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the 56th Venice Biennale

단색화 Dansaekhwa
팔라조 콘타리니-폴리냑 Palazzo Contarini-Polignac
5.7~8.15
최근 국내에서 주목받고 있는 단색화를 세계무대에 소개하는 전시가 베니스 비엔날레 병행전시로 열린다. <단색화전>이 바로 그것. 이용우 상하이 히말라야뮤지엄 관장이 기획하고, 1970년대 베니스의 유서 깊은 건물에서 열리는 이 전시는 단색화의 태동기와 중기, 그리고 근작에 이르는 70여 점을 소개한다.

단색화 (6)

김환기 전시광경 사진 왼쪽은 <5-IV-71 #200 Universe> 면에 유채 254×254cm(2점) 1971

베니스에서 만난 단색화의 현재적 의미

이용우 상하이 히말라야뮤지엄 관장

베니스 비엔날레 병행전시로 열리는 <단색화전>을 기획한 이용우 큐레이터는 서구의 모노크롬과 단색화를 비교하면서 “다양한 신체적 행위가 동원된, 색채의 정신적 승화를 위한 자연 회귀적 사고가 본질”이라고 정의한다. 또한 우리 내부에서도 논의가 한창인 단색화에 대한 베니스 전시를 또 하나의 ‘토론장’으로 규정한다. 전시 기획자의 의도를 살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단색화란 ‘단일 색채의 회화’라는 뜻으로 1970~80년대 격변기 한국현대사를 배경으로 탄생한 미술형식이다. 단색화는 특정한 미술형식의 미학적 정체성이나 맥락의 특징을 보전하기 위해 발생국가의 어원이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미술사의 전통에 따라 한국어, 또는 한자어로 표기된 용어이다.
단색화는 서구의 모노크롬회화와 유사한 형식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그 역사적 배경이나 미학적 실천, 담론에서 상이한 구조를 갖고 있다. 서구의 모노크롬은 다색에 대한 거부와 반대개념으로서 극단적 색채의 대비에, 그리고 회화의 종말을 예고하는 아방가르드 미학의 실천으로서 형식의 단순성에 착상했다. 그러나 단색화는 평면과의 소통을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신체적 행위가 동원되며, 색채의 정신적 승화를 위한 자연 회귀적 사고가 본질을 이룬다.
모노크롬은 본질적으로 서구 아방가르드 미학의 바탕 위에서 탄생한 형식주의 예술로서 회화나 디자인, 영화, 사진에서 색채의 감수성을 여과하고 배제해 절제의 미학을 극대화시킨다. 회화의 경우 캔버스 표면에 절대적 긴장상태를 유발하고 도전하며, 예측 가능한 실험적 결과들을 논리적으로 해명한다. 그러나 단색화는 색채의 감수성을 배제하기보다는 단색성을 통해 색채의 기름기를 제거하고 회화적 친근성(affinity)과 유연성을 유지한다. 특히 평면에 색채를 바르고, 뜯고, 캔버스의 뒤에서 물감을 밀어내고, 긋고 하는 제작 과정의 신체적 행위가 작품의 생산 과정에 중요한 퍼포먼스 요소로 등장함으로써 비예측성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단색화는 회화적 전통에 대한 단절이나 배제, 긴장이 아니라 색채의 단순성에 기반을 둔 평면의 진화, 변형을 바탕으로 한 내면적 해석이 강조된다. 모노크롬 회화와는 달리 단색화에서 나타나는 형식적 절충주의는 이러한 배경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단색화는 1970년대 당시 반제도권, 반관전(官展)운동에 앞장섰던 이른바 한국모더니즘 1세대 주요 작가들의 의식의 결집에서 나온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저항성이나 급진적 실험의식에도 불구하고 단색화는 집단주의를 토대로 한 문화정치적 슬로건을 내세우거나 거대한 운동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당시 참여 작가들의 개별적 이해와 해석을 토대로 전개된 하나의 흐름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단색화 작가들의 배경에는 ‘반국전선언’이나 ‘아방가르드 예술가협회’의 활성화, 시각예술에서 신체와 언어의 역할에 대한 적극적 인식 등 이른바 모더니즘 미학의 전방위적 가치들이 함께 등장한다.
단색화 탄생의 사회정치적 배경은 단색화를 이해하는 미학적 형식뿐만 아니라 단색화의 정신적 문법을 해독하는 열쇠가 된다. 20세기 한국 근현대사에서 주목되는 일제 식민지 40년과 그 수탈, 180만 명의 희생자를 낸 6·25전쟁, 남북 분단, 4·19혁명, 5·16군사정변, 군사독재, 그리고 경제개발 중심주의 등은 한국사가 지나간 자취이자 한국인이 겪은 분절이다. 특히 1960~80년대 군사독재로 인한 사회적 억압현상이나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 중심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형성과 실천의 초기단계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가치의 혼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이어진 한국인의 미학적 감수성이나 혼(魂)은 단색화의 탄생과 전개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역사적, 사회적 단서들이라고 볼 수 있다.
단색화는 1950~60년대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운동 등 서구모더니즘의 흐름과 한국의 현대미술이 어떤 영향과 연관관계에 있었는지, 또는 정신적, 형식적 차별성을 확보하기 위해 어떤 미학적 자주성을 생산했는지를 연구하고 검증하는 데 중요한 맥락을 제공한다. 특히 한국현대미술의 독자적 미학형식을 담론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비판적, 또는 긍정적 요소로서 담론 생산의 단서이자 근거이기도 하다.
오늘날 미학적, 미술사적 기록과 근거들은 작품에 대한 스토리텔링이나 형식 중심의 판단을 넘어 사회학적 비평과 문맥에 대한 인류학적 관찰, 예술과 대중의 접지(earthing)를 위한 그라운드 등에 대한 고려에서 관건이 된다. 단색화예술을 포함한 한국모더니즘, 그리고 리얼리즘 예술 등 지난 세기를 풍미한 다양한 경향들은 그 진지한 실험적 맥락과 실천에도 불구하고 계보학적 파벌주의나 분파적 속성을 보여왔다. 따라서 이번 단색화에 대한 탐색은 단순한 전시가 아닌 글로벌 시각을 통하여 본격적 검증을 시작하는 첫 무대를 마련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는 단색화를 비롯한 한국의 모더니즘형식이나 예술의 사회학적 가치에 대한 검증으로 발생한 1980~90년대 민중미술과 리얼리즘미학 등을 비로소 동일한 구도에서 통합 검증하는 시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베니스 비엔날레 병렬전시(collateral event)로 마련된 단색화 전시는 최근 3년 사이 이뤄진 단색화에 대한 다양한 전시나 출판, 세미나, 그리고 국제사회의 관심들을 종합한 또 다른 토론장이다. 그 이유는 단색화가 그 명칭에서부터 전개 과정에 대한 배경, 미학적 해석, 작가들에 대한 역사적 구분과 선별작업, 글로벌 미술계의 관심, 시장의 변화 등에서 아직도 토론되어야 할 많은 숙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전시기획자로서 이번 전시가 전시행사가 아니라 단색화에 관심을 가진 전문가나 관객들의 관심을 배가하는 라운드테이블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것은 단색화가 한국의 미학적 자주성이나 한국미술의 대표성을 갖는 다양한 모멘텀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동기에 기반을 둔 것이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 전개된 모노하나 구타이 그룹 등이 일본이나 동양의 대표적인 실험적 시각문화현상으로 미학적, 미술사적 평가를 받아온 것과 유사한 제안이다. ●

하종현 <Conjunction 74-25> 200×100cm 1974

* 이 원고는 베니스 팔라조 콘타리니-폴리냑에서 열린 <단색화전> 브로셔에 실린 필자의 글을 편집한 것임.

 

 

THEME FEATURE 뉴 스킨: 인식과 재현 사이

2015년 한국미술의 새로운 경향!
언제부턴가 ‘청년 작가’, ‘신생 공간’이란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또 ‘개인전’이 아니라 ‘프로젝트’라는 경력 사항이 작가들의 약력에 등장한다. 1980년대 중후반 출생 작가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작업의 변화 양상은 이전 세대와는 분명 다른 점이 있다. 기존 미술계와 구분 짓는 하나의 층을 만들어 나간다는 ‘청년작가’의 말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들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해하고 표현하는 세상은 기존의 현실인식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그들의 언어’에 대한 소통의 가교가 필요한 시점이다. 《월간미술》은 6월 26일부터 8월 9일까지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뉴 스킨: 인식과 재현 사이전>에 참여하는 작가 5인을 만나 그들의 작업을 소개한다. 기존 작업과 이번 전시에 소개될 작품 일부를 미리 만나보는 자리다. 현재 상황(state of things)에 대한 인식과 이를 표현하는 재현의 방법을 젊은 미술가 5인의 작업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들이 구현한 다른 세상(another state) 속 현실세계의 문을 활짝 열어본다. <뉴 스킨: 인식과 재현 사이> 일민미술관 6.26~8.9

유저-미술가(User-Artist)의 탄생

함영준 일민미술관 책임 큐레이터·커먼센터 멤버

1990년대 이후 수많은 신진작가 프로그램과 공모전,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지만, 응당 제시됐어야 할 의제는 기약없이 지연되고 있다. 해마다 쏟아져 나오는 미술가 지망생들은 간단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전국을 돌며 프리젠테이션을 했고, 그렇게 전국을 돌다 보면 물리적으로는 더 이상 청년이 아닌 세대에 근접하는 나이를 먹으면서도, 결국은 언제나 청년일 것 같은 분위기가 반복되었다. 그것은 과거의 청년 작가가 더 이상 청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 (버블을 거치며) 미술계의 노화가 급속도로 진행된 최근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제도의 공회전은 청년 작가에 대한 보편적인 접근, 그러니까 ‘작가’라는 정체성보다 ‘청년’이라는 세대의 계급적 배경에 우선 주목하면서 부득이하게 가속화할 뿐이었다. 신진작가의 성장을 지연시키면서도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게끔 하는 복지 정책의 역할을 담당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 공회전의 운명은 불치병에 걸린 환자의 팔에 링거를 꽂은 형태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이 의제 설정의 풍선돌리기는 곧 끝날 것 같다. 더 이상 부풀어 오를 수 없는 풍선이 폭발 직전에 있기 때문이다. 때를 맞춰 미술계에 투입되던 공적 기금이 서서히 고갈되어 간다는 소식이 들리니 이보다 더 좋은 타이밍이 있을 수 없다.
최근 미술계에서 감지되는 이상한 활력은 꽤 많은 청년 미술가에 의해 견인되고 있다. 아마도 한국 특유의 역동적인 인터넷과 스마트폰 문화의 영향일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의 양은 학계나 교육제도가 차마 전부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방대하고 확산 속도도 빠르다. 하지만 제도권 내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무수한 이즘의 연대기는 정보를 담은 아이템으로 환산되어 유튜브나 넷상에 공개된 텍스트를 거쳐 직접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형태와는 다르다. 말하자면, 김구림이 미8군에서 쓰레기로 버려진 《아트 인 아메리카》를 보고 서구의 아방가르드를 ‘흉내’내고자 했던 동기에 비해, 최근의 젊은 미술가들은 단지 정보의 흡수를 위해서만 인터넷을 이용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관심은 서구 미학의 흐름을 어떻게 제 작업의 동기로 변환하느냐에 있다. 나아가, 미술적 정보뿐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는 좀 더 간편한 방법으로서 인터넷 자체를 어떻게 내적 체계로 만들어 흡수하느냐에 관심을 둔다. 이는 최근의 미술로 공인된 니콜라 부리오의 ‘관계미학’마저 역사의 뒤안길로 밀쳐버릴 기세다. 요리를 해서 관객에게 먹인다든지, 집처럼 꾸며놓은 공간에 손님을 초대한다든지 하는 작품은 최첨단의 현대미술이 의태해야 하는 양식화된 패턴으로 변화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유저-미술가들은 관계미학으로 통칭되며 (미술시장을 포함하여) 미술계의 전면에 나섰던 명장들의 세계 인식에 대해, ‘원래 그런 것 아니었어?’라는, 마치 별것 아니라는 듯한 태도로 바라본다. 획득된 정보가 단순히 내용을 담고 있는 어떤 물질인 것이 아니라, 마치 게임의 아이템처럼 레벨로 환산되는, 데이터베이스 소비형 미술가, 유저-미술가가 탄생한 것이다.
유저-미술가는 여전히 청년 작가로 불리는,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에 태어난 작가와도 극명한 차이를 가진다. 유학을 통해 해외 경향을 습득하고 귀국한 작가들이 영미권의 미학을 한국의 상황에 적용하기 위해 엇비슷한 상황을 다소 기계적으로 환유하기도 했던 것에 반해, 1980년대 중반에 태어나 초/중학교때 IT붐을 겪은 세대는 그러한 미적 판단에 대해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이는 그들에게 주어졌던 문화가 전지구적 현상의 일부로 이미 편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생 작가들이 한국에서, 그리고 영미권에서 받은 교육과 영미권 학생과의 교류를 통해 점검했던 취향을 작품에 그대로 드러내는 오글오글함을 탑재하고 있었던 반면, 1980년대의 작가들은 자신이 보아온, 직접 즐겨온 일본의 망가와 게임을 경험했던 인식의 방법을 통해 스스로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을 개척하고 있다.

옆으로 이동하는 미술
가상의 ‘위’를 설정하고 거기에 본인의 자아를 투영해서 목표 지점을 성취하려는 작가의 작품은 더는 설 자리가 없다. 디아스포라 등의 철지난 의제를 남북의 상황에 연결짓는다거나 하는 등의 기계적인 태도를 재현함으로써 상황을 연출하는 것에 다름아니라는 것이 인터넷을 통해 전부 다 공개된 정보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답으로 ‘동아시아’라는 거대한 덩어리에 몸을 던져서 시선의 기계적 평등을 성립시키는 선배 세대와는 달리, 한국에서 자라난-유학의 여지가 있을 정도로-젊은 세대의 작가들은 거대한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작품을 설계하는 방식을 이미 현대미술의 ‘쿠세(くせ)’로 인식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는 가상의 그래프를 그려봄으로써 좀 더 명확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위 아래가 없는 세상에서 계속해서 옆으로 옆으로 옮겨가며 제 인식의 영역을 넓히는 평면적인 가상의 세계가 최근 청년 작가의 미의식이 추동하는 정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기존의 한국 현대미술이 이상향을 설정하고 그것을 어렴풋이 복제하면서 몸집을 키워왔던 것과는 다르다. 대신에, 그들의 미술은 ‘득템’한 인터넷상의 물질을 역시 ‘득템’한 현대미술의 공략집에 적용해보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마찰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기존의 이미지를 열화시켜 요소로 콜라주한 뒤에 그것을 뒤섞어 근사한 비디오를 한 편 제작하는 일은 해외의 유사한 사례를 따르는 추격자의 뉘앙스가 삭제되어 있다. 몇 년 전부터 몇몇 한국 미술가가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라고 하는 작업 방식을 시도하는 것이 그 좋은 예다. 거기에는 이론화한 현대미술적 형식을 의식하는 자세나, 특정 사물에 접면하는 패티시를 개인적으로 충족하려는 충동보다는 수평적으로 널찍하게 분포하는 데이터베이스의 순서를 채집하고 배열함으로써 각각의 시퀀스가 가진 아련한 충동을 충돌시켜 새로운 공간을 구축하려는 의지가 보인다.
인터넷을 통해 청년 작가들은 과거 어떤 세대도 이루지 못한 전 세계의 동기화 속에서 살고 있다. 변방이 더 이상 변방이 아니고, 현재가 더 이상 현재가 아닌, 이 중차대한 시점에 미술계는 어떻게 현재를 맞이해야 할까? 어떠한 미술이 현재 한국의 상황에 걸맞을까? 의제 설정에 게을렀던 미술 제도의 영역 바깥에서 의미있는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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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하 전략적 (3)

박민하 전략적 (1)

<전략적 오퍼레이션-하이퍼리얼리스틱> HD비디오 21분33초 2015

영화관과 미술관을 오가며 영상설치와 스크리닝이라는 형식을 통해 ‘본다’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 시각성에 대한 탐구를 지속적으로 해왔다. 내가 다루는 ‘시각성(visuality)’은 현대사회 속 여러 장소에서 찾아낸 각종 일루전과 연결되어 있다. 영화세트장을 차용한 캘리포니아 군사기지 ‘NTC Fort Irwin, LA’에 내리는 가짜 눈(snow), 관광지가 된 중국-북한의 국경 등의 장소다. 이곳에서 각종 산업이나 군사전략 등과 맞물려 생성되는 일루전에 주목하고 그 시각적 환영의 메커니즘을 파헤친다. 작업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영화적 특수효과는 어떤 사물이나 장소를 ‘물리적’으로 변환시키는 아날로그적인 특수효과로부터, 현실을 가상으로 ‘인코딩’하는 디지털적인 특수효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현실과 허구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수반할 수밖에 없는 ‘영상미디어’가 가진 양가적 성격 또한 굉장히 중요하다. 실재와 허구가 구별 불가하게 뒤섞여 fuse되는 일종의 ‘마술적 상태’는 작가가 즐겨 다루는 현상이다. 초기 영화가 마술적 일루전과 특수효과를 통해 시각적 실험을 했던 것처럼, 이는 작가의 영상 속에서 영상미디어에 대한 메타적 관심, 형식적 실험으로 연결, 확장되어 실천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전략적 오퍼레이션-하이퍼리얼리스틱’이라는 미국 회사의 카탈로그 이미지를 차용하여 만든 영상 설치작업과 TV모니터를 이용하여 만든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 박민하
박민하 인물 (1)

박 민 하 PARK MINHA
1985년 태어났다. 이화여대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캘리포니아예술대학 Art과정 석사학위를 받았다. 2014년 시청각에서 첫 개인전 <텔레캐스트 바그다드>를 열었고 다수의 그룹전과 스크리닝에 참여했다. 2012년 EXIS 서울국제실험영화제 “중운상(신인감독상)”을 수상했다. 코리아나미술관에서 열리는 <Film Montage>(5.7~7.11)에 참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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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는 <우주시민 A씨의 데카드>를 기획했고 카드의 일러스트를 그렸다. 게임을 하는 관객을 지켜보는 것까지 작업에 포함된다. 디자인은 ‘물질과 비물질’이 담당했다.

나의 작업은 주거공동체에 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그 관심은 우연한 계기에 참여했던 재개발사업설명회에서 시작됐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주어진 문제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갑론을박을 펼쳤다. 흥미롭게도 아테네 민회를 방불케 한 그들의 토론 자세는 일상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과연 무엇이 그들의 모습을 다르게 만들었을까. 자신의 이익을 정확히 선택할 수 있는 공동체는 어떤 모습일까 하는 의문을 품고 사고실험을 진행하고자 하였다.
참여자가 하는 행동을 객관식으로 바꿔가다 보니 보드게임의 형태를 취하게 됐다. 게임에는 점수라는 절대 이익이 있다는 부분도 마음에 들었다. 게임을 만드는 데 새로운 완벽한 공동체라는 설정이 필요했다. ‘한국 우주인 배출사업’ 같은 일이 가까운 미래까지 지속한다면 ‘달 정착민 배출사업’ 같은 걸 실행하지 않을까. 그래서 참여자는 달에 적응하여 임무를 수행하고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한 활동을 해야 하는 우주시민으로 설정했다. 참여자는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역할에 맞춰 투표하고 사과 혹은 건물을 생산하거나 탐사를 하여 점수를 받는다. 물론 상황이 늘 이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게임을 진행하면서 발견한 흥미로운 점은 규칙을 설명하고 시작하였지만, 대다수의 참여자는 규칙서를 다시 요구한다는 것이다. 참여자들은 명확한 근거와 기준 없이는 게임을 진행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참여자들이 게임 시작 혹은 중간에도 이따금 집단 독서를 하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이 규칙서를 서로 번역하고 설교하는 과정에서 언어 온도를 맞춰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흡족했다. 난 그저 사람들이 무엇을 선택하기 위하여 집중하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고 싶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게임 안에서만큼은 모두 훌륭한 우주시민이 되길 기대한다. – 김영수

김영수 인물 (16)-1

김 영 수 KIM YEONGSU
1984년 태어났다. 경원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전문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2012년 꿀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5회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정시우, 황아람과 함께 신생 미술공간인 교역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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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석Surface B_2

〈Simulating Surface B〉 HD 비디오 7분40초 2014

강정석415

강정석이 기획한 전시 〈던전〉이 열린 공간 사일삼의 전시광경. 이 전시는 5월 4일부터 6월 10일까지 CC101, 공간 사일삼, 개방회로, 200/20로 공간을 이동하며 계속된다.

현재 영상 미디어 작가이자 작가교류형 비디오 아트 페스티벌 <비디오릴레이 탄산>의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다. 나는 주변 인물과 본인이 속한 사회를 관찰하며, 삶의 불완점함과 불분명함을 담은 홈비디오를 제작한다. 시대의 개인은 각 시점의 다양한 문화와 시스템의 얼개 속에서 “조각”되는데 나는 이러한 지점을 시각예술의 형식으로 기록해 지난 시간과 현재를 관통하는 통로를 제작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재편집해 선보이는 작품 〈Simulating Surface A/B〉, 〈Converted (CMYK) Normal Maps from 2012~2014〉는 독립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설치이다. 세 작품은 공통적으로 막역한 친구 한 명의 삶과 노동을 통해, 오늘날의 미디어 환경을 점검한다. 두 영상과 하나의 책자는, 스크립트가 된 리듬(Simulating Surface A), 리듬이 된 그래픽(Simulating Surface B), 그래픽이 된 스크립트(Converted (CMYK) Normal Maps from 2012~2014)로 요약되며, 팽팽한 긴장감으로 서로 연결된다. 〈Simulating Surface A〉는 2012년, 첫 취업한 친구의 출근길에 매일 아침 인사를 하러 찾아간 7개월간의 영상기록물이다. 영상은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눈에 들어온 것을 찍은 소스와 손을 흔드는 친구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촬영 도중 친구가 해고를 당해, 자연스럽게 촬영이 종료되었다. 이 작품 촬영 직후부터 〈Converted (CMYK) Normal Maps from 2012~2014〉의 스크립트 작업이 시작됐다. 이 작업은 친구의 해고에서 시작한다. 친구의 회사생활, 업계인(3D 배경 그래픽 디자이너)에 대한 인터뷰, 동종 업계인 인터뷰, 마우스의 역사와 정보통신사, 3D 그래픽의 발전 등을 조합한 스크립트를 (3D 매핑 방법 중 하나인) 노멀 맵으로 변형, CMYK로 출력해 책자로 만들었다. 책자 작업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갈 무렵 〈Simulating Surface B〉를 시작했다. 친구의 삶과 노동, 오늘날 미디어 환경을 다룬 합필(합성필수)영상이다. 〈Converted (CMYK) Normal Maps from 2012~2014〉의 스크립트가 빠르게 화면 위로 지나가는 가운데, 팔랑거리는 그래픽 이미지가 된 친구의 삶이 모니터 속을 고속으로 유람한다.- 강정석

강정석 인물 (16)

강 정 석 KANG JUNGSUCK
1984년 태어났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를 졸업했다. 2013년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2014년에는 인사미술공간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이외에도 다수의 단체전과 스크리닝 프로그램,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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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천 바벨 (2)

〈바벨(Lifting Barbell)〉 HD비디오 21분27초 2015

김희천Soulseek- (1)

〈Soulseek-Pegging-Airtwerking〉 HD비디오 2015

〈바벨〉과 〈Soulseek/Pegging/Air-twerking〉이 두 영상 작업은 스크린 속 세계에 대한 작업이다. 나는 건축을 전공하여 스크린 속에 기존 세계를 데이터를 통해 임포트(import)하고 이에 새로운 세계(혹은 다수의 삶)를 만드는 데 익숙한 편이다. 〈바벨〉의 경우, 지난여름, 아버지의 죽음 후 데이터로 저장된 그의 마지막 순간과 이 세계의 끝에 대해 말한다. 스크린처럼 납작해진 세계와 디폴트 3D 인체모델처럼 움직이지만 이미 죽은 사람들, 닿을 수 없지만 금방이라도 ‘세상은 망할 것’이라며 겁을 주는 징조를 통해 이 세상이 이미 제대로 망해볼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애매하게 망한 껍데기는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무력감에 대해 말한다. 반면 〈S/P/A〉는 현재 진행 중인 ‘2015년 아카이브’에 대한 하나의 튜토리얼 영상으로 2013년부터 해온 ‘사진 아카이브 작업’의 연장선에 있다. 튜토리얼 영상을 통해 현실에서 사라지고 싶을 때 사라지고자, 스크린 속세계로 현실세계를 백업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우리 세대의 삶은 mp3와 같고, 세상은 가상을 열화 구현해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가상은 거세된 사람들에게 남은 비효율적인(인간적인) 요소들을 통해 ‘리얼리티’를 추구한다. 3D로 주위의 것들을 모으고 세계를 구성하여, 그 안의 인물이 또 자기 자신의 아카이브를 만들기 시작하는 순환고리를 보여주며, 결국 스크린처럼 되어버린 이 세계에 대해 말한다.- 김희천

김희천인물 (1)

김 희 천 KIM HEECHEON
1989년 태어났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를 졸업했다. ‘2013 미래작가상’을 수상했으며 올해 1월 반지하 B½F에서 첫 프로젝트 <데굴데굴 데모험 lol%20-22.tif>을 열었다. 현재 서울문화재단에서 주최하는 유망예술지원사업 ‘99℃ seogyo 30’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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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5분 37초의 하늘, 가변크기-22.7cm × 15.8cm x 각 156개, 2013

〈155분 37초의 하늘〉 먹지 가변크기(각 22.7×15.8cm) 2013

매일 서울 안을 어슬렁거리며 마주한 풍경은 예측이 힘든 도상과도 같았다. 현실의 풍경은 “예/아니오”로 말할 수가 없었다. “예/아니오”로 말할 수 없는 곳에서 나는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정확한 언어로 묘사가 불가능한 이곳에서, 하나의 좌표를 따라 그린 이동의 궤적은 재현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재현이 아닌 장소와 관계 맺음으로, 후일을 위한 기록보다는 현재를 위한 기록이다. 통용될 수 없는 이 지도는 내가 있었던 시간과 장소를 정확히 서술해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하려는 이 헛된 일은,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을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마주하기 위해서다.- 강동주

강동주 인물 (3)

강 동 주 KANG DONGJOO
1988년 태어났다. 서울과학기술대를 졸업하고 현재 동 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2012년 누하동 256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2013년 OCI미술관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2014년 제5회 두산연강예술상을 수상해 올해 말 두산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 예정이다.

EXHIBITION & THEME 허영만 – 창작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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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만의 <오! 한강>(1988, 왼쪽)과 허영만의 원작 <닭목을 비틀면 새벽은 안온다>를 오마주한 이동기의 <95_크래쉬>(1995, 오른쪽)

모든 것이 만화의 소재다

만화가 허영만의 40년 만화 인생을 조명한 전시 <허영만 – 창작의 비밀>이 4월 29일부터 7월 19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린다. 허영만은 15만 장의 원화와 5,000장이 넘는 드로잉을 그렸으며 <각시탈>, <날아라 슈퍼보드>, <비트>, <타짜>, <식객> 등 그의 작품 대다수가 영화, 애니메이션, 드라마로 제작돼 한국 대중문화의 대표적인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입지를 굳혔다. 이번 전시에서 오마주 작업을 선보인 작가 이동기와의 대담을 통해 만화와 미술의 경계를 떠나 문화의 보편적인 지점을 주목해본다.

이동기(이하 이) 어린 시절 이야기로 대담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여수 출신이시죠.
허영만(이하 허) 어릴 때 매일 바다만 보고 살았죠. 특별히 다른 애들과 다르게 논 기억은 없고, 장난감은 직접 만들었어요. 예를 들어 칼을 만들면 목재소에 가서 나무를 잘라다가 못질해서 칼집까지 제대로 만들었죠. 나무가 워낙 약해서 잘 부러졌지만 만드는 게 재미였죠. 서부영화에서 카우보이들이 들고 다니는 권총모양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도 하고, 팽이치기, 연날리기 등 남들 노는 거 다했어요. 초등학교 때 만화 <코주부삼국지>에 나오는 그림을 트레싱지로 열심히 따라 그렸던 게 생각나네요.
김용환 선생의 작품이죠.
네. 지금은 돌아가셨죠. 중학교 때 한 친구가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가 다시 여수로 왔는데 부산에 있는 동안 만화가에게 그림 수업을 제대로 받고 온 거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만화 그릴 때 먹을 직접 갈아서 그렸어요. 그 친구랑 가까이 지내면서 만화를 많이 그렸죠. 고등학교 때는 대학 가려고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2학년 때 아버지께서 사업을 실패하시는 바람에 대학진학이 어려워졌어요. 그날부터 입시공부는 그만두고 만화만 그렸죠. 미대에 가서 화가가 되려고 했는데 좌절되고 나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만화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1966년 1월 고등학교 졸업하고 그 다음 날 서울로 올라와서 박문윤 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선생의 작품 활동이 뜸해지자 화실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졌죠. 서울 온 지 6개월 되었을 때인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했어요. 그래도 선생이 내 실력을 인정해주셔서 한동안 선생과 하숙을 하며 둘이서 팀으로 일했는데, 하숙비도 제대로 못 버니까 저를 순정만화로 유명한 엄희자 선생에게 보내셨어요. 순정만화는 그리기 싫었는데 꽃도 그리고 여자 눈도 크고 반짝반짝 빛나게 그렸죠. 그렇게 8개월이 지났을 때 이향원 선생께서 자기 밑에서 일하라고 연락을 하셨어요. 그 분의 그림체는 마침 내가 원하는 스타일과 비슷했기 때문에 기꺼이 그쪽으로 옮겼죠. 자고로 좋아하는 그림 그리는 선생 밑으로 가야지 밥 먹여준다고 아무한테나 가면 안 돼요.
저도 어릴 때 이향원 선생의 만화를 많이 봤는데 동물이 등장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내가 그린 것도 많지요. 하루는 선생이 나보고 ‘훨씬 잘 그릴 수 있는데 왜 이것밖에 못 그리느냐. 네 마음대로 그려봐라’고 하더군요. 이후 내가 이향원 선생 작품의 주요 부분을 맡아서 그리게 되었어요. 그 당시에는 월급을 타면 명동에 있는 외국서적 파는 데 가서 일본 만화, 미국 마블 코믹스 등을 사서 열심히 연구했죠.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미국에서 출간된 전쟁 만화 시리즈가 있었는데 정말 뛰어난 작품이었어요.
스타일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미국이나 일본 만화 영향을 많이 받으셨나요?
일본 만화 영향은 많이 받았어요. 미국 만화는 그림 위주라서 일본 만화처럼 세심하게 연출하는 만화가 아니에요. 일본 만화는 이동기 선생도 <아토마우스>를 하셔서 잘 아시겠지만 데즈카 오사무, 지바 데쓰야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당시 국내에서는 지바 데쓰야의 <하리스의 회오리바람>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내가 작업을 하던 하숙집 옆방에 그 작품을 그대로 베껴서 주간지에 싣는 팀이 있었어요.
옛날에는 일본 만화를 그대로 베낀 만화가 많았죠.
네. 그랬어요. 옆방에 있다 보니 서로 왕래가 많았고, 덕분에 일본 만화를 많이 보게 되었죠. 이향원 선생과 작업한지 8년째 되는 해에 독립했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 만화판의 구조가 이상했어요. 1960년대부터 신촌 지역의 만화 출판사 7곳을 통합한 합동문화사가 전국의 대본소와 전속계약을 맺고 타 출판사의 책을 받지 못하게 해 만화시장을 독점했죠. 그에 대한 대항으로 1970년대 초반 한국일보사가 소년한국도서라는 자회사를 설립해 합동문화사의 독점시장에 진출했는데, 결과적으로 서로 연합해 만화시장을 반으로 나눠 독점한 거에요. 겉으로 보기에는 안정적인 시기인 것 같지만, 너무 안정적이다 보니 만화가들이 굳이 공들여 만화를 그릴 필요 없었죠. 대강 그려서 정해진 권수만 채워주면 규정된 부수가 유통되니까요. 그렇다 보니 만화가 재미없는 시절이었어요. 만화시장이 독점되면서 신인들이 등단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죠. 단 하나 유일하게 소년한국도서에서 주최하는 만화공모전이라는 게 있었죠. 저는 1974년 2회 수상자로 선정돼 만화가로 공식 데뷔를 했습니다. 데뷔 3개월 만에 <각시탈>을 발표했는데 그 작품이 큰 반응을 일으켜 인기작가가 되었어요. 하지만 원고료는 전혀 오르질 않아 막막하더라고요. 그런데 <각시탈>의 인기로 당시 <무쇠탈> <색시탈> 등의 아류작들이 많이 나왔어요.(웃음) 한창 <각시탈>을 연재하고 있는데 하루는 도서잡지윤리위원회에서 불러서 갔더니 <각시탈> 때문에 만화시장에 탈 투성이라면서 인제 그만 그리라고 하더라고요. 황당했죠. 하지만 당시에는 위원회의 심의필을 받아야 시중에 유통할 수 있었는데 심의를 내 주지 않으니 <각시탈>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죠. 그때 결혼해서 애가 둘이 있었어요. 당시 주변에 만화 잘 그리는 동료들은 전부 애니메이션 쪽으로 전향했죠.
그때가 우리나라가 일본 애니메이션의 하청작업을 주로 할 때였나요?
인건비가 싸니까 외국에서 일거리를 마구 들여왔죠. 나도 애니메이션 회사를 한 10개월간 다녔어요. 아침에는 내 만화를 그리고 점심 먹고 출근해 애니메이션 원화를 그렸죠. 주중에는 하루를 반으로 쪼개어 일하고 토요일, 일요일은 만화만 그렸어요.
쉬는 날도 없이 일주일 내내 일을 하셨네요.
요즘도 쉬는 날은 없어요. 근데 애니메이션 일을 하면서 제일 고민이었던 것이 내가 보기에는 납득할 수 없는 이상한 그림을 그대로 그려야 하는 거에요. 그보다 잘 그려도 안 되고 못 그려도 안 되고, 여러 사람이 함께 참여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통일된 그림이 나와야 하는 거죠. 어렵게 애니메이션을 병행하고 있는데, 1979년에 일본 만화 <캔디 캔디>가 국내에 불법 복제돼 엄청난 인기를 끌었죠. 만화가 인기가 있다 보니 여러 출판사에서 해적판을 동시에 마구잡이로 출간했어요. 그러다 <캔디 캔디> 한 작품만으로는 수익이 안 나니까 출판사들이 한국 만화가들에게 눈을 돌리게 된 겁니다. 그러면서 인기 있었던 작품을 재판(再版)하고 복간하게 된거죠. 이때부터 새로운 출판사도 생기기 시작했어요.
<캔디 캔디>의 인기를 계기로 정체되었던 한국 만화 출판시장이 순식간에 확장된 거군요.
그렇죠. 나도 더 이상 애니메이션 일을 할 필요가 없었어요. 이후 만화잡지 《어깨동무》 편집장의 요청으로 연재를 시작했는데 반응이 좋았죠. 연재를 하면서 동료 작가인 김영하, 고유성, 김철호 등을 잡지사에 소개했고, 함께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어깨동무》의 부록으로 연재되었던 <태양을 향해 달려라>를 너무 재미있게 봤습니다. 어린이 야구만화인데 세계선수권대회 나가서 우승하는 내용으로 끝이 났죠.
부록이 32페이지의 단행본 형식이었으니까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죠. 지금도 <태양을 향해 달려라>를 얘기하는 사람이 많아요.
저희 또래 사이에서 빅히트 작품이었습니다.
선생님 작품을 보면 다른 작가들과 비교해서 연출의 리듬감에 독특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연출방법에 1~5단계의 강도가 있다면 5단계는 절대 쓰지 말라고 말합니다. 5단계를 한번 써 버리면 그 다음을 이어갈 수가 없어요. 그리고 5단계가 계속되면 그것은 액센트가 아니죠. 예를 들어 어머니가 죽는 장면에서 주인공이 찢어지게 절규하지 않고 ‘어머니가 죽었다’ 한 줄 쓰고 아무 관계없는 배경을 그리고 그냥 덤덤하게 넘어가는 거죠. 주인공은 슬프지만, 독자들은 안 슬프거든요. 슬픔은 강요되지도 않고 강요해서도 안 돼요. 그게 절제이고 자제인 거죠. 그렇지 않으면 독자들의 몫이 없어지죠.
5~6년 전에 소설가 이윤기 선생과 연출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선생은 작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만 하면 되지 독자를 왜 이해시키려고 하는지, 독자의 몫을 왜 남겨두는지 묻더군요. 나는 그 의견에 반대해요. 낚시를 할 때 일정한 간격을 두고 물고기를 꼬여야 합니다. 낚싯바늘 따로 있고 물고기 따로 있으면 낚시가 되나요. 최소한 근접 거리에 가서 당겨야지 독자들이 따라오죠. 난 이 거리를 어느 정도로 두느냐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합니다. 그동안 수많은 연출을 해왔고 사람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방식을 반복하고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그리면서 이전에 그린 느낌이 들면 소름이 끼쳐요. 반복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선생님 작품의 리듬을 따라가 보면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실제로 영화를 많이 보시고 참고 하시는지요.
영화 많이 보죠. 연출할 때 영화를 많이 참고했습니다.

[이미지자료1]각시탈초판1권

<각시탈>(1974) 초판1권 속표지

[이미지자료2] 무당거미

<무당거미>(1980) 원화

새로운 환경에 맞춰 진화하는 허영만
제가 좋아하는 또 다른 작품이 <쇠퉁소> 인데요. 완성도가 굉장히 높은 작품이었어요.
<쇠퉁소>는 사실은 <각시탈>을 못 그리게 해서 나온 작품이었어요. <각시탈>과 도입부도 비슷하고 상황 설정도 비슷합니다. <각시탈>을 몇 년 뒤에 다시 그린 것이나 마찬가지죠.
<쇠퉁소>의 한 에피소드에서 늑대를 묘사한 장면이 너무 뛰어나 감탄하며 본 적이 있습니다. 저도 미술을 했지만 동물 그리기는 굉장히 어렵더라고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서부만화를 보고 그림 연습을 많이 했어요. 총도 많이 그렸지만, 서부만화에는 말이 꼭 등장하죠. 그때 말 그리기 연습을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당시 토니 장이라 불리던 장경국 선생이 말을 굉장히 잘 그렸는데 그분의 그림을 밤새 베껴 그리는 날도 많았죠. 일단 네발 달린 짐승을 그릴 줄 알면 다리 부위만 조절하면 다 그릴 수 있어요.
같이 활동하셨던 다른 만화가들과 지금도 교류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대본소 만화를 할 때는 자주 만났는데 신문, 잡지에 연재하면서 만날 시간이 없어졌어요. 그렇다 보니 지금은 유대가 거의 없어요. 노는 방법이 달라서 그런 것 같아요. 나는 대인관계 폭이 굉장히 넓은 편인데 지금은 등산, 헬스, 골프, 요트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죠. 이들이 언젠가는 꼭 도움을 줘요. 야구만화인 <태양을 향해 달려라>도 그렇게 나왔어요.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만화를 둘러싼 환경이 계속 변해왔는데요. 최근에는 웹툰이 활성화되었고요.
많이 변했죠. 만화 말고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뀐 것은 어마어마한 변화죠.
지금 전시되고 있는 영상을 보면 종이에 펜으로 그리지 않고 태블릿으로 그리시던데.
여전히 펜에 대한 향수가 있어요. 컴퓨터가 대세니까 태블릿으로 그리지만 나는 예쁘게 잘 안 그려지더라고요. 지금은 몇 개의 포털사이트에서 만화시장을 장악해 작가들에게는 사업해서 원고료를 나눠주고 독자에게 무료로 공개하는 구도죠. 그것이 옳은 것인지는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웹툰으로 괄목할 만한 히트작이 나온 게 윤태호의 <미생> 하나뿐이에요. 그래도 저변은 있으니까 윤태호 같은 만화가가 계속 나와줘야 소위 만화 붐이 일어날 수 있어요. 앞으로 그런 작가들이 나올 수 있도록 시장을 만드는 것이 포털사이트, 만화가 등이 해야 할 몫이죠.
요즘에는 만화가 드라마, 영화로도 많이 제작되는데요. 선생님의 작품도 여러 편이 영화화됐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원작자로서 드라마나 영화가 잘되길 바라죠. 영화 <식객>도 제작자가 처음에는 10편까지 하겠다고 했는데 결국 2편으로 끝났어요. 그런 면은 아쉬움이 있죠.
작품 제작에도 긴밀하게 관여하시나요.
관여 안 해요. 딸 시집보내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일단 시집가면 그집 분위기에 맞춰서 살아야지 간섭하는 건 예의가 아니죠.
이번 전시를 보니 여행하시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많더라고요. 작가들이 여행을 하면 작품에 영향을 많이 받던데 선생님은 어떠신지요. 여행하시면서 생각이 바뀐 적도 있었나요.
몇 년 전 출판사에서 만화 <꼴>을 그려보라는 제안을 받았어요. 관상은 미신에 가까운 거라서 명확한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처음에는 거절했죠. 그런데 에베레스트 등반을 하다가 베이스캠프에서 갑자기 그 만화가 생각났어요. 재미있는 소재라면 뭐든지 해야지 미신이냐 아니냐가 무슨 상관있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다음 날 위성전화로 출판사에 바로 전화를 했죠.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곧바로 관상학 전문가인 신기원 선생을 찾아갔어요. 선생에게 “얼마나 공부를 해야 사람 얼굴이 보입니까”하고 물었더니 3년이 걸린다고 하는 거예요. 만화 그리는 데 3년 투자하는 건 무리인 것 같아 뭉그적거리니까 선생이 하시는 말씀이 “공부를 하든 안 하든 3년은 간다”는 거예요. 그 얘기를 듣고 그럼 해야겠다는 생각에 매주 금요일 7시부터 10시까지 3년 반을 공부했죠.
한 작업을 준비하는 데 3년 반을 투자하시다니 대단하시네요.
공부한지 2년됐을 때 연재하기 시작했어요. 데이터는 계속 쌓이니까요. 독자를 좀 더 내 곁에 끌어들이려면 내가 독자에게 뭔가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할 수밖에 없어요.
조금 전에는 연출하는 단계에 관해 얘기하셨는데, 독자와의 소통은 만화나 순수미술 등 장르 구분 없이 보편적으로 중요한 문제인 것 같네요. 그동안 하신 작품 중에서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어떤 것을 꼽는지요.
출세작인 <각시탈>과 만화로 풀어내기 힘들었던 이데올로기 만화 <오! 한강>, 그리고 내가 제일 재미있게 그린 작품은 <망치>예요. 작가 스스로가 재미없으면 독자는 금방 눈치채요. 그리고 제일 열심히 작업한 <타짜>, <식객>. 워낙 작업을 많이 하다 보니 좋아하는 작품이 몇 개 됩니다.
그럼 아쉬움이 남는 작품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들깨 이빨>과 <무당거미>를 제대로 끝맺지 못해 아쉬움이 큽니다.
마지막으로 지금 계획하시는 작품은 어떤 것이 있나요.
지금 《중앙일보》에 <커피 한잔 할까요>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민이 요즘 젊은 사람들이 신문을 안 본다는 겁니다. 10여 년 전 <식객>을 연재할 때와 다르게 인지도가 영 떨어지네요.
30대가 종이신문을 거의 안 보죠.
문제는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다 보면 자기가 선호하는 것만 뽑아서 보니까 다른 분야는 전혀 모르게 되고 말죠. 문화 다양성이 떨어지고 있어요. 일단 연재를 시작했으니 열심히 마무리지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음식 만화를 했으니 앞으로는 돈 얘기를 해보고 싶어요. 돈 번 사람과 재산을 잃은 사람얘기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거죠. 그리고 3년 전부터 만화일기를 쓰고 있는데 계속할 거예요.
훗날 만화일기가 선생님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하고 방대한 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앤디 워홀도 40대 후반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서 병원에 실려가기 직전까지 쓴 일기가 책으로 묶였는데 전화번호부 두께 정도 됩니다. 그 작가를 이해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지요.
만화일기는 고은 선생의 《바람의 사상》이라는 책을 보고 시작했어요. 3년 동안 22권 그렸으니 앞으로 30년 그리면 200권 나오겠네요.

진행 정리・이슬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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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구단>(1985) 설치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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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발표한 허영만 만화를 총망라한 아카이브 설치광경. 이번 전시 총감독을 맡은 작가 한원석은 허영만의 ‘손’에서 영감을 받은 설치작품(왼쪽 아래)으로 전시장 도입부를 구성했다.

허 영 만 Huh Youngman
(본명 : 허형만) 1947년 출생했다. 1974년 소년한국도서 제2회 신인만화공모에서 <집을 찾아서>로 데뷔했다. <각시탈>(1974), <오! 한강>(1988), <날아라슈퍼보드>(1989), <비트>(1994), <타짜>(1999), <식객>(2003), <꼴>(2008) 등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으며, 현재 《중앙일보》에 <커피 한잔 할까요?>를 연재하고 있다.

이 동 기 Lee Dongi
1967년 출생했다. 홍익대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3년 온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일민미술관, 갤러리2, 현대갤러리 등에서 25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1994년 ‘아톰’과 ‘미키마우스’를 결합한 ‘아토마우스’를 처음 발표했으며 이후 대중문화 속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WORLD REPORT | JAPAN Takamatsu Jiro Mysteries / Trajectory of Work

<Shadow> 캔버스에 아크릴 300×1245cm 1977 The National Museum of Art, Osaka ©The Estate of Jiro Takamatsu, Courtesy of Yumiko Chiba Associates

일본 실험미술을 대표하는 다카마쓰 지로(高松次郎, 1936~1998)의 대규모 회고전이 일본에서는 이례적으로 두 군데의 국립미술관에서 열렸다. <다카마쓰 지로: 미스터리즈(Takamatsu Jiro: Mysteries)>(도쿄 국립근대미술관, 2014.12.2~3.1)과 <다카마쓰 지로: 제작의 궤적(Jiro Takamatsu: Trajectory of Work)전>(오사카 국립국제미술관, 4.7~7.5)이 바로 그것. 이 전시의 중심에는 그의 작품과 자료를 정리하고 소장한 치바 유미코의 에스테이트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대중성과 객관적인 시각의 작품세계를 전달한 이 두 전시를 통해 작가는 “스스로 사고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자세를 주문하고 있다.

다카마쓰 지로의 현재

마정연 미술사

도쿄 국립근대미술관(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rt, Tokyo)과 오사카 국립국제미술관(The National Museum of Art, Osaka)이 연이어 다카마쓰 지로(高松次郎, 1936~1998) 회고전을 개최했다. 두 곳의 국립미술관에서 공동 기획과 순회 형식이 아니라 전혀 별개의 기획과 내용으로 한 작가의 회고전을 거의 동시에 개최한 것은 일본 사상 초유의 일이다. 2015년, 다카마쓰 지로가 다시금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1960년대의 초기 작품부터 1990년대 말년의 작품까지 망라해 소개한 미술관 규모의 회고전은, 작가 생전에는 1996년 니가타시 미술관(Niigata City Art Museum)과 작가가 오랫동안 거주한 도쿄도 미타카시 아트갤러리(Mitaka City Gallery of Art)에서 개최된 <다카마쓰 지로의 현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그가 병환으로 세상을 떠난 이후, 국내에서만 수차례의 회고전이 개최되었다. 1999년 국립국제미술관의 그림자 회화와 드로잉전, 1970년대의 입체작품을 조명한 2000년 지바시 미술관(Chiba City Museum of Art)의 전시, 회화 작품을 재검증한 2003년 미타카시 아트갤러리의 전시 등등. 이들 전시가 다카마쓰의 특정 시리즈 작품에 주목한 데 반해 2004년 후츄시 미술관(Fuchu Art Museum)과 기타큐슈시 미술관(Kitakyushu Municipal Museum of Art)이 개최한 <다카마쓰 지로: 사고의 우주전>은 초기부터 후기까지의 작품을 망라하는 성격의 전시였다.
규모에는 차이가 있지만, 2014년 12월 2일부터 2015년 3월 1일까지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에서 개최된 <다카마쓰 지로: 미스터리즈(Takamatsu Jiro: Mysteries)>와 2015년 4월 7일 개막해 7월 5일까지 계속되는 오사카 국립국제 미술관의 <다카마쓰 지로: 제작의 궤적 (Jiro Takamatsu: Trajectory of Work)전>도 다카마쓰 지로의 일생에 걸친a 작업을 소개한 회고전이다. 명백하게 다른 관객층을 설정한 두 미술관의 전시가 공유하는 것은 크레딧이다. Yumiko Chiba Associates의 대표인 갤러리스트 치바 유미코가 운영하는 에스테이트(The Estate of Jiro Takamatsu)가 제공한 작품과 자료를 소재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심은 에스테이트가 발행한《Jiro Takamatsu: All Drawings》(2009)에 게재된 약 4000점의 드로잉이다. ‘에스테이트’는 저작권을 비롯한 다카마쓰의 자료, 작품 일체의 관리를 담당하는 공적인 존재라는 의미이다. 치바는 해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가 재단, 즉 ‘파운데이션’이 아니라 ‘에스테이트’라는 명칭을 사용한 이유로, 작가 개인을 연구하는 단체에 대한 공적 지원 시스템의 부재와 소규모 자금만으로 지극히 개인적 차원에서 조직을 운영해 온 점을 들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자료의 정리가 완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은 ‘아카이브’로서 일반 공개를 할 단계는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 ‘아카이브’라는 개념이 미국이나 유럽만큼 확립돼 있지 않은 일본에서는 자료 제공 서비스가 국공립 기관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1990년 다카마쓰와 처음 만나 함께 아틀리에의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한 치바가, 작가 사후에 그 어떤 공적 자본의 지원 없이 기울여온 25년간의 노력이 두 개의 전시로 열매를 맺은 셈이다.
1952년 일본 최초의 국립미술관으로 설립된 이래 줄곧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은 일본 근현대미술의 중심에 있었다. 개인전은 이번이 최초이지만, 이 미술관은 1960년대부터 다카마쓰의 작품을 소장하고, 각종 전시들을 통해 그의 작품을 소개해왔다. 흥미로운 사실은, 긴 역사를 가지는 국립근대미술관에서 개최되는 이 전시가 다카마쓰 지로를 잘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 혹은 그의 이름만 아는 국내외의 일반 관객을 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린아이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다카마쓰가 병석에서 남긴 드로잉을 표지로 삼은 단행본 크기의 카탈로그와 전시장 곳곳에 게재한 작품 해설이 일반적인 미술관 해설의 화법이 아니라 친근한 대화체라는 점, 모든 문자 정보가 일본어와 영어 2개 국어로 표기되었다는 점, 그리고 잘 알려진 그림자 시리즈를 직접 체험할 수 있게끔 전시장 입구의 긴 통로에 설치된 그림자 실험실 등이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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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arget Never Comes into View> 1964~1970 도쿄 국립근대미술관 전시광경 ©The Estate of Jiro Takamatsu, Courtesy of Yumiko Chiba Associ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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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국립국제미술관 전시 광경 ©The Estate of Jiro Takamatsu, Courtesy of Yumiko Chiba Associates

모티프가 된 점과 소립자
이 전시가 주목을 받은 또 한 가지 이유는 큐레이션 체제에 있다. 마스다 도모히로, 구라야 미카, 호사카 겐지로가 다카마쓰의 작업을 각자의 관심에 따라, 각각 <‘점’ 하나의 미궁사건: 1960~1963>, <표적은 결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1964~1970>, <그것은 ‘회화’가 아니었다:
1970~1998>이란 제목의 파트로 나누어 담당하고, 오타니 쇼고가 전시 전반의 기획 운영을 맡았다. 이 전시가 설정한 대다수의 관객뿐만 아니라, 큐레이터들 또한 동시대 작가로서 다카마쓰의 작품을 접하기보다는 미술사를 통해 알게 된 세대이다. 그들은 그들 세대가 배운 미술사 속의 다카마쓰에 대한 평가, 즉 하이레드센터나 모노하와 관계있는 1960, 70년대의 작업은 높이 평가받지만 그 이후의 회화작업은 그렇지 않은 데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사각형의 전시공간 한가운데에 실제 사이즈의 아틀리에를 재현함으로써, 도넛 모양 구조의 동선을 이룬 본 전시는, 전시장 입구에서 전시장 출구의 작품들이 보이고, 전시장 출구에서 다시 전시장 입구로 돌아갈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초기 작품과 말년 병석에서 스케치북에 그린 작품 안에, 다카마쓰가 세계의 기본 단위로 생각한 점과 소립자의 모티프가 공통적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해 온 작품세계 안에 일관적으로 존재하는 요소와 작가의 평생의 관심을 증명해내기 위해서였다. 필자 역시 원형 구조의 전시장을 몇 차례 돌며 전시를 관람했고, 그때마다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개념적이고 난해하다고 알려진 다카마쓰 지로를 통해 일반 관객에게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를 알기 쉽게 제시하는 데 성공한 전시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한편, 오사카 국립국제미술관은 다카마쓰 지로와 인연이 깊은 미술관이다. 다카마쓰의 전 시대에 걸쳐 주요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977년 개관 당시 제작을 의뢰한 거대한 그림자 작품은 이 미술관을 상징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또한 1980년 구타이(GUTAI)의 일원인 모토나가 사다마사와 더불어 2인의 개인전을 동시에 개최하는 형식으로 다카마쓰가 최초로 미술관 규모 개인전을 연 곳이자, 작가가 세상을 떠난 직후 그림자 시리즈에 초점을 맞춘 전시가 열린 곳이다. 이러한 역사를 가진 미술관에서 현재 개최 중인 전시는 역대 최대 규모의 다카마쓰 지로 회고전이자 미술사의 현재 페이지로 남을 귀중한 연구성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약 5년 전부터 치바와 상의하며 연구를 진행해 온 나카니시 히로유키는 전관의 전시공간을 이용해 450점에 달하는 작품을 소개했다.
평면작업이 주류가 된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전시를 감상하는 데 상상 이상으로 긴 시간이 필요하다. 다카마쓰의 주요 작품들 사이, 여지껏 공백이나 물음표로 존재했던 사고의 과정에 단서를 제공하는 드로잉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통해 전시 작품 하나 하나가 선택되었기에, 관객의 한 걸음 한 걸음에도 적지 않은 무게가 실리기 때문이다. 해설이 일절 배제된 채 작품만으로 구성된 전시 공간과 카탈로그에 실린 나카니시의 금욕적인 에세이 ‘다카마쓰 지로의 전체상: 드로잉과 표지, 삽화 작업과 더불어, 연대 순으로’ 또한 최소한의 문자를 통해 최대한의 객관성을 확보한 정보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전시 그 자체와 닮아있다. 이에 따르면 다카마쓰 지로의 작품세계는 조금의 흔들림 없이 논리적으로 발전해왔다. ‘1960~1963년: 점’, ‘1964~1966년: 그림자’, ‘1967~1968년: 원근법’, ‘1969~1971년: 단체(單體:oneness)’, ‘1972~1973년: 단체로부터 복합체(複合體: compound)로’, ‘1974~1977년: 복합체와 평면상의 공간’, ‘1977~1982년: 평면상의 공간’, ‘공간, 기둥과 공간’, ‘1983~1997년: 형(形)’으로. 이 전시가 연대기적으로 구성된 이유다.

<Form/Origin No.1385> 캔버스에 유채 218×82cm 1996 The National Museum of Art, Osaka ©The Estate of Jiro Takamatsu, Courtesy of Yumiko Chiba Associates

Point No.20_1961-62

<Point No.20> 보드에 래커 40.9×1.6cm 1961~62 Aomori Museum of Art ©The Estate of Jiro Takamatsu, Courtesy of Yumiko Chiba Associates

일본 현대미술을 재검증하다
에스테이트를 중심으로 한 장시간에 걸친 아카이브 구축 작업, 작품과 자료 조사에 기반을 둔 전시회 기획, 작가 집필원고와 작가에 대한 비평의 출판을 통한 문자 정보의 자료화와 번역 작업은, 작가와 작품을 통해 현대미술사를 재검증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최근 미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일본 현대미술의 역사화 작업에 대한 국내 연구의 응답 의미도 갖는다. 치바는 그러한 점에서 다카마쓰 지로가 하나의 사례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일본의 실험미술: 하이레드센터– 직접 행동의 기록》(아카세가와 겐페이 지음, 김미경 옮김, 열화당, 2001) 등을 통해 다카마쓰 지로의 이름을 접한 한국의 독자라면 두 전시 안에서 하이레드센터의 비중이 매우 작다는 사실에 의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2014년 지바시 미술관에서의 대규모 회고전을 이틀 앞두고 아카세가와 겐페이가 세상을 떠난 시기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구라야와 나카니시가 공통적으로 제시한 이유의 한 가지는, 2013년 나고야시 미술관에서 자료를 중심으로 한 하이레드센터의 대규모 전시가 이미 개최되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는 다카마쓰 지로라는 작가는 그 자체로서 제시될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 4월 22일 TBS 방송의 프로그램 <뉴스의 시점>은 이번 두 전시에 대해 보도하며 과거에 방송된 15분 분량의 다큐멘터리(1974년 5월 4일자)를 재방영했다. 영상 속에서 다카마쓰는 작품 제작 과정을 직접 보여주며 자신의 작품관과 세계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만, 저 자신도 잘 모르겠습니다.(…) 예술이란 무엇인지를 표현하는 행위라는(…) 그런 ‘표현’과는 조금 다른 것을 하려 한 생각이 듭니다.” 천천히, 낮은 목소리로 다카마쓰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의 상식에 기반을 두고 인간 관계, 인간과 사물의 관계가 일원적으로 고정되어버린 데 대한 답답함이라고 할까, 그 일원적인 관계성에서 해방된, 더 넓고, 다각적이고, 깊이 있는 관계(…) 백지 상태로 돌아가, 무구의 지점에서 시작된 관계를 갖고 싶습니다.”
사후 17년을 맞이하는 작가 회고전이 오늘날의 젊은 세대에게 주는 의미는 다카마쓰 지로가 이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구라야는 수평일 때에는 앉기 위한 기능밖에 갖지 못하는 의자가, 벽돌 하나로 인해 기울어지면 인간과 관계없는 물체가 되어버리는 <복합체(의자와 벽돌)>(1972) 작품을 예로 들며, 대지진 이후의 사회 불안과 정치적인 보수화, 올림픽 개최에 대한 흥분과 기대 등, 1930년대의 정황과 매우 유사한 현 일본 사회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가 다카마쓰 지로라는 작가에게서 기존의 개념과 사고방식을 의심하고, 철저히 스스로의 사고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태도를 배우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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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바 유미코와 작업하는 다카마쓰 지로 ©The Estate of Jiro Takamatsu, Courtesy of Yumiko Chiba Associates

CRITIC 서용선 도시 그리기: 유토피즘과 그 현실 사이

금호미술관, 학고재갤러리 4.17~5.17

윤진섭 미술비평

얼마 전 한국의 민화를 집대성한 《한국의 채색화-궁중회화와 민화의 세계》가 10여 년간의 기획 끝에 출판되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약 30여 명에 달하는 민화전문가가 이 책의 출판에 관계되었다고 한다. 참으로 장한 일이다. “책 제목을 ‘민화’ 대신 ‘채색화’라고 붙인 것은 민화를 전통채색화로 바꿔 불러야 한다는 연구자들의 문제의식이 반영”된 결과라고 한 텔레비전 방송은 전하고 있다.
지금 나의 관심은 민화를 채색화로 불러야 하는 당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화가 집대성된 결과에 있다. 아마도 명칭에 관한 논의는 다양한 학술행사를 통해 지속될 성질의 것이리라. 그보다는 오히려 민화가 이번 출판을 계기로 미술계의 전면에 부상된 사실 그 자체에 있으며, 이를 계기로 민화, 그 중에서도 특히 핵심인 ‘오방색(五方色)’에 대한 논의가 차제에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면 한다. 왜냐하면 한국 전통미술의 정수 가운데 하나인 민화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계승되고 있엄음에도 불구하고 미술계에서 이에 대한 조명은 상당히 미흡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출판을 계기로 이에 대한 관심이 전시기획과 출판을 통해 지속되길 기대한다.
최근 금호미술관과 학고재갤러리 두 곳에서 열린 <서용선의 도시 그리기 :유토피즘과 그 현실 사이전>은 비상하게 나의 관심을 끌었다. 이 전시가 나의 관심을 끈 가장 큰 이유는 서용선이야말로 티 나게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민화의 핵심인 오방색을 주조로 작업해온 작가이기 때문이다. 서용선 하면 국립현대미술관 주최의 <올해의 작가전>(2009)과 <이중섭미술상 수상작가전>(2014)을 굳이 내세우지 않더라도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대형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이는 40여 년에 걸친 그의 작가적 이력이 ‘역사화’라고 하는, 단종을 비롯한 역사적 인물에 초점을 맞춘 특유의 그림들로 점철돼 왔으며, 그러한 그의 작품세계는 시간이 흐를수록 세계의 여러 도시로 확대되어 ‘인간’을 통한 인류애의 보편적 지평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나의 관측에 근거를 두고 있다. 금호미술관과 학고재갤러리 두 곳에서 열린 이번 기획전은 서용선의 작가적 역량이 회화와 조각을 통해 총 결집된 근래에 보기 드문 전시였다.
서용선이 그림과 조각을 통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문제이다. 이 ‘인간’이 그의 그림과 조각을 통해 역사와 도시를 후경으로 삼아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거기에는 ‘오방색’이 주조음으로 깔려있다. 그에게 오방색은 마치 조선시대 민화의 주조색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내면을 표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본질’에 가깝다. 이는 그가 오랜 기간에 걸쳐 조선의 역사를 수놓은 단종을 비롯한 왕족이라든지 사대부층, 기타 이 땅에서 살다 스러져간 숱한 민초들의 삶과 애환에 대해 집요한 관심을 기울여온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러한 그의 관심은 이제 보다 확대되어 인간들이 발을 디디고 있는 세계의 여러 도시로 그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이번 전시는 중간 결산 성격의 것으로 서용선의 인간에 대한 관심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서용선은 서울을 비롯하여 베이징, 뉴욕, 베를린, 멜버른 등 세계의 거대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소재로 그림을 그린다. 앞서 언급한 외국의 도시들은 그가 장기 체류한 곳들이다. 그 그림들은 그가 단순히 스쳐지나간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그곳에 머무르면서 시민들의 삶의 단면을 관찰한 후 이를 객관적인 시선을 통해 내면화한 것이다. 서용선의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의 표정에서 진한 삶의 애환을 느낄 수 있는 까닭은 그가 인간에게 기울이는 도저한 관심 때문이다. 이 점은 그가 숱하게 제작한 기존의 역사화에서 이미 드러난 바 있거니와, 그가 한 사람의 작가로서 살아가는 존재의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여러 인간의 유형 중에서도 유독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깊은 애정과 관심을 기울여왔는데, 기득권층이 아니라 소외된 자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오방색을 주조로 표출되고 있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이번 전시에도 가령 <미테 다리 연주자들>(2012~2015)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도시에서 살아가는 무명의 민초들을 소재로 한 작품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들은 지하철이나 버스, 광장, 술집, 그리고 뉴스에 등장하는 평범한 시민들이다. 서용선은 인물화 못지않게 많은 양의 풍경화를 그렸는데 그것들은 주로 도시 풍경과 관련된다. 그러니까 도시란 그에게 있어서 다양한 인간들에 의해서 다채로운 사건들이 벌어지는 배경인 셈이고 그것은 그런 이유에서 인간과 불가분의 소재를 이룬다. 서용선은 그러한 도시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에 대해 특유의 시선과 관점에서 예리한 메스를 들이댄다. 그는 도시와 인간의 관계를 그것들의 후경 층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정치적 내지는 제도적 맥락에서 파악하고 이를 다소 음울한 어조로 화면에 풀어낸다. 그는 강렬하고 때로는 생경하게 느껴질 정도의 강한 빨간색과 청색을 비롯한 오방색을 써서 기층민의 정서를 광포(狂暴)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이 지닌 야생성은 주로 정치적 내지는 제도적 억압에 대한 기층민의 분노와 무기력(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양팔을 늘어뜨리고 있다)이라는 상반된 감정의 등가물이다. 서용선은 이번 전시에서 이러한 기층민의 야생성이 비단 한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정서임을 특유의 강렬한 오방색을 통해 입증하고 있다.

서용선_금호 (5)

 <2014 뉴스와 사건> 나무 보드에 아크릴(14조각) 2015  위 <NY지하철>(왼쪽) 캔버스에 아크릴 2015

CRITIC 데니스 오펜하임

우손갤러리 4.9~6.13

이미애 수성아트피아 전시기획팀 팀장

‘인간에 대한 본질 탐구’를 중심으로 작업세계를 펼쳐온 세계적인 조각가 데니스 오펜하임 (1938~2011)의 전시가 대구 우손갤러리에서 열렸다. 오펜하임은 회화가 지향할 최고의 가치를 평평한 캔버스 표면에 이루어질 수 있는 순수한 아름다움이라고 여기던 시기에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개념의 전달을 작업의 축으로 삼아 여러 가지 매체와 형식들을 사용했는데,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만나 시간의 흐름과 함께 만들어낸 문명과 지성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돼 왔는지에 대한 설명을 예술이라는 형식을 빌려 구현했고 이를 통해 예술 너머 인간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했다.
자신의 아이디어나 감정을 투영해 대리자 역할을 하는 꼭두각시나 오브제 작품을 제작했던 오펜하임은, 아이디어가 미술로 표현되는 과정을 기계의 작동 과정으로 나타내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서도 꼭두각시 인형에 기계 전동기를 설치해 움직이게 함으로써 감각적인 인간과 감각이 없는 사물의 관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작품을 보여주었다. <Theme for a Major Hit>(1974)는 기계의 빛과 소리, 움직임 등의 비물질적 요소를 작품세계에 내포시켜 조각의 개념적 영역을 확장하고자 한 작품이며, 오펜하임이 기계의 원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작업은 사고의 흐름을 기계의 작동 과정에 비유함으로써 심리적인 요소를 기계적인 것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는 미술의 제작과정과 산업생산의 공정을 동일시한 러시아 구축주의 미술의 이념과도 유사하다. 과학기술 (technology)의 요소를 미술에 도입함으로써 미술의 표현 가능성을 넓히고자 한 미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오펜하임은 기계라는 요소를 미술에 접목시켜 개념을 발현하기 위한 매개체로 활용했다.
또한 1990년대까지 이어진, 인간의 의식구조를 기계구조에 빗대어 반복적인 움직임과 작동원리의 공통 속성을 시각적으로 풀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꼭두각시 인형이 춤을 추는 동안 같은 전시 공간 내에 한 남성의 목소리가 반복해서 울려 퍼진다. “그것은 당신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영상 속에는 사람의 입모양만이 강조되고 전시 공간 내에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바로 오펜하임 생전의 것이다.
이와 같은 기계적 구조물은 오펜하임의 사고를 형상화하여 관람자들이 볼 수 있도록 해주는 또 다른 형태의 ‘대리자’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보여준 <Splash Building> 연작 조형물은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요소를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도록 해 주는 매체일 뿐만 아니라, 관람자의 반응을 일으키고 참여시키는 장치이기도 했다.
오펜하임은 여러 가지 매체나 형식을 동시에 혼용하기보다는 시기별로 특정한 표현 방식에 집중하면서 작품 유형이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는 그가 단순히 다양한 매체와 형식의 사용을 목적으로 했다기보다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가장 적절하게 나타내는 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했음을 입증한다.
오펜하임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표현하기 위해 형식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미술을 삶에 연결시키고 관람자의 참여를 이끌어냄으로써 미술을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 위치시켜 미술의 본질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작가가 아닌가 생각된다.

데니스 오펜하임 <Splash Building>(설치작) 혼합재료 2009

CRITIC Magnum’s First

한미사진미술관 4.4~8.15

송수정 독립큐레이터

누군가의 재난과 상처를 찍은 사진을 전시장 벽에 거는 일은 윤리적으로 온당한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매그넘 전시에는 이런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물론 매그넘 사진가라고 해서 모두 분쟁지역만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1947년 설립한 이후 대표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가 혹은 포토저널리스 집단이라는 유명세에 걸맞게, 그들 스스로도 전 세계 가장 뜨거운 인간애의 현장을 기록해왔다고 자부해 온 것에 대한 자충수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 질문은 전쟁과 가난을 벽에 걸면서 ‘작품’이라 호명하고, 그 작품을 거래함으로써 ‘상품’으로 만드는 일의 불편함, 즉 사진과 미술 시장의 충돌 지점을 예민하게 건드린다. 그러나 더 많은 대중에게 시대상을 알리겠다는 명분하에 매그넘은 《라이프》나 《파리마치》 표지를 장식하던 영광을 순회전의 긴 방문객 줄에 넘겨주었다. 게다가 이런 추세를 반영하듯 새롭게 영입하는 사진가들의 성향 또한 정통 다큐멘터리보다는 마치 신세대 마틴 파를 발굴하려는 듯 개성 넘치는 쪽으로 가고 있다. 인쇄매체의 시대는 저물고 전시와 인터넷이 뜨는 시대의 운명을 매그넘조차 거스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그넘 5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순회전 이후 매그넘의 전시는 사진들만큼이나 더 스펙터클해졌고, 고유명사가 되다시피 한 카르티에 브레송이나 스티브 매커리 등은 이제 전시에 있어 흥행 보증수표처럼 통하기도 한다.
그런 매그넘이 무려 60년 전 기획한 첫 번째 전시를 본다는 것은 단순히 매그넘 초창기 사진가의 빈티지 프린트를 만날 수 있다는 것 이상의 궁금증을 유발한다. 특히 이번 사진전의 흥밋거리는 그 당시 전시 방식을 짐작할 수 있게 고스란히 복원했다는 점이다. 당시 이 전시는 작가마다 커다란 합판에 색을 칠하고 사진을 부친 뒤, 그 합판째로 벽에 거는 방식이었다. 유리를 끼우거나 액자에 넣지 않은 이 형식은 내러티브를 강조하는 잡지의 레이아웃 구성에 더 가까웠다. 1955년부터 1956년까지 오스트리아 5개 도시를 순회하고 난 후 이 전시판들은 부피를 줄이기 위해 사진 한 점마다 거칠게 절단되었다. 그런 작품들이 통째로 감쪽같이 사라졌다가 2006년 오스트리아의 프랑스문화원 지하창고에서 나타났다는 신비감 넘치는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에디션 개념이 제대로 자리 잡지 않은 당시의 느슨한 사진문화를 반증한다.
공교롭게도 매그넘이 첫 전시를 기획한 1955년은 사진 역사에서 <인간가족전>의 해이다. 전후 인류애 복원을 목표로 뉴욕현대미술관의 사진부장 에드워드 스타이컨이 기획한 이 전시는 그해 1월 26일 모마를 시작으로 전 세계 800만 명의 관람객을 동원했다. 매그넘 사진가 상당수는 <인간가족전>의 참여 작가로서 이 전시의 기획 의도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에, 매그넘이 최초의 전시를 기획할 때 이 방식을 상당 부분 차용한 지점도 눈에 띈다. 특히 ‘시대의 얼굴’이라는 전시 제목과 함께 전쟁 사진을 배제하고 역사적 인물부터 각국의 풍경까지 다양한 시대상에 초점을 맞춘 대목은 이 관련성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총 83점이 소개된 이 전시의 무게 중심은 상당 부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특종이라 할 마하트마 간디의 암살 직전 모습과 장례식에 맞춰져 있다. 당시 카르티에 브레송은 단식을 마치는 간디를 인터뷰 하러 방문했다 예상치 못한 장례식까지 기록하게 되었는데, 1948년 《라이프》가 특집 기사로 장례식 장면만을 소개했던 것과 달리 전시에서는 간디의 생전 모습까지를 포함시켜 작업의 밀도감을 높였다. 반면 전시 1년 전인 1954년 전쟁터에서 지뢰를 밟아 사망한 로버트 카파의 경우에는 전쟁 사진이 아닌 스페인과 프랑스 국경 지대 바스크 마을의 축제를 소개함으로써 그의 작품세계를 확장시킨다. 한편으로 같은 해 안데스 산맥에서 촬영 중 자동차 전복 사고로 세상을 떠난 베르너 비숍은 유작이 된 안데스의 피리 부는 소년까지를 포함시킴으로써 그의 회고전의 성격을 강조한다.
이렇듯 치밀한 전시 구성에서 돋보이는 또 다른 작품은 에른스트 하스가 이집트에서 찍은 영화 촬영 장면이다. 하워드 혹스 감독이 1955년에 개봉한 미국 시대극의 고전 <피라미드>는 실제 크키의 세트장에서 만 명 가까운 엑스트라를 동원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에른스트 하스는 이 상황을 특유의 조형감으로 접근하고 있다. 사진은 마치 실제 파라오의 시대를 만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데 전시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 작품들은 오늘날 우리가 빈번히 문제 삼는 가짜와 진짜 세계의 혼돈, 사진의 눈속임이라는 대목까지를 짐작게 한다. 매그넘 최초의 전시는 최근 매그넘이 보여준 전시보다 형식적으로는 덜 세련됐지만 사진과 사진전이 직면하게 될 방향성을 예고한다는 점에서 훨씬 전위적이다.

위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린 <Magnum’s First> 전시광경

CRITIC 남화연 시간의 기술

아르코미술관 4.10~6.28

임산 동덕여대 교수

이 전시는 예술가의 시간 다루기의 범주와 가능성을 사유하게 한다. 예술가는 단순히 시간을 이해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시간적 구성과 그것의 여러 경계면 안팎의 작용들을 검증한다. 종국에는 자아 혹은 세계의 존재 양상을 의식적으로 성찰한다. 따라서 전시 제목에서 ‘기술’을 가리키는 영어단어 ‘mechanics’는 통일적인 구체태로서의 시간의 위상을 지시하면서도 시간이라는 지평의 유동성을 함의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주지하듯이 순수한 존재의 차원이라 할 수 있는 ‘시간’은 물질세계에서 감각으로 파악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그것을 형식화하는 방법이 대체로 소리라는 질료에 의존하다보니 오랜 세월 동안 시각예술가들에게는 도전의 대상이 되었다. 이 전시에서 남화연의 작품들에 사용된 다양한 매체들은 삶의 시간적 체험을 전한다. 허나 그것은 개인의 영역에 있지 않고 사회적 의미와 공간으로 확장한다. 이미 지나가버린, 잊어버린, 되짚고 싶은 그 덧없음의 체험에 사물과 사건의 사실들을 관여시켜 객관적 실체성을 부여한다. 물질세계에서의 시간 체험은 그렇게 사회적 형식으로 재맥락화되어 수행적 미학으로 변모한다. 이 과정은 무관계한 사물과 사건에서 의미의 구성을 추론해내게 한다. 특히 이번 전시의 수행적 행위는 목소리로, 몸으로, 시선으로, 혹은 사물 자체로서 실재를 포착함과 동시에, 행위가 구현되는 시간적 매체의 내용에서 동원된 상징화 과정과 의미론적 장치들을 관객의 움직임 공간과도 연결함으로써 예술가 주체의 경험적 수행과 객체의 상상적 수행을 하나의 총체적 상황으로 고양시키려 했다. 그런 점에서 큐레토리얼 의도가 돋보이는 전시다.
이러한 통일적인 시간 조직의 전략은 예술가의 수행적 행위를 통해 관객의 의식적・역사적 현존을 일깨운다. <코레앙109>에서는 ‘직지심체요절’이라는 과거 사물에 대한 직접 경험의 시간을 저지하는, 즉 그 사물 대신 통용되는 가상의 물적 기호들이 등장한다. 역사적 세계의 미시적 사실들이 제시됨에도 불구하고, 현재 시제에 가까울수록 우리의 의식은 특정 공간에 수집되어 존재하고 있을 직지의 시각적 형상에 집약된다. 이렇게 물질성과의 시간에 집착하는 문화적 기억은 정치적 형식으로 재활용될 여지가 크다. 이는 그것의 최종 안착지인 도서관이나 아카이브 같은 근대적 지식권력 양태가 증명한다. 남화연의 영상은 수집물의 존재 과정에서 생산된 기억 시간의 파편들이 수집물을 더욱 신화화할 수 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그럴수록 시간은 권력의 구애를 받아들이며 의식과 역사의 진보를 주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유령 난초>와 <동방박사의 경배>에서도 확인된다. 지식권력의 한 작동방식으로서의 수집 관습과 권위는 파편적 기억 시간의 신뢰성을 극대화하고 시각화한다. 그러다보니 총체적 서사를 알지 못한 채 수집된 일부 형상에 기반하는 이른바 ‘환상의 공동체’는 과거 타자의 시간 체험을 조형적이고 비유적 형태로 변환하여 수용하는 데 익숙하다. 남화연이 예시했듯이 조토의 종교적 명망을 담은 이미지가 상징적으로 과학세계에서 전유되고, 19세기 난초사냥꾼이 작성한 유럽인의 식민주의적 목록 또한 마치 현대 사회에서 어떤 합의된 ‘제의’처럼 지속되고 있지 않는가. 지속되고 있다 함은 (전시장의 영상과 소리가 서로에게 연루되듯이) ‘시간의 기술’의 심층에 깔린 난제를 꿰뚫어볼 통찰이 더욱, 계속 필요함을 뜻한다. 그럼으로써 예술가의 구체적 수행의 자유는 작품으로 귀환할 수 있을 것이다.

위 남화연 <코레앙 109>(맨 왼쪽) 비디오 11분10초 2014

CRITIC 윤정원 최고의 사치

갤러리 스케이프 4.24~6.14

김노암 세종문화회관 시각예술전문위원

반짝이는 샹들리에는 낮게 매달려 있다. 굉장히 많은 물건, 인형, 이미지가 마구 엉켜있다. 복잡하게 집적돼 있는 사물, 이미지가 전시장을 채운다. 오브제는 곧 폭발할 것처럼 사물로 뭉쳐있다. 화려하고 가벼운 플라스틱 제품과 온갖 컬러가 가득하다. 물건으로 가득 채운 집처럼 갤러리는 무언가로 가득 채워진다. 점점 더 많이, 점점 더 모이면 그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된다. 그러나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없게 된다. 그냥 시각적 유사성에 의해 ‘이것은 키치다’라고 상투적인 해석과 범주로 가두는 것은 생산적인 담론이 아니다. 관객은 최정화의 작업과 비교해서 보면 사전적 의미의 ‘키치’를 넘어서는 지점을 찾을 수도 있다.
언어의 경계를 넘어서는 회화와 오브제들로 연출되는 시각이미지들은 마치 두 작가가 함께 전시하는 듯하다. 다중인격과 다원성의 세계에서 두 인격이 결합하고 융합하는 것만큼이나 하나의 인격이 두 개로 갈라지고 또 하나의 취향이 두 개의 취향으로 갈라질 수도 있다. 회화와 오브제의 두 개별적인 운동과 흐름이 갤러리 1층과 2층을 나란히 달리고 있다.
제목 ‘라 스트라바간자(La Stravaganza)’는 사치스러운, 호화스러운, 화려한의 의미를 지닌 이탈리아 어로 바로크나 로코코의 화려한 궁정과 귀족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한글 제목 ‘최고의 사치’는 마치 ‘왕후의 밥, 걸인의 찬’ 같은 윤리적인 인상을 준다. 욕망 충족에 몰입하는 지독한 자본주의와 시장가치의 사회에서 그래도 사람들에게 전통적인 휴머니즘을 떠올리게 하는 어떤 따듯한 세계가 있다는 느낌 같은 것 말이다.
세계와 사물과 관계하는 인간의 욕망이 어떤 형태로든, 또 어떤 방향으로든 충분히 성취되었을 때 인간은 행복감을 느낀다. 전시는 작가가 오랫동안 매우 깊이 몰입해왔으며 그것이 매우 특별한 행복감을 주고 있음을 짐작게 한다. 작가와 관객의 의식상에는 시각적 감각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과 마음의 운동이 호사를 누린다는 듯 보인다. 언제든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상황과 욕구가 충족될 수도 있다는 관념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담론이다.
‘최고의 사치(La Stravaganza)’는 생각의 운동을 부자로 향하게 한다. 사치는 부자의 특권이니까. 물론 평범한 중산층도 차상위계층도 빈곤층도 모두 사치할 수 있다. 제품과 사건과 감정이 과잉인 사회에서는 누구나 결심만 하면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사치’는 대부분은 나쁜 것으로 학습되었다. 인류의 생산력이 미천할 때는 당연했다. 그러나 근대 산업사회로 들어서 인류의 생존에 필요한 산물을 이미 까마득히 돌파한 경이적인 생산력 사회에서 ‘사치’는 미덕으로 둔갑한다. 그런데 사치가 정치경제의 세계에서 심미적 세계로 넘어오면 매우 상대적인 개념이 되어버린다. 상대적이며 동시에 절대적인 심미적 세계에서 억만장자가 벌이는 사치스러운 소비와 길거리 노숙자나 거지가 제대로 된 한 끼의 식사를 즐기는 것이 별반 다르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사치가 가능하다는 것과 실제 사치를 부리는 것은 다르다. 부자는 언제나 그것을 실현할 수 있으나 노숙자와 거지는 항상 그럴 수 없다. 운이 좋아야 한다.

위 윤정원 <최고의 사치>(가운데 설치작) 혼합재료 2014~2015

CRITIC 안경수 가는 길

밀리미터 밀리그람_이태원 5.11~31

함성언 갤러리 버튼 대표

풍경을 그리는 작가가 쏟아져 나오는 중에도 안경수는 여전히 풍경을 그린다. 딱히 어느 시점부터라 말하기 어렵지만 (아마도 미술시장의 침체 때문이 아닐까 예측은 해보지만) 정확한 이유나 영향 관계를 찾을 수 없는 풍경 그림이 전시장마다 한 번씩은 걸린다. 대체로 ‘심상의 풍경’ 같은 말로 엮을 수 있는 이 풍경 그림들의 공통점은 같은 풍경이라도 누가 어떤 상태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읽히기 때문에 그것은 온전히 한 사람을 위한 풍경이 된다는 설명이 덧붙는다는 것이다. 생의 한 시점을 관조하는 자세가 젊은 작가들에게서 종종 발견된다면 그들이 그만큼 여물었거나, 아니면 반대로 급하게 무엇인가를 흉내 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안경수는 여전히 풍경을 그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여전한 안경수’가 지금 한국 회화 작가군에서 어떤 포지션을 점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알려진 바와 같이 동양화를 전공한 안경수는 아크릴을 이용한 회화작업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는데, 대체로 얇게 발라 올린 것처럼 보이는 그의 작업은 의외의 깊이를 갖고 있다. 특히 밤의 먼 풍경을 그린 작업들에서 자주 발견되는 안경수의 깊이는 작업의 진행 방식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밑작업부터 차곡차곡 색을 올려 전체적인 톤을 만들고 다시 먼 곳부터 가까운 곳으로 오며 눈에 걸리는 모든 구조물과 자연물을 그려 올리는 작업 방식은 비단 안경수만의 것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동양화의 작업 방식이나 철학에 익숙한 그는 얇은 화면에 풍경의 깊이를 충실하게 재현한다. 사진을 찍어 풍경을 재현하는 회화의 작업 방식 역시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그는 다양한 시간대에 여러 각도로 피사체를 찍고, 각각의 톤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평면예술인 회화에 시간성을 덧입히기도 한다. 특히 저녁 어스름이나 한밤중, 먼 곳에서 빛나는 도시의 불빛을 여러 색을 겹쳐 올려 표현한 <Glow the factory>나 <Bright night 1, 2>와 같은 작업들은 앞서 말한 안경수 작업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안경수를 단순히 동양화의 심도가 구현되거나 시간성을 더한 회화작업을 하는 작가로 평하는 것으로는 다른 풍경화 작가들과의 차별점이 구체화되지 않는다. 안경수의 작업을 이해하고 읽어내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풍경을 대하는 태도를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가 한 장소 사진을 여러 장 찍고, 가까이 보이는 풍경을 주로 그리는 까닭은 그것이 단순한 관조의 대상이거나 개인의 심정을 투영하기 위한 도구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작업에서 자연 풍경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유 역시 이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에게 풍경은 먼 데서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 만져볼 수 있어야 하며 인간의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여야 한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SNS 계정에는 종종 그의 작업실 주변과 버스 안에서 바라본 풍경 사진들이 게시되는데, 이 중 몇몇이 작업 대상이 되곤 한다. 그가 들어가 볼 수 있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또한 풍경들은 질감이 강조되거나 실제처럼 재현되는 경우가 있는데 굳이 질감이 느껴지도록 재현하는 이유 역시 그것이 사람의 흔적이기 때문이고, 그것이야말로 안경수가 오랜 풍경작업을 통해 그려내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조하고, 자의적으로 해석된 풍경 작업을 ‘심상의 풍경’으로 부를 수 있다면 안경수의 작업은 ‘촉각적 풍경(tangible landscape)’으로 구분하여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한국 현대회화의 흐름에서 자리 잡은 지점은 이것으로 확고해진다.

위 안경수 <Glow of factory>(맨 왼쪽) 캔버스에 아크릴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