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망원경과 현미경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이었어요. 초저녁에 즐겨듣는 에프엠 라디오에서 아주 인상적인 얘기를 들었지요. 물론 방송작가가 써준 대본이었겠지만, 그날따라 디제이의 오프닝 멘트가 귀에 쏙쏙 들어오더군요. 특유의 느끼하고 낮은 음성으로 느릿하게 말하는 남자 디제이가 하는 말은 대충 이랬어요. “계절은, 그러니까 봄은 꼭 직선으로만 오지 않는다. 성큼성큼 앞으로 쭉~ 올 것만 같더니만 오른쪽으로도 비틀거리고 왼쪽으로도 비틀 거린다. 두 발자국 다가오다 이내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주춤 거린다”면서 어쩌구저쩌구 하더니만 “자연이 창조한 거의 모든 선은 곡선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만든 인공물의 선은 대부분 직선이다”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저는 특히 나중 얘기에 공감했습니다. 자연이 만든 곡선, 사람이 만든 직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두 개의 점 사이를 가장 짧은 길이로 잇는 선이 바로 직선이죠. 군더더기 없이 효율적이면서 합리적이고 반듯한. 그럼에도 저는 직선보다 곡선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직선은 이성적이고 곡선은 감성적이니까요. 조금은 늦고 멀리 돌아가더라도 왠지 직선보다는 구불구불한 곡선에 마음이 끌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굳이 예를 들자면 이런 거죠. 무모한 삽질과 콘크리트로 무지막지하게 정리한 ‘4대강’ 둔치 공원보다 모래톱과 수초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섬진강변이, 거리와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태백산맥을 관통한 터널이 있는 미시령 고속도로 보다는 한계령 꼬부랑길이, 수많은 터널과 방음벽에 가로막힌 KTX 레일보다는 차창 밖 풍경을 보며 달릴 수 있는 국도가 좋다는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아닌 게 아니라 고루하다는 소리를 종종 듣습니다. 그 말을 적극 부인하지는 않을 랍니다.
아무튼 편집장으로서 이와 같은 태도를 ‘망원경과 현미경’에 빗대어 부연 설명해 드리고 싶군요. 어쩔 때에는 고개를 들어 망원경으로 광활하고 먼 밤하늘을 보고, 어쩔 때에는 가깝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미립자의 세계를 고개 숙여 현미경으로 탐구할 때도 있다고 말입니다.
이번 ‘민화’ 관련 특집기사도 이런 맥락에서 준비했습니다. 지난 3월호 특집 ‘이슬람 문화’가 망원경으로 보기였다면 ‘민화’는 현미경으로 보기쯤 되지 않을까요? 국립현대미술관 신임관장이나 일부 젊은세대 미술가들이 제기하는 권익문제, 또는 미술시장 활성화나 광복70주년처럼 타이밍을 놓치기 전에 다뤄야할 이슈가 눈앞에 산적해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끔씩은 뒤도 돌아보며 일부러 멀찌감치 돌아서 조금은 천천히 가고자 합니다. 심사숙고하겠단 말입니다.
미술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눈으로 본다고 작품의 속마음까지 알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미술이 인간의 시각에 호소하는 예술임이 분명함에도 그것을 한눈에 알아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봐도 그렇고 가까이에서 들여다봐도 제대로 알지 못하기는 사람이나 미술이나 비슷합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그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뭔지 모를 그 정답에 가까워지고자 할 뿐이죠. 그러니 조바심 내고 서두를 필요도 없습니다. 설렁설렁 느긋해도 좋고, 때로는 아주 집요하고 철저해도 좋습니다. 예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월간미술》이 미술이라는 정답을 찾아가는 여정에 친절한 안내서 혹은 좋은 지도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P.S. 특히 이번호는 특집을 비롯해 앞쪽 ‘강수미의 공론장’부터 작가와 전시 꼭지를 거쳐 뒤쪽 ‘강성원의 인문학미술觀’까지 읽을 만한 글이 많답니다. 좋은 봄날, 따뜻한 햇살아래서 부디 정독 해주시길….^^
편집장 이준희  dam2@unitel.co.k

[bold_title]contributors[/bold_title]

윤범모윤범모 가천대 교수
이번 특집의 불씨를 지핀 주인공이다. ‘민화’가 가진 한국적 아름다움이야말로 우리 미술이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힘이라고 확고히 믿고 이를 위한 발판을 다지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 〈경주민화포럼2015〉에서 그가 주창한 ‘길상화’란 용어는 많은 민화인의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그는 늦은 밤까지 진행된 토론 말미에도 “더더욱 길상화를 강조한다”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 말대로 나이와 무관하게 그는 “진취적이고 도발적인 젊은 평론가”다.

[separator][/separator]

김영애Sni Factory 대표
김 대표가 보내준 한 권의 책이 이번 호 특집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 책의 제작 과정에 대해 예상보다 긴 원고를 보내주었는데 지면이 한정돼 안타깝게도 일부만을 게재하게 되었다. 출판사 대표이기 이전에 동국대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한 문학박사로서 《한국의 채색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열정이 느껴졌다. 현재 숙명여대 국제교류학부 객원 교수이자 문화콘텐츠 기업 Sni Factory 대표로 한국문화 및 한국학 관련 문화콘텐츠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COLUMN 강수미의 공론장 3

새로운 관계미학, 미술정치학의 문제

마를렌 뒤마는 2012년 네덜란드 정부가 수여하는 요하네스 페르메르 상(Johannes Vermeer Award)을 받았다. 당시 작가의 수상 소감이 특히 화제가 됐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이고 암스테르담을 기반으로 활동해온 이 작가는 인종 갈등, 약자와 불평등, 반테러리즘 등 무거운 사회적 의제를 감각적인 필체로 그려내 평단으로부터 자신만의 회화예술을 인정받았다. 동시에 현대미술 시장의 가장 확실한 블루칩으로 꼽힌다. 그런 그녀가 상을 받는 자리에서 그즈음 긴축 재정에 들어간 네덜란드 문화예술계에 대한 후원, 이민법 개혁, 미술시장에 대한 창작과 비평의 생산적 견제를 호소했다. 나아가 상금으로 받은 10만 유로를 자신이 강의하던 아트 인스티튜트 드 아틀리에(De Ateliers)에 쾌척하며 스스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였다.1 뒤마의 이 같은 언행에 언론과 미술계의 박수는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가 더 가치를 부여할 지점은 그 말과 행동을 통해 미술이 사회와 관계 맺는 접점, 의사소통하는 질(質)적 순간이 부각됐다는 점이다. 나아가 많은 이가 새삼 미술을 사회적으로 존중할 분야로서 인정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미술이 현실사회와 대중을 향해 구사할 수 있는 세련된 정치학이란 이런 것일 것이다.
한국 미술계에는 그 같은 멋진 담화가 있는가, 저처럼 존경할 만한 작가의 대의적 행위를 통해 미술의 사회적 존재와 역할이 조명된 순간이 언제인가, 생각해본다. 분명 어딘가에서 빈번히 일어났겠지만 과문한 내게 퍼뜩 떠오르는 일화는 드물다. 하지만 한 화가의 그림이 아시아 미술품 경매에서 예상치를 뛰어넘은 높은 가격에 낙찰됐다는 소식, 한 사진작가가 큰 상금이 부상으로 주어지는 상을 받았다는 소식, 한 설치미술가의 전시와 한 사회비판적 작업을 하는 작가의 영상작품이 다양한 사회적/공적 후원을 받아 이뤄질 수 있었다는 소식은 줄줄이 기억난다. 지난 10여 년을 되짚어봐도 많은 사례를 들 수 있고, 최근 사례로도 꽤나 많다. 2007년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경색됐던 한국미술시장이 바야흐로 ‘호황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오늘의 뉴스에 인용된 젊은 작가의 작품 낙찰가는 기본이 수천만 원이다. ‘단색화’라는 이름 아래 제2의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는 원로들의 추상화는 사상 최고가에도 구하기 어려워 국내든 국외든 아트 딜러들이 애태운다는 뉴스가 ‘한국 미술계에 부는 한류’라는 수사학에 실려 떠돈다. 그 와중에 젊은 자신부터 앞길이 막막한 후배들을 위해 아주 작은 기여라도 하겠다고 나서는 ‘잘나가는 영 아티스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제 한 몸 서 있기도 만만찮은 현실이니). 한국미술계의 기성/원로세대로서 다음 미술세대를 위해 국가 예술정책에 고언을 던지거나, 사회에서 미술이 존중받을 만한 일을 도모하는 미술계 웃어른들의 행보도 별로 접할 수 없다(자칫 잘못 나섰다가 젊은이들로부터 핀잔이나 듣고, 안하무인 싸움에 말릴 수도 있으며, 그전에 무엇보다 내 삶의 절박함에 쫓긴다면). 대신 국공립미술관의 ‘젊은 작가전’에서, 사립미술관의 ‘동시대 회화 주제전’에서 뒤마의 그림과 스타일이나 분위기 면에서 거의 동일한, 한국의 20~30대 여성 작가들 그림은 심심찮게 마주친다. 또 대신에 명분과 역량은 어쨌든, 힘 있는 자리나 배타적 이익을 챙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 미술인들(세대나 분야에 상관없이)의 이기적인 행보를 직간접적으로 보고 듣고 겪게 된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미술을 하는 이유는 자유롭고자 함이고, 미술계의 근원 동력 또한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며 창조적인 사고와 행위에 있다. 그런 만큼 지금 여기 어느 미술인이, 어떤 동기와 목적 아래 활동을 하고,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에 대해 타인이 왈가왈부할 수 없다. 게다가 이 영역의 특성상 절대적으로 옳은 기준이나, 객관적으로 명석하게 판명한 가치판단, 보편적으로 동의할 도덕과 윤리라는 것도 설정하기 어렵다. 그러니 개인적 차원에서든 한국 사회 내 ‘미술계’라는 집단으로서든 무엇을 원하고, 말하고, 행하고, 외부에 내보이고, 스스로를 정립할 것인지는 결정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 모른다. 극단적인 예로, 어떤 작가가 작품을 팔아 큰 부를 축적했는데 더 악착같이 사적 이해득실에 몰두한다 해서 누구도 나무랄 수 없다. 한국미술 전체의 현재와 미래를 고려할 때 정말 올바르고 능력 있으며 그릇이 큰 인사가 필요한 자리에 악성 루머가 무성하고 일부에서는 패권 다툼이 일어난다 한들, 그래서 대외적으로 한국미술계의 질적 수준과 구성원의 가치가 의심받는다 한들 막을 도리도 명시적 근거도 없다.
그러나 우리, 이를테면 심리적으로 ‘미술계’라는 동일한 준거집단에 있고, 정도 차(差)는 있을망정 물리적으로 그 집단과 결부된 행위를 통해 살아가는 우리에게 우리를 둘러싼 사회 전체, 또는 현실의 여러 집단 및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할 것인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 관계란 특정 작품이나 전시, 미술 이론이나 비평이 사람들의 감각과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데서부터 미술계가 외부로부터 듣는 인정과 평판에 이르기까지 추상적이면서도 단순하다. 또 미술계의 관대함, 세련됨, 진보성, 혁신, 보편성 등에 기초해 한국의 문화행정과 예술경영 전략이 발전하는 데까지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무엇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 우리의 미술계 활동과 처신, 미술인으로서 밖으로 드러내는 사고와 행위, 그리고 그 결과물은 사적 관심에 국한되지 않는 공공성과 정치학적 의식이 수반돼야 한다. 명문화된 공공성이 아니며, 직업 정치인의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2014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을 받은 장민승은 수상 소감으로 ‘세월호 참사’를 언급하며 우리의 집합적 기억회로에 비극적 온기를 불어넣었는데, 바로 그런 행위 속에 공공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말들이 회자되는 데 미술의 정치학적 차원이 열렸어야 했다(어느 언론도, 어느 SNS 사용자도 정작 그 말을 전달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사회의 미술에 대한 관심 범위, 소통의 정치학적 경로가 이렇게 편벽하다). 본심이라든지 마음 깊숙한 곳의 진정성에 기댄 공공성이 아니어도 좋다. 거짓의 공공성도 무방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잴 수 없고 나누기도 힘든 공공성보다 미술의 구조적 특성과 지각경험 가능성에 기초한 공공성이 정치학적으로 필요하다는 뜻이다. 정연두는 얼마 전 한 대기업이 주재한 소규모 세미나에서 자신의 최근 프로젝트 작품이 시각장애인을 사회적 약자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신체적 조건에 근거해 세계에 대한 독특한 이미지를 산출하는 존재임을 깨닫게(작가부터 그 장애인과의 관계를 통해 귀한 깨달음을 얻었던) 하는 장치라고 역설했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작가의 경험담에 흥미를 느꼈고, 부쩍 한국현대미술에 대한 후원 폭을 넓혀가고 있는 그 대기업의 관계자들 또한 그의 말과 작품에서 새삼 현대미술의 다양한 역할과 가치를 봤을 것이다. 그 맥락에서는 사회 참여적 미술의 진실을 의심하거나, 프로젝트에 관여한 장애인의 행위와 사고가 결국 작가의 것이 되는 모순을 지적하는 언변이 적절하지도 의미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바로 그런 작품과 함께, 또 작가의 실행력과 사후 의견에 공감하며, 사람들은 사회에서 피상적으로 작동하는 정치적 올바름을 넘어서 한 명의 미적 주체로서 누군가(장애인/비장애인이 아닌 바로 그/녀)의 세상 경험과 감수성을 수용해 나갈 것이다. 나는 이런 식의 순환, 이와 같은 새로운 관계와 의미의 작용이 미술이 구사할 수 있는 독특한 정치학이라 생각한다.
최근 4~5년 사이 한국 작가들과 이론가들이 부쩍 많이 참조한 니콜라 부리요의 관계의 미학(Relational Aesthetics)에서 관계는 인간들의 상호작용 및 예술과 현실의 사회적 맥락(context)을 뜻한다. 이는 19세기 말 이후 서구 아방가르드 예술이론에 비춰볼 때 혁신적인 논변이 아니다. 하지만 부리요는 1990년대 길릭, 티라바니자, 곤잘레스 토레스 같은 작가들이 전시를 “순간적인 공동체성이 만들어지는 특권적 장소”로 개방했다고 비평하고, 거기에 “현대예술의 아우라는 자유로운 연합”2이라는 미학적-정치학적 논설을 부가함으로써 당대 미술의 매력을 증강시킬 수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훨씬 더 나아가야 한다. 즉 한정된 작가, 특정 경향과 매너의 작품을 비평적으로, 전시 공학적으로 옹호하고 부각시켜 미술 내부를 다양화하는 관계미학에서 멈추지 않고, 여기 미술계 구성원의 의식이 현실 사회와의 정치학적 관계 속에서 새로 마름질되고 구축되는 장(場)을 열어야 한다. 장 뤽 고다르와 장 피에르 고랭이 1968년 ‘지가 베르토프 그룹(Groupe Dziga Vertov)’을 창설하면서 슬로건으로 삼은 말을 갖다 쓰자면, ‘문제는 정치적 미술[영화]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미술[영화]을 정치적으로 만드는 것이다.’3
강수미 동덕여대 교수

1 요하네스 페르메르 상 홈페이지 www.johannesvermeerprijs.nl
2 니꼴라 부리요, 현지연 역, 《관계의 미학》, 미진사, 2011, p.28. p.109.
3 Colin McCabe, 《Godard: Image, Sound, Politics》, Macmillan, 1980, p.19. 꺽쇠 안이 원문이다.

(위)장민승 <검은 나무여> 싱글 채널 흑백영상, 멀티 채널 사운드 약 25분 2014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만든 이 작품은 최소한의 단어 구성으로 감정을 절제한 시구를 수화로 번역해 팽목항에서 녹음된 사운드와 함께 하나의 추상적인 손짓으로 관람자에게 전달한다.

Column 시각예술 전문지의 디지털화, 그 명과 암

예술, 특히 시각예술을 다루는 잡지를 전자책으로 기획한다는 건 멋진 일이다. (만약 종이책과 별도의 편집이 가능하다면) 고해상도의 이미지나 영상 자료를 분량 걱정 없이 집어넣을 수도 있고 클릭 한 번을 통해 인터넷으로 바로 기사에 사용된 레퍼런스에 접근함으로써 종이책의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다. 잡지 콘텐츠의 주인공이 여전히 텍스트라고는 해도 거기에 전자책의 멀티미디어적 성향이 커다란 도움이 될 거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소 고리타분한 발상이기는 해도, 예술이 감각적-비언어적 지각을 통해 감상자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면, 그 예술 작품을 다루는 기사 또는 해설의 ‘언어’와는 별개로 독자로 하여금 해당 작품을 보다 깊이 감각할 수 있도록 하는 쪽이 작품에 접근하는 데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향에 다다르기에는 갈 길이 멀다. 인터넷 시대에 들어 하이퍼텍스트와 멀티미디어라는 가능성 자체는 언제나 열려 있었지만 이를 기획하고 편집할 수 있는 역량은 종이책에 얽힌 감수성과는 큰 차이가 있다. 아직 활성화하지 못한 전자책 잡지에 앞서 이와 유사한 시도를 진행 중인 웹진의 경우가 그렇다. 특히 국내에서 웹진은 종이 잡지로 타산을 맞추지 못한 잡지들이 비용 절감을 위해 후퇴한 장소인 경우가 많았다. 웹진으로 변신한 잡지들은 기존의 종이 시절 포맷을 고수했다. 비용을 줄이면서 뒤로 물러서는 과정에서 플랫폼의 특징을 살필 만한 여유가 없어서다. 이런 과정을 거친 웹진은 대부분 몰락한다. 독자 수가 줄고 수익성이 악화돼 웹진으로 변신을 꾀한 뒤에는 그 줄어든 독자들을 대상으로 웹상에서 장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판매 권수가 광고 수익과 직결되는 종이책과는 달리 대부분의 웹사이트 광고는 해당 배너를 클릭하거나 노출되는 빈도를 통해 유동적인 비용을 지불한다. 즉, 콘텐츠를 보러 온 독자들이 곧 수익과 직결되지 않는다. 따라서 비용 절감을 위해 플랫폼을 웹으로 옮긴 잡지 대부분이 얼마 가지 못해 문을 닫은 건 당연한 수순이다. 비용은 줄었지만 수익 역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달라진 플랫폼에 맞추어 잡지의 정체성을 바꿈으로써 새로운 독자층을 끌어들일 여력이 없었던 ‘후퇴형 웹진’들의 마지막은 한결같았다.
전자책의 경우에는 이보다 더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종이 잡지보다는 웹 형식의 기사에 익숙한 젊은 세대가 국내 전자책 플랫폼 소비자층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20세기가 종언을 고할 무렵 한국에서는 수많은 예술 리뷰 잡지가 함께 수명을 다했다. 영화 월간지들이 사실상 전멸했고, 음악 리뷰 잡지 역시 대부분 아예 사라지거나 웹진이 되거나 무가지로 후퇴하는 등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나마 몇몇 잡지가 포맷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버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분야는 미술이나 사진 정도다. 비교적 높은 연령대의 보수적인 아마추어들이 존재하는 분야를 다루는 잡지들이 그나마 상황이 좋았던 셈이다. 1970년대 이후 교양-문화-잡지라는 시스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세대가 아직 독자층으로 유지되고 있어서다. 반면에 키노나 서브처럼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종이 잡지 문화는 20세기를 기점으로 저물었고, 그 자리를 웹 텍스트가 대신했다. ‘키노 이후의 젊은이들’은 전자책 플랫폼으로 진입할 개연성이 가장 높은 세대지만 동시에 종이 문화 잡지에 대한 경험을 거의 해본 적이 없는 세대이기도 하다. 그나마 동시대의 예술에 대해 관심이 있는 젊은 독자들은 전통적인 콘텐츠를 가진 잡지보다는 좀 더 현장의 목소리에 가까운 독립출판 계열의 여러 개성적인 잡지로 분산되어 퍼져나가는 중이다. 이들에게 잡지는 동인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와 달리 보다 보편적인 독자층을 상정한 문화 잡지들이 디지털 플랫폼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 어필할 가능성은 낮으며(‘우리꺼’가 없다), 반면에 충성도가 높은 중년 이상의 독자층은 디지털 플랫폼을 별도로 학습해야 한다는 난점이 있다. 현 시점에서 전자책 형식의 문화 잡지가 당장의 돌파구를 찾기 어려운 이유다.
시간이 갈수록 전자책 독자층이 두터워지기는 할 것이다. 현재 국내 전자책 시장의 낮은 성장률은 전자책 자체의 가능성에 문제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열악한 디바이스 때문이다. 이 부실함은 언젠가 개선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매스미디어가 디지털 플랫폼으로 옮겨온 것처럼 단행본이나 잡지 시장도 자연스럽게 넘어올 것이다. 다만 관건은 처음에 언급한 대로 바뀐 플랫폼에 얼마만큼 적응하고 그를 이용할 수 있느냐다. 단지 대세가 이동한다는 이유로 옮겨가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자신의 육체가 담긴 장소를 고찰하지 않는 ‘디지털 문화 잡지’에 눈길을 주는 젊은 예술 애호가는 많지 않다. 표현 방식에 따라 콘텐츠의 성질이 바뀌는 아름다운 순간들을 보여주는 잡지라면 그 자신의 폼/표현 방식부터 신뢰를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신뢰에 다다르는 순간에야 ‘예술 잡지’는 디지털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꽃필 수 있을 것이다.
최원호  인터넷서적 알라딘 MD

 

 

HOT PEOPLE 표미선 재단법인 서울예술재단 이사장

작가에게는 창작의 동기부여를, 후원자에게는 자부심을

6년을 짊어진 한국화랑협회 회장직을 내려놓았다. 그간의 부담과 고단함을 달랠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표미선 표갤러리 대표는 바로 ‘(재)서울예술재단’을 설립하고 곧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간다. “문화예술 창작자와 수요자(후원자)들의 구체화된 커뮤니케이션 공간으로 새로운 문화/예술시장의 플랫폼을 형성한다”는 것을 재단 설립의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는 표 이사장을 성곡미술관 바로 옆 ‘서울예술재단 PLUS’에서 만났다.
“제가 화랑을 34년간 운영했습니다. 그간의 성과와 미술계 현황을 돌아보니 글로벌한 시대에 전시 이외 뭔가 다른 미술 움직임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표 이사장이 구상하는 예술재단 운영의 프로세스는 다음과 같다. 서울예술재단의 첫 번째 행사인 ‘포트폴리오 박람회’를 통해 신진작가군을 선발한 뒤, 그들을 후원할 후원자들을 온·오프라인을 통해 모집한다. 이들은 월 일정금액을 후원금 명목으로 내게 된다. 이 후원금을 바탕으로 서울예술재단 소속 작가의 작품을 후원자가 원할 경우 작품을 대여한다는 것이다. 작가에게는 후원금의 50%를 창작활동비용으로 지급하고 나머지 50%는 작품 훼손에 대비하는 보험료와 기타 창고 운영이나, 재단 운영비 등으로 사용하게 된다. 물론 후원자가 구매를 원할 경우 재단은 작가와 후원자를 매개하는 플랫폼 역할도 하게 된다. 이러한 프로세스는 단지 의욕이나 소명의식만 앞서서 되는 것이 아니다. 재단 운영의 법률적 뒷받침과 작품 훼손에 대비한 보험 가입 등이 담보되어야 한다.
“우선 매월 소액(1만 원)을 후원할 수 있는 후원자를 모집할 겁니다. 현재 1만 명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만, 궁극적으로 많은 국민이 참여하게 할 겁니다. 그들에게 “당신이 패트런이예요, 당신이 메디치예요”라는 의식을 심어줘 예술 후원자로서 자부심을 갖게 하고 싶어요. 그런데 운영 계획에 있어서 봉착한 큰 문제는 바로 작품의 관리를 보장할 수 있는 보험 문제였어요. 바로 이점을 해결한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표 이사장은 재단 설립을 준비하면서 이상하리만큼 주변의 도움과 성원이 답지했다고 전했다. 국내 유수 법률회사는 공익 부서를 통해 재단 정관을 작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보험회사는 작품 대여의 발목을 잡았던 보험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제시했다고. 물론 표 이사장 사재도 만만치 않게 들어갔다. 10억 원의 재단 출연금은 그간 개인 컬렉션으로 소장했던 작품을 시장에 내놓아 마련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이제 4월 7일 재단 운영의 공식돌입과 함께 ‘포트폴리오 박람회’를 열 예정이다. 심사위원단의 포트폴리오 리뷰를 거쳐 평면과 입체 분야 각 1명을 최우수상 수상자로 선정해 각각 1000만 원을 수여하고, 우수상 총 20명을 선정해 국내외 전시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작품 공모에 참여할 ‘新진작가’는 포트폴리오를 출품할 수 있다. “처음부터 그 수를 다 채울 수는 없겠지만 해마다 행사를 열어 500명 작가 참여를 목표로 하고 있어요. 후원자는 물론 기업화랑, 화랑, 미술관 등도 그들의 작품을 보고 빌려갈 수 있습니다.” 표 이사장은 특히 ‘커뮤니케이션’을 강조했다. 그 중심점은 ‘서울예술재단 PLUS’가 될 것이다. 표 이사장은 “여기에서 후원자는 작가의 작품과 자료를 열람하고 작가는 후원자를 직접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또한 “이러한 소통은 신진기획자, 비평가에게도 열려있다”고 문호를 대대적으로 열 것임을 천명했다.
화랑협회 운영에서 쌓은 노하우가 재단 운영에도 분명 녹아들 것이다. “화랑 대표로서 할 수 없었던 일을 재단을 운영하면서 맘껏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표 이사장의 이 말에는 제대로 해내겠다는 의욕이 가득 차 있었다. 표 이사장의 이 실험이 어떻게 진행될지, 새로운 대안을 마련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황석권 수석기자

표 미 선 Pyo Misun
1949년 태어났다. 영남대 응용미술과를 졸업했다. 1981년 표갤러리를 개관하고 현재까지 대표직을 맡고 있다. 한국화랑협회 재무이사(1989), 국제담당이사(1991), 부회장(2003), 한국미술품 감정위원회 위원(2006~2008), 그리고 한국화랑협회 회장(2009~2015) 등을 역임했다. 또한 베이징(2005)과 L.A.(2008)에 표갤러리 분관을 열었다. 현재 강남문화재단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IMG_6150

서울예술재단 사무소로 쓰일 ‘서울예술재단 PLUS’ 전경. 사무공간 외에 작가와 후원자를 매개하고 작품을 직접 만나는 전시 공간으로도 사용될 예정이다

 

HOT PEOPLE 김달진 김달진미술연구소 소장

 

걸어다니는 미술자료 전문가 홍지동에 정착하다

 

김달진미술연구소와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이 홍지동에 새 둥지를 틀었다. 개인주택을 사들여 개조해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단독 건물을 마련했다.
새 공간을 열기까지 많은 도움이 있었다. 특히 광장건축환경연구소 김원 소장의 재능기부는 큰 힘이 되었다. 정부 지원이 끊겨 작년 말부터 속앓이하던 문제를 해결한 셈이다. 김달진 관장은 “이제 이 공간을 어떻게 독립적으로 운영할지 걱정이다”면서도 안도와 기쁨의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박물관 관장이자 미술연구의 소장인 그가 미술자료를 처음 수집한 것은 무려 4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학생 시절 각종 잡지와 화집에서 서양명화 이미지를 손수 오려 스크랩북을 제작하며 수집 역사가 시작됐다. 197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 60년전>은 김 소장이 우리 근대미술로 눈을 돌리는 계기였다. 미술 수집벽은 그가 아카이브 전문가로서 자리매김하는 기틀이 되었다. 박물관 지하에는 김 소장의 수집인생을 엿볼 수 있는 자료와 고 이경성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 기증한 자료가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이처럼 지하 전시장은 현재의 공간을 세우기까지 김 관장의 수집인생을 보여주는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신사옥 이전 첫 전시는 주요 소장품 250여 점을 모은 〈아카이브 스토리 김달진과 미술자료〉(3.12~5.31)다. 연구소는 작년 국립현대미술관 자료실에 2만 권의 단행본을 포함, 미술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 그러나 단독 자료와 많은 희귀자료는 김달진미술박물관과 연구소에 소장돼 있다. 이번 전시는 근현대 희귀 도서, 전시 팸플릿과, 사진, 아카이브 자료와 박물관 컬렉션의 대표작만을 모아 보여준다. 전시와 별개로 한국미술정보센터는 예약제로 열람을 원하는 대중에게 공개할 예정이다. 김 소장의 수집벽은 현재진행형이다. 직접 구입하기도 하고 많은 이들로부터 자료를 기증받아 자료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임승현 기자

IMG_6171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및 김달진미술연구소 연혁

2001년 종로구 평창동에 김달진미술연구소 개소
2002년 월간 서울아트가이드 창간
미술정보포털 www.daljin.com 오픈
2007년 연구소 종로구 통의동 91-26 이전, 미술자료실 개관
2008년 연구소 종로구 통의동 129-2 이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서울시 2종 전문박물관 등록(제81호)
박물관 개관전 〈미술 정기간행물 1921~2008〉(10.22~2009.1.31)
2009년 박물관·연구소 창성동으로 이전
제1회 아트북페스티벌 개최(9.18~20)
2010년 마포구 창전동 이전, 한국미술정보센터 개관
2013년 〈한국 미술단체 자료집 1945~1999〉발간 (문화체육관광부 지원)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에 미술자료 2만여 권 기증
2015년 박물관·연구소 홍지동 사옥 개관

HOT PEOPLE 〈베니스비엔날레〉본전시에 참여하는 미디어 아티스트 3인방

김아영 <PH Express>
남화연

남화연 < Field Recording >

9

임흥순 < 비념 >

올해 56회를 맞는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한국 작가 3명이 참여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 권영빈)은 보도자료를 통해 “김아영, 남화연, 임흥순 작가가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의 본전시(총감독 오쿠이 엔위저)에 초청됐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그동안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는 서도호(2001), 김소라, 김홍석, 장영혜, 주재환(2003), 구정아, 양혜규(2009)가 참가했다”며, “6년 만에 한국작가가 본전시에 참여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번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는 ‘모든 세계의 미래(All the World’s Futures)’를 주제로 53개국 136명의 작가가 참여할 예정이다.
김아영(위)은 1979년생으로 국민대 시각디자인과와 런던 칼리지 오브 커뮤니케이션 사진학과, 첼시 칼리지 오브 아트 앤 디자인 파인아트학과(석사)를 졸업했다. 비디오, 사운드, 이미지, 텍스트와 내러티브 구조를 이용한 작업을 하고 있으며, 독일 베를린 퀸스틀러하우스 베타니엔, 영국 런던 로열 아카데미 오브 아트, 리움미술관 등에서 열린 전시에 참여했다. 2010년 브리티시 인스티튜션 어워드, 플래시 포워드-Emerging Photographers, 2008년 중앙미술대전 우수상 등을 수상했다. 이번 본전시에서는 김희라 작곡가와 함께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 쉘 3(가제)>라는 설치·퍼포먼스 작업을 선보일 예정이다.
남화연(가운데)은 1979년생으로 코넬대와 한예종 전문사를 졸업했다. <Move: on the spot>(국립현대미술관, 2012), <드로잉을 위한 공간들>(하이트컬렉션, 2013) 등의 전시에 참여했고, 2009년에는 에르메스 미술상 후보에 올랐다. 이번 본전시에서는 17세기 네덜란드 황금 시대의 튤립포마니아(Tulipomania)를 바탕으로 제작한 <욕망의 식물학(The Botany of Desire)> 영상 작업을 선보일 예정이며 오는 4월 10일부터 아르코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임흥순은 1969년생으로 가천대(舊 경원대)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광주비엔날레>(2002), <부산비엔날레>(2004), <미래는 지금이다-Future is now>(국립로마현대미술관, 2014), <역병의 해 일지>(아르코미술관, 2014) 등의 전시에 출품했다. 시네마디지털서울영화제 버터플라이상(2012), 성곡미술관 내일의 작가상(2014), 인천다큐멘터리리포트 ‘베스트트러프컷상’(2014)을 수상했다. 캄보디아, 미얀마, 베트남 등에서 촬영한 <위로공단>이라는 영상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한편 이번 <베니스비엔날레>는 5월 9일부터 11월 22일까지 진행되며 한국관 전시작가는 문경원 전준호(커미셔너 이숙경)가 선정된 바 있다.
황석권 수석기자

SIGHT & ISSUE Art|Basel Hong Kong|March|15-17|2015

〈아트바젤 홍콩〉의 변화와 한국미술의 붐

아시아 아트페어 시장은 <아트바젤홍콩(Art Basel Hong Kong)>과 각국의 토종 아트페어로 크게 나뉜다. 45년 역사의 <스위스 아트바젤>을 기반으로 한 <아트바젤 홍콩>은 6월에 열리는 스위스 바젤의 285개 화랑, 12월에 열리는 미국 마이애미의 267개 화랑과 강한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는 아트페어계의 실력자다. 한국의 <KIAF>, 싱가포르의 <Art Stage Singapore>, 대만의 <Art Taipei>, 중국의 <Art Beijing>, 일본의 <Art Fair Tokyo>, 인도의 <Art India> 등 아시아 각국을 대표하는 국제 아트페어와 격차는 크지만 경쟁상대다.
233개 화랑이 참가한 <아트바젤 홍콩 2015>는 마케팅과 홍보는 기본이고 스폰서팀과 VIP 및 고객 담당팀을 별도로 운영하는 경영 중심의 아트페어이다. 메인 전시인 <갤러리(Galleries)>, 큐레이팅 프로젝트 형식인 <인사이트(Insights)>, 신진 아티스트의 쇼케이스인 <디스커버리(Discoveries)>로 나누어 참가 화랑을 경쟁시키는 식으로 심사를 강화한다. 2015년의 참가 화랑수는 233개로 2014년 245개보다 12개 줄었다.
2014년 가을 아시아 디렉터를 교체한 이후 2015년 페어는 VIP 프리뷰를 금요일과 토요일 첫 이틀에 집중시켜 VIP 위주의 판매 전략을 폈고, 일반고객 공개기간은 하루 줄인 일요일부터 3일간 진행하는 것으로 바꿨다. VIP 오픈 첫날부터 판매경쟁이 치열했다. 화이트 큐브는 2시간 만에 2억3400만 홍콩달러(340억 원)에 달하는 매출을 올렸고, 뉴욕의 굿맨갤러리, 가고시안갤러리 등도 1~2시간 만에 수십억 원어치를 팔았다. 대만의 티나 켕 갤러리는 자오우키의 <1980년> 3부작을 국제 컬렉터에게 미화 3000만 달러(337억 원)에 판매했다.
<아트바젤>은 전략적으로 기관 관계자를 대거 초청한다. 개인과 기업의 개별 수요 외에 공적 수요자인 미술관과 기관의 대표, 이사, 큐레이터, 재단 및 후원자들을 초청해 작품을 구입하게 한다. 2014년 스위스 바젤에 70개 기관의 관계자들이 초청되었고, 미국 마이애미에는 160개, 그리고 이번 홍콩페어에도 삼성 리움미술관을 비롯한 26개 기관의 관계자를 초청했다.
한국 갤러리는 총 9개가 참가했다. 국제갤러리/티나킴갤러리, PKM갤러리, 아라리오갤러리, 학고재갤러리, 원앤제이갤러리, 갤러리 스케이프가 메인 전시 격인 <갤러리>에 참가했고, <인사이트>에 리안갤러리, 갤러리 인, 갤러리 EM이 참가했다. 갤러리 특별전인 <인카운터> 코너에서도 국제갤러리의 이우환, 아라리오갤러리의 탈루 L.N, 리안갤러리의 DZINE, 원앤제이갤러리의 김태윤의 전시가 열렸다. 국제갤러리의 이우환 박서보 하종현 이불, PKM갤러리의 윤형근 코디최, 학고재갤러리의 정상화 이우환 백남준 등 출품한 한국 대표작가와 단색화 작가의 작품이 좋은 판매실적을 올렸고, 아라리오갤러리의 강형구 회화작품과 리안갤러리의 김승주 조각작품은 높은 인기도 만큼 세일이 잘 되었다.
메인 아트페어 옆 위성 아트페어인 <아트 센트럴>은 한국의 갤러리 현대와 카이스갤러리가 참여해 현대의 단색화와 카이스갤러리의 전속작가 작품의 판매실적이 좋았다. 경매회사 소더비의 한국 단색화와 일본 구타이로 꾸민 <아시아 아방가르드전>은 프라이빗 세일로 빅히트를 기록했으며, 크리스티의 소규모 경매도 활발했다. 한국의 K옥션은 홍콩에서의 첫 단독경매를 실시해 56점 출품에 50점 낙찰로 89.3%의 높은 낙찰률을 보였고, 71억 원에 달하는 판매고를 올렸다. 단색화 21점이 모두 추정가를 뛰어넘으며 낙찰경쟁이 치열했다. 김환기의 추상화 작품이 수수료 포함 8억3302만 원에 팔렸고, 이우환과 쿠사마 야요이 등의 작품도 낙찰되었다.
홍콩 미술시장은 서비스 산업과 금융산업을 바탕으로 성장한 자본력, 영국적 관습과 문화의 영향, 백만장자와 억만장자들의 미술품 소비와 투자, 매일 열리는 쇼와 컨벤션에 참가하는 이동인구, 홍콩정부의 낮은 세금과 관세 정책, 그리고 영업과 금융의 자유로 인해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홍콩에서 처음으로 단색화를 중심으로 한국 미술 붐이 일기 시작했다. 대우 받기 시작한 우리 미술의 기반 다지기와 포스트 단색화 전략을 구상하는 철저한 준비가 요구된다.
홍콩=서진수 강남대 경제학과 교수, 미술시장연구소 소장

갤러리 인 부스의 김명범의 설치작품 〈무제〉 2014

갤러리 인 부스의 김명범의 설치작품 〈무제〉 2014

 

HOT ART SPACE

김주현 (1)

김주현 개인전
갤러리 시몬 3.12~5.15

이번 개인전 제목은 <나선연구>로 명명됐다. 익히 알려졌듯 작가는 치밀한 계획을 바탕으로 점 선 면을 마치 기하학적 연구의 결과물처럼 보여준다. 이에 관람객은 마치 우주 혹은 물리학적인 공간을 연상하게 된다. 또한 이번 전시에는 작가가 작품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이 담긴 다양한 모형과 드로잉 등이 함께 전시돼 있다.

[section_title][/section_title]

아르코 (2)

한반도 오감도
아르코미술관 3.12~5.10

<제14회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황금사자상 수상 한국관 귀국전>인 이 전시는 제목 그대로 당시의 전시를 재현했다. 100년에 걸친 남북의 건축적 현상과 진화 과정에 대한 연구결과를 담은 이 전시는 이상의 시 <오감도>에서 타이틀을 따왔다.

[section_title][/section_title]

서울미술관 (1)

노벨로 피노티 개인전
서울미술관 2.28~5.17
1966년과 1984년 <베니스비엔날레> 이탈리아관을 수놓았던 작가의 첫 한국전시다. 대리석과 청동을 소재로 한 196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대표작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미술관 전관과 더불어 야외에도 작품을 설치, 산책하듯 그의 작업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section_title][/section_title]

아라리오2인 (2)

1981년 5월 27일
아라리오뮤지엄 in Space 3.4

한국 실험미술의 태두 김구림과 시인이자 《공간》편집장을 지낸 조정권 2인이 펼치는 퍼포먼스.
타이틀에 적시된 날짜에 행해졌던 퍼포먼스를 재현한 것으로 아라리오뮤지엄이 들어선 舊 공간사옥 내 소극장의 재개관에 맞춰 열렸다.

[section_title][/section_title]

이미크뇌벨 (2)

이미 크뇌벨 개인전
리안갤러리 서울 3.5~4.18

‘알루미늄 회화’라는 독특한 영역을 구축한 작가의 근작 7점을 선보이는 전시. 전후 독일 추상조각을 대표한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대담한 형태와 원색을 구사해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든다.

SPECIAL FEATURE 우리 옛 그림 민화의 재발견

*본 기사에 실린 도판과 해설은 《한국의 채색화》(정병모 기획, 다할미디어, 2015)에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민화는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삶 속에 녹아 있는 우리 그림이다 말 그대로 ‘백성(民)의 그림(畵)’ 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특정 계층이 향유하던 문화라는 편견에서 벗어나 남녀노소에게 사랑 받는 하나의 미술장르로 우뚝 섰다 현재 민화 인구는 만 명에 육박한다고 추산되며 그 증가세가 꺽일 줄 모르고 이어지고 있다 최근 세계 곳곳에 소장된 우리의 궁중회화와 민화를 권의 책으로 묶은 한국의 채색화 가 발간되었다.
일부 중년여성사이의 여가활동 대상으로 여겨지던 민화가 이제 주류 미술계의 문을 당당히 두드리고 있다. 바야흐로 민화의 예술성이 재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민화의 매력은 무엇일까 월간미술 은 근래의 민화 열풍을 이해하기 위해 민화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인 민화 라는 명칭부터 새롭게 접근하고자 한다. 다채로운 고전 민화를 살펴보며 민화 하면 떠오르는 막연한 이미지와 저급한 예술이라는 편견을 깨고자 한다 또한 민화 를 둘러싼 논쟁의 쟁점을 짚어봄으로써 세계미술 속에서 우리 민화가 자리매김할 가능성을 엿본다 오색찬란한 민화 속 색의 향연이 자연의 색을 입은 봄꽃과 함께 당신의 눈과 흥을 자극할 것이다.

八景圖
팔경도는 특정 지역의 경관을 여덟 가지의 주제로 묶어 이름 붙이고 이를 그린 그림을 말한다 아마추어 민간화가들이 그린 민화 팔경도는 기법적인 편의성으로 인해 완성도는 약하지만 기발한 발상과 해학성이 돋보이고 설화적인 이야기를 통해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MM-SPC-13

MM-SPC-14

MM-SPC-15

MM-SPC-16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종이에 채색 73.4×32.4cm(각) 8폭 병풍 19세기 말~20세기 초 (김세종 소장)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민화 산수화 가운데 가장 빈번히 그려진 그림이다.
이 작품은 기존의 화법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조형세계를 표현하면서도 소상팔경도의 화제가 지닌 특징들을 각각 잘 살리고 있다. 원포귀범遠浦歸帆은 육지로 들어오는 배를 그렸고 평사낙안平沙落雁은 기러기가 내려앉는 모티프가 그려져 있다.”
–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관동팔경도(關東八景圖)
“구한말에 이르러 한국적인 팔경도가 꽃을 피웠는데 그중 하나가 관동팔경도다. 그림의 구성이 어린아이들의 그림처럼 상식과 거리가 먼 부분이 있지만, 이런 요소들이 오히려 기존의 화풍에 물들지 않은 참신한 조형세계를 보여준다.”
–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虎獵圖
호렵도는 세기 이후 유행한 그림으로 그 내용은 청나라 왕공귀족의 군사 훈련을 겸한 대규모 사냥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종이에 채색 74.9×30.5cm(각) 8폭 병풍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 뉴아크미술관 소장)

<호렵도(虎獵圖)>(부분) 종이에 채색 74.9×30.5cm(각) 8폭 병풍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 뉴아크미술관 소장)

호렵도(虎獵圖)
“원래 호렵도는 관아에서 무장으로서의 권위와 위엄을 돋보이게 하거나 벽사의 용도로 제작한 그림이다. 그런데 이처럼 해학적인 호렵도는 기능적인 측면보다 조형적인 측면에 주력한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통적인 기법을 해학적인 표현과 연결시켜 어떤 틀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이 도드라져 보인다.” – 정병모(경주대 교수)

故事人物圖
역사나 설화 문학에 얽힌 이야기를 주제로 한 그림이다 인물이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를 고사인물도라고 한다.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
“삼국지연의도와 신선도가 어우러진 것이다. 첫 세 폭은 ‘삼국지연의도’ 중의 장면, 나머지는 다양한 신선의 모습을 담았다. 바둑을 두는 신선의 모습에서 ‘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가 동굴 속에서 두 노인이 바둑 두는 것을 보고 구경하다 집에 와보니 수백 년이 흘렀더라’는 왕질의 고사를 떠올릴 수 있다.” – 유미나(원광대 교수)

冊巨里
책을 비롯하여 그것과 관련된 여러 가지 기물을 그린 그림을 가리킨다. 거리란 먹을거리 입을거리처럼 복수의 의미다 책거리 가운데 책가 즉 서가로 구성된 그림을 책가도라 한다.

MM-SPA-03

<호피장막도(虎皮帳幕圖)> 종이에 채색 355×128cm(각) 8폭 병풍 19세기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호피장막도(虎皮帳幕圖)
“8폭 가운데 두 폭은 표피豹皮를 걷어 올린 공간에 문방구와 기물이 빼곡히 배열되어 있다. 책가 앞에 장막을 설정한 장한종 양식의 책거리와 관련이 깊은 민화 책거리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MM-SPA-01

 종이에 채색 161.7×39.5cm(각) 10폭 병풍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책가도(冊架圖)> 종이에 채색 161.7×39.5cm(각) 10폭 병풍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책가도(冊架圖)
“10칸의 서가를 책으로만 가득 채운 책가도이다. 정조 연간에 책만 빼곡히 채워서 그린 책가도의 초기 양식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책가도의 제작 시기는 19세기로 본다.”
–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花鳥圖
화조를 주제로 한 그림은 민화 전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며, 그 내용이 다양하고 표현된 물상의 종류와 형태 및 채색의 변화가 매우 크다.

MM-SPB-05

<연지도(蓮池圖)> 비단에 채색 177×75.4cm(각) 4폭 병풍 19세기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연지도(蓮池圖)
“여러 쌍의 원앙새는 주체할 수 없는 연꽃의 향기에 취해 이리저리 연꽃을 완상하며 분주하게 물결을 가르고 있다, 원앙금침을 수놓아 자식을 많이 낳고 부부 금슬이 좋기를 기원하는 신혼방에 펼쳐졌을 법한 그림이다.” – 이경숙(박물관 수(繡) 관장)

MM-SPB-09

<화조도(花鳥圖)> (부분) 종이에 채색 90.4×37.2cm(각) 8폭 병풍 19세기 (일본 개인 소장)

화조도(花鳥圖)
“매화, 파초, 초롱꽃, 대나무, 모란, 소나무, 연꽃, 백일홍으로 구성된 화조화 병풍이다. 화조로 이루어진 자연이지만, 따뜻한 휴머니즘의 세계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가늘고 구불구불한 선묘와 소나무 잎 표현으로 보건대, 제주도 민화일 가능성이 높다.” – 정병모(경주대 교수)

翎毛・魚蟹圖
호랑이의 이미지는 선사시대 바위그림, 고구려 고분벽화 등 이른 시기부터 즐겨 제작되었다 민화로 전해진 호랑이 전통은 상징성이 강해지면서 호랑이는 부패한 관리 까치는 민초를 대변하게 되었다 물고기의 경우 벽사뿐만 아니라 다산을 상징하는 길상적 소재로 여겨졌다.

MM-SPB-01

<호작도(虎雀圖)> 종이에 채색 100.5×60cm 19세기 (이우환 컬렉션, 프랑스 기메동양박물관 소장)

호작도(虎雀圖)
“민화 호랑이 그림에는 대부분 호랑이와 까치가 등장하는데 이 그림에서는 참새가 까치 대신 호랑이의 상대역을 담당한 점이 이채롭다. 참새 외에도 토끼나 꿩 등이 호랑이의 상대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 정병모(경주대 교수)

 종이에 채색 87×52cm 19세기 (바라 컬렉션, 프랑스 기메동양박물관 소장)

<어변성룡도(魚變成龍圖)> 종이에 채색 87×52cm 19세기 (바라 컬렉션, 프랑스 기메동양박물관 소장)

어변성룡도(魚變成龍圖)
“등용문 고사가 충실하게 묘사되어 배경에 패방牌坊 모양의 용문을 표현한 중국의 약리도와는 달리 우리의 어변성룡도는 일출하는 태양이나 태극문, 또는 장식적인 여의주로 변용되어 나타난다.”
– 조에스더(미국 사우스웨스트대 교수)

文字圖
문자를 소재로 한 민화로서 원래 한자의 상형성에 기인하며 그 시원은 중국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민화 문자도는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로 발전했다 문자도는 다른 소재보다 윤리성과 이념성이 두드러진다.

MM-SPE-1-1-A

MM-SPE-1-2-A

<문자도(文字圖)> 종이에 채색 55×40.5cm(각) 8폭 병풍 19세기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문자도(文字圖)
“이 효제문자도 8폭은 판화로 글자의 윤곽을 찍은 후에 내부를 흑색 바탕으로 채우고 다시 각종 동물, 새, 화초, 일월日月, 운문雲文 등을 그려넣은 것이다.”
– 진준현(서울대학교박물관 학예연구관)

MM-SPE-2-1

<비백문자도(飛白文字圖)>(부분) 종이에 채색 95.2×34.8cm(각) 6폭 병풍 19세기 (호림박물관 소장)

비백문자도(飛白文字圖)
“효제孝悌 충신忠信 예의禮意 염치廉恥 국원菊遠 강산江山 등 여섯 폭이 남아 있는 비백서 문자도 병풍이다. 비백이란 큰 붓으로 먹을 묻혀 재빨리 큰 글자를 쓸 때 먹이 묻은 곳과 묻지 않은 곳이 뚜렷이 대비되어 필획 중 흰 부분이 마치 날아가듯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진준현(서울대학교박물관 학예연구관)

 

 

SPECIAL FEATURE 행복을 담은 색깔 그림 길상화吉祥畵 다시 보기

윤범모 가천대 교수

‘미술계의 숙원 사업’이던 우리의 채색화를 집대성한 두꺼운 채색화 도록이 드디어 출판되었다. 《한국의 채색화》(다할미디어 발행)가 바로 그것. 우리는 이 책에 소개된 채색화 작품을 통해 우리 민족의 독창성과 감성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아, 아름답다! 우리 색깔 그림’.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 것인가. 우리 민족의 회화작품 가운데 이렇듯 아름답고, 멋있고, 독창적이고, 상징적인 그림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진정 국제무대에서 경쟁력 있는 우리의 그림이다. 그런데, 강하게 치밀어 오르는 의문 사항 하나, 그것은 바로 기존 한국미술사 관련 저술들의 한계이다.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기왕의 한국회화사 관련 저술에서는 우리 채색화 작품을 찾아볼 수 없다. 정말?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우리 색깔 그림’을 푸대접하고 무시했던가. 작가명과 제작연도를 알 수 없는 ‘민화’는 미술사 연구의 대상으로 삼기에 ‘하자’가 있다는 것, 하지만 이는 궁색한 변명일 수 있다. 이제 우리의 채색화를 다시 보아야 한다.

한국회화사의 주류는 채색화다

그동안 한국회화사 연구는 수묵 문인화 중심으로 기술되었다. 조선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유교의 예술관은 한마디로 예술 천시관賤視觀이었다. 그림 그리기는 취미생활 정도의 여기餘技로 여겼지 직업적 대상이 아니었다. 예술은 완물상지玩物喪志의 애물단지 정도, 그래서 사대부가 가까이 할 대상은 아니었다. 문인 당사자들이 여기라고 주장한 수묵 문인화를 가지고 한국회화사의 골간으로 삼아 기술했으니, 이는 불구의 연구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문인화는 중국풍을 기본으로 하여 전개되었으니, 민족 회화의 독창성 문제를 생각할 때 한계를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민족의 그림, 그것은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 불화, 조선 초상화와 기록화, 불화와 무속화, 그리고 이른바 민화로 이들의 공통점은 채색화이다. ‘민화’는 채색화의 꽃이다. 따라서 한국회화사의 주류는 채색화이다. 회화사 연구의 시각 교정을 요구하는 대목이다. 《한국의 채색화》는 이 점에 대해 절규한다. 절규!
흔히 한민족을 일컬어 백의민족이라고 한다. 어느 순간에는 그랬을지 모르겠다. 현재 한국인은 백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종로거리에서 흰옷 입은 사람 만나기란 매우 어렵다. 실제로 국가 기관에서 한국인의 색채선호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오늘날 한국인이 제일 좋아하는 색? 그것은 파랑색이었다. (참고로 오늘날 세계 민족의 색채 선호 역시 파랑색이 1순위라는 조사보고서가 있다.) 바닷가 출신 사람들은 완벽할 정도로 파랑색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런가, 섬 출신 김환기는 파랑색이 없으면 그림을 그리지 못할 정도로 파랑색을 좋아했다. 통영 출신 전혁림 역시 파랑색을 작품의 기저로 삼았다. 오방색의 단청을 보자. 여기서 바로 한국인의 색채의식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인은 단청과 같은 원색의 농채濃彩를 좋아한다. 하지만 일본인은 2차색인 간색間色을 좋아한다. 일본 미인도에 보이는 간드러지는 색깔과 필선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한민족은 밝고 짙은 원색을 좋아한다. 그래서 채색화가 한민족의 심성 표현에 적합했던 것이다. ‘민화’는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민화’는 무명의 저속한 하수의 그림이 아니다

민화라는 용어를 만든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민화를 무명의 저속한 하수下手의 그림이라고 개념 정리했다.(물론 하수의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민화는 아름답다고 말했다.) 아무튼 민화하면 3류의 그림, 심하게 말해서 시골 장돌뱅이의 막그림 정도로 폄하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표현은 민화의 본질을 무시한 것이다. 민화는 그렇게 무명의 하수 그림이 아니다. 더군다나 저속한 그림도 아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민화작품의 독창성과 상징성, 장식성과 해학성 등 특성은 결코 하수의 작품이라고 볼 수 없다. 나름대로 훈련된 과정을 거친 수준급 화가가 당대의 시대정신을 담보하여 그린 작품이다. 하여 민화는 마을 공동체의 눈높이에 맞춘 공동체 사회의 시각적 산물이다. 민화세계의 특성으로 동심童心을 들 수 있는 바, 동심의 표현은 고수가 아니면 불가능한 수준이다. 추사 김정희의 〈板殿〉(강남 봉은사 현판)이 이를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아프리카 미술의 제작 과정처럼 익명성은 주요한 특징을 이룬다. 아프리카 미술은 마을의 공동의지를 작품에 담는 것이 특징이다. 이때 작가명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의 미술작품처럼 작가의 개인 브랜드를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화의 무명성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여겨진다.
기왕의 민화 걸작전은 상당부분을 왕실회화 작품으로 꾸몄다. 근래 궁화宮畵 관련 연구 성과가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궁화와 민화의 구분을 요구하게 되었다. 왕실에서 사용한 궁화를 두고 백성 민民자를 붙이기에는 어폐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화나 민화는 똑같은 채색화이고 커다란 의미에서 형식과 내용이 같은 종류라고 할 수 있다. 궁화의 작가는 도화서 화원이었고, 군왕에게 진상하는 그림에 자신의 이름을 표기할 수 없는 신하의 신분이었다. 궁화에 작가명이 누락된 것은 시대적 환경의 반영이다. 이런 궁화가 민간에 퍼져 유행하면서 이른바 민화의 세계가 광역화되었다. 궁화와 민화는 재료를 비롯 표현형식 등에서 약간의 차이는 보이지만 크게 보면 같은 맥락에서 평가하게 한다. 민화의 물결은 점차 넓게 파급돼 민화의 독창성과 함께 자생력을 갖게 되었다. 우리 민족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창출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민화라는 용어의 비과학적 부분이다. 민화는 하수의 저속한 그림도 아니지만, 무엇보다 궁화와 민화의 경계선 구별 짓기에 어려움이 있다. 궁화와 민화의 완벽한 구별이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수용자 중심의 이와 같은 구별이 얼마만큼의 설득력이 있는가 하는 근본적 문제점도 가지고 있다. 화원이 똑같은 그림을 2장 그려 한 점은 왕실에 진상하고, 또 한 점은 민간의 친지에게 주었다면, 그것은 궁화인가, 민화인가. 더군다나 화원은 중인 출신으로 피지배계층에 속한다. 왕공사대부 계층도 아닌 중인 출신이 궁정화풍을 이룩하면서 그린 것이 궁화이다. 하지만 궁화의 광역화 현상은 민화와 대동소이한 형상을 만들게 했다. 요즘의 현상은 궁화와 민화를 한 형제로 볼 것인가, 남의 집 식구로 볼 것인가, 혼란을 자초하는 꼴이다. 무엇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점이 있다. 현재 민화 그리기 붐은 전국적으로 열광의 도가니를 만들고 있다. 10만 명 이상의 민화인구는 한국 문화현상의 아주 독특한 흐름이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이들이 ‘민화’라고 그리는 내용을 보면, 대다수가 궁화라는 점이다. 민화공모전 수상작은 궁화를 모본으로 삼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궁화는 민화보다 규모로 보나 내용의 품격으로 보나 고급스럽고 화려하기 때문이다. 궁화 취향은 시대적 추세의 반영이다. 그래서 민화라는 용어를 고집한다면, 궁화라는 보물창고를 잃게 된다. 굳이 민화라는 용어를 쓰고자 궁화라는 전통을 방기해야 좋을까.
이른바 민화의 내용은 대부분 행복추구이다. 가장 큰 사랑을 받은 화조화 부분, 그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작품이 남은 모란 그림, 이는 바로 부귀영화의 상징이다. 모란병풍 그림 앞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또 장례식도 거행했다. 모란 사랑의 조형적 증거물이다. 책거리, 문자도, 인물화, 산수화 등 민화작품에 내재하는 기본적 심성은 바로 행복 추구이다. 산수화도 넓은 의미로 행복을 추구하는 그림이다. 그래서 한 일본인 학자는 민화라는 용어를 차라리 ‘행복화幸福畵’라 부르자고 제안한 바 있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용어의 신선하지 않음, 이런 점을 감안하여 나는 지난 3월 열린 ‘경주민화 포럼’에서 출전이 확실한 ‘길상’이라는 용어를 내세워 ‘길상화吉祥畵’라 부르자고 제안했다. 그러니까 궁화와 민화를 모두 아우르면서 우리 채색화의 특성을 담아낼 용어, 무엇보다 무명의 저속한 그림이 민화라는 야나기 이론의 개념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의 산물이었다. 물론 새로운 용어가 자리매김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조선말기 왕실에서부터 시골의 민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유행했던 우리 식의 그림, 그것의 형식은 채색화였고 내용은 길상화였다는 점이다.

경상북도 상주에 위치한 남장사 극락보전 벽에 그려진 물고기를 탄 인물 © 윤범모

경상북도 상주에 위치한 남장사 극락보전 벽에 그려진 물고기를 탄 인물 © 윤범모

사찰에서도 길상화를 그렸다

채색화의 전통을 온전히 지킨 곳은 사찰이었다. 조선시대의 불교는 억불숭유 정책에 의해 핍박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사찰은 고려의 찬란한 불화 전통을 단절시키지 않으려고 부단한 노력을 펼쳤다. 채색의 전통을 지킨 공로, 이는 정말 박수 받을 일이다. 어째서 19세기와 20세기 전반에 ‘민화’가 대대적으로 그려지면서 유행했을까. 거꾸로 표현하면, 이 시기는 정치 경제적으로 정말 어려운 시기였다. 민간의 생활은 글자 그대로 궁핍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렇듯 살기 어려울 때, 사람들은 행복을 담은 그림을 좋아했다. 길상화를 보면서 괴로운 일상생활을 잊고 내일의 행복을 꿈꾸었다. 마치 망자亡者를 위무慰撫하기 위한 감로도甘露圖가 이 시기에 유행했던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역설적 표현은 세상을 훈훈하게 한다. 길상화 속의 풍자정신과 상징성은 이런 의미에서 더욱 돋보인다.
오늘날 사찰 벽화에 남아 있는 민화풍의 그림들, 사찰이 바로 민화 제작의 모태 역할을 했음을 증거하는 부분이다. 토끼가 호랑이에게 담배 물려주는 그림, 이런 내용이 왜 사찰 벽화에 그려졌는가. 산신각의 산신도는 타종교를 배려한 불교의 산물이라 볼 수 있지만, 불교와 무관한 민화풍 소재의 사원 벽화는 정말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조선시대 말기의 사원경제는 매우 열악했다. 제지업이 사찰에서 흥행했던 것도 경제난 타개책의 일환이었다. 마찬가지 맥락으로 불화를 그리는 화승畵僧이 민화를 그려 경제문제를 해결했다. 그렇지 않아도 사찰은 채색 물감을 다루는 전문성을 지니고 있었고, 또 채색물감은 비쌌기 때문에 아무나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청 담당 가운데 소묘력을 요구하는 그림, 바로 별화別畵 담당 화가는 민간용 민화를 그릴 수 있었다. 벽에 그린 내용을 종이에 그리면 바로 ‘민화’가 됐다. 이런 민화작품에 작가 이름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까치 호랑이를 그려주면서 굳이 스님의 법명을 밝힐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증언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고암 이응노가 주인공이다. 그는 1920년대 초 상경하기 직전 고향(홍성, 예산)의 사찰에서 ‘민화’를 그렸다. 당시 사찰에서는 민화를 많이 그렸는데, 고암도 그곳에서 일당을 받고 그림을 그렸다. 건장한 남자의 하루 품삯이 20~30전 할 때 고암은 1원을 받았다. 당시 스님들이 많이 그린 내용은 까치 호랑이 그림이었다. 뒤에 고암은 일당 5원을 받게 되었는데, 그 돈을 가지고 고암은 운동화와 기차표를 사서 상경할 수 있었다. 사찰에서 민화를 그렸다는 증언, 이는 매우 흥미롭다. 화승畵僧이 민화를 그렸다는 증언은 민화작가의 위상을 제고시키면서 민화의 성격을 다시 헤아리게 한다. 사찰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채색 전통을 지켜 온 보루였기 때문이다. 채색화의 위상 재고를 요구하는 작금의 현실이다. 아름답고 독창적인 우리의 길상화를 위하여. ●

〈해학반도도〉 비단에 채색과 금박 714×227.7cm 12폭 병풍 1902년 추정 (미국 호놀룰루미술관 소장)

〈해학반도도〉 비단에 채색과 금박 714×227.7cm 12폭 병풍 1902년 추정 (미국 호놀룰루미술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