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Report] 같은 언어, 다른 문화, 하나의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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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베를린-쉴레에서 그로스까지 두 도시의 미술전>이 베를린(2013.10.24~1.27)과 비엔나(2.14~6.15)에서 순차적으로 열린다. 비엔나와 베를린의 예술을 통한 교류과정을 보여주는 전시로 20세기 초 근대미술을 매개로 두 도시가 주고받은 영향과 그 전개의 차이점 등을 보여준다. ‘독일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지만 문화적 차이가 확연한 두 도시의 거리와 그곳을 거니는 사람들을 만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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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벨베데레 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비엔나 베를린 두 도시 이야기전> 전시 광경 © Belvedere, Vienna.
위.비엔나 벨베데레 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비엔나 베를린 두 도시 이야기전> 전시 광경 © Belvedere, Vienna.

 

같은 언어, 다른 문화, 하나의 전시

박진아  미술사

베를리니쉐 갤러리 시립미술관과 오스트리아 국립 벨베데레 갤러리는 사상 최초로 비엔나와 베를린의 근대미술이라는 공통 주제로 협력 기획한 <비엔나 베를린-실레에서 그로스까지 두 도시의 미술전(Vienna Berlin: The Art of Two Cities. From Schiele to Grosz)>을 베를린(2013.10.24~1.27)과 비엔나(2.14~6.15)에서 차례로 개최한다. 일찍이 19세기 말엽부터 국제적 메트로폴리스이자 문화의 중심지로 떠올라 독자적인 정체성을 구축한 두 도시 사이에서 활발히 전개되던 창조적 교류관계를 새롭게 고찰해보는 전시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던 세기전환기 무렵, 비엔나와 베를린 두 메트로폴리스가 문학, 무대예술, 음악 영역에서 강도 높은 예술적 실험과 상호협력 관계를 이루었던 사실은 근대문화사 연구와 문헌을 통해서 잘 알려져있다. 미술영역에서도 이 두 도시는 긴밀한 창조적 협력관계를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는 오늘날까지 미술사학계에서 사각지대로 남은채 더 많은 연구를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다. 이 같은 사실에 착안하여 베를리니쉐 갤러리와 벨베데레 갤러리는 이번 전시 <비엔나 베를린-두 도시의 미술전>을 기획해 20세기 초엽 미술과 장식예술 영역에서 이 두 메트로폴리스가 지닌 공통점, 차이점, 창조적 교류활동과 상호영향 성과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독일어를 공유하는 독어 문화권이지만 두 나라의 국가적 정체성은 매우 다르다. 독일어만을 사용하며 단일민족 의식을 지녔던 독일과는 달리,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는 일찍이 중세부터 서로마제국과 합스부르크 왕국의 변함없는 고도(古都)였다. 중유럽권과 발칸을 포함한 동유럽권에서 온 이민자들로 수도 비엔나는 인구구성 면에서나 언어 면에서 다인종·다언어가 들끓던 다문화 멜팅포트였다. 도시 풍경도 널찍하게 뻗은 블르바드 대로와 위풍 당당하고 육중한 낭만주의풍 건축물에서부터 초현대식 신건물들이 어깨를 맞댄 채 공존하는 베를린은 그 첫인상부터 남성적이다.
반면, 바로크풍의 휘황찬란한 장식과 아르누보 곡선 장식의 건축으로 수놓아진 비엔나는 한결 여성적 인상을 준다. 두 도시 시민들의 성향도 매우 달랐다. ‘베를리너는 합리주의 지향적이고 실리주의적이며 흘러간 과거에 대한 감상주의를 질색하고 급속으로 미래를 향해 질주하려는 침착 냉정한 사람들’로 알려져 있는 반면, 비엔나인들은 아늑함을 좋아하고 사탕발림 대화와 세련된 사교생활을 중시하는 오연하고 퇴폐적인 사람들’이란 평판을 받았다.
20세기가 개막하자마자 비엔나는 베를린보다 앞서 중유럽권 예술의 허브(hub)로 급부상하며 유겐트스틸과 아르누보, 표현주의를 두루 실험하며 베를린으로 전파했다. 독일 모더니즘의 기수 헤르만 무테지우스(Hermann Muthesius)는 “1908년 ‘비엔나 공방운동(Wiener Werkstätte)’은 과거 비엔나 시각문화 정신을 이어받아 이 시대에 이룩할 수 있는 시각언어와 색채로 활력있고 우아하고 생의 환희를 환기시키되 절제있고 공격적이지 않은 그야말로 비엔나다운 양식을 이룩했다”(<Die Architektur auf den Ausstellungen in Darmstadt, München und Wien>,《   Kunst und Künstler》, 1908년 제6년 12번 호, pp.491~495)고 칭찬하면서 비엔나 공방운동을 독일 모더니즘이 본받아야 할 미적 모델이라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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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 라세르스타인 <식당에서> 1927년 © Private Collection, Photo: Studio Walter Bayer.

상반된 성향의 두 도시
하지만 베를린의 미술가들은 문화정책 기관에서 수입을 인가한 근대주의 미학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 결과 베를린 분리파는 한결 반항적이고 전투적인 성향을 띠었는데, 특히 막스 페히스타인(Max Pechstein)과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는 과거 정부주도하에 창설된 베를린 분리파에 대항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신베를린 분리파(Neue Berlin Secession)를 창설하고 독일적 근대미술운동을 표방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오이겐 슈피로(Eugen Spiro)나 막스 리버만 (Max Liebermann)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은 파리 인상주의에 기대어 초기 베를린의 미술정체성을 구축하려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친불(親佛)주의 유대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비엔나에서는 프레데릭 모튼(Frederic Morton)의 소설《  황태자의 마지막 사랑(A Nervous Splendour)》풍의 세기말적 멜랑콜리가 대기를 감싼 가운데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문학, 사상, 미술에 폭넓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ilmt), 에곤 실레(Egon Schiele),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안톤 파이스타우어(Anton Faistauer) 같은 화가들은 모두 정신분석학에서 언급하는 성적억압과 무의식의 관계를 그림으로 탐색했는데, 그래서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회화 속에는 공손을 우선하는 구시대적 예의범절과 적대적 정면충돌을 기피하는 비엔나인들의 오랜 집단적 무의식이 억압되었다가 폭발 직전의 순간에 이른 듯 팽팽한 긴장감이 담겨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8년)은 나란히 싸우다 패망한 독일과 오스트리아 두 국가에 실존적 위기였음과 동시에 두 도시를 더 가깝게 연결해준 촉매제이기도 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전달된 표현주의 회화에 담긴 인간본능과 무의식이라는 주제는 어쩐지 합리적이고 냉철한 사고방식을 지닌 베를린 화가들에게 그다지 어필하지 못했다. 그 대신 베를린 화단에서는 루드비히 마이드너(Ludwig Meidner), 콘라드 벨릭스뮐러(Konrad Felixmüller), 루돌프 벨링(Rudolf Belling) 같은 신예 베를린 표현주의 화가들을 발굴해냈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광란의 시기를 목도했던 이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움이라는 포장지로 미화하기보다는 무자비하게 전개되던 근대 도시의 변화상과 그 속을 배회하는 도회군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모더니즘 아방가르드 미술은 본질적으로 도시미술(urban art)이라 했다. 만사가 합리적 이득에 입각해 좌지우지되고, 수많은 익명의 도시인이 공생하며, 초고속 개발과 변화가 가능했던 베를린은 분명 오랜 역사와 전통의 무게를 못이겨 정체돼버려 ‘죽어가는 도시’ 비엔나보다 근대적 생리가 잘 갖춰진 도시였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다시 한 번 경제회복을 서두르던 베를린의 모습은 신즉물주의 회화 속에서 신시대 대중교통, 공장, 레스토랑과 카페, 상가와 아케이드로 북적대는 거리와 그 속을 배회하는 도시빈민과 익명의 군중이 얼버무려진 대도시 풍경화로 기록되었다. 그런가 하면 베를린의 신즉물주의 회화 속에는 당시 무대예술의 중심지로서 베를린인들이 자각했던 문화적 우월감이 드러나 있다. 화가들은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던 큐비즘의 조형언어를 즐겨 차용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예컨대 오토 딕스(Otto Dix). 루돌프 슐리히터(Rudolf Schlichter), 게오르크 그로스(George Grosz), 알베르트 파리스 귀터슬로(Albert Paris Gütersloh), 안톤 콜릭(Anton Kolig), 로돌프 바커(Rudolf Wacher)는 그 같은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이들의 회화에는 메트로폴리스 베를린 특유의 거침없는 대립적 성향과 전투적 성향이 엿보인다.
급속한 근대화의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는 법이던가. 전에 없이 커진 사회문제도 떠안고 있었다. 더 벌어진 빈부의 격차, 구시대와 신시대 간의 갈등, 도시빈민으로 내몰린 수많은 군상과 그들의 고통을 더 첨예하게 경험한 베를린의 화가들은 날 세운 사회비평적 관찰 결과를 사실주의 그림으로 기록했다. 베를린의 도시 변화상을 날카로운 눈으로 포착했던 크리스티안 샤트(Christian Schad)는 실은 오스트리아의 사회비평적 화가 헤르베르트 뵈클(Herbert Boeckl)로부터 크게 영향 받았다.
전통의 고도시 비엔나의 미술계는 근대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타고난 성향과 재능에도 불구하고 비엔나는 이제 미에 대한 감각을 상실했다. 미의 역영에서 베를린이 비엔나를 제치는 날이 오리라 누가 상상이나 했단 말인가! 미적 본능이란 손톱만큼도 없이 오직 분석적이고 실리적이어서 한 톨의 상상력도 없는 베를린 사람들. 그러나 그들은 노력 끝에 비엔나를 제쳤다. 정신적 노력이 천부적 재능을 능가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비엔나의 여류 미술평론가 베르타 추커칸들(Berta Zuckerkandl)은 1889년 빈분리파(Wiener Secession) 출간 예술평론지《   베르사크룸(Ver Sacrum)》에서 이렇게 한탄하는 글을 썼다. 100년 전과 현재, 영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한 쌍의 오드커플처럼 매우 다른 기질과 세계관을 지닌 두 도시 비엔나와 베를린은 미술의 생산지이자 창조적 중심지로서 어떻게 달라졌을까?
125년 전, 저물어가던 비엔나의 예술적 우세를 탄식했던 추커칸들이 우려했듯, 또 “오스트리아의 미래는 과거에 있다”고 비엔나 출신의 카바레 휴머리스트 헬무트 콸팅거가 풍자했듯이 비엔나인들의 집단적 무의식은 흘러간 과거의 영광과 황홀이란 향수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조나 레러(Jonah Lehrer)는 창조성의 비결을 논한 책《  이매진(Imagine)》에서 문화와 출신 배경이 각기 다른 사람들이 충돌하고 갈등하는 ‘도시 속 마찰’이 벌어지는 환경 안에서 창조적 생산력이 늘어난다고 했다.
일찍이 20세기 초 비엔나와 베를린에서 ‘문화계에서 성공하려면 메트로폴리스로 나가라’고 했다. 대도시와 창조적 생산력 사이의 연관관계를 암묵적으로 시사한 것이었다. 그래선지 오늘날 수많은 야심찬 젊은 미술인은 베를린에 거점을 두고 작업하고 있으며, 인터넷 스타트업을 꿈꾸는 인터넷 전문가들 역시 속속 베를린으로 가 창업한다.
현재 유럽연합 내 실질적 정치주도국이자 경제최강국이 된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예술과 정보통신기술을 정책적으로 장려하는 소프트파워 1번지로 재부상했다. 20세기 미완의 과제를 풀면서 ‘영원히 건설 중인 도시’임을 베를린은 재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

오토 루돌프 샤츠  1929년 Belvedere, Wien, © Michael Jursa.

오토 루돌프 샤츠 <풍선 장수> 1929년 Belvedere, Wien,© Michael Jur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