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김두진

김두진 인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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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노암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 전시광경 〈비너스의 탄생〉(맨왼쪽) 3D 디지털프린트 203×140cm 2011

자아를 형성하는 다양한 정체성 중 작가 김두진에게 성(性)정체성은 가장 큰 화두이자 그의 전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초창기 회화작업부터 3D 디지털기법을 활용한 해골 이미지 작업, 그리고 추후 선보일 예정인 집착 시리즈까지 김두진은 인간을 규정하는 사회·역사적 기표에 끊임없이 저항하며 그것들을 해체해왔다. 개별적 주체로서의 인간과 정신성에 집중하는 작가의 작업세계를 조명한다.

게이인가 퀴어인가?

김원방 | 홍익대 미술대학원 교수

1980년대 이후 현대미술과 문화 이론에서 성(性)정치학과 몸정치학의 문제는 전통 미학에 대한 전복, 제도 비평, 급진적인 정치사회적 의제들이 맹렬히 교차하고 충돌하는 장소였다. 그리고 페미니즘은 바로 그러한 격변의 전장에서 최전선에 선 담론이었음은 이미 공인된 사실이다. 페미니즘은 자본주의의 이성애중심주의나 가족중심주의, 상품문화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주된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자연스럽게 게이레즈비언주의, 퀴어이론(Queer Theory)과 제휴하게 됐고 상당 부분 공통된 토대 위에서 진화해 나갔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아무리 발전해도 여전히 ‘본질주의와 분리주의의 습성’, ‘女神페미니즘(Goddess Feminism)’과 같은 환상적 페미니즘의 잔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비판이 일어 왔고, 나아가 페미니즘은 그것이 비판하고자 했던 ‘자본주의의 이성애-가족중심주의 사회체제로의 재흡수’ 에 불과하다는 혐의를 벗지 못하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바로 그러한 페미니즘사상 자체의 모호성, 혼란, 자기모순, 잡다성이 오히려 여성예술가, 철학자, 급진적 문화행동주의자들로 하여금 상상력과 에너지를 무궁무진 발휘하게 하는 조건이 되었고, 이것에 힘입어 페미니즘사상과 페미니즘미술은 중요한 추세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언뜻 페미니즘과는 다른 듯하면서도 개념적 토대를 상당 부분 공유하는 퀴어이론은 그와 동등한 자리를 갖지 못한다. 전통적인 남성중심 사회에서 ‘대드는 여성’이나 ‘깨무는 질(膣)(Vagina Dentata)’ 같은 여성적 괴물 이미지는 비교적 익숙한 공포이고 일정 부분 질서 내부로 재흡수 가능한 대상인 데 반해, 동성애를 상징적 질서 내부로 흡수시키려는 퀴어담론은 사실상 가장 이질적이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이는 달리 말해 퀴어이론이 그만큼 고도로 첨예하고 급진적인 사상의 가능성을 가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런 급진성 때문에 퀴어에 대한 담론은 페미니즘을 위한 조연 역할, 심지어 페미니즘의 한 분과 정도로 취급받기도 한다.
아서 단토(Arthur Danto) 이후 이 세계 자체가 모조리 예술이라고 강변해도 더 이상 이상하지 않고, 스위스의 한 여성예술가처럼 미술관에서 나체로 음부를 활짝 열어젖힌 채 앉아 있어도 모두 어쨌든 예술로 봐 주는 이 시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한 제도적 압력에 부딪히는 예술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퀴어예술이다. 현대미술사가들과 특히 대표적인 공공미술관과 갤러리들은 그들이 취급하는 전시에서 ‘퀴어’라고 하는 딱지를 떼어버리려고 노력했다. 대표적 사례는 미술사가 제니퍼 도일도 지적하듯이, 앤디 워홀의 ‘非게이化’이다. 현대미술의 기린아인 앤디 워홀의 작품세계를 대중 앞에서 설명할 때 그가 게이였다는 사실을 첫 번째로 강조하고, 그것을 그의 상상력의 원천으로 해석하며, 남자들끼리의 과격한 항문성교 장면을 클로즈업 한 그의 〈Sex Parts〉(1978) 같은 작품을 대중 앞에 부각하는 미술관은 찾기 힘들다. 동성애는 그저 작가 개인의 일탈이고 사생활일 뿐, 그의 예술 자체와는 무관한 것처럼 포장된다. ‘퀴어’라는 것은 여전히 반쯤 열리다 만 판도라 상자 같은 것이다.
한국의 경우 일부 커밍아웃한 대중문화 종사자, 김두진이나 오인환 같은 작가, 그리고 최근 게이축제에 관련된 논란을 통해 동성애 문제가 조금씩 개방되는 분위기이다. 심지어 그것은 일종의 ‘급진좌파적 자기도취’로 비약하기도 한다. “이제 동성애야말로 급진주의의 그다음 의제요, 인권과 해방의 새로운 시금석이다.”라는 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각의 열광 속에서 게이 예술가의 작품에는 곧 그 게이의 성애적 특성이 녹아 있으리라 섣부르게 추정하고 그렇게 대충 끼워 맞춘다. 이처럼 게이의 성적 특성이나 사회적 정체성이 곧바로 그 예술의 미학과 동일시되는 ‘인간-작품 동형론(anthopomorphism의 한 형태)’이야말로 가장 흔하게 저질러지는 오류이다. 게이와 퀴어는 다른 것이다. 다르다기보다는 다른 분과에 속하는 개념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개념은 게이가 아니라 ‘퀴어’이다. 후자는 독해의 태도, 상징질서의 해체나 전략적 재구성, 미학적 실천전략을 말한다. 작가가 게이여도 작품은 전혀 퀴어하지 않을 수 있고, 게이가 아니어도 작품이 퀴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김두진의 경우, 그는 퀴어 작가인가 아니면 그냥 게이일 뿐인가?

〈집착 자화상〉 디지털 칼라 페인팅 180×180cm 2016

〈집착 자화상〉 디지털 칼라 페인팅 180×180cm 2016

제3의 성을 향한 행보의 시작
김두진은 2000년대 초부터 디즈니 만화나 오즈의 마법사 같은 대중문화 또는 포르노 같은 하위문화의 영역에서 이미지들을 차용하고 이를 기괴한 모습으로 변형시키는 작업을 해왔다. 그 이후에는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William-Adolphe Bougereau)의 고전회화나 르네상스 명작들을 차용하고 이를 3D 컴퓨터그래픽 기법을 통해 등장인물을 해골로 대체시키는 재현비평적 작업을 하고 있다. 김두진의 작업이 퀴어한 이유는 퀴어미학의 핵심 전략 중 하나, 그러니까 ‘성차(gender)’의 이성애적 재현들을 수집, 차용하고 이것에 대한 공격을 통해 해체에 이르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그런 전략은 사실상 멀게는 마르셀 뒤샹, 클로드 카엥, 그리고 가까이는 로버트 메이플소프, 데이비드 워나로빅 같은 게이예술가들도 흔히 활용해 온 전략이다. 하지만 김두진은 단지 여장(女裝, drag)이나 性 역할 바꾸기처럼 진부할 대로 진부해진 그런 방법론이 아니라, 부패, 삭제, 해골 같은 ‘ 죽음의 기표’를 삽입하는 그만의 방법을 구사한다. 예를 들어 그는 과거의 회화작업에는 미키마우스나 미니마우스의 얼굴을 삭제하거나, 백설공주의 얼굴을 외눈박이 괴물로 변형시킨 작업이 있다.
순수하게 3D 컴퓨터그래픽 기술로만 이루어지는 명화패러디 작업에서는 해골이 죽음 또는 無의 기표로 등장한다. 이 작업에서 김두진은 패러디를 통해 원작에 내재된 ‘함축적 의미(connotation, 共示)’를 노출시키고 공격한다. 함축적 의미는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가 소위 “이미지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적 층위, 또는 신화적 층위”라고 부른 것이기도 하다. 김두진이 차용한 명작들에 내재된 이데올로기적 층위는 대략 두 가지의 상호 연관된 층위들이다. 첫 번째 층위는 ‘남성적’ 관점에서 규정되어 온 미술사, ‘아버지’와 동일한 의미로 정의되어 온 ‘대가(master)’의 개념, ‘걸작(masterpiece)’의 개념이 내포하는 상징적 위계질서 같은 것이고, 두 번째 층위는 명화 속 등장인물들이 지니는 남녀의 성적 차이에 의해 반복적으로 구현되는 ‘성 정치학 이데올로기’이다. 말하자면 서양의 명화들은 서구문화의 지배적 전제인 ‘남성/여성 간의 절대적 대립과 차이’, ‘생물학적 성차 개념’, ‘이성애주의(heterosexualism)’ 등의 이데올로기를 ‘함축적’으로 재현하면서 자연화(naturalization)해왔다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김두진이 노출시키고 공격하려는 또 하나의 ‘신화적 층위’가 된다.
마사치오의 〈낙원에서의 추방〉(1425), 귀스타브 쿠르베의 〈세계의 기원〉(1866),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켄 무디와 로버트 셔먼〉(1984) 등 서양미술사에서 잘 알려진 걸작을 차용하여 그림 속의 등장인물을 해골로 대체한 작품을 보자. 정밀하게 합성된 그 이미지는 문화적 교육수준이 높은 관객이라면 십중팔구 그것이 잘 알려진 명작을 패러디한 것임을 손쉽게 알아챌 수 있다. 이러한 ‘알아채기’란 바꿔 말해 작품들이 던져 놓은 미끼, 즉 ‘재현적 코드’ 혹은 ‘서사적 주제’라는 미끼에 관객이 스스로 걸려들었음을 의미한다. 설령 그 원작들에 대한 기억이나 교양이 전혀 없다손 치더라도, 이 해골들이 취하는 연극적인 포즈를 통해 이들이 어떤 진지하고 의미 있는 행위, 즉 이야기를 재현하고 있음(재현하는 척 하고 있음)을 알아 챌 것이다. 여기서 해골을 통한 패러디는 두 가지의 모순된 작용을 동시에 수행하는데, 첫째는 주제(앞서 말한 함축적 의미와 이데올로기)를 선명히 되살리는 것이고, 둘째로는 그 되살린 주제를 ‘삭제’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적 분열, 긍정/부정의 이중적 글쓰기, ‘함정에 빠진 텍스트’라는 특징은 패러디를 통해 실행되는 ‘해체(deconstruction)’의 본질적인 특징이고 또 그래야 한다(바로 그런 의미에서 자크 데리다의 해체 개념은 항상 퀴어한 것이었다).
살이 모두 제거된 해골에는 성차적 특징이 완전히 삭제되어 있다. 그들은 성차의 공백 위에서 남녀의 성적 역할을 흉내 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애를 비판한다’는 격한 저항의식에 추진된 나머지 그 어떤 해방의 정치적 프로파간다나 계몽적 메시지를 심어놓은 것도 아니다. 그 해골들은 단지 원작이 포함한 이데올로기적 코드체제를 교란하려는 책략일 뿐, 그 어떤 새로운 주제의식도 고취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 게이레즈비어니즘이건 페미니즘이건 간에, 그 어떤 ‘새로운 의미’, ‘새로운 재현’도 하려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해골작업에는 어떤 주제(主題)도 없다. ‘재현’하고 ‘이데올로기적 목소리’를 내려는 욕망, 작품을 ‘또 다른 의미의 기표’로 만들려는 지적인 욕망, 바로 그 ‘상징의 권력을 향한 남근적 욕망’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그 해골들의 과제인 것이다. 성차의 삭제를 재현하기, 그것을 선포하기, 부재를 시각적 형태로 표현하기, 바로 이러한 것들이 다름 아닌 ‘재현의 해체가 다시 빠지기 쉬운 재현주의적 함정’이며, 그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이미 1980년대 재현비판적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포스트페미니스트들이 몰입했던 과제였다.
앞서 말했지만, 김두진의 작업을 방법론에 대한 명확한 통찰 없이 그저 편리하게 커밍아웃, 게이, 이성애 비판 같은 수사적 표현들을 부여하려는 담론들은, 마치 그의 작업이 그런 수사적 내용들을 주제로서 ‘재현한다’는 인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이는 재현 자체에 저항함으로써 남근이성중심주의에 저항하려는 그의 작업의 지향점을 본질적으로 호도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핵심은 “성차의 해체는 재현될 수 없다”라는 점이다. ‘脫이성애적 미술’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그것이 첫 번째 특징이어야 한다.
김두진의 해골들, 그들은 성차로서의 생물학적 징표가 삭제된 존재들이다. 해골에는 성기나, 젖가슴, 털이 없다. 그렇다면 ‘죽음 자체의 성’은 무엇일까? 그냥 모호하게 중성이라 말해야 하는가? 상징계 질서, 아버지(父權)에의 도전, 부친 살해(patricide) 등이 문화적으로 결정된 ‘이 性(this sex)’에 도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필연적으로 그러한 아버지의 법에 도전하는 타자의 성은 ‘여성’일 수밖에 없다. 즉 ‘김두진 = 타자 = 죽음’이라는 등치의 축이 가능해지면서 그들의 성은 모두 여성이 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여성’은 이성애적으로 결정된 의미의 여성이 아님은 당연하다. 바로 라캉이 말했듯이 여자에게조차 여성은 자신의 성이 아닌 타자의 성이다. 우리는 ‘나’가 아닌 ‘타자’인 한에서만, ‘아직 여성으로 결정되지 않은 여성’인 한에서만 진정한 성을 말할 수 있고, 그 진정한 성이란 바로 여성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퀴어가 ‘새로운 의미에서의 여성’과 연관되는 이유이다. ●

김 두 진 Kim Doojin
1973년 출생했다.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1999년 아트팩토리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총 5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2010년 〈제3회 홍대앞문화예술상〉 ‘국제뉴미디어 페스티벌상’을 수상했으며, 2011년 SeMA신진작가 전시지원프로그램, 고양창작스튜디오,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6기 입주작가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