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청춘미술 불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그런데 우리 미술계는 지난 10년 동안 이렇다 할 변화 없이 정체됐다. 특히 젊은 세대의 창작활동 성과면에서는 오히려 퇴보한 것 같다. 나는 당사자인 젊은 세대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요즘 젊은 작가의 작품에선 진지한 역사인식이나 치열한 창작태도를 감지할 수 없다. 그러니 유의미하고 완성도 높은 결과물도 보기 힘들다. 무엇보다 근현대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관심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가장 큰 문제인 것 같다. 사정이 이러니 광복 7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은 둘째 치고, 분단현실 극복과 통일에 대한 의지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것 같다. 어쩌면 그들은 “기성세대와 세상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항변하거나, “당장 코앞에 먹고사는 문제가 절박한데 분단이니 통일이니 하는 문제가 우리와 뭔 상관이냐!”고 따지고 들 수도 있겠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들은 ‘청년’이라 할 수 없다. 세상을 향한 이유 있는 불만과 가슴속 깊은 곳에서 치솟는 분노도 없고 전투적으로 저항 할 줄도 모르는 나약한 ‘청춘’일 뿐이다. 낭만에 취한 청춘의 시절은 한 순간 명멸하는 불꽃놀이 같다. 반면 시대와 예술을 고민하는 청년의 정신은 영원하다. 가볍디가볍고 얇을 대로 얇은 청춘 말고, 조금이라도 묵직하고 두터운 ‘오늘의 청년미술’을 보고 싶다. 이것 말고도 불만이 많지만 이번호 기사에서 발췌한 아래 3인의 글로 위안을 삼는다.

“청년 세대의 감성에 맞는 감각적인 전시와 특정 집단의 취향이(의도했든/의도치 않았든) 배타적인 권력을 형성한다는 것이 이들에게 불편함을 표출하는 주된 이유다. 이런 우려를 종식시키는 것은 이들이 생산해내는 유무형의 결과물이 기존미술계에 얼마나 긍정적인 자극을 주는가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성 제도에 편입하기 힘든 젊은 작가들의 생존 실험인 신생공간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귀결되지는 흥미로운 기대를 품게 한다. 새로운 플랫폼과 운영방식이 (일시적이나마) 신선한 탈주 가능성을 낳을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진입 수단을 만드는데 그칠 것인지. 한 가지 희망사항은 운영 주체의 자립과 발언 외에 보는 주체의 권리도 고려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 문혜진 <익숙하면서도 낯선, 동시대 미술의 제도적 변천>

“유행이나 대세와는 상관없이 창작을 하고, 현대미술 우세종의 맥락과는 다른 경로로 미술을 보며, 시대착오적이더라도, 흥행하는 장소와 시간에 부응하는 활동은 아니더라도, 오롯이 ‘오늘의 미술’이라는 장(場)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2010년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공기처럼 흡입하며 성장한 디지털 웹과 앱 기반 미디어 환경속의 감각지각을 새로운 가시성/표피의 작품들로 보여준다(일민미술관의 <뉴 스킨>). 동시에 다른 쪽에서는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름 없는 당인과 이름이 있더라도 예술가 주체를 주장할 수는 없었던 이들이 면면히 쌓아올리고 정교히 한 한국문화예술의 전통을 역사의 무게를 딛고 전개시킨다(삼성미술관 리움의 <세밀가귀>). ‘좋은 미술계’라는 것이 가능하고 또 유의미하다면, 이와 같은 예술 실천이 억압 없이 다양화하는 곳이다.”
– 강수미 <세대 특정적 미술? 오늘의 미술>

“선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한국 현대미술의 현장 속에서 선무의 존재는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 그의 비극은 그 자신에게는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이지만 그가 그 아픔을 형상화하고 극복해 나가는 과정은 예술과 사회의 관계라는 지평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것이 사실이다. ‘광복 70년’은 단순히 해방 이후 시간의 총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반도의 과거의 질곡을 극복하고 현재의 상황과 미래의 가능성을 전망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 김동일 <당대적 존재로서의 선무, 혹은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은 것을 드러내기>

편집장 이준희 dam2@unitel.co.kr

COLUMN

포스트 뮤지엄의 한국적 적용이라고?

미술계의 국외자인, 한 사람의 관객일 뿐인 사람이 미술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무리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즉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지드래곤 현대미술 전시회-피스마이너스원: 무대를 넘어서전>이라면 좀 다르다. 워낙 말이 안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워낙 말이 안되는 일은 특정한 ‘계’를 넘어 사회 성원들의 보편적 문제가 된다.
지드래곤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를 할 자격이 없다. 그가 대중 연예인이라서가 아니다. 그의 직업이 무엇이든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를 할 만한 자격을 갖추면 그만이다. 자격은 다른 공간에서 한 전시들과 그에 대한 비평과 관객의 평가를 포함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만들어진다. 지드래곤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할 합당한 자격을 갖추지 않았다. 자격은 커녕 아무런 이력조차 없다. 이력을 쌓고 자격을 갖추는 데 일정한 시간이 수반되는 건 물론이다. 현재 같은 미술관 1층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윤석남 작가가 미술가로서 경과한 시간은 괜한 것이 아니다.
이번 전시는 김홍희 관장 자신의 미술관 운영 원칙, 적지 않은 진지한 사람이 그를 지지한 이유이기도 한 운영 원칙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김홍희 관장은 2012년 초 관장에 취임하며 “앞으로 외부기획사에 의존한 대형블록버스터 전시는 하지 않을 것이다”고 선언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측에선 이번 전시가 외부 기획이 아니라 ‘공동기획’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서 이 전시는 공간 대관에 ‘공동기획’이라는 명의까지 패키지로 판매된 가장 적극적인 형태의 외부 기획이다. 소속사 YG는 지드래곤의 홍보 마케팅 활동의 일환으로 전시를 기획했고 서울시립미술관과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등 몇 곳을 접촉했다. ‘뜻밖에도’ YG는 서울시립미술관의 공간과 권위를 패키지로 대관할 수 있었다. 공동기획이니 괜찮은 게 아니라 공동기획이어서 문제인 것이다.
데이빗 보위를 사례로 들기도 하는 모양인데, 진심이라면 무지의 소치라고 할 수밖에 없다. 2013년 이른바 최고의 권위를 가진 디자인 뮤지엄 런던 빅토리아&알버트(V&A)가 ‘데이빗 보위 이즈’라는 전시를 연 건 보위에게 그럴 자격이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보위는 대중연예인 혹은 뮤지션이라는 타이틀로 규정할 수 없는 존경받는 아티스트다. 그가 선도한 글램록이 패션, 무대예술, 디자인 등에 미친 영향은 예술사적 차원이다. 여전히 현역인 보위가 가사는 물론 사운드에까지 제 철학과 미학을 불어넣어 카운터컬처의 기수로 공인된 건 이미 54년 전이다. 그런 사람을 상업적 기획사에 의해 픽업되고 길러진 20대 아이돌 가수와 비교하는 건 민망한 일이다. 물론 보위의 전시는 보위 소속사의 기획으로 시작된 것도 아니다.
김홍희 관장은 이번 전시를 ‘포스트 뮤지엄’ 의 개념으로 해명한다. 일반적으로 포스트 뮤지엄은 계몽이나 교육을 기조로 한 근대적 미술관을 넘어 적극적으로 지역 주민에게 다가가는 미술관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한국에서 불었던 포스트모던 바람에 대해 되새길 필요가 있다. 1990년대 들어 지식인 사회에 불어닥친 포스트모던 바람은 1980년대 변혁운동의 경직된 정신세계(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이름으로 예술에서 예술을 소멸하기도 한)와 결부되어 ‘진리는 하나가 아니다’라는 의미있는 화두를 선사했다. 그러나 결국 포스트모던 바람이 남긴 건 살아숨쉬는 진리(들)가 아니라, 누구도 진리에 대해 말하지 않는 지적 괴멸이었다. 괴멸은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길을 터주고 온 사회성원의 정신과 신체를 열어젖히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김홍희 관장은 그런 과정을 생뚱맞을 만큼 뒤늦게 공공미술관이라는 공간에서 압축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명화 감상 겸 가족 나들이 공간’을 ‘기업 홍보관’으로 바꾸는 게 과연 포스트 뮤지엄의 한국적 적용인가.
나는 이 전시를 보지 않았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볼 필요 역시 느끼지 않았다. 나는, 혹은 지금 우리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이 전시를 하는 게 온당한지에 대해, 즉 서울시립미술관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지 이 전시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시를 본 지인이 ‘생각보다 감각 있어 보이더라’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호의적으로 반응했다. 세월이 지나 지드래곤이 아이돌의 굴레를 벗고 데이빗 보위처럼 고유한 예술세계를 이룬 존경받는 아티스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지드래곤은 그런 아티스트가 아니다.

김규항 칼럼리스트

COLUMN 강수미의 공론장 6

세대 특정적 미술? 오늘의 미술

동시대 미술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 젊어 보인다. 굳이 연령이나 생물학적 젊음을 따져서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음악계에서처럼 현대미술 분야에서도 ‘신동(神童)’ 소리가 울려 퍼져야 할 것이다. 나이보다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미적 취향, 미술제도 및 시스템의 작용 주기와 교체 속도, 예술적 역학구도나 영향관계의 양상 등을 두루 고려해보니, 동시대 미술계에서 젊음을 한 특성으로 꼽을 수 있겠다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미술은 조형적 원숙함, 미학적 깊이, 경험에 입각한 눈의 통찰과 손의 숙련을 중시했다. 같은 맥락에서 미술계는 ‘신동’이나 ‘영재’에 상당한 가치를 두는 여타 예술 분야들과는 달리 ‘중견’이나 ‘대가’를 바탕으로 꾸려져왔다. 그러던 것이 대략 1990년대 초부터 본격화된 현대미술, 특히 영국발(YBAs) 센세이션 미술이 주도한 무대에서는 ‘영 아티스트(young artist)’가 각광받는 현상이 벌어진다. 게다가 ‘앙팡테리블 (enfant terrible)’인. 또 20세기 초 아방가르드운동의 전위적 실험과 도발적 새로움과는 다른 맥락에서 끊임없는 변화와 새것으로의 교체를 무한 긍정하는 현상이 이어진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 두 가지가 오늘 여기의 미술을 방부 처리된 듯, 영원한 젊음으로 보이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큰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그 현상은 “우리는 도처에서 모험을” 하며 “당신에게 광활하고 낯선 영토를 주려”1 한다고 선언한 근대 아방가르드 시인의 정신이 아니다. 그보다는 역사의 발견 자체를 위해 “몰역사적인 오래됨의 창고”를 뒤지며 “영원히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2 것처럼 구는 동시대미술의 핵심 방법이 바로 변화와 교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꽤 오래전 한 정치인은 ‘삼겹살 불판을 갈 듯이 낡고 썩은 정치판을 갈아야 한다’고 주장해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지금 미술계의 판 갈이는 가히 유행을 위한 유행의 교체, 변화를 위한 변화의 갱신이다. 요컨대 시간의 층, 경험의 층, 다양성의 층, 주체의 층, 세대의 층, 형식의 층, 가치의 층, 의미의 층이 퇴적돼 종합적 구조가 되고 중층결정되는 곳이 아니다. 대신 액면가(face value)가 싱싱한 것들을 ‘잘라내기-붙여넣기’ 하는 피상성의 무대가 바로 동시대 미술판이다. 이 미술판에서는 새로운 것이란 기존의 것들을 감각적으로 디제잉(DJing)해서 기발한 각도로 보여줘 즉각적인 자극을 유발하면 충분한 무엇이고, 그에 성공할 경우 뒤집어 새로운 오리지널의 자리에 등극하는 무엇이다. 동시에 종합은 진지한 성찰과 필터링의 투명한 결과라기보다는 물리적 파편들의 무시간적 연쇄, 미술사에 대한 토르소식 참조와 재활용, 디지털 데이터 오버레이, 네트워크 자동 동기화 등등과 동의어가 됐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현대미술, 어느 때부턴가 고유명사처럼 ‘컨템포러리 아트(contemporary art)’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미술이 만년 젊을 것처럼 움직이는 이유다.
하지만 정말 그것들이 동시대미술의 총합일까? 그것들이 현대미술을 대표할까? 가령 그 경우 액면가가 싱싱하지 않은 전통적이고 일반화된 미학, 디지털 메커니즘이나 앱 네트워크와 동기화 안 되는 조형예술 작품들, 젊지 않은 미적 경험 세대 및 즉각적이지 않은 시각기교를 익힌 작업자들은 지금 여기 말고 언제, 어디의 미술로 분류되어야 할까? 앞선 정치인의 말처럼 새것들로 전면 교체되면 그것으로 좋은가?
우리는 이와 같은 질문에, 철학자로서 인간의 감각적 현존과 동시대예술의 추이에 관한 중요한 미학 논변을 제공해온 장 뤽 낭시(Jean-Luc Nancy)를 잠깐 참조해보기로 하자. 그는 2006년 밀라노의 아카데미아 디 브레라(Accademia di Brera)가 주재한 ‘컨템포러리 아트에 관한 강연’에서 그 용어 대신 자신은 ‘아트 투데이(Art Today)’라는 말을 쓸 것이라며, 그 논거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첫째, ‘컨템포러리 아트’는 인상주의, 초현실주의, 포비즘, 아방가르드처럼 굳어진 하나의 관용구로서 그 나름의 방식으로 미술사에 속한다. 둘째, 그것은 경계가 가변적이지만 지난 20~30여 년 이전의 미술은 포함하지 않으며, 항상 유동적인 기이한 역사적 범주다. 셋째, 그 범주로 따지면 오늘, 세상의 어딘가에서 제작되는 일군의 작품들은 그 공속성에도 불구하고 컨템포러리 아트에 속하지 않는다. 예컨대 고전적인 기법으로 그린 형상회화 같은 것 말이다.3 여기서 자세히 논할 여유는 없지만, 낭시의 이 같은 설명은 그 자체로 컨템포러리 아트의 정체와 한계를 간명하게 드러낸다. 즉 최근의 미술계가 쉽고 느슨하게 지금 여기의 미술에 갖다 붙이는 그 말이 동시대미술의 보편성도, 미술사의 큰 내러티브도, 현재 실행 중인 미술에 대한 어떤 의미의 종합도 담보하지 않는/못한다는 뜻이다. 또한 리얼리즘, 큐비즘, 보디아트처럼 특정한 미적 속성을 분석하고 명칭을 부과하는 데 무관심/실패하기 때문에 대략 ‘동시대’라는 모호한 범주로만 지칭한다는 사실이다.
사태가 이와 같다면,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용어 사용이 아니다. 오히려 “그 나름의 방식”을 가진 컨템포러리 아트가 마치 지금 여기 미술을 일반화하고 총괄하는 것처럼 작용하면서 불러일으키는 예술적 경향의 배타성, 미적 취향의 편식, 미술 주체들 간의 경시와 차별 따위를 묵인하거나 심지어 당파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문제다. 낭시가 예로 들었듯이, 클래식 회화 기법으로 형상에 충실한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오늘의 미술이 아닌 것은 아니다(나는 여기서 김홍주, 김보중, 임동식 같은 이들의 그림이 떠오른다). 또 현재 미술계에서 ‘퍼포먼스 아트’라는 이름으로 유행 중인 작업을 1950~1970년대부터 이미 해왔으나 2000년대 들어서서 ‘영 아티스트’처럼 각광 받고 있는 작가들이 나이나 경력 면에서 젊다/청년이라고 할 작가들의 파이를 빼앗는 것도 아니다(이승택, 김구림, 이건용 등이 말이다). 유행이나 대세와는 상관없이 창작을 하고, 현대미술 우세종의 맥락과는 다른 경로로 미술을 보며, 시대착오적이더라도, 흥행하는 장소와 시간에 부응하는 활동은 아니더라도, 오롯이 ‘오늘의 미술’이라는 장(場)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2010년대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공기처럼 흡입하며 성장한 디지털 웹과 앱 기반 미디어 환경 속의 감각지각을 새로운 가시성/표피의 작품들로 보여준다(일민미술관의 <뉴 스킨>). 동시에 다른 쪽에서는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름 없는 장인과 이름이 있더라도 예술가 주체를 주장할 수는 없었던 이들이 면면히 쌓아올리고 정교히 한 한국문화예술의 전통을 역사의 무게를 딛고 전개시킨다(리움미술관의 <세밀가귀>). ‘좋은 미술계’라는 것이 가능하고 또 유의미하다면, 이와 같은 예술 실천이 억압 없이 다양화하는 곳이다.
지난 2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청년관을 신설하라’는 이슈에 대한 논의로 시작한 이 ‘공론장’ 연재가 벌써 약속한 6회를 채우며 끝을 보게 됐다. 그간 나는 처음 글을 개시할 때 중요하게 상정한 ‘세대 미학’이라는 화두를 미술주체의 문제, 경향의 문제, 미술정치학의 문제, 미술제도의 문제, 미술비평의 문제로 나눠 공론화하려 애썼다. 그리고 이 마지막 편에서는 종합의 의미에서 동시대미술의 층위를 보려 했다. 글쓴이 입장에서는 그 사이 얼마만큼 생산적이고, 어느 정도로 의미 있는 논의들을 지금 여기 우리의 미술계에 이끌어냈는지 모를 일이다. 여기저기서 직간접적으로 전해지는 반응과 몇몇 독자의 구체적 의견을 통해서 대략 그 반향을 가늠해볼 수 있을 뿐. 다만 한 가지, 일련의 글을 통해 내가 분석하고자 했던 것은 어느 세대에 특정된 미술이 아니라, 오늘의 미술을 이러한 양태와 성질로 구성하고 있는 요소 및 힘의 작용이었다는 점은 강조해두고 싶다.
사람들 앞에 처음 TV가 켜졌을 때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새로운 시각경험을 했듯이, 스마트폰이 처음 우리 손에 쥐어진 후 나이나 삶의 연륜에 상관없이 낯선 미디어 환경에 응했던 것처럼 감각지각의 세계, 예술의 세계에서 ‘세대’는 개별성과 공속성의 역학을 동시에 고려할 때 존재감 있는 주제다. 언제까지든 젊은 미술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영원히 늙지 않는다는 그 자체가 지옥의 형벌과 같다. 그 점에서 컨템포러리 아트의 싱싱함은 좀 무시무시하다.강수미 동덕여대 교수

1 레나토 포지올리, 박상진 옮김, 《아방가르드 예술론》, 문예출판사, 1996, p.15의 기욤 아폴리네르 시에서 재인용.
2 장 필리프 앙투안, <동시대의 역사성은 지금이다!>, 알렉산더 덤베이즈 & 수잰 허드슨 엮음,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부 옮김, 《라운드테이블》, 2015, p.48.
3 Jean-Luc Nancy, <Art Today>(Charlotte Mandell(trans.)), 《Journal of Visual Culture》 9, 2010(May 27), pp. 91-99 중 91. The online version of this article can be found at: http://vcu.sagepub.com/content/9/1/91.citation

위 2005년 쌈지스페이스에서 열린 <타이틀매치: 이건용 VS 고승욱전>은 당시 원로 작가 이건용(오른쪽)과 차세대 주자 고승욱이 ‘된장과 케첩’ 퍼포먼스를 통해 세대 간 소통과 생산적 대화를 모색한 대표적인 전시로 평가받는다.

SIGHT & 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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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 The Stiff Neck Chamber A/W 2013 Collection > ⓒHenrik Vibskov  아래 < Face Wool Explosion > 2013 ⓒHenrik Vibsko

〈헨릭 빕스코프-Fabricate〉 대림미술관 7.9~12.31

‘아티스트’로서, ‘패션 디자이너’로서

헨릭 빕스코브(Henrik Vibskov, 1972~)는 우리에겐 생소한 인물이다. 하지만 런던 센트럴 세인트 마틴(Central St. Martin’s College of Art and Design)을 졸업한 지 불과 2년 만에 파리 패션위크에 데뷔할 만큼 디자이너로서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현재 높은 인지도를 자랑하는 작가이다. 그는 단순히 패션디자이너로서뿐만 아니라 순수미술, 사진, 영상, 퍼포먼스와 음악까지 다양한 형식의 예술적 시도를 선보이고 있고 뉴욕 MoMA PS1, 파리 팔레 드 도쿄, 헬싱키 디자인뮤지엄 등 유수의 미술관에서 그를 초청하여 개인전을 연 바 있다. 또한 그는 뮤지션 비욕(Björk), 시규어 로스(Sigur Rós) 등과 협업하고, 노르웨이 국립오페라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공연 메인 의상을 디자인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그를 서울에서 만날 수 있었다. 바로 아시아 최초로 열리는 그의 개인전 <헨릭 빕스코브-패션과 예술, 경계를 허무는 아티스트(Henrik Vibskov-Fabricate)전>(대림미술관, 7.9~12.31)을 통해서 말이다.
대림미술관 전관에서 열리는 전시는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헨릭 빕스코브’, ‘아티스트로서의 헨릭 빕스코브’, ‘헨릭 빕스코브의 세계’ 3개 섹션으로 나뉘는데 마치 패션쇼의 런웨이를 옮겨놓은 듯한 무대장치, 설치미술, 의상 제작에 있어 다양한 재료와 컬러 등을 제시하고 있다.
전시 개막을 앞두고 만난 그는 한국과 패션 관련 전시로 몇 번 인연을 맺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본인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질문에 의외로 “패션과 미술은 차이를 갖는다”며 “다만 그 둘 사이의 관계성이 나의 관심사”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 대해서는 “신작을 위주로 작품을 설치했다. 다만 공간이 작아서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며 “지금 인터뷰하고 있는 장소인 이 정원에 작품을 재설치하고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테크닉적으로 발전한 것, 복잡하게 변한 구조, 언캐니한 것 등을 좋아한다”고 밝혔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비평에 대해서는 “미술관이라는 공공의 장소에서 여러 부류의 관람객이 방문하는 만큼 내 작업에 대한 비평의 시각은 경우에 따라 다를 것”이라며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황석권 수석기자
 

HOT ART SPACE

망치질한 그대, 쉬어라

하루 660번 주 5일 쉬지않고 망치질을 해온 망치질의 달인, 〈해머링 맨(Hammering Man)〉이 12년 만에 2달간의 장기 휴식에 들어간다. 지난 6월부터 〈해머링 맨〉은 노후한 부품 교체와 도색 작업을 위해 잠시 멈춰진 상태다. 조각가 조너던 브롭스키(Jonathan Borofsky)의 작품인 〈해머링 맨〉은 2002년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1가 흥국생명 건물 앞에 세워진 이후 광화문 지역의 랜드마크구실을 톡톡히 해왔다. 겨울에는 산타모자를 쓰고 부츠를 신어, 계절의 변화를 나타내기도 하며 거리를 스치는 많은 이에게 웃음을 선사하기도 한다. 〈해머링 맨〉은 실내에 세워진 목조각과 독일 프랑크푸르트, 미국 시애틀, 스위스 바젤 등 전 세계 11개 도시에 세워진 공공조각이 있다. 서울의 〈해머링 맨〉은 공공조각 중 7번째 설치된 작품으로 높이 22m, 무게 20톤의 거구다. 망치를 든 손은 가슴높이에서 다른 손이 놓인 위치까지 아래위로 움직인다. 모든 창조물이 마음과 손으로 창조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1979년 뉴욕의 파울라 쿠퍼 갤러리(Paular Cooper gallery)에서 〈Worker〉라는 이름으로 처음 탄생한 〈해머링 맨〉은 노동자를 상징한다. 조너던 브롭스키는 “처음에는 세계 곳곳에 〈해머링 맨〉을 세우고 동시에 망치질을 하도록 하려했다. 이 작품을 통해 전 세계의 노동하는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고 싶었다”고 작업의 의미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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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리오_공시네, 양만치 (1)

공시네 양만치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7.9~8.30

공간을 모티프로 작업하는 두 작가의 전시. 공시네는 공간이라는 3차원의 문제에 주목, 공간을 평면으로 보여주는 등의 작업으로 회화와 조각의 경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양만치는 공간에 대한 추상적 사고와 감성을 분석한 결과를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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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교회김영자 (2)

김영자 개인전
사랑아트갤러리 6.20~7.17

색면으로 구성된 추상작업을 하는 작가의 이번 전시 타이틀은 ‘Le Jardin(정원)’이다. 분노와 증오라는 잡초가 자라지 못하도록, 마치 정원을 가꾸는 이처럼 작가의 종교적 의지와 결합하여 구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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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종헌 (1)

배종헌 개인전
고암이응노생가기념관 6.5~9.15

작가의 제2회 고암미술상 수상을 기념하는 전시다. 작가는 일상을 맥락화하고 다양하게 해석하여 미술의 문맥으로 옮겨놓는다. 근작을 비롯, 20여 년에 걸친 주요작을 한자리에 모아 작가의 작업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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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득

조원득 개인전
57th갤러리 7.1~6

전시 타이틀 ‘묻다’는 무엇을 숨기거나 감출 때, 그리고 무엇을 알아내기 위한 행위에 대한 의미를 담은 중의적 명명이다. 그 행위를 통해 상황을 극복하거나 회복하려는 의지를 드러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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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화랑 (1)

송용민 개인전
나무화랑 7.8~21

작가의 아홉 번째 개인전은 ‘한국현대사 4-공순이·공돌이’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타이틀이 암시하듯 노동자와 민중을 향한 작가의 시각이 정면을 노려보는 등장인물의 강렬한 눈빛에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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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석 (1)

김호석 개인전
고려대박물관 7.6~8.16

은은하고 맑은 화풍을 특징으로 하는 작가의 개인전. 이번 전시는 세월호와 윤 일병 사건에서 모티프를 얻은 작업을 비롯, 사회적 이슈가 된 현상을 한 걸음 떨어져 관찰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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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아지한남 (2)

피터팬 신드롬
LIG아트스페이스 한남 7.13~8.14

LIG아트스페이스 한남의 개관전 3부 전시. 손현수 전병철 2명의 작가가 참여해 어른 되기를 기피하고 아이로 머물게 하는 자본의 폐해를 드러낸 작품을 선보인다. 키덜트 문화에 대한 참된 이해를 위해 기획된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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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곡_마이어,위노그랜드 (8)

비비안 마이어×게리 위노그랜드
성곡미술관 7.2~9.20

이 전시는 비비안 마이어의 <내니의 비밀>과 게리 위노그랜드의 <여성은 아름답다> 두 개의 전시로 구성됐다. 작가로서 그들의 노정은 극명하게 대비되는데, 이를 통해 동시대를 공유한 이들이 어떻게 다르게 세상을 바라봤는지 비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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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헬로우 아트
광주시립미술관 6.30~8.16

‘상상과 놀이’, ‘헬로우 백남준’, ‘후아유’ 이렇게 3개 섹션으로 나뉘는 이 전시는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기획됐다. 19명의 작가가 참여해 시각적으로 익숙하고 흥미로운 작품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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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I 양정욱,씬킴 (3)

2015 OCI YOUNG CREATIVES
OCI미술관 6.18~7.14

올해 6기를 맞은 OCI미술관 영크리에이티브스의 두 번째 전시로 양정욱과 씬킴이 참여했다. 양정욱은 개인의 서사와 감정 등을 물리적 장치로 시각화했으며 씬킴은 자연의 웅대함을 담은 캔버스를 통해 인간과의 관계를 환기시킨다.

SPECIAL FEATURE 광복 70주년, 한국미술 70년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은 본격적으로 국가체제를 수립했으나 시간에 맞서야 했다. 국가는 물론 사람이 모였던 사회 각계의 모든 분야가 그러했다. 그 과정은 말 그대로 ‘굴곡(屈曲)’이었다. 때론 꺾이고 때론 굽을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흐름은 지금으로 이어졌다. 미술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월간미술》이 바라보는 우리 미술 70년은 단절의 역사가 아닌 연속성을 갖고 흘러왔다. 그래서 10년 전 광복 60주년의 성대한 기억을 호출했다. 당시 주요한 정치·사회적 사건을 기준으로 구획한 6마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요동친 미술판을 정리했던 필자들이 다시 이번 기획에 참여, 10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에 따른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물론 그 이후 미술계의 10년은 사안별로 정리했다. 또한 미술판과 우리 사회가 별개로 움직이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연보와 차트를 실었다.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도 소개한다.
광복 이후 우리 현대미술사를 정리한 대전시립미술관의 <예술과 역사의 동행, 거장들의 세기적 만남전>(5.23~8.23)과 분단현실에 초점을 맞춘 <북한 프로젝트전>(7.21~9.29)이 그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전>(7.28~10.11)에 대한 프리뷰도 놓치지 마시길 바란다. 광복 70주년은 말 그대로 단순히 시간의 흐름만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변화라는 말의 또다른 표현일 것이며, 우리 미술도 이에 따라 새로운 양상을 선보였다. 그 흐름을 짚어가며 지금의 나, 너,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는 계기를 마련해 보자.

시민과 함께 하는 광복 70년 위대한 흐름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7.28~10.11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가 즐비한 가운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도 이에 대한 전시가 열린다.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전> (7.28~10.11)이 바로 그것. 전시 타이틀대로 이번 전시는 3개 섹션, 즉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으로 나뉘었다. 광복 이후 우리 현대사를 형용사로 규정하여 동시대의 규정할 수 없는 삶을 드러내고자 했다. 3개 섹션은 각각 ‘전쟁으로 분단된 조국’, ‘산업화, 도시화, 그리고 민주화’, ‘세계화된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삶’을 그 내용으로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비롯, 총 110여 작가의 작품 270점을 선보인다. 전시 공간 디자인은 최정화가, 그리고 한 시대를 풍미한 대중음악은 시인이자 대중음악가 성기완이 맡아 선곡, 각 시대의 분위기를 입체적이고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데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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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스러운
전쟁으로 인해 분단된 조국, 떠나온 고향과 헤어진 가족을 그리워하는 전후의 삶이 펼쳐진다. 전시공간은 분단의 상징인 철조망과 조국부흥 기치 아래 진행된 개발을 상징하는 거푸집으로 꾸며졌다. 정창섭, 김혜련의 작품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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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1960~1980년대 단기간에 이루어진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부정된 근대성을 극복하려는 민주화를 주제로 했다. 시인이자 대중음악가 성기완이 협업하여 시대를 풍미한 대중음악이 흘러나온다

넘치는
세계화된 동시대의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삶을 보여준다. 최정화의 작업과 백남준의 <이태백> 등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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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FEATURE 광복 70주년, 한국미술 70년

익숙하면서도 낯선, 동시대 미술의 제도적 변천

2005년 이후 우리 미술계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2007년과 2008년 전반기 미술시장의 유례없는 활황으로 분위기가 한껏 고조됐다가 하반기 닥친 국제적인 금융위기로 허망하게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와 연관하여 미술계 분위기는 어땠으며 어떤 상황 등이 펼쳐졌을까? 필자는 이를 “가시적이고 외형적인 제도 및 공간 변천을 중심으로” 풀었다고 말한다.
미술계의 지난 10년을 돌아본다.

문혜진 미술이론
자신이 속한 시대를 역사화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2006년부터 현재까지 지난 10년간 한국현대미술의 변천을 정리해달라는 청탁을 받고 내내 머릿속에 맴돌던 질문이다. 평가와 정리는 시간적 거리감을 확보한 ‘밖’에서 가능한 일이지 떠내려가는 강물 ‘안’에서 함께 휩쓸리는 당대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20매가량의 짧은 분량에 갈수록 확장·가속화하는 동시대미술 신 전체를 포괄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해보였다. 10년간의 잡지 목차와 산처럼 쌓인 복사물을 바라보다가 가능한 선에서 범위를 좁히기로 마음먹었다. 상대적으로 가시적이고 외형적인 제도 및 공간 변천을 중심으로 지난 10년간의 한국미술 변화를 간략히 정리해볼까 한다. 해당 시기를 대표하는 전시나 작업 선정은 주관이 가미되는 일이라, 매체에서 배제된 전시까지 고려해 공정한 평가를 내리기에는 시간도 지면도 불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유례없는 미술시장의 과열을 화두로 2000년대 중반을 열어볼까 한다. 세계 경제의 호황과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투기 억제책 및 저금리 정책에 힘입어, 한국 미술시장은 2005년 말부터 2008년 상반기까지 전무후무한 상종가를 기록한다. 상승기류가 정점에 달한 2007년 서울옥션과 K옥션은 낙찰률 70%를 돌파하며 전년대비 배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같은 해 5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45억2000만원에 낙찰된 박수근의 <빨래터>는 국내 미술품 경매사상 최고가를 경신했고, 11월에는 홍콩 크리스티 아시아 컨템포러리 경매에 출품된 국내 작가들의 작품 52점 중 47점이 한화 약 49억8600만원에 낙찰돼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다. 2007년 한 해 동안 92개의 화랑이 신설되었고, KIAF는 입장객 6만을 돌파했으며 신생 경매사가 속속 등장했다.1
이러한 이례적인 호황은 같은 시기에 나타난 두 가지 현상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그중 하나는 중국미술 붐이고 다른 하나는 젊은 작가들의 제도권 진출이다. 신흥 미술시장으로 각광받는 중국 미술시장에 편승하기 위해 2006년부터 2007년 사이 베이징 동부의 지우창, 차오창디, 798 지구에 일련의 한국 화랑들이 입성한다.2 아울러 장샤오강, 팡리준, 웨민쥔, 왕광이 등 블루칩으로 부상한 중국 작가들의 국내 전시도 성황을 이루었다. 하지만 2008년 후반 미국발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치고 정치적 팝아트의 유행이 시들해지자 중국미술 열풍은 금세 꺼지고 만다. 불과 몇 년 후인 2010년 전후로 중국에 진출한 한국 화랑 대부분이 철수했음을 떠올리면, 한국화단이 외부 자극에 얼마나 취약하며 시류에 예민한지를 실감하게 된다. 한편, 시장이 활성화하자 새로운 투자 대상을 물색하던 화랑은 상대적으로 작품가가 낮은 젊은 작가들에 주목했다. 젊은 작가들의 제도권 진입절차는 1990년대 말에 등장한 1세대 대안공간들이 이미 마련해 놓은 장치지만, 2000년대 중반 시장의 과열은 과거 유지되던 일종의 검증 절차(대안공간이 발굴한 작가를 일정 기간이 흐른 뒤 미술관이나 상업화랑이 흡수하는 과정)를 무시하고 미술관과 화랑이 직접 젊은 작가를 선발하는 현상을 낳았다. 이 시기 가장 흔한 전시 제목은 ‘신진 작가 발굴’, ‘뉴스타트’, ‘영 아티스트’, ‘젊은 작가 발굴’ ‘이머징 아티스트’ 등이었고, 그 결과 젊은 작가의 기준은 35~45세에서 25~35세로 하향 조정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제도권이 직접 젊은 작가들을 흡수하는 시기, 1세대 대안공간들이 급격히 노화하여 사실상 대안의 기능을 상실한 것은 의미심장한 현상이다. 2005년 건물을 신축해 재개관한 대안공간 루프는 이러한 변화의 신호탄이 됐다. 다음해 인사미술공간과 대안공간 풀이 임대료 인상으로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고 한동안 고립되자, 대안공간이 주류 미술계에 끼치는 영향력은 더욱 줄어들게 된다. 대안공간이 하던 새로운 작가 발굴 및 전시방식이 이미 일반화한 상황에서 젊은 작가를 직접 지원하는 상위 기관이 늘어나자 이들 기관과의 차별성이 사라진 것이다. 이후 2000년대 후반 새로운 미술 공간들이 생겨나면서 담론의 중심은 더욱 빠르게 전환된다.
2000년대 중후반은 오늘날 한국미술계를 가능케 한 물적 토대가 대폭 확충된 시기다. 우선, 현재 주목받는 주요 전시 공간 중 다수가 이 시기에 설립되었다. 일례로 중형 기업 미술관 중 상당수가 2006~2007년에 세워졌다. 아뜰리에 에르메스(2006), OCI미술관(2006), 코리아나미술관(2006), 두산갤러리(2007), KT&G상상마당 갤러리(2007) 등이 그 예다. 국공립 레지던시 공간이 대폭 확충된 것도 비슷한 시기다. 국내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실질적으로 2000년대 초반에 시작되었으나3, 물리적인 자원이나 프로그램 운영, 실질적 효과 면에서 현재의 지위가 구축된 것은 2000년대 후반이라고 봐야 한다. 대표적인 예가 창의문화도시 구현의 일환으로 서울 곳곳의 유휴 공공건물이나 공장이전지를 재활용해 창작공간을 조성한 서울시창작공간이다. 2006년에 출범한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를 필두로, 2009년 서교예술실험센터, 금천예술공장, 신당창작아케이드, 2010년 문래예술공장, 성북예술창작센터, 2011년 홍은예술창작센터가 연이어 개관하면서 작가를 지원하는 물적 조건이 확장·개선되었다. 경기도의 대표적인 공립 레지던시 두 곳이 문을 연 것도 같은 시기다. 국내 최대 규모의 경기창작센터와 인천아트플랫폼이 2009년 개관하면서 수도권 레지던시 하드웨어의 기본 골격은 완성된다. 이들 레지던시가 대안공간이 무력화된 빈틈을 메웠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레지던시는 일차적으로 2008년 이후 시장의 거품이 꺼지면서 활동하기 힘들어진 젊은 작가들을 물리적으로 지원(작업실 제공 및 전시 후원)했고, 이차적으로는 단순한 작업실 제공을 넘어 인맥 형성과 비평가 연계, 국제교류 프로그램, 다양한 워크숍 등을 통해 과거 대안공간이 담당하던 기능(인적 네트워킹 및 정보 교류)을 일정 부분 수행했다.
한편 대형 미술관 및 비엔날레들도 2000년대 후반을 통과하며 꾸준히 증가한다. 백남준아트센터는 2008년, 문화역서울 284는 2011년 개관했고, 비자금 파문으로 잠정 휴관됐던 삼성미술관 리움 및 플라토 (구 로댕갤러리)도 약 3년 만인 2010년 재개관했다. 지방미술관 중에서는 2011년 문을 연 대구미술관이 <쿠사마 야요이전>(2013)의 흥행 돌풍 이후 지역을 넘어선 신화를 새로 쓰고 있다. 2013년에는 미술계의 숙원이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개관했는데, 이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전반이 국제적이고 동시대적인 기획으로 무게중심이 조율되었다. 또한 짝수 해마다 의무적 그랜드 투어를 조성하던 대형 비엔날레는 홍보 및 관광 효과를 노린 지자체 간 경쟁에 따라 포화상태에 도달했다. 기존의 3대 비엔날레인 광주(1995~), 부산(2002~), 미디어시티(2000~)에 이어 금강자연예술비엔날레(2004~), 대구사진비엔날레(2006~), 프로젝트 대전(2012~)이 차례로 문을 열었고, 플랫폼 프로젝트(2006~09),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2005~), 인천국제디지털아트페스티벌(2009~10) 등 준(準)비엔날레급 행사들이 양적 팽창에 가세했다. 동원을 위한 동원, 작품과 유리된 주제, 역치를 넘어선 피로감 등 비엔날레의 문제는 반복되고 있지만, 백화점식 전시의 효율성 때문인지 대안 없는 행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마지막으로 규모로는 비주류이나 최근 담론을 주도하는 독립 미술공간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이들의 대두는 스마트폰의 보급과 맞물려 있는데 2010년 하반기 즈음 활성화된 SNS가 인지도 및 트렌드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기 때문이다. 초기의 예로는 2010년대 초 짧고 굵은 존재감을 보인 이태원의 공간 해밀톤이나 꿀풀, 2010년 오픈한 더북소사이어티와 미디어버스의 독립출판 관련 활동들이 대표적이며, 최근의 사례로는 2013년 말에 생긴 커먼센터와 시청각, 2012~2014년 동시다발적으로 설립된 신생 공간들을4 꼽을 수 있다. 청년 세대의 감성에 맞는 감각적인 전시와 탈장르적이고 유연한 태도가 이들의 장점이겠지만, 일부 여론 주도자와 특정 집단의 취향이 (의도했든/의도치 않았든) 배타적인 권력을 형성한다는 것이 이들에게 불편함을 표출하는 주된 이유다. 이런 우려를 종식시키는 것은 이들이 생산해내는 유무형의 결과물이 기존 미술계에 얼마나 긍정적인 자극을 주는가에 달렸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성 제도권에 편입하기 힘든 젊은 작가들의 생존 실험인 신생 공간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귀결될지는 흥미로운 기대를 품게 한다. 새로운 플랫폼과 운영 방식이 (일시적이나마) 신선한 탈주 가능성을 낳을지 아니면 또 다른 진입 수단을 만드는 데 그칠지. 한 가지 희망사항을 덧붙이자면 운영 주체의 자립과 발언 외에 보는 주체의 권리도 고려했으면 하는 것이다. 힘들게 찾아간 관객이 받을 보상이라면 결국 작품과 전시/행사의 질이 아니겠는가. ●

주)
1더 자세한 정보는 다음의 두 글 참조. 반이정, ‘2007년. 사건과 시장의 해. 솔드아웃의 일장춘몽’, 《월간미술》, 2013년 9월, 182~185쪽; 서진수, ‘2007년 한국미술시장의 성과와 과제’, 《월간미술》, 2008년 3월, 164~166쪽.

2이음갤러리(798지구, 2005),아라리오 베이징(지우창, 2005), 표갤러리 베이징(지우창, 2006),갤러리 아트사이드(798지구, 2007), 두아트 차이나(2007, 차오창디), PKM갤러리 베이징(2006, 차오창디), 금산갤러리(798지구, 2007) 등이 대표적이다.

3초기의 대표적인 레지던시 공간으로 1998년에 문을 연 암사동 창작스튜디오(쌈지스페이스의 전신), 2000년에 개관한 영은창작스튜디오, 각각 2002년과 2003년에 설립된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와 고양레지던시를 꼽을 수 있다.

4구탁소, 교역소, 지금여기, 합정지구, 개방회로, 800/40, 노 토일렛 등이 대표적이다. 작가 겸 운영자가 기존 제도에 한계를 느껴 공간을 직접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로 임대료가 싼 지역에 위치하며 느슨하고 열린 공간을 지향한다.

SPECIAL FEATURE 광복 70주년, 한국미술 70년

“이젠 우리가 알아서 뜰거야!”

노형석 《한겨레》 기자
10년 전 필자가 쓴 《월간미술》 특집 기고글의 서두는 이런 코멘트로 시작했었다. 당시 제도권 미술에 냉소하며 대안세력임을 자부했던 청년 미술인들의 구호를 집약한 말이었다. 2015년, 지금 글의 서두는 “이젠 우리끼리 터 잡고 놀거야!”로 바꿔야할 듯싶다. 10년 전 선배들은 대안공간과 비엔날레의 든든한 후원, 새 블루칩 작가군을 확보하려는 화랑업자들의 추파 속에서 도발과 실험을 즐겼지만, 지금 청년작가들은 자기세대들 외엔 별로 우군이 없다. 끼리끼리 놀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자본에 짓눌린 제도권 미술판은 더 이상 그들에게 특별한 눈길을 주지 않는다. 알아서 전시장을 차리고 작가들끼리라도 소통하지 않으면 도통 존재감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내놓은 존재가 된 지금 잉여세대 삼포세대 작가들은 대도시의 변두리에 그들만의 전시장을 만들고 또 만들어낸다. 특히 올해는 ‘자족공간’ ‘자생공간’으로 불리는 신생공간이 30여 곳이나 우후죽순 생기는 바람이 불면서 청년미술판의 또 다른 지형변화가 일어나는 중이다.
10년 전은 젊은 작가군이 쑥쑥 커나가는 ‘벨 에포크(좋은 시절)’였다. 1999년 밀레니엄과 2002년 월드컵을 지나 2005년까지 진행된 시간대는 이른바 K팝과 개념미술의 전형을 만들어내고 시장에서도 컬렉터들의 각광을 받던 시절이었다. 1990년대 장기 불황으로 미술시장이 동면에 들었던 질곡 속에서 당대 청년작가들은 시장의 유통망과 다른 판을 깔고 새 진지를 쌓았다. 왜곡된 근대화가 빚은 산업사회 한국의 기괴한 일상과 사회적 시공간의 잡다한 이미지들을 작품에 녹여넣으며 한국미술판에 새 개성을 불어넣었다. 특유의 미술지형을 생성했고, 시장에도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아쉽게도 이런 흐름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강타하면서 훅 꺼져버렸다. 젊은 작가들은 시장에서 내동댕이쳐졌다. 바로 앞 선배들이 화랑가와 경매장에서 각광받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그들 앞에는 언제 퇴출될지 모른다는 잉여의 공포감이 짓눌러오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지난 3~4년 사이 청년미술판의 주변 환경은 퇴행의 징후들로 넘쳐났다. 90을 바라보는 ‘어르신’ 작가들이 40여년 전 벽지처럼 그린 단색조 그림이 화랑들의 마케팅 공세를 업고 ‘블루칩’ 상품으로 뜨는 기묘한 반전이 일어났다. 반면, 전망을 잃은 젊은 작가들은 귀신과 심령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세월호 침몰과 양극화, 종북몰이 같은 사회적 이슈들이 툭하면 터지는데도, 그들은 과거와 달리 무력하게 관망하기만 했다. 청년미술의 또 다른 숨통이었던 비엔날레와 국공립 미술관들은 정부와 지자체들의 전횡에 따른 작품 검열과 낙하산 인사, 채용 비리 등으로 숱한 적폐를 드러냈다.
상황은 180도 바뀌었다. 청년작가들은 ‘성찰’과 ‘저항’을 잃은 채 눈앞 생계와 잉여의 두려움에 휘둘린다. 더 이상 공모전, 레지던시의 간택만 기다릴 수는 없다. 미술판 바깥의 젊은 작가들은 자구책으로 작업실 겸 전시장을 변두리 지하골방 등에 차려놓고 그들만의 기획전과 아트페어 리그를 구상하고 있다. 하나, 확실한 건 1990년대 이래 청년작가들의 안전판 기능을 해온 대안공간과 작업공간 지원(레지던시), 공모전 등이 또 다른 제도의 벽으로 변질되면서 신뢰를 상실했다는 점이다. 실존의 압박에 휘둘리는 청년작가들은 작업하고 전시할 보금자리부터 꾸리는게 급선무다. 일단은 작가들끼리라도 소통하고 작업세계를 공유 하는 게 긴요해졌다. ‘동시대 새로운 도전과 과제’ 보다 ‘일단 서식할 터부터 잡자’로 꿈이 바뀐 것이다.
지금 청년작가들은 소통의 벽 앞에서 고단하다. 대안을 좇던 10년 전과 달리 현실의 바닥으로 내려앉은 지금 그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장소 특정적인 미술, 사이버 게임과 비슷해지는 미술, 소셜미디어로만 소통하고 담론을 나누는 작가, 기획자들의 기묘한 꿈틀거림을 기존 미술계는 어떻게 받아들이며 소화할 것인가. 임흥순 작가의 노동다큐영화가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은사자상을 받은 성취에서 보이듯, 일부 작가들은 세계 무대에서 약진하고, 한국미술의 위상은 상당히 업그레이드된 것 또한 사실이다. 외부의 도약과 내부의 양극화가 공존하는 미술판의 모순적 상황을 어떻게 역동적인 판으로 탈바꿈시킬지가 과제로 남게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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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_1990년대와 한국현대미술의 조변석개

임근준 AKA 이정우 미술비평
1990년 3월 서울미술관에서 심광현의 기획으로 개막한 <동향과 전망: 새벽의 숨결전>(민중미술 그룹전으로는 드물게 큐레이터십이 발휘된 사례), 10월 예술의전당에서 당대의 다양한 흐름을 한자리에 소환한 <젊은 시각 내일에의 제안전>(심광현 서성록 이준 등 5인이 각자 작가들을 선정해 비전을 겨루는 논쟁적 형식) 개막, 1991년 1월 민중미술가 임옥상의 호암갤러리 개인전, 3월 르네 블록이 큐레이팅한 국립현대미술관의 <테크놀로지의 예술적 전환전>, 1992년 7월 30일부터 8월 3일까지 서울/경주의 힐튼호텔에서 대전엑스포93의 사전 부대행사로 열린 <20/21세기 예술 심포지엄>(국내 논자들에게 무식의 두려움을 일깨움), 1991년 11~12월 대한민국미술대전의 대상작 <또 다른 꿈>의 표절(패스티시?) 논란과 구체제 권위의 몰락, 1992년 5월부터 1997년 7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서 현대미술계의 새로운 토대를 일궈낸 임영방 관장의 리더십, 1992년 12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비평을 본격화한 현실문화연구(윤석남, 김수기, 엄혁 등)의 출범, 1993년 3월 예술의전당 개관에 맞춘 <서울 플럭서스 페스티벌>로 김홍희 큐레이터 데뷔, 4월 개막한 호암갤러리의 <미국 포스트모던 대표작가 4인전>을 둘러싼 논쟁과 허황했던 미술계의 포스트모더니즘 담론 투쟁 종결, 7월 <휘트니비엔날레 서울전>의 충격과 파장, 10월 뉴욕 퀸즈미술관에서 <태평양을 건너서: 오늘의 한국미술전> 개막, 12월 큐레이터 이영철의 평론집 《상황과 인식: 주변부 문화와 한국현대미술》 출간, 대우의 선재현대미술관과 삼성의 호암갤러리가 경쟁하는 가운데, 1994년 1월 쌍용제지의 스카티 광고에 김선정 출연(큐레이터란 단어를 한국사회에 널리 알림), 2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막한 <민중미술 15년: 1980~1994전>(빈사 상태의 민중미술이 ‘역사’로 성급히 정리됨), 3월 페미니스트 미술을 표방한 <여성, 다름과 힘전>에 윤석남, 김수자, 이불, 박영숙 등 참가, 7월 김일성 주석 사망, 8월 호암갤러리에서 <앤디 워홀전> 개막(이때 <인서울매거진>이 등장, 무가지 시대의 도래를 알림), 1995년(“미술의 해”) 2월 국제화랑에서 제프리 다이치의 기획전 <경계 위의 미술> 개최(데미언 허스트의 대표작 <약국>이 전시됨), 5월 아트선재센터 착공 기념 <싹전>(시대를 전후로 양분하는 지표로 기능), 6월 동아갤러리의 <인간과 기계: 테크놀로지 아트전>(제니 홀처, 토니 아우그슬러, 백남준 등 뉴미디어아트를 선봬), 6월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개관과 전수천의 특별상 수상, 6월 금호미술관에서 박모 개인전 개막, 8월 일본위안부 출신 할머니 김순덕 여사 21세기화랑의 그룹전 <못 다 핀 꽃의 외침전>에 출품, 9월 광주비엔날레 출범, 1996년 6월 최정화의 뮤지엄바 ‘살’ 개점, 1997년 3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개원, 9월 큐레이터 하랄트 제만의 지원에 힘입어 제2회 광주비엔날레가 성공적으로 개막, 10월 호암갤러리가 자체 소장품으로 현대미술의 역사를 개괄하는 <전환의 공간전>을 개최, 12월의 외환위기와 해외 거주 청년 작가들의 집단적 귀국, 1998년 외환위기의 한파를 맞은 미술계에서 대형기획들이 줄줄이 취소되는 가운데, 동아갤러리와 벽산갤러리는 폐관, 7월 아트선재센터 개관, 7월 쌈지아트스튜디오(암사동) 출범, 8월 가나아트센터 개관, 세대교체가 급격히 이뤄지는 가운데, 10월 <98 도시와 영상-의식주전> 개막(대성공!), 1999년 2월 대안공간 루프 개관, 4월 대안공간 풀 개관, 9월 예술의전당에서 <99 여성미술제 – 팥쥐들의 행진> 개막, 9월 아트선재센터에서 하세가와 유코의 큐레이팅으로 일본청년현대미술전 <팬시댄스> 개막, 10월 프로젝트스페이스사루비아다방 개관, 그리고 뉴밀레니엄의 도래.
1995년 여름 이후의 한국현대미술에선 전지구화 시대의 당대성을 감지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한국현대미술계도 그간의 양적 팽창을 발판 삼아 질적 도약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던 시절이었다. 20(00)년대의 도래와 함께, 지속적으로 새로운 청년미술가들이 나타났기에, 세대 교체를 통해 구시대의 어두움을 금세 타파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사고에 빠지기도 했다. 크나큰 착각이었다. ●

SPECIAL FEATURE 광복 70주년, 한국미술 70년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미술의 주도권 확보를 위한 대립의 시기

오세권 대진대 교수, 비술비평
1980년대는 한국 미술문화의 양상에서 크게 ‘모더니즘’ 부류와 ‘리얼리즘’ 부류의 주도권 확보를 위한 대립의 시기로 볼 수 있다. ‘모더니즘’ 부류는 1980년대 후반기에 형성된 ‘포스트모더니즘’을 추구한 이들을 포함시킨 것이며, ‘리얼리즘’ 부류는 ‘민족주의’와 ‘민중주의’ 미술문화를 추구한 이들을 말한다.
1980년대 전반기 한국 모더니즘 미술은 1970년대에 형성된 미니멀리즘 미술에 의존하면서 지배구조를 더욱 돈독히 하는 시기였으며 지난 약 20년간 현대미술이라는 이름으로 행한 모더니즘 미술문화의 최대 전성기였다. 그러나 세계 미술문화의 새로운 지형도는 ‘한국적 미니멀리즘 미술’에 대한 자기 합리화 논리에 한계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또한 리얼리즘 미술세력의 급속한 확장으로 위기에 직면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가운데 198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미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한창이던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을 유입함으로써 리얼리즘 미술과의 대응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미술계에서는 초기 포스트모더니즘의 전개 과정을 정리할 때 1985년 ‘난지도’, ‘메타복스’ 등이 ‘탈모던’의 문제를 제기했고, 〈현·상전〉, 〈로고스와 파토스전〉, 〈엑소더스전〉, 〈현대미술의 최전선전〉, 〈상하전〉 등의 표현이 점차 포스트모더니즘 미술표현으로 확대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주로 유학파들에 의해 1980년대 중반기에 소개되다가, 1988년 올림픽을 계기로 확산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어서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은 1980년대 말기와 1990년대 초반에 한국 미술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리얼리즘 미술은 1969년 선언문만 남기고 사라진 ‘현실’ 동인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1979년의 ‘현실과 발언’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일반론이다. 리얼리즘 미술은 1980년대 초기에는 ‘민족·민중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하여 점차 조직적이고 이념화했다. 그러던 것이 1985년 7월 〈20대 힘전〉을 계기로 ‘민족미술 대토론회’가 열렸으며 11월에는 ‘민족미술협의회’가 발족했다. 이로써 1980년대 전반기 난립하던 리얼리즘 미술의 양상을 정리하고, 산발적인 활동을 조직적으로 관리하게 되었으며, 체계적인 미술운동을 위하여 전열을 정비하는 구심점을 만들었다. 그리고 ‘민족미술협의회’가 발족하면서 ‘민족미술’로 불리다가 후에 ‘민중미술’로 불리는 등 이미 그 개념에서 ‘민족’과 ‘민중’의 의미를 포함하는 미술문화운동이었다.
1987년은 리얼리즘 미술의 획기적인 전환점이었다. 특히 총선과 대통령선거 등 사회적 상황들과 연결되면서 집회 현장에서는 깃발그림을 비롯한 벽화, 걸개그림, 만화, 전단과 각종 시각매체가 대중투쟁 현장과 같이하였고, 이것은 사회 현실에 직접 참여하는 선전·선동미술이 되어갔다. 그리하여 대중투쟁의 확산에 따라 걸개그림 등이 리얼리즘 미술표현의 절정을 이루는 가운데 집회 현장에서 열기를 돋우는 미술운동이 되었다. 특히 리얼리즘 미술은 비평의 적극적인 이론적 지원을 바탕으로 삼아 미술운동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며, 조직화·체계화하면서 대중정치 선전사업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대통령선거와 88올림픽 이후 1980년대 말기에는 조직이 노선 문제로 갈등을 겪게 되고 분화되면서 점차 그 힘이 흩어지게 된다.
한편 1980년대 미술문화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부류들이 주도권 확보를 위한 대립 속에서 서로의 이념적 합리화를 위하여 치열한 이론 논의를 하였다. 그리고 이전과 같이 작가가 중심이 되어 미술계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론가들이 앞장서서 미술문화를 제시하고 이끌어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상과 같은 ‘모더니즘’ 과 ‘리얼리즘’ 미술의 주도권 확보를 위한 대립의 시기 속에서 그 변화를 보면 1980년대 초반기에는 미니멀리즘 미술을 중심으로 하는 모더니즘 미술이 활발했으며, 1980년대 중반기에는 리얼리즘 미술이 맹위를 떨쳤고, 1980년대 말기에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이 정착하던 시기로 정리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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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의 70년, 역동의 1970년대

박계리 미술사
지난 10년간의 미술계를 돌이켜보면, 한국현대미술의 역사 중 특히 1970년대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던 시기가 아니었나 자문하게 된다. 단색화 다시 (평가해)보기 열풍이 촉발되었고, 이러한 공격적인 재평가 작업은 역설적인 듯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의 단색화전 성공과 해외미술시장의 호응을 이끌어내면서 단색화 열풍을 다시 불러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부각되는 데는 단색화의 그림자에 가려 있던 1970년대의 다양한 실험적 미술에 대한 관심이 기폭제가 됐다. 학계의 관심에 화답이라도 하듯, 김구림, 박현기 작가의 대대적인 전시가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루어지면서 이 시대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국전이 거의 유일한 등용문이던 시대를 마감하고 민전 시대가 열린 것이 1970년대이다. <한국미술대상전>, <동아미술제>, <중앙미술대전>이 민전 시대를 이끌었다. 신인 등용문의 확장은 미술계의 역동성을 추동해내는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1960년대 말 청년작가연합회전과 회화68, 한국아방가르드협회(약칭 A.G.)가 창립되면서 추상표현주의의 강력한 흐름에서 벗어나 미술에 대한 다양한 실험이 활기차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신체제, S.T. 에스프리 등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젊은 세대들이 잇따라 등장했고, 1972년 한국미술협회가 <앙데팡당전>을 신설해서 젊은 세대에게 실험 무대를 제공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물질과 상황에 대한 실험을 지속해왔던 일련의 움직임들과 흐름을 같이하던 A.G.와 S.T. 등 젊은 세대들은 미술 개념에 대한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였다.
1970년대는 1975년 ‘에꼴 드 서울’의 등장을 중심으로 전반기와 후반기로 구분되곤 한다. 전반기는 A.G., 신체제, S.T., 에스프리 등에게 무대를 제공한 <앙데팡당전>의 실험적인 시도가 한창이던 시기이다. 미술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질문과 물질에 대한 실험이 매재의 확대를 자극하고 있었다. 이러한 미술개념의 확대는 이전의 장르개념인 ‘회화’ 또는 ‘조소(조각)’라는 용어에서 벗어나 ‘평면’과 ‘설치’와 같은 다양한 매체를 포함할 수 있는 용어를 확산시켰다. 이러한 움직임은 탈회화화, 탈조각(조소)화의 움직임으로 확장되어갔다. 이와 더불어 장소와 환경, 공간과 시간, 상황과 예술이라는 미술의 존재론적 화두를 파고 들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퍼포먼스도 활발해지고, 대지미술과 같은 화이트 큐브 바깥에서의 미술도 시도되었다. 이렇듯 미술이 확장되던 전반기와는 달리 1970년대 후반기는 다시 회화라는 평면구조로 환원되면서 단색화가 대두되기 시작한다. 회화로의 회귀라는 측면도 있지만 그리지 않는 회화라는 점에서 드로잉의 전통적 맥락보다는 1970년대 전반기의 개념미술과의 연결선상에 있다. 단색화의 부각은, 1975년 일본 도쿄화랑에서 열린 <한국 5인의 작가-다섯 가지 흰색전>에서 촉발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막혔던 일본과의 교류가 열리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한 일본미술시장과의 관계 속에서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리는 행동의 반복을 통해 그린다는 행위에 대한 본질적 물음은, 무아(無我)와 무위(無爲)의 세계를 지향하며 정신의 문제와 자연세계로 화두를 확장시켰다. 한국 단색화는 당시 국제적인 흐름이었던 개념미술, 미니멀리즘의 자장 속에서 국제미술계와 공존할 수 있는 소통력을 지니면서 화단에 강력한 자장을 형상해냈다.
이렇듯이 1970년대는 국제 교류의 포문이 열리면서 남관, 이성자, 이응로 등 파리를 근거로 활동하는 작가들이 선전이 알려지기도 하였다.
1970년대 말이 되면 다시 표현의 회복이라는 새로운 기류가 싹트기 시작한다. 1978년의 ‘사실과 현실’ 그룹은 거창한 정신세계가 아닌 일상으로 눈을 돌려 극도의 사실주의 기법으로 대상을 묘사하였다. 이들의 화면은 하이퍼리얼리즘 또는 포토리얼리즘과 연계되면서도 비판적 리얼리즘과 초현실주의적 화면을 생산해내며 또 다른 세대의 등장을 잉태하고 있었다.
이처럼 역동적이던 1970년대에 대한 관심이 21세기에 들어 다시 부각되면서, ‘짝퉁’인가 아닌가 하는 원형에 대한 기존 논의에서 벗어나, 국제사회와의 동시대성이 갖는 소통의 확장성에 대한 주목과, 타자적 시선이 포착해내는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환기가 1970년대에 대한 논의를 보다 풍성케 하고 있다는 점에서 1970년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SPECIAL FEATURE 광복 70주년, 한국미술 70년

청산되지 못한 식민주의, 좌절되는 우리미술의 정체성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비평
식민지를 거쳐 6·25전쟁을 막 치러낸 1954년은 전쟁의 상흔과 공포, 가난 그리고 분단 속에서 신음하던 시기였다. 당시 남한의 미술계는 식민미술의 청산, 민족미술의 수립, 전통미술의 계승, 그리고 서구미술의 수용이라는 여러 과제를 동시에 껴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해보였다. 우선 광복 이후 정권을 잡은 이승만 정부는 친일 청산과는 거리가 멀다. 이후 분단과 전쟁, 쿠데타를 통해 반민족, 친일세력들이 권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왜곡된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이는 그 이전 식민지 시기의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현재 한국 미술계에도 여전히 짙게 드리워져 있다. 전쟁 후의 한국 화단에는 일제강점기의 화풍과 영향이 변함없이 온존해 있었고 한편으로 젊은 세대들은 서구미술에 급속히 경도되었다. 우리는 한 번도 서구를 (직접적으로) 만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 세계의 다른 피식민지 국가의 민중과 달리 서구를 대립과 투쟁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구원과 동경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이 매우 특이한 점이다. 서구가 어떤 나라인지 분별할 수도 없었으며 당연히 서구미술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검증 절차도 없었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저 서구에 대한 열렬한 추종만이 있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일제강점기 동안은 일본미술 혹은 일본화 된 서구미술의 어법을 충실히 모방했다가 광복과 전쟁 이후에는 다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미술 어법을 추종해왔다는 얘기다. 이렇듯 식민지 청산에 실패함으로써 우리의 독자적인 미술문화를 일구는 일은 무척이나 지난했으며 끊임없이 좌절되었다.
친일세력을 등에 업고 집권한 이승만 정권은 4·19혁명으로 마감되었다. 독재정권이 시민의 힘으로, 민중의 이름으로 꺾인 것이다. 1960년대는 이렇게 4·19혁명 정신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4·19를 주도한 젊은 학생들은 일제 식민지의 유산과 단절된 세대였으며 가장 민감한 10대 때 4·19혁명이라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민중적 에너지’를 직접 보고 경험했다. 그러나 이내 박정희의 집권과 1965년 한일협정 체결을 통해 이른바 굴욕적인 한일 외교 관계의 정상화 역시 접한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두 개의 가치를 본능적으로 가슴에 품고 자란 이들”(강헌)이 후에 1970년대 청년문화를 태동시키는 주체가 된다. 그리고 이 영향이 바로 1980년대 미술을 만들어낸다. 나로서는 오윤이 그 대표적 존재라고 생각한다. 마치 대중음악에서 신중현과 김민기의 존재처럼 말이다.
한국의 20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보다도 4·19혁명이었다. 단 한 번도 공화주의 공화제의 가치를 경험한 적이 없었던 한국인에게 4·19혁명은 민주주의의 교과서였던 것이다. 한편 4·19혁명을 시작으로 열린 1960년대는 전후의 폐허와 허무를 딛고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근대적 가치에 대한 열망이 확산된 시기이자 곧바로 이어진 5·16군사정변으로 인한 굴절과 좌절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는 제 1·2·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시대이자 정치적으로는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시대였다. 재벌 대기업과 수출 중심 경제구조의 원형이 바로 이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에 탄생했다.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이 1960년과 1961년에 연달아 일어난 그 시기, 연간 한국 총수출액은 100만 달러를 간신히 넘는 수준이었다. 산업적 기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다. 따라서 박정희 정부, 즉 제3공화국의 어젠다는 ‘조국 근대화’였고, 그가 지은 노랫말처럼 ‘잘살아보세’였다. 박정희 체제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친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시대를 일컫는다. 이념적으로는 반공이데올로기가 지속되면서 조국 근대화와 민족주의 이념이 강화된 시기다. 박정희는 문화를 집권 연장과 독재 강화 그리고 경제 성장의 도구로 인식하였기에 문화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시간이 지날수록 확대되었고 이에 따라 문화정책도 확대되고 강화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문화예술 전반에 광범위하게 개입했으며 정치적 통제와 활용방법 매우 구체화했다. 그에 따라 작품의 창의성이나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 및 진보적 성향의 예술이 싹을 틔우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의 재임 기간에 문화산업은 철저히 사전검열을 받아야 했으며 표현의 자유는 극도로 제약당했다. 정권 역시 예술작품이 정권의 홍보물에 머물 것을 요구했으며 정권의 이데올로기인 반공과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차원에서만 기능하기를 암묵적으로 강요했다. 대다수 미술작품이 그에 순응해서 제작되었다.
1969년 9월 14일 국회는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위해 3선 개헌을 의결한다. 이후 11년을 규정짓는 불행한 정치적 사건이자 이로 인해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어둡고 불행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1960년대는 그렇게 저물어갔으며 1970년대는 또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참혹한 시대에 단색주의라는 화풍이 발아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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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 잃어버린 기회

조은정 미술사
광복 이후부터 6·25전쟁이 휴전으로 종식되기까지의 시기는 한국 현대미술사의 맥락에서 선택적 이데올로기의 공간이었다. 친일(親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맞은 광복은 친일청산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기 전 반공이데올로기에 편입되었다.
광복을 기념하기 위한 ‘해방기념예술대축전’에 당시 남쪽에 거주하던 미술인 대다수가 포함되어 있던 조선미술건설본부는 <해방기념미술전>을 열였다. 전시를 마친 1945년 11월에 미술인들은 ‘조선미술가협회’를 창설하고 고희동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정치에 대한 절대 불간섭과 엄정 중립, 미술문화의 독립적 향상을 꾀함, 민족미술을 창조하여 건국에 이바지함’ 등이 강령이었다. 하지만 고희동이 회원의 의사에 관계없이 정치적 성향이 강한 비상국민회의에 참가하고, 1947년 조선문화단체총연맹에 맞선 우익단체인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에 협회를 가입시키자, 탈퇴한 몇몇 회원은 조선미술가동맹과 조선조형예술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진보적 미술인들은 다시 단체를 통합하여 조선미술동맹을 결성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조선미술가협회’는 협회명을 ‘대한미술협회’로 변경함으로써 대표성을 획득하고자 하였다.
광복과 함께 일제강점기의 구태를 벗고 새로운 화단을 설계하려던 미술계는 당시 사회 전반이 그러하였듯 이데올로기에 의한 분열을 피할 수 없었다. 친일의 상대편에 선 반제국주의적 성격의 무정부주의나 사회주의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강력한 반공정책을 편 미군정에 의해 억압되었던 것이다. 반공은 친일의 면죄부가 될 수 있었고, 이것은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구축된 화단의 헤게모니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로 이동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정부는 정권 유지를 위하여 강조된 반공이념의 실현처로서, 미술가들의 좌익 참여 금지 방편으로 〈국전〉을 이용했다. 작가들이 좌익에 경도되는 경로를 차단하고, 정치적 혼란에 따른 미술·문화정책의 공백을 메우는 동시에 이른바 민주진영이라 일컬을 수 있는 미술가들에게 합법적인 활동무대를 제공하는 데 〈국전〉 설치의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친일미술인으로 낙인찍혔던 김인승, 윤효중, 이상범 등이 전후 재개된 <국전>의 심사위원으로 부각된 것은 그러한 실상을 드러낸다.
6·25전쟁은 광복 이후 남과 북이 만난 유일한 지점이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하였다. 미술인은 동시에 남과 북 두 체제를 모두 경험했고, 두 권력 아래 미술작품을 생산하였다. 이념전이었던 6·25전쟁의 특성상 선전화(宣傳畵)가 많이 제작되었으며, 국가 동원체제 아래 미술은 어느 때보다 국가의 부름에 강하게 응답한 시기이기도 했다. 인민군 점령기간 동안 미술인들은 동원되었고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서울이 수복되자 대한미협은 ‘화단 수습과 전시하의 국가정책에 호응할 것’을 천명하였고 인민군 점령기간에 인민군에 협조한 미술인들에 대해 부역자 심사도 하였다. 서울에 잔류하던 미술인을 임의로 정한 원칙에 따라 부역 정도를 구분해서 법적인 제재를 받을 것이 뻔한 조사위원회에 회부하였다는 사실은, 이들 도강(渡江)파에게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미술동맹에서 이 미술가들을 조직하고 지도하던 미술인들은 이미 모두 월북한 뒤였기 때문이다. 6·25전쟁은 국가가 미술을 통제할 수 있고 동원할 수 있으며 그 힘에 반할 때는 처단할 권력을 부여하였다. 전쟁에서 미술인은 종군화가로 국가에 봉사하였고 국가가 요구하는 미술작품을 생산하였다. 전쟁의 경험과 공산주의적 양식은 리얼리즘, 자유주의 양식은 자유주의 국가의 미술, 즉 추상주의라고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파악되었다. 민족미술에 대한 합의와 이념적 결집을 이루지 못한 광복 이후 화단에서 이데올로기에 의한 분열로 인해 새로운 민족적 미술양식은 산화되었다. 국가 통제의 반공주의 앞에서 미술의 사조나 도덕적 명분은 생존의 법칙을 넘어설 수 없었다. 반도덕적 기회주의의 산물인 미술계 내부의 권력은 자본의 논리, 즉 미술시장에서 그의 작품이 ‘상품’의 가치를 가질 수 있는 토대를 이미 이념의 분열을 통해 배양하였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