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나 점 수

조각가 나점수의 작품은 언뜻 보면 추상회화 같다. 구체적 형상이나 색채가 눈에 띄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조각엔 수많은 이야기와 섬세한 감성이 깃들어 녹아있다. 절제되고 세련된 형태와 촉각을 자극하는 표면의 질감에서 작가의 체온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작품 이면엔 실크로드와 아프리카 대륙 횡단이라는 고된 순례의 체험에서 발현된 철학적 사유가 담겨있다. ‘김종영미술관 오늘의 작가’에 선정되어 6월 17일부터 김종영미술관에서 <표면의 깊이>라는 타이틀로 개인전이 열린다.

세상과 더 잘 만나기 위해 詩가 되는 공간

김은영 블루메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세상을 만나는 법이 달라지고 있다. VR(가상현실) 체험 기기가 세간의 관심 속에 있는 것은 그것이 PC와 스마트폰처럼 큰 변화를 이끌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물리적 이동 없이 특정 공간에 가 있는 것 같은 가상 경험의 핵심은 프레임 없이 세상을 본다는 것에 있다. 주변의 모든 환경이 캡처된다. 머리를 돌리면 더 많은 것이 보이고 설명되는 방식이다. 이로써 실재 세상을 실재같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조각가 나점수의 작업은 압축적이다. 설명적이기보다 시적이다. 단어 하나로 정신과 몸과 마음을 갑자기 다른 곳으로 옮겨놓는 시처럼 그의 작품은 실재하는 세상을 내 눈앞에 하나하나 가져다 놓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정서를, 의식을 움직여 어디론가 데려간다. 채워 보여주기보다 비워내어 맞닥뜨리게 하는 식이다.
나를 중심으로 둘러쳐진 세상을 나열하듯 보여주기보다 더는 시각으로 분석될 수 없는, 인식 밖으로 확장되어 나가는 크기의, 밀도의 세상이 실제이고, 그 실제를 만나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거리를 극복하려는 노력보다는 고정된 의식이 목적성 없이 무너지는 ‘경이’와 같은 순간이 필요하다고 작가는 말한다. 의식이 설명적인, 분석적인 행로를 따라가는 것을 지연시키기 위해 그는 다음과 같은 장치들을 사용한다.
나점수는 공간을 되도록 비우고 수직적인 또는 수평적인 선으로 남는 형태의 조각들을 만들어왔다. 이를 위해 그는 주로 나무를 사용해왔는데 이는 그 원래 모습이 위로 성장해가는 수직성을 지니고 있거니와 서있거나 누워있는 모습에서 곧 생(生)과 사(死)라는 이성의 범주 밖을 향해 가는 생각들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가 사람의 형상을 사용할 때도 마찬가지다. 손과 발의 행위가 없는 나무 기둥의 침묵과도 같은 포즈로 서있는 인간 형상은 시시각각의 현재보다 더 크고 넓은 시공간을 품어내는 듯 보인다. 그가 만들어낸 수직의 인간형상이 그 자체로서 기념비적인 형태 자체에 주목하게 하기보다 지지대나 통로의 역할로써 그것이 서있는 물리적 공간을 다른 차원의 시공간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그에게 조각은 형태가 아닌 공간과의 관계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나점수는 사막을 찾아다닌다. 숲이 사람을 감싼다면 사막은 통째로 드러낸다. 그에게 사막은 비어있는 거대한 공간으로, 보이는 복잡한 모든 것이 비워지고 그것에 붙어있던 소리들도 비워지는 곳이다. 그리하여 모든 감각의 초점이 지평선 위에 숨쉬며 흔들리듯 서있는 자신에게 모아지는 곳이다. 광활한 수평선 그리고 그 위에 침묵하듯 서있는 생명 있는 것들이 자아내는 숭고의 감정으로 그를 끌어당기는 사막이라는 장소에서 그는 수직과 수평으로 환원되는 공간의 언어를 가져와 관객의 의식이 작동하기 전 그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에너지 장과 같은 정서적 공간을 만들어낸다.
나점수의 조각이 이성적인 설명을 이끌기보다 느낌과 정서로 먼저 관객을 끌어당기는 것은 그것이 바라보는 거리를 전제하기보다 거칠거나 단단함 같은 손끝의 감각을 당겨오기 때문이다. 시각적이기보다 촉각적인 그의 공간 안에서 재료들은 가능한 한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를 유지한다. 나무, 철, 흙, 마른 풀, 석고, 유리, FRP 같은 대체로 자연적인 재료를 사용하며 그는 작가가 재료를 손으로 제어하는 방식을 최소화한다. 깎아내기보다 거칠게 쳐내는, 빚어내기보다 한두 번 뭉쳐놓고 끝내는 방식을 통해 재료는 본래의 물질성을 잃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의 조각들은 본래 그 재료가 놓인 자리, 그것이 속해있던 장소의 공기까지 머금게 되는 것이다.
굵은 나무 기둥을 턱턱 쳐내 나무의 속살 한 켜를 그대로 세워놓은 듯한 조각, 작업실 주변 마른 풀들을 석고반죽으로 이겨 FRP로 만든 인체형상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작품에서 우리는 한겨울 숲에서 나무의 껍질을 만질 때 전달되는 온기, 풀숲을 흔드는 바람을 느낀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추상으로 또는 형상적으로 귀결되는 것과 상관없이 나점수가 만들어내는 형태의 의미는 물질적인 표면을 통해 전달된다. 그에게 표면은 표피로 맴도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출발점이 되는 끝도 없는 깊이를 지닌 것이다.

13

<식물적 사유-向> 나무 모터 철, 가변크기 2013

17 길위에서다

<~의 방향> FRP(도색) 600×120×120cm 2012

시간성 – 느린 움직임
최근 그의 작품에는 움직임을 만드는 기계장치가 추가되었다. 얇게 쳐낸 나무 기둥에 저속 모터장치를 부착해 나무 조각이 앞뒤 또는 옆으로 느리고 부드럽게 움직인다. 일정 각도 안에서 아주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모습은 동물의 민첩한, 공격적인 움직임보다 은근하고 고요한 식물의 그것과 닮아있다. 그 스스로의 움직임이라기보다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의한 흔들림 같은 느낌이다. 왜 이런 움직임일까? 그는 이것이 관객의 정서적 동의에 대한 실험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형태가 느리게, 곧 멈추려는 듯 더딘 속도로 움직이고 있을 때 그것은 그 자체의 행위로 주목되기보다 공기의 움직임으로 같은 공간 안에 서있는 관객의 마음을 흔든다는 것이다. 이는 찰나처럼 지나가는 시간을 늘여놓은 듯한 느린 움직임 앞에서 유한의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의 조건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행위로 먼저 읽히는 드로잉 기계장치도 마찬가지이다. 검은 석탄으로 흰 종이 위에 선을 긋는 기계장치에서 작가가 무게를 둔 부분은 얼마나 느리게 움직이게 할 것인지다. “선의 반복 행위는 표현을 위함이 아니라 의식의 속도를 지연시켜 현존을 깨우기 위함이다.”라는 그의 의도는 시간성을 느끼게 하는 아주 느린 움직임 앞에서 관객이 나아가고자 했던 방향을 잊고 걸음을 멈춰 지연된 또는 확장된 시간 속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완성된다.
관객으로 하여금 결국 나로 돌아오게 하는 공간. 하던 대로의 생각이 잠시 흔들리며 내가 느끼는 것, 나의 마음이 향하는 것을 더듬어보게 하는 시간의 틈을 만들어내는 것이 나점수의 작업이다. 봐야 할 것으로 가득 찬 세상을 더 많이, 더 잘 볼 수 있도록 또 무언가를 만들어 내어놓는 것이 아니라 비우고 멈추고 잠시 떠나 돌아오며 보이지 않던 실재로서의 세상과 내가 더 깊게, 더 실제같이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는 것. 그것이 그가 하고자 하는 바인 것 같다. 세상을 만나는 법이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유롭게 세상과 진정한 대화를 할 수 있느냐에 있다.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는 마음이 향해 있다면 가능하다고 말한다. ●

나 점 수 Na Jeomsoo
1969년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조소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1년 갤러리 보다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김종영미술관(2009), 갤러리현대 16번지(2010), 백순실미술관(2013), 갤러리3(2014)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현재 경기도 양주에서 작업하고 있다.

 

ARTIST REVIEW 홍 유 영

홍유영의 작품은 현실과 관계 맺고 있다. 그는 일상에서 흔히 보이는 오브제를 채집해서 새롭게 조합하고 재해석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물과 공간의 관계는 구조적인 변형을 거치고 확장된 개념으로 탈바꿈된다. 입체미술이라는 영역을 고수하는 작가의 관심은 공간의 정치학 또는 공간의 사회경제학 쪽으로 옮아가면서 심화되고 확장된다.

홍유영의 오브제 설치, 공간, 제도는 삶을 강제 한다

고충환 미술비평

홍유영은 공간에 관심이 많다. 처음에 그 관심은 생활의 편의에 따라 그때그때 만들어지고 덧붙여지고 해체되고 재구조화되는 공간의 생리며 생태학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가능태로서의 공간개념, 식물처럼 살아있는 공간개념, 이행하는 공간개념,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인 관계에 종속되지 않는, 그 자체 전체인 부분이 만들어내는 파편화된 공간개념이 그 생태학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근작에서 그 관심은 공간의 정치학이며 공간의 사회경제학 쪽으로 옮아가면서 심화되고 확장된다. 덩달아 현실적이고 서사적인 측면이 더 강조된다. 공간, 장소, 영역, 경계에 스며든 권력문제, 그리고 영토의 기획에 반하는 탈영토의 실천논리(질 들뢰즈)를 가로지르면서 넘나드는 일련의 작업들이 헤테로토피아(미셀 푸코)에 대한 또 다른 한 가능성을 예시한다.
이를테면 한 평 공간 속에 물건들이 잡다하다(한 평 공간에 대한 연구). 팬과 형광등, 컵과 생수통, 반찬용기 등 대개는 플라스틱 소재의 각종 용기들, 폐 의자와 빨래건조대, 간이 사다리와 철재 봉, 투명 플라스틱 슬레이트 등등. 언뜻 보면 잡동사니 같지만, 사실은 하나하나가 쓰임새가 있는 일상 용품들이다. 이 기물들이 한 평 공간이 좁다는 듯 빼곡한데, 특이한 것은 어떤 접착제도 사용하지 않은 채 순수한 역학만으로 균형을 잡고 있는 점이다. 그 균형은 허술한 것 같지만 빈틈이 없고 되는 대로 쌓아놓은 것 같지만 엄밀하다. 이처럼 빈틈이 없고 엄밀한 균형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그 균형이 빈틈이 없고 엄밀한 만큼 구조물 중 하나만 다르게 놓거나 심지어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다. 집이 없는 사람들이 서울에서 밀려나 수도권으로 밀려난다. 그렇게 밀려나다 어렵사리 확보한 한 평 공간마저 대개는 임시방편이기 쉽지만, 여하튼 그나마 그 속에서 자족적인 생활이 가능해야 한다. 한 치의 빈틈도 없는 공간 활용이 주는 팽팽한 긴장감은 바로 여기에 연유한다. 그 긴장감의 강도는 너무 팽팽해서 외부로부터의 최소한의 간섭에도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만다. 공간이 무너지고, 삶이 붕괴되고, 존재가 내려앉고 만다. 작가의 이 작업은 이런 임시방편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는 공간감, 긴장감, 불안감의 사회심리학적 징후 같다.
그리고 그렇게 떠밀려 다니는 사람들에게 잦은 이사는 일상이다(이사). 지금은 이삿짐을 나르는 일도 전문적인 업종이 되었고 제법 번듯한 이삿짐 전문차량도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이삿짐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1톤 트럭이다. 작가는 1톤 트럭의 공간 수치 그대로 알루미늄 프레임으로 짠 것을 무슨 액자처럼 벽에 걸고, 그 위에 이삿짐을 싸는 그물망을 드리워 놓았다. 그리고 그물망 안쪽에는 아마도 이삿짐에 해당할 벽돌꾸러미를 비닐과 고무 밴드를 이용해 꽁꽁 싸 놓았다. 작가의 이 작업은 타의에 의해 변방으로 밀려난 사람들이며 변방인의 자의식을 내재화한 사람들, 자본주의 시대의 유목민(?)에 대해서 말해준다. 인격으로부터 한갓 짐짝(자본의 페티시? 물신의 페티시?) 신세로 전락한 사람들의 존재론에 대해서 말해준다.
그리고 작가는 공간에 스며든 권력이며 공간의 정치학을 증언하기 위해 거리의 화분을 호출한다(균형 잡기 혹은 불균형한). 거리 정화를 목적으로 거리에 설치해 놓은 거대화분을 무슨 탑처럼 쌓아놓은 것인데, 기우뚱한 지표면 위에 그렇게 쌓은 두 개의 화분 탑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는 형국이 외적으로 균형을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표면 자체가 기울어져 있어서 불안한 느낌을 준다. 결국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균형은 불균형이 잠재하는 균형이며, 안정은 불안정이 내재된 안정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는 이런 거리화분이 외적으로 거리 정화를 수행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른 제도적인 장치 구실을 수행하고 있는 현실에 주목한다. 이를테면 인도와 차도를 구별하는 것과 같은. 그리고 그렇게 제도가 그어놓은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선을, 금지를, 감시를 상징하는 것과 같은. 그렇다고 정색 할 필요는 없다. 그 선은 가변적이고 더욱이 융통성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제도에만 그렇지만. 이를테면 포장마차를 철거하기 위해서라면, 그리고 노숙자를 밀어내기 위해서라면 그 선은 언제라도 인도 안쪽 깊숙이 침범할 수도 있는 일이다. 작가의 이 작업은 바로 이런 제도와 공간의 관계, 제도의 유기적인(융통성 있는?) 공간학에 대해서 말해준다.

Water Containers, 2016 (3)

< A Space Made by Thirty Water Containers > 20L통 물, 가변크기, 2016

공간, 자본은 자연을 착취한다
공간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제도가 삶의 질을 강제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자본이 자연(또 다른 공간개념인)을 착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Squeeze). 사람들은 자연을 압착하고, 짜내고, 끼워 넣고, 쑤셔 넣는다. 그리고 때로 강요하고, 갈취한다. 공기 정화를 위해서.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 장식을 위해서. 자연친화적인 삶을 증명하기 위해서. 실체를 결여한, 스펙터클한 삶을 증언하기 위해서. 그러고도 더 이상 갈취할 게 없다 싶으면, 자연은 구석에 쑤셔 넣어진다. 이를테면 쓱 봐도 불편하겠다 싶은 천장에 바싹 붙은 좁은 선반 위에. 화분보다는 차라리 팬이 있으면 적당하겠다 싶은 구석에. 이 작업은 구석, 변방, 잉여와 같은 자본주의의 타자들의 지점을 예시해준다. 자연마저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물신에 의해 변방으로 내몰린 것들이며 폐기될 것들의 운명을 예시해준다.
그리고 자본은 일종의 유사 풍경 내지 의사 자연을 그려 보이기도 한다(구축된 풍경, 입체의 경우). 이를테면 낡은 테이블 위에 소주병이며 맥주병 그리고 우유병과 기타 각종 음료수 병들이 첩첩이 쌓여있거나 배열돼 있다. 여기서 테이블은 한 평짜리 공간처럼 현대인의 자기 공간에 대한 자의식 내지 욕망을 상징하며, 낡은 테이블을 지지하고 있는 네 개의 긴 다리는 불안정한 공간인식과 현실인식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테이블 위에 쌓인 병들이 산이나 숲과 같은 유사 자연으로 제시된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대개는 녹색과 갈색 계열이 어우러진 음료수 병의 색깔이 자연의 그것을 닮아 있는 것에서 착안 했을 터이다. 그리고 음료수 병들이 인공적인 스카이라인을 그려내면서 빌딩숲을 연상시킨다. 병과 숲과 빌딩이 오버랩되는 것을 통해 자연을 흉내 내는 현실(이를테면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아파트)을 풍자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테이블은 공간이 되고 병은 숲이 된다. 아파트촌이 산이며 자연으로 둔갑한다. 자연을 흉내 내면서 억압적인 현실을 감추는 자본주의적 풍경, 물신적 풍경, 욕망 풍경이 된다.
이처럼 자본주의 물신은 자연을 상품화하고,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인공자연으로 자연을 대체한다(대체자연?). 그리고 현대인은 그렇게 대체된 자연이자 상품화된 자연을 소비한다. 이 소비재들 중에는 유원지나 휴양지와 같은 비교적 자연의 원형에 가까운 것도 있고, 내셔널지오그래픽이나 관광엽서에서 보던 것과 같은 이미지로 환원된 경우도 있다. 아마도 이런 자연 이미지야말로 가장 흔하게 소비될 것인데, 그 일면을 공사장 가림막에서 볼 수 있다. 공사장 가림막으로는 여러 이미지가 소용되지만, 그 중 전형적인 경우로 치자면 단연 자연 이미지를 꼽을 수가 있을 것이다. 단순하게 공사장 가림막은 공사 현장을 가리기 위한 것이지만, 상징적으로 자본주의 기획의 치부를 가리기 위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가리기 위해서 자연 이미지가 호출된다. 여기서 재개발 현장에 맞물린 이권의 크기가 클수록, 삶의 터전에서 내몰린 사람들의 처지가 심각할수록 자연 이미지는 더 생생해 보이고 더 그럴듯해 보여야 한다. 이미지 정치학이며 꿈의 산업이 더 잘 가동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작가의 작업(구축된 풍경, 평면의 경우)은 숲 이미지를 보여준다. 자세히 보면 숲의 부분 이미지들이 하나의 화면 속에 콜라주된 풍경이다. 좀 더 들여다 보면 그 속에 건물이 숨어 있는데, 건축 현장에 비치된 조감도 그대로 부분 이미지들을 편집하고 콜라주한 것이다. 표면적으로 숲 이미지지만, 사실은 그 속에 건물 한 채가 숨어있다. 겉으로 보기엔 자연 같지만, 잘 보면 그 이면에 숨은 자본주의의 욕망이 보인다. 마치 가림막 자체는 자연 이미지를 보여주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 자본주의의 치부를 숨겨놓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작가는 공간의 사뭇 다른 해석 내지 용법을 예시해준다. 여기에 물통들이 있다(30개의 물통이 만드는 공간). 각 20리터의 물이 담긴 하얀 플라스틱 물통 30개가 가장자리 선을 따라 삼각형의 공간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물통은 아마도 주차금지와 같은 임시방편의 목적을 위해 급조한 장애물, 일종의 생활미술이며 생활 오브제에 착안한 것일 터이다. 그 자체 자기 공간에 대한 현대인의 욕망이며 자본주의의 욕망을 상징할 것이다. 그리고 그 물통들이 그려 보이는 삼각형은 모서리 공간이며 자투리 공간을, 잉여 공간 혹은 공간의 잉여를 상징할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남는다. 왜 하필 30개의 물통인가. 30이란 숫자에 어떤 상징적 의미라도 있는가. 세월호 현장에서 30명의 아이를 구한 의인? 한 의인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순진무구한 30명의 아이?
이 작업에서 작가는 공간개념을 매개로 모서리와 자투리 그리고 잉여로 나타난 자본주의의 타자들의 지점들을 전유한다. 조르주 바타유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경제성이 없는 것들을 변방으로 내모는데, 그것들을 잉여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잉여는 자본주의의 배타적인 논리와 억압적인 욕망이 만든 외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고, 그 외상을 증언하기 위해서 호출된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30개의 하얀 물통은 끝내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의 주검을, 순진무구한 죽음을 증언하고 있었다. ●

홍 유 영 Hong Euyoung
1975년 태어났다. 이화여대 조소과와 미국 아이오와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영국 런던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미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대갤러리-윈도우갤러리, 갤러리 인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007년 뉴욕 폴록-크라즈너 재단(The Pollock-Krasner Foundation) 후원으로 뉴욕 ISCP 레지던시, 2009년 국립현대미술관 창동스튜디오, 2010년 영은미술관 7기 입주 작가로 활동했다. 서울과 런던을 오가며 작업하고 있다.

 

NEW FACE 2016 라선영

인간을 말하다

더 이상 ‘조각’이라는 장르 개념은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설치, 영상 등이 대세를 이루는 지금의 미술계에서 나무로 인체 형상을 제작하는 라선영의 작업은 조금 특별해 보인다. 그렇다고 전통적인 작업은 아니다. 어쩌면 나무로 만든 인물조각이 전통적이라는 인식은 어디까지나 편견에 불과할 것이다. 작가는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을 따라가지 않고 그냥 자신이 하고 싶은 작업을 할 뿐이다.
인간의 다양한 행태에 관심이 많은 작가는 작업 초기부터 70억 명의 인물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나무를 깎는 행위는 그녀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가장 잘 맞는 표현방식이다. 나무 특유의 따뜻함도 인물 형상과 잘 어울린다. 그녀가 만든 인물조각은 특별한 기교도 디테일도 없다. 하지만 채색 작업을 통해 형광색 조끼를 입은 경찰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여중생 등 조각 하나 하나의 개성이 뚜렷이 드러난다. 작가는 나무 특유의 물성을 압도하거나 압도당하지 않고 사람 형태라고 인식할 만큼만 깎는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모든 작품은 그녀의 평생 프로젝트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다양한 인간 군상은 그 시대의 삶의 풍경을 반영한 거대한 아카이브가 될 것이다.
<런던>, <서울, 사람> 시리즈가 주변에서 관찰한 사람들의 풍경이라면 <빔(Beam)>, <타워>, <벽(Wall)> 시리즈는 인간의 내면세계, 특히 욕망에 관한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 실제로 인물조각은 당대의 열망 또는 염원을 그대로 담아낸다. 예를 들어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석기시대 다산의 상징이었고, 거대한 동상이 다수 제작된 시대에는 이데올로기 전달이 중요한 목표였다. 30cm 남짓한 크기로 바닥에 낮게 배치된 라선영의 목조 군상은 신이 사람을 내려다보듯 관객에게 전지적 시점을 부여해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만든다. 작가에게 조각품은 그 자체로도 의미 있지만 그것들이 연출된 상황도 중요하다.
6월 카이스갤러리에서 선보이는 개인전 <반짝이는 것들>에는 새로운 형태의 작업을 선보일 예정이다. 작가는 모두가 주목받고 싶어하는 동시대 세태를 담아내기 위해 목조로 제작한 신부(新婦) 형상을 도자기로 대량 제작했다. 깨지기 쉬운 재료인 도자기는 현대인의 연약한 자아와도 맞닿아 있다. 도자기로 만든 신부 부대를 바닥에 깔고 천장에는 반짝이는 종이로 만든 낙하산 부대를 매달을 계획이다. 능력이나 자질 없는 낙하산 인사처럼 이들 형태는 반짝여서 눈에 띄지만 옆에서 보면 제대로 안보일 만큼 얄팍하다. 이처럼 동시대 삶의 모순을 담아내다 보니 라선영은 목조각이 아닌 새로운 표현방식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녀의 작업에서는 하고 싶은 말과 재료적 특성, 표현방식이 일치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슬비 기자

라선영
1987년 태어났다. 이화여대 조소과와 영국왕립예술학교 조소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대중의 새발견>(문화역서울284), <플라스틱 신화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등에 참여했다. 6월 23일부터 7월 22일까지 카이스갤러리에서 3번째 개인전 <반짝이는 것들>을 개최할 예정이다.

 나무에 채색 가변 크기 2015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전시광경

<타워> 나무에 채색 가변 크기 2015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플라스틱 신화> 전시광경

NEW FACE 2016 김하나

불안전한 시대의 온화한 풍경

고요한 풍경, 느슨한 움직임. 새하얀 빙하는 세월의 흔적을 겹겹이 담고 이동하며 일상에서 볼 수 없는 낯선 풍경을 선사한다. 작가 김하나는 일상과 동떨어진 백색의 빙하에서 자신을 발견했다. 작가는 빙하가 지닌 수만년의 시간과 하얀 빙하 벽에 흡수되고 산란되는 수많은 빛과 빙하 층의 결, 사이의 틈과 구멍에 집중했다. 그는 실견한 빙하를 캔버스에 옮기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본 빙하 이미지와 영상자료를 통해 그만의 빙하를 상상한다. 실견하지 않은 물질을 그리다 보니 표현의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 거대한 자연에 억눌리지 않고 재해석할 수 있는 해석의 자유로움을 얻는다. 이미지를 통해 자연의 모습을 접하니 거대한 자연에 압도되지 않고 미시적인 부분에서 새로운 시각적 미학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빙하의 새하얀 ‘색’은 작가가 빙하를 선택한 첫 번째 이유다. 흰색은 빛을 머금고, 내뿜으며 빛의 스펙트럼을 키우는 특징이 있다. 빙하 주변에 빨간 토양이 있으면 빙하는 붉은 빛을 띤다. 시간과 날씨에 따라 흰색은 다양한 옷을 입는다. 작가에게 빙하는 프리즘과 같다. 빙하가 빛을 흡수해 새로운 색을 뿜어내듯 작가는 순백의 캔버스를 다양한 색의 온도로 채운다. 흰색과 다른 색의 자연스러운 만남은 그의 작업을 안온한 분위기로 만드는 결정적 순간이다. 그의 작업에 차가운 빙하는 존재하지 않는다. 빙하가 바다를 부유하듯 안단테로 그어진 붓의 속도감과 봄날의 꽃망울 같은 따뜻한 색이 유독 많이 사용됐다. 차가운 빙하가 아니라 따뜻한 빙하다.
빙하가 지닌 시간성은 작가의 불안감을 표현하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 그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담는 ‘도구’로 빙하를 선택한 데에는 그것이 지닌 불안한 운동성과 시간성도 한몫 한 듯하다. 빙하풍경은 천편일률적이지 않다. 물 위에서 천천히 흐르고 서서히 변화한다. 그러나 빙하가 녹아내릴때는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파괴력으로 소멸한다.
작가가 가진 불안감과 빙하의 관계를 살피다 보면 “왜 빙하일까?”라는 원초적인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 질문은 작가 스스로도 자주 던지는 물음이다. 처음 시작은 개인의 불안감에서 비롯됐다. 작가는 “졸업 후 작가로의 전환 과정에서 ‘나’를 찾고 안정이 되면, 그때 작업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작업 속에서 안정을 찾는 자신을 발견했다”며 “나를 받아들이는 시간 자체가 그림을 그리는 출발점이었다”고 말했다. 빙하는 곧 시간의 유한함을 나타낸다. 젊은 작가에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작업과 동행하는 숙명과 같다. 어쩌면 작가는 빙하의 가변성에서 그가 느끼는 불안함을 찾은 것은 아닐까?
이번 전시에는 2년 반 정도 준비한 작업이 출품됐다. 젊은 작가의 개인전 준비기간으로 꽤 긴 시간이다. 작가는 빠르게 변화하는 시간에 불안감은 느끼지만 조급함이 없어 보인다. 느리게 흐르면서 다양한 색을 머금고 풀어내는 빙하는 작가의 모습과 닮아있다. 물론 앞으로의 작업에서 다른 풍경이 펼쳐질 수도, 작업을 해나가는 속도에서 변화가 있을 수도 있다. 인터뷰 내내 작업을 시작하는 작가로서 작업의 변화 가능성을 열어두는 그에게서 그림에 녹아있는 찬찬한 부드러움과 침착함이 느껴졌다. 작업의 소재나 주제가 바뀌더라도 작품을 닮은 그의 모습이 작업에서 온전히 드러날 것이다.
임승현 기자

김하나
1986년 태어났다. 첼시 런던예술대학교 순수미술과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에서 활동 중이다. 2015년 커먼센터 그룹전 〈오늘의 살롱 2015〉에 참여했고, ‘2016년 Shinhan Young Artist Festa’에 선정되어 5월 2일부터 6월 8일까지 신한갤러리 광화문에서 개인전이 열린다.

〈 Untitled 〉 캔버스에 유채 130.3×162.2cm 2016

〈 Untitled 〉 캔버스에 유채 130.3×162.2cm 2016

SPECIAL ARTIST 이왈종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교수직을 버리고 아무 연고도 없는 제주도로 홀연히 내려간 지 어언 27년. 특히 서귀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의미를 지닌 곳이 되었다.
<제주생활의 중도(中道)와 연기(緣起)>라는 일관 된 제목의 이왈종 작품은 ‘도대체 인간의 행복과 불행한 삶은 어디서 오는가?’라는 화두에서 출발됐다. 5월 17일부터 6월 12일까지 현대화랑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계기로 작가 이왈종의 예술세계를 되돌아본다.

세속에서 찾는 중도(中道), 평형(平衡)의 기운

전은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일상’이란 평범한 사람들이 그리 특별하지 않게 사는 ‘곳곳의 생활, 생활의 곳곳’을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에겐 일상을 살아가는 것 이상 중요한 것이 없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살아가는 법을 가장 잘 터득한 종(種)이었고, 그들의 삶의 모습이 오늘날 일상이라고 하는 우리의 생활상인 것이다. 그렇지만 흔히 일상은 인간이면 누구나 다 누리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상을 그리 신통하다고도, 그리 범상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웃의 삶에 대해 별다른 관심도 갖지 않는다. 일상은 모든 삶의 근원이고 결과이며, 도덕의 기원이 된다. 삶이 시작되고 마감되는 시공(時空)이고, 온갖 내러티브가 등장하는 문화 생산 장소인데도 말이다.
이 일상의 소중함을 알리기 위해 일생을 바쳐온 화가가 있다. 일상을 흔하디흔한 무관심 영역에서 한 차원 높여 일상을 주목하게 만든 그가 바로 ‘서귀포 왈종’이다. 그는 이런 자호(自號)로 제주의 일상에 향기를 더했다. 2016년은 이왈종이 서귀포에 정착한 지 27년이 되는 해이다. 27년간 그의 그림에는 ‘서귀포 왈종’이란 서명이 일관되게 들어갔다. 일상을 생활의 중도로 풀어서 어느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예술의 주제로 택했던 사람, 일상을 마치 보물처럼 여기는 이왈종은 서귀포의 휘파람새가 되어 제주 전역을 자신의 정원인 양 훨훨 날아다닌다. 그는 제주 자연의 요소요소를 끄집어내어 생활에 접목하여 실재(實在)보다 더욱 풍요로운 제주를 재구성한다. 그의 그림 안에서 제주는 실제(實際)보다 더 아름답게 완성된다. 그가 완성해낸 이 새로운 제주 안에 들어오면 사람들은 늘 행복해 한다. 인생이란 즐거운 것, 그의 그림을 대하면 사람들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한다.

서귀포와 하나가 된 삶
1990년, 이왈종은 삶과 예술 사이의 방황을 끝내고 제주에 정착한다. 몸은 제주에 내려왔지만 마음 정리라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심란한 마음 정리를 위해 붓과 종이를 없애버리고 2~3년 동안 릴리프 작업에 몰두했다. 붙이고 또 붙이는 작업은 몸을 지치게 했지만 정신적으로 큰 기쁨을 주었다. 인간은 만드는 것에서 존재를 확인하고 희열을 느낀다고 했다. 만드는 행위가 창조의 근원임에 분명했다.
작업을 끝내고 산책길에서 마주친 나무와 야생초들은 신기할 정도로 서로가 다치지 않게 질서 있게 서로의 영역을 지키며 자라고 있었다. 그는 야생초의 삶에서 상생과 질서로 이루어진 생명의 힘을 보았다. 우주의 조화는 작은 생명에도 상생과 질서의 철리(哲理)가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야생초를 통하여 비로소 생명의 습성과 자연의 이치대로 살아가는 만물의 도를 배울 수 있었다. 세상살이의 조화를 위해 서로가 공생하는 질서를 취하는 것이 중도라는 것을 생각하니 만물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중도(中道)는 평형(平衡)의 기운이었다. 어느 쪽에 치우친 차별이 아닌 부족하게 보이는 만족이었다. 이런 눈으로 만물을 보니 새나 짐승, 풀이나 꽃들도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교감의 관계였다. 예술 또한 고정된 장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황 속에서 형태와 색채의 균형과 조화를 찾는 것이라면 오히려 장르의 벽을 허물어야만 자유롭게 된다. 자유가 없는 권위는 억압적이기 때문에 자신과 예술을 융합시키지 못한다. 서귀포에서 마음의 평정을 찾은 지 10년이 됐을 때, 제주에서 시도한 릴리프 작업으로 개인전을 열어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제주에서는 회화라는 개념을 고수하지 않고 오히려 그 경계를 넘어 자유로운 형식을 취하면서 생활 속으로 한층 더 다가섰다.
이왈종이 제주에 정착한 27년의 시간을 되돌려 보면, 그는 처음으로 정착했던 남원에서 서귀포로 화실을 옮겨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화실 근처에 철공소가 들어서자 서귀포 시내의 삼일빌딩으로 화실을 옮겼다. 165~198m2 의 새로운 화실은 300호 5점을 동시에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곳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후회 없이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1997년경, 마지막으로 풍광 좋은 정방폭포 가까운 곳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몇 년이 흘렀을까 그동안 살던 집을 헐어 큰 작업실을 마련하고 싶다는 생각에 도자기를 빚어 자연과 빛과 바람이 잘 전달되도록 건물 모형을 만들고, 건축설계사와 의논해 전시실과 어린이 미술교육실까지 마련해 2013년 지금의 ‘왈종미술관’을 건립했다. 커피숍을 겸한 아트숍도 마련했다. 새들의 놀이터를 위해 예전 집 뜰에 있던 나무들을 그대로 옮겨 심는 작업도 잊지 않았다. 미술관을 개관하게 된 동기는 예술의 사회적 환원이라는 생각을 염두에 둔 때문이다. 이로써 이왈종은 1990년 이후 줄곧 살아온 제주 서귀포에 값진 선물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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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생활의 중도(中道)와 연기(緣起)> 장지에 아크릴 187×250cm 2013

생활 미학의 높은 경지
이왈종의 1980년대 <생활 속에서>는 1990년대 이후 <제주 생활의 중도(中道)>의 모티프에 해당한다. <생활 속에서>는 기법으로 볼 때 수묵과 채색의 혼합이면서 기하학적 형태의적용이 두드러지고, 내용적으로는 도시의 파편적인 일상과 도시의 정경들이 대세를 이룬다. 1990년대 제주에 정착하면서 그의 그림은 자연 제주의 싱그러움과 제주 일상의 즐거움을 반영하고 있다.
1990년대 이왈종 그림의 두드러진 특징은 1994년 조선일보의 <노래하는 역사> 시리즈에 연재한 삽화에서 찾을 수 있다. 비록 삽화라는 형식의 작은 그림이었지만 양각과 평면의 혼성, 역사 해석의 다양한 기법, 신명과 상징의 세계 등 상당한 실험성이 돋보인다. 또 탐라와 한국미의 절충, 단색과 컬러의 배분, 선과 면의 융합, 전통과 현대의 동시성 등 시간과 공간의 내레이션을 맘껏 음미하게 한다.
이왈종의 철학적 사유는 그림의 제목이자 주제가 되는 ‘제주생활의 중도(中道)’와 삶의 이치인 ‘연기(緣起)’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의 원천인 마음상태에 주목하며 하루하루 끊임없이 이어지는 ‘마음 비우기’는 곧 그의 ‘그림’으로 전환된다. 가장 참다운 예술이란 작가 자신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림은 마음이 가는 대로, 생각대로, 느끼는 대로, 마음 따라서 편안하게 그리면 되는 것”이 이왈종의 화론이다. 골프그림의 등장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시대마다 삶의 내용은 다양하고 예술취미와 취향이 다르므로 생활 속의 모든 내용은 예술의 소재가 된다. 우리가 일상을 세속이라고 하는 것은 세속을 통해서만 높은 단계의 예술 세계를 그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왈종이 추구하는 행복론 역시 그의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그림 안에서는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고, 모든 사물의 작용이 화평한 세계로 이어진다. 그의 그림은 날로 험악해져가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다. 세속은 공자의 말대로, 강의 하류와 같다. 강의 하류를 인간의 세상에 비유하면 모든 희로애락이 모여들고 섞이고, 요동치는 곳이다. 이왈종은 하류 속에서 건강한 삶을 건져 올렸다.
이왈종의 화력(畵歷)은 변화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기존의 동양화와는 확연히 다른 기법과 화려한 색상과 그만의 재료를 사용하고, 장르도 부조, 목각, 조각 등 다양한 입체 조형을 통해서 다중적인 시도를 하고 있다. 죽은 친구를 위해 개발한 향로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는데 향로에는 특히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잘 드러난다. 인간은 기억에 의해 서로 연결된다. 향로는 자신의 삶의 중심에 머물렀던 소중한 한 지인을 위한영혼의 제기였다.
주변의 삶을 담아내는 이왈종의 작업은 풍류와 잡기, 익살과 에로티시즘을 인생의 보편적인 놀이와 유희로서 보여주는데, 이들은 평범한 일상의 인간들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의 그림 앞에 서면 누구나 주인공이 되는, 그러한 관점의 전환은 하나의 마술처럼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그것은 예술의 난해함과 고고함이 주는 부담으로부터의 해방감이 주는 특별한 선물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화가 인생에 어리는 서귀포의 봄
이제 칠순에 접어든 이왈종. 그를 대하면 노화가라기 보다는 항상 젊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의 이런 생각에는 ‘늙으면 죽어야지’라는 식의 패러독스가 배어있고, 이 철학적 코믹성은 삶에 활력을 주는 위트로 돌아온다. 그의 코믹성과 위트는 그의 삶의 미학이자 젊은 삶을 유지하는 은유의 반전(反轉)이기도 하다.
또한 이왈종의 마음에는 인간에 대한 배려가 숨어있는데, 이것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윤리 의식과 같은 것이다. 그의 나눔에 대한 실천은 서귀포에서 부각되었다. 이왈종은 일찍부터 유니세프와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2011년 서귀포시가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협약도시로 선정되면서 유니세프 서귀포시후원회의 회원으로 위촉된 이후 그는 매년 오프셋 판화전을 개최해 그때마다 3000만 원을 유니세프기금으로 후원함으로써 나눔의 문화를 확산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2016년 바다로부터 봄이 왔다. 한라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서귀포 정방폭포의 파도소리를 가슴으로 안고 있다. 정방폭포 주변에 북적대는 사람들의 소리도 연례행사처럼 끊임없이 들려온다. 생활의 중도 그 대장정에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포용력을 느낄 수 있는 따뜻한 메시지가 있고, 현실과 비현실의 조화로움이 있다. 마치 우리 마음의 놀이터가 바로 이왈종의 작품인 것처럼 말이다. 미술관 한 켠에 위치한 2평짜리 황토방은 이왈종의 더 없는 안식처다. 아침저녁 황토방에 비치는 그의 얼굴엔 여전히 아이 같은 웃음이 포말처럼 번진다. 이보다 더 행복한 삶이 있으려나. ●

 

 

ARTIST REVIEW 부지현

9-1

위 < Net-Being > 폐집어등, 소금, LED, 스테인리스 스틸, 진동자, 스피커, 앰프 가변설치 2016 아래< Net-Being > 폐집어등, 나무상자, 폐선, 무빙라이트, 스테인리스 스틸, LED 가변설치 2012

혹시 어두운 밤바다 저 멀리 수평선을 밝히는 오징어잡이 배의 집어등을 본 적이 있는가?
먹고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자들이 벌이는 사투는 그렇게 목격자와의 거리만큼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부지현의 집어등은 그렇게 ‘바다의 별’이 되었고, ‘절제’를 눌러 담은 용기(容器)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담담한 태도로 ‘확장된 판화’의 형식이 되어버린 작가의 집어등에 불을 밝혀본다.

반사하고 비추며 연결되는 인드라망

이나연 미술비평
보들레르의 통찰: “미미하고 아주 적을지라도 ‘현대사회’에 존재할지 모를 신비로운 미적 요소를 밝혀내는 데 투신하는 것보다 그저 ‘현대사회’는 모조리 추악할 뿐이라 단정짓는 일이 훨씬 쉽게 마련이다.” 덧없음 안에서도 영원한 것을 찾아내야 하는 작가의 사명이란, 아름답지 않은 현실에서 끝끝내 실 한 오라기만큼의 단서를 찾아내, 그 한 오라기의 실로 옷을 짓는 일일 것이다. 밤바다가 유난스레 아름다워지는 시기. 오징어잡이 배들이 바다로 나가는 시즌이다. 바다 한가운데서 서로 거리를 두고 오징어가 걸린 그물을 거두어 올리는 배들을 육지에 자리 잡고 관망하노라면, 수평선을 따라 일직선으로 놓인듯 보인다. 하늘과 바다를 잇는 오징어잡이 배에서 밝힌 등. 집어등이라 불리는 이 기능적인 조명은 하늘과 바다를 동시에 배경삼을 수 있다는 기막힌 조건을 이용해 한철 눈부시게 빛난다.
부지현은 자연과 인간의 매개자로서 집어등에 관심을 둔다. 양성주광성을 가진 어류를 모으기 위해 만들어진 이 도구의 조형성에 사로잡혔다. 그에겐 이 집어등이 ‘바다의 별’로 보였다. 혹자에겐 판화를 전공한 작가가 2003년부터 판화작업으로 주로 찍어낸 어선이 있는 풍경에서 2007년 집어등 설치로 넘어간 경계가 당혹스러울 만도 하다. 그런데 동판화로 형상화된 집어등을 그리던 시기를 넘어가면서, 집어등에 다시 배의 이미지를 판화로 새기던 중간지점이 있다. 설치작을 소개하던 초기인 2007년에 사용하던 집어등에는 일일이 에디션을 단 어선이 찍혀 있었다. 2008년 이후론 레디메이드 폐집어등 자체로 설치에만 주력하지만, 기성품인 집어등에는 마치 판화처럼 일련번호가 새겨져 있다. 어떤 의미로 모든 공산품은 ‘찍어낸다’는 점에서 판화와 닮았다. 작가의 말을 빌리면 “확장된 개념의 입체판화”다. 그렇게 판화에서 시작해 자연스레 설치의 일부분으로 넘어간 집어등은 바람, 수조, 모래, 소금, LED 등을 만나며 번번이 신비롭게 확장됐다.
그의 작업을 처음 본 건 2013년 여름이었다. 푹푹 찌는 날씨에 제주도에서 드문 화이트큐브 공간을 가진 노리갤러리에 들른 참이었다. 문을 통과해 상자 같은 공간으로 들어갔더니 포그머신에서 나온 안개가 투명한 판으로 가로막힌 너머공간에 가득했다. 그리고 안개 사이로 어렴풋하게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집어등 한 줄이 보였다. 안개가 걷혀 시야가 확보되려나 했더니, 다시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서늘한 바람이 불었고, 집어등은 아스라해졌다 선명해졌다를 반복했다. 그 좁고 폐쇄된 공간에 장대한 바다의 야경이 꾸려졌다. 그의 작업은 이상화된 바다의 모습을 닮았다. 하지만 바다도 집어등도 절대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다시 작가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배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불빛이 굉장히 밝고 뜨거움을 주는 고통의 물건”인 것이다. 생존을 위한 밥벌이 공간인 동시에 목숨을 위협하는 공간인 바다에서 뜨거움을 견디며 오징어를 길어올리는 노동의 심상을 부지현의 작품에서 찾기는 어렵다. 굳이 구분짓자면, 바다라는 현장에 침투한 노동의 정서를 전달하기보다는, 바다라는 자연과 어울리는 인공의 미를 극단으로 끌어올리는 시도다. 그래서 작가는 바다의 이중성을 드러내기 위해 거울을 등장시킨다. 상을 똑같이 비추는 거울이 실제로는 허상을 진짜처럼 보이게 만드는 물건이라고 봤을 때, 집어등의 아름다운 표면을 비추는 가짜 이미지를 통해 그 이면을 성찰하게 만드는 도구가 된다. 게다가 거울은 반사되는 표면의 뒷면에선 무슨 일이 벌어져도 모르는 불투명하고 폐쇄적인 재료이기도 하다. 이 아이러니에 진지한 의미를 담아 끌어들인 거울조차 여전히 표면적으로는 아름답기만 하다. 그래도 작품에 한걸음 더 다가가 깊이 들여다보도록 이끄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집어등의 경우야 부지현의 트레이드마크겠지만, 거울을 재료로 삼은 작가는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쿠사마 야요이의 <거울방>과 김수자의 <숨쉬기-거울여자>다. 거울이 제공하는 공간의 확장성과 반복성에 착안해 환상적인 연출을 한 이 두 작가의 작업 방식에 견줘 부지현의 거울은 좀 더 개념적이다. 사진작가 다니엘 커클라(Daniel Kukla)의 <가장자리 효과(The Edge Effect)>와 설치작가 엘리슨 쇼츠(Alyson Shotz>의 <거울 펜스>가 부지현이 사용하는 방식의 거울에 보다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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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休> 폐집어등, 나무상자, LED, 거울 실크스크린(100/100) 가변설치 2007 갤러리 모앙 설치광경

담담하게 감정을 자극하다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 다시 자연의 이면을 돌아보게 만드는 식이다. 2013년 시작된 <존재의 그물망(Net-Being)> 시리즈에도 아크릴 미러가 등장한다. 물과 빛, 거울, 유리표면 등 반짝이며 반사되는 많은 요소가 반사하고 움직이고 비춰내고 빛을 내면서 서로서로 영향을 준다. 그 미묘하고 복잡한 관계들을 풀어내고 지휘하는 작가에 의해 하나의 섬세한 공간이 탄생한다. 신비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는 도구로서의 거울을 논하자니 다시 야요이와 김수자의 거울과도 깊은 연관성을 찾을만 하다. 그러자니 넓은 그물의 코마다 구슬이 달려있어서 서로가 서로를 비춘다는 인드라망이 떠오르기도 한다. 세상에 무엇 하나 서로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고,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작가는 2016년 2월, 제주현대미술관에 두 점의 설치작품을 소개했다. <존재의 그물망> 시리즈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들이다. 계단으로 이어진 갤러리, 발 디딜 공간없이 넓은 바닥 가득 하얀 소금을 채웠다. 파란 워셔액을 넣은 집어등 두 개가 천장에서부터 내려온 노끈에 덩그러니 매달린 듯-사실은 집어등은 노끈과 별개로 천장에서부터 내려오는 와이어에 연결돼 있다- 설치됐다.
널찍한 하얀 바닥에 가는 선과 여린 푸른 빛과 푸른 액체가 어우러지는 이미지는 정갈하다. 미니멀하다는 표현이 어울림직도 하다.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Felix Gonzalez-Torres)의 전구를 늘어뜨린 작품 <무제(북녘)>가 떠오르기도 하고, 작가가 그간 해온 작업들-각을 딱딱 맞추고 나열한 다수의 집어등-과 상당히 큰 차이가 포착되기도 한다. 비워내는 경지에 이른 대가의 일필을 보는 기분도 든다. 따지자면, 집어등이라는 소재의 내외부를 집요하게 탐구한 세월만 이미 10년이 훌쩍 넘었으니, 집어등에 관해서라면 감히 마스터라는 칭호를 부과해도 무리는 없지 않겠는가. 사실 이 설치는 2010년 갤러리도올에서 소개한 <휴>와 궤를 같이한다. 관객이 들어갈 수 없도록 갤러리 바닥에 소금을 깔고, 오른쪽 모퉁이에 집어등의 무덤을 쌓아뒀다. 엷은 푸른빛이 사그라질것만 같은 여리여리한 구조물을 자연광이 비추는 설치다. 관객은 육지에서 먼 바다를 내다보듯, 거리를 두고 집어등 무덤을 보게 된다. 역시 곤잘레스-토레스의 <무제(로스의 초상)>가 떠오를 만한 조형미에 한국적이고, 제주적인 자연의 서정성이 보태진다. 결과물 자체만 보면 쿨해 보이는 작품의 안쪽에는 바로 그 서정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의중이 숨어 있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 제주에서 영감을 얻은 소재를 사용하며, 제주를 기반으로 작업 활동을 이어나간 작가에게, 고향에서 본인이 느끼는 정서를 조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주된 관심사였다. 육지에서 떨어진 섬의 슬픔과 척박한 삶의 고충, 고립된 갑갑함과 자연이 주는 위협 등의 부정적인 요소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그 정서를 안개 속에 파묻힌 집어등처럼, 아스라하고 담담하게 숨겨둔다. 숨어 있어 궁금해지고, 단정한 절제가 깃들어 아름다운 작품은 그래서 역으로 극적이다.
최근 부지현의 관심은 집어등과 거울에서 확장돼, 소리와 소금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가 닿은 듯하다. 제주현대미술관에서 선보인 또 다른 설치작은 그간 해온 작업의 모든 요소가 총망라돼 있다. 각을 맞추고 일정 부피를 가지고 깔린 소금바닥 프레임 위로 푸른 LED를 장착한 집어등이 열을 맞춰 정렬했다. 숨비소리, 파도와 바람소리가 섞여 편집된 음향이 공간에 퍼진다. 작가의 작품 대부분에 붙은 ‘휴(休)’의 감각이 몸으로 들어오는 듯한 공간이다. 외부세계와의 연결을 잠시 잊고, 그저 눈앞의 미를 감상하며, 편안함을 들을 수 있는 공간에서 내게 드는 감정은 안심이었다.
묘하게 마음이 놓이고, 내려놓은 마음 때문인지 가지런한 소금턱에, 푸른 빛에 쉽게 감동하고 만다. 아마 작가가 전달하려던 서정의 기운이, 동향 사람인 나에겐 좀 더 절절히 전해졌을지도 모르겠다. 별다른 보조장치 없이, 일정한 수분을 접착제 삼아 그 두께와 각을 유지하는 하얀 소금의 존재감이 위태로워서 더 고와보였다. 익숙한 듯 새로운 소리가 감정의 폭을 배가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감정을 담아 풍경을 표현하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풍경에 감성을 담는 일’이란 표현을 글로만 읽으면 인상주의 시절의 케케묵은 작품 해설 같다. 그런데 정말로 부지현은 현대미술의 언어로 자신이 느낀 풍경에 대한 인상을 풀어낸다. 신인상주의를 넘어서 대체할 새로운 용어를 찾느라 분주해진다. 제안해보는 표현 하나. ‘설치된 인상주의(Installed-Impressionism)’는 어떨까.
작가의 인상이 시작된 근처 바다로 나가 한 번 더 깊이 고민해 볼 참이다. 힌트를 내비쳤지만, 그가 보고 지낸 바다와 내가 보고 지낸 바다는 똑같은 제주바다다. 곧 오징어잡이 철이 시작될 테고, 부지현의 눈도 나의 눈도 한결 즐거워질 일만 남았다. ●

부 지 현 Boo Jihyun
1979년 태어났다. 제주대 미술학과(서양화 전공)와 성신여대 조형대학원 미디어프린트학과를 졸업했다. 2004년부터 12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국내를 비롯해 중국, 타이완, 폴란드 등지에서 열린 기획전과 그룹전에 출품했다. ‘중앙미술대전’ 입선, 제주도미술대전 대상(이상 2003), ‘ASYAAF PRIZE 7’(2008) 등을 수상했다. 현재 제주와 서울에서 작업하고 있다.

EXHIBITION THE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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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최진욱 <서서히>(오른쪽) 캔버스에 아크릴 194×518cm 2013 <북아현동4>(왼쪽) 캔버스에 아크릴 97×130cm 2012 아래 오치균 < First Ave > (오른쪽) 캔버스에 아크릴 100×200cm 2014

최진욱 개인전 <서서히> 인디프레스 4.1~21
& 오치균 개인전 <New York 1987~2016> 금호미술관 3.4~4.10

 

화가 오치균과 최진욱. 사실 이 두 중견 작가의 작업은 닮은 구석이 없어 보인다. 회화를 재현하는 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지점이 두 작가의 작업을 함께 살펴볼 때 새로운 흥미를 일으키지 않을까? 오치균은 표면의 강렬한 질감을 통해 강한 인상을 전달하고, 최진욱은 일상적인 풍경 속에서 정치적인 이슈를 이끌어낸다. 필자는 이들의 작품을 토대로 비평에 대한 딜레마를 털어놓으며, 비평의 역할을 성찰한다.

말수가 적은 회화와 많은 회화 앞에서, 비평의 딜레마

반이정 미술비평
한 면 위에 담긴 공간적 의사소통을 텍스트라는 시간적 의사소통으로 번역하기. 회화에 대한 평론을 이처럼 단순히 정의해도 무방할 거다. 감상을 돕자고 출현한 게 평론일진대 평론이 감상에 걸림돌과 부담 요인이 될 때가 실로 많다. 이는 주어진 지면을 채워야 비로소 완성되는 평론의 생리와도 연관이 깊다. 이걸 평론의 딜레마라 불러보련다. 동일한 작품에 전혀 상이한 여러 해석이 나오긴 어렵다. 해서 새 필자는 앞선 필자들의 인용문, 그림의 주제와 연관된 참고 문헌의 장황한 나열, 종래 해석을 살짝 비튼 동어반복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지면을 구성하기도 한다. 그러니 쥐어짜낸 문장으로 분량을 채운 평문이 쉽게 출현한다. 이런 일은 실로 흔한데 이런 현상을 평론가의 인습이라 해도 괜찮겠다. 그래서 주제에 큰 편차가 없는 어떤 작가에 대해 동일한 필자가 여러 차례 평문을 쓰기란 어려운 일이라고 나는 평소 믿는다. 이런 사정이야 어떠하건 작품이란 평론과 한 묶음으로 유통되는 형편이다.
이 같은 작품-평론의 유통 구조, 견제 받지 않는 평론가의 인습 등으로 인해 동어반복적인 평론과 비문에 가까운 ‘읽히지 않는’ 평론은 제재를 받지 않고 계속 생산되는 거다. 오치균과 최진욱은 미디어 친화적인 화단에서 생존한 중견 회화 작가이지만, 이 둘은 상이한 지평에서 다뤄지고 있다. 그럼에도 지난 자료에 따르면 둘은 같은 기획전에 함께 묶인 바 있다. “주목할 만한 새로운 동향과 전망을 끌어내는 데에 역점”을 두고 기획되었다는 25년 전 <바람받이-1991년의 동향과 전망展>(서울미술관 1991년)에서 30대 중반이던 둘은 그들의 현재를 예고하는 원형을 보여준 바 있다. 세잔 풍의 붓질로 연희동 습작을 남긴 최진욱과 안료의 재질감을 살려 용산과 무악재를 재현한 오치균은 그들의 원형을 확인시킨다. 인습적인 회화의 관행에서 벗어난 실험성 때문에 둘은 당시 주목받은 걸 것이다.
오치균과 최진욱을 말수가 적은 회화와 많은 회화로 도식적으로 구분할 수도 있겠다. 작가의 사연이 화면 위에 깊이 스며있다손 쳐도 오치균의 완성도는 요철감이 지배하는 그림의 평면에서 9할이 결정된다. 반면 최진욱을 설명하는 용어는 무척 많다. ‘감성적 리얼리즘’ ‘신비하고도 과학적인 리얼리즘’ ‘개념적 회화’ ‘생태적 회화’에 이번 개인전에선 박찬경이 ‘사건 실재주의’라는 신조어까지 추가했다. 이처럼 다채로운 개념이야 어떻건 최진욱의 작업관은 사실주의와 형식주의, 구상과 추상, 정치성과 순수예술 사이를 반복하는 작가적 태도로 요약될 게다.
1987년부터 현재까지의 뉴욕 체험기를 다룬 오치균의 개인전을 보면서 나는 수첩에 ‘인상주의’라 적은 후 “이건 좀 구식 비유인가?” 하며 주저하기도 했다. 그의 호소력은 언어적 해석보다 체험을 통한 공감이 크다. 아트페어는 흔히 3강 구도의 풍경을 보여준다. 극사실주의, 팝아트, 안료의 재질감이 강조된 회화가 그 3강이다. 안료의 재질감이 주는 직감적인 호소력은 대중적 미술행사를 통해 반복해서 확인된다. 오치균은 아크릴물감과 모델링 페이스트를 혼합한 안료를 손가락에 묻혀 그린다고 알려졌다.
뉴욕 체류기 ‘회고전’을 다룬 이번 전시에서 나는 1995년 전후의 그림을 편애했는데, 오치균 화면의 촉각성이 내게 남긴 첫인상이 1995년 무렵 어느 전시장에서 형성됐기 때문이다. 차량 매연과 눈이 뒤섞인 우중충한 도로의 질감을 회화로 묘사하지 않고 안료로 대체하고 있었다. 재현 대상을 묘사가 아닌, 안료의 대체로 완성한 그림의 호소력은 복잡한 설명 없이도 간명하게 간파될 수 있다. 나는 여태 오치균을 다룬 평론을 한 번도 읽어본 바 없었다. 이번 기회에 찾아보니 예상대로 그 많은 평론이 유사한 논평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내가 주저하면서 메모했던 인상주의에 대한 언급마저 이미 다른 필자가 남겼다. 설명 없이 화면의 재질감으로 평가해도 될 오치균에 대해, 분야를 막론하고 다양한 필진이 장식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번에 알았다. 《아트인 아메리카》 편집장(리처드 바인), 서울미대 교수(정영목), 문학평론가(김우창), 소설가(김훈), 이번 개인전에선 뇌과학자(정재승)까지 가세했다.
각계 인사의 평가를 듣고 싶은 당사자의 심정은 알겠으나, 언어의 풀이보다 화면의 물성으로 승부수를 두는 회화도 있는 법인데 굳이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다. 정재승은 작품론을 부탁받은 모양인데 ‘작가와의 대화’로 글의 형식을 변경했다. 그는 작가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지만, 아마 종래의 해설들과 상이한 해석을 보고 자기 전공을 살려낼 도리를 순진한 그로선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나도 짧은 논평만 남기련다. 임페스토는 그의 브랜드가 됐지만 1995년 뉴욕이 2015년 뉴욕보다 훨씬 깊다. 지인의 조언을 빌리면, 작품이란 게 삶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법이라 근작에선 오치균 브랜드만 강조된 느낌이다. 그가 1995년의 미학으로 되돌아가긴 어려울 게다.

오치균   캔버스에 아크릴 169×111cm 1995

오치균 < Houston Street > 캔버스에 아크릴 169×111cm 1995

주관적인 확신을 넘어
오치균의 필진 구성과 대조적으로 최진욱 미학은 심광현 개인이 독점하다시피 공급했다. 형용모순처럼 들리겠지만 최진욱의 그림은 화면보다 그와 그를 지지하는 평론이 압도하는 형국이다. 이번 전시에선 박찬경이 글을 썼는데, “최진욱의 작품을 비교적 쉽게 이해”할 목적으로 써선지 심광현의 ‘잘 읽히지 않는’ 난문보다 훨씬 낫고 신작보다 포괄적인 작가론에 집중한 글이다. A4용지 11매 분량의 서문은 뒤로 갈수록 잘 읽히지 않았다.
예를 들어 “그에게 그림은, 오늘의 생활 속에서 매순간 살아있는 실제 사건들의 연쇄 속에 움직이고 있는, 정체성을 지니기 이전에 있는 어떤 복합적인 상태이며 주객관이 만나는 충만한 장소이다.” 같은 문장을 보자. 언어 사용을 생업 삼는 비평가의 직감으로 말하자면, 저 입증 불가능한 문장은 어떤 의미가 담겼을 테고, 어떤 미적 공동체에선 의사소통 때 사용될 게다. 그렇지만 저런 평가 방식 혹은 의사소통은 확장성을 지니지 못한다(대중에 대한 확장성이 아니라, 미술 전공자 집단에 대한 확장성을 말하는 거다). 나는 최진욱의 작품 혹은 평론이 독보적인 혹은 폐쇄적인 소수의 미적 공동체가 나누는 반증불가능한 주관적 미감이자 개인적 확신이라고 판단한다. 때문에 리얼리즘에 뿌리를 둠에도 확장성이 낮다. 이건 숙제다. 이를 어쩔 건가? 전시에서 구체적인 예를 들자.
박찬경은 “북아현동을 걷는 교복 입은 소녀들의 모습에서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라고 묻기도 한다. 이쯤 되면 난감해진다. 이렇게 되묻자. <북아현동4>(2012)로부터 세월호를 떠올리는 남다른 미적 감성의 공동체가 있을 것이며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같은 이치로 절대 다수의 ‘미술 전공자 그룹’은 그런 연상을 떠올리지 못할 테고 이는 최진욱에 대한 몰이해가 아닌 그저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교감의 총체적인 엇나감은 작가가 풀어야 할 몫이지 수용자의 과제가 아니다. 문제는 최진욱의 작업과 평론의 대부분이 이처럼 흔들리지 않는 주관적인 확신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확장성의 문제가 <북아현동4> 한 점에만 걸리는 게 아니라는 거다.
개인전 제목으로 쓰인 400호 캔버스의 <서서히>도 보자. 이 그림은 친구 부친상을 기초로 완성한 2008년 개인전 <88만원 세대>에 출품된 <메멘토 모리 2>라는 그림을 2013년에 재구성한 거다. 작가의 진술에 따르면 2012년 대선 때 정권이 교체되리라 확신한 작가는 이명박 시대를 땅에 묻는 의미를 담으며 그리고 있었단다. 정권교체에 실패한 현실은 차치하더라도, 일상적 장례 풍경에 정권교체라는 정치적 풍경을 이입시킨 셈인데, 박찬경은 이 작업을 “일상과 정치의 감각적 지적 일치라는 최진욱의 오랜 시도가, 이 그림을 통해 이제 결실을 맺은 것 같다”고 격찬한다. 다시 북아현동 여고생 그림과 세월호 연상 작용을 환기해보자. 일상적 장례식 그림이 정권교체의 은유임을 작가의 진술이나 전시 서문을 통해 가까스로 확인한들 “음. 그런 거였군”하고 만다. ‘사실 확인’ 이상의 감정이입이 어렵단 말이다. 이때도 감정이입의 실패는 둔한 미감의 결과이기 보다 작가의 리얼리즘이 반증불가능한 주관적인 확신에 기초해서라고 나는 본다. 나는 차라리 최진욱의 완성도가 그의 치열한 정치성과는 별개로, 디테일이 결여된 붓질과 자의적 채색에 있다고 본다. 요컨대 <북아현동3>(2011)에서 여고생 다리의 빨간 채색이나 <서서히>에서 분홍색 봉분 같은….
비평을 위해 작가의 진술과 남이 써둔 비평을 두루 검토하는 사전 작업이 자연스러운 과정처럼 굳었건만, 지리멸렬하고 불필요한 인습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이 두 작가를 해석하기에 앞서 통 읽히지 않는 평문들(최진욱)을 살피거나, 거의 유사한 해석을 살짝 바꿔 반복하는 이름만 다른 필자들의 평문들(오치균)도 봐야 했다. 이럴 때면 위기론에 에워싸인 평론의 역할이 차라리 침묵인 것도 같다. ●

최진욱  캔버스에 유채 160×117cm 2008

최진욱 <알바천국2> 캔버스에 유채 160×117cm 2008

 

 

NEW FACE 2016 윤대희

숨겨진 불안

사전적으로 ‘편안하지 않음’을 뜻하는 ‘불안(不安)’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안고 가는 숙명 같은 것일까?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항상 불안감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살고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그만큼 불안은 일상적이다. 누구는 불안으로 인한 심적 부담으로 많이 힘들어 하는 반면, 누구는 그것을 삶의 동력으로 전환하여 적당한 긴장감을 즐기기도 한다.
윤대희는 작가노트를 통해 밝혔듯 불안을 캔버스에 옮기는 작가다. 그렇다면 그는 앞서 이야기한 불안을 대하는 유형 중 후자에 속하는 것은 아닐까? “불안이 가장 일상적이며 가장 밀접한 감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것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기록하고 드로잉했죠. 그러면서 불안감이 삶에 생산적 기능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하게 됐어요.” 그러나 윤 작가의 작업은 불안 그 자체가 아닌 작가와 관계 맺는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불안을 느끼기에 이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내면의 감정을 작업으로 표현할 때 처음에는 불안을 해소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도 했었죠. 그러나 현재는 개인과 외부의 관계가 지속된다면 그 속에서는 불안을 해소하고 다른 불안을 다시 만들어내는 과정을 반복하는 셈이죠.” 그렇다면 작가에게 불안을 야기하는 것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직업적 역할(작가), 가족으로서의 역할(아들) 혹은 이성관계 등에서 역할이 많이 없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작업에서 점점 더 많은 등장인물과 상황을 보이는 것으로 드러나게 됐다. 그렇다면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인물은 작가 자신일 수도 있고, 자신의 심리를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고, 그가 만난 ‘그 누구’일 수도 있다. 윤 작가는 이에 동의하며 작업이 내러티브를 함유하면서 지금의 인물 형태로 표현되었다고 설명했다.
윤 작가의 캔버스에 등장하는 인물은 콩테의 단일한 색상과 거친 표현으로 이뤄지기도 하고, 마치 낙서화에 등장하는 누구 같기도 하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형상이지만, 심리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오히려 더 극명하게 다가온다. 윤 작가는 재료에 의한 차이를 부정했다. “큰 화면에 작업을 하기 전에 드로잉 해놨던 것들을 조합해서 하나의 화면을 다시 구성하는데 그 과정에서 완성될 작업의 분위기를 상상해 재료를 선택합니다.”
몇 차례의 투병 시기를 거쳤다고 고백한 윤 작가는 당시 사회활동과 타인과 관계 맺음에 제약받는 것이 심적으로 큰 부담이었다고 한다. 물론 그런 경험이 지금 작업의 계기가 됐다. 현재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프로그램 입주작가인 그는 8월에 열리는 개인전 준비로 여념이 없다.
그와 헤어진 뒤 생각해보니, 인터뷰하면서 윤 작가가 불안해 한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않았다. 그가 애써 숨긴 것인지 알 수 없다.
황석권 수석기자

자라난다자라난다자라난다_171x306cm_charcoal on paper_2014

<자라난다자라난다자라난다> 종이에 목탄 171×306cm 2014

윤대희
1985년 태어났다. 인천대 조형예술학부(서양화 전공)와 동 대학원 미술학과를 졸업했다. 2014년부터 2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서울과 인천, 의정부 등지에서 열린 기획전과 그룹전에 출품했다. 현재 인천아트플랫폼 7기 입주작가다.

 

NEW FACE 2016 정희정

태움과 채움 사이, 우연과 계획 사이

아직 20대인 젊은 작가가 산과 향(香)을 좋아한다. 작가 정희정이 이러한 취향을 갖게 된 데에는 집안환경의 영향이 크다. 어린 시절부터 작가는 산을 좋아한 아버지 손에 이끌려 매주 산에 올라가 놀이터 삼아 시간을 보냈다. “자연은 언제나 내 기분을 좋게 하는, 행복한 추억이 가득 배어 있는 공간”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래서 정희정의 산수화는 사실적 표현에 근거한 형상이라기보다 본인의 경험과 기억을 담아낸, 그때 그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친가가 한 달에 한 번꼴로 제사를 지내야 하는 종갓집이며 할머니, 어머니가 독실한 불교신자라는 사실은 작가의 곁에 늘 향이 있게 했다.
붓과 먹의 농담으로 무한한 표현이 가능한 점이 동양화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말하는 작가. 하지만 지금은 ‘붓’이 아닌 ‘향’으로, ‘물’이 아닌 ‘불’로 그림을 그린다. 동양화에서 가장 중요한 선을 불과 향이라는 제한된 재료로 해결함으로써 작가는 자신만의 운용법을 고안했다. 불붙은 향은 시간차를 두고 한지에 머물며 각양각색의 그을음을 생성해 내고, 그 흔적은 먹과는 또 다른 느낌의 농담과 선염을 만들어 낸다. 외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한지의 질료적 특성이 불과 만나 일궈낸 결과다. 켜켜이 쌓인 한지 조각은 작가의 작업이 얼마나 고된 노동을 요하는지 짐작하게 하고, 그 사이로 비치는 그을린 흔적은 시간의 층위를 말해준다. 하지만 “미묘한 변화들이 모여 하나의 이미지로 생성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나를 가장 기분 좋게 하는 일”이라며 말하는 작가의 표정은 생기가 넘쳤다.
작가는 숙련된 감과 우연적 효과에 의지해 형상을 표현하는 데 반해 그것을 시각화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장기 계획을 세워 단계별로 작업의 의미를 도출해간다는 점이다. 정희정의 이러한 면모는 작품 〈Burning of ridge〉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작가는 한지가 아닌 신문지와 유명 외식 브랜드의 포장지를 태웠다. 이는 작업 방향을 소멸과 생성이라는 근원적 요소에서 현대사회가 당면한 여러 문제, 예컨대 단순 노동자나 일용직에 대한 사회적 편견, 청년 취업문제 등으로 선회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자 작가는 오래전부터 이에 대해 고심해왔다며 사실 오브제 작업은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 시도였다고 한다.
“산수만 하는 작가로 고착화되기에는 아직 젊지 않나요”라고 웃으며 되묻는 작가의 모습에서 말하지 않은 얘깃거리가 아주 많아 보였다. “하지만 제 안에서 어느 정도 준비를 마치기 전까지는 말을 아끼고 싶어요”라며 조심스레 말하는 작가의 태도에서 신중한 성격이 다시 한 번 느껴졌다. 그러기 위해 작가는 현대미술 전시도 되도록 많이 보려고 노력한다. 특히 동시대 작가들이 전시공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작업으로 풀어냈는지 해석하는 일이 가장 큰 관심사다. 동양화의 무한한 변신과 확장이 정희정의 손에 들린 불과 향에 의해 어떻게 흘러갈지 사뭇 궁금해진다.
곽세원 기자

정희정 (7)

OCI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태우다, 태어나다〉 전시 광경

정희정
1988년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2015년 OCI미술관에서 〈태우다, 태어나다〉 제하의 첫 개인전을 열고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2013년 제11회 겸재진경미술대전 특선, 2014년 제1회 Campus10 ART Festival @ Hanhwa63 신진작가전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2014년 2015 OCI YOUNG CREATIVES에 선정됐다.

 

ARTIST REVIEW 박영숙

092 2003 화폐개혁프로젝트

위 <화폐개혁 프로젝트> 중 <#2 허난설헌> 디지털 프린트 170×120cm 2003 아래 <화폐개혁 프로젝트> 중 <#3 소현세자 부인 강씨>

박영숙은 사진작가라기보다는 오히려 한국의 여성주의 문화운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 가운데 올해 5월, 천안 아라리오갤러리에서 박영숙의 대규모 개인전이 열릴 예정이다. 이를 계기로 사진작가로서 박영숙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박영숙의 작품세계를 크게 ‘구성사진’, ‘사진가와 피사체의 관계’, ‘사진의 형식적 특징’이라는 세 측면에서 분석한다.

여성적 사진 찍기-그녀가 그녀를 찍다

문혜진 미술이론

박영숙의 사진과 마주쳤을 때 불현듯 어렴풋한 기억 속 엘렌 식수(Helene cixous)의 글이 떠올랐다. 글쓰기가 어떻게 남성중심주의와 동질의 것일 수밖에 없는지, 그 속에서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이 어떻게 필연적 소외로 이어지는지를 설파한 그 글은 ‘여성적 글쓰기’의 격동적 가능성을 아름답게 노래했다. 지금으로부터 십 수 년 전에 읽은 그 글이 망각의 심연에서 부상한 것은 실상 우연이 아니다. 박영숙이 사진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식수가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무기인 카메라로, 이미지로 실천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전 작업은 ‘여성적 사진 찍기’를 향한 끝없는 탐색이자 구애다. 하지만 여태까지 박영숙의 작업에 대한 이해는 다분히 표면을 훑는 정도에 그친 듯하다. ‘미친년’이라는 센 어감이 저널리즘적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메시지(내용)에 주목해 여성주의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해석되거나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사진’을 다시 보고자 한다. 사진가가 여성이고 피사체도 여성인 이 사진이 남성의 사진과 어떻게 다른지, 그녀가 그녀를 찍는다는 것이 매체로서 사진의 구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짚어볼 것이다. 다시 말해 이 글은 그녀의 사진이 여성적 사진 찍기를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추적이다. 지면 관계상 핵심적인 부분만 소략하기로 한다.
구성 사진 다큐멘터리 사진이 대세였던 1960~70년대 한국 사진계의 풍토에서, 박영숙 역시 여느 사진가들처럼 스트레이트 사진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그녀는 보도사진 기자로 오래 일한 전력이 있다.) 그녀의 초기 작업은 별다른 변형을 가하지 않은 흑백 스트레이트 사진으로, 1966년 열린 첫 개인전을 비롯해 각성의 계기가 된 유방암 수술 후의 대표작 <36인의 포트레이트>(1981) 역시 별다른 변형을 가하지 않은 흑백 초상 사진이었다. 하지만 여성주의 의식이 확립되고 문화운동을 본격화한 1990년대 이후 그녀의 사진은 모두 구성 사진(constructed photography)으로 전환된다. 다큐멘터리 사진 및 작가주의 사진의 원칙인 흑백 스트레이트 사진의 퇴조가 작가의 사상적 재탄생과 시기상으로 일치하는 것은 주목해야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는 스트레이트 사진의 전제는 페미니즘 사진의 이념적 지향과 근본적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젠더나 섹슈얼리티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었음을 강조하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사진 이미지는 구성된 것이고 작가와 관객은 모두 의미 작용의 생산과 해독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참여자다. 그런 점에서 사진을 ‘세계에 대한 투명한 창’으로 바라보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개념은 여성주의 사진에 부적합하다. 여성주의적 각성 이후 박영숙의 사진이 연출되거나 구성된 사진으로 전회한 것은 표방하는 메시지에 부합하는 사진 형식에 대한 추구로 정합적이자 필연적인 행보였다.
1999년 이후 현재까지 9개의 시리즈로 이어지고 있는 <미친년 프로젝트>는 박영숙의 연출 사진의 다양한 면모가 포괄된 방대한 작업이다. 여기서 만들어진 사진은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인물 및 여타의 사물 이미지를 합성한 포토몽타주와, 인공적 합성 사진은 아니지만 가상의 무대에 특정 상황을 재현한 연출 사진이 그것이다. 전자의 경우 주로 목적이 분명한 외부 전시 출품작인 경우가 많은데, 헤이리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제작한 <헤이리 여신 우매드>(2004)와 돈이라는 주제에 따라 가상의 한국 여성 위인의 화폐 이미지를 구현한 <화폐개혁 프로젝트>(2003)가 대표적이다. 명백히 인위적 구성과 상징이 두드러지는 포토몽타주와 달리, 실내나 야외에서 상황을 재구성하는 연출 사진은 특정 장면을 설정할 뿐 촬영 자체는 조작 없이 이루어진다.
<미친 년 프로젝트>를 대표하는 주요 이미지들이 대개 이 부류에 속하는데, <갇힌 몸 정처 없는 마음>(2002), <오사카와 도쿄의 페미니스트들>(2004), <꽃이 그녀를 흔들다>(2005)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때 연출의 정도는 인위적 연극성이 두드러지는 것부터 일상 속 한 장면 같은 자연스러운 연출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일견 스냅사진 같은 가장 일상적인 사진일지라도 관객은 그것이 연출 사진임을 인지한다. 피사체가 사진 찍힘을 주지하고 있고 나아가 주체적으로 상황을 연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133 2004 Mad Women Tokyo

<미친년 프로젝트> 중 < Feminists in Tokyo #6 >디지털 프린트 120×120cm 2004

139 2005 A flower shakes Her

<미친년 프로젝트> 중 < A Flower Shakes Her #2 > 디지털 프린트 120×120cm 2005

사진가와 피사체의 연대 일반적으로 사진가는 촬영의 절대적 권력자다. 사진기를 총에 비유한 수전 손택의 유명한 말이 아니더라도, 피사체는 찍히는 대상이요 사진가는 찍는 자라는 엄연한 구분은 촬영의 역학을 지배한다. 박영숙의 사진이 남성 사진가들의 사진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곳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녀의 촬영에서 인물들은 수동적 피사체에 머물지 않는다. 박영숙의 사진에서 피사체 여성들은 촬영의 협업자이자 설정한 상황을 스스로 해석하는 연기자다. 작가가 각 상황을 설정하고 구체적 소품과 장소, 인물의 행위를 계획하는 것은 여느 사진가들과 동일하지만, 피사체에게 부여되는 자유의지의 정도가 다른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 박영숙의 사진이 피사체와의 공감대 형성을 전제 조건으로 설정하고 있기에 가능하다. 고등어를 토막 내다가, 화단에 물을 주다가, 아이를 돌보다가 문득 넋이 나가버린 그녀들의 심정에 피사체가 동조해야만 사진이 만들어 질 수 있다. 여기서 박영숙의 사진 속 인물들이 왜 모두 사진가의 지인이자 나아가 오랫동안 교류해온 페미니스트 동지들일 수밖에 없는지가 드러난다. 작가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스스로의 경험을 이입해 그녀들을 살아있는 존재로 육화하려면, 피사체가 같은 고충을 공유하고 분투해온 이력이 필수적인 것이다. 이에 따라 박영숙의 피사체-협업자들은 사진가가 고안한 일상의 시공간들을 제 것으로 풀어낸다. 각자의 방식으로 한 상황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일종의 이심동체라고 할 수 있는 이 몰입은 ‘여성으로 살아내기’라는 공동의 원체험에 대한 접속이다. 설정한 상황과 피사체의 실제 삶이 합치하지 않아도 무방한 것은 박영숙의 사진이 특정 인물의 개인사에 대한 다큐멘터리적인 기록이 아니라 ‘그녀들의 삶’이라는 보편적 지점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리되어 있으나 한 몸이기도 한 사진가와 피사체의 독특한 연대는 <미친년> 연작의 고유성이자 차별점이다. 사진가와 피사체가 완벽히 일치하는 낸 골딘의 자폐적 현실 공동체(그녀의 모든 사진은 자화상과 다를 바 없다)와 달리, 박영숙의 여성 공동체는 훨씬 넓고 열린 원형적인 장이다. 그 속에서 차이들은 녹아들어 다르고도 같은 상징적 유기체가 된다.
내용을 뒷받침하는 형식 사진가와 피사체가 함께 그려내는 여성적 시공간의 구현에는 내용을 뒷받침하는 정교한 형식적 지원이 자리한다. 우선 <미친년> 연작에는 구체적 상황을 설명하는 텍스트가 없다. 우리는 사진 속 그녀가 어떤 연유로 욕탕에서 물을 뒤집어썼는지, 자목련 꽃잎 위에 난데없이 왜 드러누워 있는지 모른다. 작업 설명도, 암시를 주는 표제도 없는 까닭이다. 어떤 이야기를 상정하고 있으면서도 구체적 설명을 피하는 것은 관객의 감정 이입을 제한하지 않으려는 의도다. 이미지의 모호성을 텍스트로 고정하면 자신의 방식으로 공감할 관객의 동조 가능성을 차단해버릴 수 있고, 이는 보다 넓은 연대를 추구하는 작가의 의도에 위배된다. 한편 클로즈업이나 반신상보다 인물의 전신상을 선호하는 것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작가의 초점이 인물이 처한 심리적 억압에 있기에 중요한 것은 피사체의 묘사가 아니라 피사체와 공간이 맺는 심리적 관계다. 심리적 공간에서 인물이 어떻게 억눌려 있는지를 드러내야 하므로 공간 속에서 인물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가 중요하며, 상황을 몸으로 뿜어내는 인물의 육신 전체를 보여주여야 한다. 군상보다는 단독상이 다수인 것도 동화의 원리로 이해할 수 있다. 피사체나 관객이 해당 상황에 완전히 몰입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사진에 하나의 인물인 것이 유리하다. 그런 점에서 같은 설정 사진이어도 제프 월과 박영숙은 다르다. 월의 경우 인물은 설정한 상황을 연출하는 여러 장치 중 하나일 뿐, 공간 속 다른 소품과 위계상 차이가 없다. 반면 박영숙의 경우 인물은 사진의 절대적인 중심으로 사진가와 피사체, 관객을 하나로 묶어주는 축이다. 박영숙의 사진이 심리적 공간으로 배경을 중시하면서도 인물이 약화될 만큼 카메라를 뒤로 빼거나 배경의 비중을 늘리지 않는 것은 인물을 통한 공명이 그녀 사진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개별 이미지가 아닌 연작이라는 점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하나가 아니고 복수이기에 작업 또한 여럿이어야만 의미가 있다. 대형 인화되어 단단한 존재감을 갖춘 복수의 그녀에게 둘러싸인 관객들은 실제 인물들과 마주한 듯한 인상을 받는다. 각기 다른 복수의 관객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녀들과 대화하는 순간, 거기서 또 다른 들림/홀림이 발생하고 나눔의 장이 펼쳐지리라. ●

박 영 숙 Park Youngsook
1941년 태어났다. 숙명여대 사학과와 숙명여대 산업대학원 (사진전공)을 졸업했다. 1966년 첫 개인전 이후 지금까지 12회 개인전을 열었다. 2007년부터 트렁크갤러리를 운영하고 있으며, 올해 5월 천안 아라리오갤러리에서 개인전이 열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