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곽남신 – 껍데기

곽남신 – 껍데기
OCI미술관 3.12 – 4.30

이번 <껍데기>전에서 곽남신은 매우 직설적인 조형언어로 관객과의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그의 기존 실루엣 연작이 대상의 에센스를 극적 평면성으로 농축시켜 간결하고 임팩트 있게 보여주면서도, 동적인 효과와 공간감을 창출하는 시각 장치와 회화적 효과를 가미함으로써 상상력의 여지를 남겨두었다면, 이번에 새롭게 선보인 작품들에서는 평면에서 입체로, 압축적 이미지에서 구체적인 이미지로의 전환이 눈에 띄며, 이러한 성향은 보다 즉각적인 관객의 반응을 이끌어낸다.
캔버스 천에 주름을 잡거나, 컷 아웃에 네온 혹은 LED의 병치, 이미지의 겹치기 잔상 효과 등으로 평면에 기반을 두되 지속적으로 평면성의 탈피를 모색해온 그는 이번에 처음으로 움직이는 조각적 입체 설치작 <홍동지 와상>을 내놓았다. 홍동지는 민속인형극 꼭두각시놀음에 등장하는 남성성의 상징적 아이콘이다.
그런데 곽남신은 처참히 조각나 숨을 거둬가는 순간에조차 힘겹게 고개를 들어 자신의 남근이 제대로 기능하는지를 확인하는 홍동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홍동지의 몸이 기력을 완전히 잃은 후에도 그의 남근만은 다시 일어나고자 꿈질거리는데, 이 사력을 다한 마지막 2초간의 무의미하고 타성에 젖은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남근 세우기는 권력, 외모, 부에 대한 욕망의 제어장치가 없는 우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또한 허무한 욕망을 끊임없이 조장하는 사회와 대중매체에 대한 비판이자 그렇게 욕망을 좇다가 소중한 것을 잃어가고 있는지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우리 삶에 대한 연민을 담고 있다. 이는 <끄~응!>, <바디빌더>, <섹시걸>, <꿈꾸는 마초>, <비누거품 남근>, <부풀리기>, <아우라>, <아름다운 인생> 등의 작품들이 <껍데기>라는 제목하에 공통적으로 전달하는 메시지이다.
곽남신의 예술은 재료나 소재 면에서 지속적으로 대중을 향해 손을 내밀어왔다. 그는 회화, 판화, 드로잉, 오브제, 실루엣 초상과 사진의 로키(low-key) 조명의 원리를 이용한 LED와 네온 작업에서 3차원 키네틱 설치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료와 형식을 소화하면서, 대중매체 이미지를 여과 없이 사용하기까지 점점 더 거침없는 대담한 작업을 선보여왔다.
한국 모더니즘 회화의 절정기에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했던 곽남신은 모더니즘 회화의 엘리티즘의 한계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하면서, 복잡한 담론이나 극단적 형식주의를 최소화하고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예술을 추구해 온 것이다. 대중매체는 우리 시대 아이콘의 양성소이자 그 광범위한 분배를 통해 우리의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을 끊임없이 조장한다. 대중의 삶에 대한 그의 애정은 자연스럽게 그의 예술에 일상에 대한 직관적 성찰을 담는 팝 이미지의 차용을 요구한다. 따라서 이번 전시에서 두드러지는, 곽남신의 대중매체의 세속적 아이콘 전유는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추상의 절정인 하이 모더니즘의 시기를 거쳐 긴 여정을 통해 도달한 대중 친화적 조형언어에 예술가의 관조적 시선 또한 오버랩된다는 사실이 곽남신 식 팝아트의 특징이다. 헛된 욕망에 지배당하는 인간을 연민하는 인간 곽남신의 존재가, 마초 맨과 섹시 걸의 허상과 판타지가 지배하는 우리 사회의 곳곳을 바라보는 더벅머리 곽남신의 실루엣이 그의 작품 하나하나에 드리워져 있는 듯 느껴지기에, 그의 작품은 마치 일기처럼 진한 삶의 리얼리티를 담고 있다. 

이필・미술사

[Review] 이완 – 우리에게, 그리고 저들에게

이완 – 우리에게, 그리고 저들에게
프로젝트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3.7 – 4.5

사루비아다방에서 개인전 <우리에게, 그리고 저들에게>가 열리기 한 달 전 이완은 다음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제 작업에 관심있거나 참여할 의향이 있는 분은 참여 의사를 제 페이스북 메세지로 보내주기 바랍니다…. 먼저 일러두어야 할 참여 조건이 있습니다. 참여자 개인당 들어가는 제작비용 20만 원 중 15만 원은 참가자 개인부담으로 책정했고, 나머지는 제가 부담하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제작된 작업은 원목 수공 의자의 형태가 될 것이며 전시 후 참여하신 모든 분께 배송해 드리겠습니다.”
이완은 페이스북을 통해 모집한 30명의 참여자에게 각자가 생각하는 1cm를 그려줄 것을 요청했다. 작가는 제각각 인식하는 1cm를 기준으로 1m 길이의 자를 만들고, 이 자를 이용해 ‘같은 수치’를 지닌 ‘다른 크기’의 의자를 제작했다. 또한 참여자에게 “우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며 그들의 답변을 인터뷰 영상으로 제작하였다. 이 인터뷰에는 각자가 인식하는 다른 크기의 1cm 길이만큼이나 다양한 답변이 쏟아진다. 관객은 같지만 다른 크기의 의자에 앉아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다양한 답변들을 듣는다.
<사회참여예술>은 예술이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을하는 방법을 실험하는 행위예술의 하나이다. 이완의 이번 개인전은 사회참여예술이 만들어지고, 전시되며, 공유되는 규격화된 방법을 차용한다. 참여자를 페이스북이라는 가상 공간에서 모집한다. (그들에게 명확한 금전적 참여조건을 제시한다.) 참여조건에 동의한 이들은 작가가 제시하는 환경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반응의 결과물은 작가의 작품으로써 전시된다. 이들은 제각각 사적 경험에서 기인한 참여가 ‘예술작품’이 되는 과정을 정서적으로 경험한다. 또한 해당 경험에 대한 약간의 저작권을 주장하며 결과물의 일부를 소장한다.
전시장 한쪽 벽면에는 한국 근현대를 상징하는 작가의 수집품이 진열된다. 대통령의 회고록과 시계, 김정일 사망 소식이 담긴 신문 등 다양한 한국 역사의 흔적을 작가는 선별하여 전시한다. 공인의 기록물이나 언론매체가 다루는 역사라는 객관화된 시점과 그 시대상을 수집하여 진열한 작가라는 개인의 주관적 기억은 대비된다. 이완은 이번 전시를 ‘네이션(nation)’이라는 집단이 어떻게 형성되고, 형성된 집단의 개별주체들의 주관성은 그들이 동의하고 있는 객관적 기준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에 대해 알아보는 실험이라고 소개한다. 네이션이라는 단어는 국가를 의미하는 동시에 국민을 의미한다. 네이션은 우리가 속해 있는 집단인 동시에 우리 자신이다. 이번 전시는 예술계 외부에 위치한 참가자들과 협업하여 예술 밖 네이션과 예술 안 네이션의 구분과 정의를 질문한다.
이완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기억하는 객관적 관점과 주관적 관점을 대비한다. 대비의 과정에 ‘우리’를 이루는 구성원이 참여하며, 그 결과물은 공유된다. 작가는 예술 밖 개인의 예술 참여나 교류, 협업을 통해 우리가 공유하는 사회적 양식과 객관적 기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자 한다.

양지윤・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큐레이터

[Review] 최소한의 최대한

최소한의 최대한
아트센터 화이트 블럭  2.28 – 4.27

‘최소한’이라는 표현은 늘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는 단어다. 미술에 있어 특히 그렇다. 미니멀리즘과 같이 재료의 사용이나 작가의 개입을 최소화함으로써 대상의 본질에 다가가려 했던 움직임이나, 미시세계에 대한 관심을 작품으로 형상화한 동시대 작가들을 떠올릴 수 있다. 헤이리에 위치한 아트센터 화이트 블럭에서 열린 <최소한의 최대한>은 최소한의 표현을 통해 최대한의 의미를 이끌어내는 작가 3인의 작품세계를 조망한 기획전이다.
전시에 소개된 작업들은 기본적으로 회화의 범주 안에서 ‘최소한’이라는 개념을 나름의 조형어법 아래 진지하게 탐구한 결과로 보인다. 우선 이강욱은 세포처럼 작은 입자들이 나름의 질서아래 화면 곳곳에 집적되어 있는 모습을 통해 전체와 부분의 긴밀한 상호관계를 고찰한다.
그의 작업은 언뜻 최소한의 선과 점으로 표현한 그림으로 보인다. 하지만 캔버스의 표면에서 느껴지는 전후의 깊이감과 시간성, 미디엄으로 마감된 표면 아래 자리한 미세한 이미지가 빛의 산란현상으로 인해 무한반복, 확장되는 모습은 그의 작업이 결코 구체적인 대상의 표현에 머물러 있지 않고, 확장된 시공간 안에서 대상화된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거시적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확인시킨다.
정승운의 <공제선>은 가늘고 긴 실을 캔버스 삼아 그 위에 수차례 물감을 쌓아올린 후, 벽과 벽 사이를 가로지르도록 설치하여, 전시공간을 가로지르는 여러 개의 현수선을 만들어낸 작업이다. 작가는 최근 몇 년간 <공제선> 연작을 통해 서로 다른 두 개의 대상이 만나 만들어내는 경계면을 다양한 조형어법으로 노련하게 풀어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얇은 실 위에 얹혀진 물감층으로 최소한의 양감과 적당한 무게감을 만들어, 백색의 공간 안에서 유려한 곡선들이 중력에 의해 자연스럽게 늘어진 풍경을 연출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축적한 공제선의 추상적 이미지는 백색의 공간을 배경삼아 허공에 그린 커다란 색선의 드로잉과 같은 효과를 전달한다. 주어진 공간에 감각적으로 개입하는 그의 감각적인 면모와 회화적 표현에 대한 작가의 오랜 성찰을 다시금 환기시킨 작업이다. 이강욱과 정승운이 회화적 물성을 바탕으로 한 최소한의 표현에 집중했다면, 오윤석은 삶의 기억 속에 자리한 구체적인 형상들을 지워나가면서 결국엔 본래의 이미지를 찾아보기 힘든 단색의 화면을 만들어낸다.
그의 회화에서 보는 이가 얻는 최소한의 정보는 알 수 없는 글자나 표식으로 뒤덮인 화면, 혹은 그 사이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얼룩 같은 이미지의 흔적들이지만, 그가 만든 회화의 표면은 작업과정을 역방향으로 기록한 4분33초의 영상작업에서 보듯이 삶을 성찰하기 위한 일종의 수행처럼 반복되는 행위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획득해 나간다.
최소한 혹은 최대한이라는 표현은 그 범위와 대상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전달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 전시는 3명의 작가가 경험한 세상의 모습을 각자 나름의 가장 압축되고 정제된 형식으로 시각화하여 성찰하는 방식을 통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현대미술의 추상적 경향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황정인・독립큐레이터

[Review] CLOSE-UP

CLOSE-UP
두산갤러리 3.5 – 4.12

‘본다’는 것은 세상과 만나는 것이다. ‘보는 방법’은 세상을 보는 방법이기도 하다. 보는 방법, 관점을 다르게 하면 익숙하고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에 의문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예술가는 예술작품을 보는 방법을 바꿈으로써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다르게 보게 한다. 그럼으로써 예술은 다른 감각으로 보고 느끼게 한다.
익히 알다시피 유승호와 함진은 작품을 ‘가까이, 자세히 보게’ 하는 방법으로 우리가 놓쳐서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다시 보게 하는 작가들이다. 지난해 두산 레지던시 뉴욕에 참여했던 이 두 작가의 전시 은 아주 작고 하찮은 것들이 만들어낸 세상, 마치 팽창하는 우주에 빨려 들어가는 지각을 경험하게 한다.
유승호와 함진은 “자세히 들여다보기”라는 유사한 보는 방법으로 큰 것과 작은 것, 밖과 안, 전체와 부분, 나와 너, 그림과 글씨처럼 상반된 것들의 조합에서 오는 메타포, 경계의 불분명함에서 오는 보는 방법과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함진은 군집된 작품들로 전시장을 원시 정글로, 또는 행성들이 생성되는 우주공간으로, 생명이 태동되는 공간으로 펼쳤다. 전시장 전체에 유기적으로 설치된 작품을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작은 생명체들이 꿈틀거린다. 인간의 형상을 갖춘 것에서부터 어떤 형태인지 불분명한 것들이 존재하며 전체와 부분, 형상과 배경의 경계가 모호하다.
또한 유승호가 펼쳐내는 세상 역시 전혀 다른 것들이 공생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그림이 품고 있는 글씨, 서로 전혀 다른 언어이지만 둘이 엮어내는 세상은 하나이다. 마치 내 안에 있지만 내가 아닌 이물질인 박테리아가 나를 이룬 것처럼 말이다. 물질에서 생명체가 생겨난 것처럼 유승호의 그림들은 글씨에서 그림이 생성된다. 그림은 글씨의 의미를 형상화하여 글씨로 순환된다.
작고 하찮은 것들은 변화하고 변신하며 서로 공생하면서 지구를 생성, 변화시켰던 것처럼, 적대적 생물종들이 합쳐져서 새로운 생물종이 되었던 것처럼, 유승호, 함진의 작품은 그 작고 하찮은 것들이 공생하여 만들어내는 세상이다.
린 마굴리스가 “미생물은 우리들 속에서 생존하고 있으며 또 우리는 그들 속에 살고 있다”고 했던 것처럼, 지구 생명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눈에도 보이지 않는 미물들이다. 그래서 작고 하찮은 것들은 가장 작으면서 동시에 가장 크다. 유승호, 함진이 의도하는 바를 작고 하찮은 것들이 만들어내는 마이크로코스모스, 다른 것들이 공생, 공서하는 세상을 가까이 자세히 보자는 것이리다.
이번 전시는 레지던시 프로그램 결과전의 성격을 띠지만, 유승호, 함진이라는 기발한 두 작가의 조합이기에 꽤 많은 기대를 했다. 그렇기에 두 작가의 작품이 단순히 기계적 방식의 조합으로 전시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작가가 빚어낸 경이로운 세상을 다른 지각으로 경험하게 하는 마이크로코스모스는 여전히 경이롭고 아름답다.

박수진・복합문화공간 에무 디렉터

[Review] 센서십 – 제7회 무브 온 아시아

센서십 – 제7회 무브 온 아시아
대안공간 루프 2.13 – 3.21

아시아 12개국에서 21명이 보내 온 영상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검열이었다. 대체로 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국가와 사회로부터 밖으로든 안으로든 ‘검열’이 자행되고 있는 현실과 그런 현실의 이면에 도사린 권력·욕망·학살·자본·공포 또는 무관심·관음증·거리두기에 대해 다룬다. 영상이 현실을 반영하는 미디어라면, 그 내부에서 퍼포밍하는 예술가의 정체성은 고발자이거나 풍자를 다루는 광대이거나 혹은 진실 고백자들이다. 고발과 풍자, 고백의 언어는 그러므로 미디어의 이면에서 공명하는 카오스에 가깝다.
한 작가 한 작품의 언어는 오직 하나의 개념을 검열의 공명언어로 타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 <징후들과 1세기>에서 조감독을 맡았던 솜폿 칫께손퐁은 <질병과 100년의 세월> (2008)을 제작했는데 그는 <징후들과 1세기>에서 검열로 삭제된 6편의 장면을 모아서 다시 서사를 부여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고 어떤 상황도 불순해 보이지 않는 영상들이 왜 검열을 받고 삭제당해야 하는지를 듣는 과정에서 관객은 소름 돋게 될 것이다. 사실 그 이유란 것들을 보면 1960~70년대 한국사회에서 벌어졌던 대중가요에 대한 검열요인들처럼 그것은 매우 가벼운 키치적 냉소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강력한 (독재)권력이 행한 검열놀이라고 해야 할까?
이번 전시 <검열>이 던지는 충격은 작품들이 현실의 사건들로부터 미학적 사건을 전유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한마디로 출품작 모두 작가들이 살았던/살고 있는 그들의 현실을 미학적 리얼리티를 뿌리로 하고 있다.
예컨대 타이완 작가 두페이스의 <위산(玉山)에서의 모험>이 1947년 2・28사건을 모티프로 한 것이라면, 캄보디아 작가 크바이 삼낭은 <뉴스페이퍼 맨>을 통해 프놈펜의 벙칵 호수 개발문제를 다루고 있다. 삼낭은 대대로 호숫가를 터전으로 삼고 살아온 4000여 가구의 삶을 내쫓고 호수를 매립한 대기업의 ‘개발 폭력성’을 이야기한다. 중국의 페이준은 게임의 인터페이스 기능을 차용해 만든 에서 소통의 공론장 문제를 공론화한다. 민주주의의 공론장을 허락하지 않는 중국 정부는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조차 검열해 온 지 오래다. 중국의 그런 현실을 인지한다면 페이준이 펼치는 게임 인터페이스 상의 ‘민주적 수다’가 무얼 뜻하는지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동일한 문제의식으로 보여주는 루양의 개구리 춤은 더 충격적이다. 그는 해부학 실험실에서 구해 온 개구리 사체에 센서를 부착, 비트에 맞춰 마치 춤을 추는 듯한 형국을 재현한다. 뇌와 몸통의 일부가 없는 이 잔혹한 날몸뚱아리가 추는 춤이야말로 통제사회가 요구하는 유토피아일 것이다.
일본에서 온 는 후쿠시마 원전의 이야기다. 원전건물 안으로 들어간 한 사내가 CCTV카메라를 향해 손가락질을 한다. 통제된 그곳으로 들어가서 카메라의 눈을 직시하며 손가락을 치켜 든 사내. 익명의 이 사내가 펼치는 행위는 검열과 통제의 위험사회에 대한 ‘맞짱’일지 모른다.

김종길・경기문화재단 기획팀 뮤지엄운영파트장

[Review] 이상원 – THE MULTIPLE

이상원 – THE MULTIPLE
영은미술관 3.1 – 30

이상원은 2006년부터 일상에서 사람들이 여가 생활을 즐기는 모습을 표현 대상으로 삼아왔다. 그의 작업에서는 공원에서 걷고 뛰는 사람들, 스키를 타는 사람들, 수영을 하거나 스포츠 경기를 응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지속적으로 보였다.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여가활동의 종류는 다르지만 스키나 수영, 걷고 달리는 사람들은 지역이나 시간에 관계없이 서로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상원은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여러 사람이 취하는 공통된 자세와 행동을 패턴화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모여있는 군중의 모습으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의 단편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 제목인 ‘multiple’은 이런 관점에서 서로 다른 인물의 집합을 보여주는 소재적 측면과 함께 최근 이상원이 집중하는 회화 매체에 대한 다양한 시도를 의미한다. 이상원의 초기 작업에서는 여가활동이 벌어지는 장소가 화면의 큰 부분을 구성하고 여가활동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한 화면에 담기 위해 주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화면을 구성하여 행위의 주체인 사람들은 아주 작게 표현되었다.
초기 작업들과 달리, 최근 작업에서는 인물의 행위 자체에 좀 더 주목해 행동양식의 공통점을 찾고 이를 회화적으로 실험하려는 의도가 드러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는 1년간 프랑스, 이탈리아, 한국의 다양한 장소와 여러 인종의 사람들이 여름 휴가를 즐기는 모습을 관찰한 작업이다. 조금씩 다른 모습을 수채화로 그린 작은 종이 작업 100여 장이 서로 조합되어 커다란 해변을 이룬다.
이 해변의 풍경은 하나씩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서로 다른 장소임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하나로 구성된다. 그리고 해군 병사들이 모여있는 <사열>은 스티로폼으로 만든 형상을 나무판 위에 찍고 모자와 손 부분만을 덧칠한 방식으로 제작됨으로써, 인물의 개별적인 특징은 사라지고 해체되어 전체적인 하나의 풍경을 이루는 색과 형태로 재조합된다.
역시 인물들이 더욱 단순화되어 간략한 형태와 색채로만 표현되고 원근감 없이 화면의 모든 곳이 균일하게 채워지면서, 인물들의 모습과 행위는 회화적 실험의 구성요소로 변화하게 된다. 화면 안에서 이루어진 회화적 실험은 를 통해 보여주는 방식에 대한 실험으로 확장된다.
불꽃축제를 보기 위해 해변에 모인 사람들을 담은 이 작업은 거의 동일한 풍경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린 4개의 작업을 같이 전시되어 이상원의 다양한 시도를 비교해 볼 수 있다. 특히 전체가 균일하게 표현된 화면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도록 바닥의 낮은 좌대 위에 놓은 작업은 평면화된 화면을 그가 불꽃축제 현장에서 실제로 보았던 시점과 유사한 시점으로 보게 만들면서, 회화로 구성되기 이전에 그가 관찰했던 시점을 전시장 공간 속에 되살리고 있다.
그동안 이상원은 회화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영상, 설치, 공연 등으로의 확장을 통해 다양한 회화적 가능성을 실험해왔다. 이번 전시는 이상원이 그간 지속해 왔던 다양한 회화적 실험의 양상을 보여주면서도 대상을 시각화하는 과정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자기언어를 구축해가고 있음을 살펴보게 한다. 

정진우・두산갤러리 큐레이터

[Review] 조해영 – CINNABAR GREEN DEEP

조해영 – CINNABAR GREEN DEEP
갤러리 비케이 2.18 – 3.23

조해영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에 들어서면 풍경이 연상되는 초록색(전시제목도 cinnabar green deep)을 변주한 작품들이 펼쳐져 있다. 좀 더 유심히 보면 이 초록색의 화면들은 몇 가지로 나눠지는 다른 질감과 표면을 가지고 있다. 유사한 소재를 다루고 있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제작한 작품이지만, 조금은 이질적이고 다른 분위기의 화면을 보여주는 이유에 대해 작가는 자신이 채집한 각각의 풍경을 충실히 표현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작가가 풍경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낯선 공간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자신과 외부환경이 서로 확신할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당혹스러운 경험을 하게 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지각이나 판단이 매우 불완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작가는 분명히 거기에 있었지만, 좀처럼 확신할 수 없는 대상으로써 ‘장소’를 선택하게 되었다.
작가가 이러한 장소를 다루는 방식을 보면 일견 풍경처럼 보이지만, 어떤 장소 일부분을 절취하여 그 표면을 다루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작가가 선택한 대상이 실재하는 장소이지만 어떤 시간과 공간을 연상시키거나 인식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정보나 상황을 담지 못하게 하려고 선택한 방법이다. 즉 공간적 특성이 드러날 만큼 화면의 프레임이 충분히 넓지 않게 구획을 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잔디 운동장의 일부만을 잘라 내어 격자만이 보이도록 하고, 그 부분조차 도식적인 이미지로 공간이 풍기는 개성을 지워 흐릿하게 한다.
이미지의 경계면을 잘라 대상을 다루게 되면 구체성을 인식할 수 없게 되고 답답함과 낯섦으로 장소의 표면이 화면 속에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화면은 결국 색면으로 재구성되고 표면이 강조되면서 패턴화되고 추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작가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 어디에라도 있을 것 같지만 생경한 풍경(의 표면)으로 재구성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각각의 기억 속 장면으로 다시 화면을 유추하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화면의 바깥으로 밀려나간 숨은 장소의 기억과 서사가 추상화된 표면을 통해 주관적인 시선을 주고받도록 하기 때문일 것이다. 

임종은・아트센터 화이트 블럭 큐레이터

[Review] 네오산수

네오산수
대구미술관 2.11 – 5.18

동양에서 긴 시간 동안 이어져 온 산수화는 특정한 대상으로서의 소재를 넘어서 그리는 사람들의 정신적 자세가 집약된 전통이다. 옛것이 현재 속에서 구현되지 않고 박물관 속에 있으면 그것은 전통이 아니다. 사전적 의미에서 전통은 과거가 지금 일상 속에서 계속 존재하는 현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예컨대 우리 일상에서 멀어진 한복은 하나의 의례로만 존재할 뿐 더 이상 전통이 아니다. 산수화는 어떤가?
산수화가 예술체계 속에서 전통으로 다루어진다는 것은 그 제도와 정신이 온전히 이어지는 것이지, 장르적 양식이 교조적으로 보존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물론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그 생각도 틀리지 않다고 본다. 산수화뿐 아니라 예술 전체에 관해서 우린 통일된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바로 그런 점에서, 나는 산수화 개념을 엄밀하게 정해진 기준보다 훨씬 넓게 잡는 쪽이다. 그런데 대구미술관의 <네오산수전>은 이 도식 안에서 애매한 지점에 있다.
전시 제목이 ‘새로운(neo) 산수’다. 새로운 것이 있으면 지난 것도 있단 말이다. 그런데 새로움이란 무엇인가? 과거의 형식을 중시하는 정통적 견해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새로운 게 아닌가? 이 전시는 새로운/낡은 도식으로 평가되는 현대미술의 언로 안에서 새로움을 선언한다. 마치 ‘새 정치’가 부동층에 속한 유권자를 향한 수사적 용어인 것처럼, 새로운 산수는 정통 산수화를 고수하려는 진영과 형식 실험을 중시하는 현대미술의 진영, 두 편에 속하지 않는 시민들에게는 참신한 표제로 다가설 것이다. 그렇다면 공공미술관이 품어야 할 한 가지 미덕은 충족되는 셈이다.
그래도 논의할 주제는 남는다. 새로움에 의해 작동되는 현대미술 속에서 이미 존재하던 ‘새로운 산수화’와 ‘새로운, 새로운 산수화’의 차이는 무엇일까? 만약 있다면 그 차이는 뭘까? 전시에 참여한 31명의 현대미술가는 그 재진입(re-entry)의 체계 질서를 극단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작가들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네오산수전>은 현대의 과학·기술로 인하여 크게 바뀐 인간의 미적 태도를 끌어들인다. 인공과 자연의 대립 구도 또한 전시에 출품된 뉴미디어나 형식 실험 미술이 굳이 아니더라도 예술사에서 오래된 가정이다. 이처럼 고전적인 예술의 상황을 처음부터 다시 설명하는 과정이 필요하긴 하다.

윤규홍・갤러리 분도 아트디렉터, 예술사회학

[Review] 달의 변주곡

달의 변주곡
백남준아트센터 2. 26 – 6.29

백남준의 1965년 작 <달은 가장 오래된 TV>는 보름달에서 그믐달로 이울어가는 모습을 12개의 TV로 재현한 작품이다. ‘텔레비전’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달은 예나 지금이나 ‘원격시(遠隔視)’의 대표적인 대상이다. 무엇보다도 달의 특성은:1) 모든 사람이 어디에서나 그것을 볼 수 있고, 2) 끊임없이 변화하며, 3)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데 있다. 지구의 생명은 달의 영향으로 생겨나고 진화했다. 그것이 조석간만을 통해, 순환의 주기를 통해 지구의 표면을 휘젓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의 운동성은 전혀 다른 것이 되었을 것이다. 인류는 테크놀로지를 통해 비약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백남준이 달을 떠올리면서 그것의 모습을 일련의 연속사진으로, 아니 연속 비디오로 다루고자 한 것은 바로 이러한 변화와 순환의 상태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사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실제의 달을 촬영한 것이 아닌, 진공관 TV에 자석을 대거나, 구형으로 생긴 물체를 촬영한 것이다. 이번 <달의 변주곡>에 전시된 작품은 2000년에 새로 제작된 것으로, 1997년에 제작된 비디오가 추가되어 총 13개의 TV로 이루어져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해 기획자인 이채영 큐레이터는 달의 ‘느린 시간성’에 방점을 찍었다. 달은 지구만큼이나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의 차고 이지러짐 자체가 한 달이라는 시간대를 주기로 느리게 전개된다. 이러한 느린 움직임은 특정한 시간적 한계점까지 지연이 이루어질 때 시각적으로 대상이 정지되어 있다고 느끼게 한다. 달의 스펙터클은 그것의 정지 혹은 극단적 느림에서 비롯된다. 이것을 ‘가시-하 지각(infra-perception)’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review2ok이번 전시에서 특히 놓쳐서는 안될 작품은 벨기에 출신 다비드 클라르바우트(David Claerbout)와 히라키 사와(Hiraki Sawa), 그리고 안규철의 작품이다. 다비드 클라르바우트는 2012년 미디어시티 서울에서 로 소개된 바 있다. 이번에 전시된 2013년 작 에서도, 한 장의 사진을 수많은 각도에서 본 입체적 이미지로 바꾸기 위해 그는 각각의 인물들을 25개의 이미지로 재촬영하여 같은 공간 안에 재구성해 넣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매우 느리게 움직이면서 한 장면을 바라본 것과 같은 동영상이 만들어지는데, 클라르바우트는 여기에 시선의 추상적 이동이라는 섹션을 추가함으로써 매우 형이상학적인 시선을 만들어냈다. 비를 피해 모여 있는 인물들의 군상을 떠나 비에 잠긴 흙탕길을 따라 이동하는 느린 카메라의 움직임은 마치 근원적 상태로 돌아간 것 같은 세계의 물질성을 보여준다. 느린 움직임을 통한 또 다른 작품인 은 처음부터 끝까지 디지털 기법으로 그려낸 가상적 풍경의 가상적 조합으로 이어지는, 놀랄 만큼 아름다운 수작이다. 느린 카메라의 이동을 따라 배경음악과 함께 아름답고 비밀스러운 자연의 풍경들로 이어지는 이 작품은 클라르바우트가 ‘시간의 단면’을 다루기 위해 스틸이미지로부터 출발하는 이유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히라키 사와의 2007년 작 역시 이 전시의 중요한 부분이다. 총 6개의 패널 위에 투사된 사와 특유의 굵은 입자(grain)들로 이루어진 영상들은 각각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낡은 벽시계 위에서 현재의 시간을 보여주는 <파편> 외에 짙은 흑백영상들로 이루어진 <새와 바다>, <이끼>, <벽에게 말을 걸다>, <순간을 위하여>, <돌아오는 길> 등의 제목이 달려 있다. 극도로 아름답고 시적인 풍경이나 적요한 실내장면을 보여주는 뒤의 5개 영상에서는 언뜻언뜻 풍경 속에 원자력발전소의 모습이 나타난다. 나중에 일어날 3·11 재난을 놀랄 만큼 묵시적으로 예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영상작품은 실제로 사와의 고향을 떠올린 것이라고 한다.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처럼 과거와 미래가 뒤섞인 듯한 시간의 흐름은 이 작품에서도 대기 속에 가득 찬 흐릿한 입자(particle)들로 흩어지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안규철의 설치작업들 가운데 메인이라고 할 수 있는 2014년 작 <달을 그리는 법>은 이 전시의 주제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작품으로 보인다. 밝은 전시장 안에서 여러 개의 둥근 거울을 이용해 조명을 반사시켜 한곳으로 모은 결과, 벽 위에는 예민하고 둥근 달 모양의 빛이 떠오른다. 이 시적이고 아름다운 설치작품은 그 간결한 형식만큼이나 뚜렷하게 달 모양의 빛을 한곳에 중첩시키는 작업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느림은 여기서 이 중첩의 퍼포먼스를 가리키며, 동시에 여러 개의 레이어로 이루어진 달빛의 흐릿함 속에도 깃들어 있다. 전시장 야외의 잔디 위에 파란색 글씨로 크게 쓰인 는 전시기간 중에 자라게 될 잔디에 덮여 서서히 사라진다고 한다.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선언된 파릇한 ‘새로운 삶의 첫날’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봄날의 아름다운 생명감에 자리를 내주는 것이다. 선언이 삶으로 변해가는 느린 시간을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 역시 안규철의 시각적 시(詩)세계를 잘 요약하고 있다.
이 외에, 료타 쿠와쿠보의 2013년 작 는 미디어시티 서울에서 선보인 의 또 다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안세권의 장기 프로젝트인 <서울 뉴타운 풍경> 연작은 전시 주제를 통해 또 다른 측면에서 작품의 해석을 시도했다는 장점을 보여준다. 조소희의 설치작품들 가운데에선 <비과학적인 촛불의 시학 II>가 다른 작품들과의 관계 속에서 시간의 지각을 손에 잡힐 듯 보여주는 작품처럼 느껴졌다. <달의 변주곡>은 주제의 해석만큼이나 개개 작품의 적확함과 수월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롭게 느끼게 하는 전시라고 하겠다. 

유진상・계원예대 융합예술과 교수

Preview –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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