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막연한 가치 전복하기, 암묵적인 동의 균열내기

contents 2014.02. Special Feature | 막연한 가치 전복하기, 암묵적인 동의 균열내기

위・인세인박 <I need sex everyday _
steel, urethane paint, neon>
커스텀프린트 조명등 가변설치
125×150cm 2013
가운데・신정균 <옥류체로 쓰여진 노래>
나무 패널에 페인트 각 420×60cm
2013 (텍스트 출처-남자 아이돌 그룹
EXO의 노래 ‘으르렁’ 가사 중 일부)
아래・이병수 <스쿠아의 공격을
예술적으로 대처하는 7가지
방법(관악무브 협업)>
싱글채널비디오 4분 2013왼쪽 페이지
위・전미래 <Madame Jeon –
Home ground>
퍼포먼스 1시간 300m 금색 쇠사슬
2013 아트광주13 광경
아래 왼쪽・고재욱 <Die for-you can
sing but you can not>
혼합매체 185×185×185cm 2013
오른쪽・이미정 <명언짓기#6>
화선지 위에 먹 28×70cm 2011

[특별기획] 보는 것, 포착하는 것, 남은 것

contents 2014.02. Special Feature | 보는 것, 포착하는 것, 남은 것

위 왼쪽・장규정 <언노운 디테일스 : 창가에서> HD 비디오 8분 2013
오른쪽・박승진 <지울 수 없다(not to rub out a mistak e)> HD 비디오 3분26초 2013
아래・송진희 <언니야 집에 가자> 생활비디오 채널 5분 2013

위・발렛파킹 <강 약 중간 약> 2011~2013
가운데・이진경 <쾌락의 정원> 비디오 6분11초 2011~2013
아래 왼쪽・김지선 <웰스틸링> 영상 2012
오른쪽・안성석 <OPEN PATH-관할 아닌 관할> VR server PC custom-made joystick sound 2013

위・차재민 <Trot Trio Waltz> HD 비디오 컬러 사운드 10분
가운데・윤지원 <이것은 예술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예술이 아니다>
컬러 디지털 비디오(스틸컷) 32분34초 2013
아래 왼쪽・함정식 <The Preyer> HD video 26분 2014
오른쪽・문소현 <텅> 싱글채널비디오 12분47초 2012

위・차미혜 <무인칭을 위한 노래>
2채널 HD 비디오 8분45초 2013
가운데・김지희 <Audition>
영상 29분6초 2013
오른쪽・강정석 <야간행>
HD 스테레오 44분38초 2013

[특별기획] 미디어에 대한 고민, 주체적인 시각을 위한 조건

contents 2014.02. Special Feature | 미디어에 대한 고민, 주체적인 시각을 위한 조건

위・최준경 <The Urban Goddesses>
디지털프린트 가변크기 2010~2013
아래・정지현 <Demolition Site 06 Outside>
Pigment print 115×155cm 2013

왼쪽 위・이상재 <물방울, 비너스 #01>
Pigment print 72×54cm 2013
아래・원서용 <Umbrella>
C-print 160×130cm 2013
오른쪽 위・김형 <My family story in
the mirror>
Pigment Print 56×61cm 2013
가운데・류현민 <Measuring Horizon>
pigment ink 34×50cm 2013
아래・조규성 <#6>
Pigment Print Mounted on Plexiglas
120×150cm 2008

[특별기획] 공간 점유하기, 삶의 균형을 위해

contents 2014.02. Special Feature | 공간 점유하기, 삶의 균형을 위해

위 왼쪽・정승혜 <Dear. 여린 과거를 지킨 강건한 당신을 위해>
가변크기 혼합매체 2013
오른쪽・조혜진 <나선형 기둥을 가진 종려나무>
인조 도시루 나무 석고 160×160×220cm 2013
아래・조재영 <Sculpture in the blank>
카드보드 인화지 작업실에서 옮겨온 물품 2013

위・이홍한 <354-77>
철 260×250×225cm 2013
가운데・이미래 <일본식 꽃꽂이 조각>
석고 시멘트 먹 단열재 나무 차간막 가변설치 2013
아래 왼쪽・이수진 <Lumizing Sequence>
목재 끈 혼합재료 가변크기 2013
오른쪽・김정은 <Where is your destination-waving
the green road> 지도 책 110×27×79cm 2011

김다움 <If someone hates u for no reason give that jerk a reason> 벽에 상감기법 드레멜 칼 퍼티 아크릴 가변크기 2014

아래 왼쪽・김종희 <흔들리지만
흔들리지 않는>
흰 회기 위에 회색 자수 삼각대
88×215cm 가변설치 2013
오른쪽 위・김상진 <Meditation>
목탁 스피커 방석 혼합재료
200×200×40cm 2013
아래・김덕영 <Making Crack
(Push or Pull)>
합판 각재나무 수성페인트
가변크기 2013

왼쪽 위・강준영 <Nostalgia+This is it>
glazed ceramic turntable
50×50×52cm 2010
아래・임유리 <삼십살의 캠프파이어>
waste wood magnifying glass stained
glass film bamboo blind grill butane
gas solid fuel fire extinguisher
가변크기 2013
오른쪽 위・추미림 <WWW. the
world where we live in>
혼합매체 설치 2011
가운데・정운 <하나의 검은
프레임과 하나의 흰 프레임>
IKEA 흰 나무 액자 검은 나무 액자
120×90cm 80×90cm 2011
아래・정문경 <Fort>
used clothes mixed media
300×300×270cm 2013

위 왼쪽・정효영 <Supersensible clash> needlework on artificial leather thread toys wood
wire hose table motors sensor LED light 110×65×170cm 2011
오른쪽・정기훈 <무동력 여행> 나무 부표 로프 천 105×210×220cm 싱글채널비디오 35초 2014
가운데・서영덕 <Meditation 11> Chain 50×40×70cm 2013
아래 왼쪽・오종원 <짓다> A4용지 가변설치 2012
가운데・민진영 <The green stairs 2> Fabric acrylic LED Lights 210×150×170cm 2013
오른쪽・오완석 <0+play> pemat installation 2013

왼쪽 위・이병찬 <Laputa, urban-creatures>
설치 2013 복합문화공간 에무 전시광경
가운데・최윤석 <올해의 질량 2012Mass
of the Year> 2012 한 해 동안 수집한 영수증
가변크기 2012~2013
아래・이수성 <낙원>
나무 250×250×120cm 2013
한국현대문학관 입구 설치광경
오른쪽 위・이지아 <명자>
오브제 설치 280×260cm 2012
가운데・김준명 <무제(playing god)>
세라믹 가변크기 2012
아래・권용철 <Chain Reaction_
The movement series_study00>
혼합재료 가변설치 2013

위・유화수 <드라마 세트장에서 일을 하는 작가>
나무 석고보드 장판 벽지 시트지 4×2.5×3m 2013~
가운데・강한별 <Dawn>
가변크기 설치 2013
아래 왼쪽・송유림 <When it turns to something awful>
복합매체 가변크기 2012
오른쪽・박영진 <마주하기로>
wood glass acrylic mirror 180×90×110cm 2012

왼쪽 위・윤하민 <누가 사냥을 하든지
간에_스테인드글라스>
창문에 드로잉 61×88cm 2012
아래・염지혜 <외국인(Solmier)>
싱글채널비디오 조각 3분39초
컬러 사운드 스틸 우레탄폼 빵 전등
오른쪽 위・김수환 <즐거운 나의 집>
영상 아크릴 채색 수집된 비닐
스티로폼 플라스틱 병 사운드 4분45초
245×520cm 2012
가운데・권동현 <철거 표식을 위한 위장무늬 #2>
디지털프린트 150×225cm 2012
아래・천성길 <풍선 코끼리>
합성수지 우레탄도료 2013

위・이종건 <Blue sky> Engraving on antique hardwood flooring enamel Paint 180×378.5×7cm 2013
아래・길종상가 <네(내) 편한세상> 대림미술관 프로젝트 스페이스 구슬모아 당구장 설치광경 2013
일반인과 달리 특정한 날짜와 시간개념의 기복이 심해, 며칠 동안 작품 제작하는 것도 모자라 단기간 아르바이트나 언제 잘릴지 모를
대학 강사, 새로운 작품을 끊임없이 구상하며 국내외 유수한 레지던시 공모에 응모하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것, 이것이 나의 일상이
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몇 안되는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명과 암이 극명하게 갈라지는데, 이것은 매번 승자독식의 경쟁. 어느 한쪽
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이 험난한 길은 자연히 작가로서 인정받거나 작품전시에 기회를 받기 위해 미술제도권 내에 끊임없이 자신을 노출할 것을 요구한다.
그 길에서 작품이 잘 팔리는 스타작가, 안 팔리는 작가, 미술교수이면서 작가, 기타 등등의 작가로 분류되고 선택된다. 7할은 네오룩과
같은 웹사이트에 올라오는 공모전과 전시 정보, 월간지에서 소개되는 현대미술 작품과 작가들을 보며 꿈을 키워나가지만, 이 꿈은 좇
아 올라갈수록 허망하기만 하다. 선택된 작가가 아니라면 온갖 공모전과 레지던시 입주작가 선정 심사를 통과해 그 기회를 받아야 되는
데, 이럴 때는 과정 없이 잘 짜인 작업의 형태로만 평가받아야 한다. 그때마다 마주하는 심사위원들에게 작업에 대한 오해를 받으면서,
결과야 좋든 나쁘든 유통기간(수혜기간)이라도 주목받고 싶어서 다시 지원하게 된다.
이 사회에서 젊은 예술가로 살아가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달라도 너무 달라 현재 수만하은 젊은 작가가 어려운 처지에 중도포기해야
되는 기로에 서 있다. 이러다간 젊은 작가의 씨가 말라버릴 지도 모른다. 나는 지방대를 나와서 예술의 중심인 서울로 편승하기 위하여
수많은 수도권 전시와 레지던시에 공모하여 젊은 작가로서의 기회를 얻고자 했다. 지난 2006~2007년 무렵, 대학원 재학 중에 운전의
경험을 표현한 <야간운전> 시리즈는 메이저 공모에 선정되며 작품이 하나, 둘 팔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2008년에 미술시장의 거품이
빠르게 꺼지면서, 그림은 팔리지 않았고 형편은 곧 어려워졌다. 그것은 유년시절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종사하신 택시기사 직종이 한때
는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보잘것없는 직업으로 몰락하는 과정과도 같았다. 이렇듯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술제도
권 역시 젊은 예술가들에게는 보장받는 삶이란 로또와도 같다. 그렇기 때문에 나 역시 매번 갱신되는 예술구조 속에서 살아남을 길을
택하려면, 작품을 판매하거나 각종 레지던시와 지원금을 받아 활동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다른 젊은 작가들은 어떻게 살아나가고 있
을까? 그리고 나는 누구의 어떤 모습을 보고 배워야 할까.
그래도 나는 이런 불안한 삶 속에서 젊은 작가라는 이름으로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과거 독재정권과 맞서 싸웠던
선배 세대들은 진지함을 너머 참혹함 속에서 견뎌냈다고들 한다. 그런데 내가 바라보는 현재의 풍경들은, 대다수가 미술판에서 기득권
행사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자신만의 경쟁력을 갖추는 것 같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젊은 작가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경우는 돈 걱
정 없는 집에 태어나 작업하는 것, 돈 많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 돈과 권력이 있는 계층과 네트워크 파워를 갖추는 것, 어떻게든 SNS와
방송 출연으로 화제를 몰고 가며 활동하는 것뿐인가?
혹시 조용히 작업하면서 시스템이 붕괴되어 새날이 올 때까지
묵묵히 작품 활동을하면, 작가로서 정당한 생활을 유지하는 시
대를 맞을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 시대에 오직 작품으로
만 인정받을 수 있는 문화적 인프라는 없는 것일까? 많은 사람이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지적하면서 ‘나만의 경쟁력’을 갖춰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오늘날. 이런 사회 속에서 ‘예술
로 세상을 바꿔보겠다’라는 말도 안 되는(물론 그럴 능력도 없겠
지만), 그림도 그리고 다양한 예술 프로젝트를 통해 일개 작가로
서 사회 변화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는 예술을 한다는 것은
망상일까? 승자 독식의 구조가 아닌 공생의 관계로서 사회와 더
불어 예술의 길을 함께 찾아갈 수는 없을까? 그리고 내가 수혜를
입을 때 뒤에 있던 작가들과 후배들을 위해, 장차 내가 받은 것을
일부라도 돌려줘야 할 책임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
홍원석 <멈춤의 다리> 캔버스에 유채 720×1000cm 가변설치 2013

[특별기획] NEW FACE 100

contents 2014.02. Special Feature | NEW FACE 100
동덕여대에서 <우수졸업작품전>을 개최하고 10회에 걸쳐 진행한 이유는 무
엇인가?

‘미술의 향방’이라는 첫 번째 전시의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이제
막 작가가 되려는 사람들을 주목해 앞으로 미술이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
제시해보자는 것이었다. 동덕여대 회화과가 그 바탕을 제공하고 서울과 수도
권 대학이 협력관계에서 교류를 해보자는 취지에서 시작했다. 우리 학생들만
내부적으로 주목하자는 것이 아니라 문호를 개방해서 졸업생의 작품을 한자
리에서 볼 수 있는 장을 마련하자는 것을 학교 공식행사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중간에 커다란 부침이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지속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전시를 계속하겠다는 교수들의 의지 덕분이다. 현실적
인 얘기를 하자면 큰 액수는 아니지만 매년 학교가 일정 정도 예산을 지원했
는데 올해는 공식적인 지원이 없었다. 이번 전시는 학과 내부 재정으로 진행
한 것이다. 참여자들에게 따로 참가비도 받지 않고, 디스플레이도 우리과 교
수와 학생들이 다한다. 대규모 전시는 아니지만 전시를 준비하고 도록을 제작
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10회에 걸쳐 전시를 지속하다보니 각 대학에서 관례적인 행사처럼 여기고,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 같은데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 전시
는 졸업생들이 모여 친목 도모하자는 취지가 아니다. 졸업전에 출품한 작품
중에서도 우수한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이다. 그런 점에서 참여 대학과 참여
학생부터 지지해주고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999년에 열린 <공장미술제>를 비롯해 2000년 초 젊은 작가와 관련된 전시
가 쏟아졌다. <우수졸업작품전> 역시 당시의 추세를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
나?

확실히 당시는 한국 현대미술계가 ‘영아티스트’, ‘신진작가’를 화두로 하
고 있을 때였다. 대학이 보수적이고 변화를 빨리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이 시기에 우리 대학은 동시대미술의 경향성에 반영한 것으로 본다.
1999/2000/2001년 이 시기는 어떻게 보면 미술의 골든 에이지였다. 미술
이라는 굉장히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이 가장 중요했던 시기로 에너지가 넘
쳤고 다들 그 흐름을 타는 데 바빴다. 이후부터 미술 개념보다 작가 지원기금, 레지던스, 미술시장 등 미술 제도가 우월해졌다.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원래
예술가를 지원하기 위해 생겨났는데 지금은 이 제도와 시스템을 운영하기 위
해 역설적으로 젊은 작가라는 자원이 필요해졌다.
요즘에는 정말 젊은 작가들이 참여하는 전시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이 전시의
특징이나 역할이 있다면 무엇인가?

날것 상태로 보여지는 첫 번째 무대. 그
게 이 전시의 큰 의의다. 각 대학의 졸업작품전도 있지만 각각 대학의 파편화
된 전시와 당대의 스펙트럼을 만들어내는 이 전시는 다른 얘기다. 여기에서
대단한 스타 작가, 이머징 아티스트를 뽑아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공
모전에 해당할 것이다. 이 전시는 이름 자체도 노골적이다. 근데 이 상태에서
제대로 의미부여가 되지 않으면, 작가로서 성숙해질만한 연결고리를 찾지 못
하고 자신이 작가라고 떵떵거리게 된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술을 하는 것이
무엇인지, 미술계에서 어떤 식으로 커뮤니케이션하고, 어떤 작업을 해야 하
는지, 작가들은 스스로 공부하면서 성장해야 한다. 작가들은 아시아프에 출
품하는 것과 프로젝트 스페이스 다방에서 전시하는 것을 똑같이 생각한다. 여
기 심사하는 사람들 역시 사람이 달라도 인식이 다르지 않다. 각각의 포지션
을 엄격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동안 참여 작가들을 살펴보면 어떤 변화가 보이나.
이번 전시 도록에 그간
참여 작가 500여 명 중 현재 활동하는 작가의 근작을 담은 아카이브를 수록했
다. 시간이 지나서 작가로 남은 사람은 정말 소수다. 시간의 마모가 크다. 작
가들은 버텨야 한다. 전반적으로 미술대학 학생들이 가지는 감수성과 테크닉
좋고 자기주관적인 그림이라는 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미술에 대
한 태도는 달라졌다고 본다. 그림이 사적인 게 아니라 그림 그리는 게 사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작업이 고백적인 것이 아니라 너무 노골적으로 솔직하고 소
박하다. 이것은 한국 사회 젊은 세대의 문화적 삶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성적
으로 매우 민감해졌고 의식의 장벽, 가치판단이 없어졌다. 그렇다고 창조적
상상력이 확장된 것은 아니다. 페이스북에 자신의 누드나 일상을 노출하는 것
과 마찬가지로 예술을 이해하는 것이다. 예술가가 된다는 것에 대한 정체성이
없는 상태에서 예술가라는 이름이 부여되는 것이 문제다.
요즘 젊은 작가들은 작업하는 것만큼이나 살아가는 것 자체에 대한 고민이 많
아졌다.

지금만큼 예술과 사회가 동일화된 적이 없다. 문제는 예술과 삶이 너
무 밀착되어 있다보니 예술이 너무 희박해졌다는 것이다. 사는 것 자체, 생존
이 절체정명의 문제가 돼서 내가 자존감 가지고 산다는 것까지 삶이라면 예술
이 생계와 삶의 문제의 중요한 도구가 된 것이다. 예술과 생계는 층위가 다른
문제다. 먹고 사는 문제가 전부인 세계가 있는가 하면 그게 전부가 아닌 삶을
선택한 쪽이 예술계인데, 생계문제로 모든 것을 재단하니 예술이 없어진다는
얘길 하는 것이다. 예술가가 돈을 벌고 명성을 쌓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고 명성을 쌓기 위해 예술을 하는 것이 문제다. 예술을 하다보니 명성이 쌓
이고 돈을 벌게 된 것과는 인과관계가 다르다.

이슬비 기자

동덕아트갤러리에서 열린 설치광경

[특별기획] 그리기, 감각의 재구성

contents 2014.02. Special Feature | 그리기, 감각의 재구성

위 왼쪽・손승범 <어릿;한 지도자> 장지에 채색 163×262cm 2013
오른쪽・김현정 <고요한 숲의 계절> 캔버스에 유채 130.3×162.1cm 2013
아래・강호성 <우리 시대의 동화 신화 읽기> 비단에 채색 180×600cm 201

왼쪽 위・고권 <바람 센 날>
한지에 먹 채색 72×60cm 2013
오른쪽 위・홍수정 <Nymph Forest 2>
캔버스에 아크릴 90×90cm 2013
가운데・류노아 <고민상담 Friends>
캔버스에 유채 130×162cm 2013
아래・김보경 <그린리듬그래프> 가변크기
종이 위에 아크릴 나무 2012

위・이화평 <유린옐로우> 디지털프린트 100×240cm 2013
아래・김진욱 <4 color of bibim> 148cm(원형) 혼합재료 2013왼쪽페이지
왼쪽・이우성 <가장 빛나는 별> 캔버스에 과슈 130.3×162.2cm 2012
오른쪽・김희연 <정지한 낮> 리넨에 아크릴 193.9×372.8cm 2012

위 왼쪽・윤진초 <Reigen_burden>
모노타이프 프린트 30×21cm 2013
가운데・이단비 <관점을 달리하면 다르게
명명할 수 있는 법칙적 드로잉 3>
crystal photo frame 50×60cm 2012
아래・김범종 <엮어내기>
종이에 먹 아크릴 380×280cm
가운데 왼쪽・장종완 <천개의 눈을 가진 밤>
캔버스에 유채 90.5×118cm 2012
오른쪽・전희경 <인간되기>
캔버스 위에 아크릴 116×91cm 2013
아래・배윤환 <Playground>
캔버스에 유채 파스텔 132×223cm 2013

위・이세준 <무한을 유한 속에
담는 방법&> 캔버스에 유채
183.3×738.1cm 10pcs 2013
가운데 왼쪽・김수민
<월화수목금금금>
캔버스에 종이컵 펜 아크릴
37.9×45.5cm 2013
오른쪽・신준민 <Dal-sung Park>
캔버스에 유채 181×227cm 2013
아래 왼쪽・윤향로 <299>
offset-printing 17×26×1cm 2013
오른쪽・조은주 <Empty Space>
162.2×130.3cm
장지에 혼합재료 2012

위 왼쪽・박종찬 <구영3길 81>
박스에 아크릴 가변설치 2012
오른쪽・김민주 <휴가(休家)>
장지에 먹과 채색 130×157cm 2012
가운데・이주리 <마지막 도시>
캔버스에 펜 아크릴 227×362cm 2013
아래・박기일 <Engine 9>
캔버스에 아크릴 130×194cm 2010

왼쪽 위・김혜나 <Duvet>
캔버스에 유채 162.1×130.3cm 2013
가운데・임영주 <신목167 East>
캔버스에 유채 73×91cm 2013
아래・구지윤 <일요일 오후>
캔버스에 유채 22×27.5cm 2013
오른쪽 위・김봄 <어떤 동네-개와 고양이>
종이에 아크릴릭 64×100cm_2012
가운데・조종성 <정물화된 풍경>
장지 위에 먹 66×62.5cm 2013
아래・빈우혁 <A man is standing near ofrest>
캔버스에 유채 차콜 240×330㎝ 2013

위・김해진 <옥상> 캔버스에 유채 24×33.5cm 2012
아래・오희원 <Blind Site : White Scene> 캔버스에 유채 89.4×130.3cm 2014
내가 신진이라는 ‘표현’을 피부의 체감으로 의식하게 된 것은 2006~2007년, 미술시장의 풍경 속에서였다. 보다 빨리, 먼저 “신진”을
찾아내야 한다는 미션은 최대 마진을 추구하는 화랑들의 전략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새로운 얼굴은 곧 어린 얼굴들이었고, 화랑들
중 일부는 작가와의 파트너십이 생기기도 전에 상품을 주문하듯이 그들의 취향(?)을 신진작가에게 요구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생산
적이어야 둘의 관계를 단순한 ‘속도전’의 양상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불과 몇 년 사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시장의 거품 뒤에는 갤러리에
대한 냉소가 부풀대로 부풀어 있었다. 이제 어린 작가들도 상업 화랑에서의 작품 발표를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다. 유통에 대해 터부
(taboo)시하는 작가들의 분위기는 안타까운 일면이기도 하다. 반면 이러한 불안은 젊은 작가들에게 발표 기회를 직접 찾아 나서게 하
는 동기로 작용하면서 정부나 지자체, 기업에서 운영하는 여러 가지 작가지원제도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아마 지원제도는 작
가들이 느끼기에는 더욱 비주체자로서의 확인과 허무함이 남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최종적으로 본인이 혜택을 받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 공모제도이다. 나는 프로그램에 선발된 작가가 지원제도와 혜택을 고사했다는 이야기를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작가들 중 누구도 작가지원제도의 순기능 자체를 부정하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락의 패배감은 실체도 형체
도 확인되지 않은 음모와 부정의 유령을 좇게 만든다. 사실 사회 시스템에서 구성원 모두의 여건을 수용할 수 있는 절대의 값, 궁극의 구
현이란 처음부터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다만 주최자가 기관의 철학을 굳건히 가지고 최대한 투명하게, 객관적인 과정으로 ‘최선’의 노
력하는 것이 건강한 제도의 할 일일 것이다. 더불어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지평에서의 지원정책을 늘려가는 것이 당면한 숙제이다.
한편 이러한 현실을 제대로 겪고 있는, 나와는 (세대적 측면에서) 그리 큰 차이도 없는 20~30대의 작가(우리)들은 흔히 일컬어지는
88만원 세대다. 그들은 해결이 어려운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도 주체성을 향한 적극적인 의지를 실천하고 있다. 거부하고 도망갈 수 있
는 것이 생활이 아니듯, 승자 독식의 사회상황을 목격하는 그/그녀는 작업과 동시에 사회와 노동에 대한 의식이 강해졌다. 한국미술사
에서 작가의 삶이 그렇지 않은 시절이 있었겠냐마는 개발도상국의 그림자 속에는 상대적인 박탈감과 허무하게 끝난 기대를 반동에너
지 삼아 사회적 목소리를 내고 있는 작가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젊은 세대의 성장 통으로 치부하기에는 최근 몇 년간 지속적이
고 다소 공통적인 패턴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것은 다수의 경우 비슷한 입장과 철학을 가진 작가들의 연대로 이어지고, 연대가 잉태한
대안적인 주체로써 ‘컬렉티브’들이 태어났다. 굳이 전시 활동을 위한 물리적인 그룹이 아니더라도, 학연이나 또는 지리적 구역을 중심
으로 다수의 구성원이 참여하는 협회들과는 달리 소규모이고 주체적이다. 작가들은 작업실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네트워크를 ‘스스로’
찾아다닌다. 기획자가 되기도 하고, 공간을 운영하기도 하고, 글을 쓰거나 매거진을 만들기도 하고, 아르바이트나 노동활동을 작업으
로 끌어오기도 한다. 협업과 연대의 목적이 미술계에 대한 냉소이거나 자조적인 현실인식이거나 미학적 구현을 위한 것이거나 간에,
비주체적인 염증을 동력 삼아 활동의 외연을 치열하게 넓혀가는 움직임이다. 이러한 연대들은 ‘따로, 또 같이’, 뭉쳤다가 흩어지기를 반
복하면서 미술계에서 작가의 역할을 실감나게 만드는 활력이 되고 있다. 활동반경의 확장은 딱딱한 틀을 느슨하게 만드는 전략에서 주목할 만하다.
미술의 역사에서 작가의 가치가 사후 세대에까지 걸쳐 조명되는 경우를 보아왔지만, 지금의 작가(우리)의 운명은 살아생전에, 심지
어 학교를 마친 후 몇 년 안에 승부를 보아야 하는 경쟁, 검증을 마쳐야 하는 게임처럼 오해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적어도 작가에게 작
업은 평생에 걸친 고민해야 할 터이기 때문이다.
결국 ‘신진’은 타자에 의해 호출될 때 비로소 생겨나는 표현인가보다. (본인을 소개할 때 “저는 신진작가입니다”하는 작가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 ‘표현’으로의 신진, 제도의 기준으로서 그것의 반대말이 ‘기성’이라면, 작가라는 말 속에 이미 숙명
적으로 지고 가야 하는 태도로서 ‘신진’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신진세대들을 지켜본 입장을 짧은 글로 전한다는 것이
솔직히 망설여졌다. 순간적이거나 지엽적인 현상에 그치지 않는 그들을 나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의 문제를 생각해본다 치면 어
느 순간 별 볼 것도 없는 내 얼굴을 새삼 들여다보는 거울보기와 다를 바 없다는 식의 결론으로 허무하게 돌아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기기도 했다.
나는 나의 동료인 그들이 영원히, 지금의 순간보다는 앞으로의 미래가 궁금한 작가이기를 바란다. ●

[특별기획] 버티기, 우기기, 쑤시기

contents 2014.02. Special Feature | 버티기, 우기기, 쑤시기
공성훈 l 작가, 성균관대 교수
얼마 전에 모 케이블 방송에서 준비하고 있는 미술가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에 심사하러 다녀왔습니다. 심사의뢰를 받고 처음에는
‘별걸 다 하네’ 하며 회의적이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이미 전시 지원과 레지던시 등 각종 공모
를 통해서 작가를 선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커진 상태에서 방송에서는 좀 의심스러운 작가들(?)이 맹활
약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보다는 치열하고 진지한 작가들이 매스미디어에서 제대로 된 작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
했습니다. 오디션이 작가로서 단지 출발점임을 유념한다면, 그런 작가들이 미술의 생태계를 보다 풍성하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항상 그래 왔지만, 세상 참 많이 바뀌었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작가가 되기 위한 과정으로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버티기’ ‘우기
기’ ‘쑤시기’가 그것입니다. ‘버티기’는 작가로서 먹고살면서 생존하는 것, ‘우기기’는 남이 자신을 이해할 때까지 계속 보여주고 혹시
이해하지 못하면 암기할 정도로 보여주라는 것, ‘쑤시기’는 올바른 사람을 만나고 올바른 방향을 잡으라는 것입니다. 버티면 작가로 남
고 우기면 작가로서 알려지고 쑤시면 좋은 작가가 됩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또 나라를 막론하고 작가로서 버티는 일은 참 힘듭니다. 마치 추운 겨울에 짧은 이불 덮고 자는 것과 같아서 머리
를 덮으면 발이 시리고 발을 덮으면 머리가 시립니다. 위에서 세상 많이 바뀌었다고 말했지만 특히나 작가로서 버티는 환경이 많이 바
뀌었습니다. 2000년대 들어와서 젊은 작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각종 지원제도 많이 생겨서 흔히들 젊은 작가들이 작업하기 좋은 환경
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르바이트할 게 별로 없습니다. 예전에는 학원
이나 입시 화실에서 강사로 일하면 들이는 시간에 비해서 꽤 쏠쏠하게 벌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입시학원의 강사 자리가 있지만
예전에 비해 전문화되어 있다보니 개인적으로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청년층의 임금도 싸졌고요.
공모를 통해서 창작 스튜디오에 입주해도 1년마다 이사 다니기 바쁩니다. 작가 레지던시 공간만 늘릴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작업실
지원정책이 있어야 하는데 말이죠. 그럭저럭 작품성을 평가받아 미술관급 전시나 국내 비엔날레에 참여해도 아티스트 피(artist fee)
가 없습니다. 큰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뭘 먹고 살라고 그러는지. 아티스트 피가 없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미술시장이 커지면서 젊은 작가들 중에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그렇지만 몇 개의 스타일에 한정되어 있고 지
속가능성도 불확실합니다. 그래도 미술계 자체는 참 공정해졌습니다. 아마 바둑계 다음으로 공정해진 것 같습니다. 예전처럼 줄 안서
도 됩니다. 보는 눈이 많아졌으니까요. 대학의 권력이 줄고 상업과 기획의 힘이 커진 까닭도 있습니다. 그런데 미술계의 히에라르키
(hierarchy)라고 할까 작가의 지위가 변한 느낌입니다. 앞서 말한 작가 오디션 프로그램 모집기간에 지원 여부를 놓고 젊은 작가들이
눈치를 본다는 인터넷 기사를 읽었습니다. 출연하고는 싶지만 미술계에서 나쁜 평판을 얻을까봐 망설인다는 거죠. 심지어 평론가에게
지원할지 말지 여부를 묻는 문자메시지가 오기도 했답니다.
요즘에는 작가들이 여기저기서 심사를 받습니다. 기회가 많아지고 공정해지고 그래서 좋아지긴 했지만 작가들이 남의 시선을 끊임
없이 의식하게 된 것 같습니다. 당장 눈앞의 경쟁에 익숙하다보니 서로서로가 개인화되고 ‘작가 커뮤니티’도 약화된 듯합니다. 예전에
는 작가들이 전시를 조직하고 이슈를 생산해내며 주도적으로 움직였는데 제도가 강해지다보니 작가들이 ‘Sleeping Beauty’처럼 자신
이 선택되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작가 없는 미술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평론가도 저널도 갤러리
도 없어도 됩니다. 작가만 있으면 미술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미술계의 모두를 존재하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가
‘가 되는 것은 독립적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백이라는 말 대신 ‘Author’라는 칭호를 붙이는 것은 작가가 세계에 대한 어
떤 독립적 태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독립적이려면 외롭습니다. 그래서 친구도 필요하지만 동지가 필요합니다. 예술적 동지
말입니다.
젊은 작가 대부분이 느끼는 현실적이거나 예술적인 문제들은 비슷합니다. 비슷한 문제들이 많다는 것은 그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
라 구조적인 문제이고 연대해야 하는 문제라는 뜻입니다. 사회 문제이든 미술계 문제이든 서로서로 공유해야 버티기 쉽습니다.
청춘에게 어려운 세상이지만, 그리고 작가라서 더 어려운 삶이지만 후배 작가분 모두 세계에 맞먹는 무게감을 지닌 예술가로서 성장
하시길 빌며 지면 관계상 군소리 그만 하고 이만 총총…. ●

[특별기획] 청년 작가들이여, 변화를 읽어내자

contents 2014.02. Special Feature | 청년 작가들이여, 변화를 읽어내자
한국의 미술은 지난 몇 십 년간 매우 압축된 역사를 경험했다. 소위 현대미술과 관련하여 한국은 1930년대 일제
강점기 선전(鮮展)부터 1950~1960년대의 모더니즘 미술, 그리고 1970년대의 실험적 아방가르드와 1980년
대의 정치적 미술, 그리고 1990년대 이후부터 시작된 국제적 동시대미술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미술이 보여준 궤
적은 매우 강렬하고 급진적인 것이었다. 나는 최근에 한국의 동시대미술이 1990년대 중후반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
다고 말한 바 있다. 그 이유는 ‘동시대성(contemporaneity)’이 본질적으로 전 세계에 걸친 예술적, 창조적 동시성
(synchronism)을 전제로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시대미술은 전 세계의 지역(local)들이 상호 연결되면서 최
대한 동등하고 호혜적인 네트워크를 만들어낸다는 전제가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한국미술이 한국 현지에서 국제
미술의 흐름과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시작한 계기를 1995년의 <제1회 광주비엔날레>라고 본다면, 이후부터 본격적
인 동시대성이 추동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동시대성에 대해 이렇게 장황하게 말하면서 이 글을 시작하는 이유
는 ‘젊은 작가들’에 대해 언급하려면 한국 현대미술의 ‘압축적 성장’과 ‘동시대성’이라는 이슈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
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압축적 성장과 동시대성은 미술만의 이슈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의 사회,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부분에서 거론되어야 할 이슈이기도 하다. 젊은 작가들이란 이러한 압축적 변화와 동시대성을 대면하
면서 수많은 모순과 갈등, 압박과 가능성 등을 동시에 경험하는 연령적 ‘계층’이다.한국의 동시대미술은 역시 지난 15년 남짓한 기간에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국제적인 무대에서 활동하는 작가 수
가 늘었을 뿐 아니라 정보, 이동, 전시, 학술, 인프라, 프로그램 등에서 많은 지원과 신설이 이루어졌다. 특히 인프라 부
문에서 통신 인프라인 SNS와 세계 각국의 레지던시를 연결하는 공모체제가 구축된 것은 엄청난 변화라고 할 수 있
다. 우리는 전례 없이 많은 예술가가 배출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수의 시각예술가가 현장에서
활동하는 시대가 되었다. 제도적으로 많은 개선이 이루어진 것만큼이나 인정제도 안에서는 커다란 경쟁적 상황이
형성되었다. 게다가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할 정도로 ‘교육 받은’ 관객과 대중을 상대해야 한다.
전시 상황에서 조우하게 되는 관객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전문가마저 뛰어넘는 식견과 경험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
므로 예술에 관한 한 과거 예술가들이 취할 수 있었던 ‘계몽적’ 태도는 더 이상 요구되지 않는다. 2014년을 벌써 한 달
가까이 보내면서 ‘젊은 세대’라는 화제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들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동시대미술은 이제 다시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둘째, 한국은 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의 주요 문화 콘텐츠 생산국가가 되었다.
셋째, 모방이나 참조가 아니라 우리가 선택하는 삶의 양상이 그대로 전범이 되는 자발적 생산구조가 떠오르고 있다.
동시대 패러다임과 미술계 구조적 문제점
첫째로, 동시대미술은 앞서 말했듯이 세계 내에서 확보된 ‘동시대성’을 전제로 한다. 통신과 이동의 포화를 통해 이러
한 동시대성이 극대화되면 그때부터는 동시대성의 내부를 조직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유형의 창조적 생산을 이끌어
내는 노력이 시작된다. ‘공동체’란 이 과정에서 새롭게 규정되는 조직의 양태, 혹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다양한 레이어의 공동체들이 만들어질 것이며 예술가 및 예술 전문가들 역시 이 과정에서 강력한 에이전트 역할을
담당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즉 다가올 동시대성은 더욱 유기적이고 복합적인 관심과 관점들에 의해 수많은 결절
청년 작가들이여, 변화를 읽어내자
유진상 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과 교수
81
(nods)을 만들어내면서 더욱 흥미로운 현장을 만들어낼 것이다. 협업, 창업,
공유와 같은 키워드들이 예술가들에게 더욱더 중요하게 다루어지리라 생각
한다.
두 번째로, 한국은 매우 독특한 문화적 파생물들을 생산하고 있는 다소 예
외적인 후기-자본주의 국가 가운데 하나다. 일본과 더불어 한국은 아시아에
서 대중문화에 기반을 둔 강력한 문화 콘텐츠들을 생산하고 있다. 이러한 콘
텐츠들은 보통 소모적이고 수준이 낮은 문화생산물들로 치부되어 왔으나,
최근에는 이러한 문화적 생산구조가 미디어 및 산업과 결합해 이루어내는
파급력이 강하고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실험적 파생물들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나는 젊은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필드를 넓힐 것이라고 생각한
다. 실제로 대학을 나와서 모든 졸업자가 재래적 의미의 작가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만큼 선발의 규모가 크지 않
을 뿐 아니라 시장도 성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은 앞으로 더 성장할 수 있겠지만, 전통적인 예술 재래시장이
아닌 새로운 파생시장들이 만들어질 것이다. 이를 어떻게 예측하고 가시화할 것인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준은 관
객, 대중, 시민이 될 것이다.
세 번째로, 한국은 국적일 뿐 아니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사용해야 할 ‘그릇’이고 그것을 통해 삶의 최대치
를 구현해야 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우리는 간혹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서구
에 대해 가장 부러워한 것은 그들이 정말 ‘재밌게 논다’는 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까지 그들이 노는 방식을 따라
하고 모방해 온 것이다. 심지어 제 3세계의 미술, 음악, 인문대학에서는 제도적으로 서구가 발전시켜 온 ‘즐거움의 생
산’을 교육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당위’로서 내면화했다. 결국 가장 잘 노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여기서 ‘이긴다’는 표현은 내셔널리즘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승부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스스로에게 부과했던 종속변수로서의 정체성을 자신도 모르게 극복하는 것이며, 나아가 각자의 존재가 스스로 세계
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우리의 삶을 멋진 스타일로, 쿨한 태도로 내면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나아가서
이를 압도적이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멋진’ 문맥들로 보여주어야 한다. 예술가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에 초점을
두는 것은 답이 아니다. 살아남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삶의 본질적 과제다. 예술을 선택한다는 것은 생존을 훨씬
넘어서는 과제를 추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반면, 이러한 패러다임 속에서 젊은 세대들이 직면하는 주된 문제점들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각각의 개별 세대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시스템이 여전히 불충분하다. 모든 세대는 가치부여(miseen-
valeur) 혹은 인정(recognition)의 시스템을 필요하다. 그것이 없다면 세대는 내부로부터 붕괴되거나 외부에
의해 몰인정의 상태에 놓일 것이다. 가치부여는 시선, 감탄, 선발, 비평적 인정, 토론, 유통, 재인정 등의 과정을 통해 조
금씩 공동체 내의 확신과 승인을 얻어가는 과정이다. 우리 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독일이나 러시아처럼 모든
관심이 정치, 사회, 경제적 문제들에 몰려있는 독특한 전방(前方) 국가형 사회다. 이념적 투쟁이 모든 화제의 중심이
된다. 따라서 가치가 이념적, 윤리적, 도덕적 가치로 수렴되는 상황 역시 가치의 분열을 초래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젊은 세대’라는 화제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들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동시대미술은 이제 다시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둘째, 한국은 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의 주요 문화 콘텐츠 생산국가가
되었다.
셋째, 모방이나 참조가 아니라
우리가 선택하는 삶의 양상이 그대로
전범이 되는 자발적 생산구조가
떠오르고 있다.”
개인이 이러한 가치를 내면적인 최고치로 받아들일지 불분명하기 때문이
다. 한국에서 예술의 가치부여 체제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미국이나 유럽과
같은 예술적 가치에 대한 공동의 이해가 수립되어 있는 국가들에서와 달
리, 예술가들 스스로 자신들이 생산하고자 하는 가치를 규명하고 강요하는
어려운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두 번째로, 이러한 예술적 가치 생산을 지원하고 따라잡는 재정적 선순
환구조가 부재한다. 그리고 선순환구조는 예술시장에 의해 해결되어야 한
다. 나는 예술이 공공지원에 의존하는 상태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또한 예
술시장은 즐기는 시장이지 언제까지나 버텨야 하는 시장이 아니다. 예술시
장이 답답한 콘텐츠들로 채워져 있다면 이것은 대학이나 현장을 통해 시급히 바뀌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무엇이 흥
미로운 것인지에 대한 공감과 인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예술에는 답이 없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서로의 얼굴만 바라
보고 있을 수도 없다. ‘미술판’은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수 십 혹은 백 개 이상의 서로 다른 ‘판’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
시아프>와 <공장미술제>는 서로 다른 ‘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울만 해도 문래동, 연희동, 상수동, 사간동, 평창동,
청담동 등은 전혀 다른 풍경의 판들을 만들어낸다. 한 사회의 미술은 이렇듯 다양한 ‘판’들이 연결되고 겹쳐져 있음으
로써 훨씬 풍요롭고 다양한 취향과 태도들을 수용할 수 있게 된다. 문화와 역사, 지역과 계층, 교육적 출신성분과 또래
집단의 형성 과정, 시장의 특성과 제도적 지원 방식에 따라 이러한 판들은 전혀 다른 세계들을 만들어낸다. 20세기 초
파리 몽마르트르라는 작은 지역에는 약 500여 개의 서로 다른 집단이 상이한 판들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유럽과 북남미를 중심으로 세계 각국에서 모인 예술가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이었다고는 하지만, 현재 한국의 미술풍
경 안에서도 이에 못지않은 다양하고 뜨거운 판들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나는 이들이 관객들에게 자신들의 가치를
강요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시민들이 재정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는 수준 높고 흥미로운 예술이 범람하게 되
길 바란다.
1990년대 초에 홍대 앞의 바에서 매일 저녁 만나던 작가들이 생각난다. 이들은 지금 50대의 중진작가들이 되었으
며 여전히 바에서 만나고 있다. 이들과 함께 한 세대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내게는 커다란 기회이자 즐거움이다.
나는 청년작가들 역시 그들만의 행복하고 흥미진진한 세대를 만들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하기 위해
서는 변화를 읽어내고 그것을 즐겨야 한다는 점을 말해주고 싶다. ●

[월드 리포트] 시끌벅적한 추도식장에 펼쳐진 이미지의 향연

contents 2014.2. world report | 시끌벅적한 추도식장에 펼쳐진 이미지의 향연
신원정│미술사
여러 차례 계획의 변경과 연기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2013년 겨울 쿤스트베르크에서 막을 올리게 된 전시는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크리스토프 슐링엔지프의 작업을 포괄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룬 첫 회고전이라는 점에서–지난 2011년 베니스비엔날레의 독일관을 비롯해 그간 열린 전시들은 고인을 추모하는 행사에 더 가까웠기에–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슐링엔지프 작업의 방대한 스펙트럼을 감안할 때 ‘회고’적 성격의 전시를 베를린에서 열기에는 최소한 함부르거 반호프 미술관 정도의 규모라야 어울릴 듯하지만 전시가 실제 열리고 있는 곳은 그리 크지 않은 쿤스트베르크이다. 전시
를 기획한 큐레이터는 작가의 작업을 남김없이 총괄하기란 불가능하기에 그 보다는 관람객이 그의 예술세계를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강조했다. 큐레이터의 말에서도 드러나듯 장소가 다소 협소하다는표면상의 단점은 ‘선택과 집중’을 가능케 해준다는 점에서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한 듯하다. 이뿐만 아니라 베를린의 현대미술현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가지는 전시 기관인 쿤스트베르크가 가진 장점 중 하나인 주전시실 공간을 인상적으로 활용한 점 또한 이번 전시가 이곳에서 열려야 하는 당위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지상과 지하를 아우르는 높이와 상당한 크기의 주전시실은 한때 마가린 제조 공장이었던 쿤스트베르크 건물의 고유한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소이자 무엇보다 대규모 설치작품을 전시하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어두컴컴한 홀에 일곱 개의 굵직한 나무 기둥이 설치되어 있고 그 꼭대기마다 사람이 앉아있는 광경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아무런 미동 없이 독서를 하거나 드물게 고개를 들다 자신을 관찰하는 관람객들과 눈이 마주치기도 하지만 이내 무심하게 시선을 옮기는 이 <주상 고행자>들은 슐링엔지프의 2005년도 작 <두려움의 교회>의 한 부분이다. 전시실 한가운데에는 회전무대인 <아니마토그래프>의 독일판인 <파르지파크(라그나뢰크)>(2005)가 자리하고 있다. 영화, 연극, 음악, 퍼포먼스와 오페라가 한자리에 모여 녹아내리고 서로 섞이는 현장이다. 여러 개의 세트가 나란히 설치되어 있고 조명이 극적 분위기를 강조하는 회전무대는 누구나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다. 장중하게 울려 퍼지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은 공간의 밀도를 조율하고 무대 위 오브제, 벽에 붙은 포스터와 그림, 영사기에서 나오는 영상이 빚어낸 이미지들은 전시실 공간을 시각적으로 재단한다. 관람객이 천천히 돌고 있는 무대 위로 올라서서, 쏟아지는 조명과 영상을 온몸에 직접 맞으며 스스로 이 움직이는 극장의 일부가 되는 순간 비로소 작가가 꿈꾸었던 총체예술작품은 완성된다. 한편 바그너의 오페라를 들으며 아돌프 히틀러의 초상화를 보노라면 어느새 느껴지는 개운찮은 뒷맛에 독일 출신 작가의 전시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될지도 모른다.
강한 정치성을 표방하는 슐링엔지프의 퍼포먼스 작업은 부조리하고 냉혹한 현실을 가감 없이 다루는데 공개될 때마다 온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을 만큼 도
발적이지만 그 전복성과 병행하는 신랄한 조소와 탁월한 비틀기는 다양한
층위를 갖춘 복합적인 작품의 탄생에 일조한다. 서바이벌 방식의 인기 TV프
로그램 ‘빅 브라더’의 포맷을 차용한 퍼포먼스 <오스트리아를 사랑해주세요>
는 2000년 빈 예술축제 기간 중 진행되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빈
국립오페라극장 앞에 설치된 컨테이너, “외국인을 추방하라”는 문구를 담
은 큰 배너가 붙은 이 컨테이너 안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다는 외국인 12명이 1주일간 고립된 채 생활한다. 그들의 모습은 TV로 생중계되고 오스트리아 국민은 전화나 인터넷으로 송환자를 뽑는 투표를 할 수 있다. 투표 그 결과에 따라 매일 저녁 8시에 두 명씩 강제 송환을 위해 컨테이너를 떠나게 된다. 최종 우승자를 기다리는 것은 상금과 합법적인 오스트리아 국적 취득이다.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근본적인 윤리적 화두에서부터 인권과 직접(외국인 난민 및 정치적 망명자) 혹은 간접적(리얼리티 쇼 프로그램에서 참가자들을 대하는 시선)으로 관련된 테마들, 그리고 외국인 혐오 현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들이 극단의 자본주의를 대변하는 TV 예능프로그램의 달콤한 탈을 쓰고 평온한 일상을 가장한다.
아힘 폰 파첸스키와 공동으로 제작한 <프릭스타 3000>(2003)는 2002년 6월 8일부터 방영되었던 6부작 TV 프로젝트
를 편집한 비디오작업이다. 당시 독일 청소년들에게 선풍적인 화제를 불러일으킨 캐스팅 프로그램 <독일이 슈퍼스타를 찾다>와 비슷하면서도 뚜렷하게 다른 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은 바로 넘치는 끼를 주체할 수 없는 장애인들이다. 캐스팅 과정부터 최종 밴드 멤버 선정 그리고 앨범 발매에 이르기까지 캐스팅 쇼의 전반적인 메커니즘이 화면에 담겼다. 시간이 지날수록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회·관습적 구분은 모호해지고, 자연스러운 감정 표출에 제약을 받는 이는 실상 어느 쪽인가 하는 의문이 강하게 제기된다.
전시의 주인공, 슐링엔지프의 부재(不在)가 아쉬운
슐링엔지프의 작업에서 표출되는 정치성의 정점을 찍은 두 건의 사건을 보자. 먼저 그는 1997년 8월 말 제10회 도쿠멘타가 열리던 카셀에서 당시 독일수상 “헬무트 콜을 죽여라”라는 문구를 담은 포스터를 내건다. 이로 인해 퍼포먼스 현장에 긴급 투입된 경찰이 작가를 체포하고 일시적으로 구금했다. 그로부터 1년 뒤 연방의회선거에 기해 “당신 자신에게 투표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찬스 2000’이라는 이름의 정당을 창설하고 특히 전국 600만 실업자에게 헬무트 콜 총리가 여름휴가를 보내는 볼프강호수가 범람하여 총리의 별장이 물에 잠겨버리도록 <볼프강호에서 수영하기> 퍼포먼스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언론의 엄청난 주목에 비해 실제 참가자 수는 100여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비록 최종 선거에서 0.058%의 지지를 얻는 데 그쳤지만 “실패는 기회”라는 창당 슬로건부터 시작해 계속된 미디어의 관심과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영상예술에서 출발한 뒤 1993년부터 연극 쪽으로 활동영역을 넓힌 작가는 2004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초대되어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을 연출하게 된다. 페스티벌 총감독 볼프강 바그너와의 사이에서 빚어진 갈등으로 인
해 상당히 시끄러웠던 준비 과정–후에 폐암 판정을 받은 작가는 이때 받은 스트레스를 발병의 원인으로 꼽았다–과 연출을 맡은 슐링엔지프의 존재로 인해 예술계 악동이 만드는 <파르지팔>이 과연 얼마나 센세이셔널할 것인지에 대한 기대감이 날로 고조되었지만 정작 막이 오르고 나타난 것은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무난한 무대였다. 평단과 관객의 호평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사실 피에르 불레즈가 지휘한 오케스트라였다는 사실이 다소 아이러니하다.
현 시대의 잔인한 현실 앞에서 절대 고개 돌리거나 외면하지 않은 슐링엔지프의 작업은 필터 없이 바라본 세상을 담고 있기에 다소 불편하게 다가올 수도 있지만 그 속에 담긴 메시지는 작가의 진정 어린 진심에서 비롯된 만큼 강렬한 설득력을 지닌다. 독일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소년이 성장하며 꿈꾸었던 삶과 예술의 일치는 서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공화국에 그가 세운 <오페라마을>에서 작가가 저 세상으로 떠나고 없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2011년 10월에 문을 연 초등학교에서는 현재 아이들이 교육을 받고 있고 약 5헥타르에 달하는 면적 위에는 초등학교와 관련 건물(카페테리아, 녹음실) 외에도 진료소가 완공된 상태이며 그 외 일반 주택과 극장, 작가 레지던스 건물 등이 앞으로 건축될 예정이다.
조형예술과 음악, 연극 장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크리스토프 슐링엔지프의 작품세계는 그 복합성과 장르 해체적 급진성 때문에 미술전시장이라는 맥락 안으로 끌어들이기가 결코 용이하지 않다. 많이 알려진 유명한 작업들이 주를 이루는 이번 베를린 전시는 그런 점에서 영리하고 현실적인 기획이었다고 하겠다. 또한 수많은 비디오작업과 설치작품들은 작가의 조형예술가적 면모를 확실하게 각인시켜준다. 전시장을 가득 채운 이미지들은 보는 이를 혼란스럽게도 하지만 이런 어지러운 무질서함 또한 슐링엔지프 작업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클라우스 비젠바흐가 공동 큐레이터로 참여한 이 전시는 2014년 1월 중순에 막을 내린 후 3월에 뉴욕으로 옮겨가 모마 PS1 현대미술센터에서 다소 달라진 모습으로 개막할 예정이다.
여러모로 성공적인 이번 전시에서 딱 하나 아쉬운 점을 들라면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주인공의 부재를 꼽을 수있을 것이다. 살아생전에 제도적 전시공간을 항상 비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접근했던 작가가 이번 전시를 함께 기획했다면 그 결과물은 분명히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을 테니. 외국인에 대한 인종적 혐오와 극우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결코 변하지 않는 정치판에 대한 불만과 불신 등 민감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의성 넘치는 테마를 다루었던 작가가 바라본 2013년의 세계는 과연 어떤 모순으로 얼룩진 모습이었을지 궁금하다. ●

이번 전시가 열리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이 당신이라고 들었다. 이 전시를 기획하게 된 상황을 설명해달라.
크리스토프 슐링엔지프의 작업은 미술과 정치의 경계가 사라지고 모든 관람객이 직접 행위의 주체가 되는 것을 지향한다. 그의 작업에 투영된 독일의 역사와 사회정치적 주제들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시의적이다. 전시를 열려고 생각한 시기는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작가와 구체적으로 논의하며 작업의 조형적 측면을 중점적으로 조명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다루는 주제들은 굉장히 복합적이지만 작가는 스스로의 작업을 강한, 어떤 의미에서는 도상학적인 이미지를 창조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전시 준비과정에서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작가는 하나의 완결된 작품보다 계속해서 현 시대의 문제를 제기하고 그를 심사숙고하는 작업을 중요시했고 이렇게 과정에 중점을 두는 것은 그에게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전시를 기획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끝없이 서로 맞물리는 개별 작품들을 전체적인 틀 안에서 바라보고 이해해야 했던 점이었다.
주인공인 작가의 부재가 전시에 끼친 영향이 있는가.
그는 생전에 엄청난 창작력을 발휘했으며 쉬지 않고 항상 뭔가를 만들어냈다. 어마어마한 양을 자랑하는 그의 작업은 그럼에도 부분적으로는 잘 기록되어 보관되고 있다.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퍼포먼스 작업의 경우 작가의 직접적인 지휘와 개입, 실행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그는 자신의 작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빈자리가 정말 크게 느껴진다.
전시작은 어떤 기준으로 선정했는가?
그간 작가가 다루었던 주요한 테마와 장르를 고루 전시하려 노력했다. 작업 초기부터 후기까지 그리고 영화,연극, 오페라, 설치작품과 퍼포먼스 등 모든 종류의 작업을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
이 전시는 3월에 뉴욕에서도 선보일 예정이다. 독일어가 많이 등장하는 작품과 외국(영어권) 관객 간 원활한 소통을 위해 큐레이터의 어떤 대책이 필요할까.
나는 슐링엔지프의 작업이 조형적 측면에서 그간 지나치게 저평가되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업 속 이미지들의 영향력은 매우 강렬하고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한편 작가는 <100년 동안의 히틀러>나 <독일 전기톱 살인사건> 등에서 볼 수 있듯 오랜시간 독일의 역사와 전형적인 독일적 주제들을 깊이 탐구해왔고 또 서구권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 식민주의나 인종차별, 종교와 교회, 질병과 죽음 등의 주제도 즐겨 다루었다. 그러므로 감상하는 데 언어로 인한 어려움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나머지는 전시실의 작품 설명문과 미술관 교육 프로그램으로 보완할 수 있을 거다.
관람객이 전시를 보고난 후 어떤 것을 얻어가기를 바라는가?
작가는 항상
관람객들에게 스스로 사고하고 사색하며 능동적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해
왔다. 우리 개개인이 얼마나 큰 정치적 책임과 힘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전시를 방문한 이들이 숙고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수잔네 페퍼(Susanne Pfeffer, 1973년生)는 베를린 훔볼트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후 쾰른 쿤스트페어라인과 이후 프랑크푸르트 현대미술관에서 전시 어시스턴트로 일하며 실무경험을 쌓았다. 브레멘 퀸스틀러하우스 관장을 지낸 후(2004~2006) 2007년부터 베를린 쿤스트베르크에서 큐레이터 겸 예술 감독으로 활동하며 뉴욕 모마 PS1 현대미술센터의 자문위원도 겸했다. 2013년 카셀 프리데리치아눔 쿤스트할레 관장으로 임명되었다.
베를린=신원정 통신원

[특별기획] 사적인 오진, 젊은 작가들에게

contents 2014.02. Special Feature | 사적인 오진, 젊은 작가들에게
강홍구 l 작가
‘젊은 작가들에게’라고 쓰고 나니 낯설다. 나도 아직 철이 안 들었고 들 가망도 없는데, 뭔가 좀 아는 것처럼 쓰려니 그렇다. 하지만 생물
학적 나이는 도저히 속일 수 없어 오늘도 어깨가 아파 진단을 받으려 대학병원에 들렀다. 한데 충격이다. 몇 달 동안 다녔던 동네 병원에
서는 오십견이 문제가 아니라, 아주 작은 석회화 건염이 문제라고 했는데 대학병원에서는 명백한 오십견- 즉 회전근개 문제이니 한 달
동안 날마다 사우나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오란다. 다시 한 번 놀랍다. 내가 체험한 동네 병원 오진율이 거의 70%에 육박한다. 잘 낫지
않아서 대학병원에 가면 견해가 다르고 처방과 치료는 간명하다. 절망적이고 우울하다. 동네 병원이라고 다 그런 수준은 아니라고 믿
고 싶은데 내 몸은 그렇다고 한다.
지금 내가 쓰는 이 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잡지사에서 내게 청탁한 글의 주제는 요즘 젊은 작가, 대체로 1980년부터 1990
년 사이에 태어난 작가들에 관해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동네병원일까, 대학 병원 수준일까? 아무래도 좋다. 그래야 글을 쓸
수 있으니까. 오진이라도 할 수 없다고나 할까? 동네 병원 의사들도 나 같은 기분일까?
작가가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일종의 병이다. 시간이 지나도 치유될 가망이 별로 없는 병이다. 요즘 젊은 작가를 그냥 그들이라고 부
르자. 나이는 대강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대 후반쯤- 한 십년 보자. 전시장과 작업실에서 본 그들의 작업, 그림, 설치, 영상, 공모전, 심
사 경험, 기타 등등을 생각해본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작품을 그럴듯하게 만드는 솜씨가 뛰어나다는 것이다. 자신이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작품처럼 보기
좋게 묶어내는 능력이 있다. 요는 포장 기술이 괜찮다. 그러나 포장을 풀어보면 별거 없다. 이때 별거는 내용이 심오하지 않다든지, 어
째서 사소한 문제를 다루고 있느냐는 질책이 아니다. 절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절실함이란 그 작가가 정말로 그 이야기를 꼭 하고 싶고,
해야만 했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건방진 충고 하나 하자면 좋은 작가란- 잘나가는 작가 말고- 세상에 대해 진짜로 자신이 꼭 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이때
이야기란 물론 내용이나 형식을 가리지 않는다. 아주 사적이어도 좋고, 아니면 공적인 것이라도 상관없다. 아니면 내용 따위는 아예 배
제하고 미술에 관한 새로운 형식적 시도도 좋다. 미술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군가의 작품이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긴지 아닌지 금방 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말로 설명할 수 있으면 작품을 왜 만들겠는가? 그리고 알 수 없다면 작업을 그만두
는 게 낫다.
다음으로는 기본적으로 작업이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전에도 그랬
다. 하지만 21세기가 시작되자마자 한 차례 불어닥친 상업적 성공의 열풍이 잘 팔리는 작가들을 생산한 뒤 그러한 예가 일종의 모델이
되어버렸다. 이 때문에 앞서 말한 포장 기술과 결합해 여러 가지 방식의 유행을 낳았다. 예를 들면 저주에 가까운 묘사 기술의 과시에서
부터, 현장과 사회와 개념을 그럴듯하게 어중간하게 묶는 프로젝트화, 사소한 트릭과 시시한 관념을 크게 확장한 빤한 설치와 일종의
알리바이로 동영상 활용하기, 전통적인 것과 디지털, IT 등을 적당히 한 다발로 묶기 등등. 이는 아마도 자신이 사용하는 매체에 대한 아
주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는데서 비롯되는 일처럼 보인다.
좋은 미술작품이란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것이다. 최소한 자신이 하는 작품의 장르에 관해 이게 도대체 뭔가, 관습적
인가 아닌가를 묻고 새로운 정의를 시도하는 뭔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다른 학문이나 예술 심지어는 일상적 삶조차 창조적이려면 반드
시 창조적인 질문이 있다. 그걸 어떻게 하느냐고? 내가 그걸 알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창조적인 것을 가르치는
기술은 없다. 단지 어느 게 창조적이 아닌지 말해줄 수 있을 뿐이다.
이것들 말고도 쓰면 뭐 좀 나오겠지만 더 이상 쓰는 것은 무의미하다. 청탁시 요구받은 원고의 양도 거의 다 찼다. 글을 다시 읽어본
다. 이 두루뭉술, 애매모호한 진단은 어디에 해당될까? 내 스스로 늙어가는 환자인 주제에 잔소리를 해도 될까 하는 의심이 인다. 위에
서 말한 내용들은 오진일 수는 있다. 하지만 작업을 한다는 것은 이 후진 세상에 대해 개인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길을 내는
것이다. 비록 그 길- 작업을 한다는 것이 결국 환상에서 시작해서 환멸로 끝나더라도 숙명이기 때문에 하는 거라면 다시 생각해봐야 하
리라. 너무 올드패션이라고? 어쩌겠는가? 나도 낼모레 육십이다. 나이 먹는 것이 어쩔 수 없듯이 올드패션이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불만이면 새로운 뭔가를 좀 보여다오. 충격받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