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박진화 – 강화發-분단의 몸

박진화  __  강화發-분단의 몸

성곡미술관 8.29~11.30

박진화의 회화적 힘은 산불처럼 뜨거웠다. 구조적이면서 때때로 위압적이기도 한 화이트 큐브를 뒤흔들 수 있는 회화는 많지 않을 것이다. 역설적일지 모르겠으나, 20세기 회화는 화이트 큐브에 ‘모던하게’ 적응하면서 존재감을 키웠다. 미니멀과 팝과 극사실 작품들이 화이트 큐브에서 극찬 받은 것은 그것이 화이트 큐브와의 전시적 효과를 극대화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박진화의 회화적 불은 그러나 태생적일 만큼 강렬하고 거칠다. 그것은 마치 가시나무나 떨기나무에 붙은 야훼의 불처럼 살아있다.
전시를 둘러본 뒤, 다시 도입부로 가 <그 너머2>를 보았을 때 나는 그 불의 시작이 1980년대와 맞닿아 있음을 직감했다. 그것이 실제로는 불의 형상이 아닐지라도 1988년 작 <그 너머2>는 사람과 신과 대지가 한 몸으로 불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불은 광야를 헤매는 자들의 고난과 억압과 순교(희생)와 분노와 절망, 그리고 희망의 예지를 상실하지 않으려는 신념의 강밀도와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이 그림에서 흥미로운 것은 성(聖)과 육(肉)이 이분화 되지 않고 서로 보듬어 안으면서 하나의 불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푸른 하늘이 아니라 ‘하늘’로서 존재하는 자와 땅의 사람으로 존재하는 자들의 혼불!
10년, 20년이 흐르면서 그의 회화는 불의 불길로, 불씨들의 회화적 표현으로, 혼불의 작은 씨알들로 번졌다. 대부분 최근 10년 사이에 그려진 작품들은 불씨들의 붓질과 마티에르는 물론이요, 불씨들의 생명 에너지로 충만하다. 그리고 그 생명의 에너지는 이 세계를 이루는 빛의 색들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생명의 존재들이 각기 하나하나의 불(씨)을 터뜨려야만 가능한 일일 터. 그렇다면 박진화의 불(씨)과 상징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올해 제작된 <사인여천-무량화(事人如天-無量花)>가 하나의 단서가 될 것이다. 주지하듯 ‘사인여천’은 동학의 2대 교주였던 최시형(崔時亨) 선생이 동학의 시천주사상(侍天主思想)에 의거해서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고 말한 것에서 비롯된다. 또한 동학의 21자 삼칠주(三七呪)는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로 이뤄졌고 여기서 시천주사상이 발원하는데, 그 뜻을 풀면 다음과 같다. “지극하고 신령한 기운이여/ 내 안에 내려 지피소서,/ 그 맑고 밝은 신령이여/ 청하고 비오니/ 내 안에서 크게 지피소서./ 한 얼을 깨달아 모시니/ 무궁한 천지에 얼나 하나 마음,/ 생각하고 생각하여 잊지 않으리니/ 모든 앎이 하나 마음”    (필자 역).
박진화의 화면을 가득 메운 색, 그것이 사람이든 신이든 자연이든 우주이든 하나의 불씨로 존재한다고 할 때 그것의 실체는 ‘지극하고 신령한 기운’이다. 그 기운이 존재의 내부에서 맑고 밝게 지펴진 상태를 우리는 보고 있다. 올해는 동학 창시 120주년이 되는 해다. 최제우(崔濟愚) 선생은 동학 이후 두 갑자 뒤에 새 세상이 열린다고 했다. 그렇다면 박진화의 회화는 예지의 현실태일 수 있다. 이 땅의 사람들이 한 얼로서 신령한 기운을 터뜨려 새 세상을 열고 있는 상태로서.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아직 그 불씨조차 살리지 못하는 정치적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김종길·경기문화재단 정책개발팀장

 

[Review] 김태곤 – Mystic Flower Garden

김태곤  __  Mystic Flower Garden

갤러리W가회 9.26~10.10

김태곤의 ‘신비한 화원’전은 시각과 촉각, 이미지와 문자 이미지의 관계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주제로 작업하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유희적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싱겁고 담담한 스타일의 작업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다보니 작가가 작품의 이면에 깔고 있는 생각을 간과하기 쉽다. 언뜻 추상적인 조형요소로 구성되었는데, 사실 조형적 연출이라고 생각한 요소들이 시각장애인의 소통수단인 ‘점자’들이다. 또 이 점자들은 모두 작가가 생각하는 예술과 삶의 관계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작품들 가운데 ‘로고스 라이트 윈드 블룸(logos light wind bloom’은 이번 작업을 위한 작가의 기본적인 예술관, 세계관, 인간관을 표현하고 있다. 구약의 ‘태초에 말씀(logos)이 있었다.’ 이후 지구생태계에 꼭 필요한 에너지를 제공하는 빛과 숨 쉴 수 있는 대기와 그럼으로써 생명을 꽃피우는 것을 표현했다.
한편 점자로 표현된 꽃말을 담담하게 그려낸 회화들은 김태곤 작가가 기존 작업에서 조형적 표현을 절제하여 좀 더 사색적인 방향으로 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이번 전시는 시적인 뉘앙스와 영적 태도를 융합하는 시도처럼 보이는데, 제목 그대로 비의적인 신비의 차원에서 이미지와 메시지가 만나고 있다. 작가는 특별한 조건에서 의사소통을 위해 고안된 기능어인 점자를 이미지와 메시지, 감각과 의미의 관계를 성찰하는 데 이용한다.
작가는 전통적인 은유와 상징으로서의 이미지에 대해 다른 시각을 제시하려고 한다. 코드화 한 점자는 촉각이 아닌 시각에 의존하는 평균적인 조건의 사람들에게는 해석되지 않는 무의미한 이미지로 보인다. 마치 도시의 야경이나 네온을 표현한 것처럼 보이거나 아니면 반딧불이와 같은 풀벌레가 날아다니는 자연의 풍경 같기도 한 이미지들이 시각장애인을 위해 꽃말을 표현한 점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눈앞의 이미지들이 다른 차원의 이야기 맥락에 놓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주 구체적인 점자이미지와 그것이 전혀 독해되지 않는 추상의 세계가 만나는 신비를 경험하는 것이다.
오늘날 못 믿을 것이 인간의 감각인 것처럼 인간의 언어 또한 신뢰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인간의 눈을 속이는 다양한 기술이 전통적인 회화의 기술로 전승되었다. 그리고 많은 예술가에 의해 인간의 감각은 물론 인간의 사유를 교란하고 충격을 주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이렇게 싱거우면서도 담담한 태도로 일반적인 이미지와 메시지의 관계를 교란하고 비평하는 것은 현대미술이 이루어온 주요한 성과 중 하나이다. 자신의 확신이 흔들리고 교란되며 인간은 과거 인류의 조상이 그러했듯 교만하지 않고 반성적인 태도를 경험하는 것이다. 해맑은 분위기로 꽃말을 의미하는 점자를 전면에 내놓고 작가는 회화이미지가 어떠해야 할지 숙고한다. 그것은 현대미술과 올바른 삶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무한한 이미지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사회에서, 도덕과 윤리가 바닥을 치는 세계에서 인류의 문화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회화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김노암·문화역서울284 예술감독

[Review] 홍지연 – 사건의 재구성

홍지연  __  사건의 재구성

가회동60 10.8~26

1990년대 후반 미술사 인형 연작, 가면 연작 등 팝적인 이미지의 설치작업을 발표하며 등장한 홍지연이 이후 민화 이미지를 차용한 회화작업에 매진한 지  10여 년이 되었다. 1990년대 이른바 ‘신세대’ 문화라고 지칭할 만한 현상에서 두각을 보였던 홍지연이 어느덧 설치작업 10년, 회화작업 10년, 총 20년 화력을 회고하는 시점에 이른 것이다.
1990년대는 앞선 시대의 억압적 정치 현실에서 벗어난 한국의 청년세대가 소비사회와 대중문화의 새로운 감각을 가볍고 경쾌하게 즐기기 시작한 ‘신세대문화’ 의 기점으로 언급된다. 대학생 집단 내에서는 학생들의 정치사회적인 개입과 관심이 퇴로하면서 뚜렷한 분기점을 형성하는 지점으로 언급된다. 1990년대 전반 홍익대에서 미술을 전공한 홍지연은 진중한 민족의식과 사회적 부채의식에서 벗어난 첫 세대의 작가였던 셈이다.
1990년대의 신세대는 가볍고 경쾌하게 대중문화 시대의 시각이미지를 즐기기 시작했고, 이 시기에 청년기를 보낸 홍지연은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의 구분을 막론하고 팝적인 이미지, 키치적인 혼성에 주목하여 1990년대 후반부터 10여 년간을 설치작업에, 이후 10여 년간을 민화작업에 매진해왔다. 설치와 회화, 입체와 평면을 막론하고 홍지연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지점은 익숙하고 평범한 이미지, 이미 완성되어 무수히 복제되고 흔하게 통용되는 이미지에 있었다. 그것이 서양의 경우라면 미술사의 유명한 걸작 이미지, 대중문화 시대의 폭주하는 시각영상의 이미지일 것이며, 동양의 경우라면 민속미술의 영역에 속하는 민화의 이미지일 것이다. 홍지연은 이미 너무도 익숙하여 하나의 클리셰가 되어버린 이미지에 꾸준히 관심을 보였다.
언뜻 그의 그림은 흔히 보던 민화 이미지의 재연처럼 보인다. 달이 있고, 해가 있고, 모란과 연꽃, 원앙과 기러기, 잉어와 나비, 복숭아와 호랑이, 매화와 곤충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홍지연이 이런 이미지들을 가지고 지난 10여 년간 지속적으로 그림 그리는 재미를 잃지 않았던 것은 그러한 이미지들이 작동되고 구성되는 방식을 스스로 만들어냈기 때문으로 보인다. 평범한 민화의 모티프들은 그가 최근 깊은 인상을 받은 ‘힉스 입자’를 설명하기도 하고, 소셜 네트워크상에서 꼬리를 물고 말이 퍼져나가는 상황을 재연하기도 하며, 일인 주거 시대의 고립된 존재들을 시각화하는 방편이 되기도 한다. 익숙한 레디메이드의 민화 모티프들은 홍지연의 이미지 폴더 속에 차곡차곡 저장됐다가, 그가 소환하는 대로 불려나와 천연덕스럽게 새로운 민화의 시스템으로 재구성된다. 상투적인 이미지들이지만 개인적인 기억을 풀어내는 방식이 되기도 하고 사회적인 코멘트의 통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21세기 홍지연식 버전으로 재활용된 민화의 모티프들은 민화를 표현의 도구로 삼은 그가 민화의 작동 시스템을 몸에 익혀 자신의 이야기를 능숙하게 풀어내는 도구로 삼기도 하고 흥미진진하게 화면을 구성하는 토대로 삼으면서 제대로 리뉴얼되었다. 농익은 원색의 향연으로 펼쳐지는 홍지연의 정밀한 민화 연작은 이러한 ‘민화의 재구성’이라는 방식으로 구동되고 있으며, 무엇보다 그것이 작가 자신에게 그림 그리는 기쁨을 주었으며 회화적 구성의 기본적인 룰이 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권영진·미술사

[Review] 이주형 – Grid Landscape

이주형  __  Grid Landscape

갤러리 인덱스 10.8~20

이주형은 근작 <Grid Landscape>(2012~)에서 작가 특유의 고즈넉하고 적적한 풍경을 내놓는다. 수평과 수직의 선분 사이로 비치는 하늘과 산과 강은 같은 것이 반복되는 단조로운 풍경인 것 같지만 언젠가 그 장소에 한 번쯤은 서 있었던 것 같은 기시감을 안겨준다. 창의 프레임이 없었더라면 평범한 풍경이다. 카메라의 프레임과 창틀, 두 겹의 프레임을 통해서 돌연 삶의 한 모퉁이를 보여주는 것 같은 이 작품은 창문 앞에 서 있었을 개별 존재들의 긴 여운을 모아낸 듯 미묘한 밝기를 끌어올리고 있다. 무엇보다 이미지의 경제성을 존중하는 작가이기에 단정하게 다듬은 화면은 과장됨이 없이 균형 잡힌 형태 속에서 단단하고 압축된 풍경을 확보하고 있다.
그런데 이 풍경 연작은 창의 블라인드와 커튼, 가림막에 가려져 있다. 드러내면서 감추고, 투과되면서 스며들고, 흐르면서 차단되는 빛의 변주는 수평과 수직의 틈의 경계에서 모호하게 이뤄진다. 부분이 전체가 되고 전체가 부분이 되며 매우 평면적으로 보이지만 분명 어떤 ‘장소’를 염두에 둔다. 그 ‘장소’란 원근법의 도움으로 뒤로 물러나 하나로 고정되는 시각적 환영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현시(現示)되는 세계이다. 유일무이한 내가 서 있는 장소에서 바라본 ‘이 풍경’인 것이다. 어디에나 있는 유리 창문 너머의 ‘한 풍경’이 아니다. ‘이 풍경’이 ‘한 풍경’이 될 때 내게만 단독적인 풍경은 수만의 풍경으로 희미해지지만, 내게만 보이는 ‘이 풍경’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바람과 햇볕과 그림자가 만들어낸 표상이 된다. 어쩌면 풍경(風景)사진은 이 단어의 함의처럼, ‘바람이 만들어낸 경관’ ‘바람과 햇볕’이 담긴 사진일지도 모른다. 바람과 빛을 포착한다는 것은 창의 바깥과 안의 충돌이 빚어낸 흔적을 기입하는 일이다. 그리드로 분할되어 형과 색을 최소화한 미니멀한 이 풍경이 갇혀있지만 바깥으로 무한히 확장되어 보이는 이유이다. 바깥으로 향하면서 안으로 열려있고, 바깥이 들어오게 하면서 안을 비우는 것. 풍경을 개념화하고 일반화하기에 바쁜 시각 위주의 우월한 주체는 오직         ‘TTL’(사진용어 Through The Lens)에 의한 빛의 양을 계산하겠지만, 이주형의 시선은 개방된 조리개처럼 빛의 밀도를 최대한 집적했다. 땅의 경관을 뜻하는 영어의 ‘Land Scape’의 한정된 의미만으로는 이주형의 사진은 도무지 해독되지 않는다. ‘이’ 풍경은 ‘그’ 장소에 있어야 비로소 열리는 풍경이기에.
최연하·스페이스22 큐레이터

 

 

[Review] 하태범 – White-시선 White-Line of Sight

하태범  __  White-시선 White-Line of Sight

소마드로잉센터 10.9~26

하태범 작가의 개인전이 2014년 가을에 열렸다. 그간 사진과 영상, 설치,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로 <화이트>시리즈 전시를 지속적으로 진행해 온 터라 장르 변화의 색다른 시도는 예측할 수 없었다. 실상 조각을 전공했지만 독일 유학 후 한국에서는 줄곧 작품 결과물을 사진과 영상, 설치로 선보였다. 물론 작업 과정에서 조각적인 요소가 빠져있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조각, 영상, 사진이 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의 발현을 예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번엔 작년과는 또 다른 결과를 이끌어냈다. 통상 작업내용을 관통하는 사유는 일맥상통하지만 결과적으로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조각전시를 이끌어냈다.
이번 전시 역시 화이트의 네거티브 측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으며, 전시 자체에서 다양하게 어우러진 작품들의 화이트는 아름다운 한민족의 색일 수도 있고, 모든 긍정의 의미를 품은 색일 수도 있지만 실상 작가는 그곳에 또 다른 함정이 있음을 실토한다.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어린이 난민구호물자를 모집하는 단체, 직접적이고 물질적인 후원을 바라는 단체 등이 제작한 홍보영상을 가감 없이 작업의 일부로 노출시켰다. 그 영상은 결과적으로 화면 속에 등장하는 아이들에게 연민을 느끼며 바로 그 단체로 연락을 하게끔 편집된다. 하지만 편집구성을 떠나 화면 속의 이미지들을 한 장 한 장 순차적으로 떠올려 본다면 그곳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모두 천진난만한 순수한 얼굴을 하고 있으며, 때로는  ‘내가 못살고 있고, 내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구나’ 라는 인식도 하지 못한 채 즐거운 오후 한때를 보내는 이미지도 종종 만나게 된다.
그간 하태범의 작업은 매스컴에 보도된 자연재해, 전쟁과 같은 재앙을 다루되, 모두 화이트로 탈색하여 그 사진으로 하여금 인간이 느끼게 되는 연민의 감정을 모두 제거했다. 즉, 그 연민의 감정이 화이트에 의해 제거되었지만 탈색되기 이전의 실제 보도이미지를 보게 되더라도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무감각해지는 인간 심리를 포착해 보여주기도 했다.
이번에 새롭게 제작된 총 4점의 화이트 조각은 모두 선진국과 좀 더 잘사는 사람들로부터 지원과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매스컴 광고에서 따온 이미지들이다. 과거엔 인간을 둘러싼 모든 재앙에 무감각한 개개인을 되돌아보게 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특별히 ‘아이들’로 대상을 압축했다. 즉 하나의 대상으로 일관화했다는 것은 그간 온 지구에서 일어난 사고를 무자비하게 채취했던 상황과는 다르다. 그리고 전시된 조각 4점은 모두 난민캠프에서 따온 아이들의 이미지이지만 불쌍해 보인다기보다는 아름답거나, 용맹스럽게 보이기까지 한다.
우리가 접하는 아이들 이미지를 차용한 지원 광고를 통해 모두 ‘돕자’라는 심리를 발현하게 한 자와, 그대로 수용하는 사람,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애처롭게 해서 동조를 끌어내려 아이들의 이미지를 자극적으로 이용하는 자, 또 그것을 외면하는 사람, 이러한 이미지 생산자, 소비자의 메커니즘에서 비켜나 있는 천진무구한 아이들. 이 모두 작가가 느끼고 재현하고 싶었던 감정 선이 아닐까.
올 한 해는 다사다난했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우리가 예술의 영역에서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궁극적으로 반성한 해였다. 이를 계기로 이득을 취하려는 이기적인 어른, 어떠한 특정 외침을 정치적인 이슈로 오해하는 어른, 또 반대로 이를 통해 좀 더 나은 사회로 가자며 따뜻한 메시지를 던지는 어른들…. 우리는 다층적인 각도의 상황을 맞이했다. 이렇듯 하나의 색 혹은 하나의 이슈를 두고, 편협하고 일관된 논의만이 아닌 비록 하나인 것 같지만 그 안엔 무한히 다양한 측면의 상황과 레이어가 공존하고 있음을 각인시키고자 했던 작가의 노력이 지속적으로 빛을 발했으면 한다. <화이트(2012)>, <화이트-사인(2013)>, <화이트-시선(2014)>, 화이트를 둘러싼 우리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고 또 이러한 관념을 뒤틀어 우리 사회에 공존하는 심리를 더욱 심도 있게 이끌어가길 바란다. 벌써부터 또 다른 <화이트-…(….)>시리즈 작업이 궁금해진다.
이은주·아트스페이스 정미소 디렉터

[Review] 박경률 – 2013고합404

박경률  __  2013고합404

커먼센터 10.10~11.9

커먼센터 2층 본 전시의 마지막 방에서, 유리창이 있던 자리에 걸려 마치 엑스레이 필름처럼 내부와 외부를 뒤집은 듯한 겹드로잉의 인상에 대해 나는 이것이 회화에 대한 작가의 관찰과 기록연구의 구조를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글의 불완전함 속에서 작가의 과제를 충실히 옮기는 것이 불가능함을 고백하고 그녀의 회화에 대한 고민을 잠시 회화 밖의 환경에서 동행하며 반쪽짜리 감상을 해보자 마음먹는다.
전시장 입구에서 검은 커튼(혹은 회화)을 마주한 당신은 그것을 열고 들어가기 전 어떤 ‘입장’을 선택할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배우를 볼 것인지, 극을 빌려 구축된 무대의 문제를 관찰할 것인지 말이다. 이번 전시는 법정판례라는 텍스트와 그에 파생하여 펼쳐진 또 다른 영역의 무대, 그리고 추출된 결과로써의 회화, 세 가지의 굴절하는 축을 제시한다. 관객은 동선상 가장 먼저 어떤 글들을 만난다. 매우 중요하고 구체적인 프레파라트로서 이 텍스트는 글이라고 하기에는 제멋대로 부유하는 파편들이지만 주어진 단어 사이의 공백이 비극과 폭력의 서사임을 우리는 직감적으로 안다. ‘사실’과 ‘증거’, 적용된 법령과 피고인의 가정환경, 사건발생 전후의 정황을 묘사하고 있는 법정판례 자료이다. 사건에 대한 가장 이성적인 목적의 텍스트, 윤리적인 판단과 오해를 남기지 않아야 하는 객관적인 자료에서 동사와 형용사만 각각 남긴 종이 14장은 작가의 회화연구와 어떤 방향을 같이한다. 어떤 의미에서       ‘존속살해’라는 충격적 서사보다는, 범죄의 경우 공적인 합의를 위해 가장 객관적으로 묘사하여 사건을 “종결”시켜야만 하는 해부적 목적의 텍스트가 생산된다는 점에서 작가는 주목할 만한 대상의 흡입력을 발견한다. 사건(회화)을 보는 우리는 사건(회화) 밖에 서 있다. 만약 우리가 현실의 비극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가져와 그들의 서사를 확장하고 상상하고 변형하는 결론으로 본 전시를 관람한다면 각 과정의 구성체가 어떤 윤리적인 감정의 표면에서 쉽게 기화되거나 어긋나는 지점에서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본 전시에서 작가의 선택은 회화의 신체 밖으로 걸어 나와 다른 대상의 눈으로, 표면 밑의 회화적 사실과 과제를 관찰하기로 결정한 것 같다. 1층의 둔탁하게 푸른 벽과 인식하기 어려울 만큼 낮은 사운드(<Dramatic>(2014) 사각의 격투기장에서 사고로 선수가 죽은 경기를 모아 만든 영상과 중앙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흐르는 낮은 백색소음의 설치작업)는 극적인 몰입을 유도하는 환경이기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드러나지 않고 적당한 거리의 시각적 청각적 정보를 높낮이 없이 제공함으로써 전시장에 제시된 여러 프레파라트의 편평함을 지지하기도 한다.
박경률은 올해 초 회화가 가지는 “무의식”의 영역, 때로는 애매모호하고 지나치게 남용된  ‘무의식’이라는 본질적 질문을 가지고 질병을 겪고 있는 그의 손님들(치매노인)과 회화의 구조를 실험한 바 있다. 최근 그녀의 몇 가지 실험은 개개의 음으로 곡을 구성하지만 실상 곡의 음계란 무엇이었냐는 치밀한 분석과 분할로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술의 구현, 특히 회화의 문제에서 결과 이전의 과정을 분절하고 분석함으로써 직관과 객관의 변주를 확인하고 동시에 어떻게 그것으로부터 또 다른 굴절과 선택을 시도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작가의 다음 프로젝트에서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작가는 사건을 가져왔지만 사건은 회화의 소재만이 아니라 회화를 보는 눈으로써의 목적에 충실했다.
이단지·인사미술공간 큐레이터

 

[Review] 길초실 – Kiss & Fly

길초실  __  Kiss & Fly

원앤제이갤러리 9.2~10.4

미술은 근대의 발명품이다. 우리는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의 말처럼 근대 이전의 사람들이 생산한 뛰어난 건물들과 사물들을 ‘미술’이라는 제도 안에 차용하여 변형한 것을 미술품이라 부른다. 이는 액자틀 안에 있는 것을 회화로 보이게 만들고, 좌대 위에 있는 것을 조각으로 보이게 만든다. 길초실은 미술 제도의 경계나 관행 탐구에 천착해 왔다. 그의 작품은 조각이 아닌 조각이며, 회화가 아닌 회화가 된다. 이 지점에서 논리적 해설을 요구하는 관객은 갈피를 잃는다.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인 <Kiss&Fly>에서 작가는 일상의 오브제들이 갖는 내적 흔적들을 차용하여 전시 공간이라는 물리적 상황 안에 재배치한다. 3개 층으로 이루어진 갤러리 공간에 헬륨가스를 채운 주황색 라텍스 풍선이 떠 있고, 구릿빛 동전들과 주황색 장미 꽃잎들은 바닥에 흩뿌려져 있다. 계단에는 다양한 형태의 작은 개구리 인형들이 걸터앉아 있다. 수수께끼를 내듯 배치된 오브제들과 함께 작가는 하나의 자작시를 적어 놓는다. 고양이와 개구리, 헬리콥터, 축구 경기, 마이클 잭슨이 일정한 논리적 연결 고리 없이 언급되며, 이 시는 ‘우리, 다시 무모해져 볼까 / 오 복숭아 복숭아 복숭아’로 끝이 난다.
올해 4월, 길초실은 <한 시간 전시One Hour Long Exhibition>라는 퍼포먼스를 행하였다. 관객은 한 시간 동안 설치, 전시, 철수까지 시작과 완료를 모두 진행하는 압축된 전시의 전 과정을 경험하였다. 미리 짜인 극본이나 리허설 없이 일련의 자연스러운 행동들로 구성된 이 프로젝트는 전시라는 관행의 과정을 한 시간 동안 노출한다. 2009년 작품 <The breathtaking>에서 반짝이는 풍선 모양의 붉은 유리 호리병을 놓는다. 이 반짝이는 병 안에는 계룡산에 거주하는 무당들의 입김이 담겨있다. 보이지 않는 믿음과 상상력의 지점들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예술가와 주술사가 유사하다고 말하는 길초실은, 주술사들의 에너지를 모아 자신의 미술작품으로 전환한다.
마르셀 뒤샹이 미술전시장에 변기를 전시했을 때, 우리는 이 변기를  ‘조각’으로 본다. 보는 행위는 사회적, 문화적 과정이며, 인간의 시각 경험은 무수히 복합된 다수의 현실일 뿐이다. 길초실은 사물을 보는 방식에 대한 놀이를 하며, 이를 자신의 ‘미술작품’으로 이름 짓는다. 장소나 물건의 흔적 혹은 역사를 작업에 활용하거나 보이지 않는 요소인 에너지, 공기, 기, 사운드 등을 매개로 하는 그의 작업은 너무도 기묘한 풍경이라 선뜻 판독되지 않는다. 그 조직은 파편화되어 있으며,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길초실은 물체나 풍경 같은 사물이 갖는 내적인 힘을 발견하며 이를 연결시켜 새로운 내러티브를 만든다. 이미지는 자유 연상 작용으로 또 다른 이미지를 불러온다. 이미지와 현실의 일치 여부는 이성이나 논리에 의해 검증되지 않는다. 길초실의 작업은 현실에 대한 해설이 아닌 은유이다. 작가가 만들어 내는 세계에서 일상의 오브제는 미술작품이 되고 미술전시가 된다. 작가에게  전시장은 일상 속 존재들이 새로운 역할극을 펼치는 극장이다. 작가는 관객이 미술을 제 일상으로부터 분리하는 걸 허용하지 않고 관객 스스로의 상상력을 요구한다. 또한 작가는 관객에게 미술의 존재 가치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양지윤·코너아트스페이스 디렉터

 

[Review] 김성윤 – Dead Man

김성윤  __  Dead Man

갤러리 현대 9.30~10.31

김성윤의 두 번째 개인전, <Dead Man>이 갤러리 현대에서 진행 중이다. 젊지만 작업 양이 결코 적지 않은 김성윤은 이 전시에서 기존 작업의 관심을 지속하는 한편으로 약간은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를 통해 김성윤이 보여주려는 것은 무엇일까?
김성윤은 <Authentic>이라는 제목의 지난 개인전에서 19세기 인상주의 화가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 1856~1925)의 기법을 활용하여 초기 근대올림픽 선수 복장을 한 인물들을 그린 연작을 선보인 바 있다. 사전트라는 화가와 초기 근대올림픽 사이에는 시기 외에는 어떤 연관성도 없다. 화가는 이처럼 이질적인 요소를 임의적으로 결합하여, 낭만주의 회화의 통념을 비튼다. 그 통념이란 소재와 기법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 그림 안에 화가의 독창적 내면이 표출된다는 생각이다. 김성윤의 작품에 독창성이 있다면 그것은 화가의 필치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이질적인 요소들을 조합하는 방식에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여전히 사전트의 기법을 따라 하지만, 지난 전시의 포맷을 그대로 가져가지는 않는다. 이번 전시는 개별 작품의 소재 간 개연성이 훨씬  약해진 경향을 보인다. 지난 전시에서는 각각의 작품이 다루는 소재들이 초기 근대올림픽의 종목들이었다면, 이번 전시에는 소재를 포괄하는 하나의 주제가 없다. 예를 들어 그는 사전트,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존 발데사리(John Baldessari), 에드 루샤(Ed Ruscha) 등 자신이 좋아하는 화가를 그리거나, 존경하는 화가나 동료 화가의 작품에 나오는 소재, 혹은 자신이 이전부터 취하던 소재를 다뤘다. 이 소재들 간에 공통점이 있다면, 이는 그의 주변에 있다는 사실뿐이다. 대신에 이번 전시에는 이 소재들을 묶는 하나의 정서가 있다. ‘DEAD MAN’이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전시는 전체적으로 묵시록적인 정서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개별 작품들은 마치 공포영화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물을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다음 그림으로 옮겨 놓은 것 같다. 예를 들어 호크니, 발데사리, 루샤를 다룬 <좀비를 위한 연구> 연작에서 이 유명 화가들은 눈이 충혈되고 입 주변에 피가 묻어 있는 괴기스러운 좀비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리고 <존 싱어 사전트>에서 사전트는 공포영화에서 좀비를 퇴치하는 도구를 양손에 들고 한 사람을 위협하고 있다. 원색의 화려한 모습으로 유쾌하게 그려지곤 하는 김봉태 작가의 ‘댄싱 박스’가 김성윤의 작품에서는 생경한 조명을 받아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 속에 그려졌다.
그럼 개연성 없는 인물과 사물을 통해 묵시록적인 정서를 만들어낸 김성윤의 저의는 무엇일까? 작가노트에서 그는 “묵시록은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를 결핍된 것으로 인지하고 그에 대한 좌절감이 동력이 되어 만들어진다. 절망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 파멸 뒤에 무언가를 희망한다는 점에서 묵시록은 이중적인 성격을 띤다”고 썼다. 이번 전시의 묵시록적 정서는 현실의 어떤 절망에 대한 메타포이며, 그가 이 절망을 드러내는 것은 화전민이 농사를 짓기 위해 밭을 태우듯 그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고 해석해도 좋을 것 같다.
그렇긴 해도 그가 생각하는 현실의 절망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모호하기만 하다. 살아있는 화가들을 좀비로 만든 것은 낭만주의 회화의 시대가 종언을 고한 현실에 대한 메타포일까? 자신의 기존 작업에 영감을 준 화가를 좀비 퇴치사로 만든 것은 자기 회화가 다음 단계로 도약할 것을 예보하는 것일까? 그의 다음 작업이 궁금해지는 이유이다.
김시습·미술이론

[Review] 이피 – 내 얼굴의 전세계

이피  __  내 얼굴의 전세계

갤러리 아트링크 9.23~10.14

이피의 <내 얼굴의 전세계>는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핑크색 작품의 제목이면서 전체 주제를 집약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몸과 얼굴로 대변되는 성적이미지와 정체성, 환영과 초현실을 섞은 ‘장소’에 시각적인 강렬성을 갖춘 세계상이 펼쳐져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피에 따르면 <내 얼굴의 전세계>는 “하나의 전체로서의 장소”이자  “복잡다단한 시간과 사건, 인물, 관계, 사회구조가 새겨져”있다. 그런 ‘장소’의 몸들은 그 구축의 방법에서 부분과 전체의 조합이라는 ‘분절적 재현’의 조각을 사용한다. 만개한 꽃처럼 생명 발화의 생생한 현장을 담은 조각들은 세계의 욕망을 온몸에 부착한다. 인형과 시계, 알약과 향수, 목걸이와 입술, 꽃병과 장미 등 온갖 사물이 혼합 병렬된 이 다층적인 조각은 다양한 이미지와 형태, 장식, 패턴을 융합한다. 그것은 동일하지 않은 공간과 사건에 대한 기억과 이미지임을 말하고 있다. <내 얼굴의 전세계>는 사물과 타자가 동시에 공존하는 다수의 공간과 그 타자가 나임을 보여주는 전략을 취한다. 이 공공의 타자들을 내 몸에 부착함으로써 내가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타자를 감응하는 나의 몸이 부풀어 오르고 거대한 감각적 실체가 되어 물질화되는 동안 <내 몸의 전세계>와 <내 얼굴의 전세계>는 인간사원의 주술이나 기형의 기념비가 되었다.
이피는 내면이라는 주관이 물질과 타자에 대한 생생한 감응으로 환원되는 과정을 그의 독특한 상상력으로 전환시킨다. 가령 다리가 여덟 개인 문어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심해의 발광체와 같은 아름다움이 뭍으로 나오면 흉물스러운 것으로 변하는 것을 <내 몸의 전세계>와 연관시킨다. 심해가 무의식의 깊은 미망이고 여덟 개의 다리는 육근(六根, 眼耳鼻舌身意)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라고 한다면 이피가 만든 환원은 거대한 무의식이 부풀어 오르는 기형의 어떤 것인가? 그러나 이피의 드로잉은 그러한 물질적 기형과 상상의 이면에 기계장치로서의 몸과 메커니즘이 순환한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작동되는 환영은 ‘자기’ 라는 탐구대상이 명확히 있는 환영이다. 그러므로 이피는 몸이라는 기계장치 속에 숨은 감각의 이면을 탐구하면서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구현되어 있는지에 관심이 있다. <금빛 세안>은 화장실에서 세수하는, 온몸이 금빛 물방울로 덮여있는 여인(독신기계)의 감각적 환영을 보여준다. 그것은 거울을 통한 나르시스이면서 모든 것이 흐르는 사물의 틈을 보여준다. 온몸에 흐르는 물은 육화가 진행되는 타자의 몸이면서, 물질의 몸이고 내 몸의 전세계이다. 이 사물의 틈에서 이피가 본 것은 색으로 표현한 존재 전체의 세계이기보다는 존재의 갈래를 보여주는 조형요소와 장치들, 부분과 전체가 기계처럼 환원하는 메커니즘이다.
이 환원에서 이피가 진정으로 보여주려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핑크로 표현된 육체에 가까운 색과 물질성, 나와 사물의 무분별, 이 모든 세계상의 전체를 아우르면서 구현한 메시지는 무엇일까? 사물들을 단일한 전세계로 보려는 욕망을 시각화한다는 점에서 이피의 작업은 지적인 미술의 관례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사물과 존재의 색에 가까운 마력적인 핑크의 현상학에도 불구하고 이피의 작품은 그 단일성으로 인해 너무도 이성적이고 경쾌하다. 역설적으로 타자마저 단일한 어떤 것으로 빨아들이는 강력한 접착이 전세계를 이루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류철하·미술비평

[Curator’s Voice] 선무 개인전 – 홍·백·남(紅·白·藍)

선무 개인전  __  홍·백·남(紅·白·藍)

중국 베이징 원전 미술관 7.27~8.27 / 트렁크 갤러리 10.30~11.25

“나에게도 부모님이 주신 심장이 있다. 누군가 그 심장 위에 빨간 휘장을 달아주었다. …(그리고)… 누군가 달아주었던 내 심장 위의 휘장은 떨어졌다. …(지금)… 온전히 나를 위해 뛰는 심장이 나에게도 있다. 나는 선무다.”
2002년, 대한민국이 붉은악마의 물결로 일렁이던 해에 선무는 남한에 왔다. 마치 북쪽의 집단체조를 연상시키며 모두가 하나 되어 외치는 ‘대한민국’은 선무에게 너무나 익숙한 일상이었기에 북이나 남이나 별다를 것 없는 사람 사는 세상으로 비치기도 했다. 다만 감시하는 사람도 없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으며, 더구나 연습된 상황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북과 남 사이에 높게 쌓인 벽들이 서서히 선무의 눈에 들어왔다. 아직 대한민국에 초짜인 선무에게 한갓 볼 차기 게임을 놓고 밤새도록 광란하며 거리를 무리지어 싸돌아다니는 무정부 상태가 결코 옳을 수만 없는 일이었다.
선무가 북쪽을 벗어난 것은 세계가 세기말 몸살을 앓고 있던 1998년이었다. 남한 사회에서는 아직도 휴거(携擧)를 두려워하는 이들이 있었으며, 외환위기로 인해 새천년의 기대감이 상쇄되던 때였다. 남한에 들어오기까지 3년 반 남짓한 시간은 선무에게는 암흑기였다. 아시아의 덜 성숙된 몇몇 국가를 표류하며 20세기 야만의 질곡을 벗어나지 못한 채 무지막지하게 팽창된 제도들에 의해 봉인된 삶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거울로 된 유리방에 갇혀 무수히 반복되어 반사된 헤아릴 수 없는 자신들에 의해 정작 나 자신의 실체가 실종되어버린, 기억조차 떠올리기 싫은 유치된 자아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에겐 동물처럼 오직 생존만이 중요했을 뿐이다. 아직도 이로부터 홀연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그의 인생에서 유리방을 빠져나와 거울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와 여유가 생긴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10여 년간의 남한생활이 30여 년의 북쪽생활을 지울 수 없다. 더구나 개인의 삶을 주체적으로 영유하며 보낸 시간이 짧은 선무에게 전체주의의 환영과 지배와 피지배의 틈을 교묘히 노리는 욕심들의 악취를 떨쳐버리기는 버거운 일이다. 그래도 남한에서의 시간은 여러 사람과의 상봉과 이별을 만들어주었다. 그 사이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수차례의 개인전과 각종 국제전에 초대되어 뜻하지 않은 외국여행의 기회도 있었다. 이제는 몰래 숨어들거나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예술가의 자격으로 국경을 넘나드는, 나름대로 지구인이 된 셈이다.
2014년 7월 27일, 선무는 또 하나의 소란을 겪었다. 베를린과 뉴욕 그리고 오슬로 등 외국 전시 및 행사에 초대된던 그가 올해에는 베이징의 한 비영리공간에서 초대전을 열 참이었다. 이를 위해 동료 작가들의 도움을 받아 봄부터 베이징에 들어가 이런저런 작업을 완성했다. 도톰한 도록이 인쇄되고 남북의 철조망을 재현한 공간 디스플레이도 끝났다. 천여 평의 전시공간에 울려퍼질 음향도 가수 강산에와 협업해 거칠지만 멋지게 제작되었다. 중국에서 붙여준 개인전 제목은 <홍·백·남(紅·白·藍)>. 남한과 북한의 국기에 들어간 세 가지 색을 상징으로 그 경계를 넘나드는 선무의 활동을 부각시켰다. 이미 여러 통로로 각국 관계자들에게 초대장도 발송했던 터라 선무는 뉴욕 개인전 때보다도 더 들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전시 개막일, ‘전시봉쇄’라는 생뚱맞은 상황에 맞딱뜨려 다급히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물론 전시 개막 전후로 남북한 관계가 하루가 다르게 경색되고 있어 중국의 정치적 입장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중국 비영리 미술관의 지원을 받은 순수 예술활동이고 중국 당대미술가들의 발언 수위도 만만치 않기에 전시가 이뤄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아예 접어두었던 참이다. 미술관 입구의 커다란 현수막은 공안에 의해 철거되었고 개막연에 참석기 위해 미리 방문했던 사람들은 조사를 받았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선무의 2014년 베이징 개인전은 중국 공안에 의해 전시공간 입구가 봉쇄되고 도록을 비롯한 관련 인쇄물을 압수당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 후 잠시 베이징 선무 개인전은 그대로 방치되었다. 미술관이 폐쇄된 상황은 아니었으므로 전시를 보았다는 사람도 몇몇 있었으나 미술관 측은 곧 다른 전시로 대체했다. 그리고 연일 중국 인터넷에서는 작가 선무에 대한 조회수가 부쩍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 주변 정황을 정리해보니 정작 문제가 된 것은 선무의 작품이라기보다는 ‘탈국경자’라는 신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베이징에는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 사람들도 살고 있다. 선무 또한 이미 북한 사람들이 자신의 개인전에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했다. 그래서 순탄치 못한 자신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좋지 못한 기억들을 되도록 제어하며 차가운 과거가 아닌 지금과 미래를 살아가야 하는 남북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주제로 개인전을 준비했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이데올로기의 함정에 빠져 더 많은 삶의 기회를 놓쳐버리는 실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선무인 까닭이다.
아직까지 선무의 작품은 베이징에서 발이 묶여있다. 전시를 주최한 중국의 미술관 및 남한의 외교부나 통일부에서도 별 대책을 내놓지 못한 채 남북한 교류는 더욱더 아슬아슬한 살얼음 질곡을 디디고 있다. 선무 입장에서는 답답한 노릇이나 그 또한 막연히 기다리는 수밖에 별 방도가 없다. 다행히 중국 공안도 선무의 작품에 대해선 가타부타 간섭하지 않았으며 다만 ‘북한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로 돌연 전시행사만 봉쇄했을 뿐이다. 어찌되었든 선무의 작품이 압수되거나 손망실되었다는 소식은 아직 없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인천아시아경기대회에 북한 응원단도 오지 않은 뒤숭숭한 시점에 선무는 늦었지만 <귀국보고전>을 트렁크갤러리에서 연다. ‘탈북자’도 ‘새터민’도 아닌 ‘두 개의 심장을 가진 사람새끼’로서 말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에 자원도 가득한 /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 반만년 오랜 역사에 /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슬기론 인민의 이 영광 /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 몸과 맘 다 바쳐 이 조선 길이 받드세 /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오락가락이지만 두 개의 심장을 가진 선무가 술 취해 부르는 애절한 애국가다. 특히 올해 베이징 전시를 준비하며 오가던 중 베이징 서우두공항에 나란히 서 있는 대한항공과 고려항공 비행기를 보면서 이 요상한 애국가에 대한 감정이 더 애틋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베이징 전시에 출품할 작품으로 비무장지대에서 가져온 녹슨 철조망을 줄기 삼아 남북의 국화 및 야생화가 피어있는 꽃꽂이 작품 및 남북의 국기가 실루엣으로 엉킨 작품 등이 준비된 바 있다. 이미 탈국경자로서 그리고 한 명의 예술가로서 낡은 국가체제에 대한 애증이 증폭되었던 것이다.
전쟁을 직접 겪지않은 세대들에게 민족분단을 초래한 엄청난 이데올로기 대리전은 괴상하게 부풀려지면서 실제 전쟁 경험보다도 더 두렵고 무서울 수도 있다. 누구에게는 망각되거나 무시될 수도 있겠으나 아직도 일상이 자유롭지 못한 선무에게는 민족분단 해소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은 채 점점 안락에 빠져드는 자신의 삶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그렇다고 창백한 분단 상황에 휘말려 소모적인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더 끔직한 일이다. 더구나 지금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새로 꾸린 단출한 식솔과 동료들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태도 외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선무는 잘 알고 있다.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그것이 행복이라면 행복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전부라면 살 생각이 없습니다. 그것이 아닌 나를 알았습니다. 이제 세상에 대고 소리칩니다. 나는 선무라고”

최금수·이미지올로기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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