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정정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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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삶을 주제로 일관된 작업을 선보인 작가 정정엽은 1980년대 <두렁> 멤버로 민중의 삶을 성찰했으며 이후 여성주의 미술 운동을 이끌면서 여성의 노동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자기 갱신을 거듭해왔다. 갤러리 스케이프에서 열린 <벌레전>(1.21~2.27)에서는 싹, 나물, 벌레 등 미약하고 징그럽게 보이는 사물에 내재된 특유의 생명력을 포착해 이를 시각화한 신작을 선보였다.

경험하는 그림의 정치

김강 미술가, 미학 연구자

현대미술에서 작품 생산자나 감상자 모두에게 ‘보는 것’ 즉, ‘시각적 경험’은 중요한 문제이다. 전시장은 ‘전시’가 제공하는 시각적 경험의 각축장이다. 전시장은 ‘보이는 것’에 대한 감각의 분배가 일차적으로 예술가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증거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어떤 것은 가시성의 영역에 남아 우리에게 시각적 경험을 주고, 어떤 것은 보이지 않기에 경험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존재하고 있으나 보이지 않는 존재. 시각적 경험의 층위에서 감각되지 못하는 존재. 망각되거나 삭제되는 존재. 존재들의 분할과 배치 혹은 식별은, 전시라는 시각적 경험의 장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이러한 사태를 전시라는 작은 메커니즘이 아니라 ‘사회’로 확장해보면 어떨까?
현대사회에서 존재하는 것들에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 질서는 과연 타당한가. 정정엽은 2016년의 개인전 <벌레>를 통해 이런 질문을 던진다. 2016년 1월 21일부터 2월 27일까지 삼청동의 스케이프갤러리 전관에는 나방, 싹이 난 쭈글쭈글한 감자, 썩은 과일 등이 28점의 캔버스에 그려져 전시되었다. 정정엽이 2011년 안성의 시골로 작업실 겸 살림집을 옮긴 이래 마주친 것들이다. 사소하고, 쓸모없는 것들. 도대체 이것들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나방은 나비와 달리 환영받지 못하는 벌레일 뿐이고, 싹이 난 감자는 단 한 끼 식사에도 도움이 안 되기에 버려지며, 생채기가 난 과일은 상품으로 팔 수 없다.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지 못해 현대자본주의에서 기어이 폐기되는 존재들. 정정엽은 이 폐기되는 존재들, 즉 우리의 시각성의 영역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다시 ‘시각의 영역’으로 불러들였다. 줄리앙 크리스테바는 자신의 저서 《공포의 권력(부제:아브젝시옹(abjection)에 관한 에세이)》(1980)에서 더럽다고 여겨지는 것들, 늘 배제되고 추방되는 존재들, 체제 또는 관념이 밖으로 밀어내려는 존재들을 ‘아브젝트(abject)’로 명명한 바 있다. 정정엽에 의해 포착된 아브젝트들은 대형 화면 위에 여왕과도 같은 자태로 징그러운 속살을 드러낸 나방으로, 세련된 도시의 건축물 실내외를 부유하는 싹 난 감자들로, 혹은 다 썩어빠진 과일로 우리의 시각을 붙잡는다. 자본주의적 식별의 질서에서 추방되었기에 보이지 않던 존재들이 ‘보이는 존재’로 돌아왔다.
그러나, 정정엽의 아브젝트가 단순히 현 질서의 대립물로 설정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브젝트를 실재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가시성의 영역으로 등장시키는 정치를 펼치고 있다. 정정엽에 의해 선택된 아브젝트들이 그림을 통해 시각화되면서, 기존의 질서가 중단되고, 랑시에르가 언급한 ‘정치’가 발생한다.
1980년대 두렁과 함께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로 정정엽은 ‘노동’, ‘여성’, ‘살림’, ‘일상’ 등을 우리의 시각 안으로 불러 모았다. 1980년대 ‘두렁’ 활동을 하면서 ‘노동’을 화두로 삼아 그림을 그린 것은 ‘노동’이 그 시대의 ‘아브젝트’였기 때문이지 않을까. 시대의 아브젝트였던 노동자들은 베르그송이 《창조적 진화》(1907)에서 언급한 생명의 도약을 이루는 근원적인 힘인 ‘엘랑 비탈(elan vital)’로 사회 전체를 뒤흔들었다. 억압받던 존재들이 스스로 자신의 근원적인 힘을 분출시키며 사회혁명을 도모하던 시절, 정정엽은 스스로 노동자가 되어, 그 한가운데서 생명감의 봉기를 그림으로 보여주었다. 캔버스에 그려지던 그림들은 노동 현장에서 대형 걸개그림으로 변환되고, 개인 이름은 ‘두렁’이라는 집단의 이름 속에 익명이 되었다. 아카데믹한 그림은 만화로, 판화로, 포스터로 변주되고 노동자 교육의 교재가 되기도 하였다. 기존에 예술이라고 믿었던 것의 기준들은 의심되고, 예술일 수 없는 것들이 예술의 무대로, 가시성의 영역으로 등장했다. 사회가 들끓기 시작했고, 예술도 들끓기 시작했다. 그 들끓음의 한가운데서 정정엽은 ‘두렁’과 함께 그것을 주도했다. 당시의 들끓음이야말로 시대의 아브젝트들이 제 몸으로 존재를 증명하는 순간, 비등점을 넘어섰다.
1980년대의 아브젝트는 현재에도 여전히 아브젝트로 존재한다. 노동자는 더욱 미시적으로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시대의 아브젝트가 시각의 층위로 올라서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때 이미 세계는 그전과는 다른 감각을 분배한다. 정치의 장으로 재구성된다. 1987년 두렁이 산개(散開)하고 시대의 비등점은 허울 좋은 ‘민주화’에 의해 가라앉았지만, 정정엽은 또 다른 시대의 현장을 정치의 장으로 맞이한다.
1995년 이십일세기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 <생명을 아우르는 살림>에서 정정엽은 여성의 ‘노동’에 주목한다. 평온한 일상 속에서 애써 외면하고 싶은 아브젝트가 여성이자 여성의 노동이었기 때문일까. 일상에서 ‘여성의 노동’은 언제나 비가시적이다. 감추어진 노동, 배제된 노동, 안 보이는 노동, 무시하고픈 노동, 그 모든 노동이라는 단어를 수식하는 부정적 언어를 정정엽은 ‘살림의 노동’으로 다시 호출한다. <식사준비>와 <밥상>은 가족의 생명을 살리고 <어머니의 봄>은 콩, 팥, 나물 등 무수한 생명을 아우른다. ‘두렁’과 더불어 1990년대 초부터 여성미술연원회의 활동을 시작하면서, 정정엽은 여성인 자기 자신의 삶의 현장을 바로 자신의 작품과 정치의 현장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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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1>(오른쪽)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162×130cm 2016

식사준비l, 1995, oil on canvas, 162 x 372 cm

< 식사준비l > 캔버스에 유채 162×372cm 1995

변방과 중심 사이에서 춤추는 예술가
1998년부터는 ‘팥’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팥이 우리가 보는 그 모양을 갖추는 데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무수한 노동이 작용했다. 정정엽은 그 노동을 캔버스 위에 팥알 하나하나를 그려가는 자신의 노동으로 가시화했다. 2000년 그것들은 인사미술공간에서 열린 <봇물전>이 되었다. 2006년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지워지다전>에서는 이 사회가 지우고 있는 ‘존재’들을 본격적으로 다룬다. 오히려 멸종되는 존재. 노동, 여성에서 좀 더 시야를 넓혀 생명을 가진 존재 전반을 검토하면서 이 시대의 아브젝트를 발견한다. 정정엽은 ‘지구의 촉감’을 느끼며 ‘멸종’되어가는 무수한 생명체에 주목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많은 것을 생산하는 것 같지만, 많은 존재를 삭제해 나간다. 자본주의의 속도를 따라가지도 못하고, 제 쓸모도 증명하지 못하는 존재들. 전시장 벽면 전체를 가득 채운 다수의 드로잉에는 북극곰도, 도롱뇽도, 히잡을 쓴 여인도, 작가 자신도 얼굴이 지워진 채 등장한다.
2000년 종로점거 ‘아방궁(아름답고 방자한 자궁들)’ 프로젝트는 여성주의예술그룹 ‘입김’이 주최한 축제였다. 정정엽과 ‘입김’의 예술가들이 보여주려 한 것은 ‘여성’이라는 존재 그 자체이다. 한국적 가부장의 질서에서 배치되고, 분할되고, 이미지화된 여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존재 그 자체. 한국적 가부장제의 상징적 장소인 ‘종묘’에서 진행된 이 축제는 이씨 종친회 및 유림과 정면충돌했다. 존재 그 자체로서의 여성을 가시성의 영역으로 옮겨오자 한국사회의 가부장적 문화들은 폭력으로 대응했다. 이것은 분배의 권한을 행사하던 가부장 질서가 감추고 있던 것들이 사실은 여성이 아니라 자신들의 폭력이었음을 그 스스로 드러나게 한 사건이었다. 폭력적 대응은 재판으로 이어져 종국엔 ‘입김’의 승리로 끝이 났지만 보여서는 안되는 것들이 보이자마자 ‘보여줌’의 경계선을 결정했던 것들은 일제히 흔들렸다. 그 흔들림의 사건은 시각적 경험을 넘어서 우리의 감각 전체를 건드리며 정치의 경험을 가능케 했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정정엽은 1980년대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로, 줄곧 느끼고 성찰한 시대의 아브젝트들을 시각화해왔다. 20대의 정정엽은 대변자이기보다는 노동자이기를 원했다. 공장에서 전자기기 부품을 조립하며 사회 변혁과 예술의 관계를 고민하는 노동자-예술가로 살았다. 또한 여성미술위원회, 입김 등 여성주의적가들과의 소그룹 활동에서는 여성이자 예술가인 자신의 문제들을 시각화했다. 한국적 가부장질서와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어떤 존재인가. ‘모성’이라는 신화 속에서 ‘거룩하게’만 존재하는 모순적 타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존재 그 자체’를 가려버리는 이미지에 갇힌 여성을 현실 그대로, 존재 그대로 이 사회에 드러내길 바랐다.
타자를 대변하거나 재현하기보다는, 스스로 직접 경험한 현실과 자신의 삶의 현장을 시각화하는 정정엽은 매 시기 시대의 주류적 질서와 부딪히며 긴장을 발생시켰다. 노동현장 예술가, 페미니스트 예술가의 대표 작가로 지칭되던 정정엽은 2006년 아르코미술관에서의 초대전 <지워지다>를 시작으로 한국 제도 미술권의 영역으로 스며들었다. 갤러리에서도 초대전을 활발히 개최한다. 변방에서 중심으로 진출한 입지전적인 예술가인가. 이런 의문은 오히려 정정엽이 의도한 질문일 것이다. 정정엽에게 변방과 중심 사이에는 어떤 슬러시도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를 가르는 슬러시가 어떤 질서를 의미하는지 알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그것을 횡단, 교란하는 방법론을 선택한다. 정정엽은 그 슬러시 위에서 춤을 춘다.
정정엽은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보여줌으로써 전시장을 새로운 정치의 무대로 만들었다. 2016년 ‘전시장’에서 ‘벌레’와 춤을 추는 정정엽을 보았다. 그리고 우리도 조금은 들썩거렸다. 우리는 정정엽을 통해 갤러리라는 시각의 장에서 정치를 경험한다. 정정엽의 작업이 ‘경험하는 그림’인 이유이다. ●

정 정 엽 Jung Jungyeob
1962년 태어났다.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1995년 이십일세기화랑에서 열린 <생명을 아우르는 살림전>을 시작으로 12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서울, 제주, 후쿠오카, 시카고 등에서 열린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1980년대 ‘두렁’, ‘갯꽃’, ‘여성미술연구회’의 회원으로 현장미술 운동과 여성주의 미술 운동을 이끌었으며, 2000년에는 여성주의 그룹 ‘입김’의 멤버로 <아방궁 종묘점거 프로젝트>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