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이상향, 더 이상 꿈꿀 수 없는

우리 미술판에서 이상향을 그린다는 말은 요원해져 버린 것일까   
근현대 격동의 역사와 사건을 겪으면서 우리의 이상향은 과연 어떻게 바뀌었을까   
분명한 것은 있다 그렇게 꿈꾸었던 이상향에 가깝게 세상이 바뀐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

최열・미술비평

20세기 한반도가 탄생시킨 언어의 마술사 정지용은 1935년 고향을 노래했다. 정지용이 부른 <향수>의 풍경은 우리가 상상하던 아름답고 또 아름다운 세상을 훌쩍 뛰어넘는 또 다른 이상향 바로 그것이다.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곳, 이제는 꿈에서나 있을 풍경이다. 그렇게 사라진 세계, 그 세계는 이상향처럼 우리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식민과 전쟁의 탓만이 아니다. 일백년 동안의 산업화, 도시화를 떠올리거나 새마을운동과 4대강사업이 낳은 황폐한 현장을 생각할 일이다. 은빛구름 흐르고 금빛모래 반짝이던 물결에 몸을 빠뜨리던 고향 마을 냇가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어이가 없다. 우리가 태어나 자라던 흔하디흔한 고향 풍경이 이상향처럼 여겨지다니 말이다. 저 청학동이나 무릉도원, 몽유도원 그리고 허균의 율도국(栗島國)을 지금 우리의 이상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건 아미타의 극락정토나 미륵의 용화세계, 예수의 천당도 마찬가지다. 사후 안식처일 뿐이다.
동북아시아는 19세기 말 서구문명을 수용하면서 이상향을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도덕주의 세계관을 폐기했다. 대신 서구 근대가 설계한 사회주의 및 자본주의 이념을 이상적 가치관으로 삼았다.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핵심가치로 삼는 서구근대의 이상은 동양의 기존 정신가치를 전복해버렸다. 이에 따라 이상향을 상징하는 문인산수화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변관식, 이상범의 실경산수가 각광을 받으며 유행했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도덕적 이상을 상징하는 사군자가 최후의 선비화가 윤용구를 끝으로 한갓된 정물화가 되어버린 일도 무척 자연스러운 시대 추세일 뿐이었다.
20세기 최초의 이상주의자들은 아마도 근대주의자들, 다시 말해 진화론의 세례를 받은 개화당원들로서 기술과학문명을 추종하는 세력이었다. 미술인으로서 오세창, 안중식, 이도영과 같은 개화당원들은 그러나 자신의 이상향을 예술세계로 형상화하지 못했다. 이상사회 설계도는 수용했으나 그 내면을 채우는 이념의 세계를 상상력으로 밀고 나가지 못한 까닭이다. 그것은 사회주의 이념의 세례를 받은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1920년대 이래 영민하고 강직한 사회주의자들은 반제민족해방과 독립자주국가 건설이라는 원대한 이상사회 설계도를 그려놓았지만 그냥 설계도였을 뿐이다.
현실은 그들에게 아주 작은 자유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오지호와 이인성이 그토록 화사하고 세련된 색채로 조선의 자연과 인간을 눈부시게 묘사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이상향이 아니었다. 심미주의 미학이 지향하는 궁극의 이상향을 형상화하기에는 그들이 처한 시대가 지나치게 강퍅했다. 마찬가지로 다음 세대인 이중섭과 이쾌대가 몽환에 가득한 초현실세계를 그렸지만 그 세계는 환상이 아니라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악몽의 전설일 뿐이었다. 그렇게 식민지 시대가 흘러갔다.
20세기 미술사에서 가장 또렷한 이상향은 신기하게도 미증유의 학살과 파괴가 이어지던 6·25전쟁 한복판에서 탄생했다. 이중섭이 피난민으로 서귀포 시절 그린 <실향의 바다>와 통영 시절 그린 <도원(桃園)>은 낙원 풍경 그대로다. 통영이건 서귀포건 모두 남쪽바다 그 아름다운 물빛에 뒤엉킨 하늘 복숭아가 천상의 노랫가락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만들어낸 풍경으로서 이상향은 난민의 고통을 벗어나고 싶은 소망이 반영된 것이었다. 현실을 초월하여 몽환의 세계로 순간이동하고 싶었던 욕망이 조작한 가상현실 말이다.
그 뒤로 우리 미술사에서 이상향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토록 염원하던 산업화, 기계화 시대의 미래상을 눈부시게 보여주는 저 숱한 새마을 기록화, 산업 기록화 제작 열풍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이상을 함축하는 예술작품은 결코 태어나지 못했다. 또한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거센 폭풍이 10여 년을 몰아쳤던 저 1980년대에도 그렇게 꿈꾸던 민중세상, 통일조국의 아름다운 이상향은 탄생하지 못했다.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구호로 내세웠지만 바로 그 이상세계를 어떻게 설계하고 어떻게 그렸는지, 그 민중이 그리워 가고 싶어하는 세상의 모습을 어떻게 갖추었는지 질문만 잔뜩 던져두고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상상력의 고갈
오히려 흐르는 시계의 반대쪽으로 방향을 잡고서 과거 농경사회의 두레와 대동굿 판에 어우러지는 농악과 춤의 선율에서 설레는 감동을 느끼곤 했던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오윤의 <통일대원도>가 참으로 20세기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참된 이상세계였던 것일까. 혹 지난날의 향수가 아니었을까. 이런 향수 취미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상향의 설정과 관련해서 가장 놀라운 현상은 한국형 단색 추상화 계열에서 일어났다. 이들이 노자나 장자의 철학을 자기 예술론으로 삼은 것은 한국형 단색화다운 선택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대나 사회로부터 단절된 미술임을 표방할 수 있었던 것인데 그렇게 하고 나면 너무도 공허해서 찾아낸 돌파구가 바로 아득한 과거로의 여행이었다. 그곳엔 소요유(逍遙遊)의 이상세계 즉 아무것도 없는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정은 기묘하게도 1980년대 민중미술이 보여준 과거로부터 이상향 찾기와 같은 꼴이었다.
추상 및 민중미술 이후 1990년대 미술현상에서 이상향을 찾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아니 집단이 해체되고 기획자의 개념 설정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중심의 상실시대에 발맞춰 공동체의 가치와 이상 또한 파편처럼 흩어졌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비단 미술계만의 현상이 아니다. 그것이 어느 계급계층이건 모두 이익집단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있는 터에 유독 미술집단만이 공동의 가치를 추구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노동자 농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꿈꾸던 이념집단이 노동조합과 같은 이익집단으로 변화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지난날 뜻을 모아 하나의 가치를 추구하던 결사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가치는 개인의 이해와 욕망의 내면으로 잠복해 들어갔고 각자가 꾸는 꿈이 곧 이상향인 세상이다. 이제 더 이상 이상향은 없다. 꿈꾸는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많아져버렸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이상향이 아니다. 개인의 환상일 뿐.
사전에 나와 있는 이상향의 뜻은 평화롭고 완전한 상상의 세계를 가리킨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 대한 반성이나 근대 과학기술문명의 미래에 대한 환상으로서 출현한 근대의 이상향은 여전히 활력을 제공하는 원천이지만 그것도 지나가버린 옛이야기인지 모른다. 생각해 보면, 지난 세기는 이상향을 꿈꾸는 행위 그 자체가 사치였다. 극단의 황무지 위에서 살아온 기나긴 세월 끝에 안식을 구하기는커녕 절망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수밖에 없는 시대에 상상력마저 메말라갔던 것이다.
1990년대 이후 20여 년 동안의 미술사를 돌이켜 보더라도 현실에 대한 염세주의 시선과 태도는 난무하지만 고상한 윤리와 도덕의 시선을 내비치는 경우는 없었다. 허위의식이라고는 해도 19세기 이전 공동체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던 시절에는 계급계층에 따라 이상세계의 설계도를 제출했었다. <무이구곡도>나 <고산구곡도>,
<도산구곡도>가 설령 자기 문파의 세력을 강화하려는 욕망을 드러내는 홍보수단이었다고 해도 집단의 가치와 이상을 호소하는 방편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 모든 것이 괴멸당했고 남은 것은 벌거벗은 세속의 욕망 또는 음울한 도시의 냉소뿐이다.
이상향을 향해 거침없이 항해할 만큼 순결했던 미술가가 있었을까. 심미주의를 채택했다고 해서 그 예술가가 심미의 삶을 꾸려나갈 수나 있었던 것일까. 작업실을 나서면 시장에서 팔리기나 하는지 초조해 할 수밖에 없는 초라한 행색에서 무슨 공염불이란 말인가. 심미와 재물의 사이에 설 수밖에 없는 예술가의 자아는 결국 분열의 경계인일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한 손엔 세속의 욕망을, 또 한 손엔 심미의 이상향을 쥐고 흔드는 모순의 희극! 어디 그게 20세기만의 이야기일까. 오늘날 21세기를 살아가는 모든 예술가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정지용이 부르던 노래 <향수>마저 끝났다. 세속을 향하지도, 이상향을 찾아가지도 못한채 방황하는 자의 어리석은 이야기 속에서 말이다. ●

백남순낙원8곡병

 

백남순(白南舜, 1904~1994) <낙원(樂園)> 캔버스에 유채 166.0×366.0cm 1937 개인소장 ‘심산유곡(深山幽谷)’이 서구적 화풍으로 표현되어 있다. 백남순은 서양의 낙원도를 동양적 기법으로 표현했다

(위)채용신(蔡龍臣, 1850~1941)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부분) 종이에 채색 107.4×37.3cm(각) 1915 어진화사 채용신이 무이구곡을 그린 10폭 병풍. 성리학적 정서는 약화되고 형식화된 경향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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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과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장욱진, 시대의 마지막 이상향을 꿈꾸다

(장욱진)_photo by 강운구화가 장욱진(張旭鎭, 1917~1990)의 작품에서 산수화풍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1970년 중반 이후라 할 수 있는데, 덕소아틀리에(1963~1974) 시기 후기부터 작품의 표현이 수채화처럼 묽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1980년대 작품에서는 자연과 함께 유유자적하는 도가적 정서가 잘 드러난다. 이 시기 장욱진은 수많은 <풍경>을 그렸다. 전통 산수화 기법과 같이 한 획으로 그린 나무와 집, 그리고 집 안에서 가부좌를 하고 있는 인물, 나무 위나 하늘 나는 새, 해와 달이 공존하는 풍경이 주를 이루었다. 유화물감을 통한 수묵화기법과 화면 구성에서의 산수 표현은 동양과 서양을 하나로 잇는 실험적인 작업이자 전통과 현대를 잇는 혁신적인 활동이었다. 이러한 표현은 예술에 대한 그의 확고한 정신으로부터 나왔다. 화가 장욱진의 예술세계를 대변하는 핵심적인 철학은‘신사실’이라는 단어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1947년 김환기, 유영국 등과 함께 결성한 <신사실파(新寫實派)> 모임은“사실을 새롭게 보자”라는 주제의식을 표방했는데, 이는 사물 속에 내재하는 정신적인 본질을 찾고자 한 것이다. 특히 장욱진의 경우에는 사물 속에 존재하는 가장 이상적인 측면들을 발견해내고자 하였다. 그는 사물을 더욱더 사물답게 그리는 데 평생을 매달렸다. 즉, 나무를 나무로 그리고, 자연을 자연 그대로 그리고자 했다. 그랬기에 그는 순수한 아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대상의 참모습을 그리는 것, 그것이 바로 장욱진이 추구한 예술세계인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이상적 세계관은 불교와 도가적 사상의 핵심인‘무위자연’의 단순함과 근원을 지향하는 정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그렇기에 장욱진의 산수화는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모던한, 단순하면서도 풍부한 여백의 순수함 그 자체를 향하고 있다.
백곤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학예사

 

장욱진  캔버스에 유채 50×25cm 1988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소장

장욱진 <풍경> 캔버스에 유채 50×25cm 1988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소장

 

[Exhibition Focus] 홍순명 개인전-스펙터클의 여백

회화의 순수성을 탐구하기 위해 주변의 풍경을 그려 온 작가 홍순명의 개인전 <스펙터클의 여백>이 6월 28일부터 8월 28일까지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에 있는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에서 열린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보도사진을 주요 모티프로 삼은 회화작품 <사이드 스케이프> 시리즈와 사고 현장에서 수집한 물건을 오브제로 만든 신작 <메모리 스케이프> 연작을 선보인다. 인생과 예술의 동반자인 홍익대 미술대학원 김미진 교수와의 대담을 통해 작가 홍순명의 작업과 삶의 태도를 조명해본다.

주목받지 못한 독립체들의 연대

김미진(이하 ‘김’) 내년이 벌써 우리 결혼 30주년이네. 1979년, 대학에 입학해서 처음 만나 지금까지 예술과 인생의 동지로 살아왔잖아. 그 시절부터 얘기해볼까.
홍순명(이하 ‘홍’) 학부 때부터 해외 미술전문잡지를 보고 이것저것 실험적인 작업을 했지. 그러면서 자신감이 생겼고 1985년에 이미 스무 번이 넘는 전시에 참여했었지. 당시 부산지역 젊은 작가들이 모인 미술그룹 ‘강패’, ‘황색벌판’ 등에서 활동했고. 사범대학을 나오면 선생님을 해야 하는데 나는 그때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지. 그래서 무조건 외국 가서 공부하고 싶었고, 결혼하자마자 확 떠난 거야.
1985년 결혼하고 곧바로 파리로 유학을 떠나 같이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려고 했는데 나이제한이 있어서, 나는 파리 8대학 조형예술과에 들어갔고 당신은 한국에서 군복무한 것이 인정되어서 원하던 대로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했지. 거기서 운명이 갈린 거 같아. 당신은 일찍부터 ‘부분과 전체’라는 개념을 화두로 작업했는데….
파리에 있을 때 서양인들 속에서 한국 사람으로서의 내 위치에 대한 고민이 자연스럽게 작품의 주제가 되었지. 특히 그 무렵 독일의 과학자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부분과 전체》라는 책을 읽은 게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 같아. 과학 분야에 문외한이라 책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부분 안에 전체가 있고 전체 안에도 부분이 있어서 서로 간에 연결성이 있다는 내용이었지. 그 이야기를 나는 내 식으로 받아들였던 거야. 비록 서양 사람이 쓴 책이지만 그 책을 읽고 덩치가 작은 동양인인 내가 서양인에게 이론적으로 꿀리지 않는 당당함이랄까 자신감 같은 걸 갖게 됐어.
그때의 관심이 지금까지 이어져서 <사이드 스케이프(Sidescape)> 시리즈까지 연결된 건가?
파리에 있을 때 했던 작업 중에서 캔버스 옆면에 그림을 그려 책이 꽂혀있는 책장처럼 만든 작업 있잖아. 캔버스 옆면은 앞면을 존재하게 하는 보조 역할을 하지. 나는 일부러 보조 역할을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을 택했어. 센터와 사이드를 와해시키고, 서로 조화롭게 사는 것, 모두 동등한 것, 이런 생각과 의도가 파리시절 작업의 주제였지.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런 맥락에서 작업을 이어갔지. <사이드 스케이프> 시리즈로 넘어오면서 작업의 내용이 완전히 달라진 건 아니지만 조금 각도를 달리한 게 뭐냐면, 보도사진을 보고 그렸다는 거야. 원래 보도사진에는 정확한 센터/주제/주인공이 있기 때문에 사이드/주변/배경이 있을 수밖에 없어.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주변 풍경을 화면의 중심으로 가져와 ‘실존’시키는 것이야. 사이드/주변/배경은 주인공을 보조하고, 사건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는 데 나는 오히려 이런 역할을 없애버린거지. 뿐만 아니라 그 유용성이나 기능성까지 다 배제하고, 순수한 풍경 그 자체로만 존재하도록 만드는 거지. 그렇게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야. 그래서 보도사진이 가장 적절한 소재가 된 거야.
우리는 20대 후반부터 40대까지 인생의 중요한 시절을 파리에서 보냈어. 1980년대와 2000년대에 아날로그와 디지털, 중심과 주변, 글로벌과 디아스포라라는 두 개의 강렬한 패러다임이 교차되는 시기를 다른 문화권에서 산 경험이 어쩌면 행운일 수 있어. 우리는 몇 십 년간의 시간을 통해 국적·모더니즘·형이상학 같은 거대주제가 해체되고 일상적인 개인의 삶 안에서 주제를 찾거나, 예술 자체의 가치를 최고로 여기던 시대에 예술이 일상의 삶과 합쳐지는 변혁의 시대를 체험했어. 당시 프랑스는 미테랑이 재선되어 10년이나 대통령직에 있었고, 자크 랑 문화부 장관과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기념해 문화정책을 강력하게 펼쳤지.  사회주의 성격이 강한 정책으로 가난한 학생들과 예술가들이 많은 혜택을 받은 꿈의 시기였어. 덕분에 우리는 좀 더 자유롭게 사소한 곳에 눈을 돌릴 수도 있었고, 전체를 막 흔들 수 있었던 거야. 이런 경험 또한 당신의 작업 <사이드 스케이프>의 배경이 된 것 같아.
둘이서 꿈을 찾아서 유럽까지 갔는데 참 운이 좋았지. 요즘 같아서는 그 돈으로 거기 가서 한 달도 버틸 수 없을 거야.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가 있을 때 프랑스는 사회주의 정책이 강력해서 우리처럼 학비도 없고 가난한 유학생이 어떻게든 먹고살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줬지. 그런데 작품이라는 게 한 작가의 사상이나 인생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잖아. 한국에서도 대학생하고 정부하고 싸우던 시절이었는데, 파리에서도 10년 넘게 사회주의 성향이 짙은 정책을 경험하고 사회 분위기를 몸으로 직접 체험하면서 지금의 내 가치관이 더욱 굳어진 것 같아.
다시 매체 얘기로 돌아가서 질문할게. 지금은 컴퓨터가 우리 생활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고 매일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뒤적이는 시대잖아. 세계 각국에서 온갖 사건과 재앙이 발생하고, 우리는 그것을 단순하게 정보화된 이미지로만 접하지. 그런 점에서 당신이 단순한 이미지 정보가 아닌 실제와 가까운 풍경을 그리는 것은 기호가 아닌 진실에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한 행위가 아닐까?
나는 평론가들의 이런 말투가 불편하고 불만이야. 왜냐면 평론가들은 말이나 글로 나를 어떤 틀 안에 자꾸 집어넣으려고 해. 작품은 원래 살아 있는 물고기처럼 스스로 생명력이 있는데, 크리틱에 의해서 오히려 그 생명력이 약해지는 거야. 대신에 작품은 유명해지고 비싸질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평론가들은 어떻게 하면 작품을 그냥 있는 그대로 잘 전달할 수 있을지 그것을 많이 연구하고 개발하면 좋겠어. 자기들이 읽은 책에다 끼워 넣지 말고,
우리도 천재적으로 어떤 새로운 언어를 개발하면 좋겠지만 지금의 언어는 이미 사회적 약속이잖아. 그리고 평론가는 그것을 위해 훈련받은 사람이야. 비평이란 학문의 사회적 소통을 위해 그런 틀에 맞추어진 거지. 우리 같은 사람의 고충도 이해해주길 바라.
<사이드 스케이프>에서 회화의 소재로 보도사진을 사용하는데 그림을 그릴 때 물감 색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쓰지? 컴퓨터 화면처럼 보정을 하나? 아니면 그대로 써?
어떤 사람들은 “어디를 보고 프레임을 잘랐나요?”, “어떤 기준에서 사진을 선정하나요?”라는 질문을 하기도 하는데, 나는 이렇게 대답하지, “예쁘면 그냥 가고 안 예쁘면 색을 바꾸기도 한다”고.
평론가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사건의 중요성이나 위급성을 떠나 전체를 완전히 탈맥락화시킨다고 봐.
그 지점이 바로 입체작품 <메모리 스케이프(Memoryscape)>와 연결되는데. 방금 얘기한 것과 결부시켜 이야기하자면, 나는 미술, 특히 회화는 굉장히 많은 부분이 ‘감각의 문제’라고 보는 거야. 조금 전에 말했듯이 나는 부분과 전체에서 상생과 조화, <사이드 스케이프>에서는 독립이 참 중요하다고 본다고 이론적 맥락을 세울 수 있겠지만 그 맥락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림은 그냥 그림으로 결정되는 것이지 그 맥락이 결정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야. 그러면 도대체 화면 자체가 뭐고, 그것을 언어로 어떻게 표현하냐는 거지. 이건 굉장히 어려운 문제야. 왜냐면 언어를 벗어난 다른 분야의 것을 언어로 표현해야 하니까. 나는 그 대부분이 ‘감각적인 것’이라고 생각해.
그러면 감각적이라는 것은 사진에서 부분을 선택하는 감각이란 말인가?
그렇지. 부분을 선택하는 것, 또 그림을 그려나가고 완성으로 향해가는 것 등을 말하는 거지. 어떤 부분을 프레임으로 잘라낼지는 작가의 느낌으로 결정하는 거지. 그런데 이런 느낌을  정확하게 말해줄 수는 없지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 ‘뿌옇고 일시적이고 가볍고 금방 사라질 것 같고 뭔가 견고하지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웅적인 모습’이라고.
그게 완전히 순수한 예술의 순간을 찾아가는 것이고 작가로서 당신의 꿈인 것 같아. 작가는 예술의 원래 모습을 찾아가는 거잖아. 낯선 형태를…. 하지만 평론가는 처음 보는 것을 해석하기 위해 이론을 집어넣어. 예전에 존재한 작품에 덧붙여 언어로 설명하다보니 작품이 낡아지는 것 같아. 많은 작가도 이 방법을 써. 그런데 당신은 자꾸 새로운 것을 추구해. 나는 그것을 애매함이라고 보거든. 당신은 애매함으로 자꾸 비켜나가. 애매하면 소통이 안 될 수도 있지. 애매함보다는 조금 더 우리가 원하는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그런 작업들이 현재 소통되고 유명해지잖아?
그 소통이 미술에 애정과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향해 있다면 그 미술판은 후진 거지.
알았어. 이제 회화와 장소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봐. <사이드 스케이프>는 장소적 설치로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 같아. 당신은 설치작업도 많이 했고, 2008년 미국 뉴멕시코에서 열리던 <산타페 비엔날레>에서는 건축가가 당신의 작품을 미리 보고 작품에 맞게끔 건축적인 전시환경을 만들어줬어. 마찬가지로 건축가 알바로 시자가 만든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에서 열리는 이번 개인전에도 건축적 환경에 따라서 설치를 했지. 내가 볼 때는 3층의 <아쿠아리움-1402>에는 작품 사이의 틈이 창살처럼 보이기도 하고 공간에서 캔버스가 하나하나 독립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설치한 것이 특히 인상적이었어. 마치 동양의 산수화 안에 여백이 사물과 공간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심리적으로 전달되는 것처럼 실제 공간과 캔버스가 소통하는 것 같아. 그런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줘.
아까도 말했듯이 회화는 그냥 화면 안에서 끝나야 된다고 난 생각해. 그런데 회화 몇 점 가져다 놓고 거기에서 이해해라. 그건 굉장히 불친절하잖아. 불친절한 것이 현대미술의 하나의 유행이기도 하지만 내 방식의 설치는 하나의 서비스이고 소통을 위한 최소한의 제스처라 할 수 있어. 하지만 그냥 서비스라기보다는 내 작품에 사이드가 있고 비켜서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산타페 전시에서는 메인을 피해서 옆에 쭉 설치해서 작품이 가지는 의미를 좀 더 강조했지. 이 미술관은  공간 자체가 이미 유명한 건축가의 작품이고 실제적로도 무척 아름다워. 하지만 작품 설치하기에는 솔직히 좋은 공간은 아니야.
내가 보기에는 그런 맥락도 있고 이 건축물 전체가 이미 회화 같은 풍경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이 전시 하면서 많이 들은 이야기가 공간하고 작품이 너무 잘 어울린다는 거야. 나는 그냥 아름답게 보이는 상황이 어떤 것일까 고민했을 뿐인데 다들 너무 잘 어울린다고 하니까 내가 공간에 아부한 느낌이더라고. 그런데 공간을 바꿀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내가 거기에 맞춘 거지. 회화는 캔버스가 어디에 걸려있든 그 자체로 어떤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해. 그것이 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회화라고 할 수 있어.
그럼 작품 안으로 들어가보자. 그림 안에서 붓 터치를 보면 무심한 듯 턱턱 던져놨는데 멀리서 보면 생동감이 들어. 이게 바로 감각과 연결되는 지점이야. 모든 힘을 빼고 붓하고 내가 일치되면서 붓이 가는대로 따라 가지만 서예를 하듯이 붓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힘이 빠진 상태야. 그래서 중성적이면서도 붓 자체도 독립적인 힘을 갖고 있어. 그림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독립적으로 존재하게끔 보이게 해.
오~! 이 얘기는 내가 원하는 것과 똑같아. 서로 말 안했는데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야. 사실 그림 대부분이 한구석을 그린 건데 나는 그 구석을 또 구석으로 몰고 나간거야. 그러다보니 한 개 한 개는 완전 비구상이 되어버리는 거지. 그때 남는 건 색, 터치, 느낌, 분위기, 마티에르 등 굉장히 재료적인 문제야. 형태가 아닌 재료적인 것이 어떻게 스스로 독립해서 서 있을 것인가. 까딱 잘못하면 비구상과 구분이 안돼. 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가고 싶은 마음은 없어. 주제적인 면에서도 초월성을 싫어해. 재료들이 스스로 그냥 독립해서 화면에 존재하는 것. 한 개 한 개 독립체가 모여 하나의 화면이 만들어지고, 또 그것이 모여 또 다른 독립체가 되고, 이런 상황들이 혹시 가능할까 그렇게 생각하고 계속 시도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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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 스케이프> 캔버스에 유채 18×14cm (각) 1700여 점 2005~2014

예술가의 삶의 방식
그것이 회화 자체가 갖는 힘이야. 작가와 관객이 서로 다르게 느낄 수 있지만 그 자유로움 속에 소통하는 순간이 있어. 그리고 삶의 태도를 볼 때 당신은 규칙적으로 작업실에 가서 일정량의 작업을 해. 주로 밤에 작업을 많이 하지. 그리고 집에 와서도 계속 컴퓨터로 소재를 찾고 있어. 잠도 3~4시간밖에 안 자. 거의 작품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거 같아. 은퇴 후 집에서 책 읽고 서예하시는 아버님의 영향을 받아선지 옛날 문인화를 그리던 선비의 태도를 가진 것 같아. 독서와 작업이 삶의 방식을 이루는 예술적 태도를 갖고 있어.
말만 들으니 너무 거대하다. 그렇지는 않아.
좀 찔리나보네. 하하
그 정도는 아니야. 잘 알잖아. 나 노는 거 무진장 좋아해.
물론 노는 것도 좋아하지만 55년 평생 그런 식으로 해왔기 때문에 작품이 쌓여 있는 것 같아.
그렇다기보다는 훈훈하게 마무리하려면 어쨌거나 내가 많은 시간을 작업에 투자하는 게 맞는 거 같애. 그런 조건을 당신이 다 만들어주잖아. 남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인 건 틀림없지. 또 하나 무척 고마운 것이 내가 밤에 작업을 많이 하는데, 작업이 새벽에 끝나면 집에 가기 애매해. 그냥 작업실에서 자는 거지.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작업실에서 밤새도록 작업하고 그 다음 날 저녁 때 집에 가고 이런 식으로 계속 살잖아. 그런 식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주니까 내가 아무리 작업실에서 빈둥거리고 놀아도 작업량이 꽤 많은건 당연해.
마지막으로, 최근작 <메모리 스케이프>로 넘어와서 좀 더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방식의 작업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회화와 조각, 설치의 영역이 합쳐있는 상황인거 같아. 조각으로 보기에는 형태가 너무나 비정형이고, 얇은 표면 때문에 내부 오브제들의 형태가 짐작되고 일부는 노출되는 거. 버려진 장소의 당시  현장을 간직한 형태는 함께 뭉뚱그려져서 나와 매우 이질적으로 보여. 장르와 매체, 사건과 장소, 시간과 공간 등의 이질적인 부분이 합쳐져 만들어진, 그 안에는 무수한 혈맥이 흐르는 새로운 변종의 생명체처럼 새롭게 보여. 예술작품에서 ‘처음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은 아주 중요해. 그래서 매우 기뻐.
10년 동안 보도사진을 수없이 봐왔는데 사람들은 마치 내가 사회에 엄청나게 관심이 많은 줄 알지만 실제 나는 보도사진이나 사건 그 자체에 대해서 관심이 없거든. 내 작업을 위해 이미지들을 빌려오는 것뿐이지. 그렇게 계속 작업 하다보니 예술은 인간의 삶에 대한 얘기인데, 내가 너무 일상에서 벗어나 있는 건 아닌지, 내가 삶을 너무 관념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죄책감이 들더라구. 특히 이 정부 들어서는 그래. 그래서 내 삶에서 내 손에 닿고 내 눈에 닿는 조금은 일상에 가까운 작업을 해보고 싶어서 이 작업을 시작한 거야. 뭔가 좀 더 적극적인 행동을 할 수 없을까 고민하다가 당시 이슈가 된 밀양 송전탑 현장을 직접 찾아가기로 했어.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건 보도사진을 볼 때에는 송전탑이 정말 가까이 있고 인근 마을에는 전류가 어마어마하게 흐를 것 같은데, 실제 밀양에 가서 보니까 내 눈에는 송전탑이 너무 멀리 있는거야. 이게 뭐지. 내가 보기에는 밀양 사람이 오버한 건지 한국전력이 거짓말을 하는 건지 뭔지 모르는 이상한 상황이 된거야. 현장에서 내 생각은 고발이 아니라 좀 더 솔직해지고 싶었던 거야. 그렇다면 작가로서 이것을 어떻게 풀 것인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다가 ‘보존’이라고 생각했어. ‘보존’ 하면 대부분은 숫자나 데이터, 증거 확보처럼 어떤 상황을 증명하는 식으로 존재하잖아. 나는 그런 거 말고 내식대로 감상적이고 시적인 생각을 한 거야. 그때부터 상황이 벌어지는 곳에 있었던, 그 상황을 자기 식대로 머금고 있는 물건들을 가지고 오기 시작한거지. 나뭇가지, 굴러다니는 석유통 등 쉽게 가져올 수 있는 쓰레기 같은 것들을 몇 차례 실어왔지. 그리고 내가 현장에서 찍은 수백 장의 사진은 데모하는 사진이 아니야. 전류에 대해서 무식한 내가 보기에는 문제가 되기에 너무 멀리 있는 송전탑, 그 옆에서 농부가 논을 태우는 일상적인 모습이지. 그리고 물건들을 랩으로 미친 듯이 감싸고 캔버스 천을 여러 번 덧붙여서 물건들 스스로 혼자 설 수 있도록 했어.
당신에겐 그게 굉장히 중요하지.
그렇지. 그리고 지금까지는 한 화면을 그리기 위해서 내가 프레임을 잘랐잖아. 처음에는 입체 형태에다 프린트한 사진을 보고 그리려고 했는데 전체 형태가 안보이고 돌아가면서 위 아래로 봐야 하는 입체 형태와 사각형 프레임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거야. 당혹감과 동시에 굉장히 재미있었어. 지금까지 그린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려야 하는구나. 그걸 그려보고 알았어. 그 다음부터는 형태에 맞게 적절한 화면을 뽑기 시작했는데 한 화면으로는 해결이 안되서 결국 밀양사진 여러 장을 얼기설기 겹쳐서 그리게 되었지. 그동안 나는 스케치는 안하지만 포토샵으로 이미 그릴 범위를 결정하고 그렸거든. 원래 상상력으로 여러 장면을 끌어모아 그리는 거 잘 못하는게 나에게 콤플렉스였는데 이 작품에선 그렇게 안할 수 없는 거야. 내가 잘 못하던 어떤 부분을 요즘 해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작업하는 과정에서 큰 재미가 있어. 이 작품에 대해 어떤 평가가 있든 그걸 떠나서 내가 이 사회를 사는 지식인으로서 무심했던 부분이 조금이나마 해소되고 있고, 순수하게 내 시각으로 보고 이 사건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만족감이 크더라고. 이런 과정이 주는 즐거움에 이 작업을 포기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한동안 더 하려고. 전시 오픈하고 나서 당장 세월호 사고 현장인 진도 팽목항으로 내려가려고 했는데 이런 저런 일로 못가고 있어서 안타까워. 보도사진은 다 확보해놨지만 그 사건이 끝나기 전에 가서 실질적인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작업으로 보존하고 싶어.
앞으로의 계획까지 이야기 했네. 나는 아내이자 미술계 동지로 당신이 작가로서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한 길을 가는 것이 훌륭해 보여. 물론 나에게는 손해겠지만… 가난하지만 떳떳해. 그리고 조력자로서 예술의 순수 목적을 위해 온전히 독립하려는 시도에 동참할 수 있어서 참 좋아. 훈훈한 마무리네. 진행 정리・이슬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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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에서 열린 홍순명 개인전 광경 (맨 오른쪽) 캔버스에 유채 89.5×145.5cm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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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명(오른쪽)은 1959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부산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에콜 데 보자르를 졸업했다. 1989년 미국 티모티 티유 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10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2002 광주비엔날레, 2008 산타페 국제비엔날레 등에 참여했다. 서울시립미술관, 대법원, 미국 산타페 아트 인스티튜트, 경기도미술관, 호암미술관 등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김미진은 1959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부산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파리8대학교 조형예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파리1대학교에서 예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은미술관 부관장, 세오갤러리 디렉터, 예술의전당 전시예술감독 등을 역임했고, 현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hibition Topic] 굿모닝 미스터 오웰 2014

위성예술을 넘어서, 인터미디어 예술가로서의 백남준

1984년 1월 1일, 백남준은 위성을 이용해 뉴욕, 파리, 베를린, 서울 등지에서 100여 명의 예술가가 참여한 위성 텔레비전 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생중계했다. 이 역사적인 프로젝트가 시도된 지 올해로 30주년이다.
이를 기념해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리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 2014전>(7.17~11.16)은 백남준의 작업과 함께 예술과 매스미디어의 관계에 주목한 동시대 작가 16팀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선보인다.

김지훈  중앙대학교 영화·미디어연구 교수

<굿모닝 미스터 오웰 2014전>은 1984년 새해를 열어젖힌 백남준의 기념비적 인공위성 생방송 프로젝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3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다.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요제프 보이스의 퍼포먼스와 뉴욕에서 열린 존 케이지의 즉흥연주를 실시간 네트워크로 접속시키고 앨런 긴즈버그, 로리 앤더슨, 톰슨 트윈즈(Thompson Twins), 오잉고 보잉고(Oingo Boingo: 팀 버튼의 영화음악가로 잘 알려진 대니 엘프만이 속했던 미국 록 밴드) 등을 한자리에 모은 이 프로젝트는 백남준이 개척한 비디오아트 하위 장르의 한 영역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예술과 사이버네틱스의 관계에 대한 백남준의 사유들을 가로질러보면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위성 비디오아트 (satellite video art)’의 선구적 작품” 또는 “위성 텔레비전의 대안적 활용”이라는 기존 예술사의 통념들을 넘어선다. ‘백-아베 비디오 신서사이저(Paik-Abe Video Synthesizer, 1970)’를 완성하기 전인 1967년, 백남준은 벨 연구소(Bell Labs)에서 초기 컴퓨터 그래픽과 사이버네틱스 이론을 연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노베르트 위너와 마셜 맥루한의 방법은 확장된 예술 연구에 가르침을 준다. 이 둘은 단일 예술가에게는 출입금지구역이던 많은 구별된 지대들을 뛰어넘고 유영했다.”1 이렇게 볼 때 백남준에게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원격통신의 예술적 적용을 넘어 그가 신서사이저의 개발과 다양한 비디오 형성체들을 통해 구체화하고자 했던 인터미디어(intermedia) 이념, 즉 음악과 회화, 사운드아트, 퍼포먼스를 횡단하고 공존시키는 미디어예술이라는 이념을 연장한 결과다. 전자초고속도로의 구축이 예술과 삶에 미치는 영향을 성찰하면서 백남준이 예술가를 “처음부터 여러 매체를 횡단하여 다루고 말을 넘어선 언어를 구사하는 전문가”2로 규정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인터미디어 예술가로서의 이상에 따라 기획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기존의 교향악과 오페라를 다른 지역으로 송신하는 것”이 아니었다. 위성예술로서 이 프로젝트는 백남준이 착안한 여러 가지 이념인 대화적인 예술구조, 열린 회로(open circuit)로서의 예술작품, 공간적 합성, 시간적 가변성과 다차원성, 즉흥성, 불확정성을 이용하여 창조한 “복합적인 시공간의 교향악”3이다. 그리고 텔레비전과 비디오의 기술적 특정성인 실시간성, 이미지의 변형성(transformativity), 시청각성(audiovisuality), 아웃풋의 다양성과 비결정성 등은 이러한 이념들을 가능케 하는 재료들과 기법들이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 2014전>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서 선보인 “복합적인 시공간의 교향악”의 면모들을 새로운 전시 환경에 구현하면서 “인터미디어 예술가”로서 백남준이 가진 이념들, 그리고 위성예술로서 이 프로젝트가 펼친 회로들을 부각시킨다. 이 프로젝트의 안과 밖, 이전과 이후를 넘나드는 이 전시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기획 및 실현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자료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역사적 계보에 대한 통시적 조망,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협력자들인 로리 앤더슨(Laurie Anderson), 폴 개린(Paul Garrin) 등의 작품들에 대한 공시적 조망, 그리고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다양한 맥락 및 기술적, 미학적, 주제적 요소들과 조응하는 동시대의 미디어아트 또는 무빙 이미지 예술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장 1층과 2층에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다양한 모습들이 대형 프로젝션으로 펼쳐진다. 2층에는 뉴욕과 파리의 두 가지 방송 버전 및 KBS에서 방송된 서울 버전을 나란히 설치하여 이 프로젝트가 가진 시공간적 동시성의 이념을 구현하고자 했다. 1층에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서 실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차적으로 배열되었던 출연 예술가들의 퍼포먼스들을 10개의 클립으로 나누어서 동시에 보여준다. 이 10채널 동시 프로젝션은 각 퍼포먼스의 개별성을 존중하는 동시에,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규정했던 “복합적 시공간의 교향악”이라는 이념을 부각시키는 데 적합하다. 또한 이는 백남준이 1960년대부터 비디오와 컴퓨터를 통해 탐구했던 사이버네틱 예술의 특질인 정보 흐름의 다층성과 접근의 다방향성을 환기시키면서 관람자들에게 각 퍼포먼스들 사이의 자유로운 조합과 연결을 촉진한다.
위성예술이라는 한정된 장르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오랜 역사를 가진 프로젝트다. 백남준이 실시간 원격통신 테크놀로지가 예술의 형태와 경험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전망에 도달한 시점이 1984년보다 훨씬 이전이라는 점은 1961~1962년 그가 샌프란시스코와 상하이에서 동시에 공연되는 피아노 콘서트를 구상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상이 실현된 것은 1977년이었다. 백남준은 그해의 도쿠멘타6 오프닝 기념행사로 요제프 보이스, 샬롯 무어만, 더글러스 데이비스와 더불어 위성 생방송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같은 해에 키트 갤러웨이(Kit Galloway)와 셰리 라비노비츠(Sherrie Rabinowitz)는 두 장소에서 서로 다른 무용가들이 펼치는 공연을 합성하여 단일 화면에 공존시키는 “위성예술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이 모든 프로젝트가 전시된 “텔레커뮤니케이션 카페”(1984년 갤러웨이-라비노비츠가 LA 올림픽에 맞추어 기획한 프로젝트인 ‘일렉트로닉 카페’에서 이름을 따온)에서 관람자들은 위성예술이 소셜미디어 시대 이전에 선구적으로 실험하고자 했던 참여와 사회적 네트워킹의 이념들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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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미스터 오웰> 이후
전시의 나머지 반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기술적, 미학적, 주제적 이념들과 공명한다고 큐레이터들이 판단한 동시대의 여러 작품이 다양한 포맷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 작품들을 지탱하는 매체와 예술형식의 스펙트럼 또한 비디오 퍼포먼스(리즈 매직 레이저, <PR(공적인 관계들)>, 2013), 원격현전 프로젝트 (엑소네모, <수퍼내추럴>, 2009~2014) 등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기술적 국면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작품들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목탄 드로잉과 초기 애니메이션, 필름의 기법들을 재해석하여 백인 남성의 악몽을 전보, 전화 등의 통신매체를 매개로 역동적으로 표현한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의 <스테레오스코프>(1999)는 백남준 재해석을 비디오아트에 대한 매체 특정성의 신화에 가두지 않으려는 전시의 야심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서 두드러진 하나의 섹션은 질 마지드의 <증거보관소(다시 추적한 사건)>(2004), 하룬 파로키의 <카운터-뮤직> (2004) 등 감시를 주제로 한 현대적 작품들의 배치다. 이는 언뜻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조지 오웰의 묵시록적 미래상에 대한 안티테제라는 세간의 통념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위성기술을 통한 ‘자유의 증대’는 기대와 달리 ‘강한 자의 승리’로 이어진다”4라는 백남준의 경고를 상기해 보면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유토피아적 비전은 통제사회에 대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음을 알 수 있다. <카운터-뮤직>은 특히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릴(Lille)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교통 통제와 건물 온도 관리를 위해 폐쇄회로 비디오카메라와 적외선카메라로 촬영된 디지털 영상들을 지가 베르토프의 도시 교향악(city symphony)인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7)의 영상과 교차시킨다. 파로키가 이 전시를 위해 특별히 선정한 이 작품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미디어예술의 역사와 관련하여 가질 수 있는 접점들을 가시화한다. 한편으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시공간적 동시성은 사회주의 도시의 24시간을 관류하는 기계와 노동의 물질적 네트워크들을 탈인간적 시각과 몽타주 역량으로 통합하는 <카메라를 든 사나이>의 전통과 공명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작품이 정교한 몽타주로 분석하고 있는 감시 카메라 이미지들의 순환과 처리 양상은 백남준의 비디오 매체에 대한 이념과 은밀하게 공명한다. 백남준에게 비디오는 기계의 눈으로 포착되는 시청각적 정보들의 모듈레이션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일상과 시공간에 스며든 통제와 감시의 이미지 또한 인간의 파악을 넘어선 네트워크들의 복잡한 모듈레이션에 따라 생산되고 순환된다.
이 전시에서 유일하게 아쉬운 점은 국내 작가들의 작품 선정 방식이다. 국내의 각종 기획전을 주름잡고 있는 옥인콜렉티브의 <서울 데카당스>(2013)는 가상의 상황을 던지고 그러한 상황이 부여하는 미학적, 사회적 코드들과 그에 반응하는 개인의 표정과 몸짓을 주시하게끔 하지만 <굿모닝 미스터 오웰>과 쉽게 나란히 놓일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옥인콜렉티브의 작품을 배치한다면 제스처의 수행성과 현전을 탐구하면서도 비디오의 리믹스 미학과 파국에 대한 사유가 더욱 두드러진 <작전명-까맣고 뜨거운 것을 위하여>(2012)가 좀 더 적합했을 것이다. 송상희의 비디오 에세이 <그날 새벽,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2014)은 오웰의《  1984》와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를 인용하면서 일상적 세계의 풍경에 잠재된 폐허와 이상향을 끌어낸다는 점에서 <굿모닝 미스터 오웰>과 연결되지만 싱글채널 비디오 설치보다는 집중된 시간성을 가진 극장에서 상영되었을 때 더욱 적합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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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인콜렉티브 〈서울 데카당스〉(왼쪽) 1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48분 2013 이부록 〈워바타 스티커 프로젝트〉(오른쪽) 비닐 스티커에 프린트 300×450cm 120×480cm 2005~2014


1 Nam June Paik, “Norbert Wiener and Marshall McLuhan (1967),” in Judson Rosebush (ed.), Nam June Paik: Videa ‘n’ Videology 1959-1973 (Syracuse: Everson Museum of Art, 1974), unpaginated.
2 Paik, “Media Planning for the Post Industrial Age: Only 26 Years Left until the 1st Century (1974),” in Nam June Paik. Werke 1946–1976. Musik – Fluxus – Video (Kölnischer Kunstverein, Cologne, 1976), unpaginated.
3 백남준, <예술과 위성 (1984)>, 《백남준: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에디트 데커, 이르멜린 리비어 엮음, 임왕준 외 옮김 (백남준아트센터, 2010), p.137.
4 백남준, <예술과 위성>, p.140.

[Exhibition Topic]13th Donggang International Photo Festival

한국 사진축제의 가능성과 미래

산과 산 사이를 휘돌아 굽이쳐 흐르는 동강이 품은 작은 고장 영월에서 열리는 <동강국제사진제>가 13회를 맞았다. <동강사진상 수상자-구본창전>, <특별기획전-에피소드:호주 현대사진전>, <강원도사진가전-강원도에 투영된 사진예술의 진실전>을 비롯해 <포트폴리오 리뷰 수상자-김전기전>과 워크숍, 공개강좌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7월 18일부터 9월 21일까지 동강사진박물관과 영월군 일대에서 펼쳐진다.
작은 마을, 큰 축제의 성공적 사례로 손꼽히는 <동강국제사진전>의 이모저모를 살펴본다.

최연하  전시기획, 사진비평

해마다 7월 셋째 주 금요일이면 <동강국제사진제> 개막식이 강원도 영월군 동강사진박물관 앞마당에서 열린다. 영월군은 21세기가 시작된 첫해인 2001년 ‘동강사진마을’을 선포했다. 이를 계기로 2002년 <제1회 동강국제사진제>가 시작된 이래 현재에 이른다. 이처럼 <동강국제사진제>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진축제다. 올해로 13회를 맞은 이 작은 마을의 사진축제는 ‘동강사진마을 운영위원회’와 ‘영월군’이 주체가 되어 사진예술과 지역축제의 이상적인 만남이 이루어낸 결실이었다. 여러 가지 여건이 여의치 않고 해를 거듭할수록 본래 취지가 희미해지기 쉬운 상황에서 행사를 치르는 것 자체가 지난한 일이었을 텐데, <동강국제사진제>는 해를 거듭할수록 지역을 넘어 한국 사진축제의 새로운 가능성과 활로를 보여주었다. 축제를 만들어내는 기획력은 보다 탄탄해졌고, 행사의 형식적인 완성도도 높아졌다. 이처럼 <동강국제사진제>가 확장된 사진미디엄을 수용하고 매체의 물질적 특성을 견고하게 구축해 내기까지 기획자들의 노력을 높이 사야겠다.
올해 동강사진축제는 주 사진가 12명의 작품을 선보인 <호주현대사진전, Episodes: Australian Photography Now>(이하 <에피소드전>)과 <강원도사진가전>, <거리설치전>, <보도사진가전>, <동강사진박물관 소장품전>, <영월군사진가전>, <평생교육원 사진전>, <포트폴리오 리뷰 수상자전>(이하 <보이지 않는 풍경Ⅱ>) 등 지역의 서사성과 한국사진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전시 테마를 설정하여 변화하는 시대 상황에 사진이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를 조심스럽게 짚어주었다. 이 가운데 특히 주목 받은 전시는 국제전으로 기획된 <에피소드전>과 작가 김전기의 작업으로 이뤄진 <보이지 않는 풍경Ⅱ>를 꼽을 수 있다. 이 두 전시에 반영된 역사인식은 참신했다. 실증적인 역사주의를 벗어나 현재주의적인 역사관을 미적 상상력으로 도약시켜 유쾌하나 가볍지 않고, 진지하나 과격하지 않게 형식과 사유의 변증법적 역동성이 특별했다. 리얼리즘을 근간으로 하는 사진매체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와해될 수 있을지, 이 두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밀도 높은 철학적・미학적 고뇌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에피소드전>에 참여한 호주 작가들은 거의 모든 사진적 수단을 빌려 그들의 역사를 사실적으로 재현하거나 상징적, 우의적으로 표현한다. 특히 호주 원주민(Aborigine)인 트레이시 모팻(Tracey Moffatt), 마이클 쿡(Michael Cook), 크리스천 톰슨(Christian Thompson), 데스티니 디콘(Destiny Deacon) 등 네 명의 ‘에피소드’는 모든 대립적 가치가 프레임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주제를 향한 높은 환기력을 보이고 있다. 영국계가 주류이지만 다양한 민족이 존재하는 호주에는 예전부터 거주하던 원주민이 있었다. 하지만 호주 정부의 원주민 탄압정책으로 애보리진들은 자신의 영토를 빼앗긴 채 강제수용당하거나 호주 내의 디아스포라가 된다. 자신들의 과거를 호주정부에 의해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 또는 ‘도둑맞은 아이들(Stolen Children)’이라고 부를 만큼 트라우마로 얼룩진 애보리진의 후예들의 작품은 이제는 희미해진 고향의 삶과 언어를 회복하려는 자의식과의 싸움처럼 보인다. 자신의 몸을 지나간 체험이나 역사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섞어내며 작업하는 것은 하나의 불가피함이다. 그러자면 지배적인 기억(dominant memory)으로부터 대항기억(counter memory)을 곧추세워 자신을 통제하고 강요해왔던 지배이데올로기를 해체해야 한다. 기억의 제도화와 다름없는 ‘역사’는 역사적 책무를 회피하려는 지배자의 담론일 뿐이다. 그러니 기억 속에서 사라진 망각의 역사, 즉 공식적이고 지배적인 기억이 아닌 대항기억의 부활에 사진은 생생한 그 역할을 할 것이다. “나는 학교에서 한 번도 애보리진 역사에 대해 배운 적 없고, 오직 유럽인의 호주 정착에 대해서만 배웠다”는 마이클 쿡의 에피소드와 정부와 선교사의 영향을 받지 않고도 지식과 역사, 문화에 박식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데스티니 디콘은 ‘생김새가 다르다고 주변에서 침을 뱉고, 돌을 던졌던’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를 기억해낸다. 호주땅에 처음부터(ab origine) 있었지만 자신의 땅에서 분리(ab-)된 애보리진 작가들에게 ‘수년 전에 몇몇 노인이 들려준’ 이야기가 작업의 모티프가 되기도 한다. ‘정신을 다시 대지로 돌려놓는 것, 예술이 그러한 이동을 가능하게 할 운송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믿음’(크리스천 톰슨)은 흘러가버리고 기록된 연대기의 역사가 아닌, 현재진행형인 역사의 공간에 작가를 합류하게 하는 것이다.

국가와 지역의 경계를 무력화 시킨 사진의 힘
<에피소드전>의 전시장은 중심 스토리가 아닌 주변의 에피소드들로 관객의 시선을 붙잡는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다. 오래된 무덤에서 출토된 미이라가 묘한 영적 아우라와 함께 현재를 바라보거나(폴리제니 파파페트로), 익명의 군중은 거리에서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트렌트 파크). 진정한 소통이란 불가능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역설의 아포리아를 보여주는 작업(폴 나이트), 슬픔과 광기로 빚은 에로틱한 초상(폴리 볼란드), 앵글로-오스트레일리아 문화권에서 태어난 중국인으로, 이성애자들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동성애자인 윌리엄 양의 작업에서는 밝고 쓸쓸한 바람이 스친다. 중심이 아닌 주변, 몸체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들의 이야기로 즐비한 것이다. 에피소드 중 압권은 트레이시 모팻과 개리 힐버그(Gary  Hillberg)가 함께 작업한 영상작품 <다른 것(Other)>이다. 영화와 텔레비전 장면들을 몽타주한 이 영상은 침략자와 원주민, 보안관과 인디언,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정의와 불의, 선과 악, 주인과 노예로 이분화된 대립각에서 전자의 도덕적, 지적, 문화적 우월성을 전복시키며 동일자의 표상체계 밖에 있는 타자, 상징계 너머에 있는 ‘인식’이나 ‘표상’의 대상이 아닌 ‘다른 것’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공동체 바깥에 있는 타자, 이방인으로 내몰린 호주 애보리진들은 실상 공동체의 구조에 속하면서 어떠한 타자성도 지니지 않는, 즉 공동체의 동일성을 위해 요구되는 원주민이 아니었을까.
전시장을 나와서도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은 한 장의 사진이 있다. 김전기의 <보이지 않는 풍경Ⅱ>에서 만난 주문진의 밤바다 사진이다. 해질 녘에 촬영한 후, 똑같은 자리에서 해 진 후 다시 이중촬영한 철책너머 보이는 동해의 풍경은 신비롭고 아름답다! 겨울 폭풍 후의 강릉 해안선, 실외 사격장 등 강원도 고성에서부터 삼척까지 동해안 7번 국도의 해안선을 따라 철책선과 군사시설물을 촬영한 이 사진들에서 분단 이후, 해독되지 않는 ‘틈’으로 남아있는 권태로운 동해안을 본다. 대형카메라와 네거티브필름으로 촬영한 이 사진들의 색감은 미확인 비행물체처럼 현실의 네크워크를 해체하며 은밀한 균형상태를 보여준다. 분단 이데올로기가 사진으로 표상될 때, 그 명료한 주제의식 때문에 범상한 소재주의로 빠질 수도 있을 터인데, 김전기의 사진에서 두 개의 한계를 뛰어넘는 고뇌와 성찰을 포착할 수 있었다. 김전기의 가능성은 여전히 38선 이남에 머무르면서 보이지 않는 지정학적 경계를 드러내는 데 있다.
‘지금・여기’의 동시대 작가들은 사진이라는 그릇에 역사와 현실을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 올해 동강사진축제의 작품들을 보며 더욱 골똘하게 생각한다. 호주 작가들의 서술적이고, 자전적이고, 장식적이고 제의적인 에피소드들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골짜기, 강원도의 작은 마을에서 잔잔한 공감을 일으키고 있다. 인간 삶의 복잡성과 다층성, 문화의 다원적인 가치들 속에서 주체(중심)가 타자(주변)를 배제 않고 배려하는 흥미로운 토대를 생각해본다. 국가 간, 지역 간 문화교류 및 기획에서 이해와 공감의 폭이 넓어지는 그윽한 차원을 그려보며, 국제전시의 타이틀이었던 ‘에피소드’ (해양과학용어 사전에 따르면 이 말은 ‘지질시대를 통하여 독특하고 뚜렷한 사건(들)을 시간의 함의 없이 사용하는 용어’라고 한다)가 사뭇 발본적이었음을 알아챈다. ●

강원도 출신 사진작가로 기획된  전시광경

강원도 출신 사진작가로 기획된 <강원도사진가전-강원도에 투영된 사진예술의 진실> 전시광경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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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전 <호주 현대사진-에피소드전> 공동기획자 나탈리 킹(Natale King)

“호주의 문화적 정체성을 보여준다”

_MG_1809이번 <동강국제사진제>에 대한 인상은?
개막식 행사에서 누군가 말한 ‘작은 마을의 큰 축제’라는 표현에 공감한다. 일주일 정도 영월에 머물며 영월이라는 지역에서 열리는 여름축제 가운데 <동강국제사진제>가 가장 핵심적인 행사임을 확인하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호주 현대사진의 현주소를 보여주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그동안 <동강국제사진제>는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여러 국가의 사진가를 초대했는데, 이번에 호주의 현대사진을 대표하는 12명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보여주게 된 것에 보람을 느낀다. 그리고 전시 외에도 워크숍, 강의, 특별전 등 프로그램이 다양하다는 점도 돋보였다.
주제로 내세운 ‘에피소드(episode)’는 어떤 의미인가?
영어 단어 ‘에피소드’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심리적인 변화를 느낄 때의 분위기를 뜻하기도 하지만 영화나 TV 화면에서 볼 수 있는 어떤 순간의 장면을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진의 다양한 표현방식과 영역에서의 한 부분을 뜻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나와 공동 큐레이팅을 맡은 박영미(박건희문화재단 학예실장, 사진 오른쪽)는 호주의 ‘사진/영화/이야기’를 보여주기 위한 키워드로 ‘에피소드’라는 단어를 내세웠다. 이는 과거와 현재 또는  원주민과 유럽인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의 역사와 모호한 정치성이 공존하는 호주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다.
이번에 출품된 호주 작가의 작품은 문화적인 정체성의 혼란을 표현한 것이 많은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매우 적절한 지적이다. 호주 예술가 대부분은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다. 그들은 유럽인에 의해 점령되고 식민지화되고 문명화된 호주라는 특수한 장소성에 관심이 많다. 따라서 그들은 그 안에 내재된 역사와 문화적 정체성을 탐구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크리스천 톰슨(Christian Thompson)은 영국 옥스퍼드대에 입학해서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애보리진 예술가이자 사진가다. 그는 호주 원주민과 유럽인을 상징하는 다양한 오브제를 이용한 자화상 작업을 선보인다. 이밖에도 그리스계인 폴리제니 파파페트로(Polixeni Papapetrou)는 자신의 아들에게 갈기갈기 찢어진 전투복을 입혀 호주의 풍경을 배경으로 촬영한다. 이 전투복은 원래 사냥꾼이나 군인이 위장하기 위해 입던 것인데, 이처럼 평화로운 풍경과 이질적인 캐릭터의 조합은 배경과 인물의 긴장을 부각시키며, 유럽인과 원주민이라는 이질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호주 현대사진의 특성은 무엇인가?
호주의 많은 사진가 역시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창의적인 사진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그들의 활동영역은 기술적인 창의성뿐만 아니라 인물이나 다큐멘터리 같은 전통적인 사진부터 이미지 연출에 이르기까지 폭넓다. 내용적으로는 앞서도 말했듯이 호주라는 특수한 다문화 상황과 과거 식민지 역사의 배경과 그 영향이 두드러진다. 이런 맥락에서 정치적인 의식이 반영된 작품이 있다고 생각된다.
인상적인 한국 사진작가의 작품은?
올해 동강사진상 수상자로 선정된 구본창의 작품이 특히 좋았다. 풍경, 가면, 백자 시리즈 모두 매우 섬세하고 감각적이며 시적(詩的)이다. 그리고 백승우의 작품도 흥미롭다. 서울 도심과 황폐한 장소의 이미지를 표현한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영월=이준희 편집장

 

 

[Special Artist] 황규태

 

 

사진작가 황규태는 전통적인 사진어법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작품을 선보여 왔다.
지난 40여 년 동안 추구해 온 전위적인 작업여정을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7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리는 <황규태 개인전-사진 이후의 사진(Photography after Photography)>이 바로 그것. 이 전시에는 1960년대 초기작부터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대표작이 총망라되어 출품됐다.

탐미적 아방가르드 작가

박상우  중부대 사진영상학과 교수

지난 40여 년 동안 제작된 황규태 사진 아카이브는 형식과 내용 측면에서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럼에도 그의 수많은 이질적 사진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하나의 축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과거의 인습(因習)과 현재의 안주(安住)를 넘어서려는 끈질긴 ‘아방가르드(avant-garde)’ 정신이다. 아방가르드는 사상, 예술, 과학, 기술 분야에서 과거의 인습과 단절하고 혁신 혹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정신이다. ‘혁신’ 혹은 ‘넘어섬’은 그가 스스로 고백하듯이 1960년대 사진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부터 현재까지 자신의 사진예술에서 줄기차게 추구해온 문제의식이다: “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어느 범위를 넘으면 사진이 아니라고 할까. 사진은 사진이어야만 되는 것일까. 그 시절의 의문들은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히는 DNA 분자들이다.”1
황규태도 1960년대에는 다른 사진가들처럼 스트레이트 사진 혹은 다큐멘터리 사진의 스타일을 채택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선택한 사진 스타일의 ‘한계’를 스스로에게 질문했으며 이것을 어떤 식으로든 ‘넘어서고자’ 했다. 그에게 기존 사진의 근본적 한계는 사진의 존재론적 특성(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그것이 존재했음’) 자체에서 비롯된다. 사진은 회화 및 언어와 달리 기호가 가리키는 대상(지시체)이 촬영순간에 임의적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카메라 앞에 존재해야 한다.2 사진의 이 같은 피할 수 없는 속성 때문에 사진가는 문학가나 화가와는 다른 예술적 태도를 보여야 한다. 사진가는 카메라 앞에 있는 대상이 자신에게 ‘강요’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 한다. 사진은 실재(피사체)에 종속된 매우 독특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황규태는 사진의 이 같은 본질적 속성을 이용하면서 동시에 거부한다. ‘그것이 존재했음’이 자신의 예술적 상상력을 펼치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사진매체를 사용하지만 사진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이 때문에 그는 사진의 근본적 속성을 벗어난 사진, 즉 시공간이 다른 곳에 위치했던 두 피사체를 한 장의 사진에 합성한 몽타주 사진 등 다양한 실험사진 혹은 메이킹(making) 포토를 시작했다: “메이킹 포토는 찍힐 대상이 있어야 하는 사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궁여지책이다.”3 황규태에게 예술은 결국 실재의 ‘복제’가 아니라 실재의 ‘변형’인 셈이다. 황규태의 예술론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 응축되어 있다: “사실과 실체를 훼손해놓고, 그것을 예술이라고 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전시 제목인 <사진이후의 사진>은 작가가 기존의 사진 경향(‘앞의’ 사진)과 구별하여 자신의 사진(‘뒤의’ 사진)에 부여한 정체성 혹은 이름이다.
황규태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영향을 받은 사진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는 서양미술사에서 시각언어가 가장 풍요롭게 탄생한 1920~30년대 유럽 아방가르드 미술(다다이즘, 초현실주의, 구축주의)의 정신을 직접 이어받았다. 그 정신이란 기존 전통예술의 극복, 전위적 예술 추구, 과학과 테크놀로지에 대한 관심,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 허물기, 예술과 삶의 일치 등이다. 그는 더 직접적으로 당시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이 새로운 미술언어를 창조하기 위해 실험했던 다양한 사진기법 – 포토몽타주, 이중노출, 필름 태우기(버닝), 차용, 왜곡, 과학사진(현미경사진, 천체사진, 항공사진, 엑스레이사진) 등 – 을 자신의 사진에 도입했다.
컴퓨터 모니터, TV 화면에 사진을 띄워놓고 확대 촬영한 황규태의 ‘픽셀 시리즈’는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이 경탄했던 현미경사진의 일종이다. 무한히 작은 것(혹은 무한히 큰 것)에 다가가려는 황규태의 욕망은 인간 눈의 지각능력을 넘어선다. 따라서 그는 다양한 확대 도구(접사렌즈, 포토샵 등)를 이용하여 생리학적 시각도구로는 다다를 수 없는 미시세계를 탐구한다. 이를 통해 무한히 작은 세계가 감추고 있는 또 다른 차원의 미적 세계(색, 형태, 패턴)의 비밀을 드러낸다. 황규태의 픽셀 사진은 심오한 철학 얘기 – 사진의 본질은 점 혹은 픽셀이라는 존재론적 담론 – 를 담고 있지 않다. 그는 대신 확대의 즐거움, 즉 가벼운 마음으로 무심코 무언가를 확대했을 때 그곳에서 예상치 못하게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작은’ 즐거움을 추구한다. 그것은 작가의 표현대로 그냥 ‘비트 놀이’ 혹은 ‘장난’이다. 문방구에서 구입한 점(點) 스티커를 크게 확대한 이미지가 모니터의 픽셀과 유사한 패턴을 보일 때 그는 거기에서 발견의 기쁨을 느낀다. 관객은 자신 앞에 걸려있는 질서정연하고 품격 있는 커다란 추상화가 사실은 작고 하찮은 스티커를 확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작은 충격을 받는다. ‘그냥 보는 것’과 ‘알고 보는 것(지식의 개입)’ 사이에 나타나는 괴리가 주는 매력이 황규태가 노리는 점이다.
필름을 태워 만든 버노그래피(burnography)는 황규태가 1960년대 미국 할리우드의 슬라이드 현상소에서 일할 때부터 지금까지 해온 실험사진의 하나이다. 이 기법은 미술사에서 1930년대 초현실주의 화가인 라울 위박(Raoul Ubac)이 처음으로 사용했다. 위박에 따르면 필름에 열을 가하면 필름이 변형되는데 이 변형은 예측을 불허하기 때문에 최종이미지는 초현실주의가 선호하는 우연의 미(위박의 표현대로 ‘신의 우연’)를 달성할 수 있다. 황규태는 위박의 존재를 몰랐다고 필자에게 말했다.4 자신 앞에 누가 있는 줄 모르고 새로운 사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던 그는 우연히도 미술사, 사진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아방가르드 실험사진의 한 기법을 발견했다. 그는 필름 태우기 기법을 초현실주의 맥락과 완전히 다르게 우주적인 묵시록(녹아 흘러내리는 태양), 인류의 재앙과 종말(지진, 원자탄 투하, 비행기 추락) 등 자신의 방식대로 다소 우울한 시선에 연결시킨다.
두 장 이상의 사진에서 필요한 부분을 오려 한 장의 사진에 붙이거나(포토몽타주), 두 장 이상의 필름을 겹쳐서 인화하는 방법(이중인화, 다중노출)은 황규태 사진에 가장 많이 나타난 기법이다. 이것의 기원 역시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사조에서 비롯되었다. 포토몽타주5 기법은 각 아방가르드 사조의 미학적 의도에 따라 제각각 다르게 사용되었다. 다다이즘은 포토몽타주를 기존 예술가치의 비판/전복의 도구로, 구축주의는 건설과 생산의 도구로, 초현실주의는 무의식의 표현적 도구로 사용했다. 황규태의 포토몽타주는 전반적으로 초현실주의적 경향에 가장 가깝다. 1660년대 미국 초현실주의 사진(특히 제리 율스만)에 직접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황규태의 초기 몽타주를 보면 초현실주의 사진과 초현실주의 회화(르네 마그리트)의 특성이 뚜렷이 나타난다. 예컨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물들의 병치(마천루와 인간의 눈, 자동차 안의 두 눈, 대도시와 호모 에렉투스), 사물들의 크기의 역전(마천루보다 더 큰 인간의 눈, 해변에 떠 있는 거대한 입술)은 정확히 1930년대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즐겨 쓰던 기법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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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후 사진’의 증거
황규태는 사진을 직접 촬영하지만 타인의 사진을 차용한 경우도 많다. 만 레이의 키키 사진(예술사진), 마더 테레사의 임종 사진(보도사진), 태아 사진(과학사진), 바닷속 태아 사진(주인이 누군지 모르는 사진) 등, 그는 소위 예술/비예술 분야에서 나온 모든 영역의 사진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한다. 차용, 인용, 모방, 패러디 전략은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특징이다. 하지만 이 기법들은 20세기 초 다다이즘의 전형적인 예술 전략이고 현대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이 다시 사용한 것이다. 예컨대 1919년 이미 존재한 사진(모나리자 엽서사진)을 그대로 가져다 쓴 뒤샹의 전략은 차용 기법의 본보기이다. 황규태는 “나의 인용, 레디메이드 기법은 뒤샹에게서 직접 영향을 받았다”며 다다이즘에 빚지고 있음을 필자에게 언급한 적이 있다. 이처럼 아방가르드 사조에 발을 굳게 디디고 있는 그는 “[남의 사진의] 카피와 [내가 직접] 찍음의 차이를 구분함이 무의미하다”6며 자신의 ‘카피’ 전략에 대해 명확히 밝혔다.
황규태의 아방가르드 정신은 이처럼 그가 전위적인 실험기법을 채택했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다. 아방가르드 예술은 미술사에서 자신이 발 딛고 서있는 사회, 시대, 삶과 유리되지 않고 그것에 대해 항상 발언을 해왔다. 황규태도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해 수많은 질문을 제기하고 이를 사진 이미지로 시각화했다. 환경 문제(달과 물고기 뼈, 성조기 위의 플라스틱 폐기물), 핵문제(원자탄이 떨어진 도시), 생명공학 문제(공장에서 대량 복제된 아이와 여자, 눈 코 입을 바꿀 수 있는 성형기술, 어둠 속에서 부유하는 유전자, 염기서열, 변이생명체) 등 그는 우리 시대의 키워드에 대해 줄곧 작품으로 응답해왔다.
황규태 사진은 이처럼 아방가르드적 태도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 태도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아방가르드는 원래 전통적인 미학범주(아름다움, 조화, 질서, 균형)를 전복하고자 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반(反)미학적이다. 하지만 황규태 사진은 철저히 ‘탐미적’이다. 그는 다른 아방가르드 작가들처럼 새로운 형식의 사진을 끊임없이 실험해왔지만 그가 진정으로 주목한 것은 사진의 실험보다도 사진이 제공하는 시각적 ‘즐거움’이다. 한 장의 사진이 내용의 관점에서 아무리 새롭고 흥미로울지라도 시각적으로 ‘와 닿지’ 않으면 그에게 큰 의미가 없다. 예컨대 과학사진/현미경사진의 코드를 이용한 그의 픽셀사진에서 핵심은 미시세계의 들춰냄(이것은 과학자의 욕망)이 아니라 미시세계의 아름다움, 그의 표현대로 ‘컬러의 하모니’7 혹은 ‘컬러의 놀이’이다. 그는 또한 루페(확대경)로 들여다 본 TV 화면에 나타난 픽셀의 현란한 색의 잔치에 감탄하기도 한다.8 세계 만국기 200여장을 섞어 놓은 <멀팅 팟>에서도 작가는 지구촌, 다문화 현상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지만 그가 더 관심을 둔 것은 만국기를 섞어놓았을 때 “예상 못했던 현란한 색들의 파편[의] 난무”9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철저한 ‘탐미적 아방가르드’ 작가라 할 수 있다.
환경문제, 인류의 종말, 우주의 묵시록 등 어두운 주제를 다룬 작품들에서도 사진 이미지 자체는 시각적으로 매력적이다. 단순한 형태와 두세 가지 색만을 사용한 미니멀리즘적인 경향(검정색 바탕에 녹아내리는 빨간 태양)은 우주의 종말이라는 암울한 내용과 상관없이 보는 이에게 시각적인 즐거움을 준다. 이 같은 탐미적 경향은 한강을 초망원렌즈로 촬영한 다음 수많은 조각사진으로 몽타주한 <한강컬렉션>, 그리고 꽃들의 잔치를 펼쳐놓은 <꽃 시리즈>에서 더욱 강화된다. 이 작품들은 인류의 재앙을 다뤘던 동일한 작가가 제작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전위적인 동시에 탐미적인 황규태 사진은 더 나아가 ‘감성적’이기도 하다. 해변에서 아버지가 딸에게 키스하는 역광 사진에서 그는 “[당시] 나는 역광사진에 매료되었다. 개념이나 이론보다는 감성에 빠져있었다”10며 사진에 대한 자신의 정서적 태도를 밝힌다. 작가는 또한 자신의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떠오르거나 지는 거대한 붉은 태양을 마주하면 걷잡을 수 없이 흥분되거나 가슴이 벅차올라 거의 카타르시스 상태에 빠진다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심지어 환경유해물 생산 공장과 같은 ‘차가운’ 소재를 마주할 때도 지성보다는 감성으로 접근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일생 전체가 ‘안타까움 자체’라고 고백하기도 한다.
황규태 사진에 숨어있는 복잡한 의미의 지층들을 드러내려는 작업은 언제나 녹록지 않다. 그의 사진들 안에는 서로 충돌하는 다양한 이질적 범주들 – 과학기술, 실험정신, 미래, 전위, 암울함, 시각적 즐거움, 놀이, 장난, 그리고 감상적 태도 – 이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황규태의 정체성을 규정하자면 ‘탐미적 아방가르드 작가’ 혹은 ‘유쾌한 아방가르드 작가’이지 않을까. 왜냐면 그의 사진은 언제나 즐거움, 미, 실험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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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규태, 《황규태》, 열화당, 2005, p. 18
2 Roland Barthes, La chambre claire : Note sur la photographie, Gallimard, Seuil, 1980, p. 120
3 황규태, 앞의 책
4 황규태는 자신의 이 독특한 기법이 사진 역사에서 “내가 처음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황규태, 앞의 책, p. 30
5 이중인화, 다중노출도 넓은 의미에서 포토몽타주에 속한다
6 황규태, 앞의 책, p. 134
7 <비트 놀이>(1999)에 대한 작가의 작품 해설
8 “나는 궁금증이 많다. 필름을 확대해서 들여다보는 루페로 TV화면을 들여다보니 픽셀이 질서정연한 원자 알갱이처럼 현란한 색을 이루고 있다.” <티 비 픽셀 오-화이트>(2010) 작품 해설
9 <픽셀 픽시>(2010) 작품 해설
10 황규태, 앞의 책, p. 70

황규태는 1938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했다. 동국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경향신문 사진기자(1963~1965), 미주동아일보 대표(1984~1992)를 역임했다. 1973년 프레스센터에서 첫 개인전 이후 15회 개인전을 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사진미술관, 한국민속촌미술관, 워커힐미술관, 아트선재아트센터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Artist Review] 김선형

블루수묵화, 감각으로 밀고 나가기

지천명의 나이를 갓 넘긴 작가의 51번째 개인전이라 하면 누구든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김선형의 푸르디푸른 화면을 직접 본다면 그의 “두서없는 이미지들은 작가의 변화무쌍한 심정의 전환에 따라 나타나는 심상”이라는 평가에 동의할 것이고, 그것이 왕성한 작품 제작의 바탕임을 수긍할 것이다. 김선형의 파란 정원에서 동양의 수묵과 서구 현대미술의 조우를 목도한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김선형은 수묵 대신에 청색 안료와 미디엄을 구사해 단색조로 이루어진 그림을 그린다. 여전히 모필과 물의 농담에 의한 변화를 극대화해서 수묵의 맛을 유지하는데 먹 대신 쓰인 청색 안료는 청화백자 같은 그 푸르른 맛을 가득 껴안고 있다. <Garden Blue>이란 제목이 언급하듯 화면은 자연, 숲의 한 풍경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선사한다. 결국 그는 수묵화와 산수화, 서예(선) 등을 결합해내고 한편으로는 청화백자의 미감과 선비들의 문기(文氣) 짙은 취향과 격을 끌어안으면서 그러한 전통과의 깊은 교호나 공감을 지향하는 ‘현대적인’ 그림을 시도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는 이전 스승, 선배 작가들과는 다른 문화적 체험을 한 세대다. 그야말로 울트라모던, 포스트모던의 세례를 받은 감각의 소유자이다. 따라서 이 두 개의 층이 교접하고 엇갈리면서 표출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기이한 청색 수묵화이자 감각적인 수묵 추상작업이며 기의를 상실한 초서적인 추상에 가깝다. 이른바 한국의 전통미술 혹은 문화를 자기의 감각으로 번역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전통의 정신과 격을 존중하나 그 문화적 실체감은 부재한 상황에서 빚어지는 불가피한, 감각적으로 근접하는 전통문화의 오마주에 해당한다.
한국의 근현대미술은 예외 없이 ‘현대와 전통’ 사이에서 끊임없이 현재적 정체성의 의미를 모색해왔다. 이는 현재적 자기정체성에 대한 전통적 환원이라는 방법론에 기초해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만남과 결합을 매끄럽게 파악하고 있다는 단점이 자리한다. 과연 그러한 만남과 조화는 가능할까? 사실 ‘전통’이란 현재의 관점에서 해석되고 평가된 과거(전통이란 현재의 산물)이기에 전통과 현재가 만난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전통이란 것이 정신이나 영혼, 민족성 같은 허깨비가 아니라 박물관, 교육제도, 평가, 역사기술의 제도 등의 ‘물리적이고 현실적인 제도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음을 상기해보면 현재라는 시간을 메우고 있는 그 제도들 밖에서 전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알다시피 전통이란 보존되고 전승된 어떤 것이 아니라 고안된 어떤 것이다. 그러니까 전통이란 이 시대의 여러 가치관 중 하나일 뿐이며 그것은 현재가 과거에 대해 덧씌운 프레임이다. 과거는 전적으로 현재의 산물이란 얘기다. 따라서 문제는 현재의 관점에서 그 전통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느냐이다. 그간 우리의 동양화는 전통과 서구에서 받아들인 현대미술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도모해야 하는 운명을 외면하기 어려웠다고 본다. 그 사이에서 모종의 틈과 가능성, 균열을 모색했던 것이 오늘날 한국 현대미술의 초상일 것이다. 김선형의 그림 역시 전통과 현대의 연결, 접목과 해석이란 과제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해 보인다. 그리고 그는 조선 문인들의 멋과 격을 동경하고 고미술에 담긴 절묘함과 소박미도 헤아리고 있다. 동시에 수묵화의 당위성에 타피에스나 황창배, 나아가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경향과 스타일을 두루 체득하면서 이 모두를 결합해낸 자신만의 회화를 만들고자 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게 <Garden Blue>이다. 내 생각에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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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기(文氣) 흐르는 추상의 시도
그래서 그는 자연/숲(생명)을 소재로 그린다. 청화백자의 꽃문양이나 민화를 차용한다. 그 기운을 어떻게 동양화의 전통적인 재료체험과 물성을 통해 드러낼 것인지를 고민한다. 한지와 천, 안료와 물, 붓의 사용은 당연하지만 검정의 먹 대신 감각적인 블루 색을 대신했다. 여기에는 문인화적 멋과 운치, 그리고 한국적인 그림, 전통에 대한 고민이 묻어있다. <Garden Blue>의 경우, 유기체로서의 자연이 지닌 생명력과 기운을 푸른 색감과 자유로운 필획으로 표현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구체적인 숲을 그린 것이 아니라, 숲으로 대변되는 존재를 개념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숲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 떠오르는 숲, 그 숲의 이미지를 그렸다.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자연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정신적 흐름인데 이는 자기의 뜻을 자연물에 의탁하는 문인화적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다. 또한 형태와 닮음을 구하지 않고 생동하는 기운을 찾는다. 만물은 영기(靈氣)의 화신이므로, 만물이 영기를 발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는 화가의 몫이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자신만의 필법, 골법을 만든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론은 다음과 같다. 그는 아크릴, 안료와 석채, 미디엄을 섞고 이를 물과 함께 해 인위적으로 마름을 조절한다. 선묘처리를 한 바탕 위에 스프레이로 물을 뿌린 뒤 촉촉한 상태에서 스퀴즈로 물기를 밀어내는 방법 등을 구사하는데 이때 물이 밀려나가면서 다른 부분과 접촉점을 갖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전체적으로 비슷한 톤을 유지하게 된다. 김선형은 동양화의 수묵화를 이루는 재료들, 매재적 속성을 최대한 순리에 따라 화면 위에 얹혀놓았다. 자연에 따른다는 것은 순리와 이치에 따르는 것이다. 동양화는 침윤하기 쉬운 먹과 색을 부드러운 모필을 먹여서 침윤하기 좋은 종이 위에다 그리는 것이므로 지극히 우연적인 수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인위로, 작위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우연히 가져오는 기법을 필연으로 이용해서 그리는 게 동양화 수법의 전통이다. 그림 역시 인위적이며 작위적인 것이 아니라 무위적인 것이다. 그는 한지의 물성에 꾸준한 관심을 보여왔다. 한지는 무엇보다도 그 흡수성 때문에 평면에서도 깊이와 부피를 포용하는 신축성 있는 재료이다. 먹이 번진 한지는 2차원도 3차원도 아닌 이를테면 소수 차원의 프랙탈 공간이며 생성하고 변화하는 차원을 보여준다. 이는 무척 동양적인 세계관, 우주관을 가시화한다. 물의 순리를 따르지 않으면 그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동양의 먹그림이란 결국 물의 흔적, 자취, 경로, 흐름 등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수묵은 필법에 묵법으로, 궁극적으로는 수법(물의 법칙)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몇 가지 안료를 섞어 만든 푸른색의 물감을 장봉에 묻혀 한지 위로 직입하는 그의 작업은 붓을 대는 장력과 화선지의 반발, 그리고 물감의 물성이 순간적인 필획으로 만나 묶여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붓 자체, 선이나 색, 물, 종이의 물성을 만나는 일”(강선학)이다. 무엇보다도 화면은 필획의 흔적들로 이루어졌다. 가장 기본적인 그리기, 붓의 놀림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이 자동기술적인 선은 직관적으로 나아간다. 그는 대충 생각하고 곧바로 그림을 그려나간다고 한다. “그의 두서없는 이미지들은 작가의 변화무쌍한 심정의 전환에 따라 나타나는 심상”(김백균)이라는 얘기인데 그러나 장식적인 선, 몇  가지 도상이 반복해서 출몰한다. 거의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붓놀림의 흔적이고 그것으로 충족한 화면이면서도 유사한 패턴들로 마감되는 장식이 있다. 어떤 것을 그리고 나타내려고 한 것이기보다 순수한 선과 점의 자동적인 기술의 흔적에 불과한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선들은 나무와 풀, 꽃과 새, 그리고 상징적인 도상의 꼴을 암시한다. 그래서 그의 붓질은 구상과 추상 사이, 선과 도상 사이에서 진동한다. 붓질, 붓의 놀림들만이 전면적으로 화면에 가득하다. 그것은 전적으로 필력에 의존한 것이다. 가장 근원적인 그 붓질, 선은 무척 골법적이다. 골법이란 형체의 기본형 및 그 형체 안에 갖추고 있는 감정을 뜻한다. 그런데 형체의 근원이자 형체를 지탱하는 것은 결국 기(氣)다. 이 붓질은 자연풍경을 암시하는 듯하면서도 기의 표출이고 흔적이 된다. 한편 붓질이란 다름 아닌 작가의 신체적 행위의 기록인 셈이다. 붓을 통해 자기 자신의 신체의 굴곡과 이동, 움직임, 호흡, 떨림 같은 것들을 보여준다. 그는 수묵화의 뼈대인 필을 통해 수묵의 정신을 육화해내는 조형적 실험을 전개하고 있으며 이 같은 작업을 통해 서구 현대미술을 동양화 재료와 정신으로 접목하고자 한다.
화면은 온통 푸른색으로 가득하다. 종이 안에서 이루어지는 물과 먹/청색 안료의 운용만이 보일 뿐이다. 여기서 청색의 의미는 아침이 시작될 때의 푸르름으로 여명, 시종의 상징적 색이자 윤회의 색이다. 그리고 어둠과 밤 사이에 있는 색, 공기의 색이기도 하다. 더불어 청색물감은 먹보다는 물성이 적극적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청색은 청화백자의 푸른 빛깔을 연상시킨다. 맑고 청아하다.
“슬픔과 희망의 빛을 함축한 푸른색의 선을 긋고 점을 찍어 나가는 나의 그리기는 내 안의 모든 감정으로부터 나를 정리하는 동시에 나를 정화한다. 기쁨을 채우고 묵은 슬픔을 지워나가며 내 삶을 그려낸다…. 내게 있어서 시공의 경계적이고 인생의 시작이며 끝점의 색…. 생멸 자연의 근본색이며 인간 삶의 운용을 다스리는 기운의 색이다”(작가노트)
김선형은 이른바 문기에서 나오는 추상을 시도하고자 한다. 이는 동양화가 현대회화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이란 인식 아래 가능하다. 그러한 인식은 해방 이후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고암이나 산정, 남천 등이 그러한 길을 걸어왔다고 여겨진다. 이처럼 그는 한국적인 정서, 한국인으로서의 그림을 의식적으로 추구한다. 동양화가 해낼 수 있는 여러 가능성과 매력, 의미를 열어놓고자 한다. 특히나 조선이 가졌던 문인의 소박하고 담백하며 격이 있던 미감, 우아하고 점잖은 문화를 추구하는 그는 문인적 모습을 동경하며 긋고 찍고 툭툭 던지듯이 그린다. 김선형의 그림은 문인화에서 볼 수 있는 고도의 간결과 절제의 정신적인 격조를 띤 것, 선묘 자체가 생동하는 기능을 지닌 그림의 동경으로 보인다. 동양화 고유의 표현기법을 회복시키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감각’으로 밀고 나가고자 한다. 문제는 그 감각이 얼마만큼 지속적이며 정체되지 않고 밀고 나가 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아울러 문기 있는 그림의 실현이란 과연 어떤 것이냐 하는 점도 문제다. 심정적인 공감이나 코스튬으로는 가능하지 않을 텐데, 더구나 지금 우리는 그 문화로부터 너무 멀리 벗어나 있기에 어떠한 체득이 가능할지는 무척 곤혹스러운 문제다. 그것을 감각으로 내포하기에는 어림없는 일이기에 그렇다.●

김선형은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동양화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8년 첫 개인전을 시작하여 국내외에서 51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현재 국립경인교대 미술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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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Review] 염성순

미로화된 욕망의 회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유동하는 것들. 그러나 미묘하고 조심스러운 움직임의 차이.이는 작가 염성순의 작품에 보이는 세계이다. 최근 갤러리 담에서 열린 작가의 전시 〈털〉(7.9~22)은 털끝만큼의 미세한 차이의 경계를 넘는 작가만의 방법을 보여준다. 여성과 남성의 몸을 통해 주체를 탐구하며 반복되는 경계넘기를 시도하는 작가를 지금 만나보자.

이선영  미술비평

염성순의 최근 전시 <털-심층의 표면에서 생긴 일>은 본질과 현상, 내부와 외부, 정신과 물질 등으로 구별되지 않는 하나의 실재로서의 몸과 거기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표현한다. 복잡 미묘한 과정에서 생성된 풍부한 색감, 그것에 실린 유동적이고 유기체적인 형태는 염성순 그림의 특징이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신체의 일부인 ‘털(hair)’을 특정하고, 남성과 여성의 성기관이 등장하는 등 보다 구체적인 접근을 꾀한다. 붓과 자신을 일체화한 삶 이래, 모호하고 추상적이기보다는 더 분명하고 특수한 양상을 띠는 작품에서 진정한 진보를 발견한다. 그것은 선택된 일부에도 전체를 담을 수 있는 역량이며, 반복 속에 차이를 주는 방식이다. 어떤 경계를 뚫고 나오는 털은 유연하면서도 강력하다. 털은 때가 되어 경계를 파열하는 필연적인 힘이지만, 그 목적과 방향이 확실한 것은 아니다. 붓의 털끝에서 나오는 이 산물은 생명은 물론 작업의 기제를 알려준다. 작가는 생명을 이루는 이런저런 물질에서 생명체로의 도약, 작업을 이루는 이런저런 요소에서 작품으로의 도약을 촉구하고 그것을 기다린다. 경계란 곧장 경계 넘기를 예기한다. 경계 넘기가 가능한 힘은 말 그대로 털끝만큼의 미세한 차이일 수 있다. 필생의 업으로 그림 그리기를 선택한 이에게도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매순간의 도전과 그 도전의 연속이 바로 작품이다.
작업이란 늘상 작업자를 어떤 경계까지 몰아붙이는 흥미진진하고도 위험한 게임임을 염두에 둘 때, 털은 피상적인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포괄하고 내포하는 바는 풍부하다. 이 전시에서 털은 인간의 특징인 머리털을 제외한 체모로, 인간보다 더 근저에 있는 동물성과 닿아있다. 작품〈   털〉은 방향을 달리하면 대지 안팎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과정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엉덩이 라인은 둔덕이 되고 털은 식물이 되며 그 바깥은 노을 지는 하늘처럼 말이다. 몸은 화면 가득 펼쳐진 풍경(bodyscape)이 된다. 움푹 패이고 텅 빈 부분이 있는 등, 밀도와 강도는 부분마다 다르다. 동식물을 구별할 수 없는 형태에 생기다만 것들, 막 생긴 것들, 밖으로 터져 나가는 것들이 공존하며, 이러한 시간성에 의해 정지된 화면은 잠재적인 움직임으로 가득하다. 작품〈  털이 좋아〉는 알 속의 상황인데 이미 유동체를 넘어서 털로 뒤덮인 단계에 이르렀지만, 바깥을 두려워하는 표정과 몸짓이 역력하다. 알을 깨고 나갈 두려움 때문에 모체 속의 아이는 이미 폭삭 늙어버렸다. 〈  털이 좋아〉와 같은 크기의 짝으로 제작된 〈   알에서 나오다〉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결국 바깥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과정이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삶은 냉혹하게 시작된다. 〈   알에서 나오다〉는 모호한 형상에 의해 시간과 그에 따른 인과적 순서가 교란된다.
엉덩이로 추정되는 선 사이의 형상은 태아보다는 남근을 닮았다. 화면 왼쪽 아래에 아이 머리를 한 형상이 육체의 심연 속에서 바깥을 향해 떠있으며, 나오는 중인지 들어가는 중인지 불확실한 상황이 그런 추정을 가능케 한다. 안과 밖의 경계가 느슨한 채 출렁거리는 모체는 점점이 뿌려진 색채의 입자와 더불어 생명의 율동으로 충전된다. 성(性)은 모호하지만, 비교적 명확한 해부학적 형태 위에 뭉침이나 확산 같은 힘의 분포가 두드러진 작품〈   몸〉과〈  엉덩이〉는 물질과 에너지의 상호교환이 활발하다. 뭉쳐진 피톨이나 예민한 신경망의 밀집은 심신을 동시에 활성화한다. 작품〈   끓는 남자〉, 〈    통증〉, 〈  우는 남자〉, 〈    쓸쓸한 남자〉에는 남성이 분명히 드러난다. 털이 남성에게 좀 더 많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털 전>은 여성의 관점으로 본 (남성적) 욕망의 모습이 상당 부분 차지한다. 여기에서 남성의 곧추 선 욕망에 가득한 고독과 고통은 숨길 수 없다. 그림 속의 남근은 지배적 질서에 군림하는 위풍당당한 기표(Phallus)로서의 위상을 잃었다. 거기에는 거듭 좌절될 수밖에 없는 출구 없는 욕망의 드라마가 있을 뿐이다. 〈   숲〉과〈  꽃숲〉으로 나타나는 여성화된 풍경은 하나의 성 기관에 밀집된 욕망이 아니라, 다형적(polymorpho usly)이다. 다형적 성은 성도착자의 성이기보다는 유아에게 보편적이며 여성적인 성욕으로 알려져 있다.
타자가 된 주체
작품〈  여성 속 남자〉는 거세된 존재로서 부재나 결핍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양성을 포괄하는 존재로서의 여성이며, 같은 크기의 작품〈  초록색 털〉은 모체 속 개체를 초록빛 자연과 일치시킨다. 모든 욕망이 충족되는 전능한 모체 속에서 바깥을 두려워하는 작품〈  털이 좋아〉는 털 자체는 명확히 보이지 않지만 부드러운 보호막으로서의 모체를 연상시킨다. 이 모태적 시공 속에는 생멸하는 존재들이 똬리를 틀고 있다. 자궁으로부터 집까지 여성의 영역은 육체적, 물질적, 심리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장소이다. 그러나 모성천국에 대한 생각은 일방적일 수 있다. 품고 보살펴야 하는 존재는 고달프다. 여성은 모성을 단지 아이를 안고 있는 무성(無性)의 천사 같은 존재로만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권력관계로 점철된 인간사의 사회적 모순을 편리하게 해결하는 방식 중의 하나가 한쪽 성에 자연적 조화와 통일을 기대하면서 영원한 휴식처를 갈구하는 것이다. 비역사적 타자로서의 그녀는 선천적으로 갖추어야 할 미덕이 기대되지만, 이러한 숭고한 가치는 곧잘 아전인수적으로 왜곡된다. 여성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인류를 낳는 존재이기에 굳이 예술이나 과학을 비롯한 창조 활동을 할 필요가 없다는 편협한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꼭 필요한 것을 생산하는 이에게 적반하장으로 가해지는 불리한 조건은 여성, 예술가, 노동자의 존재에서 선명하다.
그들은 다수이면서도 소수자의 위치에 있다. 다수적 소수자임에도 불구하고 창조하고 생산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아름답다기보다는 기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의식이라는 주체 내부의 타자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여전히 성(욕)을 남성 중심적으로 이해했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거세된 듯 보이는 여성의 성 기관, 나아가 여성의 공간으로 간주된 집을 기괴함(unheimliche)의 원천으로 여겼다. (여성적)기괴함은 섬뜩하면서도 매력적이라는 양가감정을 일으킨다. 가장 일상적인 것 속에서 발견되는 비일상적인 감정은 경계 위에 있는 것이며, 금기와 위반, 정상과 이상, 성스러움과 혐오스러움 같은 상반되는 가치를 넘나든다. 그것은 크리스테바가 개념화한 ‘탈중심화된 주체(decentered subject)’와 ‘이행 대상(transi- tional object)’과 밀접하다. 경계를 뚫고 흘러내리는 것들은 육체적 차원에서든 심리적 차원에서든 제어되어야 할 금기지만, 동시에 카타르시스와 희열을 준다. 한계를 뚫고 터져 나오는 체액들은 오염과 정화를 동시에 야기한다. 가로질러지기 위해서만 설정된 경계 위에서 털은 다양한 은유로 확장된다. ‘어브젝션(abjection)에 관한 에세이’라는 부제를 가진 크리스테바의《  공포의 힘》에 의하면, 비체(abjection, 卑體)는 경계상에 있는 것, 경계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비체는 애매모호하며, 어중간하며, 복합적이다.
비체는 본질적인 특성이 아니라, 경계와의 관계이며 경계지역 밖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그것은 구분 자체를 위협함으로써 정체성을 교란시킨다. 원형적 비체의 체험은 출생, 즉 염성순의 작품에도 선명한 출산의 이미지이다. 인간은 배설물 사이에서 태어난다. 배설물은 깨끗함과 더러움을 구별하는 질서에 의해 분류되고 관리되지만, 여전히 위협적이다. 가령 모성적 용기(容器)는 개체를 다시 빨아들일 수도 있는 두려운 것이다. 주체화 과정을 시작하기 위해, 아이는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독립되지 못하면 비체에 삼켜진다. 염성순의 작품〈  여성 속의 남자〉에도 욕망과 삼키는 것의 관계가 나타난다. 탄생과 양육과 보호를 암시하는 자궁은 동시에 탐욕스러운 육식성 질(carnivorous vagina)이기도 하다. 욕망과 죽음은 한 몸의 두 얼굴일 것이다. 작품〈   알에서 나오다〉에서 몸의 실루엣과 체내의 상황이 공존하는데, 여기에는 어머니와의 태곳적 관계를 떠오르게 하는 태반의 이미지가 발견된다. 제 몸에 타자를 품을 수 있도록 하는 이 기관은 창조활동에 대한 오랜 비유의 터전이었다. 모체로부터의 분리는 육체적인 것을 넘어 정신적(상징적) 차원으로 이어진다.
모태로부터의 분리와 부성적 상징의 일체화로 압축될 수 있는 개체화(주체화) 과정은 소외의 연속이며 험난한 과정이다. 막 나온 태아보다는 남근처럼 보이는 모호한 형상은 나온 곳으로 들어가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것은 (성적) 욕망과 죽음의 관계를 떠오르게 한다. 예술적 창조 역시 늘 가까이에 있는 죽음과 더불어 채울 수 없는 욕망을 갈구하는 행위일 것이다. 염성순의 작품에 줄곧 나타나는 부글거리고 뭉글거리며 생성 소멸하는 유동적 형태는 경계를 넘기 위해서만 경계를 설정하며, ‘털’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직선적 요소는 2008년에 이상과 서정주의 시(詩)세계를 주제로 한 개인전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가 이번 전시에서도〈  여성 속 남자〉와〈  초록색 털〉에서 발견되지만, 여전히 곡선적 요소가 압도적이다. 곡선적 요소는 계속 출렁거리면서 무엇이 되든 자연발생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염성순을 뛰어난 색채화가라고 규정해도 될 법한 이름붙일 수 없는 색채의 구사 역시 같은 맥락이다. 작업 과정에서의 이러한 예측불가성은 환희이자 고통이다. 양자는 서로에게 속해 있다. 예술은 자신으로부터 나왔음에도 낯설다. 작품이란 동일자의 복제도 분신도 아니다. 그것은 타자이다. 아무런 거부반응 없이 자신 속에 타자를 품는 모성처럼 그렇게 타자와 조우하는 것이다. 무엇이 생겨날지 가늠할 수 없는 화폭은 타자를 품고 있는 모체에 근접한다.
이성적이며 합리적이고 자유의지를 가진 자율적 개인이라는 인본주의적 이상만큼 염성순의 작품과 멀리 떨어진 것은 없다. 몸 자체가 동일자적 이성에 의해 타자로 간주되어왔다. 몸은 계층적으로 잘 질서 지워진 조직화된 유기체가 아니다. 그것은 ‘속도와 강도로서의 표면’, 즉 ‘기관 없는 몸’(들뢰즈와 가타리)이다. 염성순의 작품은 발생하는 배아의 이미지로 가득한데, 기관 없는 몸의 대표적인 예는 기능으로 성충이 되기 이전의 알(卵)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  천개의 고원》에서 인간을 가장 직접적으로 구속하는 세 개의 지층으로 유기체, 의미생성, 주체화를 든다. 저자들에 의하면 기관 없는 몸으로 유기체를 해체하는 것은 탈영토화를 향해 몸체를 여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몸과 예술은 ‘욕망들의 연결접속, 흐름들의 접합접속, 강렬함들의 연속체’로서 진정한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물론 이번 전시는 그 어느때보다도 기관이 명확하게 드러나지만, 비율과 맥락과 의미가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몸체에 충전된 강렬함은 계층화된 모든 형식을 변형시킨다. 유동적인 색채와 형태는 바로 끝없이 변신 중인 주체를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패임이나 구멍, 흩뿌려짐 등으로 나타난 수수께끼 같은 공간 역시 주체 내부의 거대한 미지의 공간들을 암시한다. 이곳에 타자가 또는 타자와 접속할 수 있는 장이다. 예술이란 결코 변할 수 없는 자신만의 진실을 표현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없이는 결코 고정시킬 수 없는 끝없는 변화의 흐름을 순간적이나마 기념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

염성순은 1961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다. 조선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베르사유 미대에서 수학했다. 1994년 경인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을 시작으로 10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고 일민미술관, 제주항 여객터미널,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갤러리 담 개인전 광경.  왼쪽·〈알에서 나오다〉 캔버스에 아크릴162×162cm 2014 오른쪽·〈털이 좋아〉 캔버스에 아크릴 162×162cm 2014

갤러리 담 개인전 광경. 왼쪽·〈알에서 나오다〉 캔버스에 아크릴162×162cm 2014 오른쪽·〈털이 좋아〉 캔버스에 아크릴 162×162cm 2014

 

 

[Review]홍승혜 – 회상

홍승혜  __  회상

국제갤러리 7.10~8.17

단테가 베아트리체의 아름다움에 감동하여 한 편의 소네트를 썼다. 한 편의 소네트를 쓴 후  “지난번 소네트를 끝내고 나니, 나는 또 시를 쓰고픈 욕망에 사로잡혔다”며 다른 한 편을 쓰게 되었고, 이어서 또 한 편을 썼다. 단테가 시를 쓰게 된 애초의 동기가 베아트리체의 아름다움이었다면 그 다음 작품을 쓰게 된 동기와 소재, 적어도 그 일부는, 자신의 시 자체였을 것이다. 홍승혜의 개인전 <회상>이 열리는 갤러리 1층에 들어서면 발밑에 나지막하게 작은 글자 조각들이 서있다. M.O.R.E. 잠깐 웃음이 터지는데, 일단 ‘미니멀’한 기하학과 상충하는 단어인데다가, 단테 같은 시인이 시를 쓰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힌 채 ‘더, 더’를 조용히 되뇌고 있는 듯해서다.
<회상>은 홍승혜의 과거 개인전들을 모태로 한다. <유기적 기하학> (1997) (2000), <복선을 넘어서>(2004)(2006), <파편>(2008), <온 앤 오프(On & Off)>(2008), <음악의 헌정>(2009), <프레임의 모든 것>(2010) 등의 전시에서 몇 작품씩 뽑아 크기와 재료를 달리하고 그레이스케일로 처리했다. 회고전인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회고전 형식을 빌린 신작 전시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홍승혜는 그동안 자신의 이전 작업에서 모티프를 따오는 방법을 지속적으로 써왔다. 미술이 아름다움의 재현이란 사명에 치중하지 않게 된 이후 현대미술가들은 줄곧 다른 작가의 작업들 또는 자신의 작업을 새로운 작업의 ‘레퍼런스(reference)’로 삼아왔는데, 홍승혜는 이를 의식적인 방법론으로 택한 것이다. 이번 전시는 회상이라는 복고적이고 온건한 간판을 내건 그녀의 좀 더 급진적인 제스처다.
이번 전시의 제목 <회상(reminiscence)>을 보자. ‘reminisce’라는 단어는 간단히 말해 recollect(역시 ‘회상하다’라는 의미) + 어떤 정서이다. 예를 들어 미소와 함께, 또는 향수 어린 마음으로 과거를 돌이키는 것이다. 만약 이번 전시에서 어떤 정서가 느껴진다면 그건 홍승혜가 그런 정서를 표현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음악적’ 방법론으로 인한 어떤 결과에 가까울 것이다. 푸가로 대표되는 대위법은 홍승혜의 오랜 관심의 대상이고, 반복과 변주는 그녀의 조형적 방법론의 레퍼런스가 되었다. 이번 전시에서 기존의 영상작업 <센티멘탈> 연작 중 6편을 추려 흑백으로 변형한 후 설치한 대규모 영상작업 <6성 리체르카레>는 바흐의 ‘음악의 헌정’ 중 절정에 해당하는 6성 푸가의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홍승혜는 이번 전시와 관련하여 “돌이켜 보면, 나는 늘 돌이켜 보고 있었다”라고 고백한다. 인간의 기억은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능동적인 것이다. 과거의 일을 변형시키고 삭제하고 수정한다. 그리고 프레임을 부여한다. 즉 회상은 형체가 없는 과거라는 무정형의 덩어리에 프레임을 주어 잠시 고정시키는 행위이다. 그래서 현재라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 안에 위치시킨 후 응시한다. 결국 회상의 목적과 결과는 모두 응시이다. 홍승혜는 <회상>에서 음악적 방법론으로 변용하고 프레임을 준 이전 작업을 새로운 공간에, 새로운 작업으로 위치시킨다. 이 중 몇 작업은 기시감과 낯섦을 사이를 오가게 하며 먹먹한 응시를 낳는데 서랍을 연상시키던 평면작업에서 서랍으로 태어난 한 쌍의 <춤추는 서랍>은 움직이던 뭔가가 얼어붙듯 멈추었을 때의 기이한 정적을 자아내며 시선을 붙든다. 붉은색이 사라져버린, 날개를 단 듯한 <온 앤 오프>는 공중에서 연상과는 무관한 일루전을 자아낸다. 아직 관객이 들지 않은 어느 아침, <6성 리체르카레>에서 군무하는 6개의 영상은 그 사이 어딘가 어둠 속으로의 응시를 낳는다. ‘센티멘탈’의 회상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우리는 시간과 위치를 알 수 없는 깊고 오랜, 그러나 낯선 풍경 속으로 전치되는 듯하다. 이 느낌은 ‘센티멘탈’이 아니라 ‘서블라임(sublime)’에 가깝다.

박상미・Thomas Park 갤러리 대표

[Review]가면의 고백

가면의 고백

서울대학교미술관 7.10~9.14

“사실 고백의 본질은 불가능입니다. 누구도 자신의 진짜 얼굴을 차마 내놓지 못합니다. 다만 살까지 파고든 가면만이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 미시마 유키오
미디어시대에 고백의 의미를 짚어보는 <가면의 고백전>은 시작부터 다소 도발적이다. “불특정 다수에게 드러내는 ‘나’의 고백은 너무나도 유희적이고 가벼우며 공격적이다.” 혹은 “미디어시대의 고백은 진실한 내면은 감춰두고, 매끈하게 정돈된 모습만을 보여준다”라는 지적은 SNS 유저가 아닐지라도 전시장을 도는 내내 뜨끔거리게 만든다.
전시는 네 개의 섹션(프롤로그, ‘가짜 사건을 고백하는 자’, ‘고백을 엿보는 자’, 에필로그)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 중앙에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이 걸린 작은 방이 위치한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거미줄을 치듯 가운데에 웅크린 채로 다른 작품들과 연결되어 있기에 거미 형상을 한 그녀의 대표작 <마망>을 떠올리게 한다. “전제군주”와도 같았던 아버지의 외도, 어머니에 대한 연민 등 자신의 상처와 대면한 자전적인 작업은 ‘고백 예술’이라고도 불린다. 그녀가 유년기의 상처를 자신의 옷과 사용하던 천을 잘라 아름다운 문양으로 풀어냈다면, 정문경은 누구나 귀엽다고 인정하는 천 인형을 뒤집어서 바느질의 너덜너덜한 부분을 내보인다. 단지 안팎만 뒤집었을 뿐인데 푸우와 도널드 덕은 공포영화의 주인공처럼 기괴하다. 만약 누군가의 고백이 아름답지 않다면 과연 우리는 그것을 마주하고 싶을까, 듣는 사람의 마음을 고려해 너무 무겁지 않게 정리된 고백이 꼭 질타를 받아야 하는 것인가. 정문경의 인형은 고백의 형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에 비해 사진을 조합해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보여주는 김아영은 고백을 듣는 자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모래 욕조 속에서 발견된 영국인 교사 2007.3.28>는 2007년에 일본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맨션의 베란다에는 모래가 담긴 욕조가 놓여 있어 마치 영국인 영어 교사가 살해당한 현장을 찍은 것처럼 보인다. 사진을 잘라 붙이고 미니어처를 만들어 다시 찍는 과정을 거친 가짜이지만 쉽게 읽고 버려지는 신문이나 인터넷 기사의, 그 소비성의 본질을 묻는다는 고발의 측면에서는 무엇보다 진짜다. 복잡한 과정을 거치고 시간을 들여 다시 무대 위로 불러온 사건을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마주한다.
고백의 미추(美醜), 진위 여부를 다룬 ‘가짜 사건을 고백하는 자’에 이어 ‘고백을 엿보는 자’에서는 인류가 흔히 앓고 있는 질병인 관음증을 다룬다. 잘못 보기만 해도 죄가 되는 시대에 파리 유학시절 맞은편 건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몰래 찍은 사진을 선보인 예기는 스토커의 형식을 차용한다. 그들에게 ‘쏘피’, ‘쎄실’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때로는 그들의 패션 감각을 칭찬한다. 그녀를 처음 보던 날을 떠올리는 편지 형식의 글을 읽다보면 스토커에 대한 공포보다는 매일 마주하더라도 단절된  관계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은 왜일까? KKHH(강지윤+장근희)의 영상 작업인 <Chasing K>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우리는 나흘째 K씨를 쫓고 있다”고 밝히며, SNS상에서 알게 된 사람을 오프라인에서 따라다닌다.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를 짐작해 보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사생활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지만 실제로 그를 얼마나 알고 있을지, 진심을 털어 놓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인지 하는 의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진실게임에서 진심을 가장 잘 전하는 자는 때로 대답을 하지 않고 벌주를 마신다. SNS상에서 드러낸 나의 모습은 타인의 눈을 의식한 편집된 내면이라는 <가면의 고백전>의 지적은 예리하다. 그렇지만 비단 SNS뿐만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로 날것 그대로의 고백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정제되지 않은 형식의 고백이 꼭 추구되어야 하는 것일까. 루이즈 부르주아가 자신의 고백을 기하학적인 형태나 추상적인 무늬로 풀어내어 많은 이와 교감했듯이 때로는 직접적이지 않거나 아름다워서 고백은 강해진다.
<가면의 고백전> 입구에 걸린 일본인 소설가의 문구를 읽으면서 처음 떠오른 것은 한국의 시인 황인숙의 말이었다. “솔직이란 옷을 입고 저의 삿됨과 속됨과 추함과 비천함을 발산할 것인가, 아니면 제 한 몸 솔직하기를 희생해서 인간 정신의 아름다움과 고귀함과 의로움과 비범함에 봉사할 것인가.” 시인은 라로슈푸코가 후자에 높은 점수를 줬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 역시 세상에 악취를 끼치지 않는 시를 쓰길 원한다. 그냥 가면이 아닌, 살까지 파고든 가면이라면 예술에는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할 그 가면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가면의 고백은 어떤 의미에서 예술의 고백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하자가 없다.

박현정・미술사

 

[Review]천민정 – 행복한 북한아이들

천민정  __  행복한 북한아이들

트렁크갤러리 6.26~7.29

천민정이 이번 전시회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파악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일차적으로 왜 이와 같은 이미지들이 이 시점에 이러한 방식으로 재현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남한의 한 관객으로서 바라보기가 편치 않았다. 이러한 배경에는 전지구화 시대에 북한의 독재정권과 연관된 각종 아이콘들이 흡사 한반도를 대변하는 시각문화의 상징처럼 인지되는 불편한 상황이 존재한다. 북한과 연관된 사진 이미지들이 유수의 국제 사진수상전에서 단골 소재로 등장하고 있고, 김정은이나 김정일은 “황당한”, “미친” 등의 형용사와 동일시되면서 인터넷을 떠돌아다닌다. 이번 베니스 건축비엔날레에서 한국관이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배경에도  북한의 건축물에 대한 막연한 동경, 호기심이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으리라 얼마든지 유추해볼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북한이 한반도 문제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치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떠한 명목에서건 북한의 이미지를 지나치게 선정적으로 다루어 축소하게 되면서 일어나는 부차적인 문제점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반도의 복잡한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를 북한 독재정권이 지닌 기이함으로 단순화하는 데 따른 논란의 소지는 물론이거니와 무엇보다도 결국 북한을 독특한 방식으로 타자화하고 오히려 신비주의화하는 데에 이러한 이미지들이 일조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가 든다. 이와 연관하여 전시 서문은 천 작가 작품 속 북한 어린이들은 불과 50km 남짓 되는 거리에 있는 우리들이 북한에 대하여 얼마나 상투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과연 여기서 ‘우리’를 일반화할 수 있을까? 개인 차이가 확연히 존재하지만 국내에 탈북자 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매체를 통해서 암암리에 북한의 삶의 모습을 접하는 일이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필자는 천작가의 사진과 회화에서 ‘김시운’과 ‘김시아’라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작가의 아들, 딸들이 완벽히 유형화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지나치게 활기 차 보이고 오히려 자유분방해 보이는 딸의 모습은 인종적으로나 제스처에 있어서 경직된 북한 어린이의 모습을 완벽히 재생하는 데에 실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부채꼴의 태양은 마오의 태양보다는 선 메이드(건포도 상표)의 배경을 연상시켰다. 여기서 실패한 모방의 결과는 또 다른 미학적인 가능성과 문제점을 던져진다. 뒤쪽의 매스게임과 앞쪽 어린이들, 그리고 단체 유니폼이 어색해 보이는 시점에서 천 작가의 작업은 이것이 더욱더 연극적이며 반어법적인 상황(이들은 행복한가?)이라는 점을 각인시켜준다. 나아가서 북한 어린이가 직면한 현실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을 환기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천 작가의 작업을 보면서 착잡해졌다. 과연 진정으로 북한의 어린아이들이 처한 현실이란 무엇일까?
과연 예술이 타자에 대한 연민을 그 출발점으로 해서 타자를 재현하고 연기하면서, 그것도 북한 어린이들을 연기하면서 어떠한 사회적, 정치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까? 행복한 북한의 어린이들은 북한 어린이들에 대하여 무감각하고 무지하였던 우리의 처지를 돌아보게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 여기서 파생되는 불편함은 단순히 자기비판의 부산물만은 아니다. 이 불편함은 북한 어린이라는 민감한 소재, 그리고 누가 그들을 위하여 종을 울려야 할지에 대한 복잡한 심정으로부터 기인했다.

고동연・미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