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윤진영

윤진영 (11)

< The Last Breath > Digital C Print 500×120cm(각, 총5점) 2013

생물학을 전공한 윤진영은 마치 실험실의 학자와 같이 사진작업을 한다. 그녀가 취한 대상은 근작인 곰팡이를 비롯해 생선의 내장, 돼지껍질 등 인간에게 그 가치와 효용이 크게 떨어진다고 인식되고 괴기미(그로테스크)를 지닌 것들이다. 하지만 비가시적인 그것들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존재의 부당성을 거부할 수 없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최근 중앙미술대전 대상과 일우사진상을 수상한 작가가 위와 같은 소재를 취하는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로테스크와 경계의 미학

박상우 중부대 교수

윤진영은 인간이 불필요하고 징그럽다고 느끼는 생명체인 생선 내장, 돼지껍질, 곰팡이 등을 작업의 모티프로 삼는다. 작가는 이 생명체를 변형한 후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하여 거기에서 새로운 의미를 탐색한다. 과학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작가는 자연스럽게 생물학의 실험 대상들을 작품의 오브제로 삼았다. 윤진영은 예술에서 낯설고 거북스러운 이 과학적 오브제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할까? 작가는 사람들이 혐오스럽다고 인식하는 생명체를 새로운 차원의 오브제로 변형시켜 이를 통해 그로테스크의 ‘긍정성’ 혹은 ‘이면’을 드러내고자 한다. 작업의 출발점은 그로테스크이다. 하지만 작가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그로테스크한 생명체에 숨은 비가시적인 세계이다.
초기 작업인 <변형(metamorphosis)>(2006)에서 작가는 생선의 눈알, 내장, 머리를 ‘변형(재배열, 재구성)’하여 사진으로 촬영했다. 초현실주의 작가인 프레데릭 좀머(Frederick Sommer)의 <닭 해부학(Chicken Anatomy>(1939) 사진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좀머가 해부된 닭에서 “믿을 수 없는 개성과 감동”을 발견한 것처럼 윤진영도 생선의 핏빛 내장에서 알 수 없는 미묘한 흥분을 경험했다. 작가는 그로테스크한 생명에서 혐오와 매력을 동시에 느낀 것이다. 또한 작가는 일상적인 식재료(묵, 젓갈, 고추장, 검은 쌀)에 숨은 그로테스크의 속성을 발견하고 이를 사진 시리즈인 <먹을 수 있는 것들(The Edibles)>(2008)로 표현했다.
이후 윤진영은 또 다른 그로테스크 오브제인 닭발, 돼지껍질이라는 생명체의 파편을 찍은 <사후연상(Reminiscence after death)(2010)>을 제작한다. 작가는 돼지껍질 위에 빔 프로젝터로 문신 모양의 이미지를 투사해 사진으로 촬영한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문양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혐오스러운 돼지껍질이다. 이것은 그로테스크 미학의 기원에 충실한 작품이다. 왜냐하면 그로테스크의 기원인 로마 시대 장식은 멀리서 보면 식물의 아름다운 형태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식물, 동물, 인간 그리고 기괴한 생명체가 ‘그로테스크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는 그로테스크가 하나의 의미에 머물러 있지 않고 처음과는 정면 배치되는 새로운 의미로 변형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한 생명체는 하나로 고정되거나 불변하는 가치가 아니라 서로 모순적인 양면의 가치를 지닐 수 있음을 암시한다. 생선 내장과 돼지껍질은 추함과 아름다움, 혐오와 경외를 동시에 지니거나 혹은 이들의 ‘경계’에 있다.
윤진영은 최근 이 같은 경계의 미학을 또 다른 그로테스크 오브제인 곰팡이를 통해 발전시킨다. 작가는 미리 주문한 조형물(인간 및 동물 얼굴, 도자기, 병 등) 위에 곰팡이를 직접 입히고 키운다. 곰팡이가 자라면서 조형적으로 원하는 효과를 보일 때 이를 사진으로 기록한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나온 사진 시리즈가 <남은 것(The Remains)>(2012), <우월의 역행(Reversal of Dominance)>(2015)이다. 곰팡이는 작가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그것은 이전 작업의 오브제처럼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아름다운 대상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해로운 ‘부패’이면서 동시에 유익한 ‘발효’이기도 한다. 그것은 또한 다가올 죽음을 상기시키면서도 힘차게 뻗어가는 생명력을 상징한다. 곰팡이는 작가가 추구하는 경계의 미학을 어쩌면 가장 충실하게 실천하는 대리인이다.

윤진영 (9)

< Reversal of Dominance 302 > Digital C Print 120×180cm 2015

윤진영 (3)

< His Will > 영상, 사운드 설치(8분4초) 2015

혐오의 대상을 미적 대상으로 인식하다
곰팡이를 이용한 작업 과정은 다른 재료를 사용한 것과 비교했을 때 매우 독특하다. 그것은 곰팡이가 작업 과정에서는 ‘살아있는’ 물감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화가가 물감을 사용하여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윤진영은 생명체의 물감으로 조형물의 표면에 ‘그린다’. 하지만 화가가 캔버스에 물감을 전부 칠하면 작품이 완성되지만 곰팡이로 ‘칠할’ 경우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때부터 곰팡이 그림의 주체는 인간(작가)이 아니라 곰팡이 자신이다. 곰팡이는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자신의 이미지를 스스로 완성한다. 물론 인간은 과학 법칙에 따라 곰팡이의 성장을 통제한다. 하지만 곰팡이가 성장하는 과정에 항상 우연의 요소(배지 종류, 여러 곰팡이 혼합, 오염 등)가 개입하기 때문에 조형물에 입힌 곰팡이가 어떻게 성장해 나갈지를 작가는 완전히 예측할 수 없다. 결국 곰팡이 작업은 인간의 통제와 자연의 우연이라는 두 요소의 만남에서 이뤄진다. 그것은 필연과 우연, 인간과 자연, 과학과 생명의 결합 혹은 경계에 위치한다.
곰팡이는 사람들에게 혐오와 불편함의 대상으로 인식된다. 작가는 이 생명체에 대한 이런 부정적 인식을 완화하기 위해 그것의 조형 요소들(질감, 색채, 형태)을 미적으로 강조하거나 통제한다. 작가가 곰팡이의 질감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다른 사물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함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 질감은 고대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처럼 응축된 역사와 시간을 보여준다. 또한 곰팡이에 사용된 차분한 색채는 원색을 사용했을 때 두드러지는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훨씬 완화한다. 게다가 곰팡이를 입힌 조형물의 형태와 배경도 곰팡이의 부정적 인상을 누그러뜨린다. 조형물을 둘러싼 검은 배경과 추상적인 형태를 통해 관객은 곰팡이의 존재를 잊고 혐오의 대상을 미적 대상으로 인식한다.
사진은 작가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곰팡이를 입힌 조형물이 최종 작품은 아니다. 그것은 사진으로 찍히기 위한 중간 단계일 뿐이다. 최종 작품은 사진을 통해 완성된다. 작가가 사진을 매체로 택한 이유는 우선 사진이 그로테스크한 오브제를 어떤 매체보다도 실제처럼 재현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진은 조명을 통해 곰팡이를 실제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미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진은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많이 사용한 확대의 효과를 제공한다. 곰팡이는 촬영 과정에서 렌즈를 통해 확대되고 프린트 과정에서 대형 프린트를 통해 다시 한 번 확대된다. 사진은 또한 곰팡이처럼 불편한 대상을 마주할 때 느끼는 두려움을 완화하고 곰팡이의 최고의 모습만을 선명하게 확대하여 관객의 눈앞에 제시한다.
최근에 작가는 정지된 사진에서 보여주지 못한, 시간의 흐름에 따른 곰팡이의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 영상 매체를 도입했다. 대표 작품이 시간의 압축기법인 타임랩스를 사용한 <인식의 역전(Reversal of Cognition)>(2015)과 시간의 확장기법인 초고속 촬영기법을 이용한 영상 <그의 의지(His Will)>(2015)이다. 이 두 영상을 통해 작가는 인간의 눈에 비가시적이고 비현실적인 시간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비현실적인 시간 속에서 곰팡이가 펼치는 낯선 풍경을 표현한다.
2006년부터 10년에 걸친 윤진영의 전체 작품을 관통하는 중심축은 무엇일까? 그것은 현대예술의 핵심 경향인 ‘경계의 미학’이다. 작가는 그로테스크에서 출발하지만 결코 그 테두리 안에 머물지 않는다. 작가는 대신 그로테스크의 다른 면을 들춰내고자 한다. 작가는 서로 모순되는 대립항의 공존과 경계에 환희한다. 기괴함과 평범함, 추함과 아름다움, 부패와 발효, 불쾌와 쾌, 죽음과 삶의 공존과 경계에 열광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그로테스크에 대한 ‘인식의 전환’ 혹은 ‘우월의 역전’을 촉구한다. 그것은 결국 가치의 변화무쌍함과 인식의 확장을 의미한다.
하지만 윤진영이 그로테스크를 통해 추구하는 것은 ‘인식의 확장’보다 훨씬 근원적인 주제이다. 작가는 그로테스크에서 인간의 죽음의 징후를 보고 인간의 유한성을 재확인한다. 인간의 운명적인 한계를 자각한 작가의 시선은 인간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 혹은 미지의 세계인 ‘초월’의 세계를 향한다. 그리고 그 세계에 존재하는 무한한 것, 절대적인 것, 혹은 신앙심을 지닌 작가의 표현대로 ‘그[신]의 의지’를 추구한다. 결국 윤진영의 작품세계는 현대예술에서 중심 화두인 경계의 미학, 모호함의 미학, 비가시의 미학, 초월의 미학이 서로 교차하는 ‘그곳에’ 존재한다.

윤진영 (6)

< Reversal of Dominance 101 > Digital C Print 187×150cm 2015

윤 진 영 Yoon Jinyoung
1969년 태어났다. 연세대 생물학과와 홍익대 대학원 사진디자인과, 애리조나 주립대 사진학과, 홍익대 대학원 사진학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지금까지 총7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한국을 비롯 미국 등지에서 열린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제37회 중앙미술대전 대상(2015), 제7회 일우사진상(2016)을 수상했다. 현재 백석대 디자인영상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서울에서 작업하고 있다.

NEW FACE 2016 신정균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찾아서

“군대 전역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군대를 소재로 작업하냐?” 한국의 분단 현실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온 작가 신정균은 지인들에게 종종 이런 핀잔을 듣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전역 이후에도 1년에 한 번 예비군 훈련을 받고, 몇 년 전에는 훈련장에서 누군가 옆 사람을 총으로 쏴버려 큰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운이 좋아 다행이지 죽은 사람이 작가 자신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었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 중에서 분단 현실에서 자유로운 이가 누가 있을까?
첫 번째 개인전 <발견된 행적들>은 사회적 맥락과 과거의 교육 속에서 자연스럽게 내 안에 자리 잡은 이념의 실체를 직접 찾아보려는 시도였다. 아트스페이스 오에서 열린 두 번째 개인전 <알 수 없는 일>(2.12~27)은 자신에서 확장해 주변 사람들과 함께 일상에 작동하는 이데올로기를 찾아보는 과정에 해당한다. “제가 속한 세대는 윗세대처럼 6?25전쟁이나 민주화운동을 직접 겪지 않고 피상적으로 접했습니다. 그래서 뚜렷한 이념이 없는 것 같지만 일상과 주변에서 목격되는 일련의 사건들과 결코 동떨어있는 것은 아니죠.”
이번 전시에서는 간첩 식별요령을 토대로 작가가 만든 ‘작업 매뉴얼’이 전체적인 틀이 되었다. 작가는 매뉴얼대로 행하면서 남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고, 남들도 그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지만 사실 하나하나 뜯어보면 특별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전시장 한 켠에 설치된 방 <Numbers Station>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나열된 물건들은 일상에서 마음만 먹으면 구할 수 있는 것으로 특별한 개연성 없이 한곳에 모아놓은 것이지만 마치 간첩으로 추정되는 누군가의 은신처처럼 보인다.
작가는 한국 사회에서 금기시된 것과 아닌 것이 사실은 한 끗 차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그의 작업은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인식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오해를 받거나 불편한 지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작가는 이데올로기를 찾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를 몸소 체험한 셈이다. 작가는 특유의 재치로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경계를 교묘하게 넘나듦으로써 그 실체를 드러낸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재)번역된 시)>에서는 한국과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그대로 표출한 리창식의 시가 프랑스어로 번역되고 한국어로 재번역되는 과정을 거치며, 몽환적인 영상과 함께 프랑스 여인의 낭만적인 목소리로 전환돼 원래의 선동적인 문구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자아냈다.
전시가 열린 당시 때마침 북한의 핵 개발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인해 남북의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경색 국면을 치닫고 있었다. 작가는 졸업전 때는 연평도 포격 사건이 터졌고, 첫 개인전 때는 통합진보당 이석기 사건이 일어났다며 어찌 보면 한국 사회에서 늘 있는 일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일상의 풍경을 작업으로 다루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단다. “제가 하는 작업이 때로는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제가 이 작업을 계속하는 이유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전쟁은 곧바로 그 정체를 드러내진 않지만 일상 속에 늘 내재되어 있어요. 그런 것들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도 없지만 잊고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슬비 기자

신정균
1986년 태어났다.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2013년 송은아트큐브에서 <발견된 행적들>을 시작으로 2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스페이스 K,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단체전과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 <유타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 등에 참여했다. 2014 일현 트레블 그랜트 특별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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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최전방> HD 비디오, 3분40초 2015 <(재)번역된 시> 텍스트에 시트지, 가변설치 2016

 

NEW FACE 2016 황효덕

견고한 껍질을 깨다

“상상했던 것이 마침내 손으로 잡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머릿속으로 상상해본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얻게 되는 만큼 사라져 버리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황효덕의 작가노트를 읽으면 상상하는 바를 이룩하지 못한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나오는 것 같다. 적어도 그를 만나기 전에는 그런 아쉬움이 작가가 작업을 좀 더 정교하고 치밀하게 구상하고, 제작하게 하는 동력이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웬걸! 황 작가는 상상하던 바의 완벽하고 견고한 구축이 오히려 더한 구속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무언가를 만들 때, 이미 만들어진 것들은 대부분 견고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모양새로부터 도망칠 곳을 찾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전 그 견고한 형상들로부터 도피처를 만드는 것 같아요. 잘게 나누거나 변형시키거나 우회한 방법들로요. 그리고 그 과정들을 발견하는 것이 제가 작업을 진행하는 에너지가 되는 것 같아요. 그것들은 또 서로 영향을 미치며 유기적인 연관성을 만드는 것 같아요. 그것이 흥미롭고요.” 그렇다면 작가에게 완전체로서의 견고한 작업 구축은 안락함에 안주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 보인다.
작가가 취하는 재료는 매우 저렴한 것들이며 심지어는 폐품이나 페기물에 가까운 것들이다. <Cave>(2013), <Sralasso>(2014), <흐르기 위한 수집> (2015) 등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이 작업이 전시된
장소에서 발견한 것으로 보이는 재료로 제작한 작업이다. 황 작가는 공간에 대해 어떤 오브제를 발견하는 곳이
아닌 그 자체로 재료라고 설명했다. “공간은 기본적으로 작업을 하면서 다루어야 할 대상이며 동시에 공간 자체로서 설치의 재료가 되기도 합니다. 그 장소에 있었던 물건이 그대로 공간에 사용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어요. 작업을 진행하면서 그 공간에 놓이게 될 것들과 서로 영향을 주지요.”
최근 황 작가는 영상을 매체로 활용하고 있다. 그의 작업의 생각과 개념은 어느 정도 작가의 설명을 요구하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생각을 이야기 한다는 의미를 작업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그렇다면 그 부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설명은 필요하면 어디에서든 요구 받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설명이라는 것이 참 어려울 때가 많아요. 어떤 것은 설명 못하는 경우도 분명 존재해요. 영상매체를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대부분 기록의 편의성 때문이었습니다. 최근 작업들은 단발적 실험들을 통해 진행되고 있는데 대부분 신체 또는 행동이 동반된 경우가 많았고 그것을 도큐멘트할 수 있는 매체 중 가장 효율적인 것이 영상기록의 방식이었습니다.” 매체가 작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아주 국한적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황 작가는 지인들과 ‘초단발활동’이라는 명칭의 모임을 만들어 참여하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최근 열린 <서울바벨전>에도 참여한 바로 그 모임이다. “참여작가들은 서로 작가임과 동시에 최소한의 소비자(관객)가 됩니다. 관심분야, 매체도 다르죠. 어떤 작가는 작업을 통해서 사회적인 이미지를 다루는 반면에 어떤 작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을 다루어요. 초단발활동은 팀은 아니에요. 오히려 스터디모임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종종 해요. 불특정 공간에서 만나 ‘무언가’를 진행합니다. 그리고 서로의 작업을 감상한 글과 함께 아카이빙을 하죠.”
작가는 학부 시절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단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실성이 있어야 할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황효덕 작가. 아마 그의 대답은 특정 작업을 통해 종결의 형태로 나오기 보다는 당분간 지속할 온도와 연관된 작업을 통해 의문형으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거 왜 하고 있는 걸까?”
황석권 수석기자

황효덕
1983년 태어났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수료했다. 2013년 <Pink a Day> 제하의 첫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Portfolio for Future>(갤러리 화이트블럭, 2014), <Paperback Writer, Paperback Artists>(테이크아웃드로잉 치읓, 2015), <서울바벨>(서울시립미술관, 2016) 등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현재 서울에서 작업하고 있다.

 나무 PVC파이프 물 워터펌프 2015

< Pisces-Pieces > 나무 PVC파이프 물 워터펌프 2015

NEW FACE 2016 윤병주

거리 두고 다가가기

영화 ‘마션’은 주인공 마크 와트니가 화성 탐사 중 혼자 화성에 남아 고군분투하는 생존기를 담았다. 영화는 지구에서 가장 ‘화성스러운 곳’ 요르단 와디럼(Wadi Rum)사막에서 화성의 모습을 촬영해 스크린으로 옮겨와 관객의 눈을 속였다. 영화 ‘마션’이 화성(火星) 재현의 극대화를 실현하기 위해 화성과 유사한 분위기를 내는 지역을 선택했다면, 작가 윤병주는 경기도 화성(華城)을 가장 화성(火星)답게 덧입혔다. 〈화성 연작〉은 화성(火星)을 탐사하는 방식으로 기록한 경기도 화성(華城)의 모습을 담은 작업이다. 뒤늦은 나이에 미대에 진학한 작가는 대학 입학 후 4년간 다양한 변주를 통해 이 연작을 이어갔다. 작가에게 경기도 화성은 살인 사건으로 얼룩진 위험한 이미지, 도시개발로 파헤쳐진 공사 현장이 주는 삭막한 분위기로 짙은 어두움이 드리운 듯 느껴졌다. 그는 ‘화성’이라는 동음이의어로 언어·시각적 유희의 옷을 덧입혀 경기도 화성의 장소적 맥락을 잘라냈다. ‘쿨한’ 접근법으로 시작한 이 작업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를 거듭했다. 헬리캠을 이용해 화성 공사 현장을 촬영한 〈The Face〉는 공사장을 일순간 화성(火星)의 표면으로 보이도록 했다. 실시간 영상 〈Mark on Hwaseong〉은 전시장 빈 벽에 화성을 탐사하는 작가를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실존의 공간을 가상의 공간으로 꾸미고, 허상으로 변환한다. 카메라의 눈을 통하면서 작가의 위치는 자신이 경험한 일상의 공간에서 점차 멀어지고 감정적 개입은 최소화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지역을 표현하면서도 일상의 면면은 다큐멘터리처럼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작업으로부터 거리 두기를 시도하는 작가의 태도는 〈우사단〉에서도 나타난다. 이태원은 이슬람사원을 중심으로 중동아시아 사람이 다수 거주하면서 자주 오가는 곳이다. 이국적인 인상의 사람들에게 사회는 낯섦으로부터 비롯한 선입관을 갖고 대한다. 그러나 해외 생활과 잦은 이주를 경험한 작가는 ‘다름’에 대한 내성이 있는듯하다. 사진에 콘트라스트를 강하게 주고, 암울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 속에서 관객은 익숙한 사회적 감정을 극적으로 느끼게 된다. 작가는 “그러한 감정적 동요를 느끼는 순간 언론매체의 영향으로 어떠한 정보도 없는 사진 속 인물에 과도하게 동정어린 감정을 부여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묻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는 오히려 겉으로 드러내어 말하기를 터부시하면서도 만연한 사회적 편견을 몽타주로 극대화해서 자조적인 질문을 유도한다. 작가가 사진으로부터 거리를 둘수록 보는 이는 사진 속 인물과 거리를 좁힐지도 모른다.
작가는 지난 3월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화성과 이별을 고하고 새로운 작업을 향해 내딛는 첫발이다. 아르헨티나 역시 작가가 거주했던 곳이다. 그곳에서 어떤 작업을 펼칠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현장에서 부딪치면서 그만의 ‘쿨함’으로 풀어낼 내용이 ‘핫’하게 기다려진다.
임승현 기자

윤병주
1984년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 사진과를 졸업했고 서울과학기술대 조형예술대학 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2014년 스페이스 윌링앤딜링과 송은아트큐브에서 개인전을 열고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13년 박건희 문화재단 미래작가상을 수상했고, 2014년 제26회 중앙미술대전, 송은아트큐브 전시지원 작가에 선정됐다.

〈 Mark on Hwaseong _Live Broadcast 〉 싱글채널 비디오 36분 45초 2014

〈 Mark on Hwaseong _Live Broadcast 〉 싱글채널 비디오 36분 45초 2014

 

NEW FACE 2016 채온

“저는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캔버스 위를 지나간 붓놀림에서 무심한 듯 무심하지 않은 섬세함이 느껴지고 한편으론 어린아이의 장난 같은 천진난만함이 묻어난다. 그렇다고 마냥 가벼워 보이는 그림은 아니다. 그건 아마도 작가 채온의 작업이 오랜 시간 품어온 막연한 두려움을 용기로 맞바꾼 결과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노트에 여러 번 등장하는 ‘두려움’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했으나 “그림을 그리고 나면 내면에 쌓아 두었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해소”된다고 말한다. 그리는 행위가 그에게는 두려움을 극복해가는 과정인 것이다.
요즘 젊은 작가들이 영상, 미디어, 설치작업으로 기우는 경향이 뚜렷한 가운데 그는 회화를 본인에게 가장 적합한 매체로 꼽는다. 이는 자신의 내면 풍경을 표현하는 그의 작업 태도와 일맥상통한 점이기도 하다. “확장이란 개념이 반드시 매체를 통해 이뤄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회화 안에서도 그것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고 봅니다”라는 그의 말에서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고집이 느껴졌다.
투박한 붓 터치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화면은 작가가 얼마나 재빠르게 형상을 그렸는지 짐작게 한다. 그는 그림에 손을 대면 댈수록 맨 처음 느낀 감정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러한 즉흥성은 그가 작업의 소재를 선택할 때에도 발휘되며 작품의 주제도 공론화된 사회, 정치 얘기가 아닌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에서 찾는다. 예를 들어 인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하면 그를 스쳐간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캔버스에 옮긴다. 〈강한 사람〉, 〈두 얼굴〉, 〈보통 여자〉 등 제목은 완성된 형상을 보고 떠오른 것으로 정한다. 때로는 오랜 투병 생활 끝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내가 그린 꽃1〉이 그것이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으나 이 부분이 오히려 누군가와 깊이 교감하는 접점이 된다. 따라서 그에게 제목은 작품을 마주한 찰나의 순간을 기록한 일기인 셈이다.
하지만 특정한 대상 없이 형상을 그리고, 세상일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 그를 ‘현실에 무관심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다소 성급한 판단일 듯싶다. 오히려 기자가 만난 작가는 주변 환경과 사람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되새기게 하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고 많은 영감을 받았다는 언급에서 그의 그림이 채도가 낮은 색상으로 그려졌음에도 왠지 모를 따스한 느낌을 주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작품을 보고 난 후 주변의 호응이 작업을 하게 되는 원동력이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전해졌다.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긍정적인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전시 제목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말을 듣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떠올랐다.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라는. 마음을 다듬는 자기 훈련과정을 거친 뒤 그가 어떤 작업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곽세원 기자

채온
1985년 태어났다. 한남대학교 조형예술대를 졸업했다. 2013년 산토리니 서울에서 열린 〈프로젝트 스페이스전〉을 포함해 5차례 개인전을 열었으며 대구미술광장 창작스튜디오, 가창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로 활동했다. 2015년 서울예술재단 포트폴리오 박람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표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Endeavorer전〉 전시광경

표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Endeavorer전〉 전시광경

SPECIAL ARTIST 신학철

40-001

<한국현대사-갑돌이와 갑순이> 캔버스에 유채 122×200cm(각, 총16점) 1998~2002 마로니에미술관에서 열린 <신학철-우리가 만든 거대한 (像)전>(2003.11.21~12.21) 전시광경

엄혹한 시절, 작품으로 시대를 정의했던 작가가 있다. 혹자는 그의 작품을 “당대 민중운동의 공간 속에 가장 우뚝 높이 걸린 제단화”에 비유했다. 신학철은 그 제단화를 걸기 위해 시대가 발한 소용돌이에 기꺼이 투신했고, 그것은 필자의 말대로 “죽임의 현실”로 들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작업은 시대가 낳은 ‘괴물’ 앞에서 성호를 긋거나 십자가를 들이대는 사제의 종교적 행위와 같다. 지금도 신학철은 시대에 대해 순수하게 분노하며 작업을 통해 그 감정을 스스럼없이 보여준다. 이제 신학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대해 시대가 답할 차례다.

신의 소리, 넋이 하는 말

김종길 미술비평

“철학자들은 창조적인 손으로 미래를 붙잡는다. 이때 존재하는 것, 존재했던 것, 이 모든 것은 그들에게는 수단이 되고 도구가 되며 해머가 된다. 그들의 ‘인식’은 창조이며, 그들의 창조는 입법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중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사이, 신학철의 회화적 현실은 ‘일하는 노동자’ 화가로서 “내가 섬기는 것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것”의 재인식으로부터 다시 시작되었고1 그것은 구체적 현실에의 응전이었다. 그 응전의 결과로 ‘근대사 연작’을 새겼다. 1981년 <한국근대사-3>을 <방법전>(1981,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 첫 출품했을 때 그는 1970년대 A.G의 개념미술 작가가 아니라 화가로서 현실의 앞뒤를 꿰뚫어보는 사제였다.2 그는 A.G 시기를 회억(回憶)하며 “나 혼자 공중에 떠 있었다”거나, “현실과 관계가 없으니 공허했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다가 “현실계로 내려왔다”고 했는데 그 말이 내게는 ‘신내림’으로 읽혔다.3 그것은 ‘개념적 상상계’에서 ‘비판적 현실계’로의 미학적 신내림일 것이다.
그의 비판적 현실주의 미학은 1970년대 후반의 <피난길>(1978)과 같은 작품들에서 시작되어 포토콜라주로 완성된다. 1980년의 <묵시> 연작, <여인> 연작, <상황> 연작 등이 그것인데 그의 포토콜라주 양식은 근대사 연작에 반영되었다. 미학에서 포토콜라주는 환상과 풍자를 표현하는 효과적 장치다. 그렇다면 신학철의 작품에서 환상과 풍자의 미학은 도시 샐러리맨들의 목에 검은 구두를 세워서 콜라주하거나(<묵시-802>), 푸른 술병의 목에 자본주의 상품들을 머리로 붙인 뒤 부릅뜬 눈을 콜라주 하고(<묵시-801>), 성의 상품화 또는 과도한 자기애적 욕망을 광고 이미지로 콜라주한 것들에서 생생하다.
샤먼리얼리즘은 샤먼의 눈으로 꿰뚫는 지금 여기의 현실주의 미학인데, 그의 작품들에서 자본주의를 꿰뚫는 ‘눈’이 발견된다. 동아시아인들에게 현실은 언제나 눈앞의 현실이면서(前景), 동시에 눈 뒤의 초현실을 마주했다(後景). 보는 현실은 물론이요, 보이지 않는 초현실을 맞붙여서 사유해 왔던 것. 그의 미학적 구조에서 현실이 풍자라면 초현실은 환상이다. 나는 그것을 ‘우물구조’로 이해한다. 우물면의 위가 현실이고 우물면 아래의 심연이 환상인 셈. 자, 그렇다면 위아래의 두 세계가 접점을 이룬 우물면은 무엇일까? 나는 바로 그 지점이 신학철의 샤먼 미학이 터지는 ‘생성지’라고 생각한다.
그가 섬기는 미학적 ‘현실’은 눈앞의 비루한 현실에 엉겨 붙은 그림자들이다. 그림자는 우물 밑에 존재했다. 그의 우물은 우물면을 형성하는 ‘시대현실’과 그 현실로 표상되어 올라 온 숱한 과거의 ‘서사들’로 이뤄진다. 그는 역사의 그림자에서 현실의 실체를 역추적 하듯 우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처음 보았던 우물 속의 실체는 《사진으로 보는 한국 100년, 1876~》4에 실린 흑백의 이미지들이었다. 그 이미지들의 끊어진 서사와 사건을 꿰매는 방식으로 그는 콜라주하고 몽타주했다. 사진이라는 오브제는 그가 굳이 외쳐 말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근현대사의 형상과 그림자가 차고 넘쳤다.
그림자(後景/幻想)의 시간은 직선도 회귀를 반복하는 나선형도 아니다. 하나의 후경에는 몇 개의 직선과 곡선과 나선형이 몽타주로 펼쳐진다. 고구려 벽화에서 보듯이 장면들은 불일치하고 연속되지 않으며 사건들만 남아서 무질서를 이룬다. 일관성이나 통일성, 장면 구성의 치밀함, 사건의 기승전결 따위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현실은 일관되지 않고 삐죽거리듯 튕겨나가며 예고 없이 불쑥 튀어 오르는 사건들로 진창이다. 샤먼 미학의 사제로서 신학철은 그런 초현실과 비현실의 그림자를 현실에서 이어붙이는 영적, 미학적 실험을 해왔다. 왜? 바로 그것이 또한 삶으로서의 지극한 현실이요, 초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그림을 ‘잡설이나 논설 또는 소설’이라 했고, ‘공격목표를 향한 무기’라고 강조했다.5
공격과 무기의 언어로서 그의 회화는 샤먼의 공수라고 할 수 있다.6 잡설로, 논설로, 소설로 터지는 그의 ‘설(說:회화)’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예술(藝術)의 본래적 ‘뜻/상징’을 상기시킨다. 예술은 기예와 학술의 ‘예’와 ‘술’을 따 붙인 것이다. 예술의 몸은 ‘예(藝)’가 본래 뜻하는 ‘심다, 기예, 궁극’의 생태성?창조성?철학성이 술(術)로 드러나는 실체적 ‘환(幻)’이다. 그의 작품에서 종종, 아니 가로 20미터의 거대한 <갑돌이와 갑순이>(1998~2002)에 등장하는 “군사기갑시설과 공장의 중간쯤 되는 불길하고 그로테스크한 느낌의, 거대한 기계 구조물들과 그 사이사이에 배치된 민중들의 소용돌이”(성완경)는 ‘술의 환 이미지’로밖에는 해석할 방법이 없다.
20세기 서구 모더니즘의 유입으로 동아시아의 예술은 ‘예’만 강조하고 ‘술’은 괴이하게 생각하거나 미신 따위로 몰아버리는, 그러니까 유물론으로서 ‘작품’이라는 ‘예’의 물성에 사로잡힌 꼴이 되었다. 초현실과 비현실의 샤먼미학은 완전히 저급하고 저속한 것 따위의 문화로 치부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술’이 없이 어떻게 예술작품의 판타지가 가능하고 영적 교감이 가능할 것인가? 신학철의 회화는 술(사건/서사/作)로서 예[品]를 완성하는 놀라운 전환이다. 작품은 예를 앞세워서 술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술을 일으켜서 예에 이르는 투쟁이다. 그 사실을 신학철의 회화에서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를 통해서 ‘술(術)’이야말로 21세기에 다시 호명해야 하는 ‘창조술’의 다른 이름이요, 공자(孔子)가 그토록 싫어했으나 일연스님이 《삼국유사》 들머리에서 꺼내든 ‘괴력난신(怪力亂神)’의 미학이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자, 그렇다면 ‘술의 환’이라는 이미지의 실체는 무엇일까? 성완경은 그것을 “기계-야수, 그리고 남근적 에로티시즘”7이라 했고, 김윤수는 “우리의 근대사가 상처투성이요 몸부림치는 거대한 육체로서, ‘마성을 띤 존재’”8라 했으며, 심광현은 “한국 근?현대사의 트라우마”라고 했다. 그런데 작가는 인터뷰에서 “기(氣)의 에너지”, “올라가는 것”, “표적을 향한 화살”과 같은 말로 그것의 실체를 표현했다. 세 평론가의 비평언어는 현상학(성완경, 김윤수)과 심리학(심광현)에 바탕을 둔 해석이다. 실제로 신학철의 회화들에서 불끈 솟은 듯이 보이는 ‘남근적’ 형상과 괴물처럼 보이는 마성의 이미지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트라우마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그가 “모든 사물들이 내가 아닌 관념이나 외부적인 것의 영향에 의한 베일”로 보이고 급기야는 “대항하기 힘든 괴물로 둔갑해버렸”을 때, “높은 산정에서 내려와 현재 속에서 나 자신을 던져야겠다”고 다짐했던 그 시대로 돌아가 ‘신학철’이라는 한 작가가 보았던 통시적 ‘현재’를 재사유할 필요가 있다.9 동학에서 식민지, 미군정, 6·25전쟁, 이승만 자유당 독재와 4·19혁명. 5·16군사정변, 그리고 1970년대의 유신독재와 1980년대 신군부 독재를 살아야 했던 현실을. 게다가 자본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세계화로 이어진 디스토피아의 현실이었고 그것은 또-한 늘 죽임의 현실이었다. 신학철의 회화 바탕은 그런 모순의 한국적 현실이 핵심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용오름(혹은 용솟음)의 구조로 형상화 되었다.
옛 동아시아 북방 샤먼의 머리에는 사슴뿔 관이 있었다. 진인(眞人)이 된 부처는 사슴벌에서 첫 설법을 터트렸고 반야세계로 가는 용배[般若龍船]를 만들었다. 용의 뿔은 사슴뿔이어서 사슴과 용은 동일한 상징으로 만난다. 동아시아에서 ‘사슴용’의 상징은 치유의 굿판을 벌이는 샤먼이다. 그와 인터뷰하기 위해 작업실을 찾았을 때 그는 광주항쟁을 형상화 한 ‘진혼굿’을 그리고 있었다. 오월의 넋들이 한 덩어리로 뭉쳐서 용솟아 하늘로 솟아오르는 형국이었다. 별(星)-빛(光/明)-사슴(鹿)이 모두 용(龍/미르/은하)의 상징과 만나고 그것이 ‘빛’을 은유한다는 측면에서 신학철의 회화는 새롭게 재사유되어야 한다.●

리얼리즘_가나 (21)

<한국현대사-초혼곡>(왼쪽 두번째) 캔버스에 유채 244×122cm 1994

신 학 철 Shin Hakchul
1943년 태어났다.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1969년부터 1975년까지 <AG전>에 참여했으며,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서울방법전>에 참여했다. 1987년 그림마당 민에서 열린 민미협 주최 <제1회 통일전>에 출품한 <모내기>가 국가보안법에 위반된다는 혐의로 구속되었고, 2000년 사면복권됐다. 제16회 금호미술상(1999), 제1회 민족미술상(1991), 제1회 미술기자상(1982) 등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에서 작업하고 있다.

1 이 글에서 인용한 신학철의 ‘말’은 별도의 괄호표시가 없는 한 <오늘의 작가연구/신학철>(《계간미술》, 1983년 겨울호)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2 신학철은 당시 작가노트에 “나는 누구를 위하여 일하는 노동자이고 싶다. 즐김, 그 자체를 위해 그리기보다는 내가 섬기는 것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것”이라고 적었다.
3 올해 1월 15일 밤, 서울시 동대문구 장안동 자택에서 2시간가량 인터뷰를 진행했다.
4 동아일보사에서 1978년 11월에 발간한 책이다.
5 작가노트에서. “나의 그림은 잡설이나 논설 또는 소설이다. 달콤하거나 씁쓸한 맛과 같은 것을 즐기려는 것도 아니고, 고상한 척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공격목표를 향한 무기가 되었으면 할 뿐이다”가 전문.
6 1월 15일 밤 인터뷰에서 작가는 “표적을 향한 화살”이라는 말을 했고, 심리적 풍경으로서 내면적 리얼리티일 터인데 자신의 회화는 전달하려는 이야기가 명확하다고 강조했다.
7 성완경, <삶의 폭력성을 보는 두 시선>, 경기도미술관 기획전 <사람아, 사람아-신학철과 안창홍의 서민사전>에서 재인용.
8 김윤수, <일상과 역사에 대한 충격적 상상력>(《계간미술》, 1983년 겨울호, 111쪽)
9 나의 새로운 시도는 하나의 회의에서 출발했다. 모든 사물들이 내가 아닌 관념이나 외부적인 것의 영향에 의한 베일을 통하여 보여졌으며 그러한 감각에 의하여 작품이 이루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생각이 점점 뚜렷해졌고 현실화되었으며 마치 대항하기 힘든 괴물로 둔갑해버렸다.… 이젠 외진 곳에서 내면의 심연 속에서 그리고 높은 산정에서 내려와 현재 속에서 나 자신을 던져야겠다. 진정한 작가는 몸담고 있는 생활터전의 장소적 시간적 공간의 삶에 충실해야 하며, 역사적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사랑이 있어야 하고, 장소적 시대적 공감의 언어감각을 통해서 표현(이야기)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인간의 삶에 보다 가깝게 접근하는 것이고 이것은 영원으로 통하는 순간이다. 이것이야말로 자기의 삶을 확인하는 것이고 삶을 사는 예술이 되는 것이다.

ARTIST REVIEW 정정엽

여성의 삶을 주제로 일관된 작업을 선보인 작가 정정엽은 1980년대 <두렁> 멤버로 민중의 삶을 성찰했으며 이후 여성주의 미술 운동을 이끌면서 여성의 노동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자기 갱신을 거듭해왔다. 갤러리 스케이프에서 열린 <벌레전>(1.21~2.27)에서는 싹, 나물, 벌레 등 미약하고 징그럽게 보이는 사물에 내재된 특유의 생명력을 포착해 이를 시각화한 신작을 선보였다.

경험하는 그림의 정치

김강 미술가, 미학 연구자

현대미술에서 작품 생산자나 감상자 모두에게 ‘보는 것’ 즉, ‘시각적 경험’은 중요한 문제이다. 전시장은 ‘전시’가 제공하는 시각적 경험의 각축장이다. 전시장은 ‘보이는 것’에 대한 감각의 분배가 일차적으로 예술가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증거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어떤 것은 가시성의 영역에 남아 우리에게 시각적 경험을 주고, 어떤 것은 보이지 않기에 경험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존재하고 있으나 보이지 않는 존재. 시각적 경험의 층위에서 감각되지 못하는 존재. 망각되거나 삭제되는 존재. 존재들의 분할과 배치 혹은 식별은, 전시라는 시각적 경험의 장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이러한 사태를 전시라는 작은 메커니즘이 아니라 ‘사회’로 확장해보면 어떨까?
현대사회에서 존재하는 것들에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 질서는 과연 타당한가. 정정엽은 2016년의 개인전 <벌레>를 통해 이런 질문을 던진다. 2016년 1월 21일부터 2월 27일까지 삼청동의 스케이프갤러리 전관에는 나방, 싹이 난 쭈글쭈글한 감자, 썩은 과일 등이 28점의 캔버스에 그려져 전시되었다. 정정엽이 2011년 안성의 시골로 작업실 겸 살림집을 옮긴 이래 마주친 것들이다. 사소하고, 쓸모없는 것들. 도대체 이것들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나방은 나비와 달리 환영받지 못하는 벌레일 뿐이고, 싹이 난 감자는 단 한 끼 식사에도 도움이 안 되기에 버려지며, 생채기가 난 과일은 상품으로 팔 수 없다.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지 못해 현대자본주의에서 기어이 폐기되는 존재들. 정정엽은 이 폐기되는 존재들, 즉 우리의 시각성의 영역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다시 ‘시각의 영역’으로 불러들였다. 줄리앙 크리스테바는 자신의 저서 《공포의 권력(부제:아브젝시옹(abjection)에 관한 에세이)》(1980)에서 더럽다고 여겨지는 것들, 늘 배제되고 추방되는 존재들, 체제 또는 관념이 밖으로 밀어내려는 존재들을 ‘아브젝트(abject)’로 명명한 바 있다. 정정엽에 의해 포착된 아브젝트들은 대형 화면 위에 여왕과도 같은 자태로 징그러운 속살을 드러낸 나방으로, 세련된 도시의 건축물 실내외를 부유하는 싹 난 감자들로, 혹은 다 썩어빠진 과일로 우리의 시각을 붙잡는다. 자본주의적 식별의 질서에서 추방되었기에 보이지 않던 존재들이 ‘보이는 존재’로 돌아왔다.
그러나, 정정엽의 아브젝트가 단순히 현 질서의 대립물로 설정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브젝트를 실재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가시성의 영역으로 등장시키는 정치를 펼치고 있다. 정정엽에 의해 선택된 아브젝트들이 그림을 통해 시각화되면서, 기존의 질서가 중단되고, 랑시에르가 언급한 ‘정치’가 발생한다.
1980년대 두렁과 함께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로 정정엽은 ‘노동’, ‘여성’, ‘살림’, ‘일상’ 등을 우리의 시각 안으로 불러 모았다. 1980년대 ‘두렁’ 활동을 하면서 ‘노동’을 화두로 삼아 그림을 그린 것은 ‘노동’이 그 시대의 ‘아브젝트’였기 때문이지 않을까. 시대의 아브젝트였던 노동자들은 베르그송이 《창조적 진화》(1907)에서 언급한 생명의 도약을 이루는 근원적인 힘인 ‘엘랑 비탈(elan vital)’로 사회 전체를 뒤흔들었다. 억압받던 존재들이 스스로 자신의 근원적인 힘을 분출시키며 사회혁명을 도모하던 시절, 정정엽은 스스로 노동자가 되어, 그 한가운데서 생명감의 봉기를 그림으로 보여주었다. 캔버스에 그려지던 그림들은 노동 현장에서 대형 걸개그림으로 변환되고, 개인 이름은 ‘두렁’이라는 집단의 이름 속에 익명이 되었다. 아카데믹한 그림은 만화로, 판화로, 포스터로 변주되고 노동자 교육의 교재가 되기도 하였다. 기존에 예술이라고 믿었던 것의 기준들은 의심되고, 예술일 수 없는 것들이 예술의 무대로, 가시성의 영역으로 등장했다. 사회가 들끓기 시작했고, 예술도 들끓기 시작했다. 그 들끓음의 한가운데서 정정엽은 ‘두렁’과 함께 그것을 주도했다. 당시의 들끓음이야말로 시대의 아브젝트들이 제 몸으로 존재를 증명하는 순간, 비등점을 넘어섰다.
1980년대의 아브젝트는 현재에도 여전히 아브젝트로 존재한다. 노동자는 더욱 미시적으로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시대의 아브젝트가 시각의 층위로 올라서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때 이미 세계는 그전과는 다른 감각을 분배한다. 정치의 장으로 재구성된다. 1987년 두렁이 산개(散開)하고 시대의 비등점은 허울 좋은 ‘민주화’에 의해 가라앉았지만, 정정엽은 또 다른 시대의 현장을 정치의 장으로 맞이한다.
1995년 이십일세기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 <생명을 아우르는 살림>에서 정정엽은 여성의 ‘노동’에 주목한다. 평온한 일상 속에서 애써 외면하고 싶은 아브젝트가 여성이자 여성의 노동이었기 때문일까. 일상에서 ‘여성의 노동’은 언제나 비가시적이다. 감추어진 노동, 배제된 노동, 안 보이는 노동, 무시하고픈 노동, 그 모든 노동이라는 단어를 수식하는 부정적 언어를 정정엽은 ‘살림의 노동’으로 다시 호출한다. <식사준비>와 <밥상>은 가족의 생명을 살리고 <어머니의 봄>은 콩, 팥, 나물 등 무수한 생명을 아우른다. ‘두렁’과 더불어 1990년대 초부터 여성미술연원회의 활동을 시작하면서, 정정엽은 여성인 자기 자신의 삶의 현장을 바로 자신의 작품과 정치의 현장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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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1>(오른쪽)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162×130cm 2016

식사준비l, 1995, oil on canvas, 162 x 372 cm

< 식사준비l > 캔버스에 유채 162×372cm 1995

변방과 중심 사이에서 춤추는 예술가
1998년부터는 ‘팥’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팥이 우리가 보는 그 모양을 갖추는 데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무수한 노동이 작용했다. 정정엽은 그 노동을 캔버스 위에 팥알 하나하나를 그려가는 자신의 노동으로 가시화했다. 2000년 그것들은 인사미술공간에서 열린 <봇물전>이 되었다. 2006년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지워지다전>에서는 이 사회가 지우고 있는 ‘존재’들을 본격적으로 다룬다. 오히려 멸종되는 존재. 노동, 여성에서 좀 더 시야를 넓혀 생명을 가진 존재 전반을 검토하면서 이 시대의 아브젝트를 발견한다. 정정엽은 ‘지구의 촉감’을 느끼며 ‘멸종’되어가는 무수한 생명체에 주목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많은 것을 생산하는 것 같지만, 많은 존재를 삭제해 나간다. 자본주의의 속도를 따라가지도 못하고, 제 쓸모도 증명하지 못하는 존재들. 전시장 벽면 전체를 가득 채운 다수의 드로잉에는 북극곰도, 도롱뇽도, 히잡을 쓴 여인도, 작가 자신도 얼굴이 지워진 채 등장한다.
2000년 종로점거 ‘아방궁(아름답고 방자한 자궁들)’ 프로젝트는 여성주의예술그룹 ‘입김’이 주최한 축제였다. 정정엽과 ‘입김’의 예술가들이 보여주려 한 것은 ‘여성’이라는 존재 그 자체이다. 한국적 가부장의 질서에서 배치되고, 분할되고, 이미지화된 여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존재 그 자체. 한국적 가부장제의 상징적 장소인 ‘종묘’에서 진행된 이 축제는 이씨 종친회 및 유림과 정면충돌했다. 존재 그 자체로서의 여성을 가시성의 영역으로 옮겨오자 한국사회의 가부장적 문화들은 폭력으로 대응했다. 이것은 분배의 권한을 행사하던 가부장 질서가 감추고 있던 것들이 사실은 여성이 아니라 자신들의 폭력이었음을 그 스스로 드러나게 한 사건이었다. 폭력적 대응은 재판으로 이어져 종국엔 ‘입김’의 승리로 끝이 났지만 보여서는 안되는 것들이 보이자마자 ‘보여줌’의 경계선을 결정했던 것들은 일제히 흔들렸다. 그 흔들림의 사건은 시각적 경험을 넘어서 우리의 감각 전체를 건드리며 정치의 경험을 가능케 했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정정엽은 1980년대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로, 줄곧 느끼고 성찰한 시대의 아브젝트들을 시각화해왔다. 20대의 정정엽은 대변자이기보다는 노동자이기를 원했다. 공장에서 전자기기 부품을 조립하며 사회 변혁과 예술의 관계를 고민하는 노동자-예술가로 살았다. 또한 여성미술위원회, 입김 등 여성주의적가들과의 소그룹 활동에서는 여성이자 예술가인 자신의 문제들을 시각화했다. 한국적 가부장질서와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어떤 존재인가. ‘모성’이라는 신화 속에서 ‘거룩하게’만 존재하는 모순적 타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존재 그 자체’를 가려버리는 이미지에 갇힌 여성을 현실 그대로, 존재 그대로 이 사회에 드러내길 바랐다.
타자를 대변하거나 재현하기보다는, 스스로 직접 경험한 현실과 자신의 삶의 현장을 시각화하는 정정엽은 매 시기 시대의 주류적 질서와 부딪히며 긴장을 발생시켰다. 노동현장 예술가, 페미니스트 예술가의 대표 작가로 지칭되던 정정엽은 2006년 아르코미술관에서의 초대전 <지워지다>를 시작으로 한국 제도 미술권의 영역으로 스며들었다. 갤러리에서도 초대전을 활발히 개최한다. 변방에서 중심으로 진출한 입지전적인 예술가인가. 이런 의문은 오히려 정정엽이 의도한 질문일 것이다. 정정엽에게 변방과 중심 사이에는 어떤 슬러시도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를 가르는 슬러시가 어떤 질서를 의미하는지 알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그것을 횡단, 교란하는 방법론을 선택한다. 정정엽은 그 슬러시 위에서 춤을 춘다.
정정엽은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보여줌으로써 전시장을 새로운 정치의 무대로 만들었다. 2016년 ‘전시장’에서 ‘벌레’와 춤을 추는 정정엽을 보았다. 그리고 우리도 조금은 들썩거렸다. 우리는 정정엽을 통해 갤러리라는 시각의 장에서 정치를 경험한다. 정정엽의 작업이 ‘경험하는 그림’인 이유이다. ●

정 정 엽 Jung Jungyeob
1962년 태어났다.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1995년 이십일세기화랑에서 열린 <생명을 아우르는 살림전>을 시작으로 12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서울, 제주, 후쿠오카, 시카고 등에서 열린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1980년대 ‘두렁’, ‘갯꽃’, ‘여성미술연구회’의 회원으로 현장미술 운동과 여성주의 미술 운동을 이끌었으며, 2000년에는 여성주의 그룹 ‘입김’의 멤버로 <아방궁 종묘점거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SPECIAL ARTIST 정동석

11)  신미에서경진까지.Project 1991-2000 [80] 경. 갑술2월

<신미에서 경진까지 Project [80] 경. 갑술2월> 1991~2000

17)  서울묵상.Contemplation in city 21-10

<서울묵상 Contemplation in city 21-10> 2001

정동석은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그룹 ‘현실과 발언’ 창립멤버 가운데 유일한 사진작가다. 그는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일관되게 이 땅의 풍경에 주목해왔다. 작품의 궤적은 분단현상을 비판적으로 드러낸 초기작 <反-풍경> 연작을 시작으로 1990년대 <신미(辛未)에서 경진(庚辰)까지>와 <서울 묵상>(2000~2001)을 거쳐 <밤의 꿈>, <가득 빈>, <마음혁명>, <묘행(妙行)> 시리즈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왔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사진작가 정동석은 대면한 세계와 불화하는 현상들을 사진이란 매체를 통해 용해시킨다고 주장한다. 또한 작가 자신의 ‘내면’과 ‘사진’을 통일시키려는 사유를 적극 실천한다는 점에서 정독석이야말로 이 시대를 대표하는 매우 중요한 사진작가임을 밝히고 있다.

삶의 말, 삶의 꿈, 삶의 꽃

김진하 미술비평, 나무아트 대표

정동석은 사진 ‘작가’다. 작가라는 말에 방점을 둔 것은 그가 사진으로 자신의 지향점을 증명하고 표현하는 사람임을 강조해서다. 사진을 찍는 게 작업이 아니라, 정동석 자신이 추구하는 세계와 만나는 매체가 사진이고 작업이라는 뜻이다. 정동석은 외부의 대상에 그의 미적 감성이 감응해서 사진을 찍는 경우는 별로 없다. 내면으로부터 느끼고 사유한 주제를 증명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외부의 소재를 사진 속으로 수용한다. 외부 세계보다는 그 세계를 마주하고 느끼고 인식한 주체, 즉 정동석 본인에게 내포된 서사를 사진이란 매체로 증명하는 데 무게가 실려서 그렇다.
이럴 경우 사진 속의 피사체는 작가의 의도를 가시화하기 위해 빌려온 질료나 기호의 기능을한다. 또한 기계적 메커니즘의 결과인 사진적 현상이나 효과도, 정동석에게는 작업의 부수적인 요소가 된다. 우선적인 것은 역시 그가 말하고자 하는 세계이며, 거기에 다다르기 위해 사진을 풀어가는 과정과 방법, 그리고 사진이란 매체에 대한 그의 인식이나 논리 등이 주목해야 할 포인트가 된다. 그러면 대상성을 우선시하는 일반적 사진과는 다르게, 작가 내부세계에 무게를 두는 정동석이 사진작업을 통해서 추구하는 궁극적 주제가 무엇인지 그의 작업 궤적을 편년(編年)적으로 돌아보며 찾아보자.
1970년대 후반, 서른 즈음의 정동석은 10여 년간 제작한 사진을 모두 불태웠다. 정확한 노출에 정교한 재현, 빛의 변화를 효과적으로 포착한 드라마틱한 시각효과, 스펙터클한 대상성, 실험적 암실 작업, 여타의 다큐 등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잘 찍은” 사진들이다. 20대 내내 명동의 외국잡지 서점 골목에서 거의 모든 현대사진을 탐독하고 섭렵하다가, 어느 날 자신의 작업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태워버렸다는 것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유명 사진가들의 작품은 결국 그들의 것일 뿐인데, “왜 여기서, 내가, 하필이면 남의 것을 열심히 보고 뒤따르려고 하는가?”란 생각이 들었다는 것. 그때까지 자신이 찍은 사진들이 그의 내부로부터 도출된 이야기나 관점이 아니라는 걸 자각한 것이다. 자신의 사진이 습관적으로 반복되고 유형화된 채로 교육받은 유명 사진가들의 스타일이나, 외국잡지에서 본 서구 사진가들의 아류가 아닌가하는 의심이 든 것이기도 하고. 내 것 또는 주체에 대한 성찰인 셈이었다. 그것은 곧 사진과 자신에 대한 통일된 인식의 바탕에서 독자적인 작업을 하겠다는 결심으로 연결된다. 패기와 도전과 의지가 교차하는, 이 젊은 반성이 그의 작업 궤적에서 가장 중요한 변곡점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지점이다.
몇 년 뒤인 1982년, 정동석은 ‘문화공보부’의 국정홍보물 게시판을 찍었다. <1982 in Seoul>이란 제목이 붙은 흑백사진 연작이다. 앞서 태워버린 사진들은 작품이 아니라 여겼으니, 이 사진이 그 스스로가 인정하는 처녀작인 셈이다. 화면에는 텅 빈 게시판만 있다. 각종 홍보물들이 항상 넘치도록 덧붙여지는 그곳인데, 상단의 강원도, 충청남도, 부산직할시… 등의 글씨만 무표정하게 붙어 있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런 말도 없는 공간, 정동석은 바로 그 ‘없음’을 찍은 것이다. 장면 자체로는 어떤 감각도 자극하지 않고 내용도 없이 무미건조하고 평범하다. 그러나 이 장면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느끼고 자세히 보게끔 만든다. 게시물이 부재한 이 게시판에서 5공화국 초의 시대상이 반영되어서다. 1980년대 초 언론통폐합 직후부터 벌어진 일련의 상황적 단서들이 거기에 있다. 급속하게 보급된 컬러TV 방송, 프로야구 창설 및 중계, 영화제작 지원 등의 3S정책으로 자신들의 군복에 묻은 핏빛 행적을 가리려던 군사정권의 행태. 급조된 대중문화의 방만해진 오락성과는 정반대로 집행된 언론통폐합, 보도지침… 등. 정동석은 그 빈 게시판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소통 과정에서 관객 스스로가 그 사진에 해석학적 접근을 하게끔 만든 것이다. 그것은 무력에 의한 검열과, TV라는 컬러 표백제로 탈색시킨 언론 통제의 맨얼굴이자, 그런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비판을 견인하는 정치적 메타포였다.
보통 다큐사진의 직접적 시사성이나, 현란한 예술사진의 모던함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이 사진은 내러티브를 이끌어낸다. 객관적 다큐와 주관적 작가주의의 경계를 무화시키면서 비판성으로 작품의 리얼리티를 확보한 것이다. 정치적 슬로건이 거론되지 않으면서도 사진의 역할과 자신의 발언이 정묘하게 결합되어 드러난 것. 이는 사진을 찍기 전에 설정한 “내게 사진이란 무엇인가?”, “나는 왜 찍는가?”, “어떤 목소리로?” 등과 같은, 자기 내부를 향한 회의를 통해서 확립된 사진에 대한 의식과 방법론이 그 바탕에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만약 정동석이 당대성과 자기 사진의 방법론과 정체성에 대한 개념적 이해를 연관하지 않았다면, 볼품없이 비어 있는 이런 게시판을 주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또 기존에 없던 이런 사진 언어를 남기지도 못했을 것이고.
이 작품을 제작하고 난 다음 해인 1983년 정동석은 ‘현실과 발언’ 동인에 가입한다. 사진계가 아닌 미술계로 데뷔한 것. 당시로서는 자기 문법으로 자유롭게 활동하기에는 사진계보다 미술계가 더 적합했던 모양이다. 제도화된 1970년대 미술계의 관념적 행태를 극복하면서 미술과 삶의 간극을 좁히려던 ‘현실과 발언’ 그룹과, 기존 사진계의 사진 전반에 대한 암묵적 카르텔과 카테고리로부터 일탈을 꿈꾸던 리얼리스트 정동석이 결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정동석의 1980년대를 관통하는 주요작품인 <反-풍경>연작이 ‘현실과 발언’ 활동 시기에 제작되고 발표되었다.
<反-풍경 Anti Landscape, 1983~1989>은 분단의 현장을 찍은 일련의 작품 제목이다. 풍경을 찍으면서 그 사진이 풍경에 반하는 것이란 역설에는, 정동석의 풍경에 대한 반성적 인식이 녹아 있다. 여기에서 정동석은 풍경을 ‘자연미’의 범주에서 이탈시키고 분단 상황의 표지로 빌려온다. 이름 그대로 <反-풍경>인 이 작품들에서는 보편적인 사람들의 시각이 선호하는 멋지고·숭고하고·장엄한 스펙터클이나 서정성은 없다. 해변가 철책선·방호벽·초소·D.M.Z풍경 등 우리 일상의 이면으로 소외된 분단 현장의 건조한 풍경만 있다. 사진의 그곳은 덩그러니 초라하고 무덤덤하다. 풍경 특유의 자연을 찬양하는 원초적 관능미가 거세된 이 소박한 흑백사진들은 풍경에 대한 우리들의 습관적인 미적·관념적 아우라를 사살한다.
이 점에 대해 평론가 박찬경은 미첼(W.J.T Michell)의 ‘풍경에 대한 테제’를 참고하며, “정동석은 ‘그림 같은’ 풍경의 죽음을 찍는다.”고 썼다가, 더 나아가서 “정동석은 이미 죽어 있는 풍경을 찍는다.”1고 단언한다. 미첼에 따르자면, 풍경이란 장르는 그 프레임 내의 장면이 무엇이든 ‘자연미’나 ‘생동미’라는 미적 범주로 일반화되고 물화되어 그 자체가 이미 제도적 ‘미디어’가 된 지 오래다.
분단을 표지하는 전략적·인공적 설치물들이 우리 국토에 가한 폭력성은, 풍경을 풍경이 아닌 분단의 한 장면(정치, 역사성)이나 기호로 간단하게 전치시켰다. 실제 풍경으로서도, 또 우리에게 작용하는 인문적 소스(Source)로도 그것은 이미 풍경이 아닌 <反-풍경>의 상태였다. ‘사실’이 아니라, 풍경이란 장르적 프레임 속에서 박제된 ‘그림 같은’ 환영(Illusion)으로 말이다. 관능이 거세된 ‘풍경의 죽음’과 ‘죽어 있는 풍경’이 공고하게 물화된 이 지점을 정동석은 그의 사진에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 대상을 사진 속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의 철저하게 인식적인 거리두기로, 분단에 접근하는 시각과 해석의 새로운 장르적 코드를 마련하는 방식으로 찍은 것이다. 그러자 죽어 있던 풍경이 분단현실에 대한 시각적 인식소(素)로 코드화되어 부활했다. 그래서 이 현장 사진들은 풍경에 대한 감각적 향유보다는 분단현실에 대한 사유의 단서를 관객에게 제공한다.
사진이란 그런 게 아닐까. 재현이나 묘사의 기술이 아니라, 우리가 간과해버린 문제를 비판적으로 ‘재귀’시키는 가장 리얼한 양식이란 것. 그 재귀의 이미지들이 예술이자 기록으로 당대와 후대를 아우르는 시각언어로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 그래서 이런 탈(脫)스펙터클한 풍경을 작가는 왜 찍힌 풍경은 어째서 풍경(경관)에 反하며 해석학적 코드인 <反-풍경>의 인식적 문제로 기능을 하는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 이럴 때 사진은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보여지는 수동적 텍스트로부터, <작가-사진 속 이미지-사진 표면-관객> 사이를 진자처럼 넘나드는 정치적 기의로 콘텍스트화하며 능동적으로 소통 기능을 하게 된다.
이런 작업 프로세스로 분단을 환기시키면서, 정동석은 자신의 미적 기호(嗜好)도 이 사진 한쪽에 살포시 얹는다. 사진의 중성적 표면에 부드러운 시각적 감촉을 얻기 위해, 암실작업에서 사진의 색 계조를 최대한 부드럽게 단순화시키면서 인화2한 것이다. 화면으로 불러들인 분단 현장은 물론 을씨년스럽다. 그러나 인화된 사진의 질감은 고운 색상과 중·저채도의 부드러운 톤으로 덮여 있다. 이는 작가의 지극히 내밀하고도 순박한(?) 감성의 미적 표상이자, 다소간의 딱딱한 형식적 모색 뒤에서 자연스럽게 출몰하는 고운 마음결이라 하겠다.
1990년대 작품인 <辛未에서 庚辰까지 Project 1991~2000>, 그리고 2000년 서울로 입성하며 작업한 <서울 묵상 Contemplation in City, 2000~2001> 연작까지는 카메라의 재현적 메커니즘을 어느 정도 활용하는 방식을 유지했다. <신미에서 경진까지>는 강원도의 이름 없는 야산을 다니면서 채집한 풍경이다. 산·강·들판·농경지 등에 흐드러지며, 그 종과 장소와 공간의 경계 없이 함께 피고 어울리면서 생장하는 나무·잡초·채소·곡식들의 모습을 정밀하게 제시한 사진이다.3 그것은 구분·분단·갈라짐·갈등이 없는 식물성으로 만물의 상생과 생명력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 상징이자 알레고리들이다. <反-풍경>에서의 건조한 비판성에서, 민초적인 생명성의 끈질김과 더불어 그 아름다움에 대한 서정성으로의 변주이기도 하다.
뭇 생명이 서로 얽히면서 더불어 사는 이런 모습은, 이후 서울에서의 욕망과 꿈을 아우르는 정동석의 사진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생태론적/존재론적 성찰로 여전히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2002년 이후 서울의 밤풍경을 통해서 도시인의 세속적 욕망을 승화된 아름다움으로 기호화(記號化)한 작품들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로 연결되고 적용된다. 분단풍경(1980년대)/강원도풍경(1990년대)/서울풍경(2000년대)은 시공간·피사체·카메라·사진 찍기 방식·조형성·발성법 모두가 서로 다르지만, 이 모두를 가로지르는 작가의 사진에 대한 접근 태도와 의도는 모두 공통분모에 기반을 둔 것이다. 갈등과 대립과 분단을 넘어서려는 순연한 마음에 대한 사진적 접근이라는 분모 말이다.
서울로 귀경한 2000년, 정동석은 도시와 그 주변의 다소 쓸쓸한 풍광을 찍었다. <서울 묵상, 2000> 연작이다. 도심 미관을 위해 가지치기된 나무, 일상적 공간에서 소외된 잡초들, 그것을 가르는 바람결 등의 황량함을 아름답게 연역해낸 컬러 작품이다. 1990년대의 <辛未에서 庚辰까지>와 이후 2000년대 전체 테마인 <Dreamscape, 2002~2014> 사이에서, 과거의 사진적 형식과 장소성 등에서 새로운 조형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중간적 역할을 하는 경향으로 여겨진다. <Dreamscape>는 <밤의 꿈 Dreamscape, 2002~2005/가득 빈, Full Empty, 2006~2009/마음혁명, Mind Revolution, 2010~2013/ 묘행(妙行), 2015>등 일련의 연작을 총칭하는 장기적 프로젝트다. 서울의 밤을 통해서 사람들의 욕망과 그 결과로서의 꿈, 그리고 거기에 대한 작가 본인의 존재론적·사진적 통찰과 반응을 드러낸 작업이다.
여기서부터 정동석 사진의 조형적 양식은 과거의 스타일로부터 혁명적으로 이탈한다. 자신이 현재 발디디고 서 있는 곳(Standing point)의 실존을 증명할 수 있는 또 다른 동시대적 시선과 진부하지 않은 형식을 찾은 것이다.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세계에 대한 인식은 더 깊어지되, 사진 형식과 언어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복을 실행한 것이기도 했다. <反-풍경>을 통해서 이미 자기 스타일이 구축된 50대가 넘어선 중견작가로선 부담스러운 도전이자 모험이었을 것이다. 비록 자신의 것이라도, 이미 체계화된 것에 대해서는 끝없이 회의하고 거역하는 체질로부터 연유한, 그리고 삶과 사진의 관계성에 대한 성찰이 더욱 민감해진 결과라 하겠다. 화면의 피사체(네온, 불빛)는 있는 그대로 재현된 사실이다. 도시의 밤, 그리고 불빛. 그러나 화면에서 최소한의 이미지로 환원된 조형적(그러나 피사체 그대로인 사진적) 기표는, 실재보다 훨씬 광의의 해석이 가능한 기의로 작동한다. 시각적으로도 그것은 재현된 풍경이라기보다는 일견, 정신성을 추구하는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나 몬드리안 유의 신조형주의 추상, 탈(脫)이미지와 중성구조의 미니멀 회화, 기하학적인 하드에지, 혹은 실험적 예술사진으로 보일 만큼 대상성과 감정과 표현을 철저하게 절제한 것이었다. 어둠으로 대상성을 해체하거나 제거해서 검게 덮어버린 화면엔 간단한 네온 불빛만이 기호처럼 명료하다. 그 최소화된 조형성으로 정동석은 서울의 삶에 대한 그의 인식적 내러티브를 상징화한 것이다.
<밤의 꿈>을 시작하면서 정동석은 2년가량 택시운전을 했다. 대략 2만여 명의 승객을 통해서 도시인들의 욕망과 현실과 꿈에 대해서 느끼고 인지했다. 그들과의 대화에서 척박하고도 화려한 도시의 밤이, 그들의 삶을 고스란히 꿈으로 발화시키는 현장임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선/악, 욕망/이성, 빈/부, 남/녀, 성인/청소년… 등 조건을 가리지 않고 모두 꿈이 있었다. 꿈은 현실과 욕망의 이질성이 통일되며 생산한 꽃이다. 척박하고 차가운 어둠 속의 불빛이자 진흙 속 연꽃 같은 것. 욕망을 꿈으로 치환하며 스스로 살아남은 도시의 삶, 그 생명은 모두 고귀하고 모두 아름답다. 아무도 윤리나 관습으로 간섭하지도 제어하지도 못하는 온전한 자기만의 권리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온존하고 평등하게 마음에 자리한다. 사람들은 그 빛나는 꿈에 이르기 위해 현재의 차가운 일상을 기꺼이 유보한다. 정동석이 서울의 밤 풍경을 모두 <Dreamscape, 2002~2015>라는 어휘로 명제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꿈은 정동석이 찍고자 하는 소재이자 궁극적으로 그가 현실에서 다다르려는 이데아이기도 하다. <밤의 꿈>에 이어 2006년부터의 <가득 빈> 연작에서는 스스로의 마음을, 다시 2011년부터의 <마음혁명>에서는 존재론적인 철학적 통찰을 담아낸다. 이어서 2014년 <묘행(妙行)> 연작으로 서울의 밤 전체 시리즈인 <Dreamscape>는 끝난다.
서울의 밤 시리즈는 점차적으로 도시와 사람들로부터 작가 자신의 안으로 이행되고 환원되는 시선을 담는다.
그 시선은 외부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자기의 내부로 옮겨간다. 렌즈가 향하는 대상성은 좀 더 추상적인 기표로 바뀌었다. 그만큼 내면으로의 간구를 향한 그의 사진 찍기는 소재의 소거라는 결과로 이행하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서울의 밤이란 실제 현장을 찍은 것이지만, 엄밀하게는 대상과 작가의 ‘사이’에서 발현되고 생성된(아(我)도 비아(非我)도 아닌) 새로운 이미지를 포착한 것이라서 그렇다.

19)  꿈꾸는세상.Dreamscape  278-5

<꿈꾸는 세상 Dreamscape 278-5> 2007

거기엔 구상성보다는 작가의 내면적 기호가 더 두드러지게 자리한다. 특히 숨을 쉬고 카메라를 움직이면서 찍은 <마음혁명>에서는 밤의 꿈으로 피어난 현실, 거기에서 발현한 영성적 경건함을 통해 그와 세계가 통일하는 지점에서 움직이며 생성하고 생장하는 제3의 현상과 이미지가 진술된다. 여기에선, 과거 <反-풍경>에서 의도적으로 제거했던 아우라를 절제되고 긴장된 정신성으로 부활시킨다. 서울에서의 일상적 삶에 대한 내면적인 자기성찰을 통해서 다다른 최소한의 핵심 이미지를 얻으면서 발생한 긴장도 때문이다. 마치 중도(中道)의 수행처럼, 서울에서의 꿈에서 깨달음의 꽃을 얻으려는 간구처럼, 그 긴장은 사리처럼 엄격하게 절제된 결과다. 그 많은 일상과 서사들의 핵심으로 환원해서 구한 이미지는 그래서 아름답고 깊다. <Dreamscape>의 형식에 대한 설명은 예전에 필자가 기술했던 글의 부분적 인용으로 갈무리하자. 새로 써도 같은 내용이 될 듯해서다.
“눈으로 본 것을 넘어선 이 이미지들은 정동석의 마음의 결이자, 이성적 사유와 희구가 최소 단위로 환원된 결정체다. 도시의 욕망을 능동적으로 수용하며 정동석은 거기에 대한 인식을 극한까지 밀어 붙여 마침내 하나의 세계, 혹은 깨우침으로 주체와 대상이 서로 교차하며 합일하는 풍경을 형상화한 것이다. 도시의 밤을 의미소(意味素)로 하여, 사진 고유의 원근법적 재현을 거부한 평면적 조형성, 카메라 흔들어 찍기로 도출한 동적인 내면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그 결과 피사체의 사실적인 재현에서 벗어나면서 작가의 마음을 반영하는 또 다른 움직이는 형상이 나타난 것이다.”
“카메라를 흔드는 것은 곧 시차(視差)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바라보는 주체의 초점의 위치에 따라 대상이 다르게 인지됨으로 대상에 공고하게 각인된 주체의 시선이 흔들릴 때, 마음속에서 새롭게 생성되는 현상을 정동석은 카메라로 포착한 것이다. ‘카메라 드로잉’이라 명명할 수도 있는 그것은, 정동석과 삶의 현장인 도시의 밤 풍경 사이에서 발생하는 제3의 현상에 대한 진술이다. 사진이자 그림이고 그림이자 사진이면서, 주체와 피사체 간의 수평적 만남으로 시선을 넘어서는 이미지가 발아하는 과정의 기록이기도 하다. 세계를 마주하는 정동석의 이런 작가적 태도에 데리다(Derrida, Jacques)의 다음 문구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카메라 셔터가 감겼다 떠지며 사진이 찍히는 특성상 우리는 대상을 보고 우리가 본 것을 찍는다고 생각하지만, 카메라 셔터가 터지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한 그 순간을 찍는 것 이라는. 여기서
‘보지 못한 순간’은 대상을 찍으려는 사진가의 욕망이, 그대로 피사체에 담기고 드러나는 권력적 시선의 작동방식을 해체시키는 그 시간이 아닐까.”
정동석의 카메라를 흔드는 행위는 외부의 사물을 보기만 하는 주체의 입장에서 벗어나서, 역으로 주체 자신의 내면을 대상화하는 것이다. 피사체의 묘사를 넘는 서사가 주체와 피사체란 분별을 넘어 서로 해방되면서 진화하는 사진 이미지는 그래서 싱싱하다. 카메라를 흔들며 정동석이 다다른 곳은 자기 호흡으로 만난, 그리고 자기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대상과 숨을 나누는 지점이다. ‘주체의 시선’이라는 사진의 독점적 메커니즘으로부터 벗어나서, 피사체인 도시인들의 삶의 의지와 작가의 마음을 담은 열린 공간의 창출이기도 하다.”4
최근 정동석은 서울의 낮 풍경을 사진에 담고 있다. 그동안 <Dreamscape>에서의, 의식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던 긴장에서 이완해서 비교적 유유자적하게 나무가 있는 풍경을 찍는다. 고희(古稀)가 다 되어가는 이제 소요유(逍遙遊)의 입장으로 뷰파인더를 대면하려는 것으로 느껴질 만큼 여유롭게 보인다.
근작에서의 나무는 유연한 형태들이다. 나무는 같은 뿌리에서 자라도 가지나 위치·생긴 모양·생장 속도·색깔·생사가 서로 다르다. 그래도 나무는 자기 자리에서 이런 모든 차이와 다름을 수렴하면서 굳게 서 있다. 바로 그런 나무의 넉넉하고 통일된 생명성을 마치 카메라를 처음 잡았던 40년 전처럼 재현적 방식으로 찍고 있는 것이다. 고수들에게서 느껴지는 허허실실 같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렌즈에선 나무의 자연스러운 생명력에 대한 서술과 함께 존재에 대한 문제의식도 여전히 묻어 나온다. 자신의 내면에서 서사적 인식으로 상상한 사진을 완성하고 난 뒤, 외부로 출사해서 원했던 피사체를 찾은 다음에라야 셔터를 누르는 습관으로 인해서 그런 듯하다. 몸에 축적된 발화(發話)방식은 바꾸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그래서 담담하고 “릴랙스하게” 진행한다는 <Deep Contemplation>으로 지칭되는 그의 현재 작업에서도, 여전히 어떤 독자성이 또 드러날지를 기대하게 된다. 개별적 인식과 총체적인 서사를 사진으로 연결하는 문법에서 정동석은 한국 현대사진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유한다. 그의 작업엔 늘 ‘反’이란 접두사가 붙어 있는 듯해서다. <反풍경> 뿐만 아니다. 반어(反語)적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것도 그렇고, 기존에 제도화된 사진 문법에의 반성(反省)도 그렇고, 부조리한 현실이나 구조에 반역(反逆)하는 것도 그렇다. 머무르거나 안주하지 않는 태도가 고집스러운 그만의 작업을 체계적으로 긴 시간 지속시켜 온 힘이고, 그것이 작가로서 그의 큰 저력이자 매력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그가 대면한 세계와 불화하는 현상들을 사진이란 매체를 통해서 용해시키며 그의 ‘내면’과 ‘사진’을 통일시키려는 작가적 사유와 실천이다. 사진으로 나와 너를 말하고, 사진으로 우리를 꿈꾸고, 사진으로 갈등을 넘어 관계의 꽃을 피우는 것에 대한 깊은 성찰을 동반해서 더 그렇다. 정동석이 진짜 사진 ‘작가’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정 동 석 Chung Dongsuk
1948년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사진과에서 수학하고 《한국일보》기자를 지냈다.
1983년 현실과발언 동인전(관훈미술관)에 참여했고, 1992년부터 12회 개인전을 열었다. 작품집으로 《반풍경》(눈빛, 1999) 《밤의 꿈》(세상의 아침, 2004) 《나다》(글을읽다, 2008) 《마음혁명》(나무아트, 2011) 등이 있다.

1 박찬경 《정동석의 反-풍경/反-풍경》 도서출판 나다 2008
2 이런 사진표면의 질료적 분위기와 이미지의 감성적 통일을 위해 카메라도 라이카 M시리즈로 바꿨다. 더불어 암실에서 인화할 때 색상의 명도와 채도를 의도적으로 최대한 부드럽게 만들었다. 색상과 채도가 곱게 연결된 하늘이나 바다 같은 피사체들의 리드미컬한 연결은 작가의 감성적/미적 기호가 반영된 결과물이다.
3 이때는 좀 더 섬세하고 세밀하게 자연물들의 얽히고설킴을 포착하기 위해서 대형 목재바디인 ‘비스타’카메라와 ‘슈나이더’렌즈를 사용했다.
4 김진하 《사진으로 가는 ‘마음혁명의 길’ 정동석-MIND REVOLUTION》 나무아트 2012

ARTIST REVIEW 김지연

비교적 뒤늦게 사진공부를 시작한 김지연은 사진에서 이론과 깨달음을 얻고 실천하며 자신의 사상을 구현한다. 그는 점차 사라져가는 공동체의 가치와 옛것의 기억을 기록하고 있다. 개인 사진작업 외에 공간운영을 통한 전시기획과 아키비스트로서의 다재다능한 역량을 펼치고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 최근 김지연이 주목하는 ‘낡은 방’을 가리켜 과거로의 회귀도, 이전 세대에 대한 애가도 아닌, 사람이 사물과 관계맺는 방식에 관한 ‘정직한 보고서’라고 정의 한다.

사물의 질서로서의 ‘낡은 방’

전가경 디자이너, 《세계의 아트디렉터 10 》 저자

2015년 10월 중순, 나는 김지연 사진가와의 1년여에 걸친 사전작업을 거쳐 사진 책 《빈방에 서다》를 완성했다. 출판사 ‘사월의 눈’에서 나온 다섯 번째 사진 책이자, 김지연 작가에겐 아홉 번째에 해당하는 ‘작품집’이다. 애초 사진 책에 김지연 사진가의 <낡은 방> 시리즈만 수록하고자 했다. 그간 발행된 여덟 권의 사진 책이 사진시리즈 명과 동일하게 갔듯이, 아홉 번째 사진 제목책도 의심의 여지없이 ‘낡은 방’이었으며, 출판사와 작가가 바라본 사진들 또한 일관되게 ‘낡은 방’이었다. 그러나 출간일자를 두 달여 남겨둔 8월 중순, 김지연은 새로운 사진꾸러미를 준비해 내 앞에 나타났다. 전주에서 서학동사진관을 운영하는 그는 인근 군산의 철거예정지역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철거 전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채 버려진 빈집들을 촬영한 것이다. 새로운 시리즈의 등장으로 기존의 사진책 계획안은 완벽하게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의 아홉번째 사진책은 《빈방에 서다》라는 제목과 함께 ‘낡은 방’과 ‘빈방’의 교차편집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2012년 발표된 김지연의 ‘낡은 방’은 2015년이라는 시간과 테이크아웃드로잉이라는 전시공간 속으로 새롭게 편입되었고, 그의 사진은 무거운 은유가 되었다.
애당초 테이크아웃드로잉 한남점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김지연의 개인전은 테이크아웃드로잉의 건물주 싸이와의 법적 분쟁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보다 안전한 테이크아웃드로잉 이태원점으로 ‘망명’하여 전시가 열린 것이다. 김지연은 전시와 책을 준비하는 내내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강제집행이 이뤄진 테이크아웃드로잉은 어느새 국내 젠트리피케이션의 상징이 되어버렸고, 그의 전시 또한 불안한 약속이 될 수 있는 운명이었다. 공간을 중심에 둔 세입자와 임대인간의 팽팽한 긴장은 ‘땅’에 대한 다른 해석이 낳은 상처였다. 공간이 곧 자본인 임대인에게 공간에 축적된 삶은 언제든지 죽음의 문 앞으로 던져질 수 있는 헌신짝이었다. 테이크아웃드로잉의 그런 투쟁 속에서 김지연의 군산 철거지역 화면들이 전시되었다. 전라북도 군산과 서울 한남동의 테이크아웃드로잉은 어느새 박탈당하는 삶의 상징으로서 운명의 공동체가 되었다. 김지연의 군산 사진은 테이크아웃드로잉의 쉬어가는 목소리를 ‘다른 방식’으로 전달하는 사진적 목소리였다. 전시공간의 절박한 상황은 김지연의 사진을 재난에 대한 은유로 탈바꿈시켰다. 그것은 그 상황에서는 분명 빛나는 은유였다. 그런데 손택은 “은유는 오도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빈방에 서다> 60×80cm(각) 2015 군산지역에 남아있는 오래된 옛 집의 외관과 내부를 촬영한 작품이다

<빈방에 서다> 60×80cm(각) 2015 군산지역에 남아있는 오래된 옛 집의 외관과 내부를 촬영한 작품이다

의미의 무덤
“내 마음을 끄는 건 항상 그런 회의주의를 표현하면서 은유를 넘어 깨끗하고 투명한 무언가로 나아가는 담론이에요. 바르트의 표현을 빌리면 0도의 글쓰기죠.” 손택은 1970년대에 조너선 콧과의 대화에서 “질병은 저주다”와 같은 은유를 가리키며 이를 사유의 붕괴에 빗대었다. 사진은 명징한 오브제들의 세계다. 객관적 실체라는 ‘기능적 역할’로서 사진은 실존했던 대상을 찍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렇기에 사진은 여전히 우리가 보는 사물들의 뚜렷한 윤곽이 존재하는 세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진이 그리는 윤곽을 따라 사진에 담긴 대상을 면밀하게 관찰하는 경우가 드물다. 오히려 그 윤곽으로 인해 그려진 사물이나 대상이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각자 안에 저장된 지식을 불러내어 해석의 낚시망을 던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조형적 각론 이전에 해석의 총평을 서두르진 않았던가.
사회적 발언의 매체로서 사진은 당연히 존재한다. 다만, 김지연의 사진 앞에는 이미 고안된 어떤 결론이 묵직하게 서있는 느낌이다. 이미 고정된 어떤 해석의 틀이 서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사진들은 윤곽선들을 아주 명징하게 드러낸다. 포착된 대상은 “나는 여기 있음”을 알몸으로 드러낸다. 캐논 EOS 마크투로 기록된 윤곽선이 대상의 가시성을 드러내는 구별 기준이라면, 우리는 그 윤곽을 따라 대상에 침잠해 볼 필요가 있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의 반짝임을 보자. 더 잘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도록 감수성을 회복하자”라는 손택의 표현대로.
김지연의 사진들은 현재의 완벽한 ‘재현(represenation)‘이다. 여기서 말하는 재현이란 기술적으로 똑같이 복사한다는 뜻이다. 그는 여전히 우리의 현대적 삶의 테두리에 겹겹이 달라 붙거나 간신히 걸려 있을 넝마를 찍는다. 시간의 유속에서 기능을 박탈당한 건물 혹은 장소로서의 넝마이다. ‘고물’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질 만도 한데 김지연이 찍는 ‘넝마’는 견고하게 땅에 붙어 있다. 그런데 바래고, 낡은 대상의 면면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과거를 들추도록 부추긴다. 초기작인 ‘정미소’ 시리즈부터 ‘나는 이발소에 간다’, ‘근대화상회’ 등이 그렇다. 그가 기록하는 대상들의 일관된 ‘조형적’ 특질 때문인지 그의 사진에 대한 해석은 과거를 향한다. 유산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기념비적인 존재로서, 잃어버리는 공동체의 상징으로서 의미를 부여받으며 ‘근대화에 대한 반성적 사유’ 혹은 ‘노스탤지어’로 양분되어 소비된다. 물론 이것은 사진의 운명이기도 하다. “카메라라는 기계적 장치는 생생한 기억을 간직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왔다. 사진은 살아온 삶을 기억하게 해주는 기념물인 것이다.”라고 존 버거는 말했고, 이말은 사진과 관련된 ‘진부한 진리’가 되었다. 특히, 과거에 익숙한 것이 포착되어 사진으로 환기되면, 우리는 마치 숨은 그림 찾기와 같은 발견에서 오는 쾌락을 느낀다. 그런데 온전히 사진적인 쾌락은 있을 수 없는 것인가. 보는 이의 감성적 쾌락이 아닌, 사진 그 본연으로서의 쾌락 말이다.

장터국수 3,000원.2012

<장터국수 3000원>(2012)

백양국수1단5,000원.2014

<백양국수 1단 5000원>(2012)

계열체로서의 미적 성취
나에게 김지연의 ‘낡은 방’은 사물의 질서다. 한 장, 한 장의 사진에서는 찬란한 사물의 질서가 펼쳐진다. 그것은 버네큘러 감수성을 담은 찬란한 인테리어이기도 하다. 요강, 물파스, 전기장판, 곰팡이, 에프킬라, 파리채, 유선전화기, 카네이션, 꽃무늬, 벽시계, 농협달력, 플라스틱 옷걸이, 보일러, 벽거울, 연분홍 수건, 담요, 약봉투, 부채, 두루말이 휴지, 재떨이, 홈키파, 십자가, 빨래집게, 라디오, 전기밥솥, 먼지떨이, 맨소래담, 양은 주전자, 자개장, 리모컨, 브라운관 TV, 플라스틱 꽃무늬 휴지통, 땅콩 캬라멜, 2단 서랍장 등.
사물을 하나하나 뜯어 보고 있노라면 주인의 삶의 방식과 대략의 나이도 가늠하게 된다. 친구들과 캬라멜을 나눠 먹을 동네 할머니들이 떠오르는가 하면, 구석에 놓인 밥솥에서 플라스틱 하얀 주걱으로 밥을 한가득 퍼서 밥상기 앞에 앉아 소박한 반찬으로 하루의 끼니를 해결하는 독거노인도 어렴풋이 그려진다. 파리는 연신 음식의 냄새를 쫓으며 날아다닐테고, 그때마다 분사방식의 홈키파나 날렵한 파리채의 내리치기가 성가신 소음을 단번에 잠재울테다. 그 흔한 스마트폰이 보이지 않는 이 방들에서 달력과 벽시계는 여전히 병렬적일 수 있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상의 증명이기도 한다. 난잡해 보이지만 각각의 사물은 오랜 시간 형성되어온 삶의 패턴, 그러니까 삶의 질서를 대변한다. 그리고 이 질서의 한가운데 사진들이 있다.
돌사진, 결혼식 사진, 회갑 사진 등이 나열되어 있다. 전통 한옥구조에서 흔히 보던 현판은 가옥이 변하면서 어느새 사진액자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사진들은 우리가 평소 응시하는 높이에서 조금 더 높은 벽 그곳에 자리해 있다. 손안 스마트폰에서 보고 유통되는 ‘젊은’ 사진과 달리 ‘낡은 방’의 ‘늙은’ 사진들은 숭배의 대상이 되어 조금 높이 존재한다. ‘낡은 방’은 과거로의 회귀도, 이전 세대에 대한 애가도 아닌, 사람이 사물과 관계 맺는 방식에 관한 정직한 보고서이다. 동시에 ‘낡은 방’은 각 방에 진열된 사진들을 매개로 한 삶의 기념물로서의 사진 기능에 대한 환기이다.
존 버거가 아우구스트 잔더의 사진을 본 방식이란 유물론적이었다. 그는 잔더의 인물사진에서 신사복에 집중했고, 신사복의 생산 배경과 그 사회적 표상을 짚었다. 아마도 김지연의 사진들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태도라면 이렇듯 버거가 잔더의 사진에 취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사진이 기록의 기능을 할 때, 그 기능에 순응하여 버티는 것이다. 해석의 그물망은 잠시 놓고서. 이는 관념론적이고 개념적인 현대사진에서 사진아카이브연구소의 이경민이 시도했듯이 아키비스트로서의 김지연을 재배치하는 작업일 수도 있다.
모든 사물이란 특유의 임무를 갖고서 태어난다. 사물의 배경엔 사물의 생산자가 존재한다. 각 사물엔 사물을 사용하는 일종의 사용매뉴얼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기능 때문에 사물을 구매한다. 그렇게 사물과 한 사람과의 결속관계를 맺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물의 기능은 본연의 기능에서 멀어진다. 아마도 가장 기초적인 기능은 남아 있겠지만, 시간은 사물에 다른 이야기를 풍성하게 삽입한다. 사물의 다른 용도가 마련된다. 사물은 일차적, 보편적 기능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화자로서 독립적이 된다. ‘낡은 방’은 그러한 사물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벽면에 일사불란하게 배치되어 있거나 방 여기저기 무심하게 놓인 사물들은 주인공과 장기계약을 맺은 모습이다. 우리는 사람이 없는 방에서 사물들을 통해서 사람의 모습을 대략 떠올릴 수 있고, 사람의 모습에선 그의 취향을 읽어낸다. 사물과 취향, 그 명징한 관계맺기가 ‘낡은 방’에 포착된 것이다. 그래서 ‘낡은 방’은 사물의 유형학이기도 하다.
들뢰즈는 근대적 시간관에 숨어있는 ‘주체’의 존재를 거부했다. 그런데 사진은 촬영과 인화라는 시간적 공백 때문에 해석의 주체가 개입하기 쉬운 매체다. 하지만 “삶에서는 플래시 조명을 받아 영원히 고정된 세세한 디테일들이 낱낱이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사진에서는 그렇다”란 손택의 말처럼 우리는 그 순간 고정된 세세한 디테일을 일단 좀 더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계열체의 차이와 반복만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 철저하게 형식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김지연의 사진은 다시 스캐닝될 수 있다. 설사 그 태도가 군산의 ‘빈방’ 사진들을 조형적으로 예쁜 화면으로만 바라보게 만든다고 한들 포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조형 또한 김지연 사진을 이루는-아마도 가장 핵심적인-구성물이기 때문이다. ●

2012년 류가헌에서 열린 개인전  전시광경

2012년 류가헌에서 열린 개인전 <낡은방> 전시광경

김 지 연 Kim Jeeyoun
1948년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 연극과를 수료하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영어영문과를 졸업했다. 2002년 갤러리룩스에서 첫 개인전 <정미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9회 개인전을 열었다. 사진집 《정미소》 《나는 이발소에 간다》 《우리 동네 이장님은 출근중》 《진안골 졸업사진첩》 《근대화상회》 《용담위로 나는 새》 《정미소와 작은 유산들》 《빈방에 서다》를 냈다. 진안 계남정미소 공동체박물관과 전주 서학동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다.

EXHIBITION FOCUS 2015 젊은 시각 새로운 시선

부산시립미술관이 1999년 지역의 청년 작가를 발굴해 지원하고자 기획한 <젊은 시각 새로운 시선전>이 올해로 13회째를 맞았다. 이같은 시도는 단순히 청년 작가를 소개하는 차원이 아니라 지역미술의 잠재력을 확산시키고 부산 미술의 풍부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라 하겠다. 올해 선정 작가인 박상은 송기철 송진희 이은영 4인의 인터뷰와 함께 부산시립미술관의 행보를 짚어보고 향방을 모색하는 글을 통해 부산미술의 가능성을 주목해보자.

미래의 지역미술과 부산시립미술관의 행보

김만석 미술비평

반복된다는 것은 아직 이 세계가 완전한 파국으로 끝장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언가가 되돌아온다는 감각은 삶의 지속을 상상할 수 있는 기반이 되며 바로 그 때문에 불투명하지만 모종의 희망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반복은 일종의 미래의 서식지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이미 시작했지만, 항상 다시 시작하는 것이고 다르게 시작하는 원천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반복은 형식적으로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출발부터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이 도착하는 지점 역시 같은 장소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연되고 연기될 따름이다. 설령, 어떤 존재가 같은 장소에 동일한 방식으로 도착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은 기왕의 영토가 아닐뿐더러, 오히려 도착한 그 장소를 낯설게 만들고 다른 방식으로 관계 맺도록 요청하고 촉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미술 장 내에서 정기적인 반복을 정기전이라고 명명할 때, 그것은 그 단체가 지향하는 규범화된 의미나 고착화된 질서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복이 아직 현실화하지 못한 조형언어의 자리를 내부에 함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바로 그러한 사정이 정기전을 통해서 미래와 희망을 예감하게 하는 밑천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부산시립미술관이 청년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지하기 위해 마련한 전시가 2015년을 기준으로 13회째를 맞이했다. 1999년 출발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니, 16년간 지역미술의 ‘저변’에 대해 탐문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사고하는 데에 기여해왔다고 하겠다. 특히 미술관이 지역미술의 텃밭을 일구기 시작한 1998년 이듬해부터 바로 청년 작가들 지원에 나섰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시립미술관이 등장하기 전까지 지역미술에 대한 상상은 ‘불모’ 담론을 통해서 이루어져왔는데, 이는 ‘지방’을 통치의 대상으로 구조화하려는 다종다양한 역사적 전략에 따른 내부 식민화의 결과였다. 이 때문에 지역 인력풀이 왜소화되는 구조를 피하기가 어려웠으며 이에 대한 반응으로 자기부정이나 배타적 지역주의가 나타나는 일도 없지 않았다. 시립미술관의 등장은 이러한 대립적 구도를 비켜서 청년 작가들에게 지역미술의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중심과의 매개 없이 다양한 조형적 실천 현장과의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는 방식을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다른 한편으로 부산시립미술관이 IMF라는 전대미문의 ‘환란’으로 규정된 시기에 등장했다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환란’이라는 수사적 표현은 결코 과장일 수 없지만, ‘불모’ 담론이 횡행하는 가운데 가장 먼저 문화예술에 대한 정책적 지원이 축소된 것을 떠올리면, 그 한가운데서 탄생한 시립미술관과 그 일환으로 이루어진 <젊은 작가 새로운 시선>과 같은 정기적이고 장기적인 플랜은 지역미술의 미래와 희망을 가늠하게 하는 표지라고 해도 과언일 수 없다. ‘작가’ 생산 자체가 위축되는 시기였고 작업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하는 일 자체가 힘겨운 상황에서 미술관이 청년 작가들의 작업을 연구하고 이를 지역사회와 한국 사회 전체에 알리는 과정을 시도한 것이다. 이는 작가로 활동하며 살아갈 수 있는 소소하지만 중요한 뼈대의 하나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지역을 현장으로 한 대안공간들의 활동 역시 청년 작가들에게 중요한 기반과 자산으로 받아들여졌음은 물론이다. 대안공간과 미술관 각자가 지향하는 활동과 역할이 일치할 수 없지만, 시립미술관은 이 전시를 통해 지역의 청년 작가들에게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자극과 힘을 준 것은 분명하다.

미술관의 도약을 기대하며
그렇지만 부산시립미술관의 이 정기적이고 장기적인 기획을 단순히 지역 시립미술관의 기능 가운데 하나로 간주해선 안된다. 정치경제적인 요인으로 인해 시립미술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 이상, 이 기획은 단순히 새로운 조형언어를 소개 하는 데 머무르지 않으며 그 이상의 차원을 함의한다. 이 전시가 기본적으로 특정한 시간을 경유함으로써 반복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반복 자체가 거꾸로 미술관의 존재 이유와 정체성에 대한 규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청년 작가에 대한 지지와 응원의 반복이 미술관의 지속과 미래의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작가 배출의 중요한 제도인 ‘미술대학’의 위축은 미술관이 경제적인 차원에서 발생하는 구조를 뛰어넘어 본연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실제로 교육부의 예술대학에 대한 압박이 꾸준히 이루어져, 통폐합은 말할 것도 없고 한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부산지역 미술대학은 실질적으로 미술학과의 ‘폐지’를 선고한 상황이어서 청년 작가들과 그들의 작업을 연구하고 담론을 생산하는 일은 이전보다 그 중요성이 훨씬 커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기획 자체가 미술관의 존재 이유를 밑받침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른바 창조경제의 광범위한 도입 역시 지역 청년 작가들의 창조적 역량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지역 미술의 근간에 중요한 사안이다. ‘굴뚝 산업’에서 ‘굴뚝 없는 산업’으로의 전환에 예술의 창조성이 널리 요구되는 실정이고 지역의 산업이 ‘환란’을 통해서 ‘재구조화’된 이후 문화예술이 지역 산업의 한 뼈대로 구성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정치경제적 동학의 핵심이 바로 청년 작가들의 인프라와 생산에 연결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물론 창조경제가 예술가들에게 신뢰할 만한 산업의 형식일 수는 없다. 다만 국가 차원의 이러한 요구가 왜곡된 방식(창조산업은 독려하되 창조적 인력을 생산하는 학문과 실천은 폐지)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기왕의 청년 작가들에 대한 지지와 응원은 요식적인 차원을 넘어 심화된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청년 작가들의 예술적 창조성을 지역과 한국사회 그리고 글로벌한 맥락에서 구성하고 논의하고 알리는 작업이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부산시립미술관이 지역미술에 관한 이론을 정립하고 연구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양한 차원에서 수행되어온 ‘부산학’의 성과와 시립미술관의 독자적인 연구 성과 축적을 통해서 지역미술이 주체화될 수 있는 새로운 맥락들이 조성되어야 한다. 이는 결코 짧은 시일 내에 달성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일국적 차원의 미학 생산 방식을 넘어서 ‘아시아’와 ‘글로벌’의 수준을 포괄하는 미학이나 문화연구는 시립미술관의 체제와 시스템의 변화를 요구할뿐더러 활동 반경 역시 기존의 범주를 훨씬 뛰어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방식인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부산이라는 도시의 역사적 맥락만 살펴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왜관에서부터 식민지, 광복, 6?25전쟁으로부터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에서 부산이 항상 가시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교류와 만남의 장이었다는 사실 역시 부산시립미술관에 이러한 기반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기반의 중추가 예술을 생산하고 재생산할 수 있는 청년 작가들이고 이들이 부산 문화 전체의 미래가 될 것임은 두말할 나귀가 없을 것이다.
혹여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작가들을 호출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는 다만 기왕의 미술 장이 갖는 폐쇄성이나 한계에 균열을 일으키는 차원의 용법 정도로 활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부기할 필요가 있다. 청년 작가에 대한 지지와 응원은 그들의 작업이 아직 미숙하고 부족하다는 차원에서 접근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번 <젊은 시각 새로운 시선 2015>에 참여한 송진희의 작업은 ‘아카이빙’ 작업이 갖는 형식을 전유하면서도 그것을 작가라는 위상으로 독점하고 편집하여 제시하는 차원을 뛰어넘는 방식을 제안하고 있다. ‘성매매 경험 여성’과 ‘일반시민’, ‘예술가’, ‘활동가’를 수신인으로 이들이 다시 완월동 ‘성매매 경험 여성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녀들로부터 발신된 편지들을 받아 전시장에 펼쳐 놓았지만, 그 사실보다 더 중요한 지점은 그녀들 스스로가 누구나가 다 보고 읽을 수 있도록 자신을 일종의 ‘문서고’로 재구성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가시화되거나 왜곡된 형상화를 통해서만 드러났던 그녀들의 삶과 목소리가 누군가에 의해 대리되거나 대변되는 대신 능동적으로 문서고를 구축하도록 요청됨으로써 전통적인 의미의 작가의 자리를 그녀들과 나누는 데에 이른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녀들이 두런두런 함께 나누는 이야기들을 작품화할 수 있는 것은 송진희 작가가 청년 작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전에 없던, ‘작가’의 영역을 진정한 의미에서 확장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민들이 바로 문서고(형상화의 가능성과 가시성의 자리)라면, 미술대학의 위축에 대응할 수 있는 방식은 자명하다. 송진희 작가가 취한 전략들이야말로 다른 의미에서의 동료를 적극적으로 생산하고 재생산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것이 미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전문가 체제나 탁월함의 기예는 그것대로, 이와 달리 시민들의 삶의 탁월함을 생산하는 작업은 또 다른 방식을 통해서 모두 응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미 시작되었지만, 매번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고 동일한 도착점처럼 보이지만 서로 다른 곳에 서 있는 청년미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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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범창살 철제대문 가변설치 2015 (왼쪽) 벚나무 설치 2015

<이미 여기에 늘 평화롭게 존재한다> 방범창살 철제대문 가변설치 2015 <자유를 위한 최소 소건>(왼쪽) 벚나무 설치 2015

송 기 철
1982년 태어났다. 동의대학교 미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동의대학교 효민갤러리에서 석사학위 청구전을 열었으며 (구)백제병원에서 열린 해체둔벙전에 참여했다.

주로 개념적인 작업을 선보였는데, 최근 강조하고 있는 대립적/모순적 상황에서 ‘빼기’의 개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경계선 흐리기>는 물고문을 하는 장면과 심폐 소생술을 하는 장면이 각각 A3용지 앞뒤에 인쇄된 작업이다. 소생 기술의 발달이 장기이식 기술의 발전과 동일한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사실상 소생 기술은 장기 보존 기술이자 다른 생명을 살리기 위한 기술이다. 마찬가지로 전쟁포로를 잔혹하게 고문해 얻은 정보는 많은 수의 아군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기술로 작용한다. 따라서 전혀 다르게만 보이던 두 행동 이면에 누군가의 희생으로 다른 생명을 살린다는 하나의 기저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우리가 자주 대면하게 되는 대립적 상황에서의 선택은 거짓 선택일 수 있음을 상기시키고자 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빼기’는 어떠한 선택을 하든 결과가 같을 것이라는, 거짓 선택의 종속에서 과감히 우리의 선택을 빼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번 전시에서 설치, 영상, 사진작업을 한 공간에 선보였는데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 궁금하다.
<이미 여기에 늘 평화롭게 존재한다>는 창살이라는 오브제를 공중에 매단 작업으로, 우리 주위에 항상 존재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계급적 아파르트헤이트의 유령성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 계급적 아파르트 헤이트의 유령은 끊임없이 우리 주위를 맴돌며 사회-정치적으로 배제된 자를 무수히 생산한다. <자유를 위한 최소 조건>에서는 나무로 비유된 배제된 자들이 자신을 구속하는 내장으로써의 뿌리를 불태운다. 이것은 배제된 자에서 사회-정치적인 주체로 이행하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벌거벗기는 공간>은 버스터 키튼 영화의 한 장면을 반복하면서 비로소 그 사회-정치적 주체가 계급적 아파르트 헤이트를 가로지르는 장면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우리가 다른 세계를 창출할 수 있음을 의미하며, 창살 사이에 있는 철제 대문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벌거벗기는 공간>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 작업들 또한 각자 다르게 작동하면서도 이러한 주제 맥락 안에서 이야기들을 채우며 이어지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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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캔버스 위에 흑연 가변설치 2015

<망각은 없다> 캔버스 위에 흑연 가변설치 2015

이 은 영
1982년 태어났다. 영남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니스 국립고등미술원에서 학사, 석사 과정과 스위스 제네바고등미술원(HEAD) CERCCO 석사 연구과정을 마쳤다. 제네바 Milkshake Agency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3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상징성이 강한 드로잉 작업은 어떤 배경을 가지는지 궁금하다.
이미지들은 대부분 내가 일상생활에서 수집한 것들인데 나의 기억과 상상을 합친 결과물이다. 상징적인 이미지에서 출발한 것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 중의적인 알레고리의 특성을 가지는 작업들이다. 개념은 역사와 문화 그리고 장소에 따라 변화하고 발전하는데 작가가 제시하는 이야기가 있더라도 전시되는 장소에 따라 관람객은 이미지의 개념을 자신이 가진 복합적인 지식과 상황에 맞춰 변화시킨다. 나는 그 개념에 대한 정의의 자의적이고도 타의적인 변화 혹은 변질이 흥미롭다. 그것은 비단 작업의 해석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이 부분을 통해 우리가 지금 보고 믿는 것들의 근본에 대한 의문을 가졌으면 한다.

산과 물결의 일부를 표현한 작업을 간단히 소개해 달라. 이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2015년 4월 개인전을 준비하며 제네바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때가 세월호 1주기 였다. 그리고 그 즈음 유럽으로 넘어오려던 수많은 난민선이 지중해에서 전복되었다. 네팔에서 지진이 일어나 8000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에 작업이 손에 잡히지 않았었다. 나는 어떠한 것을 할 수 있을까. 오랜 생각 끝에 내가 가장 잘 표현하는 언어로 사람들과 이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다만 단면적이 아니라 다양한 시각을 제시하며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렇게 관심을 갖게 하고 생각하게 하며 토의하게 하고 나누게 하는 것이 민주사회구성원이자 예술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넘쳐나는 비극에 담담해진 사람들의 감정을 조형적이고 시적인 표현으로 자극하고 예민하게 하는 것. 그 사건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2015년 5월 제네바 개인전 때 원래 하려고 했던 벽화 대신 그려넣은 작업이 <+4038m> 이다. 스위스인들에게 산이란 오직 스위스에만 존재하는 듯했다. 충분히 그럴 만한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채 살아가는 스위스사람들은 내가 만약 그들의 공간 속에 산을 그려 놓는다면 당연히 스위스산이며 내가 그들의 자연에 심취하여 산을 그려놓다고 생각할 것이라 예상했다. 에베레스트 8,848m-몽블랑 4,810m=4,038m. 지구 반대편 네팔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없이 각자의 삶을 살고있는, 우리가 친숙하게 알고 있는 것과 우리에겐 멀고 낯선 것에 대한 차이, 그리고 눈앞에 놓인 신기루 같은 아름다움에 취해 미처 돌아보지 못한 곳과의 간극에 대해, 스스로 믿고 정의하는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세라믹으로 바다의 수면들을 재현한 연작은, 각기 하나하나의 작품에 붙여진 이 숫자들은 세월호와 난민선이 전복된 날짜들이다. 네모난 블록형태는 분절된, 그러나 결국 모두 연결되어 공공의 기억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 마치 이 세상 모든 바다가 이어져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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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 프린트 80×145cm 2014 아래 (오른쪽) 비디오 3분30초 2015

< Anxiety-아스팔트 > 디지털 프린트 80×145cm 2014 아래 <누군가의 상처 1>(오른쪽) 비디오 3분30초 2015

박 상 은
1988년 태어났다. 부산대학교 미술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조소를 전공했다. 2012년 효원문화회관에서 첫 번째 개인전 <Blue Whale>을 열었으며 대안공간 반디, 부산시립미술관 금련산갤러리, 오픈스페이스 배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으며, 2014 <무빙트리엔날레-메이드인 부산>에 출품했다. 제7회 국제비디오페스티벌 우수상을 수상했다.

피부묘기증(피부를 긁거나 스치는 등의 경미한 외부 자극에도 붉게 부풀어 오르는 알레르기 반응)이라는 독특한 증상은 남과는 다른 특이점이다. 그동안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몸에 새기거나, 아스팔트, 매립지의 균열 현상과 개인의 상처를 교차시키기도 했다. 작가 자신과 외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했는지 설명해 달라.
작품을 봤다면 느껴지겠지만, 피부묘기증이 있다 해도 이렇게 몸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꽤나 고통스러운 물리적인 아픔이 수반된다. 내 작품은 이 아픔을 관람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느껴지는 촉각적인 아픔이 그들의 상처가 시각적으로 구현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한낱 이런 행위를 통해 나와 관람자가 공감하고 아픔을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겪는 복합적인 상처를 시각적으로 전하는 효과가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한다. <Anxiety>는 성과사회 속에서 병들어가는 현대인의 불안을 매립지의 균열 이미지와 연결한 이야기다. 이전 작품이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의 몸을 빌려 보여주는 작품이었다면, 이 작품은 현대인의 불안과 매립지의 균열 그리고 나의 몸 이렇게 새 개를 연결시킨 것이다. 갈라지는 땅과 부어오르는 내 몸, 그리고 현대인이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이라 생각한다.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선보인 영상작업과 사진 작업에는 특별한 내러티브가 엿보이는데 이에 대해 설명해 달라.
작품의 주제는 ‘세 젊은 여성의 상처’다. 이 세 명의 여성은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주위에서 ‘걸레’, ‘남자 이용해먹는 나쁜 년’ 소리를 듣거나 혹은 ‘처지에 맞게 살라’는 얘기를 들으며 상처받는 여성들이다. 이들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중에 ‘아버지의 부재’라는 공통적인 사정을 발견했다. 비록 남과 공유되지 않는 특수한 경험, 즉 아버지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패턴이지만 그 아버지란 존재를 다른 것으로 치환하여 생각하면 이 문제는 단순히 이들만의 어떤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이 돌아가는 패턴 같은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전 작업과의 연장선에서 이들의 상처를 공유하며 치유해 나가는 것도 작업의 과정으로 보고 싶었다. 이전엔 촉각적인 아픔이 느껴지는 불편함이었던 데 반해 이번에 이야기가 들어가는 것은 이 패턴을 보여주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몸을 통해 발언하는 방식, 특히 피부묘기증이라는 신체적 특징이 지금까지 작가로서 차별화된 지점이라 하겠다. 한편 이에 대한 고민도 많을 것 같다.
스스로의 몸에 상처를 내고 불합리한 지점들에 저항하는 작업을 했다. 그런데 어려움이 컸다. 개인적으로는 신체작업을 하면서 신체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없었고 해체할 수 없었다. 노출에 대한 부담감과 두려움이 컸던 것 같다. 아마도 기존 관습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어서였을 것이다. 앞으로도 더욱 고민해야 하는 지점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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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이, 봉투, 테이블, 의자 등 설치 2015

<완월동 편지> 종이, 봉투, 테이블, 의자 등 설치 2015

송 진 희
1982년 태어났다. 대안공간 반디, 요코하마 AAA갤러리, 아르코미술관, 김해 문화의전당, 미부아트센터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다. 생활예술모임 ‘곳간’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성매매 집결지인 완월동은 부산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장소이다. 이곳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하게 된 배경을 말해 달라.
작년 5월 완월동을 처음 알게 되었고 그곳을 걷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완월동의 보이지 않는 역사와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이 이야기들은 성매매 경험 여성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기보다는 한국사회의 성산업과 여성의 삶의 현재를 말해주고 있다. 현재 이곳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바깥으로 매개하는 통로, 사이-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완월동 편지>이다. 완월동이 성매매 집결지라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배제되는 것, 사라지는 것, 기록에 남지 않는 것들에 대한 관심과 갈증이 늘 있었고, 완월동이라는 장소와 여성들의 이야기를 만나게 되면서 이제는 응답해야 할 때라고 느꼈다.

일반인이 성매매 경험 여성을 접할 수 있는 통로는 제한적이다. 그렇다 보니 일반인 참여자들이 그들에 대해 발언하는 데 상당한 부담이 있었을 것이다. 작업을 하면서 초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
<완월동 편지>에 참여자 과반수는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자신의 언어를 담아서 답장을 보낸 것이라. 그 내용은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성산업에 관해서 나눌 수 있는 대화의 방식은 추측, 낙인, 이슈화하기에서 끝나버린다. 추측을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니깐 성산업에 관해서 ‘생각’하는게 어렵다는 말과 같다.
왜 생각하지 않냐고 다그치기보다는 그 문제를 일상적인 차원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중요하다. 참여자들의 편지에서 ‘부담’이 느껴졌다면 ‘생각’하고 ‘언어화’하는 과정을 스스로가 수행해야 했기 때문일 거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럼에도 자신이 살고 있는 곳 주변의 성매매장소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편지, 자신의 고통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 보는 편지, 재개발 풍경과 완월동을 연결하는 편지, 그 자체가 그 부담을 뚫고 나온 말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 작업은 작가 개인의 시선으로 점철되어 있지 않다. 완월동을 포함한 성산업, 여성들의 삶에 대해 응답하는 ‘공동의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작가는 공동의 기록이 가능한 사이-공간을 가꾸는 매개자이자 안내자이다. 없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했다.
이슬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