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ATOR'S VO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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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김선두 〈별을 보여드립니다- 파〉 장지 위에 먹, 분채 130×162cm 2015 아래 임태규 〈 love story#4 〉(오른쪽) 종이위에 먹 107×73.5cm 2016

겹의 미학 1,2부

6.1~7.15/7.18~8.31 복합문화공간 에무

김영종 | 복합문화공간 에무 대표

바그다드의 알무타나비로(路)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책방 거리다. 고서를 파는 상인이 음유시인처럼 책 속의 구절을 읊고 있는 모습이 <페이퍼로드> 영상에 나온다.
“나는 장님조차도 볼 수 있을 정도로 행실이 바른 자이며 귀머거리조차 내가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질책하지 말지어다. 그런 나도 이미 잊고 있었다.
내 유년의 고향 바그다드, 너의 눈은 마치 잠든 태양과 같구나.”
채륜이 발명한 종이가 동서로 전파되면서 지역적 특색을 띠게 되는데, 한편으로 그 지역의 문명 역시 지역화된 종이에 반응한다. 한국에서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전통적으로 한국화가들은 닥종이의 하나인 장지에 그림을 그렸다. 장지에 제대로 색을 내려면 수십 번의 덧칠이 필수적이다. 많게는 30~50번 정도 칠함으로써 밑에 칠한 색들이 우러나와 색감의 깊이를 자아낸다. 이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색상의 어우러짐이 생겨난다. 이 아름다움이 ‘겹의 미학’이다. 바탕 재료인 종이가 질기고 단단하지 않으면 이 기법(장지기법)을 수용할 수 없다. 장지는 가재수건으로 심하게 닦아내는 것까지 모두 포용하고 견디는 종이다.” 〈겹의 미학전〉을 6회째 이끌어온 작가 김선두의 말이다. 그런데 겹은 물질의 특성이긴 하지만 미학은 아니다. ‘겹의 미학’과 ‘장지’는 한국화의 정체성을 특징짓는, ‘예술론’과 ‘물질’이라 할 수 있다. 예술은 형식적 특성을 갖춰야만 한다. 이와 관련한 고민이 위의 아포리즘을 되뇌게 한다.
“내 유년의 고향 바그다드, 너의 눈은 마치 잠든 태양과 같구나.” 바그다드 시인은 왜 고향을 잊고 있었을까? 이 질문은 나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우리의 영혼이 서구 지식과 문화로 꽉 차있기 때문이다. 아마 바그다드 시인의 회한도 그와 같지 않았을까 싶다. 내친김에 이런 가정을 해본다. 그는 중세의 어느 대학에서 유학하고 수도원에서 정진한 지식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플라톤의 이데아에 깊은 영향을 받고, 교부철학 혹은 스콜라철학을 공부했을 것이다. 이 가정은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서구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한 말에 신세지고 있다.
‘겹의 미학’의 특성을 생각할 때, ‘미의 본질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순간 미로에 빠지게 된다. 미뿐만이 아니라 진이든 선이든 그 무엇의 본질을 묻는 자는 이데아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데아 세계는 질문자의 영혼을 잠식한다. 질문자의 전두엽에 내려앉은 비둘기의 부리에는 ‘본질은 영원불변하며 사유 속에만 있다’는 메시지가 물려있다. 이제 그는 ‘미의 본질’을 오직 사유 속에서만 탐구할 준비를 갖춘 것이다. 특히, 식민지 지식인에게 플라톤의 이데아는 두 눈 뜨고 꿈꾸게 하는 마약과 같다. 먼저 고향(고국)의 현실을 잊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회주의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본질이란 존재하지 않은 환영’임을 밝혀서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했던 철학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가져왔다. 이때의 본질은 자연과학의 대상이 아닌 사랑, 미, 자유 같은 정신적 대상에 대한 것이다. 정신적 본질은 누군가 묻지 않으면 알지만 그것을 설명해야 할 때는 더 이상 알지 못해서 우리가 상기해내야 하는 어떤 것인 까닭에 환영에 불과하다고 했다.
우리는 아름다움에 관한 모든 사례를 관통하는 ‘공통된 무엇’을 추출할 수 없으므로 결국 미의 본질을 말하려면 눈을 감고 조용히 상기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 본질을 순수하게 상기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건 환영에 붙잡혀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짜장면은 맛있다는 경험을 상기하는 것과 그 짜장면은 맛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상기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우리가 미의 본질을 설명하려 할 때 실은 그것에 대한 믿음을 상기하려 애쓰는 것일 뿐이다. 여기서 환영이 나타난다. 질문자가 일단 이데아의 망상에서 벗어나면 그때부터 많은 것이 해결된다. ‘미의 본질’을 찾아 헤맨 서양예술론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근현대예술론은 ‘모더니즘 회화’와 ‘컨템퍼러리 아트(Contemporary art)’로 구성되는데, 전자는 마네의 인상파부터 잭슨 폴록의 추상표현주의까지, 후자는 앤디 워홀의 팝아트 이후(1964~)를 가리킨다.
‘컨템퍼러리 아트’의 주창자인 아서 단토가 앤디 워홀의 〈브릴로박스(비누상자)〉를 가리키며 ‘예술의 종말’을 선언했을 때, 그 대상은 팝아트 이전의 모든 재현예술이었지만, 사실상은 ’모더니즘 회화론’을 펼친 클레멘트 그린버그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린버그는 20세기 전반에 걸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모더니즘 이론가다. 아서 단토는 그를 단번에 사형장으로 보내버렸다. 모더니즘과의 전쟁에서 단토는 부친인 크로노스(그린버그)를 살해한 제우스가 된다.
그러나 이 세력교체는 어디까지나 올림푸스 세계의 쟁패전에 불과하다. 이데아의 늪에서 빠져나오면, 현란하기 그지없는 두 신의 이론이 실제로는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을 알 게 된다. 그들은 여전히 ‘이데아’의 주위를 맴돌고 있을 뿐이다.
‘겹의 미학’은 이런 서구 미학세계에 더 이상 주눅 들어 있을 수 없다는 변방인의 자각이다. 가장 반인공적인 예술, 예컨대 숲의 예술이기 때문에 현대예술의 대안으로 모색될 수 있다.
르네상스의 사실주의, 근대 모더니즘의 형식주의, 컨템퍼러리의 다원주의를 일관하는 정체를 말하라면, 숲(자연)을 지배하기 위한 도시의 예술이다. 이것은 휴머니즘에 연원을 둔다. 휴머니즘은 사전의 정의처럼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 인종, 국가, 종교 따위의 차이를 초월한 사상이 아니다. 휴머니즘은 인간이 인간을 적대시해서 나온 사상이다.1
휴머니즘에 입각한 미학은 오감 중에서 시각을 가장 중시하는데, 그것은 이성을 중시한 결과다. 이를 반증하듯, 그린버그는 공간을 이해하는 데 촉감보다는 시각이 훨씬 용이하다고 했다. 모더니즘 미술의 완성인 추상미술은 통일성과 완전성에서 시각이 촉각적 자연을 대신함으로써 자연의 본질과 미술의 본질의 일치를 가져왔다고 강조했다. 추상미술이 이 시각성 우위를 전달하는 데 실패할 때, 그래서 한낱 장식이 되어버릴 때 ‘인간성을 말살한’(dehumanized) 미술로 변질된다고 했다.2
그러나 나에겐 그 역이 성립한다. 시각이 촉각적 자연을 대신하기 때문에 되레 인간성을 말살하는 것이라고. 이 역관점을 대담하게 회화로 표현한 화가가 프랜시스 베이컨이다. 그는 눈(시각)이 있는 얼굴을 붓으로 뭉개버렸다.
그린버그는 형식주의 미학을 펴기 위해 칸트를 들고 나왔다. 그가 칸트를 내세우며 ‘내재적 비판’ 내지 ‘자기비판’을 이론적 무기로 삼았지만, 이는 칸트의 ‘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여기서 이 논의를 길게 할 수는 없다. 칸트 미학의 ‘형식’이 형식주의 미학의 ‘형식’과 다를 뿐 아니라 상반된다는 점을 살피기에도 지면이 부족하다. 칸트 미학의 ‘형식’은 주체가 대상의 아름다움을 인식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주관에 의해 대상에 부여된 것(형식)이다. 이때 대상은 물자체의 표상이다. 대부분 그렇듯이 물자체와 이데아를 혼동하는 순간 형식주의의 미혹에 빠져들고 만다. 칸트 미학의 ‘형식’이 형식주의 미학의 ‘형식’으로 둔갑하는 순간이다. 이런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예를 드는 게 가장 빠를 것이다. 같은 나무를 보지만 고양이가 보는 나무와 인간이 보는 나무는 전혀 다르다. 고양이는 일단 컬러를 볼 수 없고 형체도 다르게 본다. 실제로 이 나무가 어떤 존재인지는 각자(고양이와 인간)의 주관적인 지각 외에 ‘본체로서의 나무 그 자체’(물자체)는 인식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르게 그것(물자체)을 가정하고 사유할 수는 있다. 따라서 물자체는 그 실체를 알 수는 없지만 현실의 모든 사물에 실재한다.
반면, 이데아는 관념 속에만 존재한다. 그리고 물자체와 다르게 그 본질을 아는 게 가능한 개념이다. 우리가 다 아는 이데아를 부언하는 것은 시간낭비이므로, 20세기의 형식주의를 설명함으로써, 이데아가 형식주의에서 추구하는 바로 그 형식(형상)임을 밝히는 게 효과적일 것이다.
20세기 전반기를 휩쓴 형식주의는 수학에서 시작하였고 수학에서 좌절했다. 러셀과 힐베르트는 자연수에 의존하지 않는, 오직 수학적 형식으로만 구성된 수학의 체계를 완성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더 이상 자연수라는 기초를 필요로 하지 않는 어떤 수학적 실재도 존재하지 않음을 괴델이 증명함으로써 형식주의의 이상은 파산했다. 우리의 논의에서 자연수는 자연/구체/실재에 대입된다. 자연에 의지하지 않은, ‘추상’으로만 된 ‘형식’에 대한 욕망이 형식주의를 만들었다. 휴머니즘이 나아가는 종국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러나 칸트 철학은 형식(=형상)/이데아에 대한 탐구가 오류를 낳는다고 해서 그것을 형이상학으로 부정했다. 칸트는 인식 가능성의 한계를 철저히 설정했다. 칸트 철학의 ‘형식’은 초월계가 아닌, 자연에 속해 있는 물자체의 탐구를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사실, 칸트는 이성의 시대(휴머니즘)에 자연사적 관점(반휴머니즘적 관점)을 정립한 최초의 철학자였다.
이에 반해 그린버그의 ‘형식’은 자연(촉감)을 정복하기 위해 이성(시각)이 추구한 이데아(형상)였다. 따라서 형식주의 미학의 형식은 실재하지 않은 환영을 좇기 위해 추상에 매달린 것이다. 그런데 추상으로 향하던 지난 예술계를 돌아봤을 때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큐비즘, 추상표현주의에 속하는 작품들이 과연 형식주의 이론으로 묶일 공통점을 객관적으로 가지고 있는가? 단지 믿음일 뿐이 아닌가? 그린버그가 형식주의예술의 혁명으로 선언했던 피카소의 큐비즘이 정치성이 없는 순수한 자기지시적인 작품인가? 대답은 간단하게 “No.”
2차대전 후 미국은 자국의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는 모든 논리를 환영했다. 여기에 부응한 것이 그린버그의 형식주의적 모더니즘론이다. 그 자신이 발굴한 잭슨 폴록을 등장시켜 그의 작품을 큐비즘의 한계를 돌파한 ‘열린 회화적 추상’이라고 극찬함으로써, 문화 종주국으로서 프랑스, 파리의 영예를 역사화하고, 그 역사의 계승자로서 미국, 뉴욕을 부각시키는 데 성공했다.3 그린버그는 ‘추상미술’을 수호하고 잭슨 폴록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모더니즘 예술론의 계보를 구성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생명으로 삼는 예술의 순수성(형식주의)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1960년대 초, 비평가로서 절정에 오른 그린버그에게 황제의 자리는 영원한 듯 보였다. 그러나 그의 제국도 분열이 가속화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미술양식이 백가쟁명처럼 쏟아져나오는 상황이었다.
이때 단토가 ‘예술의 종말’(1984년)을 들고 나와서 불안한 모더니즘의 토대를 파괴해버렸다. 붕괴된 토대는 ‘예술의 본질에 관한 내러티브4   ’  였다. 그것은 20세기의 2/3를 지배한 형식주의 이념이었다. 단토의 문제제기는 본질주의의 거부란 점에서 일견 우리의 비판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단토의 논리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겹의 미학’은 훨씬 명확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단토는 ‘새 시대 예술’(컨템퍼러리 아트)의 양대 축으로 ‘의미’와 ‘해석’을 제시했다. 1964년 앤디 워홀 이전의 구시대를 ‘내러티브의 시대’로 규정한 그는, 모더니즘 시대를 이데올로기의 독단이 강요되고 내러티브에 의해 통제, 검열되는 시대로 혹평했다. 단토의 동시대 예술에서는 모든 예술이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예술이 종말 이후에 맞는 해방의 현상이라고 했다. “똑같은 상품상자가 어떻게 작품이 될 수 있는가?” 단토는 이 물음이 새로운 철학을 요구한다고 믿었다. 예술작품이 어떤 외관을 가져야 하는지가 아니라, 그 외관 안에 들어있는 ‘의미’를 읽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의미가 진정하게 해석되기 위해서 ‘철학을 위한 예술’이 아닌 ‘예술을 위한 철학’을 즉, 작품에 대한 전제 없는 철학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 철학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 단토는 이렇게 말할 뿐이다. “참된 철학적 발견은 다른 것보다 더 참된 예술은 없다는 것, 그리고 예술이 반드시 그래야 할 단 한 하나의 방식과 같은 것은 없으며, 모든 예술은 동등하고도 무차별적으로 예술이라는 것이다.” 이 진술은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이지 새로운 예술철학에 대한 정의는 아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예술론이 모더니즘론에 대한 반동 이상이 아니라는 얘기다. 단토는 자신이 동시대에 대해 예언한 탈헤게모니(또는 아나키즘) 문화가 얼마나 긍정적인지를 마치 천국이라도 도래한 양 찬양한다. 그러나 탈헤게모니는 전혀 민주적이 아닐뿐더러 신정(神政)에 가까운 정치적 이념이다. 현대자본주의하에서 자유방임 상태가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는 작가가 예술의 경계에 제한받지 않고 자유로이 작품을 통해 의미를 생산하면, 철학자가 해석을 맡고, 대중은 철학자의 해석에 인도된다. 의미는 해석에 의해 결정되는데, 철학자는 비평가이므로, ‘보이지 않는 손’은 비평가일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갖는다. 이 구조를 확대하면 철학자가 통치하는, 플라톤의 국가가 모델인 제국5  이 등장한다.
이것은 모더니즘을 독재로 비판했던, 또 다른 독재다. 모더니즘 비평가든 컨템퍼러리아트 비평가든 사실상 모두 이데아를 이념으로 하는 것이다. 전자는 구조 안에서, 후자는 구조 밖에서 이데아 세계를 구현하려는 그 ‘차이’만 있을 뿐이다.
단토 예술론의 핵심은 ‘내러티브’를 일소함으로써 재현을 ‘의미’로 대체하는 것인데, 이는 그가 비판한 ‘형식주의’에 대해, 스스로가 그 쌍생아임을 입증하는 결과를 빚었다. 이때 ‘의미’는 본질에 대한 또 다른 내러티브일 뿐이기 때문이다. 단지 ‘의미’가 절대적 본질에서 그 본질의 파편으로 분산돼 마치 자유, 해방인 양 위장한 것이다. 수잔 손탁은 “우리의 임무는 예술작품에서 내용(의미)을 최대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더 이상 짜내지 않는 것이다”라면서 해석(의미)은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라고 했다. 바그다드 시인의 고향은 사람, 삶, 자연이 교직된 곳이다. 그곳이 현대적 도시로 개발되면 이데아와 형식만 남고 ‘생’은 사라진다. 그 시인과 마친가지로 내가 고향을 찾는 것은 ‘생’에 눈떴기 때문이다.
이 글을 마치며 ‘생’의 ‘굿’! 문화와 ‘겹의 미학’의 관련성을 일견해 보겠다. ‘굿’은 진동 속에서 대상과 소통하고 그 과정에서 ‘대상을 주체화’한다. 전통적인 장지기법이 우리 민화(民畫)에 연원을 둔 점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민화는 샤머니즘의 우주관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굿’ 문화와 뗄 수 없는 관련이 있다.
민화의 ‘역원근법’은 ‘굿’에서처럼 ‘대상을 주체화’한다. 원근법이 이성주의의 산물인 데 반해, 이것은 반휴머니즘과 반이성주의의 산물이다. 역원근법은 ‘겹’의 진동성과 더불어 한국화가 계승해서 탐구해야 할 테마일 것이다.
복합문화공간 에무에서는 ‘<겹의 미학> 1부 넓게 읽기(6.1~7.15), 2부 깊게 읽기’(7.18~ 8.31)를 전시하고 있다.

1 휴머니즘은 타자(신 혹은 자연)와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인간 내 관점 즉, 신분적 관점에서 출현했다. ‘인간’(시민)과 ‘인간을 인간으로서 인정하지 않은 인간’(귀족, 성직자) 혹은 ‘인간일 수 없는 인간’(하층민, 미개인)을 구별할 필요에 의해 생겨난 시대적 산물이다. 이를 출발로 ‘인간’의 정치사회적 요구를 철학화하면서 ‘이성’이 절대적 가치로 등장하고 만물에 대한 인간의 우위가 설정되었다. (졸저, 《너희들의 유토피아》 참조)
2 《예술과 문화》(그린버그 지음/조주연 엮음, 경성대 출판부)에서 인용.
3 위 책의 역자 조주연의 서평에서 인용.
4 내러티브의 제거는 아서 단토의 예술비평에서 핵심이다. 내러티브 문제는 ‘겹의 미학’과 관련해서 다음 기회에 다룰 것이다.
5 조지 오웰 《1984년》의 제국.

REVIEW

김가람 개인전
7.9~8.6 코너아트스페이스

〈아젠다 헤어살롱〉은 헤어커트 퍼포먼스다. ‘헤어살롱’이 세워진 장소 특정성과 당시 사회적 이슈를 중심으로 관객의 머리를 다듬으며 작가와 대화를 나누는 형식이다. 작가는 이 퍼포먼스를 위해 ‘헤어커트 전문가 과정’을 이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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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

서해근 개인전
7.6~26 스페이스 캔, 오래된 집

평화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무분별하게 만들어진 무기가 전쟁에 사용되어 본래의 목적이 무색해진 것을 빈 껍데기만 남은 상태라고 규정한 작가는 ‘The Skins’란 타이틀로 〈전투기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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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옥현

넌 벽에 박혔어
7.15~8.6 갤러리 룩스

사진작가 안옥현과 김병규의 2인전. 대량생산, 대량소비 사회에서 감정은 그 존재의 가치를 잃고 말았다. 16년을 동료로 지내온 참여작가 2인은 이 전시에서 ‘감정’을 화두로 그것을 드러내거나, 숨기는 작업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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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기 (1)

이동기 개인전
7.7~8.13 갤러리2

‘아토마우스’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작업하는 팝아티스트 이동기의 1990년대 이후 드로잉 200여 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스케치용 종이부터 광고전단지 등 다양한 종이에 그려진 드로잉으로 작가의 즉흥적인 작업의 발상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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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미림

추미림 개인전
7.6~28 트렁크갤러리

픽셀로 도시 풍경을 담는 작가의 4번째 개인전. 〈일렁이는 그리드에서 태어난 새로운 모듈〉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이번 전시는 컴퓨터로 형태를 만든 후 잉크젯 프린터로 출력한 부분을 칼로 오려내고 아크릴 물감을 스펀지에 묻혀 찍는 방식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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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뉴월

빈우혁 개인전
7.1~21 스페이스 오뉴월

하재용의 평론과 빈우혁의 작품이 만났다. 빈우혁은 개인의 기억을 바탕으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일상의 풍경을 재해석해 이미지화한다. 그의 독특한 시선이 풍경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살펴본 하재용의 글과 함께 전시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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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2)

지속가능을 묻는다
5.17~7.24 서울대미술관

서울대미술관 개관 1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로 8명의 작가 작품 80여 점이 출품됐다. 전시 타이틀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은 1980년대 지구환경 변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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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수_160707_20

고봉수 개인전
7.6~18 가나인사아트센터

홍익대 조소과 교수로 재직 중인 작가의 이번 개인전은 〈니케의 날개_재현의 비재현〉으로 명명됐다. 빈곤한 상상력을 깨고, 현재 시점에서 고전적 대상을 다시 읽기를 강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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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수김강

권성수 개인전
7.13~18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

〈거기에 머물다〉로 명명된 이번 개인전에서 작가는 돌로 만들어진 꽃잎 안에 나무로 수술과 암술을 만든 조각작품을 선보였다. 이질적 물성이 결합하여 차가움과 따뜻함이 한 작품 내에서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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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방 (1)

토요일. 흙. 7.6.
7.6~19 동산방화랑

김주호, 박미화, 윤명순, 윤주일, 최정윤, 주후식, 한애규 등 7인의 작가가 다양한 작업을 선보였다. ‘흙’이란 주제를 각자 개성 넘치는 결과물에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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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금란1

김용식 개인전
7.21~27 아트스페이스

11회째를 맞는 작가의 개인전으로 〈月舞, 달빛 사랑을 꽃잎에 조각하다〉라는 부제를 달았다. 지속적으로 진행한 〈월무〉 연작은 생명성을 바탕으로 우주의 신비와 시간성을 초월한 신화적 요소가 가득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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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금주김강

안금주 개인전
7.5~15 마린갤러리

작가에게 바다는 어떠한 화려한 외연을 드러내거나 정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따라서 작가는 수평의 안정적 구도를 통해 하늘과 바다, 그리고 해안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PRIVIEW

프로젝트대전 2016 : 코스모스
7.26~11.20 대전시립미술관

과학기술도시로서의 위상을 높여가고 있는 대전의 중추적 발전 과제로 과학과 예술의 융합을 통한 과학문화축제의 창조적 기반 구축을 위해 진행하는 격년제 국제예술전시. 올해는 우주(Cosmos)를 주제로 미지의 세계, 즉 과학이 도전해온 우주 영역에 대한 탐색을 이야기한다. 우주에 대해 과학이 도전했던 영역(우주역사, 우주 시그널, 행성탐험, 우주와 공간, 물질로서의 우주, 우주 그 이후)은 이 전시의 소주제 항목으로 구성된다. 대덕연구단지 내 과학자 및 지역 예술 전문가 간의 교류를 통해 현대미술의 또 다른 예술적 특성을 이해하고 전 과정을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제시하며, 예술과 과학의 지속적인 교류를 위한 ‘과학예술융복합’ 실행 프로젝트를 이번 전시와 함께 진행한다.
노리미치 히라카와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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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유영국-산-1997-캔버스에-유채-132×132cm-경기도미술관-소장

백화만발 만화방창
7.7~9.18 경기도미술관

경기도내 미술관들이 소장한 작품들을 한 데 모아 소개한다. 39개 미술관의 소장품 100점을 통해 ‘예술과 함께하는 삶의 의미’를 묻고 함께하는 예술의 의미를 우리 주변에 위치한 미술관을 통해 되새긴다.
유영국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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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쇼
7.20~10.30 DDP 배움터 디자인전시관

백남준의 작품 100점 사진작가 임영균이 찍은 백남준 사진 43점 등 총 143점을 통해 백남준이 걸은 인생 여정을 재조명한다. 작가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을 맞아 열리는 전시로 시대를 앞서간 고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의 이상을 공유하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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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리쥔%2C 2014 Summer%2C 2014%2C 캔버스에 오일%2C 180x250cm

신학철&팡리쥔 / 이용백
8.19~9.25 학고재갤러리

한국의 민중미술과 중국의 냉소적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두 작가 신학철, 팡리쥔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나 그들 각자의 고유한 미술 세계 사이에서 소통의 지점을 탐색한다. 나아가 아시아 미술사의 흐름이라는 넓은 관점에서 이 두 가지 미술사조의 태동과 흐름 그리고 역사적 의의를 비교해 살펴보고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최근 들어서야 재조명 받는 한국의 민중미술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연구와 평가를 재고한다. 또한 같은 공간의 신관에서는 베니스비엔날레 참여작가로 이름을 알린 이용백의 개인전이 열린다. 보여지는 현대사회의 이중성과 사건 사고들을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5.5m에 이르는 대작을 포함, 11점의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팡리쥔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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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 2.tif

엠마 헥
7.22~10.3 사비나미술관

바디페인팅 아티스트인 엠마 핵이 2005년 이후 작부터 근작에 이르는 대표작품 49점과 메이킹 영상을 선보인다. 전시를 위해 내한하는 작가는 한국전통화를 이용한 라이브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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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희

신성희
8.18~9.18 갤러리 현대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지며, 회화가 가진 화면의 물질적 한계성을 넘어서고자 끊임없이 탐구했던 姑신성희 화백의 개인전. 작가가 1975-80년대에 주력했던 <마대>시리즈를 집중 재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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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블럭-장지아

미디어+아트패러다임
7.24~8.7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매체와 미술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모습을 회화, 판화, 영상, 공예, 디자인의 형태로 보여준다. 〈2016 세계미학자대회 대중예술축전〉 특별전으로 열리는 이 전시는 매체와 미술의 상호작용 관계에 주목한다.
장지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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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박형렬
8.10~28 갤러리 룩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 공간에 물리적인 힘을 가해 변형된 모습을 기록하는 박형렬의 여섯 번째 개인전 〈Dig and Cover〉. 작가는 대지를 파내거나 덧대어 입체적 장면을 평면화시키며 규정화된 대지에 대한 폭력성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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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윤모

안윤모
7.27~9.13 신한갤러리 광화문

소통의 어려움을 그림을 통해서 해소하기를 바라는 안윤모의 개인전 〈나비가 되다〉. 이번 전시에서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자폐성장애어린이들과 함께 진행한 워크샵에서 탄생한 1,500여마리의 나비들을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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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김대현

몸:ritual
7.14~9.25 갤러리 로얄

몸에 대한 기존의 의식을 확장시키고 외피를 이루는 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려는 시도가 담긴 전시. 김대현 노준구 백두리 오정택 유창창 윤미원 이성표 이에스더 이인수가 참여해 인간의 몸을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을 보여준다.
김대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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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석_Dreamscape_225-5

정동석
8.17~31 갤러리 담

현실과 발언 동인 가운데 유일한 사진기자인 정동석 개인전. 밤풍경을 포착한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12점의 작품을 통해 밤거리의 무수한 상황을 지우고 인위적 불빛인 네온에 의지한 풍경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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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종협_Untitle(part). Installation

20163  世間
8.19~31 쌍리갤러리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에서 관심 분야가 일맥상통하는 이종협 다카시 이케자와 다카하시 마츠하루의 작업에 주목한다. 세 명의 작가가 주목하는 ‘비슷한’ 상황이 그들을 둘러싼 사회상과 만나 어떻게 변하고 발전하는지를 지켜본다.
이종협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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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선생과

마선생과 발랄한 로잘린
7.20~8.10 아트스페이스 휴

마광수의 그림과 함께 그의 문학 활동을 재조명하며 사진작가 로잘린의 바비 인형이 찾아가는 무의식과 내면의 자유를 들여다본다. 다른 시대와 다른 현실을 산 두 예술가를 한자리에 불러내 새로운 감각과 대화의 문을 열어 놓는다.
로잘린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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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4_우주당_우주가방제작워크숍

COSMOS PARTY 우리는 우주에 간다
7.22~9.3 인사미술공간

박희자 서윤아 손현선 최병석이 참여해 예술가가 무엇을 할지 찾아가는 과정을 우주에 가는 것에 빗대어 표현한다. 개인 및 공동으로 진행된 리서치 결과물과 훈련 과정을 전시 형태로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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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풍경김진호

어떤 풍경에 대한 반성
8.6~28 전주 서학동 사진관

풍경 속에 담긴 황량한 환경을 사회적으로 성찰하고 고민하는 김영경 김진호 손이숙이 함께하는 전시. 작가들은 이번 전시를 통해 사진의 상투적인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목소리를 진솔하게 담아낸다.
손이숙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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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

선무
7.27~8.28 대안공간 루프

탈북작가 선무의 개인전 〈그것이 행복이라면…〉. 이번 전시는 남북의 화해와 통일에 대한 작가의 염원의 장이자 그가 그간의 숱한 그림으로도 차마 표현하지 못했던 바람을 전하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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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영

서해영
8.11~26 갤러리 조선

다양한 조건과 상황에 놓여있는 여성들과의 협업을 통해, 여성에게 필요한 도구나 환경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 전시 〈여성미술가를 위한 도구 만들기-너와 나의 협업의 도구〉.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조각, 영상, 사진, 문서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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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별

차한별
8.24~30 토포하우스

일상적 대상을 압축된 간결한 구도로 표현하는 구상작업을 진행하는 차한별의 개인전. 작가는 일상의 소재에 상상력을 더하고 캔버스 위에서 여러 가지 실험적 도구로 걸러낸다.

PREVIEW 2

박하늬
7.29~8.29 레지나갤러리

유한한 대상들을 바라보며 그 뒤 무한의 세계를 상상하는 박하늬의 개인전. 작가는 보고 듣고 느끼는 것 이상의 감정과 감각을 상상하며 작업을 진행하며 작업을 통해 베일에 쌓인 무한의 감각에 다가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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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수

조희수
7.6~9.25 경주 솔거미술관

토속적인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지금은 사라져가는 옛 경주의 아름다운 경관들을 주로 화폭에 담아내는 조희수의 개인전. 사생을 원칙으로 작업하는 작가의 그림의 대한 태도와 어우러지는 작품을 한눈에 엿볼 수 있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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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김상훈-백정기,_oil_on_canvas,_162.2x112.1

김상훈
8.12~9.9 그리고갤러리

한국의 예술사에서 소외된 역사적 담론을 표현하는 김상훈의 개인전.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백정기, 이강훈, 원심창 의사의 초상화와 그 당시 한국의 아나키스트와 뜻을 같이한 중국과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을 그린 ‘아나키스트 프로젝트’ 작업을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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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지 갤러리 세인

개념판화
8.16~27 갤러리 세인

만들고 찍는 제작 과정에 국한된 판화가 아닌 다양한 복제의 과정을 거치는 이미지를 모았다. 공은지 권순왕 김예지 노반 아그네스 아이샤 윤해군이 참여해 영상, 직물, 그래픽, 3D Printing 등을 통해 광범위하게 다루어진 이미지를 선보인다. 공은지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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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채2

정광채
8.10~16 토포하우스

자작나무를 소재로 작업하는 정광채의 개인전. 작가는 자작나무에서 잘려나간 나뭇가지 자리에서 인간과 나무가 서로 교감하는 느낌을 받고 자작나무를 일개 나무가 아닌 영혼의 교감 대상으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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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진

윤현진&이정훈
8.4~9.22 부산 갤러리 아인

각종 디자인페어에서 참신함을 인정받은 두 젊은 공예디자이너 윤현진 이정훈의 가구, 조명 소품을 선보이는 전시. 작가들의 참신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생활가구를 통해 공예가 생활과 연결되는 지점을 찾아본다.
윤현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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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최명식,소통-기쁜소식1601

최명식
8.6~19 수덕사 선미술관

전통문을 소재로 행복을 기원하는 최명식의 개인전. 작가는 ‘문’이라는 소재를 ‘목적지’로 인식하며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소통과 노력을 작업에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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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남

이향남
7.27~8.5 미술세계갤러리

일상을 벗어난 여행에서 받은 감흥을 단서로 작업하는 이향남의 개인전. 작가는 발로 걷고 또 걷는 순례자적인 여행을 하듯 작업을 통해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육체적 고통으로 인해 감지되는 깨달음으로 삶의 지향점을 찾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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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혜_Chung_mihye_Harmoney_14x14_나무위에_채색_자개_mother_of_shell_pearl_on_wood_20~

정미혜
8.22~28 핑크갤러리

한국의 전통문양을 살린 드로잉을 자개로 표현하는 정미혜의 개인전. 작가는 화려한 자개를 이용하여 나비, 창살 등의 우리 고유의 문양을 새롭게 표현하며 전통과 현대를 잇는 작업을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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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끼부탁드려요~)페로몬-박은주_푸른날개_브로치_115x65x40mm_은,비늘에 염색_2016

페로몬- 에로스의 과녁
8.9~31 갤러리 다온

김한나 박은주 박정혜 심진아 조민정 한규익 한상덕이 참여해 현대 장신구의 예술적 표현을 이야기한다. 8명의 젊은 작가는 각기 다른 환경만큼이나 다양한 각도로 장식과 몸에 관해 관찰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박은주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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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미화

육미화
8.31~9.6 갤러리 루벤

낯선 곳을 여행하면서 얻어지는 예술적 에너지를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작가 육미화의 개인전 〈베네치아로 가는 길〉. 작가는 여행길에서 만난 이국적 풍경을 낯선 이, 타인의 시각으로 담아낸 풍경작품 20여 점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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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연

박순연
8.31~9.5 가나인사아트센터

수평선과 수직선의 만남. 면과 면의 만남. 조각과 조각의 만남을 통해 작은 조각이 또 다른 큰 형태를 이루듯이 가구와 조각보로 작품을 구성하는 작가는 더 큰 세상을 꿈꾸는 사람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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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민1

박성민
8.2~24 갤러리 조은

10여 년 동안 ‘아이스 캡슐’이라는 타이틀로 연작을 그려온 박성민 작가의 개인전. 얼음같이 차가운 현실이지만 자유를 향한 원초적 희망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신작 20여 점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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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호작품사진

서현호
8.11~17 광주 무등갤러리

보편적인 삶, 우리의 일상을 다루는 작가 서현호의 개인전. 작가는 단순히 인간의 모습을 재현하려는 시도가 아닌 삶의 현실에서 나타나는 꾸밈없는 감정들을 나누고 소통하려는 의지로서 실존적 모습을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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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선

이양선
8.11~15 정부세종컨벤션센터

자신의 삶을 오롯이 표현하는 이양선의 다섯 번째 개인전.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에 전통색인 오방색을 주로 사용하여 한국인의 정서를 표현함으로써 각박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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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정

김승정
8.24~30 갤러리 시작

철학적이고 은유적인 재현을 통해 자신이 몸담은 사회의 다양한 관심을 보여주는 김승정의 개인전 〈거울아, 거울아〉. 작가는 여러 가지 오브제들을 빌려 자신의 내면을 지속적으로 드러내며, 넓게 펼쳐진 하늘, 바람에 날리는 옷가지 등을 통해 변화하는 감정들을 시각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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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인작가

이수인
8.8~31 이든갤러리

다채로운 색감으로 감정을 더듬어내는 작가 이수인의 개인전. 작가는 산책길에서 만나는 풍경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그 감정을 캔버스위에 담아낸다. 익숙한 풍경이 주는 휴식을 통해 인생을 돌아보는 감정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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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경

장은경
8.3~8 울산문화예술회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이지만, 맘속 어딘가에 동심으로 남아있는 나라인 NEVERLAND를 시각화하는 장은경의 개인전. 인간 스스로가 타인과 자연 그리고 하늘로 나 있는 문을 열고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작가는 자연과의 아름다운 공존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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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분모전-1_복사

공통분모
8.1~31 닐리리갤러리

행복과 감사의 순간들을 기억하고 다양한 이미지로 자유롭게 풀어내는 회화작가 박덕실과 주변 풍경을 통해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설치작가 이순영의 전시. 인형을 소재로 하는 평면과 설치가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박덕실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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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Y DSC

박용선
8.25~31 대전 이공갤러리

실로 스웨터를 짜듯 연필로 따스함을 전하는 작가 박용선의 개인전. 작가는 연필로 스웨터를 짜듯이 한올한올을 그려내며 자신의 기억에 묻는 스웨터의 따스함을 끌어올리며 끊임없는 관찰과 집요함으로 삶을 다듬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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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최영욱,_Karma,_49.5_x_45.5_cm,_mixed_media_on_canvas,_2011

최영욱
8.22~9.30 비선재갤러리

차분한 색감으로 달항아리를 그려내는 최영욱의 개인전. 작가는 항아리 표면의 균열까지 세세하게 표현하며 갈라졌다가 다시 이어지는 항아리의 수많은 균열처럼 삶에서 반복되는 만남과 헤어짐,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다른 듯 하나로 조화되는 우리네 인생살이를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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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광김혜미

김혜미
8.25~31 부산 미광화랑

독특한 터치와 색감의 조합으로 낯선 도시와 공간을 재구성하는 김혜미의 4번째 개인전. 작가는 시각적 촉감을 불러일으키는 화법을 통해 지치고, 상한 마음에 따뜻한 위로가 되는 작품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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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종하

共存과 隱喩
8.6~14 부산 갤러리 조이

올해 64회 정기전을 맞이한 「미술동인 혁」의 단체전. 〈공존과 은유〉를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 참여한 30여 명의 회원은 어떠한 사조나 사상, 관념도 창조를 통해 넘어 설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허종하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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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끼부탁드려요^)김강현

김강현
8.4~17 아트스페이스 퀄리아

반짝이는 작품을 통해 빛나는 미래를 염원하는 김강현의 개인전. 작가는 답답하고 갑갑한 현실 속에서도 언제나 희망을 잃으면 안된다고 이야기하며 아름답고 찬란한 미래를 위해 항상 웃으면서 꿈꿔야한다고 이야기한다.

SIGHT & ISSUE 주명덕 개인전〈蓮 PADMA〉

그렇게 시간이 모인다

‘연(蓮)’만큼 그 의미가 고정적인 상징도 없을 것이다. 대부분 연을 불교와 연결지어서 생각하니 말이다. 진흙에 뿌리박고 서서 그리 깨끗하지 않은 물에서도 찬란한 꽃을 피우는 연은 그래서 흔히 몸은 세속에 있으나 더렵혀지지 않는 영혼을 지향하는 불교의 교리와 맞닿아 있다. 한미사진미술관(4.23~6.18)에서 열린 주명덕의 개인전은 바로 그 <연 PADMA>로 명명된 바, 일견 종교적 색채가 짙은 전시인가 했다. 그러나 웬걸. 정작 그는 특정 종교를 신봉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PADMA’는 산스크리트어로 연을 뜻하는데, 작가는 “소재가 지니는 불교적인 느낌”을 지우고 작업했노라 고백했다.
전시장은 그가 사계절 흑백으로 촬영한 연으로 채워졌다. 반사되는 수면 위 연엽은 물론, 화려하게 개화한 모습부터 그것이 소멸하는 모습까지 과정이 마치 시간의 순서로 배치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바, 그에게 연은 그 자체로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에서 태어나 다시 물로 돌아가는 연은 자연의 섭리를 보여준다. 주명덕의 연은 그 자연스러운 흐름을 과도한 개입 없이 담담하게 보여주기에 그 공명이 크다. 그래서 전시장에 첫발을 내디디는 순간부터 마지막 작업을 볼 때까지 사진 각각이 가지는 의미보다 전시 전체의 맥락이 도드라져 보인다. 그래서 특정한 사건에 기대어 전개되는 단막극이 아닌, 면면히 흐르는 감정 기복을 품은 한 편의 장편 서사시(敍事詩)를 보는 듯하다. 생명의 생성과 소멸 과정에 만개한 꽃이 주는 감흥에 비견되는 아름다운 시절도 있다. 그러나 그 꽃의 만개는 저절로 얻어지지 않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뿌리에서 적절한 양분이 공급되어야 하고, 또한 온도와 일조량도 뒷받침 되어야 이뤄지는 실로 오묘한 조화의 결과다. 게다가 개화는 곧 다음 생의 잉태와 생산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낙화(洛花)로서만 가능하다. 주명덕의 이번 전시는 느리지만 분명히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작가의 지난한 관찰과 기다림, 변화의 예리한 포착, 그리고 수십 년 카메라와 함께 한 작가의 생의 태도 등이 합작한 결과다. 그러니 이 또한 생명의 생성과 소멸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왜 연을 대상으로 선택했는지 이유가 이해가 갈 듯하다. 한국 근현대사진의 살아있는 역사로서 작가는 자신이 직접 드러나거나, 의도하는 바를 극명하게 드러내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담으려는 태도를 견지했다. 그러한 작업이 모여 그 자체로 역사가 되었듯, 찰나가 모여 연속된 시간이 된다. 연은 바로 그 편린과 같은 시간의 부분이요, 그것의 생장과 소멸은 역사가 된다.
황석권 수석기자

HOT PEOPLE | 이 명 옥

열정으로 달려온 사비나의 20년

1996년 3월 사비나갤러리로 시작해 한국의 대표적인 사립미술관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이명옥 사비나미술관 관장은 20년을 쉼 없이 달려왔다. 그간의 여정을 들어보기 위해 6월 10일 미술관을 찾았다. 먼저 20년을 맞은 소감을 묻자 그는 “20년 세월이 나 또한 놀랍다”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다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다. 개인이 설립한 비영리 미술공간이 20년을 버티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답한다. 미술관을 운영하며 절망한 적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이 관장은 작가와 관객에게 한 약속을 떠올렸다고. 미술관 운영을 중도 포기하는 일은 그에게 작가의 전시경력을 없애고 사비나미술관을 찾은 관객의 기대와 애정을 저버리는 행동이었다. 이는 자신이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이 관장의 소신과 맥을 같이한다. 그는 “결국엔 ‘책임감’이다. 그것이 나를 버티게 한 원동력”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사비나미술관의 전신인 사비나갤러리는 처음부터 여타 상업 화랑과 차별화된 정체성을 내세웠다. 그것은 바로 차별화된 기획력으로 승부를 거는 이른바 ‘기획 전문’ 갤러리였다. 당시 우리나라 미술계를 떠올려보면 이 관장의 운영 방침은 시대를 앞서가는 행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밤의 풍경〉(1996), 〈교과서 미술〉(1997), 〈그림으로 보는 우리 세시풍속〉(2000) 등 주제 중심의 전시를 끊임없이 시도했다. 이 관장의 차별화 전략은 전례 없는 모델을 만들어내
신생 갤러리였음에도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특색 있는 전시공간이란 이미지가 확고하게 형성되고 미술관으로 전환할 시점이 되었다고 판단한 이 관장은 2002년 7월 사비나미술관으로 등록을 마쳤다. 이후 다른 분야와의 융복합 전시와 역량 있는 작가의 개인전을
각 2회씩 개최하는 등 신선한 기획과 주제로 관객을 찾아가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1월 미술품
컬렉터의 데이터베이스인 래리스 리스트(Larry’s List)와 AMMA(Art Market Monitor of Artron)가 공동 조사한 ‘사립미술관보고서’에서 국내 우수 미술관 3개 기관에 이름을 올린 것도 이러한 노력이 일궈낸 성과였다.
대중과 소통하려는 이 관장의 열의는 오래전부터 해온 강연과 칼럼 및 저술활동에서도 읽힌다. 관장이란 이름표를 떼고 미술을 사랑하는 미술인으로서 “미술에 관심은 있지만 낯가리는 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알기 쉬운 대중적 언어로 글을 쓴다”는 그는 이미 서른 권이 넘는 미술 관련 서적을 출간한 베테랑 작가이자 미술과 대중을 잇는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운영자금이 안정적으로 지원되는 공립미술관과 개성 있고 유연하게 미술관 색깔을 만들어갈 수 있는 사립미술관이 결합된 형태의 미술관”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이 관장. 언제나 초심을 되새기며 일한다는 그가 머지않아 또 한 번 전례 없는 형태의 새로운 미술관을 구현할 것이라 조심스레 예상해본다.
곽세원 기자

이 명 옥 Savina Lee
홍익대 미술대학원 예술기획 석사를 졸업했다. 사비나미술관 관장이자 국민대 미술학부 교수, 한국미술관협회장(2011~), 과학문화융합포럼 공동대표 (2008~)를 겸하고 있다. 대한민국과학문화상 도서부문(2006),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식 국무총리 표창(2009)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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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나미술관 개관 20주년을 기념해 기획된 〈60sec ART전〉(5.21~7.10) 전시광경

EXHIBITION TOP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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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이병호 〈 Taxidummian 〉(가운데) 우레탄, 나무, 철 가변크기 2016 아래 김인배 < Rising Fastbal l> 합성수지, 철 70×150×242cm 2010~2011

BODY MATTERS

2016년의 ‘몸’은 어떤 형태로 독해할 수 있을까? 6월 10일부터 8월 28일까지 소마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 〈그다음 몸: 담론, 실천, 재현으로서의 예술〉은 신체의 형상이 드러나거나 신체에 직접 개입하는 작업을 주로 등장시키면서 ‘매개로서의 몸’에 대한 고민을 던진다.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몸, 현재의 갈등 속에 포개진 몸, 결박되어 있거나 벗어나려는 몸 등 그간 미술에서 다뤄진 ‘몸’의 이야기를 재소환해 현재의 유의미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각 작업 간 앙상블로 풀어낸 몸의 합주가 들려주는 “담론, 실천, 재현으로서의 예술”에 귀 기울여 보자.

몸의 위치에 던지는 질문

현시원 | 독립큐레이터

오늘날 우리는 쉴 새 없이 인터넷 패스워드와 아이디로 다른 세계에 진입한다. 업로드한 사각형 이미지 파일을 통해 하루에도 수십 번의 순간을 저장하고 오판한다. 그때마다 각자는 다른 몸이 되거나 몸 없이 움직이기를 표방한다. 음식 포르노 사진의 윤기, 한 여배우와 영화감독에 관한 기사를 카카오톡 대화창 형태로 배치한 노란 대화창 등은 모두 몸통 없이 떠도는 가상의 몸들이다. 몸 없는 말들이자 안개같이 뿌옇게 증식하는 소문들이다. 소마미술관에서 열리는 〈그다음 몸〉(정현 기획)은 몸이 위치하는 여러 개의 자리를 한꺼번에 보여준다. 〈그다음 몸〉의 전시장에서 보이는 것은 눈·코·입과 팔·다리의 형상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과거의 몸과 미래의 몸, 부식될 위험이 있는 수많은 갈등 관계 속에서도 살아 숨 쉬는 현재의 몸이 포개져 있다. 결박되는 몸을 인식하거나 벗어나고자 하는 ‘정체성’의 문제는 이제 다 극복한 것이 아닌가 하는 시점에 다시 불려나온 2016년의 몸은, 그러나 이 전시의 선언 같은 영문 제목(BODY MATTERS)처럼 언제나 문제가 된다.
전시장 입구에 있는 유목연의 〈당신의 어깨 위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그냥 웃어요〉가 몸 없이는 전시장에 들어올 수 없는 관람객에게 살짝, 깨어있기를 제안하는 퍼포먼스라면 김월식의 박스로 만들어진, 무속인들이 모시는 신의 형상을 재현한 〈지동신〉은 몸들이 부대낀 이후의 장면을 시각화한다. 서로 얽힌 몇 개의 몸은 동물의 것이지만 인간의 눈과 인습을 통해 생성된 몸/조각으로, 마치 몸의 현재적 성전에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는 듯하다. 김혜순의 시 〈돼지〉의 한 문장 “우리는 발끝으로 걸어야 하죠/ 벽 너머 8년째 무언 수행 중인 스님/ 스님 밥 드나드는 문 열릴 때 섬광처럼 끼쳐오는 요란한 냄새”가 묘사하는 찰나와 같이 〈그다음 몸〉에서 관람객을 초청하는 순간은 움직이는 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림 안에서 멈춘 채로 움직이고 있거나 아니면 땀 냄새를 풍기며 활발하게 움직이던 몸, 살아 있는 이 순간을 작동시키는 인간의 도구이자 존재 증명으로서 호흡을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인 몸 말이다. 멈춰 있지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그림은 무엇보다 이우성의 그림들이다. 개인전을 비롯한 다른 전시장에서 젊은 세대의 태도 또는 그림 방법론에 대한 작업으로 독해되곤 했던 작가의 그림은 〈그다음 몸〉에 있는 다른 몸들과 결부되며 신체의 꼬불꼬불한 내장, 얼굴 피부를 표현하는 방식과 살갗 그러니까 바깥에 있는 사물처럼 보이는 몸의 내부를 보여주는 그림으로 새롭게 독해된다.(〈끝〉, 2013) 이우성의 그림과 한 공간에 놓인 박진아의 그림 또한 다르게 보는 관람객의 시각을 누린다. 박진아의 그림에는 절단된 신체가 아니라 몸의 전체가 드러나는 사람들의 동작들이 드러나는데, 〈2011년 후쿠시마〉에서 푸른색 천과 하얀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의 몸은 올록볼록한 입체감을 보여주지만 그 어떤 서사도 표현도 직접적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이 그림들 사이에서 이병호가 만든 인체 형상은 가장 높은 곳에서 아래의 몸들을 관측한다. 피에타적이지만 더 위태롭고, 황금비율의 몸으로 이상화하기에는 기계부품의 연결체처럼 보이는 오늘의 몸을 재현하는 작업이다.
결정적 사건의 이전과 이후, 또는 중심이 되는 사건의 주변부를 구성한 듯한 화면에서 사람의 몸은 다른 몸들과 어떻게 만나는지를 누군가 묻는다면, 〈그다음 몸〉에 있는 각각의 작업들이 서로의 보다 세밀한 질문이 되어주거나 다른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 답변이 되어준다. 기획전에서 큐레이터가 각 방에 배치한 몇 개의 몸은 해당 작가의 세계관에서 아예 떨어져 나올 수는 없지만 큐레이터의 기획과 한 공간을 점거한 다른 작업들로 인해 작가론, 작품론의 형태에 종속되지 않은 다른 문맥들에 위치하게 된다. 예를 들어 니키리의 잘 알려진 사진 연작이 다른 사람이 되어보는 수행의 과정을 통해, 여러 집단의 문화적 양태들을 인물화한다면 김옥선의 커플 사진은 화면이 가진 다큐멘터리 속성으로 인해 주석이나 레퍼런스가 아닌 자신의 몸으로 직접 쓰는 적확한 1인칭 시점을 보여준다. 안은미의 3부작 〈조상에게 바치는 땐스〉(2011), 〈아저씨를 위한 무책임한 땐스〉(2013), 〈사심없는 땐스〉(2012)의 영상 부분인 세 개의 화면에서 각자의 춤 동작을 경연하고 있는 것은 조용하지만 무척이나 빽빽하고 결연한 몸들의 합주다.

노승복〈 1366 Project 〉피그먼트 프린트 100×900cm 2016

노승복〈 1366 Project 〉피그먼트 프린트 100×900cm 2016

몸의 노동
〈그다음 몸〉에서 문제되는 몸은 2016년의 여러 문제적 지표들과 경쟁하는 몸이다. 하지만 이 경쟁은 그 무엇을 이기기 위한 속도전이 아니라 신체의 동작을 느리게 보는 것에 가깝다. 폭력과 혐오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경쟁의 룰을 다시 보게 하는 몸들을 등장시킨다. 오석근의 사진작업은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스테레오타입 이미지를 거리 바깥으로 또 바깥으로 보낸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고전적 캐릭터였던 철수와 영희 가면을 쓴 몸들이 위치하는 곳은 어디인가? 또 그가 불려온 근대 엽서 속 인물을 코스프레한 남자의 관상은 어떠한가? 박보나의 작업 〈쉽게 끝나지 않는 순간〉에서 작가가 탐구하는 것은 누하목재 김만호 님의 손, 이미지원 액자 장성민 님의 손 동작과 이미지이다. 한편 이들의 전문기술과 손에 의한 노동은 작가의 작업에 일부 동원돼 이 전시장 안에서 세속적인 삶에 위치하는 몸의 노동을 재건한다.
자크 랑시에르는 저서 〈해방된 관객〉에서 ‘치안’을 공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분배 속에서 신체를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놓는 논리라고 하며, 집단적 언표행위의 방안을 발명함으로써 이 치안 질서와 단절하는 실천을 ‘정치’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1848년 프랑스혁명 때 한 노동자 신문에서 어느 소목장이 노동자의 일과를 묘사한 텍스트를 소개한다. “자신이 마루판을 깔고 있는 방의 작업을 끝마치기 전까지 그는 여기가 자기 집이라고 하면서 그 방의 매치를 마음에 들어한다.(중략) 일순간 팔을 멈추고 널찍한 전망을 향해 상상의 나래를 펴고 그 전망을 만끽한다.” 랑시에르는 이 텍스트에 덧붙여 “다른 것에 열중하는 신체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소목장에게 중요했으며 그것은 “신체를 재량껏 사용하는 가운데 이 정념, 동요를 만들어내는 것은 시선의 형태”라고 적었다. 팔의 노동에 순종하는 자들과 시선의 자유를 소유한 자 사이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신체의 노동 사이사이의 비움을 채우는 시선과 거리감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다음 몸〉 전시장에는 몇 개의 짧은 텍스트가 전시공간을 인도한다. 예를 들어 “실천으로서의 몸, 쓰기를 통한 읽기” 와 같은 문장이 흰 벽면에 자리한다. 길지 않은 문장들에서 전시에 관한 설명이 아닌 안내, 오늘날 몸을 둘러싼 한국사회의 가부장적 편견과 여성혐오라는 이슈들을 어떻게 다른 차원으로 타개해나갈 수 있는가 하는 질문들을 본다. 소마미술관 전시장은 〈그다음 몸〉의 흥미로운 관람을 도출한다. 전시를 보기 위해 계단을 오르는 동작을 수행해야 하고 바로 앞에 위치한 녹색 잔디 위에서 개인, 가족, 친구, 관람자와 행인이 동시에 몸을 각각 움직이는 모습이 유리창 너머로 보인다. ●

CRITIC 보이지 않는 가족

4.5 ~ 5.29 서울시립미술관, 일우스페이스

이필 | 홍익대 교수

<보이지 않는 가족전>은 ‘인간가족,’ 혹은 ‘인간의 위대한 가족’이라는 개념에 대한 롤랑 바르트의 비판에 착안하여 기획되었다. 1955년 미국의 MoMA에서 열린 <인간가족 전>의 프랑스 순회전이 ‘인간의 위대한 가족’이라는 제목으로 열렸고, (후기)구조주의자이자 기호학자인 바르트는 이 전시가 “가족 개념을 타락시켜 하나의 보편적인 신화”로 만들어버렸다며 통렬하게 비판하는 리뷰를 《신화》(1957)에 수록했다. ‘보이지 않는 자들의 가족’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이번 전시는 마갈리 네처겔, 파스칼 보스, 클레어 자케가 공동 기획했으며 네처겔에 의하면 바르트의 텍스트를 해석하여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주의적이고, 열려있고 다양하며, 함께 나누고 끌어안는, 국적이나 민족, 계급을 따지지 않는, 말하자면 ‘인간의’ 가족이 아닌 그저 인간적인 가족”을 제시하고자 했다.
<인간가족 전> 자체는 전시회의 신화라고 볼 수 있다. 이 전시는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MoMA의 사진분과 큐레이터가 되면서 대중적 관심을 끌기 위해 기획한 전시로 버몬트 뉴홀 시기 MoMA가 강조한 ‘예술로서의 사진’ 개념으로부터 급선회하여 사진이미지의 생생한 전달력을 이용하여 제2차 세계대전 후 절박해진 평화와 인류의 형제애에 호소하는 휴머니즘을 내세워 미국의 대중뿐 아니라 세계 관객을 향해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미술관 정책의 일환이었다. 전시의 성공적 개최 후 다섯 개의 버전으로 변형되어 8년간 세계 38개국을 순회하며 그 당시 역대 전시사상 최다 관객인 약 900만 명을 동원했다. 한국에서도 1957년 경복궁에서 열려 30만 명의 관객이 관람했다. 2003년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스타이켄의 모국 룩셈부르크에 영구 설치되어 지금도 볼 수 있다. 이 전시는 2013년 한국의 코아스페이스에서 다시 열렸으며, MoMA에서는 2015년 60주년을 기념하여 전시도록을 재발간했다. ‘인간가족’ 이라는 보편적 신화는 아직도 전 세계적으로 퍼지고 있다.
바르트는 ‘인간가족’이라는 개념을 이데올로기적 메시지를 극대화한 신화의 예로 보았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동성애자였던 바르트에게 가부장적 신화가 덧입혀진 인간 공동체는 근대적 휴머니즘이 양산한 신화이다. 물론 <인간가족 전>은 다양한 국가와 인종의 삶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여줌으로써 다원주의를 강조했다. 그러나 바르트는 그 시각적 다양성은 단지 외형일 뿐,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인간의 생로병사라는 공통성을 강조함으로써 이 자연적 현상에 중요한 가치를 부여했다고 본다. 신의 의지에 의해 태어난 인간이 가족의 울타리에서 자라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일하고 희로애락을 겪다 죽는다는 공통성을 확립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동일성을 강조함으로써 그 범주를 벗어나는 ‘다름’을 부정적으로 상정하는 것이고 그 수많은 ‘다른 자들’을 소수자이자 불합리한 존재로 몰고 간다. 포스트모던 비평가인 크리스토퍼 필립스 역시 이 전시가 ‘인간의 가족이라는 유토피아를 보여줌으로써, 지구화한 가부장적 가족 개념’을 내세워 전쟁의 악몽을 대체했다고 평했다. 바르트는 출생과 죽음은 누구나 겪는 것이지만 그것을 자연적인 현상으로 찬양할 것이 아니며 인간에게는 풍요로운 삶을 위한 노동만이 주어지는 것도 아님을 환기시킨다. 세상에는 축복받지 못한 탄생, 비극적이고 불행한 죽음, 억압하에 행해지는 착취적 노동 또한 많다. 바르트는 <인간가족 전>이 제시하는 인간의 ‘동일성의 표면’은 인간 행위의 저변에 있는 역사의 영역을 볼 수 없게 하며, 조금의 차이로 ‘불합리한 자들’로 분류된 이들은 이러한 ‘신화’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된다고 본 것이다.
바르트의 저술들에 표명된 그의 비판적 이론과 사진에 대한 성찰에 의거하여 기획자들은 이번 전시를 ‘신화를 해체하기,’ ‘중립 안으로,’ ‘보이지 않는 이들,’ ‘자아의 허구,’ ‘에필로그’로 구성했다. 일우스페이스에 꾸며진 ‘에필로그’전은 MoMA에서 열린 <인간가족 전>과 유사한 패턴을 제시함으로써, 시립미술관에서 전시를 본 관객들이 바르트가 비판한 스타이켄 식의 전시 구성이 얼마나 가족이라는 개념을 협소화하고 전형화했는지 느끼게 한다. 또한 단아한 흰 벽에 한 줄로 전시한 디스플레이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스타이켄의 전시가 당시 유럽의 급진적 전시 형태를 도입하여 사진에 가차 없이 가위질을 해댄 획기적인 디스플레이로 ‘악명’ 높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가족이라는 개념 혹은 그와 함께 누리는 행복의 신화는 오늘날 한국인의 삶에서도 깨지고 있다. 한국 사회도 공동체의 신화가 중심이 아닌 개인주의 시대, 개별성의 시대, 개인의 신화의 시대에 진입하였다. 만약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을 비디오 설치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면, 이 전시에서 나에게 푼크툼의 경험을 준 작품은 낸 골딘의 <자매와 성인 그리고 무녀>이다. 그녀의 남달랐던 언니를 14세에 수용시설에 보내고 18세에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가부장제적 가족이라는 신화였다. 그녀는 언니의 비극적 죽음이 가족이라는 신화를 맹신하고 인간의 개별성을 묵살한 부모의 수정주의, 그에 따른 ‘다름’의 은폐와 고립 때문이었음을 가족사진을 통해 보여준다.
낸 골딘은 자신을 수정하고 싶지 않았다. 고립을 거부했고 자신과 같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알고 싶었다. 14세에 집을 나온 그녀는 개별성을 인정하되 그러한 개별자가 많다는 사실을 서로 인식하며 공존하는 세계에서 살게 되고 그곳에서 그들의 모습을 투명하고 진솔하게 있는 그대로 카메라에 담아냈다. 그녀는 자신이 ‘소외된 (marginalized)’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라고 한다. 왜냐하면 다수인 ‘우리들’은 주변부의 사람들이 아니며 ‘우리들이 바로 세상이기 때문’이다. 골딘에 의하면 우리는 ‘소외된 자’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거나 수정해야 하는 시대에 사는지도 모른다. 이제 소외는 현상 자체라기보다 그 현상을 감추려고 하는 은폐의 산물인 것이다. 골딘에게 사진은 그러한 ‘우리들’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정확하게 (exactly)’ 보여줌으로써 다수의 우리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진지함으로 다양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데 의미가 있다. 골딘에게도 바르트에게도 사진은 신화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는 정직성 (complete honesty)을 구현한다.
이번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바르트이다. 한·불수교 13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열린 이 전시가 전적으로 프랑스 측에 의해서 기획되었다는 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과 미국 작가들의 작품이 대다수를 이룬다는 점, 일본과 중국 작가 3인이 참여하고 있는데 반해 한국 작가가 보이지 않는 점 등이 아쉽다. 현대 사진을 집중적으로 공부한 나에게 롤랑 바르트는 언제나 큰 산이다.
이 전시를 본 후 바르트는 내게 더욱 큰 산으로 다가온다. 바르트 자신이 그토록 해체하기를 원했던 신화가 ‘프랑스의 거장 바르트’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이데올로기적 긴장은 이 전시의 아이러니이다.

위 낸 골딘 〈자매와 성인 그리고 무녀〉 3채널 영상 2004

CRITIC 정지현 곰염섬

6.1 ~ 7.2 두산갤러리

여경환 |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정지현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에 들어서서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뜯어내다 만 채 쌓여있는, 기존 전시에 쓰였을 가벽들의 헐벗은 광경이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전선들, 골조를 드러낸 목재들이 정지현의 이전 작업들(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잡다한, 용도를 알 수 없는 파편들일)과 익숙한 듯 생경한 오브제들이 무질서하게 이어져있다.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게 만드는 전시 구성이지만 어느 것이 작품이고 어느 것이 작품이 아닌지, 대체 전시장인지 아직 준비 중인지 모를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 답을 찾기 위해 〈곰염섬〉이라는 전시 제목을 살펴봐도 소용이 없다, 이미 그것은 무의미한 글자의 나열일 뿐이라고 작가가 선언했으니까.
사실 차분히 전시장을 거닐면 거닐수록 무질서한 배치 속에 세심히 구축된 질서의 흔적이, 무작위적인 나열 속에 계산된 연출이 슬며시 엿보인다. 그럼 여기서, 감각적이고 트렌디한 시대에 뒤떨어진, 좀 촌스러운 질문을 해보자.
“이 생경한 풍경의 의도적 제시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대체 무엇인가?” 관람객을 알 것 같으면서도 도무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이 불편함 속으로 밀어 넣는 이유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풍경에 대해서 작가는 “빠르게 바뀌는 가변적인 현실 앞에서 개인이 느끼는 무기력한 상황들, 그리고 그런 상황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변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한다.
큐레이터와 작가로 그와 같이 일해 본, 필자가 아는 정지현은 매우 치밀한 작가다. 함께 했던 〈로우테크놀로지 : 미래로 돌아가다〉(2014.12.19~ 2015.2.1,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촉박한 준비기간에도 그는 전시기획안을 꼼꼼히 읽고 그에 정확히 조응하는 새로운 작품안과 자신의 작품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보내왔다. 몇 번의 예민한 의견조율 과정 속에서도 그는 늘 정확한 언어로 자신의 작품안을 설득했고, 유연한 태도로 조율에 임했다. 최종적으로 지금까지 발표해 온 자신의 구작(舊作)들이 공연 전의 연극무대처럼 골조가 드러나는 공간 뒤편에 놓이고, 3D 아바타 스킨을 결합한 BJ의 인터넷방송을 보여주는 신작 〈Skin Paster〉를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로우테크와 하이테크가 혼재된 현실과 그 경계를 묻는 작품 〈테크 리허설〉을 선보였는데, 이와 같이 구작과 신작이 뒤섞이는 방식은 이번 개인전 〈곰염섬〉에서 선보이는 전시 구조와도 일치한다.
사실 필자에게는 정지현의 이번 개인전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고, 그 작품은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집단적 심상으로서의 풍경을 제시한 것으로 읽힌다. 다루는 매체가 매우 다양한 정지현의 작업을 관통하는 것 중에 하나는 사회나 현실의 거대함과 반복성 앞에 선 예술가 개인의 자의식이다. 그 자의식은 대부분 매우 개인적이고, 시적이고, 추상적이고, 끊임없이 좌절과 무력함을 느끼지만 결코 그 세밀한 무늬들의 기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 개별성과 섬세함을 위해 그는 자신만의 오브제들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은 현실과 매우 닮아있기도 하고(〈아무도 모르는 곳〉), 너무나 기괴하고(〈Bird Eat Bird〉), 조금씩 움직이거나 흩날리기도 하며(〈저편의 리듬〉), 빛나다가 서서히 사라져간다(〈Night Walker〉).
자신의 기존 작업들까지 과감히 하나의 파편들로 만들어버리는 폐허의 힘은 미약하지만 파괴를 통한 구축을, 망각을 통한 상기를 끈질기게 촉발시킨다. 그것은 사회학자 김홍중이 발터 벤야민의 철학적 방식을 일러 만들어낸 말 ‘파상력(破像力)’과 맞닿아 있다. 부재하는 대상을 현존시키는 힘인 유토피아적인 상상력의 반대에 있는 파상력은 현존하는 대상의 비실체성 혹은 환각성을 깨닫는 힘으로, 어떤 구원의 가능성은 미래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폐허로서의 현재를 그대로 인정하고 파괴하고 다시 구축하는 과정,
그 순간 속에 있음을 말한다. 파괴 – 수집 – 만화경적 구축을 통한 파상력의 21세기적 구현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풍경이 아닐까. 현실의 부유하는 잔해물들 속에서, 그 폐허를 새롭게 구축할 수 있는 힘은 먼저 그 풍경을 그대로 눈앞에 펼쳐내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정지현의 의미 없는 작업의 의미는 바로 여기서 시작될 것이다.

위 작은 작품들이 합쳐져 하나의 작업이 되는 전시장 전경

CRITIC 윤종석 artist’s archive-나의 10년의 기록

5.13 ~ 6.6 충무아트홀갤러리

김최은영 | 미학

드러난 도상보다 더 궁금한 것은 화면의 속살이었다. 5cc 용량 주사기로 짜낸 점들이 모여 새롭고 흥미로운 형태를 이룬 윤종석의 작품엔 언제나 ‘노동’이란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은 거죽의 형상보다 속살의 집요함을 목격하려 든다. 호기심을 충족하고 난 후, 그제서야 제대로 보이는 〈어머니의 손〉과 〈처 할머니〉의 얼굴이다. 팽팽하고 윤이 나는 젊은 그것이 아닌, 반드시 세월을 거쳐야만 얻을 수 있는 주름과 결이 보인다. 기존 작품의 의류이미지와는 분명 다른 언어다. 똑같은 5cc 주사기의 점으로 표현했으나 이전의 것은 욕망에 대한 이중성을 위장하기 위한 방식으로서의 ‘점’이었다면 노경(老境-늙은 얼굴과 손)에서의 ‘점’은 세상의 욕망에서 벗어나 스스로 선택한 은자(隱者)적 삶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급하지 않고, 느려도 상관없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흘러야만 가능한 노경이다. 절대시간을 쏟아야만 가능한 노경을 점묘 작품으로 완성해내는 당연한 명분을 구성해냈다.
달라진 것은 대상뿐이 아니다. 점에서 선으로 작법이 변화했다. 주사기를 사용하는 방식은 같지만 점들을 나열하던 방식에서 흐르는 곡선을 차곡차곡 겹으로 쌓았다. 함축(含蓄)이다. 함축은 문학 언어의 특성 중 하나로 직선적, 평면적, 외연적(Denota-tion)이기보다 입체적, 고차원적임을 말한다. 은유인 동시에 내포(Intension)에 해당한다. 〈That days (20150219)〉는 이러한 함축의 속성을 화면에 고스란히 담아낸 윤종석의 신작이다.
“살면서 보고 느끼는 것들, 보게 되는 대상들, 만나는 대상들 사람들 이런 것들을 주로 그리고 있고 다시 그것들을 재조합해서 어떤 날을 만들어 보려고 하는 것.”- 작가 인터뷰 중
드러내기 위해 쌓는다. 깊게 이야기하기 위해 숨긴다. 오래 고민했기에 탄생된 굽은 선들의 함축은 조급함을 이겼고, 명백한 아름다움보다 한 수 위를 차지했다. 안으로 간직하는 것을 중시하는 동아시아 고전의 곡경(曲徑)과 유사하다. 윤종석의 선은 빠르지 않고, 온화하여 다른 색감의 선과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이 곡선들의 집합은 유형의 형상 배후에 깊이 숨은 의미의 세계가 된다. 즉, 작가 윤종석은 사람과 사물 등 다양한 대상의 DNA를 찾았다. 그리고 그 원초적인 성분만을 이용해 사람도 사물도 아닌 ‘어떤 날(That days)’을 레고블록처럼 쌓아버렸다. 익명의 얼굴은 어쩌면 ‘어떤 날’ 만난 사람일 수도 있고, ‘어떤 날’ 느낀 감정일 수도 있다. 윤종석은 진짜 말하고자 하는 ‘어떤 날’을 드러내지 않고 누군가의 얼굴 뒤로 감추고 숨겼다. 사실 숨김은 더 잘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더욱 깊고 그윽하며 아득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감춤은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서 풍부하고 더 감동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분명한 것은 단 하나, 내면으로 향하는 작가의 정신이다. 차곡차곡 쌓인 선들이 만든 겹을 들춰 결을 마주할 때 윤종석이 말하고자 하는 ‘어떤 날’ 민낯을 목격하게 된다.
흐릿한 가운데서 찾아낸 아름다움은 투명한 미감을 이겼다.

위〈That days 시리즈〉 캔버스에 아크릴 130×162cm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