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리뷰] 사진과 사회: 소셜아트

contents 2014.2. review | 사진과 사회: 소셜아트
롤랑 바르트는《 카메라 루시다》에서 “사진은 침묵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진과 사회전>의 사진들은 대체로 침묵과는 거리가 멀다. 네 개의 전시장을 채운 26인의 작품 150여 점과 37인의 팀 프로젝트의 사진작업들에는 이 전시의 담론인 ‘소셜아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아우성으로 가득하다. 이러한 목소리를 끌어내는 네 개의 프레임은 ‘비판, 행동, 공동체, 공공’이다. 먼저 ‘비판’이란 부제가 달린 전시공간에서 관객이 만나게 되는 첫 작품은 백승우의 <아카이브 프로젝트>이다. 현실의 시공을 자르고 붙인 듯 조합된 백승우의 허구적 건축물 사진은 이전시 전체가 이 땅의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만드는 ‘초현실주의적’ 풍경을 수집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일상적 풍경의 내면을 꿰뚫는 카메라의 시선은 집요하고 긴장감을 유발한다. 후쿠시마의 바다 앞에서, 카메라가 시선을 던져야 할 길을 찾는 박진영의 <카메라의 길>은, 우리의 의식에 휘두르는 마치 쓰나미와 같은 폭력적 이데올로기의 쇠망치를 ‘쇠못’으로 가두고픈 박불똥의 <길>로 이어진다. 이는 폭력을 폭력으로 제어하고자 하는 것이라기보다 어쩌면 자기 치유를 위한 동종요법과 같은 시어로 읽힌다. 아도르노를 따라 말하자면, 현실의 고통을 모방하는 ‘어둠의 미메시스’야말로창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동종요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진이 걷는 ‘길’은 현실 비판적이면서도 이처럼 자기 상처를 드러내 치유하고자 하는 측면이 있다.

이때 상처의 노출은 보는 이의 시선에서 곧 비판의 언어로 전유될 수 있다. 장지아의 ‘서서 오줌 누는 여성’의 사진 또한 남근 중심적 폭력과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금기한 것들에 대한 조소이면서, 그만큼 여성에 대한 사회의 통념이 만든 상처를 노출시킨다. 마찬가지로, 오형근의 카메라에 포착된, 꽃 같은 나이에 징집된 한국 남성들도 남근 중심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들일 수 있다.

어떤 사진들은 이러한 ‘비판’을 ‘행동’으로, 참여와 개입의 ‘새로운 퍼블릭아트’로, 즉 사회적 실천으로 옮기고자 한다. 이 때문에 이러한 행동주의 예술에 선 사진은 침묵하기가 어렵다.

보는 이의 시선을 명료하게 찌르는 ‘푼크툼’을 파생시키도 전에 충분히 의미가 전달될 만큼의 정보와 주장으로 보는 이의 호기심을 채워주고 마는 즉, ‘스투디움’이 가득한 사진 속에서 행동주의 예술가들의 성마른 외침이 넘친다. “모래강 내성천을 함께 지켜요”(리슨투더시티)의 사진과 “표현의 자유”(이윤엽)의 목판, 여성그룹 입김의 시위적 퍼포먼스사진, 이하의 정치인들에 대한 풍자적 몽타주사진들, 공공예술의 프로젝트보고서 성격의 사진들은 ‘행동’의 프레임 안에서 오직 한 가지 목소리를 낸다. ‘비판’의 장에서 보였던 예술의 아우라와 다의성은 이 ‘행동’의 장에서는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편 어떤 공동체의 장소특정적인 사진작업들은 조금 다른 목소리를 낸다. 지워지고 소외되고 상처받은 역사의 기억을 불러와 어루만지는 ‘공동체’의 프레임에 와서, 사진의 목소리는 낮아지고 조용해졌다. 그중에서도 재일조선인 김인숙이 유치원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다닌 13년간의 오사카조선학교시절에 대한 사진과, 지금은 폐쇄된 이강우의 정선탄광촌 사진은 오래전 그 장소를 거닐고 그곳의 물건들을 마음에 담아둔 이 작가들의 ‘지속된 기억’의 편린들을 나누게 한다.

개인의 역사와 공동체의 역사가 오버랩되는 역사적 궤적의 어딘가에서 그들이 본 어떤 ‘소중한 것’이 거기 있다. 그 사진들은 묘하게도 허구와 현실의 중간에서 부유하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럼으로써 소외된 공동체의 아픔에 우리 자신의 감정의 빛깔을 덧입히게 만든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 눈을 감을 것, 하찮은 세부로 하여금, 홀로, 감정적 의식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도록 내버려둘”(롤랑 바르트) 침묵 가운데 듣는 예술의 음성과 함께 말이다.

유현주・미학, 미술평론

왼쪽·박진영 <시리즈 사진의길 카메라들 14.7m>(사진 왼쪽) c-print 220×180cm
오른쪽·입김< 아방궁종묘점거프로젝트-거리행진>(사진 왼쪽 벽면) 2000

[전시리뷰] 박경률_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 가능성의 릴레이

contents 2014.2. review | 박경률_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 가능성의 릴레이
박경률의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는 프로젝트 성격을 띤 전시로 먼저 용산구 치매센터에서 치매 노인 3명과 함께 실행(인터뷰/4주간 24회, 드로잉)한 <가능성의 릴레이>(2013.11.2~29)와 연결된 구성을 보인다. 전체적으로는 치매환자인 친할머니의 인터뷰 영상과 치매 노인 3명의 인터뷰를 각색하여 노인 배우의 연기를 통해 제작한 페이크 다큐멘터리 영상, 그리고 그 노인들과 함께 얘기하며 풀어낸 드로잉들과 그 얘기들을 토대로 작가의 상상력을 더한 단편 소설(<고요한 소녀>, 세 개의 거울액자 속에 새김), 또한 이러한 경험과 자신의 기억을 의식과 무의식 관계 속에서 배설한 낱개의 드로잉 및 서술된 드로잉들로 구성되었다.
여기서 작가는 의식과 무의식에 관한, 즉 ‘무의식적으로 그린다?’라는 의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그 화두를 프로젝트로 증명해보이려고 했다. 작가가 자율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어떤 대상을 ‘채우고-지우기’를 반복하며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상, 현상, 사건, 기억, 번안, 편견 등을 자신의 언어로 전환하여 콜라주하거나 스토리화하는 과정을 겪는다고 가정한다면, 그 화두도 이러한 되새김질 현상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동안 그는 자신의 주변에서 부딪히는 일상의 사건들과 잠재된 기억들을 자신만의 여과장치를 통해 걸러서 해체시키는 일련의 드로잉들을 페인팅으로 구조화하는 작업을 했었다. 반면, 이번 전시에서는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과정에 불과했던 드로잉들을 전면에 부각시키면서 자신의 언어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를 실험하며 유연한 태도로 접근하고 있다.
작가는 어떤 측면에서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거나 너무도 일반적 의
미인 ‘무의식’을 화두로 삼아 치매 환자분들을 만나고 대화한다. 그 과정이 다시 자신을 들여다보며(거울 현상) 이미 형성되었거나 무의식을
경험하는 태도로 자신의 언어를 해체하는 자각현상과 같은 의미로 다
가왔다.
무의식의 태도로 접근한다는 자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내어놓고 다시 시험받는, 그래서 역으로 영역화된 페인팅을 유연하게 해체시켜’연약한 드로잉’이라고 명명한 것이 아닐까.(큰 작품의 드로잉은 여느작가들의 드로잉에 비해 구조적이다.) 그렇다면, 이번 전시는 언어의 환영체가 구축되어 관객들로 하여금 일방적으로 감상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닌, 언어와 이미지 사이를 열어놓고 탐색하는 드로잉적인 사유의 태도로 접근하게 하여 보는 이들과 묵언의 대화를 나누며 호흡을 유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고요한 소녀> 작품이다.
자기언어를 구축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박경률 작가의 프로젝트를 통한 시각적 행위는 끊임없는 화두로 시작되었고, 이어서 나와 사회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예견치 못한 내러티브적인 얘기들을 들춰내어 이미지효과를 떠나 메시지 전달로서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로써 그가 앞으로 유형과 무형, 사람과 사람, 글과 이미지, 책 속의 앞뒤 간지 등의 수많은 ‘사이 공간’에까지 사유를 넓혀갈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객체와 주체 사이의 이분법적 구별을 거부하는 정서적 흐름이 그의 인문학적 태도에 기인하며, 동시에 주체의 인식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그의 이면과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가능한 시도들이었고, 하나의 매체에만 국한되지 않는 다차원적 성향을 지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관훈·Project Space 사루비아다방 큐레이터

왼쪽·<고요한 소녀>(가운데 액자 작업) 혼합재료 70×53(각, 총3점) 2013
오른쪽·<연약한 드로잉 No.650-미래와 할머니와 복잡함에 대한 1차원적 반응들>(부분) 240×650cm 2013

[전시리뷰] 유비호_Belief in Art

contents 2014.2. review | 유비호_Belief in Art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신념의 선, 2013>의 영상에서 사람은 그저 하나의 점에 불과하고 대지와 지평선만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목적지는 그곳에서 자신이 정해놓은 하나의 선(線)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디에 서 있든 그곳에서 보면 광활한 대지와 지평선만 보일 것이다. 자신이 정해놓은 선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것은 그 순간 하나의 사치일지도 모른다. 그 순간은 생각이 정지하고 목적지도 사라지며 방향 감각 또한 사라지는 것이다. 아니 그것은 또한 시간의 의미를 상실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목적지가 사라지는 것은 미래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미래가 사라지는 것은 과거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목적지가 사라질 때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자 했던 과거의 모든 노력은 한순간 주마등 같이 스쳐가며, 허탈함과 공허함만이 밀려올 것이다.
자신이 정해놓은 선이 사라지면, 과거와 미래가 사라지고 몸뚱이 하나만 남아있는 현재의 자신을 보게 된다. 자신이 정해놓은 선은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목적지가 정해지는 순간 우리는 주변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그저 주변의 모든 사람을 자신의 목적지로 가기 위한 하나의 징검다리로 볼 뿐이다.
예술은 정해진 선이 있을까? 예술의 정의는 각자 자신들이 정해놓은 선만 있을 뿐 그것은 <신념의 선>의 영상에서 보듯이 대지나 지평선과는 상관없다. 아니 그보다 예술은 어떤 목적을 지녀야 하는 것인가? 예술 또한 어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통해 현재의 자신을 보고, 주변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까?
유비호의 <신념의 선>의 영상은 광활하고 무한한 공간 앞에서 겪게 되는 방향성의 상실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그것은 예술에 어떤 정해진 목적지가 있는 것과 같이 나아갔던 작가 자신의 개인적인 성찰을 이야기하는 고백록과도 같을 지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정해진 선이 사라지고 광활하고 무한한 공간에 선 순간 또다시 <긴 슬픔 공허한 숨>(2007)의 영상에서 느꼈던, 자신만이 혼자 이 세상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듯한 작고 왜소한 마음이 또다시 밀려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위안의 숲>(2013)의 영상은 자신이 <신념의 선>(2013)과 <긴 슬픔 공허한>(2007)의 영상에서 느낀 것과 같은 마음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안하는 것이자 또한 자신을 위안하기 위한 작은 몸부림과도 같다. 나무는 사람들처럼 어떤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지도 않으며, 사람들을 하나의 징검다리로 이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유비호의 <Belief in Art> 전시는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다가 방향성을 상실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예술이 어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는 것이며, 우리는 누구를 위해 목적지를 정해 나아가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한 것이다.
조관용・《미술과 담론》 편집장

<위안의 숲_겨울(남)>(벽면 왼쪽 사진) <<위안의 숲_겨울(여)>(벽면 오른쪽 사진) 120×180cm(각)2 013

[전시리뷰] 한국화의 반란

contents 2014.2. review | 한국화의 반란

위·이동협 <닮아도>(사진 오른쪽) 종이에 먹, 물감 33×25cm(각) 2005
아래·진현미 <겹-0103>(사진 앞) 투명필름, 한지에 먹 400×320×300cm 2012
안국주 <우리 엄마는 어디있어? 8>(사진 맨 왼쪽) 혼합재료 130×194cm 2013
사진・박홍순
‘한국화의 반란’이라는 자극적 제목만큼이나 놀라움을 주는 것은 미술관이 들어선 노원구 중계동의 풍경이다. 그곳은 아파트가 많은 정도가 아니라, 아파트만으로 이루어진 동네 같았다. 도미노 게임처럼 끝도 없이 펼쳐진 시멘트 블록은 진정 ‘현대적’ 도시 그 자체로 다가온다. 아파트 사이로 물질적, 정신적 차원의 대량 소비를 소화할 수 있는 대형 마트들과 극장들이 보이고, 고층 건물이 품고 있는 작은 공원 속에 자리한 미술관은 무슨 전시를 해도 최소한의 흥행은 보장받을 것 같은 흐뭇한 믿음을 준다. 한국 사회에서 예술의 전반적인 타자화에도 불구하고, 시민의 문화 향수권 확대라는 계몽주의적 모토로 탄생한 근대적 제도가 예술의 힘을 사회에 알리는 전초기지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과거나 현재의 자리(place)인 땅보다 미래의 공간(space)인 허공에 더 많은 사람이 살고 있으며, 칸막이 쳐진 단편들을 잇는 것은 자연발생적 구조가 아니라 어느 날 동시에 시행된 공시적 구조로서의 산물이다. 현대는 옳고 그름이나 미적 취향의 문제를 떠나 우리의 삶의 구조적 차원에서부터 자리를 잡았다. 미술관을 향해 최소한 몇 분간이라도 걸어가 본 관객은 전통에 관계된다고 믿어지는 한국화가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온몸으로 깨달을 것이다. 동시에 체계는 체계 자체를 유지시키려는 관성이 있기에, 대학에 한국화과라는 전공과목이 건재하는 한그 위기라는 것도 때 되면 나타났다 사라지는 담론 소비의 일환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벽지를 닮은 한국적 모더니즘이 미학적이거나 사회적인 담론의 우위 이전에, 막 생겨나기 시작한 아파트의 하얀 벽면들을 채우기에 적절했기에 유예없는 시장의 선점이 가능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한국화 역시 현대에 대한 나름의 상황파악을 통한 특단의 조처가 필요한 것이다.
12명의 젊은 한국화과 출신자가 참여한 이 전시가 ‘반란’에 값하는 도발이나 대안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에서 우리를 전면적으로 규정짓는 현대의 증후가 보인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 증후 중의 하나가 단편화이다. 완전하다고 믿어지는 원형적(전형적) 모델로서 간주된 전통, 그 유기적 총체성은 해체되었고, 단편들은 결핍 또는 충만의 기호로 나타난다. 여러 방식으로 구현된 30여 점의 작품을 묶어낼 수 있는 ‘동양화의 새로운 실험’은 어떤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단편들이 조합되는 방식을 말한다. 한지 위에 고서 콜라주, 수묵과 아크릴채색으로 그려진 권인경의 풍경화는 서로 다른 기원을 가진 것들이 충돌하는 현대의 풍경이다. 짧은 시간 압축 성장한 우리의 근대화는 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든 이질적 코드의 공존을 낳았던 것이다. 입체로 구현된 이정배의 산수는 전통의 바탕인 자연의 현 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은 깊은 뿌리를 가지는 온전한 전체, 또는 본질이 아니라 단편의 조합이다. 사진이나 플라스틱 모형으로 축소된 자연은 탈색되어 있고 잘려나갔으며, 인간이라는 이물질에 의해 오염되고 잠식된다. 어수선하게 가지를 뻗는 식물로 대변되는 빈약한 토양의 산물, 그리고 포획을 위해 걸쳐놓은 막과 망들은 자연을 착취하고 소유하려는 인간의 과도한 욕망을 알려준다. 그러나 단편은 나형민의 풍경에서 천상의 도시 같은 충만함으로 떠오른다. 그는 평범한 동네 한켠을 잘라내 뭉게구름 있는 푸른 하늘 위에 붕 띄워놓았다. 그곳으로부터의 낙하도 아찔하면서 신나는 놀이로 나타난다. 한지에 토분채색으로 담백하게 그려진 그의 풍경에서 단편화는 박탈감보다는 해방감을 낳는다. 근대도시가 소외와 자유를 동시에 낳았듯이 말이다.
전통, 풍경, 인물 등이 짙은 안개 속 모호한 분위기에 잠겨 있는 안국주나 이은실의 작품은 단편화의 이면이다.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단편은 수수께끼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단편의 비의적 속성을 극대화한 그들의 작품은 은은하면서도 자극적이다. 전통적 산수화에 포함된 이상향적 가치는 단편의 모서리를 최대한 둥글려서 통합된 가상을 창출하려 한다. 일월도처럼 해와 달이 동시에 떠있는 이용석의 풍경은 이국적 동식물로 가득한 이 시대의 이상향이다. 열대의 섬이 떠오르는 풍경은 전통사회에서는 흔하지 않았던 관광의 산물이다. 관광은 전통뿐 아니라 현대예술을 대체하는 문화소비 품목으로 자리 잡았다. 수십 장의 겹쳐진 투명 필름으로 만들어진 진현미의 산수풍경은 단편을 전체로 종합하기 위한 장치가 독특하다. 아마도 현대의 대표적인 문화예술로 자리 잡은 시간예술(영화)을 공간화한다면 이런 모습이 될 것이다. 일상의 대소사를 기록하는 기념사진의 틀을 빌린 변윤희의 인물화, 그리고 같은 크기의 화선지에 수백 명의 인물을 그린 이동협의 작품은 시공간의 박편인 사진을 활용한다. 기계로 수집된 박편들은 기계적으로 재배열된다. 단편화된 인간은 사물과 구별되기 힘들다. 서민정은 안팎이 불분명한 공간에 고립된 인간인지 인형인지 알 수 없는 인물을 그린다. 단편화된 인간에게 몸의 온전한 경계를 기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지요상은 두개골 안에 있어야 할 뇌를 몸 안팎을 넘나드는 머리카락으로 가득 펼쳐놓았다. 중력에 순응하는 검은 선의 다발들이 하얀 벽 위에서 변화무쌍하게 유영하는 권기범의 작품은 단편의 확대를 꾀한다. 그는 바닥에 놓고 그리는 한국화의 전통을 순순히 따르지만, 그것을 일으켜 세우고 확장하며 벽체라는 물질과 결합했을 때의 기념비적 효과를
노린다.
이선영・미술비평

권기범 <JUMBLE PAINTING 09_GRAVITY TS (Tube)> 혼합재료 380×3100cm 2009

[화제의 전시] 애니미즘들을 다시 움직이기

contents 2014.2. exhibition topic | 애니미즘들을 다시 움직이기
50여 점의 필름, 비디오 및 각종 사진과 회화자료들을 포괄하는 방대한 그룹전 <애니미즘전>의 테마는 제목이 시사하듯 ‘움직임’이다.
처음으로 떠오르는 움직임은 민속학과 신화학에서 말하는 애니미즘이 뜻하는 움직임, 즉 자연과 문명의 사물들에 깃들어 있는 영혼의 움직임이다. 그러나 애니미즘과 동일한 어원을 갖는 ‘애니메이션(animation)’이라는 기법에 착안해보면 운동의 외연은 확장된다. 사물과 인간의 운동은 그 자체로는 파악되지 않는다. 운동은 재현되고 나아가 생산된다. 시각매체의 역사는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을 구분하고, 운동을 가시화하고, 정지된 것에 운동을 불어넣은 과정들의 역사다. 이렇게 보면 ‘애니메이션’은 셀(cel)이나 인형 등의 재료에 근거한 특정한 무빙 이미지 예술의 장르적 경계를 넘어선다. 대신 ‘애니메이션’은 움직임에 매혹되어 그 찰나적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고안된 회화와 사진의 기법들, 기계적 자동장치를 이용해 정지 이미지를 운동의 환영으로 변환시키는 영화의 본성, 그리고 전자적 신호와 컴퓨터 알고리즘이라는 새로운 자동장치들이 생산하는 포스트-영화시대의 다양한 운동들을 포괄한다. <애니미즘전>은 이러한 미디어들을 아우르는 운동의 역사에 대한 조망이다. 나아가 이 전시는 이러한 운동들이 서구적 근대성의 다양한 국면과 맺어
온 관계의 계보들을 비선형적으로 배치한다. 그 관계들이란 근대성이 형성하고 지탱해 온 다양한 구분을 말한다. 식민주의와 과학적 이성의 양날개를 달고 비행한 서구적 근대성은 주체와 객체, 자연과 문화, 인간과 비인간, 문명과 야만, 이성과 맹신 사이에 명징한 경계선을 그어왔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미디어 이미지들이 구현해 온 애니미즘은 19세기 이후 사회와 주체성의 생산을 지탱해 온 이러한 경계선을 드러내는 동시에 이를 문제 삼는다. <애니미즘전>은 애니미즘의 이러한 이중성에 대한 전시다. 기획자인 안젤름 프랑케가 말하듯 이는 “애니미즘을 보여주기 위한 전시이자 이를 파괴하기 위한 전시다.” 비록 프랑케가 “이 전시는 과학적 상상력과 예술 형태들로 표현된 애니미즘에 대한 것이며 민속학이나 신화학에서 말하는 애니미즘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이 전시 관람자들을 일차적으로 유인하는 작품들은 마술적 믿음, 토착적 신앙, 이국적이고 원시적인 문화, 영혼이 스며든 사물, 생명으로 충만한 자연 등을 소재로 한 것들이다. 이 모든 것은 근대적 세계관이 전근대적인 것의 이름으로 배제하거나 대상화한 타자들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애니미즘은 근대성의 이원론적 위계들이 설정한 타자들의 귀환이다. 시
각미디어는 이러한 귀환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시각미디어가 세계와 주체 사이에 자리 잡으며 운동을 생산할 때, 그 운동은 주체와 객체, 영혼과 사물, 자연과 문명의 은밀한 소통 그 자체를 체현하는 매개물이 되기 때문이다(그래서 Medium이라는 단어는 ‘매체’와 ‘영매’를 모두 뜻한다). 이에 화답하듯 <애니미즘전>의 몇몇 작품은 애니미즘적 주체와 인식, 현상들을 전근대적 타자들로 규정하는 근대적 지식과 지각의 체계를 노출하거나, 그러한 체계를 넘어서 애니미즘의 역동성을 담아내고 탐구하기 위한 시각미디어의 대안적
사용법들(즉 시각미디어를 일종의 영매처럼 활용하는 방법들)을 보여준다.
수잔 슈플리의 <태양도 거짓말을 할 수 있는가(Can the Sun Lie?,2013)>는 태양의 위치 변화와 기후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에스키 모들의 세계관이 지구온난화에 대한 오늘날의 과학적 지식체계에서 기각되는 과정을 민속지적 영상과 디지털 데이터 영상, 사진 이미지의 병치를 통해 다층적으로 분석한 에세이 다큐멘터리다. 다큐멘터리의 다양한 양식들은 타자성의 불가해한 매혹들이 지배하는 세계를 드러내는 데 유용하게 사용돼왔다. 범신론적 믿음이 지배하는 나바호족의 세계를 포착한 <용감무쌍한 그림자들 (Intrepid Shadows, 알 클라(Al Clah), 1966/69)>에서 자유분방하게 가속화된 탈중심적 카메라는 보이지 않는 영혼이 자연을 변화시키고 무생물(정체불명의 금속 고리)을 활성화시키는 과정 자체를 체현함으로써 민속학적 다큐멘터리의 관찰자적 거리두기를 극복한다. 자크라왈 닐탐롱(Jakrawal Nilthamrong)의 <비현실의 숲(Unreal
Forest, 2010)>
은 잠비아 현지 제작진과 함께 한 제작 과정을 그대로 노출하는 반영적 양식을 통해 영적 세계의 경계에 대한 질문을 허구와 현실의 경계에 대한 질문으로 연장시킨다. 다큐멘터리 양식들의 반대편에는 애니미즘의 역량을 빌려 이미지와 시각적 지각의 경계를 확장한 실험영화들이 있다. 일본 아방가르드 영화의 중요 인물인 쿠사마 야요이(Yayoi Kusama)는 16mm영화 <쿠사마의 자
기-삭제(Kusama’s Self-Obliteration, 1967)>에서 불연속적 편집과 자유분방한 카메라워크를 통해 일본 전통신앙의 정령적 존재와 서구 사이키델릭 문화 사이의 현란한 소통을 추구한다. 서구적 정신주의와 토착적 애니미즘 사이의 결연은 초기 수작업 추상 애니메이션의 선구자 렌 라이(Len Lye)에게서도 드러난다. 그의 첫 작품 <투살리바(Tusaliva, 1929)>는 추상회화의 기하학적 형태들을 사모아족의 원시적 형상들로 역동적으로 변형시키는 자동기법(automatism)
의 모범 사례다.
습득영상, 사진적 이미지의 유령성
애니미즘을 다루는 이러한 다양한 방식들은 시각미디어 자체를 구성하는 유령성(spectrality)의 존재를 암시한다. 사진과 영화가 특히 유령적이다. 롤랑 바르트가 말하듯 사진이 관람자의 감각에 호소하는 내밀한 지점은 과거에 존재했으나 현재는 부재한 대상과 사건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익숙하고도 낯선 (그리고 현전과 부재가 공존하는) 과거의 흔적이 가진 유령성은 영화를 통해 새로운 차원을 얻는다. 영화 이미지의 자동운동은 셀룰로이드를 이루는 무수한 프레임 사이의 빈 공간, 그리고 프레임이 본원적으로 가진 사진적 이미지의 정지 상태에서 비롯된 환영적 운동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진과 영화는 자크 데리다가 《에코그라피》에서 말한 유령의 논리, “볼 수 있
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을 초과하는” 유령의 논리에 사로잡혀 있다.
습득영상(found footage) 제작은 바로 이러한 사진과 영화의 유령성을 탐구한다. 기존에 만들어진 이미지의 전유와 변형, 재배열로 이루어진 작품을 뜻하는 습득영상은 2차대전 후 실험영화를 통해 풍부히 발전했으며 1990년대 이후 영화적 비디오 설치작품(cinematic video installation)의 한 경향으로 자리 잡앗다. 습득영상 제작에서 사진적 이미지의 유령성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기법은 일종의 비정상적 운동들, 정지와 감속의 운동들이다. 이 운동들은 지속적으로 교체되는 영화 이미지의 흐름들을 일시적으로 지연시킴으로써 이미지의 형식적, 수사적 전략들을 드러내고 이미
지에 기입된 과거의 흔적들을 관람자의 현재에 강렬하게 남기기 때
문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습득영상 실험영화를 지속적으로 탐구
해 온 켄 제이콥스(Ken Jacobs)의 <자본주의: 노예(Capitalism:Slavery, 2007)>는 19세기 미국 목화농장 노동자들의 입체사진 이미지를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통해 살아 움직이게 한다. 미세하게 다른 두 개의 이미지를 번갈아 보여주는 디지털 자동기법은 원래의 입체사진이 잠재적인 수준으로 나타냈던 3차원적 몰입의 황홀경을 현실화한다. 이 황홀경의 환영적인 면모는 이미지들 사이의 간극에서 비롯되는 플리커 효과(flicker effect)들로 인해 지속적으로 해체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체적인 충동은 식민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을 착취하면서 그들의 육체에 부과한 피로의 제스처들을 강렬하게 확대하기도 한다. <자본주의: 노예>에서 정지를 수반한 역설적인 애니미즘은 이탈리아 습득영상 제작의 거장들인 여반트 기니키안과 안젤라 리치 루치(Yervant Gianikian & Angela Ricci Lucchi) 가 사용하는 감속의 기법과 호응한다. <다이아나의 거울(Diana’s Looking Glass, 1996)>은 로마 남부의 신비스러운 한 호수가 무솔리니의 제국주의적 파시즘에 의해 개발되는 과정에 대한 기록영상들을 소재로 삼는다. 호수에 가라앉은 것으로 추정된 로마 시기의 거대한 배를 끌어올리기 위해 동원된 노동자들의 지친 눈빛과 몸짓들은 슬로 모션으로 관람자에게 다가온다. 이 두 편의 습득영상 작품은 과거의 파편들이 현재의 인식과 만나는 깨달음의 불꽃을 지피고 사진적 이미지의 본원적인 유령성에 도달하기 위해 기존의 이미지들에 새로운 운동을 부여한다. 여기서 애니미즘은 다시 움직인다(re-animated).
시각미디어가 근대 이후부터 구현한 다양한 형태의 애니미즘들
은 주체의 경험과 정서, 사유를 재현하고 조직해왔다. 이러한 과정은 기술이 근대성의 지식체계 및 제도들이 이루는 네트워크 내에서 작동해왔음을 말해준다. 전시의 참고자료로 제시된 샤르코의 히스테리 환자들에 대한 사진, 메스머의 전기최면 시술에 대한 드로잉, 그리고 에티인 쥘르-마레가 움직이는 물체와 활동하는 육체의 운동을 과학적으로 탐구하기 위해 개발한 연속사진(chronophotography)은 시각미디어들이 인간의 지각과 생리적, 심리적 과정들을 형성한 사회적 장치(apparatus)로 기능을 했음을 말해준다. 이 모든 사례에서 운동은 주체의 내적 자아 안에 있는 불가해한 신경생리적 차원과 무의식의 지대들을 가시화하고(샤르코, 메스머), 주체의 외적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분석하는 데 복무했기 때문이다 (마레). 사진과 영화에 드러나는 다양한 애니미즘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생체권력(biopower)의 작동양식은 전자적 신호, 컴퓨터 재현체계 및 인터페이스가 비물질노동(immaterial labor)을 활성화함으로써 사용자의 지각과 정서를 규정하는 오늘날의 미디어 경관에도 적용된다(그래서 이 전시에 비물질노동 개념을 제안한 이탈리아 철학자 마우리치오 라자라토(Maurizio Lazzarato)가 참여한 것은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전시장의 3층에서 찾아볼 수 있는 두 개의 작품은 미디어 애니미즘이 주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 대한 비판적 논증들을 펼치는 비디오 에세이의 형태를 취한다.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의 <평행(Parallel, 2012)>은 오늘날 현실을 사진적 이미지와 가깝게 시뮬레이션하는 컴퓨터 게임의 풍경 이미지들(바람, 바다, 나무)을 탐구하고 그것들을 카메라의 기록에 근거한 영화적 풍경의 이미지들과 대비시킨다. 이러한 대비 전략을 통해 파로키는 컴퓨터 이미지의 하이퍼리얼리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두 가지 방식으로 유도한다. 하나는 컴퓨터 이미지가 현실로부터 추상화된 수학적 기호들의 알고리즘적 연산에 근거한다는 점, 다른 하나는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컴퓨터 이미지는 아무리 모방적이라도 물리적 현실로부터 일정 부분 추상화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재현과 시각적 인식에 대한 비판적인 계보학적 탐색은 톰 홀러트(Tom Holert)의 <광택의 노동(The Labours of Shine, 2012)>에서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대중영화의 매혹적인 스타 이미지와 광택을 내는 구두닦이의 노동 과정에 대한 습득영상, 그리고 브랑쿠시의 광나는 청동 조각상을 병치시킨 이 작품은 겉으로는 무관해 보이는 예술과 노동, 대중문화 사이의 연결고리를 광택이 가진 의미에서 찾아낸다. 광택은 빛의 물리학을 넘어 일상적 대상을 예술작품으로 변환시키고, 재화에 교환가치를 부여하며, 이미지에 물신적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미학적, 정치적 현상인 것이다. 이 두 작품이 공통적으로 채택하는 2채널 비디오는 시간적인 순차성에 근거한 영화적 몽타주를 공간적인 동시성으로 치환한다. 이러한 공간적 몽타주는 멀리 떨어진 이미지들을 새로운 맥락과 의미망에 배치한다는 점에서 다시 움직이기(re-animation)의 또 다른 양식이다. ●

애덤 아비카이넨 <천연자원 관리국의 범죄현장 조사서>(오른쪽) 2013과 임흥순 〈비념〉(왼쪽) 2012

당신이 기획한 전시는 최근 비엔날레, 대규모 미술 행사를 중심으로 스펙터클한 작품 선정과 디스플레이를 추구하는 전시공학과는 동떨어져 보인다. 특히 이번 전시는 상당히 많은 양의 아카이브와 텍스트로 구성되어 관람객이 그것을 자세히 살펴봐야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이 의도한 전시 디스플레이의 방향에 대해 설명해달라.이번 전시는 예술을 통해 개념, 상상력 및 미디어 테크놀로지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고, 모더니티의 논리와 증상에 대한 연구에 관해 관객들의 관심을 유도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연결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이 전시는 매우 넓은 의미에서 미디어의 역사에 관한 전시이다. 또한 전시라는 매체, 형태 그리고 전시의 역사가 삶 또는 살아있음과 관련된다는 것에 대한 연구이자 반영을 의미한다. 난 항상 ‘애니미즘’이라는 용어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든 회화나 도자기처럼 전시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제의적인 춤과 박물관 전시 사이의 간극을 떠올린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스펙터클한 전시와 자본주의 문화는 이 간극을 위장한다. 그러한 전시는 모든 애니메이션(animation, 생명력을 불러일으키는 효과)이 전시될 수 있고 소비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애니미즘은 매우 복잡한 것이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문화’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신중하게 획득되고 유지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도 매우 큰 개념이다.
이 전시는 관객이 기대하는 바와 다르게 애니미즘이 아니라 뮤지엄과 죽은 물질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박물관과 모더니티의 관계는 애니미즘 파괴의 역사이다. 뮤지엄에 대한 소외 효과를 만들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뮤지엄은 무엇을 보고 물건을 신중하게 연구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이다.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지미 더럼(Jimmie Durham)의 작품인 유리 진열장 속의 돌들은 관객들이 보기에 유머러스할 것이다. 우리는 자연사 박물관에서 나비를 고정시켜 놓듯이 애니미즘을 고정시킬 수 없다. 애니미즘은 항상 영적인 것의 과정과 관련 있으며, 믿음 또는 절대적인 지식 또는 진리와 같은 독단적인 유형과는 관련이 없다. 애니미즘은 마음의 상태에 관한 것, 살아있게 혹은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전시에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구조적인
상상력을 주장함으로써 변증법의 형태를 통해서 가능하다. 이번 전시에서
박물관 진열용 유리 케이스 다음으로 중요한 요소는 영화와 영화의 역사를
소개한 것이다.
<애니미즘전>은 순회하면서 작업이 추가되거나 빠지기도 하는데, 이번 전시에는 한국 작가들의 작업이 몇 점 추가됐다. 이들 작업에서 보이는 애니미즘적 요소에 관해 어떻게 느꼈는지, 그리고 나라별로 당신이 전시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 중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애니미즘은 모더니티의 역사와 같은 ‘보편적인 역사’의 부정적인 면과 유사한 지점이 있다. 국가마다 다른 문맥이 있지만 그것은 진정한 글로벌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유럽에서는 무엇보다 애니미즘을 과학과 이성에 반대되는 허구, 미신 등의 개념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식민주의적 사고의 단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이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고 애니미즘을 말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한 도전이었다. 그리고 어떤 지역에서는 역사적 과정이 이 전시의 맥락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중국의 선전(深圳)같은 도시에서는 제국주의, 국수주의적 전통, 급속한 근대화와 같은 20세기 충격으로 기억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혼동 과정 없이 ‘모더니티’와 ‘애니미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웠다. 한국에서는 ‘토속신앙’ 문화는 수백 년에 걸쳐 제국과 가부장적인 문화에 대한 잠재적인 저항을 유지하고 있다.
이 전시는 애니미즘의 ‘귀환’ 그 자체에 관심을 둔 것 같지는 않다.

이번 전시는 애니미즘의 파괴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비판적이지만 애니미즘의 ‘귀환’에 관해서는 회의적이다. 근대 국가와 자본주의의 조건하에서 이 귀환은 본질과 전통의 귀환으로 오인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종종 문제를 일으키는데 근대 국가의 논리 자체가 이러한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안티-애니미즘도 결국은 애니미즘의 한 형태로 애니미즘 외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애니미즘의 다양한 형태와 이와 관련된 힘, 집합체, 그리고 이야기들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음을 제안하는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상상력을 실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역사적인 전시를 뮤지엄 속에
서 구현하는 일을 예술가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하고 싶다. 그리고 웃음에
관한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다.
이슬비 기자

지미 더햄 〈롯의 아내도 이해했으니, 과거를 회상하기만 하면 화석화와 퇴적작용이 일어날거야〉 돌 종이 칼 스푼 접시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