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토픽] 미디어아트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안경화│백남준아트센터 학예팀장

지난 2월, 도쿄의 롯폰기와 에비스에서는 미디어아트에 대한 서로 다른 접근 방식을 보여주는 두 개의 전시 <일본문화청미디어예술제(Japan Media Arts Festival, 이하 ‘미디어예술제’)>와 <에비스영상제(The Yebisu International Festival for Art & Alternative Visions)>가 열렸다. 한국의 문화부에 해당하는 일본 문화청과 국립신미술관에서 작품을 주최하고 <미디어예술제>는 아트, 엔터테인먼트, 애니메이션, 만화의 4개 부문에 걸쳐 공모를 받고 수상자를 선정하는 콘테스트 형식을 취한다. 미술관에서 펼쳐지는 미디어아트 전시에 애니메이션과 만화가 포함되는 경우는 많지만 엔터테인먼트부문이 공존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미디어예술제>의 이러한 장르적 특성은 미디어아트를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및 컴퓨터, 그 외의 전자기기 등을 이용한 예술”로 정의한 일본의 ‘문화예술진흥기본법’ 덕택에 가능한 것으로, 이는 <미디어예술제>에 대한 찬반 양론을 불러일으키는 소지를 제공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미디어아트에 관한 정의에 긍정적인 이들은 실험적인 예술과 엔터테인먼트 사이에 경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 반대하는 이들은 부가가치 창출이라는 문화의 산업적인 특성만을 지나치게 중시한다는 측면에서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미디어예술제>에는 또 다른 비판이 가해지고 있는데, 두 번째 논쟁은 심사위원 구성과 관련되어 있다. 주최 측은 이번 대회에 84개국의 4,327점이 출품되었고 이 중에서 일본 출신 아티스트의 작품이 2,000점이라는 사실을 들어 예술제가 국제적인 행사로 성장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예술제의 심사위원이 전원 일본인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은 수상작 선정에 있어서 자국 작가의 작품과, 일본의 문화적 감수성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해외 참여자의 작품이 유리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이 점은 애니메이션부문의 대상 수상작으로 14년 만에 해외 작품이 선정되었다는 사실로도 어느 정도 뒷받침된다.) 진정한 국제행사가 되려면 이제 절반이 넘는 해외 참가자들에게 공정한 잣대를 제시할 수 있도록 심사제도의 정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와 같이 겉으로 드러난 문제점과 몇 십 년 만에 도쿄에 내린 폭설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예술제> 는 줄을 서서 봐야할 정도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심지어 출품작에 비해 전시 공간이 비좁을 뿐만 아니라, 공간 구획 없이 모든 작품을 한 장소에 모아놨기 때문에 작품 감상이 쉽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전시 이외에도 백남준이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의사”라고 칭한 엔지니어 슈야 아베의 공로상 수상 기념 심포지엄 <엔지니어링! 백남준>을 비롯하여 스크리닝, 토크, 워크숍 등의 부대 행사에도 많은 청중이 참석하였다. 이처럼 수많은 관객의 자발적인 참여는, <미디어예술제>가 애니메이션부문 우수상을 받은 히데아키 안노의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Q>와 만화부문 대상작인 히코 아라키의 <죠죠의 기묘한 모험 8부>를 포함하여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작가들의 애니메이션과 만화를 한 자리에서 경험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근본적인 요인으로 미디어아트 전반에 대한 일본인의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들 수 있다.
올해 아트부문 대상을 수상한 카르스텐 니콜라이는 알바 노토(alva noto)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알려진 노이즈 음악가이도 하다. 기술적인 장치를 이용하여 사운드와 비주얼을 결합한 작품을 제작해온 니콜라이의 은 텔레비전 모니터에 자석을 대고 움직이거나 코일을 부착한 후 전기를 흐르게 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던 백남준의 실험 TV 시리즈를 연상케 하는 작업이다. 벽면에 설치된 4개의 네온 튜브에서 발하는 빛이 카메라를 통하여 CRT 텔레비전에 전달되면, 텔레비전 모니터에는 4개의 선이 나타난다. 이 선들은 천장에 매달린, 끝 부분에 자석이 부착된 기다란 추가 불규칙적으로 모니터 위를 움직일 때마다 색채와 형태가 왜곡되고, 이러한 자기장의 파동은 사운드 시스템으로 전달되어 소리를 발생시킨다. 작가가 와타리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한 백남준 추모 콘서트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는 이 작품은 그동안 소개된 니콜라이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최고의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대상은 이란 개별 작업이 아닌, 예술과 과학을 가로지르며 지속적으로 작품 활동을 펼쳐 온 아티스트 니콜라이에게 수여된 것으로 보였다

 

다른 컬러, 동일한 컬러, 그리고 세계화

대상 수상작 보다 관객들을 집중시킨 작품은 심사위원 추천작으로 전시된 에이 와다의 이었다. 구형의 오픈 릴(open reel) 자기(磁氣) 녹음기를 사용한 작품과 퍼포먼스를 꾸준히 진행해 온 와다는, 앞면에 투명한 아크릴이 부착된 4개의 높은 단 위에 자기 녹음기 한 대씩을 설치하였다. 4대의 자기 녹음기에 부착된 릴이 회전함에 따라 릴에 감겨 있던 자기 테이프가 풀려 나가고, 풀어진 테이프는 추상적인 형상을 만들면서 단 속으로 떨어진다. 자기 테이프가 끝까지 풀린 순간 릴이 반대로 회전하기 시작하고, 이어서 테이프는 릴에 다시 감겨 올라가게 되는데, 이처럼 조금 전과 반대의 상황이 벌어지는 동안 테이프에 녹음된 음악이 큰소리로 재생되면서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이 작품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용도 폐기된 테크놀로지의 산물에 새로운 기술을 덧대어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다른 매체로 변환시킨 와다의 재능은, 이미 오래된 텔레비전의 내부를 조작하여 텔레비전을 드럼과 같은 악기로 변모시킨 전작 <브라운 튜브 재즈 밴드>(2010 일본문화청미디어예술제 우수상 수상작)에서 빛을 발한 바 있다.
<미디어예술제>의 출품작들이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기반을 두거나 직접적으로 움직임을 연출하는 특성을 보이는 반면, <에비스영상제>에 소개된 작업은 대부분 사진, 비디오, 필름과 같이 미디어아트의 역사에서 ‘고전’의 영역에 속하는 매체들로 표현되었다. 도쿄도사진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인 만큼 매체의 형식보다는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이미지’에 중점을 둔 이 영상제는, 매년 동시대의 상황을 드러내고 삶의 다양성을 탐구하는 주제에 맞춰 작가를 선정하는, 지극히 전통적인 주제전이자 그룹전의 형식을 띠고 있다.
<제6회 에비스영상제>의 <트루 컬러(True Colors)전>은 세계(globalization)라는 익숙한 주제를 선택한 만큼 얼마나 참신한 이야기를 끌어내는지가 관건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기획자는 18명의 작가(팀)가 참여한 전시 이외에도 심포지엄, 토크, 강연, 그리고 15종류의 스크리닝 프로그램과 에비스 가든 플레이스에서 열린 시징맨의 퍼포먼스를 통해 세계화의 서로 다른 목소리를 대변하는 무대를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페스티벌 디렉터인 히로미 기토자와가 세계화에 대하여 언급하려는 내용은 전시 제목인 <트루 컬러>에 대한 해석, 즉 본성·본색·개성의 의미를 지닌 ‘트루컬러’가 다양한 국가와 인종을 배경으로 동시대에 공존하는 각기 다른 문화·전통·사상·자연환경 등을 제시하는 데 적합한 단어라는 언급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전시 작품들 중에서 색색의 페인트를 칠한 오래된 건물들을 촬영한 앙리 살라의 <내게 색채를 줘>는 기획자가 의도하는 세계화와 지역화의 복잡하고도 미묘한 관계, 세계화로 인한 예기치 못한 현상 등을 함축적으로 암시한 영상이다. 공산주의 체제가 휩쓸고 간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의 도심 재건사업 중 하나를 촬영한 이 작업은, 자유가 주어진 사회에서 오히려 지역적 특성과 개별적인 맥락이 사라져가는 역설적인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내게 색채를 줘> 이외에도 살라의 초기 영상 6점이 스크리닝의 첫 번째 섹션으로 구성되었다. 기획자가 살라의 작업을 집중적으로 소개했다는 사실에서 개인과 전체, 지역화와 세계화와 같은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진 양 극단의 개념들이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엉켜있고, 모든 일에는 명과 암이 공존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기록한 그의 작품들이 <트루 컬러전>의 주제를 포괄적으로 전달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세계화의 다양한 양상에 초점을 맞춘 이 전시에는 세계화의 한 측면을 스포츠와 전체주의의 속성에 빗대 표현한 타란 질과 필라 마타 듀퐁의 <실내 체육관>, 카메룬과 에티오피아의 일상을 인류학자의 시각으로 기록한 다이스케 분도, 이츠이 가와세의 비디오와 함께 서양의 시각으로 바라본 아시아의 정형화된 모습을 비판하고 이를 넘어서려는 아시아 출신 작가들의 영상이 다 수 소개되었다. 하지만 각 지역의 특수성에 집중한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특히 대형 스크린을 통해 티베트의 종교 의식인 코라의 과정을 고화질로 촬영한 리우(Jawshing Arthur Liou)의 비디오를 보면서, 이 작업이 티베트를 바라보는 기존의 시선에 동의하거나 그 시선을 강화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타이완 출신으로 미국에 거주하는 작가는 티베트 불교의 성지인 카일라스 산과 컬러풀한 색상의 옷을 입고 황량한 설산을 오르는 순례자들을 공들여 촬영하였다. 하지만 아시아인의 작업임에도 ‘문명화되지 않은, 순수한, 미지의, 성스러운’과 같이 티베트를 떠올릴 때 쉽게 연상되는 형용사들로부터 이 비디오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오히려 <코라>는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거나 무시하거나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아시아인인 필자 역시 전 지 구적으로 획일화된 시각에 맞춰 아시아를 바라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하는 작품이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세계화의 트루 컬러는 이미 우리를 동일한 컬러로 물들인 것이다. ●

[월드 리포트] 고기와 케이크가 있는 풍경

박진아│미술사

오스트리아의 중세 무역도시 크렘즈(Krems)에 위치한 포룸 프로너 현대미술 전시관(Forum Frohner)에서는 <미술 속의 음식: 쾌락과 덧없음(Eating in Art: Pleasure and Transience)전>(2013.10.20~ 3.23.)을 열어 현대미술 속에 음식거리와 요리가 어떻게 표현되어 오늘날 우리의 일상을 반영하고 있는지 조명하고 있다.
지난 몇 년 구미권에서는 텔레비전 전파를 타고 불기 시작한 쿠킹쇼 유행에 힘입어 음식과 요리를 주제로 미술작품을 탐색해 보는 시도가 눈에 띄었다. 2009~2010년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할레에서 기획돼 여러 도시를 순회한 <우주를 먹다(Eating the Universe)전>을 시작으로, 2011년 뉴욕 로버트 맨 화랑(Robert Mann Gallery) 기획의 <생각거리(Food for Thought)전>, 2012년 시카고대 스마트 현대미술관(Smart Museum of Art)에서 열린 <잔치 후대(Feast: Radical Hospitality in Contemporary Art)전>, 그리고 최근인 2013년 연말부터 올해 초까지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열린 <미술과 식욕: 미국회화로 본 요리와 문화(Art and Appetite)전>은 20세기부터 현재까지 음식과 요리, 식사문화를 창조적 모티프로 삼은 현대미술 작품들을 연대적 흐름으로 정리한 전시회들이다.
최근 기획되는 전시나 문화이벤트는 음식과 요리를 21세기적 소비문화학 관점에서 보다 경고성 짙은 논조를 띠는 추세다.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음식거리가 양적으로 풍족해진 과잉 풍요의 글로벌 21세기, 과연 음식은 현대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진화해왔을까’라는 문제의식을 관객에게 던지고 음식을 둘러싼 과잉 대 부족, 포식 대 기아, 맛좋음 대 역겨움이 공존하는 역설적 현실을 숙고해 보라고 권유한다. 예컨대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아리아나 박물관은 유엔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12년에 <푸드(FOOD)전>을 기획해 2015년까지 전 세계 순회전시를 앞두고 있다. 현재 오스트리아 크렘스 쿤스트할레 포룸 프로너관에서 전시 중인 <미술 속의 음식: 쾌락과 덧없음>은 한층 더 깊은 철학적 논조를 띤다. 음식이란 인간의 육신에 자양분을 주고 미각에 쾌락을 안겨주지만 결국 일시적이고 부질없는 생(生)에 대한 은유일 뿐이라며 관객에게 자기성찰과 겸손을 제안한다. 과잉 풍족의 시대인 21세기 오늘, 현대인이 ‘희귀’한 먹거리도 쉽게 구하고 무심하게 버리는 ‘일용품(commodity)’ 정도로 취급하고 있지는 않냐고 넌지시 꼬집는다.
음식거리가 서양미술에 모티프로 등장한 것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과음과 과식을 7대 죄악의 하나로 보았던 기독교 사상에 근거해,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정물화는 육체적 쾌락에 쉽게 유혹받는 인간 무리를 쉽게 상하고 벌레먹어 썩는 음식거리에 빗대어 인생무상(vanitas)을 경고했다. 그 연장 선상에서, 에덴의 동산에서 지식의 열매 사과를 따먹은 후 원죄의 타락에 빠진 인간상을 일관적으로 그려온 오스트리아 화가 아돌프 프로너(Adolf Frohner)는 이번 전시에 <식료품(Das Lebensmittel)> 칸막이 그림 시리즈를 선보여 재조명받고 있다.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서 음식을 먹고 마시고 소화하고 배설한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음식을 섭취하는 행위는 육신과 외부 세계, 자아와 타자 사이의 물리적 간격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이며, 한걸음 나아가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인간에게 생명을 멈추지 않고 돌아가게 도와주는 매개물이기도 하다. 이 전시 <미술 속의 음식: 쾌락과 덧없음>은 1960년대 빈 행위주의 (Wiener Aktionismus)야말로 바로 이 철학적 착상에 근거하여 음식재료나 잔치 의례를 퍼포먼스적 요소로 적극 도입한 대표적인 미술운동이었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돼지 도살장에서 죽은 동물의 피와 내장을 갖고 펼친 헤르만 니치(Hermann Nitsch)의 난교극장(1962~1998), 장황한 테이블세팅과 요리를 활용해 벌인 루돌프 슈바르츠코글러(Rudolf Schwarzkogler)의 <결혼피로연>(1965), 온몸에 음식물을 뒤범벅시키는 난장판을 연출했던 오토 뮐(Otto Muehl)의 <푸드 테스트(Nahrungsmittel Test)>(1966)는 모두 음식물에 빗대어 인간의 생로병사와 원초적 성욕을 은유한 강력한 퍼포먼스였다.

미술, 음식문화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다

오스트리아의 실험주의 영화가 페터 쿠벨카(Peter Kubelka)는 요리란 자연상태의 식재료에 열과 조리술을 가해 자연과 문화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임을 넘어서 자연(식재료)을 예술적 조형물(완성된 요리)로 구현하는 고도의 창조과 정이라 정의했다. 그런가 하면 요리란 동물이든 식물이든 살아있는 생명을 죽여야만 하는 잔인함을 내포한다. 사진가 하인츠 치불카(Heinz Cibulka)는 가축 도살 장면을 촬영한 <사진 퍼포먼스> 시리즈를 통해서 요리란 “죽이고, 먹고, 살아가고 잉태하는” 순환과정의 은유라고 정의하면서 동시에 먹이사슬 최상단에 놓인 인간조차도 결국 그 같은 생사의 대섭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기억하라고 촉구한다.
음식(飮食)문화는 시대마다 변천하면서 호모 소셜리스(Homo Socialis) 즉, 사회적 인간의 단면을 보여주는 바로미터 노릇도 했다. 태곳적부터 오늘날까지 문화권을 막론하고 여러 사람이 모여 술과 조리된 먹을거리를 나누고 먹고마시는 식사 관행은 인간 사회 속의 여러 기능을 윤활하게 촉진시키고 질서를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종교적・사회적 의례(ritual)였다. 인류의 모든 종교는 제각각 음식과 관련된 독특한 상징체계와 섭생규칙을 가르친다. 전투에 임했던 장군과 병사들은 잔치를 거나하게 열어 먹고 마시면서 사기를 북돋웠고, 고위 정치가나 중대한 계약을 앞둔 사업가는 성찬을 베풀어 손님을 극진하게 대우하는 것으로써 신뢰를 다졌다. 예나 지금이나 구애는 남성이 여성을 저녁식사에 초대하는 것에서 출발하며, 혈연과 혼인으로 구성된 가족이란 함께 살면서 한솥밥을 나눠먹는 식구(食口)들을 뜻하게 되었다.
이 ‘사회적 의례로서의 식사’ 라는 범인류적 주제에 착안해 음식과 미술를 교접한 음식미술의 선구자로 미술계는 스위스의 조각가 다니엘 스푀리(Daniel Spoerri)를 꼽는다. 1960년부터 1970년대까지 계속된 스푀리의 이른바 ‘이트 아트(Eat Art)’는 요리한 음식을 잘 차려낸 밥상에 둘러앉아 여럿이 나눠먹는 식사 의례란 개인과 개인, 나아가서 세대와 세대 간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의 순환(life cycle)을 뜻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는 “인간은 낯선 그 무엇을 잡아 잘게 썰고 뒤섞고 꾸며 담아내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 값싼 석유에 의존한 물류 및 운송력, 첨단 포장과 보관기술, 세련된 식품가공기술 덕택에 슈퍼마켓만 가면 원산지나 제철과 무관하게 사실사철 먹거리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초간편의 시대 21세기, 현대 인류는 음식물이 어디서 어떻게 제조되어 우리 곁으로 오는지 모른 채 점점 더 자연과 멀어져가고 있다. 이를 환기시키려는 듯 요제프 보이스의 <내게 꿀을 다오(Gib mir Honig)>는 인간과 자연 간 깨지기 쉬운 공생(symbiosis)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꿀벌과 벌꿀통에 빗대어 표현한 개념주의 설치물이다. 디터로스(Dieter Roth)는 초콜릿 덩어리를 깎아 만든 자화상 조각 <사자로서의 자아(Lowenselbst)>(1967년)에서 재료에 내재된 부패와 사멸의 운명을 작품의 일부로 포함시켰다. 유엔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전 세계서 생산되는 식품 중 3분의 1이 소비되지 못한채 폐기된다. 이에 대한 논평으로 오스트리아의 사진작가 클라우스 피힐러(Klaus Pichler)는 <3분의1(One Third)> 시리즈에서 바로크 정물화풍을 빌려서 식품산업계가 그토록 집착하는 유통기한제의 진정한 의미를 재고한다. 탈가족화 추세 속에서 전에 없이 1인가구가 많아진 요즘, 마르쿠스 하나캄과 로즈비타 쉴러(Markus Hanakam & Roswitha Schuller) 2인조팀은 플라스틱과 인조가죽을 삼각형으로 잘린 조각 케이크로 형상화해 대량 생산된 기계가공식품으로부터 영양을 섭취하는 현대인의 식생활 양태를 지적한다.
미술 속의 음식을 인류문화사를 이해하기 위한 문화적 자취로만 이해하는 단계는 지났다. 예컨대, 태국의 리르크릿 티라바냐(Rirkrit Tiravanija)는 전시장에서 커리를 요리해 관중에게 나워주는 퍼포먼스(뉴욕 모마, 2012년)를 통해서 요리, 미술, 외교를 연결했다. 2012년 잘츠부르크에서 열린 한 아트 프로젝트는 젊은이들이 슈퍼마켓에서 버려지는 음식물을 구제해 파티요리를 만드는 단편영화 <쓰레기 속에서(Days in Trash)>를 제작해 소비주의의 병폐를 창조적으로 극복할 것을 제안했다. 빈에 있는 티센-보르네미자 아트 컨템포러리(Thyssen-Bornemisza Art Contemporary)가 운영하는 서퍼클럽(Supper Club) 이벤트는 미래의 연회 메뉴와 식사문화를 탐색해보는 문화실험소다. 이제 현대미술은 음식을 인간 행동을 변화시키고 미래 문화를 창출하기 위한 문화적 실험 도구이자 적극적인 참여 수단으로 응용하고 있는 것이다. ●

[반이정 미술비평] 2009년. 동조성과 성역에 갇힌 비평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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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순택  2009

노순택 <그날의 남일당> 2009

 

여기 사람이 있다.

2009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 사고 가운데에는 부조리한 갑을관계나 비평과 언론이 제 기능을 상실해서 초래한 재난이 많았다. 재개발 문제가 낳은 용산 참사, 성상납을 폭로한 여성 연기자 장자연 씨의 자살, (2014년 현재까지 20명 넘는 연쇄 자살을 낳은) 쌍용차 평택공장 정리해고, MBC 뉴스데스크 앵커 신경민의 하차,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등이 모두 그렇다. 이명박 정부는 100일 이상 지속된 도심 촛불집회로 부담을 안은 채 집권 첫해를 보냈다. 이듬해 1월20일 출근 시간대,
재개발 사업 문제로 정부와 대치하던 철거민 시위자들이 상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 특공대 과잉 진압과정에서 철거민들이 점거 농성하던 망루에 불이 붙어서 철거민 5명과 경찰 특공대원 1명이 불에 타서 사망한 것이다. 당소 사고를 중계하던 인터넷 방송 진행자는 “어, 어, 저기 사람이 있어요!”라고 외쳤다.
참사 직후 남일당 건물 주변을 점거한 유가족과 시민운동가들이 경찰과 대치하며 한 해가 지나가는 사이 언론과 정치비평은 제 기능을 할 수 없었다. 장례가 무기한 연기되면서 희생자들의 시신을 병원에 안치하는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 소식을 접한 파견 미술가 이윤엽은 사고 당시 방송 진행자가 외친 ‘저기 사람이 있어요!’를 차용해서 <여기 사람이 있다>는 제목을 단 목판화1 두 점을 제작해서 팔았다. 기금 마련을 위해 한 점당 3만 원에 총 6백점을 내놓았는데 판화는 3일 동안 모두 판매되어 시신 안치 비용으로 쓰였다. 정상 기능을 상실한 언론과 정치 비평은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없었다.

비평가들의 그룹 전시회

볼거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시각정보를 해독하는 미술비평은 침묵하는 대상에게 해석을 달아주는 점에서, 시인 김춘수가 <꽃>에서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무엇을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로 만드는 이름 불러주기에 비유할 만하다. 말 없는 대상에게 말을 건네는 비평의 재능은 견제 받지않는 권한이기 쉽고 따라서 무분별하게 남용될 수도 있다. 비평이 지니는 고유한 역할 때문에 화단에서 작가와 비평가는 공생관계를 표방하지만 비평가에게서 작가로 향하는 일방향성이 훨씬 강하다. 공식적인 관계에서 작가와 비평가는 논평의 대상과 주체로 나뉘어 만난다. 비평가가 논평 대상이 되는 때는 ‘비평의 위기’ 같은 익숙한 화두가 논제로 떠오를 때에 국한되는데, 이때마저 이 주제를 논하는 주체는 바로 비평가들이다. “(출품작가) 10명 중 반이정을 제외한 9인은 대학에서 미술 실기를 전공했다. 이건 한국 미술계의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전의 미술비평들이 이해불가한 비문과 비약으로 채워진 경우가 적지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김민경 기자.《 주간동아》 678호)
《 주간동아》가 리뷰로 다룬 일민미술관의 기획 그룹전《 비평의 지평》은 현장에서 활동하는 미술비평가와 기획자 10인(강수미 류병학 고충환 반이정 장동광 최금수 서진석 임근준 유진상 심상용)을 작품 출품자로 초대한 역발상 기획물이다. 참신한 발상의 전시였지만, 큰 화제가 되진 않았다. 출품작의 평균적인 완성도 때문일 수도 있고, 이론과잉으로 치달은 평균적 기성 비평의 경직된 인상 때문일 수도 있으리라. 진정성을 상실한 레토릭이 된 ‘비평위기’의 원인으로 조직 동조성의 반복을 지목할 수 있다. 소속된 조직과 조화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일치시키려는 경향이 동조성이다. 규범을 따름으로써 자신의 소속감을 확인시키는 거다. 의복 동조성(Clothing Conformity)이란 조직 생활의 심리적 압박이 의복을 통해 표출되는 현상인데, 비평가 집단의 동조성은 평균적인 비평의 문체와 어투를 따라 하는 것으로 실행되곤 한다.
“《 프리즈 Freeze》의 기사들은 전체적으로 직접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미술전문용어를 피하며, 미술사적 지식이나 이론적 배경 없이도 이해할 수 있게 쉽게 쓰인 것이 특징이자 목표다. (중략) 최근 미술사가 이론과 결합하여, 정신분석학·(후기)구조주의 분석학·해체학 등을 통해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그다지 반갑지 않다. 특히 작품을 보지도 않고 작가의 정신분석에 임하는 일이나, 또 이론을 제대로 읽지 않고 어설픈 방법으로 분석을 모 방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작가들마저 이론에 작품을 맞추는 경향이 강한데, 이는 그들의 작품세계를 제한하는 일이라고 본다.” (제임스 로버츠《 프리즈》 편집장 인터뷰《 월간미술》 2001년 4월)
“또한 비평이 자칫 공허한 이론의 언설에 빠질 수 있는 미학을 좀 더 현실 속에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미학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이론적인 잣대로 무장하기보다 숨겨진 진주를 찾을 수 있는 비평가의 직관이 필요하다고 본다.” (유근택《 월간미술》 특집 ‘작가가 본 미술비평’ 2003년 2월)
“어떤 진술은 내 작업을 너무 거창하게 포스트모던 빅 뉴스에 몰아넣어서, 작업에 깃들인 실제 내면 풍경이 지워지기도 하였다. 그럴때 작업이나 작품은 ‘선험적’ 이론들을 입증하는 사물에 지나지 않게 되고, 급기야 지워지기 까지 한다. 어떤 비평가는 ‘안목’이 없다. 부지런히 터득한 지식과 이론으로 작품과 작업과 미술판을 줄줄 엮어 나가기는 하는데, 도무지 속 없다. 모던 혹은 포스트모던 포장지로 멋지게 말아놓기는 했는데, 풀어 보니 빈 곽 안에 물음표밖에 없는 꼴. 듣기 싫겠지만, 옛적 문인 화론에서 하던 말을 빌리면, ‘기운생동(氣韻生動)’하지 않는다는 말.” (김학량 《 월간미술》 특집 ‘작가가 본 미술비평’ 2003년 2월)
어설픈 학식을 드러내기 위해 기성 비평이 범하는 잦은 개념적 오류나 불투명한 글귀를 둘러싼 주변의 지적과 내부의 자성에도 불구하고, 개선이 더딘 이유는 비평문화의 동조성 때문일 것이다. 현대미술이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 훨씬 고상한 담론을 담보한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하지만 대중예술과 견주어 전문 영역이 강한 건 분명할 게다. 바로 이 점이 비문과 허세에 찬 지식을 남발하게 만든다.

슈퍼스타K. 독설의 중독성

<슈퍼스타K>2는 케이블 채널 Mnet이 제작한 국내 최초의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2009년 7월 첫 방송을 타고 그해 마지막 방송 전국 시청률이 8.4%까지 치솟았다. 예상 못한 시청률 덕에 매년 시즌을 이어가며 스테디셀러로 자리를 굳혔다. “슈퍼스타K는 14.6%라는 케이블 채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경이로운 시청률”을 기록했고 이로 인해 “그 뒤 우후죽순 오디션 프로그램이 생겨났다. 오디션 프로그램에 소극적이던 공중파 방송도 앞을 다투어 경쟁에 합류했다.”고 언론은 평가한다(고재열 기자《 시사인》230호). 대중 엔터테인먼트의 심사위원들이 보인 자세로부터 기성 비평의 빈틈 두 가지를 읽을 수 있다. 하나는 독설에 대한 사유이고, 다른 하나는 인품에 대한 자성이다.
숨은 신예의 발굴이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본래 취지보다 오디션 방송에서 큰 볼거리를 만드는 건 심사위원의 거침없는 독설이다. “최악인데?” “할 말이 없다.” “이건 시작에 불과해요.” 심사위원 이승철이 미숙한 도전자들에게 날린 직설화술의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다. 도전자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심사위원의 독설에 시청자가 열광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까? 폐부를 찌르는 비평이 실종된 시대에 비평의 드라마성을 엔터테인먼트와 결합시켰기 때문에 중독성이 강한 걸 테다. 기성미술비평이 이같이 중독성 강한 독설을 본받아야 하는 건 아닐 거다. 그렇지만 완곡 화법에 길들어져 야성을 상실한 점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거다. 한국 근대기 미술평론가 김복진은 제4회 조선미전에 관해 쓴 평문《( 개벽》1926년 6월)에서 동양화가 노수현의 출품작 <일완>을 평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칭찬이 아닌 평문은 쓰지 않는 게 좋다’고 일본 어떤 문인은 말하였다마는 나는 뒤바꾸어 욕이 아닌 비평을 쓸 까닭이 없다고 한다. 칭찬하려면 쓸 것도 없이 입만 딱 닫는 것이 제일 날 것이 아니냐.”
한편 후속 오디션 프로그램에 가세한 SBS 의 심사위원 가수 보아가 밝힌 심사기준은 놀랍게도 인성(人性)이다. 보아가 인성을 심사 기준으로 댄 이유는 “인성은 한 사람의 기본이고 인성에 따라 앞으로 미래에 대한 의지나 노력, 가능성도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한다.”란다. 미학을 윤리학과 연관시킨 거다. 이는 예술가보다 비평가에게 더 요청되는 기준일 것이다. 직업을 불문하고 개인이 내놓은 성과물은 결국 그 개인으로 구성된다. 개인이 성과를 만들고 성과는 개인을 이룬다. 특히 성과물을 ‘언어’로 내놓는 직종이라면 성과물과 인성 사이의 연관성은 더 깊으리라. 허구적 이야기꾼이 아닌 사실의 언어로 기술하고 평가하고 판단하는 비평가라면 그의 성품은 더욱 투명하게 글에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이해관계에 종속된 비평은 평가절하된 자신의 인품을 투영하고야 만다. 비평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를 실천한 귀감을 선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까?

2009년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에 출품된 필자의 작품

2009년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비평의 지평전>에 출품된 필자의 작품

선배 비평가라는 성역

“사실 미술비평은 그 출생 이후 언제나 주어진 사회의 존속에 관여하는 세력의 부산물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담당하는 자들은 그 세력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보조를 받고 그러한 세력 을 방조하는 무리에 지나지 않았다.” 아놀드 하우저의 극단적 자조 문구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미술과 미술비평의 체질은 상류문화를 지향한다. 그 안에 몸담고 있는 사람의 체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한국사회라면 그 비중은 실로 크다.
2009년 11월 26일. 미술평론가 석남 이경성 선생이 미국에서 타계했다. 한국 1세대 미술평론가라는 상징성만큼 이경성은 그가 남긴 평문보다 그가 두루 역임한 무수한 문화계 요직들로 인해 성역시되는 면이 분명히 있다. 무수한 요직과 더불어 현역으로 활동하는 또 다른 1세대 비평가가 있다. 2010년 2월 문화체육 관광방송통신위원회 국회 업무보고 자리에 2명의 문예위원장이 나타나는 바람에 업무보고가 연기되었다. 문화부(유인촌 장관)에 의해 해임된 김정헌 전임 위원장이 해임무효확인 청구소송 1심에서 승소해서 국회에 나타나 오광수 위원장과 나란히 앉은 것이다. 김정헌 전임 위원장의 소송 건에 대해 이후 2심 승소에 이어 2010년 대법원도 “해임처분을 취소하라”는 원심을 확정한다. 전임 위원장의 해임이 부당했다는 1,2심과 대법원이 판단한 사건의 진위를 비평가 출신 오광수는 후임에 위촉되기 전에 공감할 수 없었을까?
1세대 미술평론가 오광수 위원장이 논란 속에 퇴출된 자리에 재위촉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8년 민중미술 이론가 배경이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장 최민이 광주비엔날레 전시총감독 자리에서 전격 해촉되어 미술계 안팎에서 비난이 일 때도, 후임 총감독에 위촉된 바 있다. 나이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원로라는 신분은 견제와 비난으로부터 무한히 자유롭다. 비평의 위기는 견제받지않는 위치에 있을 때 현실이 된다. 비평에 위아래를 두려는 자세는 비평의 직업정신과도 상호 모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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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 국내 지각 출시

11월 28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아이폰 론칭쇼’3에 예약 고객들이 줄을 섰다. 출시 전 예약자만 4만~6만 명에 달했고, 예약 사이트가 마비될 만큼 소비자가 몰렸다. 출시 3일 동안 4만 대 가까운 판매 실적을 올렸는데, 이는 출시 후 한 달간 7만 대를 판매한 경쟁사 삼성의 옴니아 II를 훨씬 앞서는 수치다. 컴퓨터 회사 애플이 내놓은 첫 휴대전화 아이폰은 2007년 1월 처음 출시되었지만, 이동통신사의 지배구조가 강한 한국에서는 데이터 통신 수입 감소를 우려한 이동통신사(KT)와 애플 사이의 협상이 지연되면서 “다음 달에는 꼭 출시된다.”는 헛소문이 돌고 이로 인해 ‘담달폰’이라는 오명을 안은 채 1년 10개월 만에 지각 출시되었다. 하지만 아이폰의 국내 출시는 완전한 경쟁시장에서 구도를 바꿔놓았다. 아이폰 국내 출시를 앞두고 삼성의 옴니아 II는 가격을 반토막 냈고, 경쟁사 SK텔레콤은 가입비 30% 절감을 발표했다. 견제받지 않는 미디어도 망한다.

연말. 이재용 김정은의 후계구도

이명박 정부는 12월 31일자로 이건희 전 삼성 그룹 회장의 단독 특별사면을 심의 의결한다고 발표한다. 이에 앞서 12월 5일 삼성은 사장단 회의에서 이건희 회장의 아들 이재용 전무를 삼성전자 부사장으로 승진시켜 핵심 요직인 최고운영책임자(COO)를 맡겼다. 이번 인사로 승진한 10명의 다른 사장 평균 연령이 50대 초반인 점도 이재용 후계구도를 위한 포석으로 해석되었다. 같은 해 12월 2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아들 김정은의 생일을 ‘국가적 명절’로 지정하고 경축한다는 내부 지시를 전당과 전군에 내려 보낸 북한은 이미 김정은의 후계 사실을 그해 중순께 당·군·정에 공식 통보했고 해외 공관에도 통보했다. 남과 북에서 같은 시기에 이행된 후계구도는 내용은 달라도 같은 형식으로 반복되었다. 견제받지 못할 때, 당사자가 위기를 의식하지 못할 때, 위기의 폐해가 당사자보다 공동체와 연결될 때, 위기는 이미 한창 진행 중인 거다. ●

 

[section_title]2009 시대상[/section_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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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김대중 서거

박연차 정관계 로비 사건을 수사하던 검찰이 전직 대통령 노무현까지 소환조사하기에 이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더 이상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미 민주주의, 진보, 정의, 이런 말을 할 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수렁에 함께 빠져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라는 글을 올리고 1달이 지난 5월 23일 투신자살한다. 정부의 반대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추도사를 할 수 없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7월 입원하여 투병 끝에 8월 18일 사망한다. 그리하여 지난 10년의 짧은 정권 교체의 상징적 인물 둘이 연달아 세상을 등졌다. 세상의 변화는 이렇게 체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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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연 성상납 폭로 자살

여배우 장자연의 자살은 연예계의 낡은 관행인 갑을관계의 악용을 보여준다. 성상납을 요구받았다고 밝힌 이른바 장자연 문건은 국회대정부질문에서 이종걸 민주당 의원에 의해 “장자연 문건에 따르면 ‘당시 《조선일보》 방사장을 술자리를 만들어 모셨고, 그 후로 며칠 뒤에 《스포츠조선》 방사장이 방문했습니다’라는 글귀가 있다. 보고 받았냐”고 되물어 공론화되었다. 경찰청의 중간 수사결과 발표에도 《조선일보》 고위 임원, 《조선일보》 고위임원 아들, 인터넷 언론사 대표가 수사 대상자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문건에 명시된 인물들이 처벌받은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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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확정 발표

1월15일 문화예술인 신년인사회에서 “종로구 1월 15일 문화예술인 신년인사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종로구 소격동 국군기무사령부 부지를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2011년 1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문가 설명회’에서 있었던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서울관의 기본 계획이 수립된 건 2006년 11월이다. 2012년 완공 예정이라는 문화부의 당초 발표와는 달리 사망자 4명을 포함해 20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대형화재 사고 등의 악재가 끼면서 서울관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2013년 말에 개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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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민의 마지막 클로징 멘트

인지도와 경력에 가려 엄기영을 한국 최상의 앵커인줄 믿고 살았다. 신경민 앵커가 브라운관에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뉴스가 끝나는 순간 남기는 클로징 멘트로 유명세를 탄 신경민 앵커는 이명박 정부와 MBC 모두에 부담이 되었다. 앵커에서 하차한 후 그는 2012년 민주통합당 대변인으로 변신해야 했다. 2009년 4월 13일 신경민 앵커의 마지막 클로징 멘트는 이렇다. “회사 결정에 따라서 저는 오늘자로 물러납니다. 지난 1년여 제가 지닌 원칙은 자유, 민주, 힘에 대한 견제, 약자 배려 그리고 안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언론의 비판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서 답답하고 암울했습니다. 구석구석과 매일매일 문제가 도사리고 있어 밝은 메시지를 전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희망을 품은 내일이 언젠가 올 것을 믿습니다. 할 말은 많지만 저의 클로징 멘트를 여기로 클로징하겠습니다.”

유러피안 재즈의 독립선언문

황덕호│재즈 칼럼니스트

에버하르트 베버 〈클로에의 색깔(The Colours of Chloë)〉 (ECM 1042)

에버하르트 베버
〈클로에의 색깔(The Colours of Chloë)〉 (ECM 1042)

전기 사운드와 록 비트가 뒤섞인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의 1969년 문제작 <마녀들의 연금술 (Bitches Brew)>이 거의 완성되자 프로듀서 티오 마세로(Teo Macero)는 그때까지 마일스에게 대단히 우호적이었던 평론가 랠프 글리즌에게 홍보용 테이프를 들려주었다. 음악을 듣고 글리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재즈가 죽었다는 것은 이제 분명하군요. 바로 당신 같은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단지 글리즌만의 느낌은 아니었다. 기존의 재즈팬은 재즈의 아이콘이던 마일스의 변모에 적지 않게 당황했으며 서슴없이 재즈의 죽음을 이야기했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말대로 그것은 음악에서 벌어진 친부살해였다. “아들인 록이 아버지인 재즈를 살해한 것이다.”

하지만 <마녀들의 연금술>에 대한 글리즌의 반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이미 록과 솔(soul) 음악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었고 1967년부터 그가 주관해오던 몬터레이 재즈 페스티벌에 블루스, 록, 소울 음악인들을 초대하고 있었다. 글리즌의 취향 변화는 그의 세대(1917년생) 안에서는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다(이러한 취향 변화로 그는 몬터레이 페스티벌의 공동 설립자인 지미 라이언스 (Jimmy Lyons)와 갈등을 빚었다). 사조의 흐름에 민감했던 글리즌은 아들 세대(1940년대 생)의 취향으로 옮겨갔으며 그가 라이너노트(음반 안에 삽입된 해설문)를 쓴 마일스의 <마녀들의 연금술>은 단번에 50만 장이 팔려나갔다. 이는 재즈음반으로서 전무했던 기록이었다.
그런데 재즈의 이러한 변화를 진정으로 기쁘게 바라본 것은 예상 외로 유럽의 재즈뮤지션이었다. 1930년대부터 자생적인 재즈 음악인을 배출하기 시작한 유럽은 1960년대가 저물 때까지 어떻게 하면 아프리카계 미국 음악인들처럼 연주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블루스와 스윙의 느낌을 제대로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1950년대 말 모든 형식을 거부한 프리재즈가 등장하고 10년 뒤에는 재즈가 다른 음악들과 뒤섞이게 되자 유럽 재즈 음악인들은 재즈가 기존의 단일한 모습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들은 재즈를 위한 다른 재료들을 찾기 시작했다. 색소폰 주자 얀 가바렉(Jan Garbarek)의 말대로 자신들은 블루스를 제대로 연주 할 수 없었기에 자신들만의 음악적 전통을 찾아 나섰다. 그러한 흐름을 가장 예민하게 포착한 프로듀서 만프레드 아이어(Manfred Eicher)는 1969년 독일 뮌헨에 자신의 음반사 ECM을 설립했다.
슈투트가르트 태생의 베이스 주자 에버하르트 베버는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미국 재즈의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1973년 ECM 레이블을 통해 자신의 첫 음반 <클로에의 색깔 (The Colours of Chloë)>을 발표했을 때 그 음악은 미국 재즈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독특한 색채를 지녔다. 그것은 유러피언 재즈의 완성된 독립선언문이었다. 과거에는 정통 비바퍼(bebopper)였지만 새로운 음악을 찾아 일본을 경유해 독일로 들어온 색소폰 주자 찰리 마리아노(Charlie Mariano)를 영입해 1975년에 결성한 베버의 그룹 컬러즈는 1977년 작 <조용한 발>을 통해 그 선언문의 마지막 구두점을 찍었다. 이제 재즈는 연기 자욱한 음습한 지하클럽에서 나와 넓은 지평선의 대지 위로 나왔고 널따랗게 펼쳐진 음의 여백은 그 대지를 감싼 하늘같았다. 재즈는 이제 한 폭의 수채화가 되었고 에버하르트의 아내 마야 베버(Maja Weber)가 늘 그렸던 커버 그림들은 이를 시각적으로 구현해주었다. 그것은 유럽이라는 지역의 감수성이자 당시 프로그레시브 록을 통해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한 세대의 감수성이었다.
베버는 지난 2007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현재 연주 일선에서 물러나 있다. 그래서 2012년에 발표된 베버의 최근작 <이력서(Resume)>는 1990년부터 2007년까지의 실황녹음들을 모아 놨는데 부클릿에는 마야가 그린 몇 점의 그림과 함께 그녀가 2011년 세상을 떠났음을 전하고 있다. 영원히 젊었던 베이비부머 세대 혹은 68세대가 어느덧 작별의 인사를 건네고 있다. ●

편집실에서·도움주신 분들

隔世之感

#1. 평소 영화나 TV를 즐기는 편이 아니다. 재미가 없다. 몰입도 안 된다. 어린 애들이 떼로 나와서 춤추는 쇼는 정신이 없고 드라마는 현실성이 없어 마땅찮다. 게다가 TV 화면이 너무 선명한 탓에 과하게 덕지덕지 화장을 한 배우 얼굴 보는 것도 부담스럽다. 엉성한 세트나 엉뚱한 소품 등 눈에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렇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그냥 보면 그만일 텐데 그게 잘 안 된다. 시시콜콜 트집을 잡고 깐족거리며 불평불만을 내뱉고 만다. 그러면 뭐든지 하나를 보면 초집중해서 보는 마누라가 참다못해 소리를 꽥지른다. “제발 좀 입 닥치고 보던지 아니면 꺼져버려”라고. 깨갱, 내가 생각해도 욕먹어 싸다.
#2. 이번 달부터 <아트스타 코리아>라는 프로가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된단다. ‘아트 서바이벌’을 표방한 이 프로그램에 서울시립미술관까지 적극 동참하기로 했단다. 이래저래 한동안 화제가 될 듯하다. 사실 몇 달 전부터 이 프로에 직간접으로 관여한 여러 사람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니 나까지 이러쿵저러쿵 맞장구 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화면에 등장할 ‘아티스트’나 ‘멘토’, ‘심사위원’들 보다 궁금한 게 따로 있다.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작한 프로듀서와 (방송)작가, 그리고 적지 않은 돈을 투자한 ‘보이지 않는 손’의 머릿속 꿍꿍이가 무엇인지 궁금하단 말이다. 과연 그들은 한국/현대/미술/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미술/작가란 존재를 어떻게 생각할까? 미술마저 거대자본을 등에 없고 대중 홀리기에 혈안이 된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노리개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미술-작가를 소재로 실험하는 그 의도가 탐탁지 않고 불편하다
#3. 나는 2003년 1월호에 ‘비평가 44인이 선정한 우리가 주목해야할 젊은작가’라는 특집을 만들었었다. 당시 이 기사 때문에 온라인 게시판에서 정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었다.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올 일이지만, 핵심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미술이 <가요 Top 10>이냐? 어떻게 잡지에서 작가들 순위를 매겨서 줄을 세우느냐!’였고, 또 하나는 ‘작가가 무슨 연예인이냐? 왜 작품보다 작가 얼굴사진을 더 크게 나오냐!’ 였다. 심지어 어떤 작가(누굴까요?)는《 월간미술》 불매운동을 주장하기도 했다. 옛말치고 틀린 것 하나도 없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세상 참 많이 변했다. 이젠 작가들이 제 발로 방송카메라 앞에서 포즈 취하고 심사를 받겠다고 나서는 세상이 됐으니 말이다.
#4. 격세지감의 현장 하나 더.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린 <박노해 사진전>.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새벽 쓰린 가슴 위로/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던 얼굴 없는 시인이 35㎜ ‘라이카’ 카메라를 목에 걸고 나타났다. 30년 만이다. 벽에 걸린 사진보다 전시장 분위기가 더욱 감동적이었다. 이제부터 그를 ‘박기평’이란 진짜 이름으로 불러주련다.

편집장 이준희 dam2@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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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이정 미술비평

반이정
미술비평

미술판에서 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평론가이자 파워 블로거(blog.naver.com/dogstylist)다. 그만큼 관심사와 활동범위가 다양하고 폭넓다. 현대미술부터 영화나 대중문화, 시사정치 그리고 자전거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종횡무진이다. 2013년 3월호부터 시작한 ‘반이정의 9809 레슨 ‘연재를 이번호에 마감한다. 횟수로는 12회였지만 연재 기간은 꼬박 2년이 걸렸다. 최근이 연재를 바탕으로 강연회도 열였다. 앞으로 단행본을 낼 계획이라고.[/one_sixth][one_sixth]

김남수 안무비평가

김남수
안무비평가

이번 특집 기사의 기획 단계에서 그를 정식으로 처음 만났는데 다양한 분야의 참고 자료를 망라하는 박식함으로 기자를 한 번 놀라게 하더니 엄청난 양의 원고로 두 번 놀라게 했다. 이영철 관장의 제안으로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사로 근무하면서 신화, 샤먼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현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예술극장 드라마투르그로 재직 중이다. 연출을 도와 공연을 만드는 전반적인 일에 참견하는 자라고 추가 설명을 보내왔다.[/one_sixth][one_sixth]

임금님 올댓시네마 과장

임금님
올댓시네마 과장

영화 <만신>을 감독한 작가 박찬경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영화 스틸 컷을 얻는 과정에서 적극적인 도움을 주었다. 특히 이번 호 표지를 장식한 박 감독의 인물사진을 고화질로 구하기 위한 기자의 등쌀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시종일관 친절하게 대하는 고귀한 자태를 보여주었다. 동국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2010년 영화 홍보 마케팅 전문회사인 올댓시네마에 입사해 <더 울버린> ,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26년>, <소원> 등에 참여했다.[/one_sixth]

모니터 광장

변화, 지속, 소통의 톱니바퀴가 잘 맞물리길 바라며

신년호가 새해를 맞기 위해 재정비하는 고민들을 담고 있었다면, 2월호는 그야말로 한 해를 맞는 시작점에 해당하는 정보를 제시하는 호였다고 평가하면 적절할 것 같다. 지난해에 개막한 전시들을 뒤로하고 진정 새해에 개막하는 전시들, 미술행사들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 한 해의 전시를 프리뷰하는 지면은《 월간미술》을 사랑하고, 미술을 애정하는 독자들에게 봄바람 같은 설렘을 안겨주었으리라. 젊은 작가들을 소개한 지면도 마찬가지다. 이들에 대한 소개는 곧 앞으로 미술계에 불어올 바람을 미세하게나마 먼저 느낄 수 있는 창구이니 말이다.
지난 1년간, 아직 넓은 시야를 갖추지 못한 학생으로서 전통 깊은 미술잡지를 모니터하며 의견을 제시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나와 같은 위치에서 《 월간미술》을 지켜보는 독자도 있으리라 생각하며 느낀 점, 제시하고 싶은 점들을 전해보았다. 그리하여 1년이 지난 지금, 《 월간미술》을 되돌아보면 상당한 변화, 그것도 지속과 변화가 적절히 배합된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모니터들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든 《 월간미술》 내의 변화에 따른 고민이 반영된 것이든 지면 구성부터 새로운 코너의 신설, 기사를 선정하는 기준, 논하는 시각, 제시하는 방법까지 다양한 부분이 변했고, 또 그 변화의 일정부분은 분명 독자와의 소통을 통한 것이었다고 느낀다.

강한라

젊은 작가를 향한 젊은 시도

20~30대 예술가들 사이에는 흔히 이런 말이 떠돈다. ‘마흔까지만 버티면.’ 이 말은 마흔 살이 될 때까지 작업을 지속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해준다. 실제로 수많은 20~30대 작가가 경제적 어려움과 불안한 미래에 무시로 흔들린다. 현실은 냉혹하다. 사회적 배려마저 없다면 그들은 꿈과 현실 속에서 어느 것을 택하게 될까.

젊은 세대 작가들이 포기하지 않고 꿈을 펼칠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 참으로 중요한데, 그것의 한 방법을 이번 특집 에서 엿볼 수 있었다. 그점에서《 월간미술》이 언론의 역할을 잘 수행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젊은 작가들에게 자신의 작품세계를 알릴 기회, 독자에겐 다양한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니 윈윈이라 하겠다. 특히 선정된 100인의 작가의 생각을 나열한 목록에서 그들의 스펙을 지우고 오로지 이름과 생년, 생각만 드러낸 것은 그 작가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작품을 보는데 참으로 도움이 되었다.
여러 기사에서 문제로 지적한 부분- 파편화된 취향, 과대포장과 알맹이의 부재, 작위적인 형식 등-과 같은 세대적 특성에 대해서도 젊은 작가들이 분명 고민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지금 이 순간, 가장 치열하게 자신과 싸우고 있을 젊은 작가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권은영

 

어떤 체념

생계는 물론 부양의 책임이 있는 상황에 예술을 하는 것은 욕심이라 생각했다. 이 때문에 경제적 부담을 던 노년 즈음하여 동네 작은 부스전에 그림을 거는 것을 미래의 보상으로 생각하고, 현 (젊은)시점에 요구되는 것을 우선으로 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 생의 저점에 잡은 동아줄이 아이러니하게 미술계에서 일을 하고 예술인(내지 예술주변인)이 되게 했다.《 월간미술》 특집으로 다룬 100인 작가와 여러 차이가 있지만, 그들처럼 2535세대에 속해 동일시할 것도 많은 내가 편견 없이 진술된 그들의 관심사와 현재의 고민에 진면목을 확인하라는 대목 그대로를 실천하고 싶으면서도 어쩐지 어려웠던 이유가 있었다. 작가에게 작업 설명과 현재의 고민을 간단하게 서술하라는 것이 즉답화법의 불편함이 아닐 수가 없을 것이고, 내 경우 ‘생의 저점’이나 ‘동아줄’로 표현한 저마다의 개인적 일화를 태연자약 고백하기도 어렵지 않겠냐 등의 이유다. 그렇게 2535세대 작가와의 교감을 놓치고 차라리 “그냥 그렸다”거나 “그리는 게 너무 좋아서 그렸다”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이 세대 작가를 향한 쓴소리에 항거할 대응책이 궁함을 느낀다. 세대의 당사자로서 가장 큰 아쉬움은 그들이 새로운 충격을 주지 못해서가 아니다. 같은 또래조차도 소통의 문제를 느낀다는 것, 예술적 동지를 찾기 어렵다는 것. 그것이 생계보다도 때로 더 어렵다는 것. 그리고 그 이상의 느낌을 2025세대를 보면 느낀다는 우스운 이야기.

오정은

 

한국 미술계에 새로운 바람을 기대하며

2월호 특집기사 를 꼼꼼히 읽었다. 궁금했다. 2535 젊은 작가 세대들이 작업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거두절미하고 지면전시를 보듯이 이미지들을 읽으면서 나는 솔직히 그리 암울하지 않을 젊은 작가 세대를 읽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인터뷰 기사를 보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어렴풋이나마 파악했다. 대부분 사회와 개인, 시간과 공간, 사실과 허구, 일상과 해프닝, 예술가로서의 자의식 등의 문제에서 비롯된 작업이 많아보였는데 이 지점 역시 흥미로웠다. 분명 이전 세대와는 다른 지점을 고민하고 다음 세대를 준비하고 있는 (혹은 이미 시작한) 그들이 이끌어갈 미술계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일말의 기대감이 생기기도 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끊임없이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기사 하나를 읽었을 뿐인데 참 많은 생각이 꼬리를 물어물어 나왔다. 사실 지난 1년간의 모니터 요원으로서의 활동도 그러했다. 모니터링을 하며《 월간미술》을 큰 틀로도 바라보고 작은 그림으로도 읽으려고 노력했다. 개인적인 시각이나 생각이 아주 배제될 순 없었겠지만 매달의 미술계를 모종의 의무감으로 접하며 파악해나갈 수 있었던 유익한 시간이었다.

신지현

[컬럼] 예술을 빙자한 상품

팔 물건이 넘쳐난다. 돈이 없어 그렇지 살 물건이 너무 많다. 대형마트의 주말풍경은 대단하다. 보기 좋게 진열된 상품과 묵묵히 주워 담는 사람, 그들은 주머니 사정을 봐가며 살까 말까 망설이지 않는다. 돈 내고 살 때와 카드로 살 때는 씀씀이가 다르다. 계산대 앞에는 물건을 잔뜩 담은 카드들이 줄줄이 서 있다. 바코드 찍히는 소리야말로 이 시대의 전위음악이 아닌가 한다. 눈 감고 들어보면 소비사회를 찬양하는 교향곡으로 들린다. 가격을 깎는 법도 없다. 말없이 카드를 내밀면 계산원 또한 말없이 계산서와 카드를 내준다. 상품을 사고파는 우리 시대의 너무나 깨끗한 풍경이다. 먹고살고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상거래가 이렇게 자리 잡았다. 그런데 이런 상거래의 대상인 상품을 혐오하는 분야가 있으니 바로 미술 분야다.
‘예술을 빙자한 상품’. 이 말은 작품이 돈만 밝히고 작가 정신이 스며있지 않은 그렇고 그런 작품을 빗댈 때 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에는 작품이 상품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뉘앙스가 있다. 작품은 사고파는 상품과는 다른 그 무엇이라는 거다. 상품을 사고파는 기능이 미술에서는 혐오스럽게 여겨지다니, 이야말로 어떻게 먹고살지 하는 걱정을 안 할 수 없다. 몇 억 원이 넘는 아파트도 부동산 가게에서는 ‘물건’이라 한다. 행복의 보금자리를 단순히 사고파는 대상인 물건으로 취급한다. 다 그렇다. 두부 한 모도 그냥 거래되지 않는다. 두부가 매장에 놓이는 과정 간단한 일이 아니라 한다. 두부를 만드는 공장이 있고 유통시키는 중간상이 있다. 그다음 소비자가 사서 맛나게 먹는다. 미술작품을 사서 맛나게 먹을 수는 없다만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줄 상품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이크! 큰일 날 소리. 미술을 두부와 비교하다니.
TV 방송에서 미술관련 프로그램은 대부분 밤 12시가 넘어야 볼 수 있다. 가까이 하고 싶어도 너무나도 먼 당신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하는 이유는 시청률이 낮아서란다. 사실 나도 잘 보지 않는다. 잘 시간 빼먹고 봐야 하는데 그렇게 되질 않는다. 미술을 드라마나 오락프로처럼 시청률로 비교해선 안 되겠지만 밀려도 이렇게 밀리다니. 왜 이렇게 미술이 딴 세상 취급을 받으며 외면당하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미술은 딴 나라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대형서점 미술 코너에는 서양미술을 소개하는 책으로 넘쳐난다. 너도 나도 서양미술 순례 여행기이거나 서양의 유명 작가를 소개하는 책이 대부분이다. 이미 아는 내용을 이리저리 포장해서 다시 보여주기도 한다. 한 국 작가의 작품 팸플릿을 보자. 웬 영어가 그렇게도 많은지 눈앞이 어지럽다. 세계화, 국제화를 앞세우다 보니 자기 얘기가 드러나지 않는다. 다른 예술분야를 찾아본다. 시, 소설, 영화, 드라마 등은 자기 얘기, 삶에 밀착된 표현을 한다. 자국 영화 상영이 할리우드 영화보다 더 많이 상영되는 나라는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몇 안 된다 한다. 이크! 큰일 날 소리. 미술을 영화와 비교하다니.
우리는 순수에 너무 오염(?)되었다. 자기 가랑이가 찢어져도 오직 순수다. 팔리면 ‘상품’이고 안 팔리면 ‘작품’이라는 등식이 만들어졌다. 요새 미술시장이 꽁꽁 얼어붙었다 한다. 소비성향의 끝자락에 있는 미술은 지금 상황이 아주 심각하다. 작품가격도 너무 비싸다. 미술작품이 좋아도 사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못한다. 웬만큼 여유가 있지 않고서야 몇 백만 원 혹은 그 이상의 돈을 쓰기가 쉽겠나. 판화와 같이 대중과 가까이 하는 방법을 찾아보 자. 뭐 다른 방법이 없을까? 생음악도 좋지만 음반이 따로 있듯이, 두고두고 즐길 수 있거나 내가 소유했다는 만족감을 채울 수 없을까. 그것도 아주 착한 가격으로 말이다.
작품하기도 어려운데 친구들에게 괜한 걱정을 안겨 미안하게 되었다. 다른 예술분야도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시나 소설로 먹고사는 작가 역시 극소수다. 그래도 그들은 베스트셀러가 되기를 꿈이나 꾸지 않는가. 베스트셀러! 신나게 팔린다는 뜻이다. 그런데 환쟁이끼리는 이런 말 자체를 어색해 한다. 말해 보았자 별 뾰족한 수가 없어서다. 한편으론 안 팔리면 ‘작품’이라는 마지막 보호막이 있어 배짱 두둑하다. 가난해도 폼 난다. 나는 지금까지 미술인이 어렵다고 말만 할 것이 아니라, 먹고살기 위한 방법을 찾아 보아야한다고 말한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인데도 말 꺼내기조차 조심스럽다. 우린 신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적응 못하는 영역에서 살고 있다. 우리만 모르고 있다. 조금 타락(?)해도 괜찮다는 자기용서가 먼저 있어야 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 이크! 큰일 날 소리, 순수한 미술이 타락해야 한다니.

김주호・조각가

[핫피플] 제4회 안양공공미술프로젝트예술감독 백지숙 '개념미술'이 아니라 '개념있는 미술'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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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안양공공미술프로젝트예술감독 백지숙 ‘개념미술’이 아니라 ‘개념있는 미술’을 제안한다

<4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이하 APAP)>의 본 전시가 3월 28일 개막해 6월 8일까지 안양파빌리온과 안양예술공원에 새롭게 개관하는 ‘김중업박물관’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미국 현대음악의 거장 폴린 올리베로스가 안양 시민들과 함께 준비한 퍼포먼스인 ‘딥 리스닝(Deep Listening)’ 을 비롯해, 후지코 나카야, 컨플릭트 키친, 그라이즈데일 아츠, 앤소니 매콜, 오노레 도, 배영환, 송상희 등 총 27개 팀의 국내외 작가들이 참여해 24점의 신작을 포함한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다.
APAP는 지난 10년간 국내에서 열리는 대규모 국제미술행사 중 하나로 자리 잡으며 한국 공공예술 담론을 실험하는 장으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2012년 예산이 전액 삭감되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가까스로 존폐위기를 면했다. 힘겹게 부활한 만큼 4회 APAP의 진두지휘를 맡은 백지숙 예술감독은 무엇보다 지난 APAP의 성과를 되돌아보고 내실을 다지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시민들에게 공공예술을 새롭게 인식시키고 함께 즐길 수 있는 행사로 꾸미기 위해 공공성을 향한 다양한 실험을 시도했다.
우선 연중 진행된 ‘작품 보존・관리 프로젝트’는 기존의 APAP 소장품 92점의 가치를 지속시키고 시민과 작품 간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안양시민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새로운 대안을 모색했다. 그 시작으로 1회 때 건립됐으나 제대로 활용된 적 없는 <알바로시자홀>을 <안양파빌리온>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공원도서관’, ‘만들자연구실’을 운영하는 APAP의 허브로 만들었다. 이밖에도 안양 곳곳에 방치된 작품들을 철거하거나, 적절한 장소로 옮기고, 일부는 개보수해 새로운 작품으로 탈바꿈시켰다. 백 감독은 “처음부터 공공예술 작품에 보존연한(life cycle)을 지정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개별 작품을 보존관리의 일반론으로 접근하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시민들의 삶과 유리된 작품을 제대로 살려내려면 그 과정 자체가 창의적이어야 한다.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것만큼 정교한 보존 관리 과정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4회 APAP는 특별히 ‘퍼블릭 스토리’를 전달하는 ‘미디어’에 대한 고민을 주제화한다. 백 감독은 공공예술이 그동안 너무 물질적으로 이해됐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미디어’라고 하면 테크닉한 문제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APAP 에서는 미디어에 대한 다양한 관점, 미디어의 문법을 각자 해석하는 과정, 미디어의 효과에 초점을 맞췄다. 무엇보다 옛날 식의 광장 개념을 대체하는 현재 미디어 환경 속에서 공공 담론의 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에 궁극적인 가치를 두고 있다.” 미디어아티스트 최태윤이 총괄하는 ‘만들자연구실’은 지난해 2월부터 시민들을 대상으로 오픈 소스 기술을 접할 수 있는 국내외 작가들의 다양한 워크숍을 제공해 메이커 문화를 실험했다. 독립큐레이터 김윤경이 기획을 맡은 ‘인터페이스 : 나의, 나만의 공공예술’ 프로젝트는 공공장소에 물리적인 결과물로 남은 APAP 소장품을 시민들의 삶 속에 적극적으로 개입시키고자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APAP를 일회적인 행사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형태의 프로젝트로 만들기 위해 국내외 네트워크 구축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최하는 공모사업 ‘공공미술 2.0’에 선정돼 공공미술 아카이브를 마련하는데 주력하며, 현재 안양 시내 5개 도서관을 연결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1970년부터 공공미술을 지원해 온 미술단체인 ‘크리에이티브 타임(Creative Time)’과 교류하며 <리빙 에즈 폼> 노마딕 버전 전시를 아시아에 처음 선보인다.

이슬비 기자

[핫피플] 제4회 안양공공미술프로젝트예술감독 백지숙 ‘개념미술’이 아니라 ‘개념있는 미술’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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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안양공공미술프로젝트예술감독 백지숙 ‘개념미술’이 아니라 ‘개념있는 미술’을 제안한다

<4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이하 APAP)>의 본 전시가 3월 28일 개막해 6월 8일까지 안양파빌리온과 안양예술공원에 새롭게 개관하는 ‘김중업박물관’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미국 현대음악의 거장 폴린 올리베로스가 안양 시민들과 함께 준비한 퍼포먼스인 ‘딥 리스닝(Deep Listening)’ 을 비롯해, 후지코 나카야, 컨플릭트 키친, 그라이즈데일 아츠, 앤소니 매콜, 오노레 도, 배영환, 송상희 등 총 27개 팀의 국내외 작가들이 참여해 24점의 신작을 포함한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다.
APAP는 지난 10년간 국내에서 열리는 대규모 국제미술행사 중 하나로 자리 잡으며 한국 공공예술 담론을 실험하는 장으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2012년 예산이 전액 삭감되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가까스로 존폐위기를 면했다. 힘겹게 부활한 만큼 4회 APAP의 진두지휘를 맡은 백지숙 예술감독은 무엇보다 지난 APAP의 성과를 되돌아보고 내실을 다지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시민들에게 공공예술을 새롭게 인식시키고 함께 즐길 수 있는 행사로 꾸미기 위해 공공성을 향한 다양한 실험을 시도했다.
우선 연중 진행된 ‘작품 보존・관리 프로젝트’는 기존의 APAP 소장품 92점의 가치를 지속시키고 시민과 작품 간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안양시민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새로운 대안을 모색했다. 그 시작으로 1회 때 건립됐으나 제대로 활용된 적 없는 <알바로시자홀>을 <안양파빌리온>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공원도서관’, ‘만들자연구실’을 운영하는 APAP의 허브로 만들었다. 이밖에도 안양 곳곳에 방치된 작품들을 철거하거나, 적절한 장소로 옮기고, 일부는 개보수해 새로운 작품으로 탈바꿈시켰다. 백 감독은 “처음부터 공공예술 작품에 보존연한(life cycle)을 지정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개별 작품을 보존관리의 일반론으로 접근하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시민들의 삶과 유리된 작품을 제대로 살려내려면 그 과정 자체가 창의적이어야 한다.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것만큼 정교한 보존 관리 과정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4회 APAP는 특별히 ‘퍼블릭 스토리’를 전달하는 ‘미디어’에 대한 고민을 주제화한다. 백 감독은 공공예술이 그동안 너무 물질적으로 이해됐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미디어’라고 하면 테크닉한 문제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APAP 에서는 미디어에 대한 다양한 관점, 미디어의 문법을 각자 해석하는 과정, 미디어의 효과에 초점을 맞췄다. 무엇보다 옛날 식의 광장 개념을 대체하는 현재 미디어 환경 속에서 공공 담론의 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에 궁극적인 가치를 두고 있다.” 미디어아티스트 최태윤이 총괄하는 ‘만들자연구실’은 지난해 2월부터 시민들을 대상으로 오픈 소스 기술을 접할 수 있는 국내외 작가들의 다양한 워크숍을 제공해 메이커 문화를 실험했다. 독립큐레이터 김윤경이 기획을 맡은 ‘인터페이스 : 나의, 나만의 공공예술’ 프로젝트는 공공장소에 물리적인 결과물로 남은 APAP 소장품을 시민들의 삶 속에 적극적으로 개입시키고자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APAP를 일회적인 행사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형태의 프로젝트로 만들기 위해 국내외 네트워크 구축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최하는 공모사업 ‘공공미술 2.0’에 선정돼 공공미술 아카이브를 마련하는데 주력하며, 현재 안양 시내 5개 도서관을 연결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1970년부터 공공미술을 지원해 온 미술단체인 ‘크리에이티브 타임(Creative Time)’과 교류하며 <리빙 에즈 폼> 노마딕 버전 전시를 아시아에 처음 선보인다.

이슬비 기자

[현장] 미술관 속 사진페스티벌 – 사진과 너, 나, 우리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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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너, 나, 우리의 대화

우리에게 사진은 무엇일까. 사진의 의미를 살펴보는 전시가 전국 4개 시도립미술관에서 잇달아 열린다. <미술관 속 사진페스티벌>이 바로 그것. 이에 ‘사진 한국을 말하다’라는 대주제 하에 <사진과 사회전>(대전시립미술관, 2013.12.6~2.16), <사진과 도시전>(경남도립미술관, 1.16~4.16), <사진과 미디어전>(서울시립미술관, 1.28~3.23), <사진과 역사>(광주시립미술관, 2.6~4.13)가 각각 진행(개최일 順)된다. 또한 아르코미술관에서는 ‘사진과 담론'(1.10~3.21) 워크숍이 열린다.
이번 전시는 디지털 사진기가 대량 보급된 당대 우리 사진문화의 현주소를 살펴보자는 계기로 마련됐다. 사실 동시대 현상을 담아내는 예술 장르 중 사진만한 것이 없다. 게다가 ‘찍는다’로 표현되는 사진 이미지 생산 과정이 더 이상 특정 작가의 전유물이 아니며 유효하지도 않은 가운데, 이번 전시는 그러한 대중적 에너지가 “한국 사회와 문화예술의 발전 그리고 우리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긍정적 요소로 작동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자”한다. 특히 <미술관 속 사진 페스티벌>은 “국내에서 최초로 진행되는 릴레이 사진전으로 각 도시가 저마다의 주제를 갖고” 기획했다.
그럼 각 도시를 순회해보자. 대전시립미술관의 <사진과 사회전>은 60여 명(팀)이 참여한 대규모 전시였다. 전시 타이틀이 암시하듯 “사회를 다루거나 사회 속에 뛰어드는 사진예술의 태도와 방법을 ‘비판적 성찰과 참여, 개입, 동행’ 등의 관점에서 조망”했다. ‘성찰’, ‘행동’, ‘공동체’, ‘공공’의 전시 구성으로 사진작업은 물론이고 아카이브도 소개했다. 이어 개최된 경남도립미술관의 <사진과 도시전>은 10명의 작가가 참여했으며 도시의 풍경과 그곳에서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반추한다. 작가의 시선이 담긴 사진을 통해 “즉각적으로 도시 풍경을 인지하고 이해할 수 있는” 전시였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사진과 미디어전>을 전시 타이틀로 내걸었다. 이는 우리 삶의 행위와 그 양태를 매체를 통한 사진을 조망함으로써 보여준다는 기획의도를 내포한다. 과거 존재했던 매체 속 사진, 즉 보도사진, 광고사진은 물론 최근 등장한 SNS 속 사진 이미지를 함께 보여주며 이른바 ‘미디어의 시대’에 사진은 과연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펴볼 계기를 마련해준다. 마지막으로 광주시립미술관의 <사진과 역사전>은 말 그대로 우리의 삶의 흔적을 기록한 사진을 보여준다. 그러나 ‘기록’의 의미를 단순하게 해석한 것이 아니라 기록자 시선의 영역으로까지 확대, 당대를 바라봤던 사진가의 태도를 ‘Document’, ‘Monument’, ‘Memory’ 세 영역으로 나줘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번 <미술관 속 사진페스티벌>은 전시로서 어떤 의의를 가질까? <미술관 속 사진페스티벌> 운영위원회 위원장인 박주석 명지대 교수는 “기본적으로 사진 찍기의 대상이 자연과 풍경에 경도되어 있는 아마추어 사진가, 일반 시민들의 인식을 바꾸는 계기를 마련하고 싶었다”며 “전문 작가들이 다루는 대상은 사회적 의제, 즉 도시, 역사, 미디어, 사회적 관계와 자본 등과 같이 우리 한국 사회가 고민하고 성찰하는 문제”임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물론 한국 사회가 한두 가지 관점으로 파악될 리 만무하다. 그래서 이번 각 전시장에 걸린 전시의 주제가 다양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박 위원장은 이번 전시를 시도립미술관 순회전 형식으로 기획한 이유에 대해서 “운영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사진계의 작품 평가 기준을 미술관에 제시, 사진계와 미술계 사이의 사진작품을 보는 눈의 간극을 줄여보고자 하는 의도였다”고 밝혔다. 사진 전문 큐레이터가 거의 없는 미술관에서 소개되는 사진작가가 사진계의 시선과 다름을 지적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박 위원장은 “예산만 확보된다면 트리엔날레 형식으로 이러한 사진전시를 꾸며보고 싶다”며, “주제로 ‘자연’과 ‘풍경’을 다루는 전시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전 창원 광주 서울= 황석권 수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