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누구라도 그렇지 않겠는가. 마음이 먹먹하고 답답하다. TV를 끄고 괜스레 넓지도 않은 집안을 서성였다. 책꽂이에 꽂힌 책 가운데 불현 듯 눈에 들어 오는 책이 있었다.《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한겨레출판, 2010). 혹여나 오해는 마시라. 제목만 보고 남녀사이 시시콜한 연애사 쯤으로 치부하지 말란 말이다. 이 책은 ‘비겁하게 살지언정 쪽팔리게는 살지 말자’는 마음가짐을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여성 언론인 김선주 선생의 칼럼 100여 편을 모아 놓은 책이다. 김선주 선생은 20대에 처음
《 조선일보》에 입사한 후《 한겨레》 창간부터 줄곧 거기서 활동하며 논설주간까지 지낸 인물이다. 현역에서 은퇴했음에도 여전히 후배 기자들이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언론계 선배로 손꼽는다. 책에 실린 글은 김 선생이 20여 년 동안 신문과 잡지에 발표했던 것들이다. 한사코 자신의 글이 부끄럽다고 말하지만, 사람을 바라보는 애틋한 시선과 세상을 바라보는 예리한 통찰의 문장이 빼곡하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은 김 선생의 글을 일컬어 “자신의 부끄러움에서 출발해 자기성찰로 이어진”, “김선주라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지금 우리-시대-존재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깨닫는 동시에 자기성찰을 위한 시간을 절대적으로 가져야한다.
이별에 대한 또 하나의 단상. 그러고보니 벌써 10년이 지났다. 2004년 4월 26일, 작가 박이소 선생이 이 세상과 이별한지 말이다. 당시 그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진 건 몇 개월이 지나서였다. 나는 그해 9월호에 부랴부랴 특집기사를 만들었었다. 나는 거기서 문학평론가 故김현 선생이 시인 기형도의 유고시집에 쓴 문장을 큰따옴표로 인용했었다. 앞서 먹먹한 마음을 김선주 선생의 책으로 갈음한 것처럼, 그 따옴표를 오늘 이자리에 다시 옮겨 적는다. “죽음은 늙음이나 아픔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육체가 반드시 겪게 되는 한 현상이다. 한 현상이라기보다는, 실존의 범주이다. 죽음은 그가 앗아간 사람의 육체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서 그의 육체를 제거하여, 그것을 다시는 못 보게 하는 행위이다. 그의 육체는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환영처럼, 그림자처럼 존재한다. 실제로 없다는 점에서, 그의 육체는 부재지만, 머릿속에 살아있다는 의미에서, 그의 육체는 현존이다. 말장난 같지만, 죽은 사람의 육체는 부재하는 현존이며, 현존하는 부재이다. 그러나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사라져 없어져버릴 때, 죽은 사람은 다시 죽는다. 그의 사진을 보거나, 그의 초상을 보고서도, 그가 누구인지를 기억해 내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될 때, 무서워라. 그때에 그는 정말로 없음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 완전한 사라짐이 사실은 세계를 지탱한 힘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는 동안 그(들)의 사라짐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박이소 10주기 개인전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한 어떤 것(Something for Nothing)>이 6월 1일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다.

편집장 이준희 dam2@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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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길( 이목구비 확인할 수 있게 밝게 해주세요)
김종길 미술비평
올해 4・3미술제 20주년 기념전 전시감독을 맡았다. 그는 10년 넘게 <4・3미술제>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진 4・3항쟁을 호출하는 데 앞장서왔다. 그는 4・3을 비롯한 삶의 현장에 뛰어들어 예술과 행동에 대한 사유를 몸소 실천하는 대표적인 비평가이자 전시기획자다. 최근 ‘샤먼/리얼리즘’이라는 새로운 비평적 개념을 제안함으로써 한국 미술사의 주체적인 시각에서 4・3항쟁과 같은, 국가폭력과 야만에 대항하는 궁극적 해방에너지를 탐색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김지연
김지연 예술감독
‘2014부산아트쇼’의 성공적인 마무리 뒤에는 김지연 예술감독이 있었다. 분명히 여타 아트페어와의 차별화에 성공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아트페어 곳곳에 전시를 진행해 관람객을 미술장터와 함께 진중한 전시를 경험하도록 유도했다. 아트쇼 폐막 후 며칠 휴식을 가져봄직도 하지만, 그녀는 ‘지리산프로젝트’, ‘제2회 창원조각비엔날레’ 등 다양한 프로젝트와 전시를 준비하느라 바로 출근했다고. 행사 준비도 좋지만 몸도 잘 챙기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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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라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2013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입사한 후 연속해서 다양한 전시를 담당하고 있는 큐레이터. 서울시립미술관에서도 이번 호 특집과 유사한 기획의 전시를 준비 중이라는 소식에 다짜고짜 연락을 취했다. 업무량이 많아 야근을 반복한 피곤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인터뷰에 응해 주었다. 대화가 오가며 열정적이고 힘이 넘치는 젊은 큐레이터의 모습을 보았다. 6월에 열릴 국내 거주하는 외국인 작가들의 그룹전 을 기대해본다.

[컬럼] 필요와 신뢰 그리고 자생의 공간

필요와 신뢰 그리고 자생의 공간

1997년 여름, <(가칭)300개의 공간展>은 아주 단순한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시대와 환경이 바뀌고 있음을 감지한 작가를 비롯 미술계 젊은 일꾼들이 그나마 가능한 정보를 서로 자발적으로 교류해보자는 의도였다. 당시의 환경은 그야말로 황무지였다. 몇몇 작가에게는 등기우편 또는 전보로 전시참여 의사를 묻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며, 그나마 신세대인 젊은이들에게는 삐삐라는 무선호출기가 보급되어 비교적 수월하게 업무를 진행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큐레이터 명함을 지닌 이들은 손에 꼽혔으며, 대부분 전시공간에 컴퓨터는커녕 팩스조차 없었다. 그 흔한 기관의 지원은 경력이 미천한 젊은 작가들에게는 무의미했으며 기금공모 기간조차 아는 이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20여 명의 전시공간 ‘실무자’가 모여 자신들이 알고 있는 작가들의 목록을 서로 교환하며 현장에서 진짜로 쓸모 있는 데이터를 만들어보고자 힘을 모았다. 각 실무자들이 5~10명 내외의 작가를 추천하여 중복된 작가들이 있을 경우 300명이 될 때까지 계속 추천을 더 받는 복잡하지 않은 방식으로 일을 추진했다. 혹 물의가 있을 수 있어 다수 중복 추천된 명단은 실무자들끼리만 공유하며 되도록 외부에 공개하지 않음을 원칙으로 했다. 당시 대부분 기관장이나 전시공간의 관장들은 권위를 내세워 특정 학력 또는 공모전 특선 이상 경력을 가진 작가를 선호하던 시기여서 기존의 모든 타성을 버리고 오직 실무자의 소신으로 작가를 추천하도록 유도했음은 물론이다. 단, 이 행사의 가장 큰 걸림돌은 소요경비였다. 어떤 정치적 이슈도 조형적 이념도 아닌 미술현장 실무자들의 단순한 정보교류 성격의 자발적 행사에다 어떤 기관의 지원과 관여도 없는 탈권위적 행사였기에 재원을 마련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고육지책으로 십시일반하자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실무자와 작가 모두에게 일정의 비용이 부담되었다. 돌이켜보면 작가와 실무자들의 ‘필요와 신뢰’가 소요경비를 비롯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큰 비결이었던 셈이다.
농담으로 미술현장에서는 양식산과 자연산을 구분한다. 주는 것만 받아먹어 수렵과 채취에는 허약하지만 곱게 자라 고귀한척 하는 부류와 어디에 갖다 놓아도 굶어 죽지는 않으나 길들지 않아 다소 엉성하고 거친 야생의 부류를 의미한다. 어차피 미술현장은 현대미술 초기부터 굳건하게 유지된 사다리 구조에 속하지 못한, 불만과 불안에 가득 찬 대다수 자연산들로 득실댄다. 그래서 개체수로 보아 자연산이 더 우세일 것 같으나 막상 현장에서 만나는 이들은 양식산 성향이 더 짙다. 아마도 양식산은 가늠이 가능하나 자연산은 이름 그대로 야생이기에 그들의 성깔과 습성 또한 제각각인지라 파악하기 난해한 탓이리라. 이제 와서 굳이 <(가칭)300개의 공간展>의 성과를 들추자면 딱딱하게 굳은 메마른 땅에 아직 덜 갖춰진 유연한 창작의 감성을 작가와 실무자가 힘을 합쳐 ‘내 땅 갈아 내가 먹기 식’으로 대거 주입시킨 일이었다.
요사이 넓어진 문화지평에서 흔히들 창작 또는 예술활동과 단순 문화행사를 너무 쉽게 혼동한다. 특히 기관의 지원을 받는 행사인 경우, 자신들이 행정 그리고 복지 차원의 일에 복무한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물며 일정 비용을 받고 투여되는 행사인 경우 그 목적에 부합한 용역을 요구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개별 창작자나 행사 주관자 또는 실무자에게 행사에 참여 할지 결정하는 데 신중함이 요구된다. 그리고 자신의 습성과 어울리지 않다면 가볍게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행사 참여로 개인적으로 얻는 성과 또는 실적 올리기에 급급함을 떠나 그 결과의 득실이 행사에 참여한 모든 이에게 본의 아니게 영향을 주기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더구나 구태의연한 행정이나 얍삽한 처세술을 예술행위 또는 권위라 착각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은 탓에 작가나 실무자 모두 쉽게 판단할 일이 아니다.
부실한 난파선에서 그나마 서로에 대한 신뢰가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은 무척 건강한 환경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요즘 현실의 면면에서 체감되는 남한 사회를 비롯한 창작환경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신뢰에 선행되어야 할 의사소통 자체가 어긋나고, 행정 또는 여론의 과잉으로 비판의 대상자가 잘못 설정되거나, 생산 없이 유통 경쟁만 부풀려지는 식상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족분단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를 낳는 세대단절은 한동안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다. 모두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이 절실하다.

최금수·이미지올로기연구소 소장

[핫피플] 2015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이숙경

2015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이숙경

커미셔너와 작가의 파트너십을 기대한다
1995년 건립된 베니스비엔날레의 한국관이 2015년 건립 20주년을 맞이한다. 한국관은 그동안 한국 현대미술이 국제 미술의 맥락에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2008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을 역임한 오쿠이 엔위저(Okui Enwezor)가 진두지휘하는 2015년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 미술전(5. 9~11. 22) 한국관 커미셔너로 이숙경 영국 테이트미술관 큐레이터가 선정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커미셔너를 지명하는 종래의 방식에서 탈피해 최종후보 4명이 작가 및 전시 기획을 제안하고 이를 토대로 선정하는 절차를 밟았다. 이로써 이 커미셔너가 제안한 문경원 전준호 작가가 2015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최종 선정됐다.
이숙경 신임 커미셔너는 “이번 기회를 통해 동시대미술의 가장 첨예한 이슈들을 다룰 뿐 아니라 그 미래 또한 이끌 수 있는 선각자적 시각을 제안하고 싶다”며 “중심과 주변이라는 틀이 깨지고 상대성과 다양성이 중시되는 오늘의 미술계에서 한국 미술 또한 전지구적 미술 담론의 중요한 일부임을 강조할 생각”이라며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문경원, 전준호를 한국관 작가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두 작가는 카셀 도쿠멘타, 올해의 작가상, 광주비엔날레 등 국내외 다양한 플랫폼에서 지난 수년간 주목할 만한 작품을 보여주었다. 미술뿐 아니라 디자인, 건축, 영화, 문학 등 미술 외적 분야 전문가들과의 협력을 통해 광범위한 인류 생존의 문제, 미술의 본질적인 역할 등 한국이라는 지리적, 문화적 조건을 넘어서는 보편적 이슈들을 다룬 점이 내게 긍정적으로 보였다”고 말했다.
2015년 한국관 전시를 위해 두 작가는 이전에 보여온 작업의 연장선 위에 있으면서도 새로운 예술적 도전이 될 만한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 신작의 내용과 전시로 구현되는 방식은 아직 구체적으로 확정되진 않았다. 작가 문경원 전준호는 2012년 카셀 도쿠멘타에서 첫선을 보인 프로젝트 <미지에서 온 소식(News From Nowhere)>부터 공동작업을 해왔으며 후속작 <순수존재(AVYAKTA)> 이후 특히 영상작업을 통해 활발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최근 두 작가는 분단국의 특수한 상황을 통해 삶과 예술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반영한 단편영화 <묘향산관>과 루이비통코리아의 후원으로 전통 악기장 이영수·이동윤 부자의 ‘장인정신’을 현대미술 다큐로 풀어낸 <공무도하가>를 제작 중이며 올해 하반기에 발표할 예정이다.
문경원, 전준호를 비롯해 최근 미디어아티스트들이 다양한 협업의 과정을 통해 영화를 선보이는 현상에 대해 이 커미셔너는 이렇게 말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등장한 비디오아트가 시간적 요소에 바탕을 두고 기계적으로 생산된 이미지를 기본 개념으로 했다면, 최근 보이는 영화적 영상 작품들은 확장된 혹은 해체된 시네마 등, ‘영화’의 내러티브 및 시각적 관행에 대한 질문에 바탕을 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문경원 전준호 또한 주류 시네마의 언어를 의도적으로 도입하여 익숙한 듯하면서도 비관습적인 시각적 내러티브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현재 이 커미셔너는 올해 하반기 테이트 모던에서 열릴 백남준 신소장품 전시를 준비하고 있으며 테이트 모던의 신관 개관을 위한 소장품 전시와 기획전 큐레이팅에 참여하고 있다.
이슬비 기자

이숙경은 1969년 서울에서 태어았다.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예술학을 전공했고 영국 에섹스 대학교에서 미술사와 미술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홍익대학교 강사 등으로 활동했으며 2006년 영국예술위원회 펠로우 큐레이터로 한국 현대미술전을 포함한 다수의 전시를 기획했다. 2007년부터 테이트 미술관 큐레이터로 활동하면서 백남준, 더그 에이트킨 등 대규모 기획전과 다수의 소장품 전시를 기획했으며 테이트 아시아태평양 작품 구입위원회 큐레이터를 겸임하고 있다.

준호경원 (2)

문경원 전준호 <세상의 저편> 2012 광주비엔날레 전시광경

 

[핫피플] 제5회 ‘홍진기 창조인상’ 문화부문 수상자 서진석

제5회 ‘홍진기 창조인상’ 문화부문 수상자 서진석

대안공간 1세대, 혁신적인 창의성을 인정받다
서진석 대안공간 루프디렉터가 제5회 ‘홍진기 창조인상’문화부문을 수상했다. ‘홍진기 창조인상’은 재단법인 유민문화재단과 <중앙일보>가 제정한 시상제도로 매년 과학·사회·문화부문에서 “혁신적인 창의성을 바탕으로 기존 가치를 넘어선 새로운 가치를 선도한 개인이나 단체”를 선정해 시상한다. ‘홍진기 창조인상’은 공적 중심의 시상에서 탈피하여 앞으로의 부문별 기여 가능성에 무게를 두어 시상한다고. 대표적인 역대 수상자로는 반크(사이버 외교사절단, 1회,사회부문), 박종선(가구디자이너,2회,문화부문), 이자람(공연예술가,3회,문화부문),박재상(PSY,대중음악가,4회,사회부문)등이 있다. 상금은 500만원.
1999년 대안공간 루프를 개관한 이래 우리 대안공간의 산증인 역할을 했던 그이기에 이번 수상의 감회가 남달랐을 터. 그 소회를 물었다. 꼭 수상을 계기로 질문한 것이 아니라 현재 별다른 담론 제기가 전무해 동력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미술계가 과거로부터 무엇인가 취득할 단서가 있는지 궁금했다. 그는 “사실 15년 전과 지금의 한국 미술계는 너무나도 다르다. 1990년대 한국 미술계는 유형적, 무형적 미술의 향유시장이 부재했기 때문에 창작과 매개영역이 심하게 왜곡되는 현상이 팽배했다. 대관화랑의 비율이 95%가 넘었다는 것이 그 방증이다. 이러한 1990년대 한국 미술계에서 대안공간들의 초기 활동은 그 공유되는 목적의식이 뚜렷했다. 젊은 작가 발굴, 지원과 이를 통한 창작-매개-향유의 거시적인 순환구조 확립. 즉 형식이 내용적 대안이 될 만큼 젊은 작가 지원이 절실한 시기였다”며 “결과적으로 루프를 비롯한 초창기 대안공간들과 참여 작가들은 서구 주류 미술계와 한국미술의 간극을 줄였다”고 말했다.
물론 당시에 기치로 내걸었던 ‘대안’이 지금 2014년에 통용되는 ‘대안’과 그 뜻을 같이할 리는 없다. 아니 시간을 거치면서 그 의미는 매번 달라졌을 것이다. “예전에 대안성은 한국 미술계의 대안성이었지만 지금의 대안성은 아시아, 더 나아가 세계미술계의 대안성이 되어야 되는 시기가 되었다.” 글로컬 시대 한국미술은 세계와 교유하며 한 축을 이루고 있다는 설명이다. “대안공간 루프도 2005년 이후 디지털기술의 발달, 후기자본주의 시작, 아시아성의 재정립이라는 시대적 어젠다를 중심으로 또 다른 대안성을 모색해왔다. , <비디오아카이브 네트워크포럼>, <아시아 창작공간 네트워크>, <예술과 자본> 등의 국제 행사들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이 답변에서 디렉터가 열거한, 대안공간 루프가 변화의 시기에 수행했던 프로그램이 바로 이번 수상의 이유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 디렉터는 이에 덧붙여 “미술계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생태계를 형성하고 다양한 예술 창작활동이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대안공간 루프의 발전적 활동을 위해서는 예술정책, 예술교육, 국내외의 전시기획 등등 예술 사회의 다면적인 환경 변화도 매우 중요하다”며 그간의 능동적인 행적의 이유를 설명했다.
그간의 공적뿐만 아니라 앞으로 지속가능한 문화분야에 대한 기여도도 참작해 수상자로 선정된 만큼 이후 행보를 물었다.
“8월 말 광주에서 문화관광부가 주최하는 아시아 창작공간 네트워크 행사의 일환으로 <아시아 민주주의의 거울과 모니터전>을 준비하고 있다. 아시아 민주주의의 다양한 양상과 공공예술을 선보일 예정이다. 또한 중국에서 한국의 신진작가 그룹전도  개최될 예정이다.
황석권 수석기자

서진석은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원대 응용미술과와 시카고 미술대학원, 필라델피아 텍스타일 과학대학 PCT&S를 졸업했다. 1999년 대안공간 루프를 설립 현재까지 디렉터를 맡고 있다. 대구사진비엔날레 운영위원, 인천아트플랫폼 운영위원, HOMA 운영위원 등을 맡고 있으며 경원대(2007~2010), 경희대(2009)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2001년 ‘티라나비엔날레’(2001), ‘리버풀비엔날레’(2010) 등 다수의 국제 비엔날레의 기획에 참여했고 쿤스트할레 뒤셀도르프, 센트럴이스탄블, 카사아시아, ZKM 등과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또한 《150아시아현대미술작가》, 《예술과 자본》, 《동양적 은유》 등의 미술서적을 기획,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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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대안공간 루프 구관(舊館)에서 열린 ‘작가 만들기 매니저’ 김홍석 기획 <레트로비스트로전> 광경

 

[Sight & Issue] 제주 4・3, 기억 화해 치유

제주 4・3, 기억 화해 치유

1894년 갑오년의 동학민중혁명으로부터 두 갑자가 돌았다. 새날 새 세상이 올 것인가? 하늘 모심이 사람 모심이고(侍天主),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며(吾心卽汝心), 내 안에 하늘 기르기(養天主)의 철학이 들 싹으로 피어야 한다. 나(주체)와 너(타자)를 폭력적·강제적으로 구분했던 위험사회의 현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동학의 포접제(包接制)는 계급적 조선사회를 변혁하려는 사회적 대전환이요, 아방가르드 운동의 요체였다. 접(接)마다 접주(接主)를 두었던 것은 신라 최치원의 접화군생(接化群生)과 상통한다. 모든 생명과 만나서 관계를 맺고 변화하라는 그 정신! 하늘·땅·사람·정신·마음을 공공(公共)하는 철학으로서 “지극한 기운이 오늘에 이르러 크게 내리도록 빕니다. 하늘님을 모셔 조화가 정해지는 것을 영세토록 잊지 않으면 온갖 일을 알게 됩니다(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를 주문했던 그 실심(實心)을 위해서!
동학 100주년이던 1994년 제주 4・3미술제는 시작되었고 올해 20주년이 되었다. 1948년 4・3사건이 터진 뒤 46년이 흐른 뒤였다. 1988년 무렵 제주 미술동인 ‘바람코지’ 작가들이 미학적 접근을 시도했으나 본격화한 것은 그때였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올해 4・3미술은 새로운 방향타를 제시하고 나섰다. 동학의 접화군생과 다르지 않다. 첫 접화는 미국의 캘리포니아 샌타로사시(市)다. 그곳 소노마카운티미술관에서 지난 2월 7일부터 5월 4일까지 <동백꽃지다 : 제주 4・3을 다룬 한국의 현대미술가들전>이 개최된 것이다. 소노마카운티는 제주와 자매도시를 맺고 있는 곳이기도 하고, 더군다나 4・3사건이 미군정기의 일이라 전시 장소의 상징은 매우 컸다. 기억, 화해, 치유 등 세 개의 주제로 구성된 이 전시는 로비와 아트숍을 비롯해 기획전시실과 소전시실까지 1백여 평의 1층 공간을 가득 채웠다. 아트스페이 씨의 안혜경 디렉터가 기획하고 다이앤 에반스 관장과 소노마카운티의 작가 마리오 우리베가 서로 공공하는 예술기획으로 협력해서 탄생시킨 전시는 향후 4・3미술 국제교류의 신호탄이 될 것이 분명하다. 소노마카운티미술관은 전시개막 후 첫 토요일과 일요일을 ‘특별주간’으로 기획했는데, 토요일 오전에는 강요배 작가의 4・3미술 연작 작품으로 4・3사건의 전개과정에 대한 강연과 4・3중앙위원회 전문위원을 지낸 김종민의 “제주 4・3민중항쟁과 미국” 주제 강연이 진행되었고, 오후에는 캘리포니아대 크리스틴 홍 교수의 “한국전쟁” 주제 강연과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 상영회가 있었다. 일요일에는 소설가 현기영의 “기억투쟁으로서의 문학” 주제 강연, 임흥순 감독의 시적 다큐멘터리 <비념> 상영회, 필자와 캘리포니아대 민영순 교수, 작가 강요배의 토론회, 그리고 딘 볼세이 리임과 램지 리임 감독의 다큐멘터리 <잊혀진 전쟁의 기억> 상영회가 진행되었다.
두 번째 접화는 4월 1일부터 20일까지 제주도립미술관에서 개최한 <오키나와 타이완 제주 사이 : 제주의 바다는 갑오년이다!전>이었다. 4・3미술제 20년 만에 처음으로 예술감독제가 도입되었고 필자가 그 역할을 맡았다. 그동안 4・3미술제는 탐라미술인협회의 프로젝트형 기획전시였으나 이번 전시에서는 제주미협, 한라미협을 비롯해 국내외 작가들을 대거 초대하여 국제전으로 치렀다. 접화군생의 핵심이 다른 생명들과의 만남, 관계 맺기, 변화이기에 4・3을 제주로부터 아시아로 확대해 전유하고 공유하는 공공지(公共知)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66년이 된 4・3사건은 이미 한국사회에서 잊혀진 지 오래일뿐더러, 제주 밖의 사회가 4・3사건을 회억하거나 또는 그것을 미학적 사건으로 기획하려는 시도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키나와는 2차 세계대전 중 10만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고, 타이완에서는 1947년 2월 28일 중화민국 통치에 맞선 본토인들의 항쟁으로 3만여 명이 희생했던 2・28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1948년 제주 4・3사건이 벌어졌다. 쿠로시오 해류를 따라 동아시아 세 섬에서 벌어진 이 비극적인 학살은 21세기 새로운 동아시아를 상상하기 위해서 반드시 풀어야 할 평화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40여 명이 참여한 이 전시도 또한 제주 내에서 시작한 국제교류의 첫 신호탄이라 할 것이다. 안팎으로 제주 4・3미술이 확장되고 있다. 공공하는 예술로서 4・3미술은 홀로주체가 아니라 서로주체의 서로 삶을 위한 미술운동이 되고 있는 것이다.

김종길・미술비평

제인 진 카이젠  5채널 비디오 설치 2011

제인 진 카이젠 <거듭되는 항거> 5채널 비디오 설치 2011

[특별기획] Artist-Bernd Halbherr

웰컴 투 코리아!
한국의 외국인 작가들

통계청이 2013년 10월 발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국내체류 외국인은 150만 7000명. 인구대비 3%가 넘는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셈이다. 이제 대중매체나 일상에서 이들을 마주하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한국미술은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 작가들에 대해 어떻게 다가가고 있는가. 한국현대미술을 ‘한국인이 만든 현대미술’로 이해한다면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작가는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만든 현대미술’이라고 정의 내린다면 국외에서 활동하는 한국작가는 포함되지 않을 수 있다. 국가 간의 물리적ㆍ심리적 이동이 가속화되고 국가 간 경계가 흐릿해진 지금, 우리가 말하는 한국현대미술의 화살표는 누구를 혹은 어떤 곳을 향하고 있을까.
《월간미술》은 너무나 일반적인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 작가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와 작품을 소개한다. 이들은 우리와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을 함께 지켜보며 같은 장소의 문화를 공유하며 살아간다. 한국에 기반을 두고 해외 각국을 오가며 작업하는 외국인 작가들은 한국에 대한 색다른 시선을 갖는 동시에 한국인 작가와 공통된 고민을 하고 있다. 이번 특집은 외국인 작가를 소개하며 또다시 이들을 타자(the other)로 구분짓기를 원하지 않는다. 다만 한국과 해외를 오가는 한국작가들처럼 이들도 한국미술계의 당당한 일원으로 읽혀지기를 바란다.

베른트 할프헤르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은 예술이 언제나 요구해왔던 지점이다. 물론 할프헤르의 작업도 그러하다. 원구와 사진을 접목한 작업 시리즈는 방 안 전체를 촬영하고 이를 원구의 조형물에 옮긴 것이다. 이 시리즈의 작업에서 거울이미지란 바뀌는 것이 아니라서 인간의 인지 메커니즘은 제거되고 일시적인 가변성 바깥에 고정된 사진이미지로 존재하게 된다. 그의 작업은 이해의 근원에 의문을 제시한다.”
– 스태판 본 비즈(뒤셀도르프 예술궁) 관장

급격하게 변하는 도시 속의 소외

한국에 오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1993년 뒤셀도르프 예술대학에서 수학하고 많은 곳을 여행했다. 한국에 대해서는 문화적으로 막연하게 궁금했다. 당시 여자친구(현재 부인)의 영향도 있다. 그러던 중 2003년 서울의 레지던시에 참여하게 되었다. 2006년에는 하제마을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한국의 어떤 문화가 특히 신선한가 한국사회는 정말 빠른 속도로 변화한다. 내가 한국에서 산 지 채 10년이 되지 않았지만 많은 것이 변했다. 그동안 내가 작업했던 숭례문은 불탔고, 현재는 그 자리에 복원된 숭례문이 서있다. 나의 집 앞에는 일년 사이에 6채의 빌라가 세워졌고 그 과정에서 집 앞을 둘러싸고 있던 숲은 딱 한나절만에 사라졌다. 그 정도로 한국사회는 변화의 속도가 빨라 작가로서는 신기하고 독특한 체험의 공간이다. 또 한 가지 인상깊은 점은 아이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다. 독일에서는 타인의 아이에게 관심이 없다. 그러나 한국은 아이에게 굉장한 관심과 사랑을 전한다. 아이에게는 모두가 열린 마음을 갖게 되고 따뜻한 시선으로 다가온다.
독일과 한국은 생활뿐 아니라 작가로서 작업 환경이 다를 것 같다 물론 다르다. 유럽의 현대미술은 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차근히 밟아온 흐름이 있다. 1960년대 이후부터는 현대미술이 본격적으로 대중에게도 인식되기 시작했다. 현대미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한국보다 보편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전시 공간, 컬렉터 등 많은 부분에서 독일의 시장이 더 클 수 밖에 없다.
외국인 작가로서 한국에서 전시하고 활동하는 데 제약은 없는가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힘들다기보다는 여느 작가와 같은 고민을 한다. 아이의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갖게 되는 어려움이지 외국인 작가이기 때문에 갖는 고민은 아니다. 사실 한국에서 외국인 작가는 전시에 첫발을 들이기는 오히려 쉬운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가지는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업하면서 좀 더 다양한 지역에서 전시를 하려고 하면 그때부터 어려움에 봉착하곤 한다. 서울을 벗어나 다른 지역에서 전시하기가 쉽지 않다.
사진을 보이는 방법이 독특하다 구형의 사진작업을 학생 때부터 해왔다. 사진을 찍으면 내가 원치 않게 앵글에 다 담지 못하고 놓치는 부분이 생겼다. 소외되는 부분을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파노라마를 선택했고,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을 구상하다가 구형을 선택했다. 사실 파노라마 방식은 르네상스 시대 유럽 성당의 반구형태 천장화에서도 나타난다. 비디오를 사진으로 풀어내는 작업도 이와 유사한 맥락이다. 기본적으로 대학 때부터 과학, 기술을 작업에 접목시키는데 관심이 있었다. 최근에는 5월 14일부터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에 참여하기 위해 최근에는 3D 프린터를 사용하는 작업을 준비 중이다.
기본적으로 공간에 대한 관심이 작품에 반영되었다고 들었다. 한국에서 작업하면서 특히 관심을 가진 장소가 있는가 한국에서 작업하기 때문에 이곳의 풍경과 공간을 담는다. 그러나 그 나라의 특정한 장소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예가 여러 나라에 있는 축구경기장이다. 독일에서 작업할 당시에 축구장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축구장은 수천명 관중의 시선이 경기하는 운동장으로 향한다. 나는 수많은 시선이 집중되는 운동장의 자리에서 카메라라는 하나의 시선으로 그곳을 둘러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를 볼록한 구형태로 나타냈다. 다수와 소수의 시선이 교차하는 것 자체가 흥미롭지 않은가. ●

베른트 할프헤르는 독일에서 태어났다. 독일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학사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6-2009년에 파주의 하제마을 스튜디오에서 작업했다.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12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현재 중앙대 조형예술학과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www.berndhalbherr.de

 photography, coated with plastics 2013

photography, coated with plastics 2013

[특별기획] Artist-Simon Morley

사이먼 몰리

“나는 자기 표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매체가 표현의 영역에서 가진 잠재성을 끌어내기 위해서 나는 서두르지 않고 좀 더 복잡하게 시각적으로 대응해서 ‘보기’와 ‘읽기’ 사이의 차이를 모호하게 하고자 한다. 나는 배경과 인물 사이의 관계에 혼란을 야기한다.
무엇이 강조되는가와 읽혀지거나 그렇지 않은가 ‘사이’의 차이 말이다. 본인이 만들어내는 시각적인 효과란 변형이나 분명하지 않은것으로 묘사될 수 있다.”
– 사이먼 몰리

사이를 포착하다

한국의 전통 문화적 요소를 직접적으로 작품에 표현하는 작가다. 작품에 대한 소개 부탁한다 내 작업은 특정한 문화와 역사적인 현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내가 있는 곳의 맥락을 파악하고 표현하는 데 관심이 있다. 요즘은 전통방식을 모던화하는 작업을 하는 나의 파트너 장응복 디자이너에게 도움과 영향을 많이 받는다. 나는 동아시아의 정신과 철학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기본적으로 책에 대해 관심이 있다. 내 작품에 나타난 텍스트를 읽으면 이미지가 보이지 않고, 작품에서 조금 떨어져 이미지를 보면 텍스트가 보이지 않는다. 내가 하는 작업은 그 ‘사이’ 어딘가를 보여주려 한다. 서구와 한국, 어제와 오늘, 이미지와 텍스트 음과 양 등의 분명하지 않은 경계 등 말이다. 한국 문화는 오랜 시간 이를 고민해왔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한국에서의 작업은 그 부분에서 의미가 있다. 내 이름이 ‘사이’몬 인 것은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지하지 못하지만 존재하는 것에 집중한다.
외국인 작가들이 한국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경제적인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한국에 온다. 프랑스, 스페인 등의 유럽 국가에 비해 한국의 경제사정이 낫다. 또 한 가지는 서양인들에게 한국이라는 나라가 예전보다 훨씬 알려진 것도 한몫했다. 내 주변을 둘러보면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아직도 분단국가로서 가지는 위험성을 떠올리고 이를 걱정하는 인식이 강하지만 예전에 비해 한국에 대해 훨씬 자세하고 다양한 측면이 알려진 것은 사실이다. 거주가 아니더라도 한국을 방문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내 주위에도 많다.
한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외국인 교수에 대한 대우는 어떠한가 사실 객원교수가 되기까지는 비교적 쉬운 편이다. 현재 한국에서 외국인은 종신교수가 불가능하기에 그 이상의 직책으로 나아갈 수 없다. 나 역시 매년 계약을 갱신하고 있다. 이건 미술뿐 아니라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라고 들었다. 이런 부분은 한국인들도 외국으로의 이동이 많아지는 만큼 서로가 서서히 변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 에 참여한다고 들었다. 한국에서 작업하는 외국인 작가에 주목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느끼기에 한국 미술계는 주목할 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 작가들과의 활발한 문화적 혼성과 융합 노력이 부족한 것 같다. 이런 점은 미술계의 다양성을 막는다. 이동과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미술에 대한 공통된 취향이 생겨나기도 했다. 서울은 시각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이미 많은 외국인이 살고 있다. 더 이상 외국인이 주변에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그렇지만 미술계에서 여전히 작가는 국적으로 나뉘어 지는 경향이 짙다. 그런데 예술가는 기질적으로 새로움을 찾고, 어지럽게 무엇인가를 섞고 혼합하는 성향이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미술에서의 활발한 교류와 접목은 어느 분야보다도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

사이먼 몰리는 1958년 영국 이스트본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대에서 근대사를 전공하고 골드스미스대에서 파인아트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1년부터 한국과 일본 및 유럽 각국에서 19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저서로는 《Writing on the Wall》《L’Art Les Mots》등이 있다. 현재 단국대 예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www.simonmorley.com

acrylic on canvas 40×30cm 2011

acrylic on canvas 40×30cm 2011

 

[특별기획] Artist-Tallur L. N

탈루 L. N

“진단: 난기류(Turbulence)란 리듬을 잃은 상태라 할 수 있다. ‘가속’에 대한 희망과 함께 뿌려져 ‘속도’에 대한 탐욕으로 자라난 씨앗이다. 전무후무한 속도로부터 탄생하는 흥분! 쾌락!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바로 그 속도 자체에 대한 두려움! 결과: 크로마토포비아, 즉 돈에 대한 공포이다.”
– 탈루 L. N

현대사회의 공통된 고민

다양한 주제의 작품 중 돈을 소재로 한 작업이 있다. 이 작업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2000년대 후반 급격한 경제성장과 함꼐 미술계에도 붐이 일어나면서 예술의 내용보다 돈의 가치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때부터 돈의 개념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16세기의 중국의 승려 포대화상은 현대에 와서 부의 상징으로 변했다. 여기서 생각을 발전시켜 돈과 관련된 아이러니한 상황을 주제로 작업했다. 사람들은 돈이 많든 적든 돈을 사용하는 데에 두려움을 느낀다.의 경우는 이에 대한 일종의 테라피로서 작용한다.
세계 공통적이고 일반적인 고민을 주제로 작업한다고 보여진다 나는 인류의 생각과 고민에 무언가 유사한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난 늘 생각의 경계를 지양한다. 내가 느끼기에 한국은 민족주의적인 의식이 강한 편인 것 같다. 내 작업은 그다지 민족주의적이지 않다. 비자와 여권만을 있으면 어느 나라든 방문할 수 있는 시대이다. 각 나라만의 경험이 있고 특징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나는 그 경계를 허무는 데 관심이 있다. 개인적으로 내가 백인 남성이 아니기 때문인지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것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과 질문을 많이 받는다. 이러한 경계들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고립된 섬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에 오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한국인 아내를 만나 8년 전에 한국에 왔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과 인도를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한국의 겨울에는 인도에서 거주하고 나머지 시간은 한국에서 거주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거주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예술가로서 지속적인 이동은 좋은 조건이라는 생각에서 비롯했다. 대학에서 파인아트를 전공한 후 공예에 매료되어 공예를 전공했다. 그러나 그러한 기술적인 측면에 집중한 나머지 창의적인 예술적 사고의 발목이 붙잡히기도 했다. 뭔가 새로운 것이 필요했다. 한국은 문화적으로 인도와 매우 다르기 때문에 사소한 것 하나까지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내 생각에 25세 이후 세상을 바로보고 결정하는 판단근거가 고착되게 된다. 하지만 새로운 곳으로의 이동은 모든 것을 재고(re-thinking)하게 만드는데 이것이 예술가에게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리적인 이동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한다.
해외와 비교했을 때 한국의 미술시장 진입에 외국인 작가로서 겪는 어려움이 있는가 한국에서 내 작품을 구매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내가 한국에서 전시를 열면 오직 유럽인이나 미국인들만이 내 작업을 컬렉팅할 뿐이다. 한국의 컬렉터들은 작업이 좋아서 관심을 보이기보다는 미술시장의 영향력에 따라 작업을 고른다. 이런 경향은 미술시장이 확대되는 것을 가로막는 문제점이라고 본다. 그러나 내 경우는 새로운 매체를 많이 사용하여 관심을 받는 편이며 소속 갤러리가 있어 전시와 그 외 기반에 많은 지원을 받고 있다. 작업이 한국에서 판매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 작업을 돕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외국인 작가로서 한국에서 작업하면서 아쉬운 점이 있는가 사실 한국 작가들과 교류할 일은 극히 드물다. 매우 적은 수의 예술가하고만 깊게 작품의 이야기를 한다. 내가 느끼기에 한국 작가들은 의견을 내는데 굉장히 조심스러운데 이런 부분은 인도사람의 태도와는 매우 다르게 느껴진다. 그들의 감정 변화와 표현을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다. 개인의 의견을 주장하기 보다는 한 사람이 좋다고 이야기하면 모두가 따라가는 경향이 짙은 것 같다. ●

탈루 L.N은 1971년 인도 카르나카에서 태어났다. 인도의 미소르대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발로다의 마하라자 세이야이지로대에서 박물관학, 영국 리즈 대에서 현대미술 석사학위를 받았다. 인도, 미국, 한국 등에서 14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세계 각국에서 열리는 그룹전에 참여했다. www.tallur.com

MM_TR (1)

Wood, two bronze sculptures and nailed coins 500×200×300cm 2010

 

[특별기획] Artist-Ingo Baumgarten

잉고 바움가르텐

“나는 그리 새롭지도 않지만 그다지 오래되지도 않은, 그러나 나의 눈에는 진정으로 한국적인 건축양식을 대변하는 듯 보이는 어떤 집들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 최근 점점 사라져가는 주택의 모습은 그것이 한 때 가졌던 가치들이 소멸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 이처럼 사라져가는 한국의 건축양식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때로 과거에 대한 향수나 낭만적 기분을 자극하기도 한다.”
– 잉고 바움가르텐

한국의 주택에서 찾는 도시 이미지

한국에 오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고등학교 재학 때부터 해외로의 이동을 꿈꿨다. 군대 문제로 오스트리아로 이동하고픈 꿈이 좌절된 한참 후 프랑스로 공부를 하러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여해 영국으로 가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경험들에서 나의 정체성과 상반되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에 예술가로서 많은 자극을 받는다. 그러던 중 역사 문화적으로 유럽과는 매우 다른 아시아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20년 전에 한국에 처음 오게 되었다. 프랑스의 석사과정 중에 지도교수인 폰튜스 훌텐(퐁피두센터의 첫 디렉터)이 대전엑스포에 초대받았고 당시 그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나의 첫 아시아 국가 방문이었다. 이후 일본에서 4년간 살던 중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홍익대 교수에 임용된 후 지금까지 한국에서 살고 있다.
현재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어떤 점에 중점을 두고 있는가 내가 생각하는 것을 잘 설명하려고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 유럽의 미술과 한국미술 사이에 개념적 대립이 분명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을 가르치고 있다. 유럽 예술이 좀 더 공격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유럽문화의 기반과 철학적 사고를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한국학생들은 재능 있고 기술적으로 발전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표현하길 원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교수로서 나의 의무는 이러한 면을 끄집어내어 그들의 아이디어를 구조화하는 과정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과 일본에 거주한 경험이 있다. 양국 미술 시스템에 어떤 차이를 느끼는가 일본을 떠난 지 약 6년이 지났기 때문에 지금의 일본 미술 시스템과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나의 경험에 미뤄 봤을 때 일본은 전통미술과 서구화된 현대미술 사이에 굉장히 큰 간극이 있어 서로간 교류가 거의 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한국 역시 이러한 측면이 있지만 일본만큼 간극이 크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또 일본은 이른 경제성장으로 서양미술의 방식을 빨리 흡수해왔던 것 같다.
일상의 건축을 소재로 작업하고 있다. 거주국가가 변함에 따라 당신의 작업에 어떠한 변화가 있는가 내가 있는 곳이 일본이든, 한국이든 나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면서 내 주변의 일상을 그리려고 노력한다. 내가 있는 곳이 일본이든, 한국이든. 어떤 작가들은 자기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고 그곳의 전통미술 방식과 사고방식을 흡수한다고 한다. 하지만 서구적인 것을 흡수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흡수한 이곳의 문화, 라이프스타일 등에 관심을 두고 서구인인 나의 시선으로 이를 이해하고 분석한다.
주변을 둘러싼 건축을 중심으로 작업하고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한국 주택의 특징을 설명해 달라 독일에서 건축은 반영구적인 예술분야로 이해되고 있다. 법적으로 건물이나 교량 등을 지을 경우 20년간 제작자가 어떠한 문제도 책임지고 수리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한국은 날마다 새로운 건물이 세워진다. 서울의 풍경은 매우 다이내믹하게 변화한다. 유럽의 도시와 이곳의 도시는 개념 자체도 다르고 모습도 전혀 다르다. 파리의 경우는 새로운 건물을 짓는 일도 드물지만 건물을 짓더라도 기존 건물의 모습과 흡사하게 짓는다. 한국은 내가 사는 동안만 집 주변 100m 반경에 6채의 집이 완전히 무너지고 새로 건설되었다. 한국의 1970~80년대 지어진 주택의 경우 한국의 전통적인 양식과 모던화된 서구적 방식이 결합된 건축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한국의 건축은 전통과 모던의 조화를 시도한 집합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건축에선 대문이 굉장히 중요하다. ●

잉고 바움가르텐은 1964년 독일 서부에서 태어나 1984년부터 1999년까지 국립 카를수르헤 미술학교, 파리 고등예술학교, 노르위치 디자인예술대, 도쿄예술대 등에서 다양한 예술교육을 받았다. 한국, 대만, 미국, 독일, 일본 등을 오가며 다수의 기관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세계 각지에서 수십여 회의 기획전에 참여하였다.
현재 홍익대 회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www.ingobaumgarten.de

 캔버스에 유채 180×220cm 2012~2013 캔버스에 유채

<untitled, (house, blue gate, Seogyodong, Seoul)> 캔버스에 유채 180×220cm 2012~2013

 

[특별기획] Artist-Dana Ramon Kapelian

다나 레이몽 카펠리앙

“나는 이방인이었기에 여성들이 어떠한 규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한국은 빠른 속도로 개방의 문을 열고 있다. … 변화는 불가피하지만 변화의 속도가 불안해 여성들이 자신의 새로운 사회적 역할과 위치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 급변하는 사회의 요구에 대항하고 적응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 다나 레이몽 카펠리앙

한국여성을 통한 역사읽기

한국 여성 60명과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사진을 찍어 책으로 엮었다. 어떻게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는가 한국에 오기 전부터 한국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읽었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서서히 알아가며 한국인의 삶이 도전적이고 저항적인 시간을 보냈을 것이라 느껴졌다. 매우 미래지향적인 방향성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전통문화와 모더니즘적 요소가 뒤섞여 있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한국여성의 삶이 궁금했다.
왜 여성에 초점을 맞춘 작업을 결정했는가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성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각각의 여성들의 삶을 통해 한국의 역사를 이해하려고 했다. 일제강점기를 겪은 1927년생 할머니부터, 6·25전쟁, 군부독재를 지나온 세대, 그리고 10대 소녀까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엔 그들이 겪은 거시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듣고 이후에는 개인적 삶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한국사회의 거시적인 흐름과 동시에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모습을 알 수 있었다.
인터뷰를 통해 본 한국 여성과 유럽 여성의 삶에서 가장 다른 점은 무엇인가 여성들 사이엔 지역을 막론하고 공통된 삶의 공감대가 있다. 문화적으로 다른 면을 꼽자면 결혼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들 수 있다.
‘사랑 없는 결혼생활’이라는 말을 사회적인 코드로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한국여성들의 대화는 충격적이었다. 내가 만난 한 20대 후반의 이혼여성은 인터뷰 후에 책에 사진이 노출되는것을 꺼렸다. 사회적 시선 때문에 직장동료와 주변인들에게 이혼사실을 숨기고 있다고 했다. 유럽 사회는 결혼과 이혼에 대해 한국보다 자유롭고 개방적이다.
인터뷰이를 어떻게 선정했는가 다양한 매체의 기사를 읽어가며 사람들을 찾았다. 그리고 한 사람을 인터뷰하면 그가 다른 이를 소개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인터뷰를 이어갔다. 인터뷰이를 선정할 때 최대한 사회, 경제적 계층과 연령이 다양하게 포진되도록 신경썼다. 60명의 여성이 한국 여성 전부를 대변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다각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이해하려 했다.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외국인 여성, 한국에서 평생을 산 미국인 수녀 등도 포함했다. 나에게 그들 역시 한국인이고 한국사회의 일부다. 비록 내가 한국어를 잘못해서 부끄럽지만 한국은 이미 나의 일부이다.
책의 출간에 맞춰 전시 계획은 없는가 처음부터 책 출간을 염두해 두고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인터뷰를 한 몇몇 사람의 사진을 벽에 걸고 소수의 관람객에게만 작업을 보이는 방식을 지양한다. 책을 출간하면 보다 많은 사람이 내 작업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예술가에게 국적이란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는가 역사적인 이유 때문에 한국이 닫혀있는 경향을 띠게 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고와 시스템의 유연함은 중요한 부분이다. 세계적인 도시에 비해 서울은 거주하는 외국인의 비율이 매우 낮은 편이다. 하지만 한국인은 결단하면 빠르게 실행에 옮기지 않는가. 지금도 변해가고 있고 곧 바뀔 것이라 생각한다. ●

다나 레이몽 카펠리앙은 1963년 이스라엘 하이파에서 태어났다. 1986년부터 1988년까지 메리트 장학금과 소벨 장학금을 받아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공부했다. 1989년부터 20년간 파리에 머물며 프랑스, 독일, 브라질 등지에서 수차례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열었다. 2010년부터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

다나 (4)

왼쪽·《한국의 여성들: 전통에서 자아의 재발견으로》에 인터뷰와 함께 게재된 사진. 사진 속 인물은 가수 최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