EDITOR'S VIEW

내일은 달라질까?

3년 전, 벌써 제주항에 도착했어야 할 그 배는 차디찬 바다에 300명이 넘는 생명을 움켜쥔 채 가라앉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제대로 밝혀진 것 없이 3년을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며 바다에 누워있던 그 배가 그렇게 간단히 올라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배가 다시 바다 위로 올라왔을 때, 최고 권력자가 파면되고,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의 수사를 받았던 시각과 겹쳤다. 계획에 의한 인양이었어도 정말 ‘공교롭다’라는 표현 외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다.
신문 1면을 세로로 꽉 채울 만큼 그 배는 결코 작은 배가 아니었다. 그만큼 왜 그 배가 바닥에 몸을 뉘여야만 했는지 알아야할 진실도 배의 크기 만큼이었다. 배가 바닥에 누워있던 시간 동안 자유롭게 호흡을 하며 살았던 이들은 여러 추측을 던졌다. 말 그대로 ‘던졌다.’ 여러 합리적인 의심을 바탕으로 한다지만 정답은 없었다. 누군가는 그랬다. 잊자고. 누군가는 그랬다. 가슴에 묻자고. 이런 말잔치의 저의는 진실의 은폐와 그에 따른 정치적 유불리를 감안한 것임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처럼 3년이라는 시간동안 우리는 우리의 바닥을, 참사를 대하는 민낯을 볼 수 있었다. 어떤 위로도, 그리고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야만의 시간을 보냈다.
2017년 4월은 정말이지 고통의 시간이었다. 앞으로도 매년 4월은 그럴 것이다.
달라질 내일을 기대하기 어려운 시절이다.

황석권 anarchy9@gmail.com

위 ㅅㅂㅅ뉴스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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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리 〈일기(一期)생멸(生滅)〉 흙, 물, 백묘국, 채취된 식물, 사운드 가변설치 2017

자가 점검

김주리 〈일기(一期)생멸(生滅)〉 흙, 물, 백묘국, 채취된 식물, 사운드 가변설치 2017
말 없는 것들의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 생각의 시작은 최근에 읽은 《식물은 알고 있다》(다른 2013)란 책에서 비롯되었다. 저자 대니얼 샤모비츠는 “식물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주변 조건들에 반응해 성장을 조절할 수 있도록 복잡한 감각과 조절 체계를 발달시켰다… 유전적 수준에서 보면 식물들은 많은 동물들보다 더 복잡한 존재”라고 말하며 시각, 청각, 촉각 그리고 인간의 자기 수용감각과 기억 등의 감각체계가 식물에게도 존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저자의 말이 설득력을 주는 이유는 과학적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본인의 주장을 입증해가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갈수록 무심코 지나친 길가의 나무와 베란다 화분이 낯설다. 언제나 시선의 주체는 나뿐이라고 생각한 대상에게, 시선의 대상이 된 듯한 느낌. 묘한 기분이 든다. ‘안다는 것’이란 과연 무엇일까. 정보를 수집하고 조정하는 중앙신경계, 뇌가 없는 식물이 과연 안다는 걸 행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규정해온 안다는 것의 정의가 맞는가. 정정이 필요한건 아닌가.
이번 4월호에서 기자가 담당한 서울대미술관 기획전 〈예술만큼 추한〉 역시 이 같은 맥락에 닿아 있다. ‘추’에 얽힌 모든 개념과 인식 등을 선회해서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되게 한다. 이는 개개인에게도 적용된다. 이따금씩 우린 자신의 좌표가 어디쯤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의심과 재고의 작업, 이른바 ‘자가 점검’이 필요하다.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건 점검의 ‘시기’이다. 적절한 타이밍에 점검이 이루어져야 늦지 않게 좌표 수정을 할 수 있다.

p.s_4월호부터 새로운 모니터 요원이 함께 한다. 어느덧 8기란다. 다양한 연령대와 다방면의 미술인으로 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앞으로 1년간 냉철한 견해와 지적, 충고 부탁드린다.

곽세원 ggwaaak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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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밥 먹여 주나

오랜만에 〈강성원의 인문학 미술관〉 연재가 실렸다. 작년 9월 이후 6개월 만이다. 내가 원고를 맡았다. 어렵다. 글의 내용을 소개하는 리드를 쓰기 위해 세 번 읽었다. 그래도 어렵다. 미학 전공인 나도 읽기 쉽지 않은데 미술이 생소한 독자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예술(이론, 작품, 역사 등)은 어렵다. 정확히 말하면 예술의 복합적인 성격을 한 번에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예술(작품, 활동, 감상 등)은 이해하는 일과 별개로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 달 특집의 짧은 기사도 하나 맡았다. 서울예술치유허브와 마음약방 리포트다. 이 두 곳은 공부하고 이해하기 보다는 내가 체험하고 느끼는 곳이다. 예술을 이해하거나 느끼는 것 어느 하나가 먼저 일어나느냐의 순서는 중요하지 않다. 다양한 분야의 헤아리기도 어려운 예술작품 수만큼 예술을 향유하는 방식도 제 나름이다.
예술에 관한 오해 중 하나는 감상자가 수동적 위치에 있다는 생각이다. 예술은 창작은 물론 향유에 있어서도 자기로부터 기인한 생각과 경험을 바탕에 둔 활동이다. 내가 품어왔던 생각과 감정이 글, 그림,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지각적으로 구현되었을 때, 또는 그 이상의 것을 보거나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했을 때. 이렇듯 작품에 공감하는 순간으로서 예술 감상은 자신이 느낄 수 있고 이해 가능한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며 전적으로 나에게 달린 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술은 자신을 주체적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된다. 예술을 통한 자기반성은 예술이 사회적 산물임을 방증하는 지점이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타인을 통해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긍정한다. 타인이 나의 존재를 긍정하는 순간은 곧 나의 생각과 감정에 공감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예술을 통한 치유도 이렇게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예술활동을 통해 나를 반성하고 그로부터 타인의 감정과 생각에 공감하는 일. 예술이 밥을 먹여주지는 않는다. 다만 숟가락을 들게 할 수는 있다. 밥을 맛있게 먹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할 수 있다.

박유리 contactyul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