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미술관 <거짓말>

빛의 속도로 달리는 ‘이야기꾼’과 ‘가상 인물’

신화나 이야기의 근본 요소는 허구다. 인류 역사에서 거짓말이 없던 때는 없다. 다만, 동시대 거짓의 양상은 조금 다르다. 기술이 발달해 허구와 허구 아님이 긴밀하게 붙어있고, 진실이라고 시치미 떼는 거짓 정보가 이중-삼중 허상으로 우리의 판단을 흩트리는 중이다. 과연, ‘이야기꾼’과 ‘가상 아이디’ 중 이 시대의 진정한 ‘사기꾼’이 될 인물은 누구일까?  

 전시 전경, 서울대학교 미술관

<거짓말> 전시 전경, 서울대학교 미술관

서울대학교미술관은 5월 28일까지 <거짓말> 전을 펼친다. 정보가 넘치며 주장이 강해진 요즘 사회에서 진실이 무엇일지 ‘허구’를 표현 전략으로 사용한 작품을 통해 되돌아본다. 전시는 결코 진실을 제시하지 않는다. 전시는 ‘한 걸음 물러나 생각해볼까?’라는 질문을 유도하는 장소이며 작품은 꿈틀거리고 웅얼대는 표면 속 목소리로 방문객에게 말을 건넨다. 진실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고.

출품작 중 하나인 이병수의 <관악산 호랑이 연구소>는 관악산에 호랑이가 산다는 가정 아래 호랑이의 흔적을 추적하는 작업이다. 작품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진실인지 알 수 없다. 그 때문에 ‘사진은 어디서 구했을까? 관악산에서 호랑이를 목격한 사람은 없을까? 연구소는 언제 만든 걸까?’ 등 끊임없는 질문이 떠오른다. 포르투갈 문학의 대가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는 부정을 거의 미로처럼 복잡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선보여 세상을 놀래켰다. 그는 끊임없는 모순어법을 사용해 단어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한다. 다음은 프랑스 철학자이자 문학가인 알랭 바디우(Alain Badiou)가 페르난두 페소아의 작품세계에 관해 서술한 내용이다. “그가 취하는 ‘떠다니는 부정’은 ‘이것도 저것도 아님’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며, 그것이 전혀 다른 어떤 것, 즉 모든 예와 아니오의 대립이 놓치고 있는 것임을 제안하기 위한 것이다.(알랭 바디우, 비미학, 이학사, 2010, p79)” 알랭 바디우의 말대로 작품은 자신이 곧 진실(여기서는 옳고 그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예술 작품은 진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관점과 그것 ‘너머’를 온몸으로 암시한다. 

이병수 설치 전경

이병수 <관악산 호랑이 연구소> 설치 전경

진실을 국지적으로 ‘탐색’하는 것과 진실을 ‘보여주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눈앞에서 고양이가 사라졌다고 가정해본다. 이때, “고양이가 사라졌을까?” 라고 제시하는 것과 “고양이는 사라졌어”라고 말하는 것은 다르다. ‘의심과 질문’의 유무이며 사건에 접근하는 태도 차이다. 예술 작품은 진실을 ‘탐색해보자’고 제안한다. 동시대 가짜 정보가 마치 자신의 이야기가 ‘진실인 것처럼’ 보여주는 것과 다른 지점. ‘이야기꾼’과 ‘가상 아이디’ 는 모두 거짓이라는 날개를 달고 있다. 다만 이야기꾼은 날개를 활짝 펴 날갯짓으로 부유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허공이라는 위치를 보게 한다. 반면, 인터넷 가상 인물은 거짓 날개 없이 두 다리를 땅에 우뚝 내디딘 영웅처럼 자기주장을 외친다.

나날이 정말 많은 정보가 우리를 유혹한다. 거짓을 조작하는 기술이 발달해 판단력을 흩트린다. 이런 시대적 상황 때문에 <거짓말> 전시에 기대가 컸다. 밝히자면, 필자는 전시장에서 길을 잃었다. 예술에 대한 맹목적 믿음에 질문하는 건지 속고 속이는 거짓말을 말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발견한 게 있다. ‘거짓말’이라는 제목 덕분에 작품 앞에서 애써 속지 않으려고 기 쓰는 스스로의 모습. ‘의심’이라는 두 글자를 다시 한번 마주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동시대에 장마처럼 끊임없이 내리는 정보 속에서 우리가 우산 대신 펼쳐야 하는 두 음절은 ‘의심’이지 않을까. 비바람으로 어깻죽지가 젖어 이상한 정보가 살결에 치근댈수록, 의심과 질문이라는 우산대를 단단히 붙잡아야 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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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김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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