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송현숙

복잡하고 어려운 것을 단순화하면 그 힘은 강해진다. 최소한의 붓놀림으로 성숙하고 명료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작가 송현숙을 만나본다. ‘획’이라는 동양적 개념과 서구미술의 ‘시간성’이 공존하는 그의 회화에 드러난 리얼리티는 무엇일까.
2014년 11월 11일부터 12월 31일까지 학고재에서 열린 개인전 를 통해 한층 묵직하고 깊어진 그의 작업세계를 살펴본다.

적극적 내용미학으로의 모색, ‘붓질의 다이어그램’을 떠올리며
박석태 미술사

어떤 텍스트냐를 막론하고 그 안에는 작가가 추구하는 진실한 믿음의 세계가 존재한다. 그것이 세계평화나 미술의 사회적 역할과 같은 거대담론일 수도 있지만, 작가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좀처럼 알아차릴 수 없는 내밀한 태도 혹은 정서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작품에는 그 수만큼의 리얼리티reality가 존재한다고 할 터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려는 리얼리티는 흔히 ‘리얼한 표현이 인상적이다’라고 할 때의 사실적 표현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작품으로서 다가가려는 작가의 구체적인 어떤 지점을 가리킨다. 이를 조형예술에 국한해 말하자면, 그 내밀한 지점에 다가가려는 태도 자체에 존재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구사하는 언설言說로는 도저히 표현되지 않지만, 특유의 시각적 장치를 통해서만 작가가 제시하고 싶어 하는 리얼리티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송현숙의 회화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리얼리티는 무엇인가. <3획>, <6획>, <28획> 등 작품 타이틀이 말하듯 최소화된 획으로 펼쳐 보이는 동양적(한국적) 개념인가, 그를 통해 작품과 작가가 대면하는 방식인가, 혹은 행위와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내용적 측면의 리얼리티인가. 이때 리얼리티라는 개념은 1970년대 파독 간호사 출신으로 겪어야만 했던 디아스포라라는 정체성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탐구인가, 화면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횃대, 흰 천, 익명의 인물과 같은 소재들로 전달하려는 두고 온 땅에 대한 그리움인가.
그가 제시하는 ‘획’이라는 동양적 개념은 서구미술의 ‘시간성’과 일정 부분 맥을 같이한다고 보인다. 획은 필을 긋는 행위를 뜻하지만, 호흡이 만들어내는 시간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생몰년 미상)의 <달마도>나 호생관毫生館 최북崔北(생몰년 미상)의 <풍설야귀도>에서 그 본질적 속성과는 별개로 그야말로 ‘일필휘지’가 만들어내는 정지된 호흡을 읽기도 한다. 반대로 공필工筆로 형사形似를 추구하는 그림에는 헤아릴 수 없는 붓질의 중첩이 만들어낸 시간이 응축돼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획을 긋고 그 수가 그대로 작품 타이틀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송현숙의 화면은 상당 부분 동양적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인다. 송현숙은 이번 개인전에서도 중첩된 시간성을 예의 그만의 태도로 기록하고 있다. 그가 겪어낸, 혹은 그려 온 지난한 시간의 쌓임을 어두운 색채로 증언하는 작업 태도는 절제된 획의 흔적을 보여주는 방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는 시간성을 기록하는 그만의 적절한 행위로 보인다. 그러나 시간과 행위를 기록하는 서구의 추상표현주의 방식과는 상당히 다른 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즉 서구의 방식이 실존적 사고에 근거해, 대상(화면)과 주체를 전제한 채 주체가 강조되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고 한다면, 송현숙의 그것이 화면과 마주하는 주체가 구분되지 않는 몰아일체의 경지를 탐구함으로써 서구의 이분법적 사고를 해체한다는 점은 주목을 요하는 지점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획수를 기록하는 그의 작품은 시간의 경과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것이 외면화하기까지 사유의 기록이기도 한 것이다.

(오른쪽) 캔버스 위에 템페라 150×200cm 2014

<28획>(오른쪽) 캔버스 위에 템페라 150×200cm 2014

동양적 사고로 풀어낸 내면의 리얼리티
송현숙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시간에 대한 동양적 사고를 실험한다. 즉 시간 그대로의 시간positive time과 대비되는 개념적인 시간negative time을 형상화하는 방식을 취한다. 언뜻 보기에 그의 화면은 획수와 타이틀로 이어진 순환구조로 마치 촬영시간과 러닝타임이 일치하는 무편집영화를 연상시키지만, 그 이면을 채우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혹은 그 정체성에 맞닿은 재현을 넘어선 사의寫意의 흔적이라는, 기나긴 사유의 시간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고 보인다. 이처럼 가시적·비가시적 시간이라는 양면성을 표현하는 그의 방식은 마치 동양의 음양사상을 떠오르게 하는 지점인 바, 선형적 시간개념을 근간으로 한 서구적 사상에 대한 일종의 반전을 시도하는 듯하다.
한편 사유가 동반된 시간 개념을 증언하는 그의 행보는 시대의식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 같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길을 끈 작품은 <붓질의 다이어그램(4월 16일 세월호 비극을 생각하며 그림)>(이하 <붓질의 다이어그램>)이다. 검고 어두운 배경 속에 그가 오랫동안 택해온 소재들-횃대, 그 위에 놓인 흰 천으로 감긴 길고 날카로운 형상-이 마치 깊은 바다 속에 침잠해 있는 비극의 배처럼 검은 공간 속에 힘겹게 형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들은 그가 두고 온 땅을 떠오르 하는 그리움의 기표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제목의 ‘다이어그램’이 뜻하듯 그와는 다른 무엇인가를 전달함을 목적으로 제시된 시각언어로 보인다. 통곡마저 삼켜버린 그 음험한 바다 한가운데서 서서히 가라앉으며 운명을 달리한 수백 명의 원혼에 수의를 연상시키는 흰 천이 감긴 듯한 장면은 고요하므로 더 큰 울림을 담아낸다. 유일하게 획수가 표기되지 않은 작품 제목이 상징하는 듯한, 적어도 이 작품에서만큼은 그가 줄곧 스스로 내면화해왔던 규율을 넘어선 태도로 인하여 그가 제시하려는 내용적 측면의 ‘리얼리티’를 얻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번 개인전에 선보인 16점의 작품은 <붓질의 다이어그램>으로 수렴되는 듯하다. 구도하는 수도승처럼 한 획 한 획 써내려간 그의 화면은 이국에서 사무치게 솟구치는 고향 땅에 대한 그리움, 그곳에서 벌어지는 갈등으로 인한 슬픔, 그리고 차마 외면하지 못할 시대의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붓질의 다이어그램>에 이어 <8획>에 등장하는 횃대에 감긴 흰 천이 우리 시대의 비극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면, 실상 그는 화면에 단지 여덟 번 붓을 그은 것만이 아니라고 보인다. 현상적으로 보이는 8획을 통해 그는 4월 16일, 그때부터 간단없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스스로의 아픔을 화면과 일체가 되어 증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서두에서 리얼리티가 작가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좀처럼 알아차릴 수 없는 내밀한 태도 혹은 정서의 문제일 수 있다고 적었다. 또 내밀한 지점에 다가가려는 태도 자체에 존재 가치가 있다고 했다. 동양적 사고에 기반을 둔 조형언어라는 그만의 리얼리티는 바야흐로 내용적 측면에서 리얼리티를 획득하는 모색의 지점에 서 있다고 보인다. 달리 표현하자면 개인적 차원의 정서를 드러내는 태도가 사회적 인식의 범주로 나아가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더욱이 그 동안의 작업이 디아스포라로서 정체성을 모색하는 정서적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 성공을 거두어 왔으므로 이러한 그의 변화는 작업의 이력에 깊이를 더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한다. 리얼리티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기법적인 해석과 표현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보편적인 속성으로의 전이, 나아가 이미지가 갖는 존재론적인 규명이 적극적인 내용미학으로 연결되었다는 데에 이번 송현숙 개인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

 캔버스 위에 템페라 135×174cm 2012

<1획 위에 4획(왼쪽), 8획(오른쪽)> 캔버스 위에 템페라 135×174cm 2012

 송현숙 인물송 현 숙 Song Hyunsook
1952년 태어났다. 1972년 파독 간호원으로 독일로 건너가 4년간 독일의 병원에서 근무하다 함부르크 미술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독일 학술교류처 장학생으로 전남대에서 동양화와 한국미술사를 연구했다. 1982년부터 독일과 한국을 넘나들며 18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스위스 베른미술관, 독일 함부르크 미술관,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일본 모리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 함부르크에서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다.

 

ARTIST REVIEW 나현

DF2B1686

<바벨탑 프로젝트, 체리나무 바벨탑>(사진 앞 오른쪽)120×120×140(h)cm 2013

나현의 개인전 <프로-젝트(PRO-JECT)>가 LIG아트스페이스에서 2014년 11월 27일부터 12월 31일까지 열렸다. 나현은 이 전시에서 수집한 역사적인 자료를 작가 개인의 주관과 결합하여 객관의 역사 속 절대 진실을 보여주는 일련의 작업을 선보였다. 따라서 관람객은 전시장에서 결과물이 아닌 지금도 지속되는 작업 과정을 목도하게 된다. 객관의 역사가 재구성되는 나현의 전시장으로 들어가 본다.

‘절대 진실’에 저항한다
김주원 미학

“민족의 피가 더럽혀져가는 이 시대에 자국의 가장 우월한 인종 보존에 최선을 다한 국가는 언젠가 분명 세상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 우월 인종 보존을 두고 성공 가능성이 있는지를 당이 요구하는 희생과 비교하며 불안해지는 일이 있더라도 이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Mein Kampf》 중에서

한 작가의 작품세계에 관한 글을 내가 이렇게 불순하게 시작하는 이유가 있다. 한 사람의 광기어린 편견과 민족, 인종에 대한 오해가 다른 민족을 절멸의 운명으로 이끌고 세계지도를 전쟁과 학살의 피로 얼룩지게 한 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작가가 말하는 ‘절대 진실Absolute truth’, 즉 근대와 근대성의 표상이며, 이를 교육받고 강요받으며 유년기를 보낸 세대의 작가 나현이 이에 대한 의심으로 자신의 프로젝트들을 전개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성이자 말인 로고스에 대한 신뢰와 확신의 시대에 대한 의심인 셈이다. 합리주의와 식민주의/우생학, 진보에 대한 믿음과 인종/민족주의, 자본주의와 실증주의 등의 근대 프로그램은 작가 나현의 <실종Missing>(2006~2009)에서부터 현재진행형인 <바벨탑The Babel Tower>(2012~)에 이르는 거의 10년 동안 진행되는 프로젝트 등의 비판적 대상이며, 이로 인해 만들어진 객관화된 ‘하나’의 사실 혹은 역사로 불려온 것들이 사실은 두껍고 단단한 마스크를 쓴 복잡한 ‘여러’ 다른 얼굴을 감추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물론 이것은 그의 작업이 어떻게 진행돼왔고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를 살피는 일에서 확인될 것이다.
LIG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리는 작가 나현의 전시 <프로-젝트PRO-JECT>에는 작가가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현재 진행 중이거나 지금까지 진행해 온 회화, 드로잉, 영상, 사진, 설치 등 다양한 매체의 작업들이 소개되고 있다. 그의 프로젝트는 <실종>(2006~2009), <나현 보고서-민족에 관하여NA Hyun report-about the Ethnic>(2008~2011), <로렐라이의 노래A Song of Lorelei>(2010~2013), <바벨탑>(2012~) 등 크게 네 개로 구별되지만 이들은 연쇄적 성격을 지녔다.
프로젝트들은 하나의 특정한 레퍼런스, 장소, 그리고 시간에서 시작해 관련된 자료나 문서들을 수집하고 실재 인물 인터뷰 등을 이용하는 리서치 기반의 작업 형식을 띤다. 그러나 그 특정한 레퍼런스와 장소적 그리고 시간적 편협함 안으로 미끄러지지는 않는데, 이는 나현의 작업이 리서치 과정과 결과물의 형식에서, 아카이브나 기록이라는 전형성과 박제성에서 멀리 나아가기 때문이다. 즉 사건으로서의 역사적 사실과 그것을 에워싼 담론들의 축조들을 여러 맥락에서 살피고 다시 현재 혹은 각기 다른 장소, 시간과 엮고 구성하여 역동적 읽기와 새로 쓰기의 가능성을 여는 흥미로운 과정을 끌어오는 것이다.
예컨대, 작가가 우연한 기회에 접하게 된 독일제국의회의 1912년 혼혈혼 논쟁Die Mischehendebatte im Reichstag 자료에서 출발한 <바벨탑>의 경우를 보자. 사실, 인종 혼합이라는 공포의 이미지는 근대 식민주의 담론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식민지의 지배 인종이 피식민지인과 혼합되면서 식민 주도의 힘을 상실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인종 혼합=종種의 퇴화라는 우생학적 담론이 바탕에 있다. 이 정치적 논쟁의 법률적 도덕적 성격 판단 여부를 떠나 이러한 논쟁의 사건 속에서 지속적인 역사적 과정의 인식들이 생기게 된다고 작가는 보았던 것 같다.

 아틀리에 에르메스 서울 전시광경 2013

<바벨탑 프로젝트> 아틀리에 에르메스 서울 전시광경 2013

네 개의 프로-젝트와 질문들
혈통, 민족, 로고스(이성이자 말), 신화 등으로 대응되는 바벨탑 이야기는 작가 나현에 의해 전후 전쟁 쓰레기로 만들어진 베를린의 토이펠스베르크Teufelsberg(악마의 산)과 자본의 논리 아래 쏟아지는 산업, 생활 쓰레기로 이루어진 서울의 난지도라는 두 도시의 인공산으로 연결되었다. 프로젝트에는 7000년 전 유럽과 한성 백제시대의 <목조우물>의 재현, 베를린 거주 외국인들의 모국어 <인터뷰_크로이츠베르그>(2013~2014) 프로젝션, 외래종과 토착종의 채집 식물들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목조우물> 속에 프로젝션 되고 있는 <인터뷰>는 터키, 미국, 일본, 캐나다, 에티오피아, 그리스, 폴란드, 이탈리아, 이스라엘, 브라질, 한국 등 각기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지만 한 가지 언어(‘영어’)로 질문하고 다시 한글로 번역되는 과정을 보인다.
이 작업들은 나현의 프로젝트가 고대 유적 바벨탑의 발굴 프로젝트임을 상징한다. 서로에게 대응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로고스를 둘러싼 분리와 단절의 계기들을 혼합된 경계지대로 이끌어내어 서로가 ‘적’이자 ‘위험한 것’이었던 민족 간 혹은 인간과 신, 자연과 인간 등이 스스로 품었던 두려움, 공포, 경계 등을 끄집어냈다. 이는 서로 연결될 수 없을 것만 같던 공간과 시간, 여러 가지 계기들이 작가 나현에 의해 다시 직조되어, 지배적인 판단, 정의, 역사라는 확정된 절대 진실에 대한 수사학적 전복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프로젝트 <바벨탑>은 <로렐라이의 노래>, <나현 보고서-민족에 관하여>와 동일한 맥락에 서있다. ‘기적’과 ‘개발’의 수사로 언급돼 온 독일의 라인 강과 한국의 4대강을 연결하여 3년에 걸쳐 진행된 또 다른 발굴 프로젝트 <로렐라이의 노래>는 14세기 독일의 성과 영토를 위한 경계 목A boundary post <PILE(말뚝) PROJECT>(2012)을 재현한 것으로 시작된다. 나현은 2년 동안 강변에 <말뚝>을 박고 자연의 흐름과 그것을 둘러싼 인간의 사회정치적인 태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관한 압축적 지표화를 시도했다. 라인 강을 둘러싼 정벌과 전쟁, 교역과 공업, 생태도시로의 전환이라는 시간차를 둔 이 모순적인 역사적 모델들은, 아름다운 소녀의 감미로운 노랫소리가 죽음의 유혹이라는 전설의 노래와 하이네의 시 ‘로렐라이’로 수렴되어 <말뚝>에 흔적으로 남게 했다. 그리고 다시 <말뚝>은 테이블로 제작되어 ‘기적’과 ‘개발’이라는 근대적 신화를 만들기 위한 충돌과 모순, 경계를 통합하는 가능성으로 전환됐다. 라인 강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한국의 남한강대교-한강, 구담교-낙동강, 담양호-영산강, 금강 등지에서도 나현의 프로젝트는 그렇게 수행되었다.
사실 <나현 보고서-민족에 관하여>는 앞의 두 프로젝트가 의심하고 있는 문제들, 즉 근대와 근대성이 요구해온 ‘절대 진실’로서의 동일성과 균질성, 그리고 경계가 그 이면의 것들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질문에 닿아있다. 다른 것들에 비해 상당한 갈래를 갖고 있는 작업들은 시베리아나 몽골의 바이칼 호와 쿠바 그리고 한국의 서남해안 등지를 여행하며 수집한 역사와 자료들에 기초한다. 작업은 민족(혹은 ‘국민’, nation)의 구성적 특징이라 여겨진 초역사적 단일성과 동질성의 개념을 흔들고 민족ethnic의 문제를 디아스포라와 잡종, 그 경계에 주목하게 했다. 원시시대 소금과 먹이를 찾아 이동한 매머드를 따라 인간 역시 이동했다는 작가의 가설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1950년대 한국전쟁에 참전한 프랑스 군인 중 실종자 7인에 관한 도큐멘트에서 출발한 <실종>은 프랑스군, 연합군, 실종자라는 무정체적 정체를 지닌 보편 혹은 덩어리들인 7인의 병사를 12인의 개인, 혹은 파편으로 찾아내고 소생시켰다. 실종이라는 이미 멈춰버린 사태와 그 사태의 해체 혹은 재구성을 위한 그의 작업 과정은 실종자 7인의 실종확인 도큐멘트, 시테 섬의 7개의 다리, 관을 연상시키는 7개의 함석 제작품 등으로 가시화된다. 특히 7개의 함석제작품 안의 <물 위에 그리기>는 지나간 시간들이 사건으로 남는 방식에 관해 말하고 있다. 물위에 그린 그림, 증발된 물, 함석 바닥에 남은 물감의 분명치 않은 흔적 등은 주체에 따라 매우 상이한 방식으로 인식되고 상상될 것이다.
<우물>, <말뚝>, <매머드 터스크>, <물위에 그리기>는 네 개의 프로젝트 각각의 중심에 있다. 현지 조사와 수집을 통해 모아진 레퍼런스들에 기대는 종류의 작업이 잃기 쉬운 미학적 터치들은 작가가 설정한 발굴 지표로서 이들 작업에서 해소되고 상징화됐다. 나는 근대와 근대성의 모순적인 모델들을 마술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으로 이들을 상정한 작가의 진심을 여기에서 읽는다. 그래서 그의 작업이 프로젝트가
아닌 프로-젝트일 수 있는 가능성을. 다른 시간들과 공간들, 그리고 다른 공동체들의 담론적 네트워크를 실천하는 수행성을. ●

 2010/2012/2013

<로렐라이의 노래 프로젝트, PILE-Rhine> 2010/2012/2013

 

DF2B0389나 현 Na Hyun
1970년 출생했다. 홍익대 회화과, 동 대학원 그리고 옥스퍼드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과 일본, 독일, 영국 등지에서 15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한국을 비롯하여 인도, 일본, 미국, 영국 등지에서 열린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출품했다. 프랑스 파리 시테, 쿠바 아바나, 베를린 쿤스트하우스 베타니엔 등 국내외 레지던스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현재 서울에서 작업하고 있다.

 

EXHIBITION & THEME Africa Now: Political Patterns

 

 

아프리카 (9)

Yinka Shonibare, MBE (왼쪽) Victorian children’s dresses made of Dutch wax printed cotton 각 460×280cm 2010

글로벌라이제이션 이후 소수자, 제3국가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 아프리카의 미술을 소개하는 전시는 극히 드물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아프리카 나우: Political Patterns>(2014.12.6~2.15)는 그 동안 간과해온 아프리카의 예술을 대거 소개한다. 미국 영국에서 활동하는 아프리카 출신 작가를 포함한 20명의 작품 100여 점이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민속적인 면을 강조한 작업을 단순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탈식민주의 이론, 이민세대의 인종차별, 아프리카 대륙 내의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작가들의 작업을 선별해 흑인 디아스포라의 탈식민주의적 예술적 성찰을 엿 볼 수 있다.

정체성이라는 환영(spectre)-정체성 정치학으로서의 아프리카 현대 미술

정현 미술비평

사회 전반에 팽배한 정체성에 대한 요구는 개인적으로는 견고한 자아 형성에 초점이 맞춰지지만, 공동체, 집단, 국가, 민족, 인종, 성 그리고 종교의 관점이 투사되면 정치적 차원의 의무가 등장한다. 중심과 주변, 주류와 비주류의 위계질서가 서구 중심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는 거대 명제로부터 출발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결국 민족과 인종의 동일시는 백인 남성 중심의 역사를 주류의 세계사로 만들었다. 주변의 반란이 촉발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유는 분명하다. 역사라는 기획물은 세계를 관측하는 절대적인 창이 되었고 수세기에 걸친 유럽 국가의 식민지 개발은 열등한 민족, 인종, 성이란 고정관념을 인류에 심어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의 관성에 균열을 만들고 이 틈새로부터 세계에 관한 인식의 틀을 이동시키고 확장시키기 위한 노력은 1960~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시작되었다. 혁명적 사유의 시작은 사상가, 문학가들이 주도했고 시각예술계에서는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정치적 관점을 바탕에 둔 시도가 일어난다. 주변의 혁명은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냈고 예술, 문화, 학술 등의 분야에서 이른바 소수적 사고가 핵심 사상이 된 것은 비교적 단기간에 이루어낸 큰 변화의 물결임에 분명하다. 우리는 미국에서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는 역사적 전환기를 목격한 세대이다. 그러나 안심하기엔 아직 이른 것일까? 현재 미국에서는 부조리한 흑인 차별이 끊이지 않고, 백인과 흑인 사회 간의 갈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미술계에 다문화, 다원주의가 반영된 첫 전시는 1980년대 말 파리의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대지의 마술사들>(1989)로 오세아니아, 아프리카의 동시대작가를 유럽 작가들과 동등하게 다루었다고 평가받은 바 있다. 특히 이 전시로부터 자연스레 탈중심주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네트워크를 중요시하는 새로운 전시 방법론이 제시되면서 이른바 세계화 현상을 재현하는 대신 작가들의 국적, 비서구권 국가의 전통을 새롭게 재해석하는 시도를 통해 다양성을 수용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시 패러다임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비서구권 작가들은 여전히 민족지적 성격이 강한 작업들을 소개하며 타자의 영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21세기 이후, 아프리카 대륙은 세계화 헤게모니 문제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고 2005년 유럽에서는 가장 큰 규모로 <아프리카 리믹스>라는 전시가 영국의 헤이워드 갤러리 주최로 열린 바 있다. 아프리카는 물론 유럽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을 망라하며 25개국 60명이 넘는 작가가 참여한 이 전시는 아프리카의 정치·경제·환경적 조건을 다양한 매체와 방식으로 제시한 최초의 블록버스터 전시였다. 규모로 본다면 <아프리카 나우>는 <아프리카 리믹스>보다 작은 기획전이지만, 전시가 지향하는 바를 보면 10년의 시간차만큼 기획의도의 시각이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프리카 나우>라는 표제는 다소 전형적으로 보이지만, 그 의도는 분명하다. 아프리카를 타자로, 민족지적 표상으로 보여주기보다 탈국가, 탈전통, 신세대의 시점이 반영된 혼성적 성격에 무게를 두고 있다. 오늘날의 시각예술전시가 과거의 만국박람회나 인류학 박물관이 추구하던 지배자의 시선으로 희귀한 타자의 세계를 감상하던 방식을 거부하고 있음을 암묵적으로 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아프리카는 변화 중이다. 세계화는 장소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세계화는 무조건 배척하거나 비판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 어떻게 권력이 비윤리적으로 세계를 분할하고 타자를 이용하는지에 관한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변화하는 아프리카의 정체성
전시에서는 아프리카의 클리셰를 발견하기 어렵다. 잉카 쇼니바레, 크리스 오필리는 아프리카의 전형적 기표와 대상의 관계를 전치하여 그 틈에 각인된 식민과 개발의 역사, 고정된 관점을 뒤흔든다. 존 아캄프라는 정체성과 세계 정치지형도 간 힘의 논리를 지성적이면서도 시적인 영상언어로 풀어낸다. 대중문화와 미디어의 영향을 보여주는 베레코, 카네미이어, 윌리 등은 전 지구적 문화의 맥락 안에서 아프리카의 현재를 시각화한다. 이외에도 전통공예에 뿌리를 둔 현대공예를 소개하는 전시 안의 또 다른 전시인 <정치적 패턴>은 탈전형적 질료를 사용해 현대 디자인과 정치 간의 맥락화를 시도하는 작가들을 통해 가장 전통적 방식의 공예품을 가장 정치적인 조형언어로 변용한다. 대중 미디어가 소개하는 이국적 아프리카, 광활한 대지와 정글은 사실 환영으로서의 아프리카에 가깝다. 과장된 휴머니티가 넘실대는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레드퍼드 주연의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 노예의 지난한 삶을 다룬 <뿌리>나 후피 골드버그의 <컬러퍼플>과 같은 드라마처럼 말이다. 민족지적 시선이 두려운 까닭은 삶과 문화는 끊임없이 변화 중이라는 점에서다.
정체성 연구 또한 변화 중이다. 정체성은 고정된 성질이 아닌 개인과 사회, 내면과 외부세계 간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 정체성 또한 결과가 아니라 끊임없이 진화 중으로 보아야 한다. 대한민국 역시 다문화, 다원주의를 국가의 문화정책으로 표방하고 있지만, 제도에 의한 문화행정은 오랜 시간 뿌리내린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허물어뜨리지는 못한다. <아프리카 나우>는 전시 자체가 주는 만족감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에 대한 사고를 바꿔줄 신선한 기회가 될 것이다. 일회적 전시로 머물지 않고 초대 작가들과의 대화 및 동시대 아프리카 문화를 함께 다룰 또 다른 기회를 기대한다. ●

아프리카 (13)

Kevin Beasley 〈Untitled(Sack)〉(가운데 조각) foam, resin, t-shirt, mattress, cover, cotton, thermal shirt 58.4×129.5×40.6cm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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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새로 찾은 아프리카의 아이덴티티”
신은진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이번 전시는 아프리카 현대미술 작가를 소개한다. 그러나 한편 아프리카 출신이지만 서구권에서 활동하는 작가가 많은 편이다. 아프리카 미술의 범주를 어떻게 설정했는지 궁금하다.
참여작가에 남아공 출신 작가 6명(팀), 모잠비크, 알제리, 마다가스카르, 나이지리아 등 아프리카 대륙 출신 작가 9명이 포함돼 있다. 거의 절반의 작가가 아프리카 대륙 출신이다. 존 아캄프라와 잉카 쇼니바레 역시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각각 가나와 나이지리아 출신이며 자신의 뿌리는 아프리카에 있다고 생각하는 작가들이다. 반면, 안톤 카네마이어와 히스 내쉬는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난 백인 아프리카너이다. 아프리카라는 아이덴티티를 피부색이나 지역으로만 국한하지 않았다.
전시의 구성과 디스플레이가 돋보인다.고대 그리스 풍의 기둥을 세운 방의 경우, 마치 유럽지역의 박물관을 연상케 한다.
전시 디스플레이에서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알려달라.
아프리카 미술에 대한 우리의 인상이 막연히 전통조각에 국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역으로 이용했다. 제국주의의 상징인 박물관은 일찍이 식민지에서 값나가는 보물이나 유물을 가져다 전리품처럼 진열하는 장소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정치적으로는 식민제국주의가 종결된 시대라고 하지만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신식민지배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3층 전시장의 한 섹션을 잉카 쇼니바레의 방으로 채웠다. 특별히 이 작가를 주목한 이유가 있는가.
특별히 잉카 쇼니바레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다른 작가에 비해 설치와 조각적인 요소가 두드러지는 작품이 많아 그렇게 했다. 작품 내러티브도 강렬하고 조각의 동세와 영상의 사운드까지 모든 특징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었기 때문에 다른 작품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윌리 로만 시리즈 사진은 우리 측에서 처음으로 삼면화 기법을 써서 평균 높이보다 높게 걸었는데 잉카의 스튜디오와 갤러리 측에서 아주 만족해하며 이제부터 이 작품 디스플레이를 이렇게 하겠다고 했다.
이번 전시를 담당한 큐레이터로서, 관람객들이 특히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무엇이라고 보나.
2층 규모의 작지 않은 공간에 공예, 사진, 회화, 영상, 조각 등 다채로운 미디엄의 작업과 작가군을 선보였다. 존 아캄프라는 우리나라 영화제에서도 작품이 소개된적 있지만 갤러리 피스로는 처음으로 듀얼 스크린 형식을 선보였다. 영상미와 사운드 그리고 내러티브가 모두 훌륭한 작품이다. 1월 23일에 문강형준, 임동근, 김소영, 김현미, 서동진, 심보선, 권명아, 박자영과 함께 글로벌 이주와 문화정체성에 관련된 학술 세미나를 진행할 예정이다.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임승현 기자
사진 조영하

곤살로 마분다 Gonçalo Mabunda (뒷쪽)가 설치된 전시 광경

곤살로 마분다 Gonçalo Mabunda <무제 (mask)>(뒷쪽)가 설치된 전시 광경

 

 

EXHIBITION TOPIC 프로젝트대전 2014: 더 브레인

예술은 인간의 마음작용 중 가장 복잡한 과정을 거친 산물이다.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주최하는 격년제 미술행사 <프로젝트대전 2014>(2014.11.22~2.8)의 주제는 ‘더 브레인’이다. 대전시립미술관, 카이스트 KI빌딩, 대전시립미술관 창작센터 등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는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감각과 인지, 물질과 파동 등 뇌에 관한 다양한 예술적 실천을 펼쳐 보인다.

뇌로 바라보는 자아와 세계

유현주 미학

‘뇌’를 통해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려는 전시가 있다. 바로 대전시립미술관과 카이스트가 주관한 이 그것이다. 2012년 처음 ‘에네르기’란 주제로 과학예술의 포문을 연 데 이어, 이번 전시는 뇌과학 기반의 기술과 예술을 접목한 미디어아트라고 부를 만하다. 전시의 전체 구조는 ‘뇌’에 대한 큰 주제 아래, 미술관을 비롯해 네 개의 장소에서 세분화된 소주제들과 그 아래 하위 섹션들로 나뉜다. 미술관에서는 ‘인간의 뇌, 제2의 자연’을 주제로 뇌와 신경의 세계를 시각화하고, 카이스트에서는 ‘인공의 뇌, 로봇은 진화한다’는 제목으로 인공지능을 비롯한 인간-로봇의 철학을 이야기한다. 대전창작센터에서는 카이스트 및 대덕연구개발특구의 과학자들과 작가들이 융합한 <아티스트프로젝트(ArtiST: Art in Science and Technology)>를 선보이며, 원도심에 위치한 대전스카이로드에서는 ‘미디어스카이’라는 제목으로 거대한 영상패널을 통해 거리의 시민들에게 말을 건넨다.
미술관에서의 주제는 뇌과학의 의제들을 예술과 융합시키려는 기획 의도를 잘 보여준다. 먼저 뇌 존재 자체의 정체성을 묻는 작업들을 ‘뇌라는 물질’, ‘파동으로서의 뇌’라는 섹션에서 선보인다. 말하자면 뇌를 신경생리학적 메커니즘을 갖는 하나의 물질적 ‘자연’으로 보고자 하는 작업이다. 예를 들면, 뇌의 단백질 세포 구조를 시각화한 <단백질 초상>(마르타 데 메네제스), 난독증을 앓는 작가 자신의 뇌 촬영을 시도한 <나의 영혼>(캐서린 도슨), 인간 뇌의 해부 이미지를 QR코드로 전달하는 <스캔>(니나 셀러스), 뇌신경세포체인 뉴런의 성장과 활동을 마치 숲의 공간과 유사한 이미지로 비유한 <마술 숲>(앤드루 카니>에서 우리는 물질로 환원된 뇌를 만난다. 그러나 물질로 환원된 뇌만으로 인간의 자율적인 사유작용을 설명하기엔 미흡하다. 따라서 이어지는 전시는 ‘파동으로서의 뇌’를 통해 사유와 감정을 파동으로 풀어내는 작품들을 펼쳐보인다. 에마뉘엘 페랑의 작품 <인사이드 브레인, 아웃사이드 브레인>은 뇌를 뉴런과 시냅스로 구성된 기계로 환원하고자 하는 오랜 인류역사를 보여준다면, 리사 박의 <좋은 생각>과 샘슨 영의 <음악가의 해부학>은 각각 감정의 작용을 뇌파로 시각화한다거나, 연주자의 뇌파를 데이터로 삼고 그 데이터를 다시 전자음으로 바꾸는 퍼포먼스를 통해 감정과 사유과정의 비밀을 뇌의 물리적 과정으로 환원시킨다.
모든 사유작용이 과연 뇌의 의식작용으로 증명될 수 있을까? 무의식은 어떨까? ‘의식과 무의식’ 섹션에서 오윤석의 작품 <감춰진 기억-꽃> 등은 바로 그러한 뇌과학의 담론 가운데 하나인, 즉 무의식을 의식으로 전환하려는 시도와 일치한다. 일정기간 해온 운동을 오래 쉬었다가 재개했을 때, 의외로 몸은 쉽게 이전의 방법을 기억하는데, 이는 무의식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의식작용이라는 이론이 있다. 이러한 ‘머슬메모리’ 이론을 적용해, 작가가 감춰진 기억과 공포의 결과물을 극복하고자 그린 그림들이 결국은 무의식이 아닌 ‘의식작용’이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기억의 층위’와 ‘뇌화한 마음’ 섹션에서 전개된 다른 작품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의 비연속적이고 비선형적 기억이란 현실과 연결된 개인의 내러티브(뮌, <오디토리움>)이며, 사회의 특정 조건에 따라 의미망을 만드는 의식작용(전승일, <트라우마는 인간의 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김기라 변영돈, <이념의 무게_한낮의 어둠>)으로 설명된다. 흥미로운 것은 미술관 전시의 모든 방향이 인간의 뇌를 자연의 뇌로 설명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다는 점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모호할 뿐 아니라 그러한 것의 증거를 찾는, 어두운 ‘밤의 과학’을 언급하는 과학자도 여전히 많은데, 이러한 뇌과학적 인식이 얼마만큼 관객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느냐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예술이 앞장서서 이러한 뇌과학의 과제들을 풀어내고 해석한다는 점은 놀라운 시도가 아닐 수 없다.

앤드루 카니 라이드 영상 24분 2002

앤드루 카니<마술 숲> 라이드 영상 24분 2002

마음의 실체,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는가
카이스트에서의 전시 <인공의 뇌, 로봇은 진화한다>는 실제적인 과학자들의 과제와 연계되면서도 창조적인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시각예술작업에 다가서고 있다. ‘로봇’을 ‘움직이다 느끼다 생각하다 표현하다’의 동사에서 접근하여 인간이 만든 로봇, 마치 ‘인간’ 자신의 재현과 같은 ‘휴머노이드’를 꿈꾸는 작업 등을 소개한다. 컴퓨터가 인식한 얼굴 구름(신승백 김용훈, <클라우드 페이스>)과 단어를 창조하는 로봇(전병삼, <전병삼룡이>)은 신기함을 넘어, 실제 인공지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묻게 한다. 한편 강현욱의 작품 <아픈 강아지>는 바이러스가 주입된 로봇인형을 통해 통제 시스템하에 놓인 인간 자아와 사회를 통찰한다. 이는 2013년 4월 19일 인공위성을 개인이 혼자 쏘아 올리는 작업을 했던 송호준의 <인공위성 메들리>에서 엿보이는, 기존의 과학자들에게만 허용된 과학실험 등 국가 권력과 분리되지 못하는 현재의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언급과 맞닿는 부분이 있다. 창작센터의 <아티스트프로젝트>는 과학자와의 융합적인 작업이 아니었다면 생각하기 어려운 성과들을 내놓았다. 원동민의 <하이데거>는 과학자들의 협력 끝에 그들과 했던 인터뷰의 단편들을 모스부호로 치환한 후 그것을 음악으로 구현한 매력적인 사운드아트이다. 한편 <미디어스카이>에서 작가들은 신체 어딘가에 있을 ‘영혼’의 영역을 탐색하기도 하고(박형준, <떠다니는 신체>), 적, 청, 록을 연속으로 바라볼 때, 눈과 뇌의 협업으로 인한 잔상효과로 결국 흰색을 바라보는 인식의 불완전성(석성석, <뇌.색>)을 들추기도 한다.
대전발 과학예술프로젝트의 두 번째 활시위는 첫 번째보다 한결 힘 있게 당겨졌다. ‘눈’이 아니라 ‘뇌’로, 감각작용 및 모든 인식을 ‘뇌’의 작용으로 보는 시대가 온 것일까? 자아와 세계를 ‘뇌’로 해명하는 것은 곧 우리 삶을 물리적인 현상과 체계로 명쾌하게 이해하자는 것인데, 거기에서 예술은 과학 너머의 것을 노래하기도 한다. 마치 인간이 끝내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형이상학적 요구가 있는 것처럼,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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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뉘엘 페랑, 구에놀라 바공, 스테판 드구탱 <귀류법: 뉴로스위치>(왼쪽) DIY 전자장치, 종이 프린트 2014

사진 박홍순

 

EXHIBITION FOCUS 이창원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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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원 <가족> 홍차잎, MDF 252×400cm 2009 베를린 안도파인아트 (AANDO Fine Art) 갤러리 전시광경

Shadow Casters 이창원 개인전 <그림자의 주인>

현실과 환영, 리얼리티와 이미지의 관계를 파고드는 작가 이창원의 개인전 <그림자의 주인>(2014.11.6~1.30)이 갤러리 시몬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현상과 그 이면을 들춰내는 장치로서 다양한 신작을 선보인다. 미술평론가 신혜영과의 대담을 통해 리얼리티와 왜곡된 이미지의 관계를 드러내는 이창원의 작업과 예술에 대한 태도를 살펴본다.

예술, 현상의 이면을 보여주는 장치

신혜영(이하 ‘신’) 작가님 작업은 2007년에 열린 두아트갤러리 개인전부터 관심 있게 지켜봤습니다. 지난 6월 고양스튜디오 전문가 방문 프로그램에서 처음 뵙고 이야기 나누었을 때 벽면에 붙은 작업 메모들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냥 봐도 성실한 분 같은데 평소 많은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거르고 다듬어서 작업하는 모습이 매력적이었죠.
이창원(이하 ‘이’) 저는 저 자신이 논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단편적인 생각을 메모로 많이 남기는 편이에요. 그리고 관심사도 종교부터 다방면에 걸쳐있어 잡식성이라 할 수 있죠.
이런 사람은 어떤 TV 프로그램을 볼까 궁금해서 여쭤봤는데 당시 드라마 <내 생애 봄날>을 본다고 했죠. 나중에 찾아보고 저도 눈물 좀 뺐습니다. 중반 이후부터는 힘이 빠지고 뻔한 내용이긴 한데 어느 정도 감동을 주는 면이 있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보편적인 주제를 특별하게 풀어내는 게 참 어려운 일이라 생각했어요. 원래 평범한 이야기인데 어떤 관점, 어느 시점에서 바라보느냐, 어떻게 펼쳐놓느냐에 따라 누군가에게 공감을 주는 작업이 되잖아요. 그런 점은 작가님의 작업과 일맥상통한다고 봐요.
저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평범한 나 자신을 조감도처럼 바라보는 거죠. 그게 작가의 시선인 것 같아요. 평범한 일상을 살다가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를 반복하는 것이 작가의 삶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요즘 자주 해요.
작업에서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 빛과 그림자 등 이원적인 구분이 자주 등장하고, 큰 주제를 다루면서도 일상의 재료를 가지고 구체적인 사건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풀어내는 공통된 흐름이 보이는 것 같아요.
그런 관심사는 1998년 독일로 유학을 가서 저 자신에 대해 질문하면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러다가 점차 내 주변의 상황,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됐어요. 그리고 제가 사는 세계를 이해하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원래부터 알고 작업으로 풀어낸 것은 아니지만 제 작업에 대해 글을 쓰시는 분들이 종종 ‘플라톤의 동굴 비유’를 언급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찾아봤어요. 동굴에서 사슬에 묶여 평생 앞만 보는 죄수들 뒤로 모닥불이 있는데, 그들은 그림자라는 환영을 실체라고 착각하며 그림자라는 현상의 근원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내용이죠. 현상의 근원을 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이 곧 진실을 은폐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근데 동굴 비유가 지금 한국 사회에도 유효한 세계상인 것 같아요. 세계상은 세상에 대해 상상한 이미지인데 과거에는 종교에 따른 세계상이 있었고 어떤 시대에는 지구는 평평하다고 생각했잖아요. 세계상은 상상일 뿐이지만 굉장히 무서운 것일 수 있죠.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상상하는지 자꾸 드러내고 함께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과정 없이 무의식적으로 어떤 세계상을 가지고 살다 보면 역사적으로 볼 때 위험한 방향으로 갈 수도 있잖아요. 그렇다고 의무감이나 사명감을 가진다기 보다, 그런 상상이 제 작업의 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저도 작가님의 작업을 플라톤의 동굴 비유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동굴 비유가 사람들을 묶어놓고 리얼리티는 못 보게 하고 이미지만 보게 해서 이미지가 리얼리티라고 믿게 하는 거잖아요. 반면 작가님의 작업 방식은 리얼리티와 이미지의 대결구도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평행세계Parallel World> 같은 경우에는 리얼리티와 이미지의 공존과 대비를 더욱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죠. 처음에 그림자를 보고 어떤 상상을 하는데 실제로 그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출처는 전쟁이나 재난에 대한 신문기사나 영상인 식으로요. 그것이 현실의 장면이라 리얼리티처럼 보이지만, 미디어가 보여주는 리얼리티라는 것 역시 결국 가려지고 왜곡되는 이미지잖아요. 리얼리티와 이미지의 중층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작업의 특징인 것 같아요.
요즘 저는 작업에 대해 관객이 보고 어떻게 반응하는 일종의 장치라고 상상해요. 저 자신이 보통사람인 것처럼 저는 보통사람들이 제 작업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굉장히 궁금해요. 과거 세계상 속에서는 삶도 생각도 단순했지만, 지금은 서로 이율배반적인 세계상이 공존하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살아가는데 보통사람으로서 일종의 분열증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거든요. 동굴의 비유처럼 현상의 근원을 가린다면 사람들은 현상의 실체를 보지 못하잖아요. 하지만 그것을 가리지 않으면 누구나 빛과 그림자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작업할 때에도 그런 관계를 볼 수 있게 장치를 만드는 편이고, 그러면 사람들이 무심하게 살아가는 일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하죠.
이번 전시에서 1층에 설치된 <성스러운 빛Holy Light>은 앞에서는 종교적이고 경건해 보이지만, 뒷면을 보면 세속적인 삶을 이루는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종교와 일상, 삶과 예술 등 플라톤의 이원론적 구분이 이제는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인 것 같아요. 독일에서 처음 선보였죠?
네. 그동안 한국에서는 발표한 적 없어요. 전시장에서 맨 왼쪽에 설치된 작품이 2005년 독일에서 발표했던 것을 일부 다시 제작한 거고요. 그 작품에서 파생된 작업이 1층에 배치되었어요.
군복무 시절 스테인드글라스 제작 경험이 계기가 됐다고 하셨지요?
네. 스테인드글라스는 공간을 점유하지 않고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빛만 조율해서 공간 자체를 전혀 다른 공간으로 바꿔버리잖아요. 그 경험이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사실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는 성당에 들어가면 사람들은 성스럽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죠. 하지만 그게 사람이 만든 빛이잖아요. 그 빛을 통해 신을 느끼는 것에 대해 질문도 하게 됐어요.
그런 불경한 생각에서 시작된 거군요.(웃음) 사실 작가님의 작업에서 빛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데 그때부터 빛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제대하고 바로 빛에 관한 작업을 한 건 아니에요. 미대에서는 졸업할 때까지 돌, 용접 등 전통적인 작업 방식을 배웠죠. 이후 독일에 가서 사진이나 음식물 등 좀 더 다양한 매체를 가지고 실험을 많이 했어요.
독일 유학이 큰 전환점이 된 것 같네요. 조각은 실제 공간의 부피를 차지하고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기본 속성인데, 이후 작업들은 비정형적이고, 물질이 아닌 것일 수도 있고, 빛을 이용해 그림자가 공간을 점유한다거나 반사된 이미지를 사용하는 등 전통적인 조각의 속성과는 거리가 먼 것들로 일관된 것 같습니다.
그런 식으로 작업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2003년 블라인드 형태의 구조에 찻잎을 뿌려서 형태를 만들면서부터였어요. 블라인드와 블라인드 사이에 재료가 어슴푸레 반사되는 빛을 어슴푸레 발견한 거죠. 그때부터 빛을 가지고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물질을 버리고 빛으로 작업했다기보다 그 빛이 여전히 물질을 지시하고 있다는 점이 매력적인 거죠. 사람들로 하여금 반사된 빛을 보게 하지만 그 빛이 원래의 물질을 지시하기 때문에 물질을 넘어선 재료를 가지고 물질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 거예요.
작업의 재료가 찻잎처럼 대부분 일상의 하찮은 재료인데 만들어낸 이미지는 주로 영웅이나 신화 같은 것이더군요. 그런 대비가 무척 흥미로워요. 어떤 의도인가요?
영웅을 형상화한 동상은 권위를 표현하기 위해 세월의 풍파를 잘 견디는 단단한 재료로 만들지만 그 동상의 주인에 대한 사람들의 해석이 바뀌면 금방 철거되거나 철거 논란에 휩싸이죠. 눈앞에 단단한 물질로 만들어져 있지만 사실은 연약하다는 본질을 드러내고 싶었어요. 어떤 거리에서는 굉장히 웅장한 크기의 동상의 이미지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후’하고 불기만 해도 흩어지는 재료로 만들어진거죠. 게다가 찻잎은 가까이서 보면 낙엽처럼 보여요. 그런 시간성도 있고 동양적이고 명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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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원 <플라스틱해> LED 패널, 블랙 라이트/피그먼트 프린트, 금속 프레임 44×64×8cm(각) 2014 갤러리 시몬 전시광경

왜곡된 진실을 드러내다
반사된 빛을 다룬 작업 중에서 일시적이고 고정되지 않은 형태로 그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작업이 찻잎 작업인 거 같아요. 찻잎 작업 다음이 거울반사 작업이죠?
네. 제가 독일 유학 중일 때 한국에서는 찻잎을 이용한 스케일 큰 설치작업을 많이 선보였어요. 유럽에서는 리플랙션으로 이루어진 사진, 그림 작업을 선보였는데 반응이 굉장히 좋았어요. 2008년까지 독일과 벨기에 갤러리와 일을 하면서 작품도 잘 팔리고 생계에도 큰 보탬이 됐죠. 그런데 그런 작업을 계속 하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진 거예요. 그래서 2009년 한 전시를 앞두고 뭔가 새로운 것을 모색해야겠다는 생각에 유리판에 그림을 그려 포지티브와 네거티브를 이용한 자화상 작업을 시도했어요. 나는 하나지만 여러 공간에 비춰 어떤 상황에 투영됐냐에 따라 내가 다르게 보이는 그런 작업이에요. 사실 드로잉 북을 보면 2004년부터 거울을 이용한 작업을 구상했는데 그동안 실현을 안 한 거죠.
자화상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업이에요. 작가가 그린 것은 유리에 네거티브 형상인데 빛에 비쳐서 그림자로 드러날 때 비로소 포지티브로 보이잖아요. 그런 방식이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신작 <플라스틱해The Plastic Ocean>에도 연결되는 것 같아요. 세계지도를 그릴 때 작가가 플라스틱 조각으로 표시해놓은 곳은 바다를 이루는데 우리의 눈에는 대륙이 먼저 보이죠. 그래서 오리-토끼 그림처럼 대륙인지 바다인지, 플라스틱 조각이 어떻게 놓이고 얼마나 조밀하게 모이느냐에 따라 사람의 시선이 그쪽으로 가게 되잖아요. 그래서 세계지도에서 공룡과 같은 다른 형상을 발견하기도 하고… 그런 이미지와 리얼리티의 관계가 재미있어요.
도록에도 <플라스틱해>에 관해 짧은 글을 썼는데 우리가 세계를 파악할 때 육지를 실제 공간으로 생각하고 나머지는 빈 공간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빈 공간에 쓰레기가 그렇게 많이 버려지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에 반전시켜 본 작업이에요.
<엔젤 오브 더 미러Angel of the Mirror>는 어떤 작업인가요?
2013년 겨울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의 소장품이 옥션에 나왔다는 기사가 거의 모든 신문에 실렸어요. 기사들을 봤더니 온통 그 일가의 안목이 높았다든지 어떤 작품이 얼마에 낙찰됐다는 데 관심이 집중돼 있더군요. 그때 작가로서 예술이 과연 무엇일까 많이 고민했어요. 예술이 권력과 부의 장식에 불과한가 하는 자괴감에 빠지면서 하게 된 작품인데요. 소장품 중에 하얀 천사가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거울을 들고 있는 공예품이 있었어요. 그 작품이 전 전 대통령 소장품이 얼마에 낙찰됐다는 기사의 대표 이미지로 쓰였는데 그걸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죠. 일가 사람들이 이 소장품을 가지고 있었을 때 저 거울은 무엇을 비추고 있었을까 그런 상상을 한 거죠. 백설공주 이야기에서 왕비가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고 물었을 때 자신을 말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말하는 것처럼 저 거울도 광주라는 도시를 계속 비춰주는 내용으로 구성하게 된 거죠.
<엔젤 오브 더 미러>를 포함한 2층 전시는 두 개의 다른 작업이지만 하나로 느껴져서 좋았어요. <네 개의 도시Four Cities>는 바그다드, 평양, 서울, 후쿠시마라는 각기 다른 이슈를 가지고 있는 도시를 모아서 4개의 도시가 하나의 실루엣을 이루잖아요. 거기에 광주를 비추는 <엔젤 오브 더 미러>가 더해져 전체적으로 역사・정치・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도시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돋보이는 하나의 전시공간으로 다가왔어요.
우리는 미디어라는 창문을 통해서 어디에서 전쟁이 일어났다거나 방사능이 유출됐다는 식의 사건을 접하잖아요. 미디어가 바로 눈앞에 벌어지는 것처럼 생생하게 보여주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나랑은 상관없다는 식으로 거리를 느끼거든요. <네 개의 도시>는 우리가 서울이라는 도시에 살고 있는데 다른 세 개의 도시를 걸어서 몇 시간 가면, 아니 버스를 타고 몇 분만 가면 갈 수 있는 곳처럼 환영의 차원에서 보여주었을 때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사실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곳이거든요. 그런데 그 사이의 단절은 왜 생기는지 그런 생각에 하나의 도시처럼 연결해 본 거예요.
요즘에는 실질적인 거리 개념은 무너지고 심리적인 거리가 문제인 것 같아요. 미디어로 전쟁을 봤을 때 실제 전쟁의 참혹한 감정은 느낄 수 없는 것처럼 미디어 환경이 리얼리티를 리얼리티로 느낄 수 없게 만드는 것이죠.
세상은 점점 이미지로만 드러나고 리얼리티는 숨겨지는 시대에 사는 것 같아요. 뉴스도 현상만 있고 진실은 가려져 있잖아요.
그래서 계속해서 리얼리티를 보여주는 장치를 만든다는 말씀이 와 닿네요. 전반적인 작업이 영구적인 조각이 아니라 판매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런 지점에 대해 어떤 고민을 하는지 궁금해요.
한국 미술계는 작품을 판매하는 작가와 비평 위주의 작가로 나뉘어 양극화가 심한 것 같아요. 물론 서양 역시 나뉜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정도가 이렇게 심하진 않거든요. 설치작가도 작품을 판매하고 미술관에서는 커미션 작업을 통해 응용할 수 있어요. 그런데 한국은 개인 소장가들이 일반적으로 작품을 투자 대상으로 간주한다든지 장식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문제인 것 같아요.
투자나 장식이어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거든요. 작가가 성장하면 그 작업도 같이 성장한다는 점에서 투자일 수 있고 장식적으로 집이나 공간에 맞게 설치할 수 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데 교육의 문제라고 할까요.
저는 한국 사람들의 취미활동이 굉장히 섬세하고 집요하다고 생각해요. 오디오, 기계식 컴퓨터 자판, 만년필 등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세세한 것을 따지고 그 차이를 느끼고 즐기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아직 현대미술에 대해서는 파고들려고 하지 않고 무관심하거나 잘 모른다는 게 좀 신기해요. 그렇기 때문에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업이 관객에게 어떻게 작동하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컬렉터의 문제도 있지만 사실 작가들이 작품이 판매되도록 잘 마감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봐요. 외국에서 작품을 잘 판매하는 작가들의 경우 작품 지시서instruction나 패키지가 완벽하죠. 아직 한국 작가들의 작품은 완성품으로서 마감처리가 많이 부족한 것 같아요. 갤러리에 있을 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물론 큐레이터, 비평가, 기자 등 생산자와 소비자를 매개하는 사람들의 의식 수준도 전반적으로 상승해야 겠지요.
네. 복합적인 문제죠
앞으로의 계획은요?
중국 베이징 코뮨에서 서진석, 이진명 큐레이터가 기획한 한국 작가 소개 그룹전 (2014.11.25~2.28)에 참여하고요. 연말에는 재충전해야죠.
진행 정리・이슬비 기자
사진 조영하

이창원(왼쪽)과 신혜영 이창원  쇼 케이스, 받침대, LED 조명 113×45×45cm(각) 2014

이창원(왼쪽)과 신혜영 이창원 <네 개의 도시 :바그다드, 평양, 서울, 후쿠시마> 쇼 케이스, 받침대, LED 조명 113×45×45cm(각) 2014

이 창 원 Lee Changwon
1972년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했고 독일 뮌스터 쿤스트아카데미에서 파인아트 전공으로 석사학위(디플롬)를 받았다. 2003년 벨기에 갤러리 쿠세너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11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서울, 독일, 영국, 중국 등지에서 열린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04년 제58회 인터나치오날레 베르기셰 쿤스트아우스슈텔룽에서 관객상을 수상했다.
신 혜 영 Shin Hyeyoung
1975년 태어났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미학과 석사를 졸업했다.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영상커뮤니케이션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학위논문을 준비 중이다. 《월간미술》 기자와 가인갤러리 큐레이터를 거쳐 현재 강의와 미술비평 활동을 하고 있다.

WORLD REPORT Taipei Biennial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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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규 Female Natives 2010 Medicine Men 2010 Field of Teleportation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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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파비바라OPAVIVARÁ의 Fromosa Decelerator 16개의 해먹 다기 나무 220×1000×1000cm 2014

타이베이비엔날레 2014

<타이베이비엔날레2014>는 여타 비엔날레에 비해 매우 조용한 행보를 보인다. 그러나 그에서 비롯되는 공명은 결코 작지 않다. 9회째를 맞이한 <타이베이비엔날레 2014>가 2014년 9월 13일 개막해 새해 1월 4일까지 타이베이시립미술관에서 진행된다. 이번 비엔날레 주제는 ‘극렬가속도劇烈加速度, The Great Acceleration’이며 우리에겐 이른바 ‘관계의 미학’으로 저명한 니콜라 부리요Nicolas Bourriaud가 총감독을 맡았다.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인간에 의해 변화되는 지구에 대한 각각의 단상이 펼쳐졌다. 그 현장을 《월간미술》이 직접 찾았다.

확인하는 비엔날레? 살피는 비엔날레?
황석권 본지 수석기자

아시아 미술계에서 타이완臺灣이 갖는 의미는 의외로 미미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중국, 일본 등 인접한 국가에 비해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데는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향에 함몰돼 <타이베이비엔날레>를 간과한다면 이 비엔날레의 독특한 이면을 놓치는 일이 될 것이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타이베이비엔날레>는 주제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장점을 그간의 전시를 통해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타이베이비엔날레 2014>는 어땠을까? 예술감독으로 니콜라 부리요Nicolas Bourriaud가 선임되었을 때부터 기대감은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 자신이 동시대미술에서 저명한 기획자이자 이론가로서 니콜라 부리요의 관계의 미학은 1990년대 이후 등장한 미술의 혼재성hybridity 등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이론으로 손꼽히고 있다. 따라서 이번 <타이베이비엔날레 2014>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총감독 니콜라 부리요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자신의 프레임이 견고한 총감독이 풀어내는 전시는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던 것일까?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관계의 미학의 이론적 내용과 사변적 실제론 사이의 대화”라고 이번 비엔날레를 정의한 그가 풀어낸 지금의 세상은 인간과 관련한 모든 것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지 않아도 드러난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런 점에서 아시아에서 처음 비엔날레 큐레이팅을 한 부리요가 주제로 제시한 ‘극렬가속도劇烈加速度, The Great Acceleration’가 그의 이론과 어떻게 맞물릴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극렬가속도’는 말 그대로 가속화된 인류의 문제, 즉 산업화, 글로벌화, 그리고 환경문제, 기술적 변화 등을 함축하는 매우 농도 짙은 다중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에서 인류가 새로운 지질학적 힘으로 작용한다는 비공식적 지질학적 용어에서 차용한 ‘인류세the Anthropocene’의 의미가 새삼 부각되는데 전시에서 이 용어의 개념을 어떻게 풀어낼지도 궁금했다.
<타이베이비엔날레 2014> 취재를 위해 지난 대회에 이어 타이베이시립미술관을 방문한 기자는 비정형 전시공간인 미술관 동선에 적응하느라 꽤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동선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듯하다가도 다시 겹쳐 그 구조를 한 번에 파악하기 어렵다. 그래서 자칫 길을 잃었다는 느낌을 준다.
입구에 들어서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협업그룹 OPAVIVARÁ의 가 맨 처음 관객을 맞이한다. 관객이 자연스럽게 해먹에 누울 수 있게 한 이 작품은 이전 대회에서 한나 후르트치히의 가 관객을 맞이한 바로 그 장소다. 전시장 입구에 놓인 작품 외형이나 내용은 전시 성격을 가늠하게 하는 일종의 선입관을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정자亭子를 떠올리게 하는 목재 구조물과 그 내부의 해먹, 다기茶器 등이 구비된 이 작품은 대번 부리요가 말한 ‘관계’에 대한 직접적인 제시로 보인다. 흡사 부리요 《관계의 미학》 도입부에 등장하는 가브리엘 오로즈코Gabriel Orozco의 <모마의 해먹Hamoc en el MoMA>을 연상하게 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번 전시 도입부는 부리요가 제시한 이론의 확립을 위해 준비된 것이겠구나 하는 강한 선입견을 주입하는 공간이었다. 이런 작업을 접하면 이번 전시를 관람하는 나름의 가이드라인이 제시되는 법이다. 입구를 지나면 타이완 작가 황포친 Po-Chin Huang의 을 만날 수 있다. 타이완의 경제혁명 시기를 거친 작가의 가족사를 대비시킨 이 작품 옆에는 펑훙친Peng Hung-Chin의 가 3D프린터로 제작돼 있다. 이곳을 지나면 부리요가 “선사시대의 풍경”으로 지칭한 전시장이 연결된다. 산업화시대의 풍경과 인간이 자연의 단순한 일부였던 자연의 시대 풍경이 전시장 벽을 사이로 전개되는 것이다.
데쓰미 구도 Tetsumi Kudo, 스털링 루비Sterling Ruby, 카미유 앙로Camille Henrot 그리고 양혜규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이 전시장은 연대기 순으로 나열된 발굴 현장을 재현한 박물관을 보는 듯한 광경을 선보였다.

이론과 실재의 만남?
그러나 2층으로 올라가자 1층 전시장과 다른 양상의 작품이 전개되었다. 1층 전시작 피터 뷔게노Peter Buggenhout의 나 나타니엘 멜로즈Nathaniel Mellors의 유의 작업이 인류의 등장과 그 이후의 단상을 제시하듯 보여줬다면, 2층은 부리요의 의도보다 적극적인 제스처로 전체 전시의 주제를 구현하려는 작가 각각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만난 수라시 쿠솔웡 Surasi Kusolwong 은 단연 눈길을 끌었다. 작가는 5톤에 육박하는 실타래를 전시장에 가득 채우고 그 안에 12개의 금목걸이를 숨겨 놓았다. 물론 목걸이를 찾아낸 관람객은 그것을 가져갈 수 있다. 뭐랄까, 가장 아날로그적인 인터랙티브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디지털 신호로 변환시켜주는 센서가 설치된 인터랙티브 작업을 만났던 관람객은 자신의 욕망과 작품이 조우하는 공간에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궁금했다.
같은 층에 있는 시마부쿠 Shimabuku의 설치작업 는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야만 하는, 그것이 숙명이라고 믿는 우리에게 ‘멈춤’과 ‘되돌아감’을 제시하는 작업이다. 또한 은 비슷한 크기의 석기와 최신 태블릿PC를 함께 제시하는데 ‘기억’을 상징하는 석기는 손에 들면 마치 전화기처럼 통화를 하거나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충동을 일으킨다.
요나 프리먼과 저스틴 로Jonah Freeman&Justin Lowe의 도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모형 건축물이 놓인 정식 전시장으로 인식되는 장소 옆문으로 들어서면 이곳이 과연 전시장인지, 아니면 스태프의 휴게공간 같은 미술관의 숨은 공간인지 착각을 불러일으켜 마치 공사 중인 미술관의 자투리 공간을 발견하는 인상을 주었다.
3층에서 만난 올라 페슨 Ola Pehrson의 (1999)는 의식적이지 않은 식물을 통해 인간 부재의 시대에 대해 생각해보는 작업이다. 사무직 노동자가 관상용으로 쉽게 마련하는 난초과 식물인 유카를 컴퓨터에 연결, 주식투자의 패턴을 학습시킨다는 내용. 유카에게 가는 물과 태양의 양이 주식시황에 맞게 조절된다.
린궈웨이Lin Kuo-Wei의 는 마치 지구본을 맞대놓은 듯한 형태의 작업이다. 자전축을 중심으로 전동장치에 의해 서로 반대방향으로 회전하는 구체球體는 갈리는 소리와 함께 서로의 외부에 흔적을 남기게 된다.
부리요는 이번 <타이베이비엔날레 2014>를 통해 적어도 이론과 실재의 관계를 드러내려는 의도는 이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점이 현지 작가나 기획자가 이번 비엔날레를 비판적으로 보는 빌미를 제공한 것도 같다. 1990년대 말부터 부리요가 이론과 일련의 전시를 통해 보여준, 어떻게 보면 동어반복을 한 듯한 인상을 받았다는 비판을 들었기 때문이다. 타이완의 한 기획자는 “어떤 비엔날레도 그러한 비판을 받겠지만 이른바 현지화, 즉 타이베이에서 유럽의 기획자가 보여준 것은 유럽의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며, “적어도 타이베이는 이 전시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고 말했다.
이는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미술 이벤트에서 해당 국가와 주변 국가의 담론들을 적극 수용하는 ‘변별력 있는 비엔날레가 되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적어도 ‘타이완의 현실이나 타이완이 속한 아시아의 문제’가 제대로 거론되지 못한 점은 분명한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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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카 이Anicka Yi Le Pain Symbiotique 2014

 

NEW FACE 2015 고재욱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

사랑의 상처는 많은 사람을 파멸에 이르게 한다. 사랑의 아픔을 주체하지 못한 개인이 저지른 행동이 나비효과로 사회적 사건, 사고에 영향을 끼친 사례도 많다. 작가 고재욱의 작업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이해하고 느끼는 ‘사랑’이란 감정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진중한 언어로 작업을 풀어나가기보다는 자신의 일상 속 이해의 폭 내에서 재치있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업은 어딘지 모르게 어설프면서 솔직하다. 모든 작가가 이해하기도, 다가가기도 힘든 거시적인 문제에 집중해 이러쿵저러쿵 무겁게 풀어나갈 필요는 없다. 작가 고재욱의 개인적 고민은 진정성을 갖고 관객은 이에 자연스럽게 다가간다. 그는 주변부를 건드려 세대의 목소리, 사회의 문제들이 은연중 작품에 드러나는 것을 즐긴다.
고재욱은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인터랙티브 작업을 주로 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그것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차치하고서 일단 관객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작가가 미리 선곡해둔 이별노래의 반주가 흘러나오는 반투명 유리 노래방 작업인 이 그 중 하나다. 작가는 살짝 문이 열린 노래방에 들어가 열창하고 관객은 그를 바라본다. 이 작업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원하면서 한편으로 이를 숨기려는 젊은 세대들의 모습을 풍자했다. 는 헤어진 연인의 물건을 3개월간 보관하는 프로젝트였다. 2013년 당시 60여 명의 신청자가 몰려 카메라 가방부터 헝겊조각까지 다양한 물품이 수집되었다. 작가는 개인적인 역사가 담긴 오브제를 병치해 그들이 가진 저마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2009년부터 진행했던 는 관객과 작가의 상호관계가 더욱 강한 작품이다. 작가는 자신의 사진을 물리적으로 가기 힘든 지역으로 보냈다. 이 사진을 받은 이는 작가의 자신들을 함께 찍은 사진을 작가에게 되돌려주게 한 프로젝트였다. 허구의 이미지가 세계를 이동하며 실존하는 인물들 간의 묘한 관계를 형성했다. 이미지가 부유하는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이는 지극히 일상적인 발상이었다. 그리고 이 사진들을 모아 전시장 한 벽면을 채운 방식은 마치 SNS에서 테그에 걸린 여러 사진을 펼쳐놓은 듯한 인상을 주었다.
2014년, 그의 관심은 유휴공간을 이용한 대안주거에 쏠렸다. 서울 시내에도 주위를 둘러보면 곳곳에 공터가 있다. 그러나 막상 점유할 수 있는 ‘나만의’ 주거공간을 구하기란 어렵다. 최근 빈집, 빈고 등 대안적 공동거주 형태들이 생겨나는 상황에서 그는 이동할 수 있는 <렌터블 룸> 프로젝트를 생각했다. 이 프로젝트는 2014년 11월 11일 공간해방을 시작으로 오렌지 연필(2014.11.27~2014.12.3), 반지하(2014.12.4~7), 가우스(2014.12.10~17) 그리고 서교예술실험센터(2014.12.22~27)로 옮겨갔다. 설치된 방을 연인에게 대실하는 프로젝트다. 본래는 미술과 무관한 서울시내 유휴공간에 설치할 계획이었으나 임차공간을 구하지 못해 아쉽지만 문화관련 공간 일부를 빌려 진행했다. 이용객은 미술작품이라는 인식 없이 온 경우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미술과 숙박업의 경계가 모호한 상황이다. 일종의 ‘대실’ 프로젝트이다보니 한 숙박업체 사이트에 이벤트 형식으로 공고되어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하고, 숙박업체를 공유하는 사이트에 올라온 사용자후기를 보고 예약문의를 하는 등 웃지못한 에피도드도 있었다. 덕분에 프로젝트 기간 내내 룸은 만실이었다. 작가는 찾아온 이들에게 작업의도를 설명하고, 자신이 꿈꾸는 집의 구조를 그려달라고 주문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프롤로그 역할을 하는 짧은 소설을 읽도록 했다. 누군가는 작업이 가볍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는 말한다. “이론적으로 보면 참여미술로 분류할 수도 있겠고, 거주형태에 대안을 제시하는 사회 참여적 메시지를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을 해석하고 분석하는 겹겹의 층을 제거하더라도 1차적인 레이어는 단순하다. 결국 ‘방’이다. 이해를 떠나 관객이 즐길 수 있는 작업을 바란다.”
임승현 기자

고재욱 인물 (2)고재욱 Koh Jaewook
1983년 태어났다.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독일 코에스펠트에서 열린 을 시작으로 4차례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2013년 첫 개인전을, 2014년에는 으로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NEW FACE 2015 김윤희

자연과 인간이 유쾌하게 공존하는 세상

오늘날 동양화가들은 심리적 부담감이 크다. 동양화의 전통적 요소와 동시대적 변화를 어떻게 풀어낼지에 대해 고민이 많기 때문이다. 풍경을 그리는 작가 김윤희 역시 마찬가지다. 작가는 최근 만삭의 몸으로 5번째 개인전 <기묘한 설레임>(2014.12.6~12)을 인천 갤러리 지오에서 열었다. 그녀는 자신의 작업이 “산수나 풍경으로 정형화되기보다는 이미지 그 자체로 인식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윤희는 강원도, 서울 일대의 풍경을 스케치하기 위해 답사를 다니고 동네의 특성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데 집중했다. 예를 들어 서울 한남동이 강변북로로 둘러싸인 모습을 마치 왕관처럼 캐릭터화했다.
요즈음 작가는 장소에 대한 해석을 개인적인 감수성으로 환원하기보다 그림을 보는 이가 풍경을 이미지 자체로 대면하고 그림에서 독특한 감각을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풍경의 패턴화된 형태, 도트, 색면 처리 등도 인간과 자연이 맺고 있는 유기적 관계 속에서 새로운 공간 개념을 제시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에 해당한다.
김윤희가 그리는 풍경은 이상향도 아니고 그렇다고 삭막하지도 않다. 인간의 거주 공간은 마치 아이들의 장난감 블록처럼 자유롭게 구성되지만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는 조화로운 공간으로 표현돼 있다. 여기에서 자연 풍경은 회색톤의 먹으로, 동네 풍경은 컬러풀한 아크릴 채색으로 대비를 이루는 것이 특징적이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은 대결구도가 아니라 그림 안에서 색다른 어울림을 이루는 것이다.
김윤희는 동양화의 특성이 한계처럼 느껴지더라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떠안는 방식을 취한다. 때로는 동양화의 전통을 뛰어넘어 마음껏 변주를 시도한다. 일반적으로 동양화가들은 먹을 통해 붓자국을 강조하지만 그녀는 먹을 하나의 색으로 사용한다. 자연이라서 먹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색으로서 먹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아크릴의 검은색은 먹만큼 풍부한 색의 깊이를 표현하지 못하단다.
그녀에게 동양화는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기 위한 풍부한 토양이자 원천이다.
김윤희의 근작들은 이번 전시 제목처럼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면서 느낄 수 있는 하나의 감수성으로 ‘기묘한 설레임’을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과거 동양화에 자연을 이상향으로 바라보는 전통적인 관점이 배어있다면 작가는 지금의 현실이 반영된 자연관이란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연을 통해 아름다움과 휴식을 느끼고자 했다. 작가는 직접적으로 주장하진 않지만 이런 감수성이 오히려 인간이 자기 중심적으로 자연의 리듬을 파괴하고 현대문명을 성립해온 근원은 아닌지 반성한다. “자연과 사람이 만들어낸 공간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자꾸 변화하는 과정이라 생각해요. 이 공간 속에서 기묘한 느낌, 그리고 이전에 알지 못했던 설레임을 찾고 싶어요. 서로 다른 두 감성이 만나서, 실제로 존재하지만 사람들이 포착하지 못하고 잃어버리는 공간감을 드러내는 것이죠.” 하지만 그녀의 작업은 인간의 삶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유쾌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공간의 유쾌함을 드러내기 위해 제목을 지을 때도 나름대로 고민하는 편이다.
김윤희의 작업은 여전히 어떤 변화를 위한 출발점에 서있다. 지금의 시도가 차곡차곡 축적되도록 작업량을 늘리고 앞으로는 대형 작업을 선보일 예정이다. 그리고 작업도 좀 더 단순한 형태로, 평면적으로 변모시킬 계획이다. 그러다보면 지금까지 화면에 보여주었던 전통적인 필선이 없어질 수도 있다. 그러면서 작가는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지점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 고민이라고 밝혔다.
이슬비 기자

art141212_02김윤희 Kim Yoonhee
1984년 출생했다. 덕성여대 동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홍익대학교 대학원 동양화과 박사과정 중이다. 2008년 관훈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을 시작으로 5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CRITIC 청춘과 잉여

커먼센터 2014.11.20~2014.12.31

얼마 전까지 힙스터가 해야 할 일 중에 하나가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인터스텔라>를 보면서 ‘허니버터칩’을 먹는 거란 말이 있었다는데, 굼뜬 일상인지라 하나도 이룬 게 없었는데 얼마전 허니버터칩을 맛볼 기회가 있었다. 기존 감자칩과 다른 새로운 시도로 짭짤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허니버터칩에 대한 소문과 기사 때문인지 신문물을 앞에 두고 조금의 기대와 긴장을 하고 먹었는데. 내 맛도 니 맛도 아님을 알고 난 후 과자 하나를 앞에 두고 여러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청춘과 잉여전>은 젊은 기획자 듀오 ‘유능사(안대웅, 최정윤)’의 입봉 전시이기에 작가 박찬경의 말처럼 어설픈 지도 그리기도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시도 자체로 보기에 <청춘과 잉여>는 지나치게 야심 찬 기획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이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그리고 2010년대를 관통하는 한국 사회의 주제로 아시아, 이야기, 유토피아, 매체 그리고 어떤 주체(?)의 5개를 제시했다. 계보와 위치 짓기를 시도하는 기획에서 그 기준의 근거가 적확하지 않다면 기획의 의도나 의미를 공감하기 어려운데, 아무리 꿰어 보아도 왜 5개의 주제인가, 각각의 주제가 어떤 관계인가 알기 어려웠다. 송상희-이자혜 작가를 묶는 주제는 정리되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청춘’과 ‘잉여’ 의 대표 주자처럼 짝을 이룬 작가들은 (박찬경-이완, 안규철-김영글, 정연두-백정기, 박미나-이상훈, 송상희-이자혜) 이미 작업 맥락이 뚜렷한, 제도적으로 연착륙한 작가들이라 전시의 재료로써 작업은 보장된다. 그렇다면, 전시의 관건은 젊은 기획자로서 미술계에 이러한 이슈를 제기하고 주제에 맞게 작업들을 어떠한 맥락에 놓는가에 달려있다 할 것이다. 기획자는 장소 특정적 성격이 강한 전시에 공간 자체의 아우라보단 작품이 드러나도록 노력했다고 이야기했지만, 공간 배치에서 특정 소주제와 몇몇 작가에 집중해 최소한의 균형이 부족했고, 1층부터 4층까지 22개의 작업을 보는 과정은 분절적이고 부자연스러웠다.
한국사회에서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그리고 2010년대 초반은 20여 년에 불과하지만,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급진적이고 다층적 맥락을 지닌다. 그렇기에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전시 배경과 내용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준 기획자의 현학적 수사에 비해 주제 정리와 배치 과정에 대한 느슨함이 더욱 아쉽다. 차라리 역사화에 대한 힘을 빼고 분명하지 않고 중첩된 5개의 주제와 <댄싱 위드 더 스타>와 같은 작가 짝짓기 형식을 조금 줄여 집중했다면 잘 꿰어진 보배가 되지 않았을까.
<청춘과 잉여전>은 최근 20여 년의 한국 사회와 미술의 궤적에 대한 짭짤하고 달콤함을 뒤섞은 위치 짓기의 시도였다. 어쩌면 전시 자체의 의도나 기획의 역량은 거기까지였을 수도 있는데, 미술계의 과대 혹은 과소 비평과 감상이 있을 뿐이다. 첫 전시가 좋든 나쁘든 오르내렸으니 더할 나위 없는 성과이자 앞으로 행보가 주목받게 된 것도 힘이 될 것이다.
2010년부터 제도권에 등장한 젊은 기획자들의 자기조직화 방법 중에 동시대미술에 대한 계보학적 위치 짓기, 감각적 네이밍와 출판은 나름의 전략일 수 있고 대체로 효과를 발휘했다. 젊은 기획자의 야심 찬 기획과 전략의 방법론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1:8의 세상에서 예술의 가능성은 작아지지만 책임은 무거워지는 상황에서 기획자의 정신승리를 위한 시도에만 기대는 것은 조금 단순하고 순진한 마무리일 수 있다. 공공영역의 실험적이고 대안적인 활동이 축소되는 상황에서 젊은 기획자들이 귀한 자산이 되어야 하기에 조금 느리더라도 깊이 성찰하고 정진해주길 바란다면 요즘 실정 모르는 기성세대라고 할까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하고 부탁하고 싶다.
채은영 우민아트센터 학예실장

CRITIC 이광호 그림 풍경

국제갤러리 2014.12.16~1.25

환한 빛이 가득한 1층 두 방에서, 그리고 어둠으로 차 있는 2층에서 곶자왈을 만났다. 지나간 시간들이 말라비틀어진 덩굴식물의 줄기와 나뭇가지들이 덤불 속에서 폐부를 찌르듯 쏟아져 나왔다. 눈앞의 잡목 뒤에 어떤 세계가 펼쳐져 있을지 가늠할 수 없었던 그때의 낯섦은 무한한 원시림을 상상하게 했는데, 세월이 지나 갑작스레 화면 속에서 마주한 곶자왈에서도 그 너머의 산길은 가늠할 수 없었다. 기시감을 넘어선 실재의 공간, 곶자왈은 꿈속에서 만난 풍경이자 잠시 머물렀던 지나간 시간이며 무한히 펼쳐내는 환상적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곶자왈은 내게는 아르카디아이나 작가 이광호에게는 매료된 특정 장소이자 자연을 사색하는 공간이다. 남자 차장이 버스 몸통을 두드리며 외친다. “곶자왈! 곶자왈 내립서.” 외지인인 나의 뇌리에는 제주도의 소리 “곶자왈”이 각인돼 있다. 창밖 어둠 속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그곳을 다시 지나던 낮에, 여전히 버스 몸통을 탕탕 두드리는 남자 차장의 비음과 함께 차는 출발하고 창밖으로 엄청나게 큰 고사리잎으로 뒤덮인 산길 입구가 열려 있었다. 5.16도로에 감사하며 버스 운행시간에 맞추어 제주도의 남쪽과 북쪽을 오간 이들에게 ‘곶자왈’은 그렇게 사전적 의미로 설명되지 않는 어떤 장소이고 어디서나 만나는 동네 숲길이다.
이광호의 화면 속에 존재하는 곶자왈은 눈이 덮여 있을 때조차 봄으로 보인다. 연중 상온을 유지하는 제주에서 눈은 그저 차가운 수분일 뿐이다. 눈 아래 놓인 푸르름과 달리 덤불은 눈을 넘어 공간으로 뻗어 오른다. 그 날카롭고 뻣뻣한 나뭇가지 혹은 메마른 줄기들은 바늘의 예리함으로 화면을 뚫고 나와 속살을 드러낸다. 푸르름이 가득한 봄 풍경과 물기가 말라들어 바삭해진 가을 풍경 모두 발려진 물감층을 뚫고 비집고 나온 풀이나 잡목처럼 그렇게 생명력을 드러낸다. 그것은 바로 예리한 바늘의 리듬감 있는 그리기, 결국 표면의 상처를 통해 형상화된 빈 공간이다.
화면 속 곶자왈의 밤은 깊고 무겁다. 부드럽고 가늠할 수 없는 깊이로 인해 상상력의 골이 무한히 깊어지는 공간을 체험케 한다. 그림의 표면은 균질하고 싱싱하다. 밤을 울리는 벌레 소리와 잎이 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부드러운 생명의 현장이 흔들거림 혹은 진동하는 에너지의 축처럼, 가는 떨림이 가득한 평면에 다름 아님을 알게 될 때, 이 작가의 놀라운 테크닉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탄력 있는 고무붓의 경쾌한 리듬과 탄성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진동하는 에너지의 형상화를 보게 되는 것이다. 숲에 이르러 보지 못하게 되는 숲이 아니라, 가까이 들여다보아 사라지는 나무가 아니라 생명성 자체를 경험하는 일, 그림 속 곶자왈을 만나는 것은 각인된 시간의 여행, 원시적 생명성에의 경외를 경험하는 일이다.
조은정 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