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TOPIC 마지막 여행은 달에 가고 싶다

정강자 50 YEARS OF WORK

작가 故정강자(1942~2017)의 첫 회고전이 아라리오갤러리 천안(1.31~5.6)과 서울(1.31~2.25)에서 열렸다. 작가가 2015년 위암 투병 중에 그린 작품제목 〈마지막 여행은 달에 가고 싶다〉와 동명인 이번 전시에는 정강자의 대표작과 근작이 대거 출품되며 다양한 아카이브 자료를 선보인다. 사회정치적으로 격동의 시기를 온몸으로 감당해내며 한국 현대미술사에서는 퇴폐와 선정적 이미지로 인해 평생 체제 밖을 떠돌아야 했던 정강자의 예술가적 열정과 애환이 느껴지는 현장을 만나본다.

 


자화상 속의 신체

고동연 |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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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여인들(감비아)〉(사진 오른쪽) 캔버스에 아크릴릭 160×200.5cm 1989 | 아라리오갤러리 천안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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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벗었다는데 그렇게 신경을 쓰는지 모르겠어요. ‘누드’ 자체가 하나의 ‘오브제’로 쓰이고 있을 뿐인데…”라면서 속안(俗眼)을 탓한다.

비평가가 작업이 지닌 미학적인 측면에만 집중하고자 할 때 작가 개인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방해가 되곤 한다. 작업 대신 작가의 ‘독특한’ 삶에만 독자의 관심이 집중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정강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1968년 세시봉 음악감상실에서 열린 〈투명풍선과 누드〉에서 팬티만을 입은 채 가슴 부위에 투명풍선을 달고 터뜨리는 행위예술의 주인공이었던 그녀의 ‘스타성’은 미술계뿐 아니라 세간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 두드러진 것 역시 작가 개인의 신체 이미지였다. 국내 여성작가들이 자화상을 제작하는 일은 흔히 있지만, 자신의 신체를 중점적이고 지속적으로, 그리고 일상적인 맥락에서 활용하거나 재현한 경우는 흔치 않다. 전시된 작가의 유품 사진들 중에 관광지 유적 앞에서 찍은 모습은 자화상과 신기할 정도로 일치한다. 특히 1970년대 초 명동 거리의 중심을 활보하는 여성으로부터 1990년대 작업복 차림의 여성,2000년대 들어서 간략화된 자연추상과 여성의 몸을 중첩시킨 최근 풍경화에 이르기까지 정강자는 행동하는 자신(여성)의 신체를 전면에 내세운다. 1960년대 말 이젤 앞에 놓인 자화상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나 1990년대 이후 그녀의 거대한 자화상들이 필자의 이목을 끈 것도 이 때문이다.

정강자는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에 참여하면서 ‘아방가르드 여성 1세대’로 불려왔다. 1960년대 국내에 오브제의 개념이 도입되었고 국내 미술계에서도 순수미술의 지위에 대한 철학적인 논쟁이 제기되면서 미술계의 권력구조에 대한 저항의 움직임들이 전개되었다. ‘무동인’, ‘신전’, ‘오리진’ 등의 소그룹이 벌인 전시나 해프닝은 작업의 재료나 형태가 비물질적이거나 완결된 형태를 띠지 않았고, 내용에서도 〈한강변의 타살〉(1968),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1970)은 1972년 유신체제로 향해가는 억압적인 사회 현실을 다양한 방식으로 풍자하였다. 정강자는 〈투명풍선과 누드〉등의 행위예술 이벤트를 통하여 남성 멤버들 위주로 조직된 소그룹 운동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동시에 보수적인 성문화에 과감하게 맞섰다. 그를 한국 여성미술의 선구자로 언급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1세대 여성 실험예술가로 분류하는 것은 전혀 무리가 없어 보인다.

이번 전시를 위해 다시 제작된 〈억누르다〉(1969)는 정강자의 여성주의적인 관점을 암시하는,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업이다. 엄청난 무게의 쇠 파이프가 대형 목화솜을 누른다. 쇠 파이프는 무거워 보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완벽하게 솜과 밀착되어 있지 않기에 위치를 변경하거나 제거할 수 있다. 현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쇠 파이프가 상징하는 사회적 억압을 극복해보려는 작가의 ‘의지’를 짐작게 한다. 뿐만 아니라 설치작업〈키스미〉(1967)는 동료작가 심선희의 〈미니1〉(1967)과 함께 대중문화 친화적이었던 젊은 세대 여성작가의 관심사를 반영한다. 전후 한국 화단을 대표한 여성작가 천경자가 꿈의 이미지나 뱀과 같이 문학적이고 상징적인 소재를 가지고 순종적인 여성상을 거부했다면,〈키스미〉에서 여성의 성적 해방은 립스틱이나 선글라스와 같은 대중소비문화의 파편을 통해서 구현되었다.

물론 1960년대 말부터 국내에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대중소비문화를 성적 해방과 직결하는 부분은 논쟁의 소지가 있다. 대중문화의 편린을 사용해서 보수적인  유교문화에 제동을 걸고자 한 정강자의 시도는 군부독재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서구 대중문화를 활용해서 민중이나 대학생, 지식인들의 사회비판적인 관심을 분산시켜온 역사에 비추어 보아 비판받을 만하다. 여성의 성을 자발적으로 대상화한 ‘키스미’라는 문구도 현재의 시각에서 보면 불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스미〉가 1960년대 말 남성 위주의 성적 관념이나 순수예술에 대한 젊은 여성작가의 솔직하고 저돌적인 발언이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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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 작가의 자화상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청바지 162×130cm 1992 © Estate of JUNG Kangja. Courtesy ARARIO GALLERY

1974년 한국을 떠난 정강자는 이후 몇 차례 개인전을 갖기는 했으나 국내에서 최근 자화상을 포함해서 그녀의 작업을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이에 작가가 타계하고 처음으로 열린 〈정강자: 마지막 여행은 달에 가고 싶다전〉에서 한복 변형 시리즈, 동남아시아의 바틱 기법을 사용한 2차원 작업, 암투병기에 제작된 자화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선보였다. 

그런데 최근 작업들에서 필자의 이목을 끈 것은 역시 신체가 강조된 자화상이었다. 〈자화상〉(1992)에서 작가는 푸른 청바지를 입고 연장에 해당하는 붓을 들고 있고 1996년 자화상에서는 청바지에 가죽점퍼를 입은 작가가 팔레트를 옆에 두고 서있다. 이국적인 풍경이나 모티프들 속에 위치한 자화상은 타문화를 탐구하고 해석해가는 화가의 적극성을 암시한다. 여기서 팔레트와 붓은 창조의 원천이나 도구로서 남성작가들의 자화상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소재이다. 재스퍼 존스가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의 마초적인 창조적(성적) 에너지를 풍자하고자 붓을 거꾸로 붓통에 꽂아놓은 모습을 브론즈로 주조한 바 있다. 따라서 거대한 팔레트 옆에 서있는 정강자의 자화상은 여성 작가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통상적인 젠더 구분에 도전장을 내민다. 또한 살결이 검은 남태평양의 원주민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한 모습은 일찍이 서구권의 남성작가들이 비서구권의 문화를 대상화해온 관행을 꼬집는다고도 볼 수 있다.

정강자의 자화상은 철저하게 여성의 신체를 타자화하는 방식으로부터도 비껴나 있다. 말년 자화상에서 여성의 신체에는 수술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고 캔버스 밖에 위치한 여성은 자신의 모습을 측은하다는 듯이 손을 뻗어서 쓰다듬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작가는 최후까지 자신이 그림 속 대상에 머무르는 것을 거부하였고 그림 안과 밖, 관찰자와 피관찰자의 경계를 허물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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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자의 행동하는 몸으로부터 배우다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진행된 전시 전경

결론적으로 정강자에게 몸은 직접 경험하고 행동하는 인간 실존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단 하루를 더 살더라도 자신의 열망을 숨김없이 표현해야 한다’는 작가의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1960년대 말 행위예술 분야에 적극적으로 몸을 던진 것처럼 작가는 외국으로 이주한 후에도 이국적인 풍경의 중앙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그 부분이 되고자 애썼다. 덕분에 필자는 1960년대 말〈투명풍선과 누드〉에서 그가 보여준 저돌적인 작가의 자의식과 존재감을 최근 자화상들과도 쉽게 연관시킬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강자의 신체 이미지를 통하여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몸이 갖고 있는 위상에 대하여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성의 해방을 부르짖은 지 5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여성의 몸은 공공의 장소에서 기이하고 불편한 존재이며, 최근 우리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투(#MeToo) 운동이 제기하는바 남성의 욕망을 ‘본의 아니게’ 자극한 여성의 성은 처단되어야 할 대상이다. 정강자의 파격적인 용기가 다시금 필요한 때다. ● 고동연 |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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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GHT & ISSUE 화성에서 온 메세지

사라 다허/마르쿠츠 베를리 (사진 앞) 소변, 씨앗, 인명 식물 키우기 세트, 유리시험관 가변크기 2016

사라 다허/마르쿠츠 베를리 <Aquaforming, Mars>(사진 앞) 소변, 씨앗, 인명 식물 키우기 세트, 유리시험관 가변크기 2016

1.23~5.30 한국화학연구원 디딤돌플라자

화성에서 쓴 지구 환경 보고서

그간 미술은 발전한 과학을 도구화하여 시각적 재현물을 ‘작품’으로 보여주는 문법을 따르는 것이 주류였다. 따라서 과학의 발전은 미술에 있어 매체 다양화라는 응용의 결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술의 상상력은 과학적 진보의 저변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과학의 발전은 왜 그것을 이뤄야만 하는지 당위성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화성에서 온 메시지전〉은 이러한 양상을 확인하고 예술적 상상력이 전지구적 위기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단서를 제공하는 전시로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지구를 타자화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는데, 전시 타이틀이 암시하듯 지구의 문제를 지구에 발을 디디고 있는 상황에서 타개하는 것이 아닌, 지구 밖에서 지구를 객관화하여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이룩하고자 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영화화되면서 인기를 끈 앤디 위어(Andy Weir, 1972~)의 소설 《마션(Martian)》을 연상하게끔 한다. 전시 타이틀을 인지하고 전시를 본다면 제2의 생존장으로서 화성의 가능성에 대해 참여 작가들이 화학전공자들과 협업하며 벌인 상상력 퍼레이드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참여작가는 7명(팀)으로 미국의 생태과학예술가인 아비바 라마니(Aviva Rahmani), 화학예술가 서일 사프렌(Cheryl Safren), 스위스와 브라질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마르쿠츠 베를리(Markuz Wernli) / 사라 다허(Ssrah Daher)팀, 인공적 화학물을 이용해 작업하는 길현, 탄소를 주제로 게임을 작품으로 선보인 안가영, 사막화에 반대하는 작품을 선보인 김지수, 그리고 생체활동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고민한 박형준 등이다. 이들은 전시장이 화성에 구축된 것을 전제로 작업한 것 같다. 예를 들어 마르쿠츠 베를리/사라 다허의 작품은 소변을 발효시켜 물의 존재가 요원한 화성에서 식물을 재배할 수 있는 팁을 제시한다. 마치 과학실험실을 연상하게끔 하는 연출 같지만, 이 작업은 실제 기증받은 소변을 재료로 민들레나 허브 등을 발아시켜 키워낸다. 이런 방식은 박형준의 작업에서도 보이는데, 이산화탄소 얼음, 즉 드라이아이스를 고순도로 뽑아내는 화학실험을 방불케 한다. 김지수는 화성에 이끼를 키워 산소를 만든다는 영화 〈토탈리콜〉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온 작업을 선보였다.

전시를 기획한 유현주 큐레이터가 이 전시에서 주목한 요소는 바로 ‘탄소(炭素)’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의 기본적 존재 단위이자, 인류의 생존에 꼭 필요한 화석원료의 구성물질이고 현재 지구에 가장 큰 위험을 가하는 이산화탄소 등을 구성하는 물질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인간 역시 대단히 복잡 미묘하게 진화한, 탄소와 물을 기초로 하는 화학복합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전시는 과학적이고 지리적인 지식을 동원하기도 하고, 탄소와 이산화탄소, 요소(urea), 구리와 화학복합물의 페인팅 및 바이오화학적인 실험 등 화학 재료들을 사용해 화학을 예술의 언어로 전환하고자 애쓴 예술가들의 작업을 보여줍니다.”

전시장을 나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럴듯하다!’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화성, 그곳은 지구 생명체가 살아남기엔 척박한 환경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이런 작가들의 제안이라면 화성에서도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역으로 그 척박한 화성에서도 작가들이 제안한 방법으로 생존이 가능하다면, 당장 지구에서는 더 수월하게 행해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전시는 화성에서 거주를 위한 상상적 방법을 제안함과 동시에 이 제안을 생존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지구에 당장 적용해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대전 = 황석권 수석기자

THEME FEATURE 광주화루

위 이호억 〈수덕사 대웅전 곁에서〉 2017

명칭부터 논쟁거리인 ‘한국화’는 익숙한 우리 그림을 서구 회화와 비교할 목적으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화는 너무 익숙한 나머지 현재 우리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것은 아닐까? 이를 환기하는 한국화 공모전 〈광주화루〉(주최 광주은행)가 이목을 끌고 있다. 《월간미술》은 치열한 경쟁을 거쳐 선정된 10명의 한국화 작가를 소개한다. 이들의 한국화에 대한 다각도의 접근은 한국화의 현주소와 가능성을 알리는 리트머스지일지도 모른다. 또한 한국화에 특화된 이 공모전을 계기로 공모에 대한 일반의 시선을 반성적으로 정리해본다. 작품들은 〈광주화루 10인의 작가전〉 (4.4~23,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ACC))에서 직접 만날 수 있다.

동시대 한국화의 젊은 보루
〈제1회 광주화루〉 공모전 선전작가 10인

구본아프로필구본아 Koo Bona
1976년 生
홍익대 미술대학 동양화과와 동 대학원 미술학과(박사)
개인전_국내외 상하이, 타이베이 등
기획전 및 그룹전_
〈긍정의 아포리아〉(2015, 모스크바)
<자연으로 들어가다〉(2014, 오사카)
〈한중일 3인전〉(2011, 상하이)
바람난 미술공모(2014)
신진여성문화인상(2011)
송은미술대전(2005)

〈Physical Objects〉 한지 콜라주에 먹과 채색 100×280cm 2016

〈Physical Objects〉 한지 콜라주에 먹과 채색 100×280cm 2016

“폐허를 통해 미완성과 붕괴라는 이중성을 표현하며 일생동안 미완과 붕괴의 과정을 거치는 인간의 모습과 같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벽이라는 물(物)을 화두로 삼아 내가 말하려 하는 물은 단순한 사물이나 물성으로서의 물이 아닌 유기적 생명체들의 연장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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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1

김원 Kim Won
1982년 生
전북대 예술대학 미술과, 동 대학원 졸업
개인전_서울, 전주 등 4회
기획전 및 그룹전_
〈서울디지털대학교 미술상 수상전〉(2017)
〈전북미술의 현장〉(2016)
〈시대정신과 동양회화의 표현의식〉(2014)
서울디지털대학교 미술상 우수상(2017)

 

 

〈 alcoholic 〉 한지에 먹과 아크릴 200×488cm 2016

〈 alcoholic 〉 한지에 먹과 아크릴 200×488cm 2016

“나는 반복되는 상황과 그 안에서 버티기 위한 몸부림의 일부가 아마도 불안감과 불확실성, 강박과 폭발, 흥분 등과 연관되어 중독이라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있다고 바라보았다. 이와 같은 내용들은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순과 내면의 우울과 불안함, 공격성 등을 고리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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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묵티프박경묵 Park Kyongmug
1981년 生
동아대 회화과, 홍익대 대학원 동양화과 졸업
개인전_서울, 부산, 양산 8회
기획전 및 그룹전_
〈영호남 수묵화교류전〉(2016),
〈나는 무명작가다〉(2015),
〈열림 筆歌墨舞〉(2015)

 

 

 

〈경회루 무진(慶會樓 無盡)〉 종이에 먹과 채색 290×380cm 2011

〈경회루 무진(慶會樓 無盡)〉 종이에 먹과 채색 290×380cm 2011

“내게 예술이란 스스로를 찾아가는 놀이다. 놀이의 도구는 ‘붓’이자 그려진 자국은 캔버스에 담아진 마음의 흔적이며 사고된 작가의 감성이다. 작가는 실경을 근간으로 원경과 근경을 오가며 형상 속에 감춰진 뼈(骨)의 본질과 정서를 스며들게 하려 한다. 무념으로 바라본 자연에서 기존의 의미를 떠나 고정된 형태와 색상에 구애하지 않는 붓놀이로, 옛법을 배우되 머물지 않은 질서로 그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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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연1

이지연 Lee Jiyun
1979년 生
홍익대 동양화과,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개인전_2007년부터 8회
기획전 및 그룹전_
〈한중 서예교류전〉(2016)
〈바람〉(2015)
〈여백 현대한국화-여성중심〉(2013)

 

 

 

〈바람에 물들다〉 한지에 수묵 97×236cm 2017

〈바람에 물들다〉 한지에 수묵 97×236cm 2017

“나는 자연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현상과 형상이 환경에 따라 유기적으로 무한히 변화하고 있으면서도, 소란스럽지 않다. 자연은 미추(美醜)와 선악(善惡)이 없다. 가치의 대소(大小)가 없다. 나에게는 구원의 세계이고, 화엄의 바다를 보는듯한 장엄함을 느낀다. 감정의 파도 속에서 헤매는 중에도 자연은 나를 숨 쉴 수 있게 한다. 자연의 변화는 나에게 현실에 대한 표상(表象)이면서 손에 잡히지 않는 이상(理想)에 대한 열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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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채영)이채영 Lee Chaeyoung
1984년 生
덕성여대 동양화과, 동 대학원 동양화전공 졸업
개인전_2009년부터 4회
기획전 및 그룹전_
〈Sensitive Reality〉(2016)
〈The Great Artist〉(2016, 2014)
〈안견회화정신〉(2014)
제4회 에트로미술대상 금상(2015),
종근당 예술지상(2015),
파이낸셜뉴스 미술공모전 입선(2010)

 

〈섬〉 한지에 수묵 130×162cm 2016

〈섬〉 한지에 수묵 130×162cm 2016

“이처럼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간과하기 쉬운, 그래서 오히려 독특한 정서를 자아내는 장소들이 있다. 본인은 이러한 도시의 풍경들 즉. 일상에 연관된 장소들, 나 또는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거리들, 도시의 주택가와 낡은 건물들의 주변 풍경들에서 느껴지는 비정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아주 고독하기도 한 것들이 뒤섞여 있는 풍경들을 보여주고 싶었고, 주변의 풍경들 사이에서 다른 시간과 공간이 가동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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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량 컬러이태량 Lee Taeryang
개인전_미국, 프랑스, 중국 등 총 27회
기획전 및 그룹전_
〈인왕산프로젝트_특별전〉(2017)
〈안평의 시간〉(2016)
〈트라이앵글 프로젝트〉(2015) 등 190여 회

 

 

 

 

〈무경산수(無境山水)〉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194×97cm 2017

〈무경산수(無境山水)〉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194×97cm 2017

“내게 있어 작업은 ‘좋은 작업을 해야 한다’ 라는 명제에 대한 시도가 아니라 ‘좋은 작업은 무엇인가’라는 물음 그 자체이다. 내 그림형식의 명제가 그림이라는 인상을 준다는 것은 본질은 손상되지 않았다는 것이기에 어떤 형식으로든 표현하려는 것을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문제에 대한 하나의 논리적 판단이나 근거를 주장하거나 강요하는 명제는 아니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오직 명제를 통해서만 말해질 수 있으며 따라서 모든 명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어떤 것도 말해질 수 없다.” 결국, 내 그림은 중요하지 않으며 정작 중요한 것은 내 그림 밖의 모든 것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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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억수정이호억 Lee Houk
1985년 生
중앙대 한국화학과 및 동 대학원 예술학과 박사과정 수료
개인전_2012년부터 6회
기획전 및 그룹전_
〈불안〉(2017)
〈한국화의 유혹〉(2016)
〈오토픽션-한국화의 유혹과 저항〉(2013)

 

 

 

〈시간을 움직이는 것과 살아있는 것〉 장지에 먹, 분채, 식물성 안료 125×193cm 2017

〈시간을 움직이는 것과 살아있는 것〉 장지에 먹, 분채, 식물성 안료 125×193cm 2017

“현장에서의 모필 사생을 통해 시간성과 감정을 필선에 담아, 작업의 의미를 분명히 한다. 여기에 박제된 듯 고정된 동물의 그림자 따위를 분채로 칠해 올린다. 움직이는 식물과 멈춰진 동물. 개체의 속성에 반하여 연출하고 작업의 의도에 따라 숲에서 채집한 식물성안료로 염색하기도 한다.
유한한 삶의 가치를 움직이는 것과 멈춰진 것의 대비로서 드러내고자 한다.
우리는 시간에 속박된 유한한 존재다.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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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예슬인물2장예슬 Jang Yeseul
1988년 生
청강문화산업대 및 조선대 대학원 미술학과 석사과정
기획전 및 그룹전_
〈Asia Young Art Festival〉(2016)
〈온새미로〉(2016)
〈현대한국화 길을 묻다〉(2016)
대한민국한국화대전(2016)
무등미술대전(2016)
행주미술대전 특선(2016)

 

 

〈순환 Ⅱ〉 한지에 수묵 130.3×162.2cm 2016

〈순환 Ⅱ〉 한지에 수묵 130.3×162.2cm 2016

“우주의 순환과 움직임을 한국화의 가장 기본이자 정신이 되는 지(紙), 필(筆), 묵(墨)을 이용해 표현하고자 하였다. 작품에서 순환하는 먹의 형상성은 우주를 채우고 움직이는 에너지이며, 기운이 충만한 생기의 근원이다. 묵(墨)의 색(色)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깊이를 담고 있으며, 우주의 색이자 하늘의 색으로 작가의 감성을 재해석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작가는 작품 속의 우주를 통해 대자연의 법칙에 순응하고 본연의 섭리에 따르는 무위자연(無爲自然)과 순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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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흡1하성흡 Ha Sungheub
1962년 生
전남대 미술학과 졸업
개인전_1994년부터 총3회
기획전 및 그룹전_
〈김광석 20주기 추모전〉(2016)
〈잊지 않겠습니다〉(2014)
〈5·18 민중항쟁 30주년 기념전〉(2010)

 

 

 

〈금강전도〉 한지에 수묵담채 92×137cm 2016

〈금강전도〉 한지에 수묵담채 92×137cm 2016

“전통회화는 물론 전통적 미감을 고수한 진경산수와 인물화를 현대적으로 적용해 1980년 이래의 사회와 삶, 풍경과 자연을 먹을 이용한 간결한 색을 가미해 그려내려 했습니다. 또한 색에 대한 굶주림으로 인해 자유분방한 틀을 깨뜨리는 데 주력하는 동시에 서사적 인물, 우리 산천의 의미 있고 아름다운 풍경을 주된 소재로 삼았고, 최근에는 화면공간을 크게 확장한 수묵과 채색의 실험을 다양하게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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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용주2하용주 Ha Yongjoo
1979년 生
조선대 미술대학 한국화과, 중앙대 대학원 한국화학과(석사) 및
동국대 대학원 미술학과 박사과정 수료
개인전_2007년부터 총8회
기획전 및 그룹전_
〈수묵시각 2016〉(2016)
〈구인전〉(2015)
〈신세계갤러리 선정작가전〉(2013)

 

 

〈어느 연약한 짐승의 죽음〉 장지에 먹, 분 244×546cm 2012

〈어느 연약한 짐승의 죽음〉 장지에 먹, 분 244×546cm 2012

“나와 타자, 원활한 소통과 걸러진 소통을 통한 관계의 수많은 레이어의 위장을 부정하면서도 개인과 집단, 구조, 체계 안에서의 익숙하며 필연적인 상황을 인정합니다. 작품의 형식에서 보이는 방식은 화면 안에서 친절히 보여주지 않습니다. 대상을 온전히 그리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사람인지, 사람 모양을 한 것인지, 풍경인지 풍경 같은 느낌인지는 시지각을 통해 1차적으로 판단하고, 작품을 경험하는 자의 정서와 가치관을 통한 주관적 요소로 인식되고 정의됩니다. 보이는 것의 최소 기준입니다. 감각하는 것과 사유하는 작품의 화면 속 이미지는 그 무엇의 이미지일 뿐 그 무엇 자체일 수 없습니다.
사회 안에서 당신이 속한 시간, 공간, 상황, 입장에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작업입니다.”

EXHIBITION FOCUS Imaginary Asia

AES+F 〈신성한 알레고리〉 5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39분 39초 2011
Ⓒ AES+F, Courtesy of the artist & Multimedia Art Museum Moscow and Triumph Gallery

상상적 아시아

서구를 중심으로, 승자를 중심으로 기술되어온 역사의 관습에 순응하지 않는다.
아시아 권역 고유의 역사와 시간 그리고 그 과정에 축적된 기억을 좀 더 주체적으로 반추하고 현재로 소환한다. 이에 관한 일련의 이야기가 지난 3월 9일 백남준아트센터에서 개막한 〈상상적 아시아전〉을 통해 펼쳐지고 있다.
무엇보다 전시 제목 ‘상상적’에 주목하자. 일방적인 서술과 기록이 아니다. 17명(팀)이 참여해 23가지로 풀어낸 ‘무빙 이미지’에 눈과 귀를 집중해보자. 여유 있는 관람시간은 필수 지참이다. 전시는 7월 2일까지.

호 추 니엔〈미지의 구름〉싱글 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30분 2011

호 추 니엔〈미지의 구름〉싱글 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30분 2011

확실성에 관하여

이병희 | 독립큐레이터

기획 의도이자 이 전시의 특징은 우선 “무빙이미지”로 총칭하는 시간매체들을 주로 싱글채널로 그룹상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지역과 역사에 대한 내러티브를 기존의 공식적인 서술이나 해석과 평가를 통해서가 아니라 개인적, 상상적 시간 이미지를 통해서 재구축하려는 점이 특징적이다. 나아가 경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것이, 패러다임의 전환, 새로운 감각과 정서적 공동체 형성이나 소통방식의 공유, 새로운 수평적 관계상을 상상적으로 전망할 수 있느냐의 문제까지 던지고 있다.

참여 작가들을 일별해보면 우선 공통적으로 ‘아시아’의 근대성을 포스트 식민적, 포스트 민족주의적, 해체 혹은 다중 매체 차원에서 다뤄온 작가들임을 알 수 있다. 비판된 지점은 전지구화와 새로운 착취에 기반을 둔 자본-신자유주의적 경제-정치적 거래로부터 초래된 문제와 갈등, 소외, 고립 등이고, 나아가 생명의 단독성 차원에서 귀환을 감각적, 정서적인 차원에서 다뤄온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지금은 새로운 보수화와 파시즘(민족주의적 관점에서)의 대두라는 ‘경직’의 시기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첨단 기술과 미래에 대한 새로운 전망 등을 절실하게 염원하고 개발하고자 하는 ‘소프트한’ 미디어 세대들의 출현이 다소 아이러니한 레이어를 형성하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여기서 이 전시를 단순한 반복 소개 차원에서 보기보다는 다각도로 접근해 미래적 시간(가능성의 지점)을 단지 메시아적 ‘기다림’으로써가 아니라, 실천의 측면에서 그리고 나아가 트라우마적 조우와 정서적 귀환, 충동의 재발굴 측면에서 가늠해보는 기회로 볼 필요가 있다.

전시 출품 작품군을 몇 가지로 엮어볼 수 있는데, 우선 ‘지역’ 중심의 역사서술과 내러티브 위주의 작품군이 있다. 다음으로 근대적 내러티브가 포스트 근대적 매체 해체와 재조직의 과정에 등장하는 작품군으로, 여기서는 근대 주체의 소외, 재고립, 확장, 상실 이후 타자성들의 다양한 형태로의 귀환을 볼 수 있다. 다층감각과 정서의 전환 지점에 아피찻퐁의 다섯 개의 싱글채널 에피소드를 둘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전환의 지점으로 볼 수 있으며 이어서 다음으로 감각적, 정서적, 새로운 판타지적 역할이 어떻게 소비가 아닌 새로운 확실성의 영역이 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담지하면서, 마지막 지점으로 넘어가게 된다.

우선 ‘지역’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선형적 시간성에 근거한 작품군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처음에 보게 되는 것은 아이다 마코토의 작품이다. 자칭 일본 수상이라는 자의 퍼포먼스 연설인데, 이 작품에서 연설자는 ‘영어’ 공용화의 불편함을 퍼포밍하면서 전지구화를 적극 철회하고 역사를 되돌려 민족주의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다. 날리니 말라니와 양푸동의 작품을 통해서 이러한 제안의 배경에는 사실 아시아 역사의 실질적인 이유와 그 중심에 ‘폭력’이 있음을 재확인하게 된다. 여기에서 아시아 고유의 민족주의와 가부장제, 혹은 계급주의가 전지구화를 통해 청산되었다기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으로 세탁되었고, 이어 보다 중층적인 ‘피해자’를 반복 재생산하고 심지어 미디어적으로 소비하고 있음을 성찰적, 정서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포스트 전쟁 증후 혹은 트라우마를 매체적으로 다룬다고 볼 수 있는 작품군에서는 근대적 시간성의 해체와 내러티브의 트라우마적 귀환을 볼 수 있다. 디지털 이미지로 재연된 비무장지대(DMZ)에서의 추억과 ‘지뢰’라는 매몰-잠재된 살상을 서정적으로 다룬 권하윤의 〈489년〉과 베트남 전쟁에서 일본의 패배라는 소재를 갖고 현대 일본 사회의 측면을 강박적인 리인액트먼트(재연) 방식을 통해 다소 증상적 후유증의 상태로 다룬 딘 큐 레의 〈모든 것은 재연이다〉가 조우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메이로 고이즈미의 〈영원한 처녀〉는 민족주의가 초래한 민족 주체성의 상실과 전지구적 소비대상화에 대한 포스트 트라우마적, 메타 미디어적 작품이 된다.

이어서는 아시아의 전지구화가 가져온 신자유주의적 파괴성이 단지 인권적, 지리적인 차원과 같은 타자화의 영역뿐 아니라 고유한 주체의 단독성의 영역에서 자리 잡고 있던 주술성, 판타지, 심지어 마술성과 미신성 등의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미신적 혹은 판타지의 영역이 물질성의 차원으로 비천해진 것을 보여주는 호 추 니엔의 〈미지의 구름〉과 아흐마드 호세인의 작품 〈제4단계〉는 여기에서 한 쌍을 이룬다.

염지혜 〈분홍 돌고래와의 하룻밤〉싱글 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 21분 30초 2015

염지혜 〈분홍 돌고래와의 하룻밤〉싱글 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 21분 30초 2015

아래 쉬빙 〈지서(地書): 팝업북(낮)〉(왼쪽)영상 설치, 컬러, 사운드, 6분 20초 2015〈지서(地書): 팝업북(밤)〉 영상 설치, 컬러, 사운드, 3분 50초 2016 © Xu Bing Studio

 쉬빙 〈지서(地書): 팝업북(낮)〉(왼쪽)영상 설치, 컬러, 사운드, 6분 20초 2015〈지서(地書): 팝업북(밤)〉 영상 설치, 컬러, 사운드, 3분 50초 2016 © Xu Bing Studio

키워드로서 무빙이미지의 진면목

보다 일상적으로 친근해진 디지털 매체들의 다중시간적, 혼성적 타자성과의 조우 차원을 볼 수 있는 작품군에 염지혜의 〈분홍 돌고래와의 하룻밤〉이 있다. 이어 점차로 “무빙이미지”의 ‘반복-다중 시간성’과 새로운 소통방식으로서의 역할이 강조되어 감을 알 수 있고, 여기서 쉬빙의 디지털 시각언어_기호 책을 흥미롭게 열람할 수 있다. 쑹둥의 〈시작 끝〉의 무한 반복적 이미지와 직접적 재현 불가능성에 대한 시적 접근과 딘 큐 레의 〈네 순간의 무역센터〉로부터 우리는 전지구적 트라우마가 공유 (불)가능한 것인지, 혹은 불가능성 자체로 추상적으로 봉합되어 잠재성의 차원으로만 드러나는 것인지를 보게 된다.

아피찻퐁의 5개의 싱글채널 공간은 전체 전시에서 갈라짐의 지점, 경계 지점의 구실을 한다. 그동안 알려졌다시피 아피찻퐁은 포스트 식민주의의 관점에서 온정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배제된 생명의 영역이 어떻게 미디어적으로 귀환하는지를 보여왔다. 이에 우리는 역사와 한 국가, 지역의 이야기가 보다 복합적이고 다중적인 시·공간적 차원에서 전개되고 반복되며 웅얼거리는 차원에서 폭로될 수 있음을 보았다. 이를 통해 전설, 과거, 꿈, 트라우마, 판타지 등과 같은 비언어적, 비제도적, 상상적, 상징 이전의 상태, 혹은 무의식이나 전의식 상태와 같은 단독성의 영역이 어떻게 역사성이 실재적인 차원 즉 파편적 전체로, 혹은 이미지적 서술로, 혹은 주체-타자 간의 관계 항 속에서만 부상할 수 있는지를 역설케 된다.

만일 우리가 이 기점을 지나, 언뜻 어떤 변환의 기점을 감지할 수 있었다면, 하룬파로키의 다큐멘터리는 단지 다양성의 비교가 아니라, 세계의 전지구화와 그 역사의 궤적을 다시 걷게 되는 길잡이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와엘샤키와 문경원과 전준호의 작품에선 에피소드 혹은 소문이 단지 개인적인 상상적 내러티브로서 이국적이거나 흥미로운 차원이 아니라, 심각한 실재성의 차원일 수 있음이 드러난다. 여기서 잠시 새롭게 획득될 확실성은 혼성적이고 다중적 시간의 패러다임에서만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거론할 작품군에서는 일종의 봉합과 무한반복이 어떻게 하여 근대적인 시간성을 넘어선 다른 차원의 시간성에서 정서와 감각으로 확장되는지를 보게 된다. 전시장의 마지막 지점에서 문틴&로젠블룸, AES+F의 작품을 보게 되는데, 파토스적 인물들의 다소 장엄해보일 수 있는 포스트 휴먼적 매체퍼포먼스 이미지가 특징이 된다. 즉 근대의 잠재성이란 것이 전지구화와 신자유주의적으로 ‘소비’되고 남겨진 ‘이미지’들이 되었을때, 과연 이들이 다시 다층적인 감각과 복합적인 감성, 정서와 순수 형식으로의 충동 등을 통해 산-죽은 상태가 아닌 생동하는 포스트 휴먼적 내러티브를 새롭게 구축해 나갈 수 있을지, 그리고 이때 어떤 확실성에 기반을 둘지, 혹은 요청되는지를 되묻게 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과연 새롭게 감각적 정서적으로 귀환해온 단독성의 영역들과 새로이 발굴될 세대성이 새로운 패러다임과 혼성적 (포스트 휴먼적 관점의) 시간을 내다볼 때 어떤 기틀이자 잠재성이 되며 또한 어떤 기점이 될 수 있겠는가. 물론 전시 관람의 시작에서 꿈꾸고 상상했던 새로운 내러티브, 혹은 시간적 경험이 비록 꼬박 하루가 걸리는 관람이라 할지라도, 그 짧은 시간에 획득될 리는 없다. 실천의 시간은 아마도 분명한 확실성에 기반을 둘 것이며 현대성이란 갈라짐의 연속이고, 역사란 파편화된 고유 요소들이 순수 형식으로서의 충동처럼 출몰하는 시간이라는 점은 확실한 듯하다. ●

 

CRITIC 아이작 줄리언 〈플레이타임〉

2.22~4.30 플랫폼  -  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박제철 | 영화 ·  미디어 이론 연구자

2004년 부산비엔날레, 2008년 광주비엔날레, 그리고 2011년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가진 개인전까지 이미 몇 번의 전시를 통해 국내 관객에게 이름을 알린 영국의 흑인 게이 영화감독이자 영상설치 작가 아이작 줄리언의 7채널 스크린 설치작업 〈플레이타임(Playtime)〉(2014), 2채널 스크린 설치작품 〈자본 KAPITAL)〉(2013), 싱글 채널 비디오 〈표범(The Leopard〉(2007)이 플랫폼-엘에서 전시 중이다. 이 작품들은 주제와 매체 미학 양면에서 최근 그의 작업 경향에 어떤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암시한다. 서구에 거주하는 흑인들의 복잡한 인종적, 성적, 성별적 정체성과 할렘 르네상스의 연관성을 탐구한 시적 다큐멘터리 〈랭스턴을 찾아서(Looking for Langston〉 (1989)나 블랙스플로이테이션(blaxploitation) 영화의 역사를 탐구한 다큐멘터리 〈배다스 시네마(BaadAsssss Cinema〉(2002)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 줄리언의 관심은 주로 흑인 디아스포라의 불안정한 정체성과 그것의 문화적 의의에 집중돼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래 그는 이미 어느 정도 서구에 동화된 2세대나 3세대 흑인 디아스포라보다 최근 전지구화의 흐름과 더불어 새로운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는, ‘남반구(global South) 주민들의 북반구(global North)로의 이주’로 관심의 초점을 옮기고 있다. 또한 극장 상영을 겨냥한 단일 스크린 기반의 필름이나 비디오 매체를 사용함으로써 인종 간 동성애에 연루된 남성의 신체를 육감적으로 묘사하는 데 치중하던 과거와 달리 그의 최근작은 대형 갤러리나 뮤지엄에서의 전시를 염두에 둔 다수의 스크린을 기반으로 한 설치 형식을 주로 취하며, 디지털 합성을 통해 가상적 신체와 현실적 신체 간의 경계를 부단히 넘나드는 양상을 보여준다.
〈표범〉은 이러한 변화의 이행기적 성격을 보여주는 작업으로 주목할 만하다. 최근 중동 지역 난민들이 지중해를 통해 서구로 대규모 이주하는 현상을 시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은 줄리언의 새로운 관심사를 보여주는 동시에 인종 간 동성애에 연루된 남성 신체의 육감적 묘사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원래 3채널 스크린 형식으로 전시했었으나 이곳 플랫폼-엘에서는 싱글 채널 비디오로 재편집되어 상영됐는데, 이 점 역시 매체 미학적 측면에서 봤을 때 이행기적 성격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플레이타임〉과 그 자매작 〈자본〉은 그가 더 이상 흑인 디아스포라 남성의 퀴어 정체성이라는 주제에 얽매이지 않고 자본, 인간, 이미지의 전지구적 흐름이 가져오는 파국적 효과라는 새로운 관심사로 작업 방향을 완전히 선회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또한 건축학적으로 배치된 7개의 스크린을 통해 마치 한 편의 음악을 연주하듯 이미지를 전개하는, 〈플레이타임〉에 드러나는 매체 미학적 특성은 그가 어떻게 다채널 영상설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물론 〈플레이타임〉은 내러티브 영화의 관습을 상당 부분 차용하고 있다. 장만옥, 제임스 프랭코 등 유명한 전문배우의 캐스팅이나 매끄럽고 유려한 미장센과 촬영을 보자면 가히 이 작품을 다채널 스크린 설치의 블록버스터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또한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상이한 방식으로 겪고 있는 지리적, 계급적, 인종적으로 다른 세 인물-파산한 아이슬란드인, 승승장구하는 런던의 미술품 경매사, 자식 부양을 위해 가사 노동자로 두바이에 온 필리핀 여성-의 상황을 대조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신자유주의적 전지구화의 파국적 효과를 비판하는 이 작품의 내러티브도 이제 그다지 충격적이지도 신선하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오직 관객이 7개의 스크린 중 중앙에 위치한 가장 큰 스크린 위주로, 즉 단일 스크린 기반의 영화 관람 양식으로 〈플레이타임〉을 감상할 때만 가능하다.
조나단 벨러의 ‘주목가치이론(attention theory of value)’에 따르면 미디어가 산출하는 이미지의 경제적 가치는 그 이미지에 대한 관객의 주목이 축적됨에 따라 증대된다. 따라서 자연히 가장 주목받을 것으로 기대되는, 중앙의 가장 큰 스크린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이 가장 큰 경제적 가치를 잠재적으로 획득할 것이다. 하지만 스크린 7개의 불균등한 배치를 통해 줄리언은 이미지 경제가 공평한 자유로운 경쟁에 열려있다는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폭로할 뿐만 아니라, 중앙의 스크린으로부터 배제된 여타의 가능한 이미지들을 주변에 위치한 6개의 스크린을 통해 회복시킴으로써 독점적인 전지구적 미디어 산업에 대항하는 대안적인 주목 경제적 실천을 매체 미학적으로 실현하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플레이타임〉은 줄리언이 이 작품의 자매작이라고 말한 〈자본〉을 매체 미학적으로 보충하려는 시도로 읽힐 수 있다. ‘자본을 안무하기(Choreographing Capital)’라는 제목으로 줄리언이 기획한, 데이비드 하비의 강연을 기초로 제작된 2채널 스크린 다큐멘터리인 이 작품에서 하비는 자본은 본래 비물질적으로 객관적이며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 속에서 불균등하게 분배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자본에 관한 마르크스의 고전적 통찰은 아직도 유효하다고 말한다. 이 때 청중으로 참여한 유명한 문화연구학자 스튜어트 홀(이후 2014년 2월 타계)이 생산 과정과 계급에만 초점을 맞추는 마르크스의 고전적 이론은 소비와 문화적 차이를 고려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어야 한다는 반론을 펼친다. 〈플레이타임〉은 줄리언이 스튜어트 홀의 이러한 반론을 고려하여 〈자본〉을-줄리언의 영상 작품 〈자본〉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의 저작 〈자본〉까지   -   매체 미학적으로 “다시 쓰는,” 즉 데리다적 의미에서 “대리-보충”하는 시도의 산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위 아이작 줄리언 〈플레이타임 Playtime〉 7채널 영상설치 67분 2014

CRITIC 서윤희 기억의 간격; 畵苑

3.9~4.22 OCI미술관

고충환 | 미술비평

서윤희가 자신의 그림에 부친 주제 〈기억의 간격; 畵苑〉에는 실제 혹은 실재가 빠져있다. 일종의 생략법인 셈인데, 이렇게 생략된 부분을 되살려 복원해보면 ‘기억의 간격’이란 주제는 사실은 ‘기억과 실제 혹은 실재와의 간격’이 된다. 여기서 기억은 현재에 속하고, 실제와 실재는 과거시제에 속한다. 그리고 실제는 과거에 실제로 있었던 일을 뜻하고, 현재시점에서 그 일을 기억으로 되불러오는 것이다. 그렇게 실제와 기억 사이에는 과거와 현재 사이만큼의 거리가 있고 간격이 있다. 그러므로 기억을 그린다는 것은 사실은 시간을 그린다는 것이고, 기억의 간격을 그리는 행위는 사실상 시간의 간격을 그리는 행위와도 같다.
이렇게 실제가 시간과 관련이 있다면, 실재는 욕망과 관련이 깊고 특히 억압된 욕망과 관련이 깊다. 이를테면 기억에는 되새기고 싶은 기억이 있고 잊고 싶은 기억이 있다. 여기서 잊고 싶은 기억이 기억을 억압하고, 그렇게 억압된 기억이 억압된 욕망의 형태로 실재계로 밀려난다. 그러므로 기억은 실제와의 간격만큼 모호해지고 때로는 억압된 탓에 애매해진다. 다시, 그러므로 기억을 그리고 시간을 그리는 그림에서는 이처럼 모호해진 실제를, 그리고 애매해진 실재를 그림의 표면으로 불러내는 것이 관건이고, 다른 유의 그림들에 비해 유독 분위기가 강한 것도 이 관건과 무관하지가 않다.
멀리서 작가의 그림을 보면 그저 무분별한, 알 수 없는 추상회화처럼 보인다. 좀 더 다가가 보면 비정형의 구김과 주름, 섬세한 얼룩이나 크랙과 같은 추상회화의 성분요소들이 보인다. 그리고 여기서 더 다가가 보면 물놀이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낚시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산행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쯤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그림 속 사람들이 점경을 이루기 위해서 그림은 배경화면이 되어야 하고 풍경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추상회화처럼 보이던 그림이 불현듯 풍경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멀리서 볼 때 다르고, 가까이서 볼 때가 다르다.
그 풍경은 친근하면서 낯설다. 비록 선입관 속 풍경을 닮았지만 실제 그대로를 재현한 풍경이 아니기에, 엄밀하게는 작가가 지어낸 풍경이기에 낯설다.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풍경에 비해 눈에 띄게 점경을 이룬 사람들과의 대비가, 그리고 여기에 도대체 가장자리가 따로 없는 무한정 열린 풍경이 막막하고 아득한 기분에 빠져들게 만든다. 언젠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데자뷰를 보는 것도 같고, 망각 직전에 겨우 건져 올린 희미한 기억의 한 자락을 보는 것도 같고 색 바래고 빛바랜 기억의 화석을 보는 것도 같다. 현생을 넘어 전생의 기억을 보는 것도 같고, 존재를 넘어선 기억의 원형 혹은 원형적 기억을 보는 것도 같고, 존재가 처음으로 유래한 흑암, 암흑, 카오스를 보는 것도 같다.
그림에 보이는 풍경은 사실은 작가가 지어낸 풍경이라고 했다. 비정형의 구김과 주름, 섬세한 얼룩이며 크랙이 어우러져 하나의 가상적인 풍경이 재구성된다. 이러저런 약재로 우려낸 광목천이나 장지로 풍경을 조성하는데, 그 풍경 그대로 기억의 결이며 시간의 질감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 결이며 질감 속에 서사가 깃드는데 개인적인 서사와 시사적인 서사, 종교적인 서사와 존재론적 서사가 깃드는 품 같고 주름 같고 자궁 같다. 그 자궁을 작가는 예술가의 정원이라고 부른다. 기억과 실제(그리고 실재)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아마도 작가의 정원은 그 사이 어디쯤엔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예술이란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는가의 문제라고 작가는 생각했을 것이다. 작가에게 기억은 치유를 의미한다. 기억하면서 치유하는 것이다. 굳이 약재로 풍경이며 정원을 우려낸 것은 그 치유 행위와 무관하지가 않다.
작가의 영상작업을 보면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는데, 마치 기억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것 같다. 흡사 시간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것 같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밀려오는 기억 앞에 서게 만들고, 밀려가는 시간 앞에 서게 만든다.

서윤희 〈기억의 간격_벌랏Ⅱ〉 면천에 혼합매체 210×800cm 2015~2016

CRITIC 배윤환 서식지

3.1~29 두산갤러리 서울

유은순 | 미학

두산갤러리에서 열린 배윤환의 다섯 번째 개인전 〈서식지〉는 작가 자신이 처한 다양한 현실적 상황과 내적이고 외적인 갈등, 창작에 대한 고민 등을 주제로 한 드로잉, 회화, 영상작업을 선보인 전시였다. ‘서식지’는 특정 생물이 살아가는 생태적, 환경적 조건을 뜻한다. ‘주거지’가 집을 짓고 터를 다듬어 인간이 살기 좋은 상태로 환경을 적극적으로 바꾼다는 함의를 가지는 반면, ‘서식지’는 계절, 날씨, 천재지변 등 환경적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적응하려 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배윤환의 ‘작업하기’ 방식이 이와 비슷하다. 작가는 그때그때 작업실 환경에 맞춰 작품의 스케일이나 재료를 달리하고, 주어진 전시 환경에 따라 작품을 다르게 연출한다. 이와 동시에 언제나 서식지의 환경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생물처럼 작품으로서의 이미지와 상상으로서의 이야기, 작가노트 등의 불일치에서 불거지는 글과 이미지의 갈등,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과 현실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충돌에서 끊임없는 (작품 제작의)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작가에게 글과 이미지의 불화는 언제나 주요한 작품 동기가 되었다. 〈그리즐리 서식지〉와 〈퓨마 서식지〉에는 각각 그들의 서식지임을 나타내는 팻말이 있지만 내팽개쳐 있고 각각에는 그리즐리가 없으며 퓨마가 없다. 대신 각각에는 퓨마가 있고 관광객이 있다. 퓨마에겐 글 자체가 이미지일 뿐이고 관광객에게 그곳은 단지 관광지(라고 착각한 서식지)일 뿐이다. 작품은 작품 제목(글)과 이미지 자체로 불일치를 보여주며 작품 내부의 상황으로도 글과 이미지의 불일치를 보여준다.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과 현실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에 관한 작품은 〈부리게임〉, 〈뿔과 붓〉 등 캔버스 회화이다. 작가는 과거 〈내가 본 게 고양이야?〉(2014)에서 캔버스 천 한 롤에 자유 연상되는 이미지를 채워 넣는 열정을 보여줬지만, 이번엔 재단된 캔버스에 정제된 에너지를 붓는다. 요컨대 캔버스에 안착된 서식지는 내용 측면과 형식 측면에서 서로 갈등 중인 셈이다.
이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애니메이션 작업 〈자화상〉(2017)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박제사, 박제된 동물, 의뢰인은 모두 작가 자신의 변형이다. 미술가로서 작가(박제사)는 끊임없이 자신(의뢰인)과 대화하며, 이를 중간 종결인 작품(박제동물)으로 남기고, 충분할 수도 불충분할 수도 있는 메시지(박제사는 박제동물에 의뢰인의 이야기를 담는 재주가 있지만, 박제동물에 담긴 이야기는 동물로부터 새어나와 자음과 모음으로 흩어진다)를 던지며 또다시 다른 작품(또 다른 박제동물)으로 미끄러진다. 마지막 장면의 비질은 결국 처음의 비질과 이어지는데, 이를 통해 작가 자신이 작업하는 방식과, 그 순환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2015년 개인전 〈능구렁이같이 들개같이〉에서 선보인 동명의 애니메이션이 현대미술 환경을 거대한 공장시스템으로 은유하고 자신을 공장주, 능구렁이와 들개에 비유하면서 현대미술을 풍자적으로 표현했다면, 〈자화상〉에선 작가의 내적 갈등이 보다 심화된 것으로 보인다. 〈능구렁이같이 들개같이〉에서는 자막이 영상 외부에 위치해 있었지만 〈자화상〉에서는 자막이 이미지를 휘둘러버릴 정도로 작품과 일체가 되어 있고 이미지는 비선형적으로 흐른다. 이는 글과 이미지에 대한 작가의 고민뿐만 아니라, ‘작업하기’에 대한 작가의 근원적인 고민을 포함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서식지〉의 작품 전체가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언제나 양 극단 사이의 위험에 처해 있다. 언어냐 이미지이냐의 문제가 작품 내적 갈등의 두 축이라면, 캔버스냐 실험이냐는 작품 외적 갈등의 축이다. 작가가 이러한 두 극단 사이에서 작품을 계속 해나가는 한 현실과 꿈, 생계와 예술, 글과 이미지 사이에서 끊임없는 줄타기를 해야 할 것이다.

위 배윤환 〈퓨마 서식지〉(사진 왼쪽) 종이에 목탄 202×400cm 2017

CRITIC 김근태 미술이 철학을 사유하다

2.22~3.1 조선일보미술관

장계현 | 갤러리 담 대표

주말마다 촛불과 태극기 집회가 열리는 광화문 한켠에 자리 잡은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작가 김근태의 전시가 지난 2월 22일에 열렸다. 김근태는 일찍이 대학 졸업 이후 계속해온 비구상 작업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전시장을 찾은 관객 중에는 작품이 없어서 그냥 몸을 돌려 나가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현재 한국미술의 에피소드라고 본다.
김근태의 근작에서 보이는, 희뿌연 표면에 자유롭게 흩뿌려진 점들은 화면과 색조에서 조선초기 덤벙분청의 한 모습을 연상케 한다. 무념과 작위의 것들이 사라진 후에 남은 담담한 표정과도 같은 그의 그림에서 어쩌다 보이는 검은색 작은 점들도 수비를 완벽하게 거치지 않은 분청의 표면에 남은 철분 같다.
두껍게 칠해진 화면에 언뜻 희뿌연 화면이 들어오고 그 안으로 철분과 같은 짙은 밤색의 점들이 보일 뿐이다. 다시 바라보면 그냥 담담하게 사막에서 바라보는 별빛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묵직한 재료가 주는 흙의 질감에서 막막한 사막 한가운데 떨어져 있는 것과 같은 깊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때로는 두꺼운 유채의 붓질만으론 더 이상 갈 수 없는 한 지점에 멈춰서 있다. 화면 안에서 작가는 늘 〈담론〉이라고 말하는 주제에 평생 천착해 왔다. 〈담론〉의 대상도 자신과 화면에서 만나고 있는 순간이다. 그 순간에서 작가는 진지하게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며 화면에 긴장감을 일으킨다. 의도된 긴장감이나 붓질은 아니다. 숫한 붓질 끝에 더 이상 진행될 수 없는 한 순간에 작가는 숨을 멈추듯이 작업을 마친다.
더 나아갈 수 없는 그곳이 자연에서 바람이 만난 암벽 그곳일 수 있고 혹은 작가의 참선공부 중에 갈 수 그 경계이기도 하다. 소동파의 ‘여산진면목 (廬山眞面目)’이란 시의 한 구절처럼 암벽에 부딪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에서 만난 바람소리와 구름 한 점에서 새롭게 작업이 펼쳐지고 있다.

CRITIC 윤종숙 마음의 풍경들

2.17~5.1 Museum Kurhaus Kleve 독일

군다 루이켄(Gunda Luyken) | Head of the department of prints and drawings Museum Kunstpalast Düsseldorf

윤종숙은 한국의 작은 도시 온양에서 자라났다. 작가의 아버지는 동양화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화랑을 운영했고 오빠는 난과 대나무를 소재로 수묵화를 그렸다. 이렇게 예술과 문화는 작가의 가족의 삶에 큰 역할을 하였고 하나의 의미였다. 윤종숙은 한국에서 한국학과 교육학을 전공하였고, 29세에 독일로 이주하여 뮌스터 대학에서 미술사 공부를 시작했지만 얼마 후 작가로서의 길을 선택하고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 프리츠 슈베글러 교수 밑에서 수학했다. 슈베글러 교수는 카타리나 프리치, 토마스 쉬테, 그레고어 슈나이더 등 세계적인 작가들을 제자로 두고 있는데, 그레고어 슈나이더는 “토테스 하우스 우르(Totes Haus ur)”로 2001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윤 작가는 뒤셀도르프에서 아카데미 브리프를 수료한 후 첼시 칼리지 오브 아트, 런던에서 계속하여 회화를 공부했으며 그렇게 작업세계를 전개하며 성숙해갔다.
윤종숙의 작업은 시작부터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으로 강한 인상을 주었는데 더 나아가 작가의 작품들에서는 넓은 측면의 문화(culture)에 대한 실험과 분석을 감지하게 된다. 작가는 처음에 캔버스 위에 실로 꿰매는 작업을 했는데 이미 그때부터 선은 작업에서 주요한 요소였다  –   실과 바늘로 그려진 선. 그 후에는 추상적인 파스텔 톤의 색면이 그려졌고, 사각형 색면 위를 거칠게 재봉틀의 색 땀이 가로지른다. 그리고 한동안은 환상적인 풍경에 동물을 그리기도 했다.
윤종숙이 2012년부터 그리고 있는 풍경화는 추상표현주의에 속한다. 작가는 이 새로운 그림을 “마인드 랜드스케이프스(마음의 풍경들)”라고 칭한다. 강하고 매트한 흙의 색상, 크게는 240×360cm 크기의 유화 작업 10여 점이 이번 쿠어하우스 클레베 미술관(Museum Kurhaus Kleve)에서 열린 전시를 통해 처음 선보였다. 또한 함께 전시된 30여 점의 드로잉 작품은 2004년부터 2016년 사이에 제작됐고 연필, 색연필 그리고 수채화 물감이 절제되어 사용됐다. 시적이고 섬세한 그리고 매우 독창적인 드로잉은 거의 불투명하고 제스처적인 붓 터치로 그려진 캔버스 작업과 대비된다. 이렇게 서로 다른 작업의 그룹을 미술관 가운데에서 요셉 보이스의 〈슈트라센반할테슈텔레  –   미래를 위한 기념비〉가 가로지르며 두 세계로 분리한다. 1961~1976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보이스의 대표작 중 하나로 1976년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에 전시됐다. 전시장에서 그의 녹슨 트램 레일은 관람자를 윤종숙의 경이로운 회화세계로 이끈다   –   그녀의 그림은 마치 늘 새로운 세계로 좁혀 밀집되는 하나의 만화경처럼, 작품 스스로의 꿈들이며 경험이다.

CURATOR’s VOICE 권영우 Various Whites

3.16∼4.30 국제갤러리

전민경 | 국제갤러리 대외협력 디렉터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특별했던 점은 권영우 화백의 개인적인 면면을 살펴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소위 선비스타일의 인물이었을 것 같다. 시대와 쉽게 타협하지 않고 온건하지만 강직하고 때로는 소탈하고 섬세한 로맨티스트 같다. 이러한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과 성격의 일단을 파악하는 일은 중요하다. 지난 몇 년간 단색화로 총칭되는 작가들과 그들의 주요 작품이 미술시장에서 각광받았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나 이들 개개인에 대한 연구는 시장의 관심도에 비해 부족했다. 한 시대를 기반으로 형성된 일련의 미술적 모멘텀(momentum)을 편의상 혹은 관례적으로 ‘단색화’라 부른다. 하지만 작가들은 그 누구보다 자신들의 서사를 알리고 싶어 한다. 단색화 명칭에 대해서 파고든다면 너무 이야기가 복잡해질 수 있으므로 함구하고 요는 권영우를 단색화 작가라기보다 동시대에 ‘재발굴(rediscovery)되는 작가’의 측면에서 볼 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더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전 생을 돌아보면 그는 특정 그룹에 연합되어 활동한 적이 없다. 친밀하게 교유한 제자나 작가들을 제외하곤 대체로 작가로서의 외길인생을 걸어왔다. 권영우 화백의 이러한 면모는 그가 개인적으로 쓴 친필편지를 통해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가 파리에 머무는 동안 가족들에게 쓴 편지를 통해 파리로 떠나와 작업하는 열정적인 작가의 모습 그 이면을 느낄 수 있다. 삶의 많은 부분을 정리하고 아내에게 경제 활동을 일임한 가장의 모습과 작가의 필연적인 정서적 외로움과 분투하는 생각 등. 또한 그가 생전에 한 인터뷰 및 영상 기록들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때문에 이번 국제갤러리의 권영우 개인전 〈Various Whites〉에서 그의 아카이브를 본격적으로 구현하고 주요 사료들을 재구성한 바 나는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생전의 언급들을 발췌해서 권영우 화백에 대한 내 나름의 navigate를 해 보고 싶다.
미술학교에 다닐 적 학교에서 배운 것이, 소위 과거에서부터 내려오는 어떤 전통적인 동양화였는데, 그런 것이 제 체질에 맞지 않았어요. 그래서 ‘난 내 것을 해야 되겠다’ 하는 방향으로 자꾸 나가다 보니 우연히 하얀 종이로 돌아옵디다. (동양화를 전공했기에) 화선지라고 하는 하얀 종이가 늘 내 주위에 있었고, 그 때는 모든 재료가 귀했어요. 화판 하나를 내가 만들고 땜질해서 뚫어진 데를 고치고 하다 보니까 어떨 때는 화선지를 갖다 바르기도 했고요. 그런데 땜질하려고 가져다 붙인 화선지들이 이루어내는 그 어떤 나름대로의 하모니랄까? 아주 재미난 걸 발견한 거죠. ‘아, 이거 참 재미있다.’ 그 때부터 종이 붙이는 작업을 시작한 거예요.
최근 그가 국내를 넘어 해외에 소개될 때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지점은 종이에 대한 (당시로서는) 실험적 시도들이다. 늘 그렇듯 특별한 발견은 대부분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다. 하얀 종이, 우리는 화선지를 (그가 언급한 대로) “하얀 종이”로 느끼기보다 재질적으로 인지 한다는 점에서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재료와 기법에 관한 고민이 ‘화선지’라는 질료 자체에 대한 탐구로 귀결된 것은 납득이 간다. 권영우가 손톱으로 긁고, 칼로 선을 그어 종이를 찢어 내고 펀치로 구멍을 뚫은 일련의 행위는 어쩌면 수묵화 혹은 시서화 같은 전통적인 동양화에서 오랫동안 무수한 반복과 오랜 수련을 통해 몸과 정신을 수양해야 한다는 묵계를 향한 반항적인 접근이 짐작된다. 설사 그가 행한 시도들이 반항적이지 않았다한들 찢겨진 이미지들 자체가 주는 심상은 비교적 거칠고 야성적이다. 이 불규칙한 정렬을 아이러니한 하모니로 구현한 모습은 그가 지닌 섬세하지만 고집 센 완고한 기질을 상기시킨다.
65  -   6년경이었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때가 내 나름대로 내 영역을 개척했다 하는 의미에서 발표를 처음 시도한 것이 신세계백화점 안에 있는 미술관에서 제1회 개인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전시는) 지금까지 그런 그림의 형태와 다른 종이만 가지고 다루는 그림을 그렸었습니다 그림을 그렸다기보다는 만들었었죠. 이걸 보고 어떤 사람들은 이게 동양화냐 별소리가 많았죠. 동시에 소위 말하는 추상적인 것 비구상적인 그림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서양화 아닌가? 라고 말하는 사람들까지 있었습니다.…  중략  …. 그런데 저 나름대로 생각할 적에는 회화이지 동양화 서양화란 구별을 굳이 두지 말자. 그것이 기름 물감으로 그렸건, 서양화적인 화법으로 그렸건, 여는 그 작품이 발산하는 어딘가 그 체취가 동양적인 것을 발산할 적에 그것은 동양화다, 저는 그렇게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규정짓기를 좋아한다. 나 또한 업무를 보며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라는 식의 명쾌한 결론에 대한 압박을 자주 받는다. 하지만 창작의 영역에서 이러한 요구는 생산자인 작가에게 상당히 폭력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 어쩌면 작가에게 흑백 논리는 상당 부분 무의미하다. 처음부터 답을 정해놓고 무언가를 추구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많은 창작자가 본인이 예측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발견과 조우하길 기대한다. 그래서 나는 이런 식의 요구에 피로감을 느끼지만 권영우 화백의 언급에서 이런 나의 비평적인 생각을 좀 더 지혜롭게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물어보기에 앞서 작품의 체취를 느끼고 작품을 논해야하는데 나의 경우 미술과 가까운 현장에서 일을 할 때 오히려 습관적 관점을 유지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아직 많은 경우 내용보다 형식에 대한 고민이 앞서기 때문인 듯싶다. 내용 자체는 개인에게 필연적이기에 추가로 말을 보태기가 어렵다. 그러나 전문성을 갖춘 형식을 추구하다보면 간혹 그 이면에 있는 정서를 상실하곤 한다. 논리적으로는 묘사하기 어려운 심상적, 감각적 이미지들이 존재하는데 때로는 탁월한 언어적 묘사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나 체취를 위한 여유를 좀 남겨두어야 할 것 같다.
우연한 기회랄까요, 국전에 계속 출품을 하다가, 국전에서 물론 특선도 됐고, 또 나중에 심사위원도 했습니다만, 초대작가 중에서 선정하는 초대작가상이라는 게 있었는데, 그것을 74년도에 수상했습니다. 당시에 외국에 나간다는 것 자체도 쉬운 일이 아니었었는데 외국의 문물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 여행을 할 수 있는 그런 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75년에 파리로 출국하여 약 1년여 머물며 지냈습니다. 당시 그 작업을 한 십 년 하던 차에 파리로 가면서, 채색이 시작된 거죠. 처음엔 조심스럽게 채색을 화면 뒤에다 발랐습니다. 그럼 화선지라고 하는 것은, 흡수하는 성질이 있거든요? 앞으로 빨아 당깁니다. 그러면 겉에다 확 바른 것보다는 은은하게 이것이 젖어 나오죠. 그런 효과를 많이 사용했었죠. 뚫은 데다가 나오게 하기도 하고, 칼로 찢어가지고 그 사이로만 나오게 하고, 그러한 변화들을 많이 찾았었죠.
권영우 화백은 이후 약 10여 년간 파리에 체류했다. 작가에게 그 시간은 채색 작업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시기이다. 이전에 하던, 단색화의 전신으로 불리는 백색화와 비교해 보다 회화의 규격도 보다 커지고, 그만의 고유한 먹색, 청색, 간혹 마젠타가 섞인 보랏빛채색도 시도하곤 했다. 때문에 그의 1980년대는 화선지에 대한 실험에서 색채 개입이 적극적으로 이뤄진 다채로운 회화적 연구를 엿볼 수 있는 부흥의 시기라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그가 한국으로 보낸 편지가 기억에 남는다. 편지에서 그는 가족 혹은 이웃의 안부를 묻거나 현지 날씨 또는 그곳에서 지내는 모습을 묘사했는데, 특기할 점은 그가 거의 모든 편지에서 화선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그는 파리에 머물며 지속적으로 화선지를 고집했고 상당한 양의 재료가 필요한 경우에는 프랑스를 방문하는 인편을 통해 재료를 조달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건, 권영우에게 화선지는 작업 행위 이전에 재료 자체가 상당히 중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화선지 고유의 재료적 특성이 그가 표현하고자 한 여러 조건을 충족시킨 것 같다. 때문에 나는 화선지가 수분을 흡수하고 번지게 하는 실제적인 특징보다 그런 특징이 작가에게 맞닿아 있고 표현의 일환으로 소화되는 과정이 더 흥미롭지 않을까 싶다.
출발점에서부터 언제가 귀착점이 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하는 일에서 늘 거기서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간다는 것, 늘 꾸준히 한다는 것, 계속 한다는 것, 그것뿐입니다.
맺음말로는 다소 고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시대 불문 불변의 진리 같다. 개인적으로는 근래의 필자 또한 되새겨야 할 말이라 인용했다. 이제는 후배 여러 명과 강의를 듣는 학생도 몇몇 생겨나는 동시에 아직 현장에선 동력을 가져다나르는 젊은 피이자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소모적인 중간자 입장에 있다. 뚜렷하게 구분되는 세대들 중간에서 비슷한 또래의 동료들과도 나누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워낙 세련된 매너를 추구하는 환경에서 이런 말들은 귀에 간지럽거나 촌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나보다 더 많은 시간과 역사를 겪은 인물에게서 전달 받는 상대적인 경험만큼 가슴 깊이 와 닿는 말이 없을 것 같다. 작고한 권영우 화백도 마찬가지다. 그가 지나온 시기에 대한 귀결로 다다른 태도가 아닐는지 싶다.

위<무제〉 한지 100×80.5cm 1980년대 Courtesy of the artist’s estate and Kukje Galle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