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창작과 비평의 조화

이번 호부터 책의 형식, 즉 디자인을 살짝 바꿨다. 우선 본문 글씨 크기를 조금 키웠다. 때문에 각 꼭지별로 글 분량이 약간씩 줄어들었다. 글씨가 너무 작다는 의견을 종종 들었던 탓도 있고, 글 쓰는 필자나 읽는 독자 모두에게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은 마음 또한 없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용마저 느슨해지지는 않았다. 필자 섭외부터 사진하나 선택까지 더욱 심사숙고했다. 이 밖에도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구석에서 변화를 시도했다. 이 모든 게 결국 책의 가독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다. 어떤 평가와 반응이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그리고 예전 ‘리뷰’ 꼭지에 ‘크리틱’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대신 ‘리뷰’는 ‘크리틱’과 ‘프리뷰’ 사이에 사진 한 컷으로 간략히 처리했다. 부언하자면 ‘크리틱’ 꼭지는 여기에 선정된 작가/전시 보다 이론가/비평가에게 방점을 찍고자 하는 의도에서 개발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평’의 기능과 위상을 더욱 강화하고자 함이다. 지금까지 ‘리뷰’는 해당 전시의 이해당사자, 즉 작가 개인이나 전시기획자 혹은 갤러리나 미술관 관계자 위주였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거기에 선정된 것만으로 뭔가 특별한 대접(?)을 받거나 마치 좋은 전시로 공인받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앞으로 ‘크리틱’은 선정된 전시보다 글 내용과 필자에 권위가 실릴 것이다. 어떤 전시가 됐던 날카로운 분석과 냉철한 비판을 수용할 것이다. 이른바 ‘주례사 비평’을 지양하겠다는 말이다. 아무래도 이번이 처음이라 그 성과가 단박에 드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회를 거듭할수록 꼭지의 성격이 차츰 부각될 것으로 기대한다.
창작하는 작가도 그렇지만 특히 미술이론을 전공한 사람은 몇 배 더 먹고살기 힘든 게 현실이다. 교수나 학예원구원 같은 안정된 직업이 없으면 더욱 그렇다. 그러니 세컨드 잡 없이 오직 전업 글쟁이로만 생계를 유지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런 가운데 《월간미술》은 지금까지 단 한차례 지연이나 누락 없이 모든 필자에게 소정의 원고료를 제때 지불해왔다. 이건 자화자찬이 아니다. 너무나 기본이고 당연하며 심지어 윤리적인 문제라서 하는 말이다. 하지만 제작환경이 열악한 여타 미술잡지사는 꼭 그렇지 못한 걸로 알고 있다. 안타깝다. 이처럼 대부분 미술이론가의 원고료 수입은 불안정하다. 게다가 너무 헐값이다. 조속히 정상적으로 현실화되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창작과 비평의 조화가 이뤄지고 궁극엔 우리 미술 판의 생태계가 건강해질 것이다.
편집장 이준희 dam2@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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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_CT이태호
명지대 교수, 문화예술대학원장
테마기획 <공재 윤두서>의 기획 단계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열린 동명의 전시를 제안한 주역이다. 2014년 12월 24일 진행된 ‘공재 윤두서에 대한 모든 것’ 제하의 강연은 인산인해였다는 후문. 특별히 《월간미술》을 위해 새롭게 발굴한 윤두서 일가의 작업을 소개해 주었다. 한 편의 글에 아쉬움이 남는 독자에게 반가운 소식이 있다. 진경산수화에 등장한 실경을 직접 답사한 연재글을 《월간미술》을 통해 곧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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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0727김준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2012년에 이어 올해에도 예술과 과학의 접점을 탐구하는 비엔날레급 행사 <프로젝트대전 2014>를 진두지휘했다. 미술전문지 《가나아트》 기자로 미술계에 입성해 사비나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등에서 일했다. 민중미술, 분단미술, 공공미술, 액티비즘 등을 주제로 공공영역에서 예술적 실천을 위한 다수의 전시기획과 미술 평론활동을 선보였다. 2007년 석남미술상 젊은 이론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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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근혜임근혜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과장
작가 리경의 일본 개인전 소식과 <아프리카 나우>에 대한 주요 정보를 제공해 줬다. 홍익대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런던대학교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큐레이터십 석사 학위를 받고 돌아와 2009년 영국 현대미술을 다룬 《창조의 제국》(지안출판사)를 냈고 3년 후에 개정판을 출간했다. 다시 유학길에 올라 영국 레스터대학 박물관학과에서 ‘한국의 문화정책과 미술관 운영’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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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대학미술교육의 가능성을 말하다

지난 12월 6일 서울 서초동 한원미술관에서 대학미술협의회 주최로 학술토론회가 열렸다. 4시간에 걸쳐 난상토론 형식으로 진행된 이날의 주제는 ‘미술대학과 대학미술교육의 문제점 및 개선방안’이었다. 사회자 김노암(문화역서울 284 예술감독)의 진행으로 김태호(서울여대 교수), 임근준(미술평론가), 류장복(작가), 강영민(작가)이 참여해 허심탄회하고 진지한, 그리고 때로는 격론에 가까운 토론을 벌였다. 주제 자체가 별로 새로울 것 없는 해묵은 난제였기에 자칫 잘못하면 미술대학 성토대회로 끝나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그럼에도 현황의 문제점을 다시금 진단하고, 보다 나은 대안을 모색하는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기에 애써 마련한 토론회였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참여자들은 상황에 대한 진단과 해결 방안에 서로 크고 작은 온도의 편차를 보였다. 결과적으로 ‘난상토론’의 기대감에 걸맞은 토론회가 되었다.
이날 청중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주최 측의 홍보와 독려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겠으나 개인 작업을 주로 하는 미술인의 성향도 한몫했다. 장르의 속성상 공동작업을 하는 연극, 영화, 무용과 달리 개개인이 개별적으로 대응, 대처하는 것이 미술계가 대물림한 일처리 방식이 아닌가 싶다. 참고로 아주 드물게 전국의 미술대학 구성원들이 함께 한 사례가 있다. 2007년 7월 6일 고등학교 내신에 음악, 미술, 체육을 제외하겠다는 교육부 정책에 반대하기 위한 광화문 집회. 이는 미술대학에 재직하는 전임교원들이 유사 이래 가장 많이 모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2011년 3월 18일 최초의 미술대학이 설립된 지 65년 만에 교육정책 및 교육환경 개선을 기치로 비로소 출범한 <전국 미술・디자인계열 대학장협의회>가 있다. 실상은 취업률을 전제로 한 ‘대학평가 반대’가 당시 가장 중요한 구심점이었다. 이처럼 시급한 현안에만 마지못해 대응하는 안이한 상황인식과 대처, 그리고 전반적인 무관심이야말로 대학미술교육에서 가장 크고 시급한 선결과제 중 하나이다.
이날 토론에는 교육의 이념, 목표부터 교과과정의 운용, 학생 선발을 위한 입시제도 등 교육 내용에 해당하는 부분부터, 실기공간과 설비, 장학제도, 졸업 후 진로 등 교육환경과 여건에 해당하는 부분까지 두루 상정되었다. 그중 특히 현행 입시제도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구체적인 논의가 진행되었다. 수험생의 ‘창의성’과 ‘개성’ 파악이라는 미명아래 검증되지 않은 시험을 위한 시험, 본유의 자질보다는 아이디어 파악에 그치는 시험이 무수히 자행되어, 오히려 사교육을 조장하는 풍조를 나았다는 비판이 대저 주류를 이루었다. 대안으로는 지나치게 복잡하고 세분화된 실기시험을 지양할 것. 기초실기능력에 대한 보다 명확한 개념을 설정할 것. 이에 따라 가급적 단순하고 평이한 방식으로 기본적인 소양을 평가할 수 있도록 하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아울러 국·영·수 중심의 입시체계에 눌려 고사하다시피한 중등교육과정의 미술교육을 정상화하는 일, 즉 ‘창의성 교육’으로서의 ‘미술 공교육 활성화’야말로 대학미술교육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문화를 일구는 데 크게 기여할 것임을 몇몇 토론자가 역설했다. 또 이를 위한 가장 실질적인 대책으로 일반 대학의 내신에도 미술교과를 일정부분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데, 미술대학 진학을 결정하는 순간부터 자신과는 무관한 내용을 그리도록 강요받는 게 현행 입시제도의 단적인 폐해이다. 대다수 학생이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입시준비를 통해 잘못 형성된 사고와 태도, 습관 등을 교정하느라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현실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이는 지극히 비생산적이고 전근대적인 양태이며, 우리나라의 대학미술교육은 물론 전반적인 시각예술 발전에 가장 크고 오래된 걸림돌이라는 점에 참석자 모두 동의했다.
또 다른 쟁점들도 대두되었는바, 그중 하나가 미술대학 무용론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는 오히려 미술 현장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젊은 작가나 외부 강사들을 주축으로 하는 소규모 교육프로그램과 중견 작가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도제식 교육의 활성화 방안이 거론되었다. 아울러 참석자들은 미술대학 자체의 교육환경 개선을 위한 능동적인 노력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교육정책의 막강한 영향력과 그에 대응하는 대학 구성원들의 사전 준비와 결집의 필요성에도 공감대를 이루었다. 무엇보다도 정책을 입안하는 기관에 미술전문인력이 배제되어 있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이어서 대학 관계자들에게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처하고 구체적 해결방안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이번 토론회는 대학미술교육의 문제점들에 대한 명확한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차원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미술계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문제의식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이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과 문제제기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대학미술교육의 연장선상에서 미술 현장에 대한 실질적이고, 생산적이며, 지속가능한 개입과 실천을 위한 ‘미술인 협동조합’을 결성해야 하며, 한걸음 더 나아가 시민사회 문화 활동의 일환으로서 미술교육의 가능성에 대한 추후 논의를 다짐하며 마무리되었다.
윤동천 서울대 교수, 대학미술협의회 회장

Hot People 이대형 현대자동차 아트디렉터

대기업 아트마케팅의 첨병

미술에서 주목받으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아이디어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양성을 하나로 응축할 수 있는 힘을 구축해야 한다. 무엇보다 도전해야 한다. 큐레이터 이대형은 끈질기게 위험요소를 무릅쓰고서라도 과감하게 일을 ‘저지르는’ 배짱 좋은 큐레이터다. 이대형은 아트사이드의 큐레이터로서 미술계에 발을 들이면서 국내에 중국현대미술 작가를 다수 소개했다. 이른바 ‘아시아통’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다양한 전시기획 경력을 쌓던 그는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그곳에서 쏟는 관심은 중국, 일본미술에 국한되었다. 그때 “한국 작가들을 소개하는 데 올인해야겠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그의 관심은 한국현대미술이라는 일관된 지점을 지니지만 이를 보이는 큐레이팅 방식은 끊임없이 변모해왔다.
미술시장이 한창 호황을 누리던 2007년, 그는 특정 작가들만을 주목하는 일방향적 시장 프레임에서 벗어난 전시를 구상했다. 2008년 이대형이 기획한 <블루닷아시아>는 신진 작가를 발굴하면서 “큐레이터의 눈을 통해서 작품을 봐야 합니다”는 귀에 쏙 박히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전시는 성공적이었다. 젊은 작가들에 대한 투자가 급증했다. <블루닷아시아> 이후 진행한 은 한국미술을 국제적으로 알린 대표적 전시로 손꼽힌다. 미국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초래된 금융위기 이후 예산이 80% 가량 축소된 상황에서 런던의 사치갤러리에서 진행한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경제 난항 속 수많은 위험요소를 안고도 그는 전시를 강행했다. 강단 있는 기획력으로 25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관람객을 이끌어냈다. 이에 전시는 2010년 <코리안 아이-환상적인 일상>으로 이어졌다. 2012년에는 사치 갤러리에서 직접 작가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동명의 전시가 이뤄졌다. 이후 이대형은 서구와 한국현대미술의 고리를 넘어서 세대 간, 장르 간 교류에 초점을 맞춘 <코리안 투모로우>, 한국 여성작가의 범주화를 거부하는 <코리안 우먼 노마딕 코드> 등 다채로운 기획을 꾸준히 했다.
현재 현대자동차 아트디렉터로서 그의 업무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의 연속이다. 해외 큐레이터, 장르, 세대 간 협업을 꾀하던 그는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과 기업이 두루 협업할 수 있는 환경에 서있다. 현대자동차는 정의선 부회장이 2011년 브랜드 슬로건을 ‘모던 프리미엄’으로 내세우면서 중장기적으로 다양한 문화 사업에 투자해왔다. 마케팅팀이 오랜기간 다져온 문화 융성의 토양위에 그가 함께하게 된것이다. 이대형은 마케팅 사업부 조원홍 전무 이하 다양한 인력과 함께 큐레이팅 환경을 조성하며 방향을 잡는 역할을 하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2013년부터 10년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후원한다. <올해의 작가상> <젊은 모색> 의 틈바구니 속에서 비교적 지원이 뜸한 중진작가를 중점적으로 지원한다. 그 첫 번째 작가로 이불의 전시(2014.9.30~3.1)가 열리고 있다. 이 외에도 올해 국내외적으로 계획된 프로젝트 중 눈여겨볼 만한 것들이 있다. 우선, 2025년까지 10년간 진행할 테이트 모던 미술관 터바인홀의 전시가 있다. 또한 미국의 한 미술관과 10년간 파트너십 체결했으며, 전 세계 수억 명의 뷰어를 지닌 미디어 회사와의 아트티비 프로그램을 계획 중이다. 이 프로그램은 약 30분간 세계를 대표하는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을 심층인터뷰 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작가 하나하나의 소개보다 플랫폼 자체를 구축해 토양을 다져야 작가, 큐레이터 등이 발굴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결국 미술계에 또 하나의 마케팅 플랫폼을 열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이대형은 “현 시점에서 큐레이팅은 이질적인 요소들의 방정식을 만들고, 그 사이의 연결성을 구축해 나가는 방향으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금 그는 새로운 환경에서 또 다른 방정식을 풀어가고 있다. 맥락을 이해하고, 판을 분석하는 안목이 큐레이터로서 그가 새로운 방식을 확장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아닐까.
임승현 기자

외관

강남 도산대로에 위치한 현대모터스튜디오 외관. 3층에서 5층에 이르는 쇼윈도에 ‘카 로테이터’에 매달린 자동차가 설치되어 있다. 문화예술공간 역할을 전면에 내세운 국내 최초 자동차 브랜드 체험관이다.

이 대 형 Lee Daehyung
1974년 태어났다. 홍익대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큐레이토리얼 스터디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1년 아트사이드에서 열린 <5인의 중국 아방가르드 작가들전>을 시작으로 지난 13년간 서울을 넘어 런던, 뉴욕, 베이징 등에서 열린 다수의 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큐레이팅 회사인 Hzone을 설립했고, <코리안 아이>와 등의 굵직한 전시를 기획했다. 현재 현대자동차 아트디렉터로 활동하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과 테이트모던의 파트너십 프로그램을 성사시켰다.

 

CURATOR’S VOICE

생각하는 손 〈고 김근태 3주기 추모전〉DDP 갤러리 문 2014.12.4~21
미술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추모’할 수 있을까?
한 인물이 아니라 그가 전하고 싶었던 것, 자신의 육신을 돌보지 않고 꼭 이루려 했던 것, 그가 더 많은 이들과 공감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고민했다. 우리는 그의 ‘따뜻한 시장경제’라는 화두에 공감했다. 김근태 서재공간을 통해, 서른 개가 넘는 기술자격증으로 상징되는 노동현장의 청년 김근태가 ‘따뜻한 시장경제론’으로 나아가는 발자취를 되짚어 봄과 동시에, 미술인들은 이를 화두로 우리시대의 노동문제를 작품으로 풀어냈다. 이를 통해 현대문명이 잃어버린 ‘생각하는 손’의 부활을 꿈꿨다.
작가들을 초대할 때, 2가지 기준이 있었다. 하나는 고 김근태선생과 생전에 친했던 미술가들 보다는 잘 몰랐지만 김근태 정신을 공유할 수 있는 작가들과 함께 하고자 하였다. 김근태 정신의 확장에 대해 고민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의 화두와 관련되어 ‘노동’ 문제에 대하여 지속적인 작업을 하고 있는 미술가들과 함께 하고자 하였다. 특히 현재 각각의 현장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생각하는 손’들과 같이 하고 싶었다. 돌아가신 과거의 고 김근태선생이 아닌 지금 현장에서 김근태의 정신이 여전히 유효한가 묻고 싶었다.
김진송, 박서원, 배윤호, 심은식, 안지미, 옥인콜렉티브, 이부록, 리무부아키텍쳐, 이윤엽, 임민욱, 전소정, 정정엽, 콜트콜텍기타노동자밴드, 이렇게 많은 작가들이 함께 해주셨다. ‘생각하는 손’이라는 화두가 함축하고 있듯이, 이번 기획에서는 미술 장르 간의 차별적 가치를 주지는 않았다. 영상 및 설치 작가, 화가뿐만 아니라 목수 김씨가 초대되었고, 이번 전시 도록을 디자인 한 안지미, 전시 관련 시각디자인을 총괄한 박서원은, 갤러리 안에 전시된 다른 작가들과 나란히 참여작가로 소개되었다.
참여 작가들도 장르를 넘나들었다. 리무부아키텍쳐는 재활용된 나무들도 ‘근태가 살던 방’을 꾸몄다. 유품들이 낱개의 자료로 존재하다, 이 공간에 놓여짐으로써 김근태로 부활하는 과정을 체험할 수 있었다. ‘파견 미술가’ 이윤엽은 노동 운동의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생각하는 손’으로의 부활을 꿈꾼다.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콜트콜텍기타노동자밴드(이하 콜밴)’, 에서도 이윤엽의 손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생각하는 손을 지닌 노동자들도 당당히 예술가로서 초대되었다. ‘노동자가 예술가’, ‘노동이 예술’이라는 개념이 싹트고 있는 콜밴은, 농성 도구로 구축된 설치작품을 통해 자신들이 ‘생각하는 손’으로 변모되어가는 과정의 역사를 보여주었다. 희망지킴이의 <쌍용차 해고노동자 자동차를 만들다, H-20000 프로젝트>도 전시되었다. H는 Heart를, 20000은 자동차란 이만개의 부품이 조립되는 고도로 정교한 과정임을 상징한다. 전시 오픈날에는 코란도를 만들었던 쌍용자동차의 이창근실장이 예술가로서 무대에 올라 노동자이자 장인이었던 자신들이 코란도를 만드는 과정은 ‘생각하는 손’이 부활하는 과정이었음을 이야기하였다.
옥인콜렉티브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콜밴’의 상처들, 배윤호가 기러기 아빠와 주말 부부들에게 보내는 화두. 가족을 위해 떠나지만 결국 정주하지 못하고 쓰러져 죽을 우리 세대들에게 보내는 화두의 쓸쓸함에 대하여, 임민욱, 정정엽은 ‘이들의 상처를 어떻하지?’ 되묻게 하였다. 정정엽은 <생각하는 손>이 꿈꾸는 세상은 연약한 것, 소심하고 섬세한 것, 소수의 생명이 함께 노래하는 세상임을 이야기 하였고, 임민욱은 추모전 개막 퍼포먼스를 통해 김근태의 마음을 담아냈다.
이번 기획을 준비하며 계속된 질문은 ‘애도’를 표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미술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추모’할 수 있을까? 였다. 말이 가장 위로가 된다고 하지만, 말로 해도 다 설명되지 않는 것, 다 말할 수 없는 것, 말로는 정의내릴 수 없는 것을 미술로는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미지로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은 관람객들에게 이야기를 각인시키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의 고민과 고뇌에 우리가 보여주는 이미지가 섞여서 또 다른 열린 시각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다양한 성향의 매체가 이번 전시를 각자의 시선으로 읽어내고, 다양한 연령의 관객들이 찾아온 전시장 풍경이 기획자들을 행복하게 했다.
박계리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초빙교수

 

HOT ART SPACE

가나_이이남 (7)

이이남 개인전
2014.12.16~2.8   2014.12.16~1.31
<다시 태어나는 빛>으로 명명된 이이남의 개인전이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와 가나아트 부산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애니메이션 작업과 더불어 오브제를 영상과 혼합하고 동서양 명화를 적용한 작업을 선보인다.
사진 박홍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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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중 (2)
김근중 개인전
고려대학교 박물관 2014.12.8~1.11
김근중의 개인전 <꽃, 이전 이후>는 탈형상을 선언했던 작가의 근작을 선보이는 자리다. 고려대학교박물관과 금산갤러리가 공동으로 펼치는 <한국화 예찬 시리즈>의 포문을 여는 전시. 생명을 잉태한 씨앗부터 화려한 꽃을 피우기까지의 모든 요소가 캔버스를 메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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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2)
AIA: 개인으로부터의 정치전
김해문화의 전당 윤슬미술관 2014.12.17~2.28
한국, 대만, 홍콩, 마카오, 중국, 일본 아시아 6개국 작가가 참여한 <AIA(Asia Independent Art): 개인으로부터의 정치전>은 각국에서 10여 년 동안 활동한 독립적인 미술단체가 모인 전시다. 각기 다른 문화를 가진 아시아 국가 단체의 네트워크를 위한 새로운 대화법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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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1)

강경구 개인전
스페이스 K_서울 2014.12.4~1.22
10여 년 전 인도를 여행한 작가는 갠지즈 강에서 삶과 죽음이 교차해 떠다니는 광경을 목격했다. 작가는 그 사유의 결과물이 바로 개인전 <浮游(부유)하다>라고 밝힌다.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 그저 부유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역사주의적 맥락에서 조명한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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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미술관
왕칭쑹 정연두 2인전
대구미술관 2014.9.20~2.1
아시아 현대사진의 단면을 조망하는 전시로 한국의 정연두와 중국의 왕칭쑹의 작업을 선보인다. 정연두는 서울의 한 아파트에 사는 32가구의 가족사진을 비롯해 97점을 왕칭쑹은 개방 이후 자본주의의 거센 풍파를 맞고 있는 중국의 현실을 보여주는 작업 16점을 출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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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권
김준권 개인전
아라아트센터 2014.12.10~29
작가의 30년 목판화 화업을 정리하는 전시로 <나무에 새긴 30년>이란 타이틀 아래 300여 점을 아라아트센터 전관에서 선보였다. 홍익대 회화과 재학 중이던 작가는 1980년대부터 목판화에 천착했다. 또한 동명의 화집이 출간되어 전시의 의의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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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첸웬링 개인전
표갤러리 2014.12.19~2.13
이른바 ‘차이니즈 아방가르드’ 1세대 작가로 불리는 첸웬링의 개인전은 로 명명됐다. 중국의 역사와 전통에서 소재를 끌어오는 그의 작품에는 돼지,소, 물고기 등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공통체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게끔 하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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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원-1

모바일홈 프로젝트
송원아트센터 2014.11.21~2014.12.19
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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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관두비엔날레
국립타이베이예술대학 관두미술관 2014.9.26~2014.12.14
국립타이베이예술대학(國立臺北藝術大學)의 관두(關渡)미술관이 주최하는 <2014 관두 비엔날레>의 주제는 ‘識別系統(식별계통, Recognition System)’.
이번 비엔날레는 타이완을 비롯, 한국, 일본, 인도네시아, 인도, 중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의 커미셔너 10명이 각각 1인의 작가를 추천하여 진행됐다. 한국에서는 설원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작가 장석준과 함께 참여했다. 타이베이=황석권 수석기자

SPECIAL FEATURE 세계 미술현장의 새 지형도

이른바 ‘세계 미술계’는 어떻게 변화하는가? 2015년 새해를 맞아 《월간미술》은 변화에 주목한다. 우리가 미술현장이 ‘변화했다’고 하는 이유는 근래 미술계와 그것을 둘러싼 환경에서 변화의 물결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변화는 생각처럼 단순하게 전개되지 않았다. 작가는 그저 작업실에 처박혀 작업만 하는 이로 정의되지 않고, 비평은 미학적 언어를 쏟아내는 것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 문화, 사회, 사상 등 주변 환경은 급격한 변화의 흐름을 탔으며 따라서 미술이 추구해야 할 가치는 고정돼 있지 않다. 변화의 흐름을 추적하며 우리가 주목한 것은 국가가 아닌 도시다. 즉, 각국을 대표하는 미술계 거점 도시를 일컫는 것이다. 여기에 작가가 작품을 전시하고 비평이 그것에 대해 말하고, 그리고 시장market이 형성됐다.
아시아에서는 서울을 비롯 가장 뜨거운 미술시장으로 정의되는 중국 베이징, 상하이 그리고 홍콩을, 지긋하지만 최근 뚜렷한 변화가 감지되는 일본 도쿄 미술계의 변화 양상을 살펴본다. 또한 전통적으로 미술계 중심지를 자임하는 유럽에서는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오스트리아 빈, 그리고 독일 베를린의 동향에 주목했다. 마지막으로 이른바 세계 미술의 수도 미국 뉴욕을 살펴본다.
‘변화’와 ‘발전’이 항상 등가적 의미를 갖진 않는다. 따라서 이번 기획은 방향을 살피되 결론을 예단하지 않는다. 지금 미술 현장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말이다.

침범侵犯당한 인사동 미술에서 글로벌화된 탈脫장소적 미술까지
심상용  동덕여대 교수

오늘날의 글로벌 현대미술은 전시를 통해 양육되지 않는다. 프랑스의 갤러리스트 조르주 필립 발루아Georges Philippe Vallois에 의하면, 이 시대는 경매의 젖꼭지를 빨며 자란 작가들의 시대다. 글로벌 단일시장화된 미술은 장소에 귀속되지도, 시간에 구애받지도 않는다. 다만 시공을 넘나드는 자본에 의해 발육이 결정된다. 도쿄에서 태어난 독일 작가 조나단 메세 Jonathan Messe의 그림은 그의 나이 32세에 24만 유로(한화 약 3억2000만 원)에 팔린다. 자본의 속도다.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김동유의 회화 1가 3억2000만 원에 낙찰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2007년 같은 경매에서 홍경택의 회화는 7억7000만 원에 낙찰되었다. 한국작가의 해외 경매 사상 최고가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2
이 경매 건들은 한국현대미술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글로벌 무대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는 ‘예술적 성장’의 결정적인 신호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비유적인 의미에서 역사를 성과없는 ‘인사동 미술’의 밖으로 빼내야만 하는 근거로 채택되었다. 2014년 10월 29일 동일한 경매사가 김동유와 홍경택을 포함하는 ‘엄선된’ 한국 작가 5인전을 제임스크리스티룸에서 열면서 “표현과 혁신의 관점에서 한국현대미술의 현주소”를 보여주겠노라 선언했다.3
2008년 홍콩 크리스티에서 임동식의 회화 두 점이 각각 4920만 원과 5720만 원에 낙찰된 사건은 고스란히 “작품성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것”으로 해석되었다. 와우! 하긴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나 브뤼겔Pieter Brueghel의 작품들조차 경매회사가 키운 젊은 현대작가의 작품에 훨씬 못 미치는 값으로 팔리는 게 오늘날의 상황이다.
앞서 언급한 발루아에 의하면, 정말 놀라운 것은 “경매장에서 도출되는 결론의 힘”이다. “그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비평가나 미술관 큐레이터, 미술사가의 견해를 압도한다.” 경매에서 정해진 고가 낙찰이 예술성의 부동의 판명으로 직결되는 것이다. 경매의 낙찰가격 순위와 이론가들이 침이 마르도록 상찬하는 작가들의 순위 목록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경매장에 오르지 않은 작품이 비평가의 주목을 받는 경우는 갈수록 드문 사건이 되고 있다. 큐레이터들이라고 경매장 바깥 작품이나 작가들로 자신의 전시를 꾸미고 싶어 하랴. 비평담론도 전시공학도 고가 거래가 성사되는 곳에서 꽃핀다. 발루아는 말을 잇는다.

“비엔날레에서 보았던 작가들을 다음 달에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가 사실이다. 크리스티의 망치를 바쁘게 만들었던 작가들을 이듬해 비엔날레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 이것이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시스템이다. 상인으로서 이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두려운 것은 그 속도다.” 4

글로벌 단일체계화된 미술의 작가들은 경매의 망치소리와 함께 급속하게 성장한다. 오랜 기간에 걸친 긴 전시 목록으로 구성되곤 했던 과거의 커리어는 불필요하다. 질 프슈Gilles Fuchs에 의하면, 1960, 1970년만 해도 작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여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예술은 미술관이 아니라, 예술이 돈벌이의 기제로 전락하는 경매장에서 형성된다. 전시와 장소성은 더 이상 현대미술의 핵심적인 사건이 아니다. 지리적 경계는 중요한 요인이 아니다. 뉴욕 미술이라고? 순수하게 ‘미학적 정체성’으로서 그런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런던미술이나 베를린미술, 파리미술의 시대는 지나갔다. 다만, 프랑수아 피노나 베르나르 아르노의 미술이 작동할 뿐이고, 가고시안의 라벨이 붙었거나 찰스 사치의 색인을 지닌 미술이 지구촌의 도처에서 출몰할 뿐이다. 그러므로 단지 덜 속기 위해서라도 순서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베니스에서 만들어진 작가를 바젤이 마케팅하는 것이 아니다. 바젤에서 급조된 예술을 베니스가 바코팅, 곧 각각의 것에 코드를 붙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 침범당한 시스템이 언제까지 지속될지에 대한 회의적 시각 또한 지속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게다가 신화화된 고도성장으로 은폐된 글로벌 경제체계의 거품이 조만간 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다. 이 시스템을 비춰볼 수 있는 다른 거울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연대를 1980, 90년대쯤으로 조정하기만 하면, 이는 ‘전적으로’ 글로벌화의 롤러코스터에 몸을 맡겨온 한국미술의 상황이다. 인사동이 미술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담당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1970년대에 그 형체를 드러내면서 한때 인사동은 욕망이 들끓던 장소였다. 한국현대미술을 주도하는 흐름이 그곳을 관통해 흘렀다. 하지만 오늘날 그곳은 경유지로서의 의미조차 희미하게 되었다. 그동안 한국미술은 세계 5대 비엔날레 가운데 하나를 개최하고, 틈만 나면 아시아미술 선도론을 입에 올릴 만큼 외형적으로 커졌다. 한국미술은 중심을 잃은 적 없이 이 성공으로 간주되는 노선을 내달릴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을 만들어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제도화되고 경직된 인사동 미술의 미래적 대체를 선언한 이 미술은 중심이 부재하기 때문에, 집중에 대한 부담도, 상실에 대한 성찰도 원천적으로 봉쇄된, 기형적으로 경쾌하고 더욱 욕망하는 미술이다. 하지만, 안으로부터 전해오는 공복통空腹痛은 사라지는커녕 오히려 더욱 심해졌다. ‘크리스티 경매가 곧 예술성의 궁극적 원천’으로 간주되는 지경이고 보니, 그 실체적 토대의 빈곤에 대한 인식을 외면하고 언제까지 도망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현재는 해석 및 담론기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실상 사건 자체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장소와 함께 장소 이상의 것을 누락했기 때문이다.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린 것처럼.

‘인사동 미술’의 실체
일제강점기 말 일본인이 경영하는 골동품상들이 입지하면서 고미술거리가 형성된 것이 오늘날 전통문화의 거리 인사동의 시초였다. 몰락한 세도가들의 집과 골동품, 고서화와 도자기 등이 유입되면서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고미술품 상이 자리잡았다. 하지만, 채 반 세기가 안 된 2000년 현재 고미술 관련 화랑, 표구점, 필방업소 등의 절반 이상이 인사동을 떠났거나 사라졌다. 그 빈자리는 한류스타의 조악한 사진이나 중국산 짝퉁 민속공예품이나 잡화들로 채워졌다. 2012년 40%가 넘는 상점들이 설치한 가판대에서 판매되는 품목의 평균가격은 2.000원 내외로 양말 티셔츠, 스카프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이제라도 유무형의 역사적 자산을 정비해 한류의 밑바탕이 되었던 우리 문화의 이야기들을 찾아내자”,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문화특구이자 한류의 재생산기지로 만들자” 등의 담화가 난무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장소의 복원과 관련된 그러한 구호들에는 복원해야 할 실체에 대한 인식이 부재하거나 왜곡돼 있다.
인사동이 전통문화의 거리라는 인식은 정작 1980년대 들어서면서 관광특화구역에 대한 국가 차원의 요구로부터 비롯되었다. 국가적 이벤트 성황에 부응하려는 정치적 기획은 1983년 ‘제5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문화예술부문 계획’이나 1986년 ‘제6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 문화예술부분 계획’ 등을 통해 실행되었다. 제5공화국은 전통문화 및 민족문화 관련 사항을 헌법에 명시하고, 7년(1980~1988)의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문화에 관한 중장기 계획을 4번 발표할 정도로 정성을 기울였다. 5 하지만 그것은 헌법에 문화, 특히 전통문화의 창달에 대한 조항을 편입시키는 자체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극히 이례적이라는 점 등에서 드러나듯, 문화를 통치술의 일환으로 편입시키려는 의지의 산물이었다. 6 전통문화를 이용한 은폐의 정치, 곧 문화와 예술을 국민을 회유하거나 관심을 정치로부터 멀어지도록 함으로써 7 정치적 과오를 덮는 수단으로 삼으려는 의도는 예컨대 ‘국풍 81’같은 국가주도 이벤트에서 이미 그 모습을 확연히 드러냈다. 8
전통의 거리만큼이나 문화와 예술의 거리로서 인사동의 실체도 미심쩍다. 인사동은 1970년대에 들어서서야 뒤늦게 문화예술과 결부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상업화랑 입점이 그 직접적인 계기였다.(현대화랑) 상징적 읽기가 가능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1974년 문헌화랑, 1976년의 경미화랑과 동산방화랑이 개관했으며 1977년에는 선화랑, 1983년에 가나화랑이 개점하면서 화랑가로서의 면모를 다져나갔다.9 이후로 화랑의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해 현재 인사동에서 가장 많이 분포하는 업종이지만, 10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참담한 측면이 없지 않다. 2013년 현재 인사동에 자리한 120여 개의 크고 작은 갤러리의 65% 이상은 여전히 ‘대관貸館화랑’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머지 가운데서도 18%는 대관과 작품 판매를 병행하고, 소위 ‘상업화랑’으로 운영되는 17%의 상당수조차 작품 판매에 비중을 두는 정도다.
예나 지금이나 ‘대관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인사동 미술의 한 실체다. 이 시스템을 구성하는 임대 화랑들에 작가나 작품성에 근거한 선별, 미학적 신념이나 노선에 대한 존중, 전시의 실질적인 수준은 부차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다. 상황이 더 열악하던 시절, 임대 화랑들이 젊은 작가들에게 해방구가 돼주기도 했던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고가의 대관료를 지불할 여력이 있는 소수를 그렇지 못했던 다수로부터 선별하는, 억압적인 자본의 검증을 실행해왔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설상가상 2002년 정부가 문화지구로 지정되면서 대관 임대료가 급격하게 상승했는데, 이는 인사동이 자본의 굴락화化로 치닫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작가에게 대관료의 벽은 창작을 접거나 현대미술 장을 떠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인사동 미술의 성황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은 높은 대관료에서 전시 카탈로그 제작비와 오프닝 세리머니 비용까지 지불할 여력이 있는 젊은 작가들이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임대 화랑을 기반으로 하는 인사동 미술의 이러한 하부구조는 오히려 한국미술 잠재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러한 구조적 기반 위에서 인사동은 향후 “고급문화로서 특권화되어 갈”  또 하나의 인사동 미술, ‘한국적 미니멀리즘으’로 명명되곤 하는 제도화된 미술을 위한 요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것이 인사동 미술의 양분화된 작동 패러다임이었다.
고급주택화gentrification된 현재의 인사동에서 양극화된 두 예술의 우생학적 생존 여건은 조금도 완화되지 않았다. 고가의 대관료를 지불할 여력이 있는 아마추어 미술과 고도의 지대상승률을 앞지를 만큼의 수익률을 담보하는 ‘글로벌 블루칩 미술global bluechip art’ 또는 ‘아트스타의 아트art of art star의 양극 사이에 정작 인간을 위한 내적 토대는 여전히 찾아보기 어렵다. 인사동이 조선조 도화서가 있었던 자리라 하여 미술과 결부시키는 것은 낭만적 소설에 가깝다. 전통거리로서 인사동은 일제강점기 말기의 산물이며, 인사동 미술은 고작 1970년대의 소산물일 뿐이다. 변하지 않는 토대, 어떤 본질에 상응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문화예술의 장소로서 인사동의 실체는 미미하다. 인사동 미술은 역사 만들기와 회유와 은폐의 정치술과 초상업주의의, 침범당한 근현대사의 거울이자 우리 미술의 내적 빈곤과 마주하는 장소다. 인사동의 향수를 논하고 복원을 주장하는 담론들이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대목이다. 그곳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이 아니라, 넘어 나가야 할 곳으로서의 거울이다. ●

비엔나 (12)

빈 크리스틴 쾨니히갤러리

뉴욕 덤보의 흑백벽화

뉴욕 덤보의 흑백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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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낙찰된 작품은 <마릴린먼로 vs 마오주석>이었다.
홍경택의 작품은 2013년 홍콩 크리스티 이브닝 세일에 재등장, 663만 홍콩달러(약 9억6000만 원·이하 수수료 포함 가격)에 낙찰되며 다시 한 번 기록을 경신했다.
3  ‘홍경택·김동유 등 5인展…28일 크리스티홍콩 개막’, 이향휘 기자, 기사입력 2014.10.9
  Marie Maertens, L’Art du Marche de l’Art, ed. QUE, 2008, Espagne, p.104.
네 번의 중장기 문화정책은 다음과 같다. 1981년 : ‘새 문화 정책’ 1983년 : ‘제5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문화예술부문 계획’
1984년 : ‘지방문화중흥 5개년 계획’ 1986년 : ‘제6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문화예술부문 게획’
구광모, <우리나라 문화정책의 목표와 특성-80년대와 90년대를 중심으로>,  《중앙행정논집》, 제12권, 중앙대학교 국가정책연구소 중앙행정학 연구회, 1988
7   동아일보 1985년 2월 19일자. 참조
  장승백이 지신밟기, 풍년기원제, 민속제, 전통에술제, 국풍장사씨름판, 팔도굿, 남사동놀이 등의 행사가 ‘국풍81’의 중심에 있었다.
9  김종근, <현대미술의 메카, 인사동>, 《인사동 가고 싶은 날》, 디자인하우스, 2002, p.140.
10 전체점포수 대비 화랑의 비중은 1998년 이전 21.6%에서 2002년에는 34.3%로 증가했다.

SPECIAL FEATURE 세계 미술현장의 새 지형도 北京

베이징 (2)

위 798예술구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UCCA 전경, 아래 798예술구 골목 전경. 독일식 건물의 공장지대였던 이곳의 과거를 보여준다

명불허전名不虛傳 798예술구
권은영  예술학

중국 팔대 고도八大古都 중 하나인 베이징을 방문한 경험이 있다면, 외국인보다 절대 다수의 중국 내국인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자금성과 톈안먼 광장을 기억할 것이다. 국내총생산량(GDP)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지만, 14억 인구 다수를 구성하는 소시민에게 950만km2의 대륙을 횡단하여 ‘중국 꿈中國夢’의 도시, 베이징을 찾는 것은 여전히 버킷 리스트 중 하나이다. 중국인들이 과거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감흥에 심취하는 반면, 외국인에게는 오늘의 중국 역시 매력적인 호기심의 대상일 것이다. 그들의 발길은 자연스럽게 베이징 동북쪽에 위치한 798예술구로 향한다. 1960년대 ‘신중국 전자 공업의 요람’이라 불리던 국영 공업단지가 베이징을 대표하는 예술구이자 관광지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낡은 공장지대가 문화예술의 명소로 변신하는 것은 이미 예술계의 클리셰가 된 지 오래지만,  여전히 그 가치는 유효하며 지금도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는  일등 공신이다. 베이징 곳곳에 예술가들이 틔운 문화의 싹을 추적해보자.
30여 년의 중국 동시대미술 역사에서 베이징의 예술구는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작가 작업실 중심의 작가촌 개념의 예술구이며, 다른 하나는 전시공간 중심의 화랑가 개념의 예술구이다. 물론 전자와 후자 모두 작업실과 전시공간이 혼재해 발전하는 것이 다반사이며, 초지일관 하나의 특징으로 규정되는 지역은 드물다.
초기 중국 동시대미술 발전에 촉매제가 된 것은 ‘85 미술운동’으로 대표되는 전위예술운동이었다. 당시 이들이 폭발적인 양의 작업을 쏟아낼 수 있었던 것은 일정 지역에서 동고동락했기에 가능했다. 작가들의 생활 터전이자 작업실이 모여 있는 작가촌은 순간의 미학, 행위예술과 소규모 전시로 가득했기에 그곳이 곧 가장 뜨거운 미술현장이 되었다. 1990년을 전후해 비슷한 시기에 베이징의 동쪽과 서쪽 외곽에 각각 두 개의 작가촌이 형성된다. 하나는 다산쯔大山子 인근에 장환張洹, 마리우밍馬六明, 창씬蒼鑫 등 행위예술가를 주축으로 형성된 동촌, 다른 하나는 18세기 청나라 황실의 정원이었던 원명원 일대 푸루먼福綠門촌과 과이자둔挂甲屯을 중심으로 딩팡丁方, 팡리쥔方力鈞, 웨민쥔岳敏君 등 아방가르드 회화 작가들이 운집한 서촌이었다. 이들이 베이징의 동쪽과 서쪽 외곽지역에 모이게 된 것은 물론 당시 두 지역 모두 폐허나 다름 없었으며, 임대료가 저렴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중국의 특수한 상황에 주목하고자 한다. 신중국 건설 이후, 중국 정부는 엄격한 호적제도를 시행해, 출생지를 벗어나는 것이 출국 절차와 비견될 만큼 까다로웠다. 하지만 개혁ㆍ개방 이후 1986년 국무원이 발표한 <국영기업 실행 노동계약제 임시 시행 규정>과 1992년 노동부가 발표한 <전원 노동 계약제 확대 시행에 관한 통지> 등을 통한 노동자를 중심 인구의 이동을 점진적으로 개방하면서 작가들도 정치문화의 중심지로 흡수될 수 있었다. 폐허나 다름없던 지역이 동촌과 원명원 화가촌으로 발전하는 동안, 농민공을 비롯한 소외 계층도 모여들어 작가들은 작가촌과 슬럼의 경계에 서게 된다. 일찍이 들어왔던 팡리쥔 등 몇몇 작가가 안정된 작업 환경을 찾아, 1994년 베이징 퉁셴通县의 쑹좡宋庄으로 이주해 ‘쑹좡예술가촌’을 건설한다. 실제로 동촌과 원명원 화가촌뿐만 아니라, 당시 베이징 외곽 지역에 맹목적으로 상경한 농민공들로 구성된 저장浙江촌, 신장新疆촌 등이 형성되고 있었다. 정부는 1995년 가을, 베이징 일대 무허가 판자촌 정리에 들어가고, 결국 동촌과 원명원 화가촌도 해체된다.
1990년대 중반 방황하는 작가들을 흡수한 곳이 쑹좡과 718연합창 일대다. 오늘날 798예술구가 기타 예술구에 비해 성공적으로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미술 전문가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718연합창과 멀지 않은 곳으로 이전하여 작가들을 끊임없이 공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95년 중국 팔대 미술학원 중 하나인 중앙미술학원이 베이징 중심 왕푸징王府井에서 망경望京과 다산쯔 사이 화가디花家地로 이전을 시작하면서, 다산쯔 전자공장 부지에 1995~1998년까지 중앙미술학원 조소과 작업실이 꾸려지고, 당시 조소과 교수와 학생들이 모두 그곳에서 작업을 했다. 이전이 완료된 2000년, 중앙미술학원 조소과 교수 쑤젠궈隋建國를 시작으로 718연합창 공장지대로 속속 작가 작업실이 유입된다. 1990년대 말, 왕징 지역 아파트로 장샤오강張曉剛, 추즈제邱志杰, 쑹융훙宋永紅, 예융칭葉永青, 마리우밍, 잔왕展望 등이 작업실을 옮겼다.  이로서 왕징, 중앙미술학원, 718연합창에 이르는 베이징 동북부에 풍부한 인프라가 구축된다. 저렴한 임대료 외에도, 1950년대 동독의 설계로 지어진 바우하우스풍 공장들이 즐비한 718연합창은 작가들에게 넓은 작업공간을 제공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화랑에도 매력적인 전시공간이었다. 2002년 도쿄화랑의 프로젝트 공간인 BTAPBeijing Tokyo Art Projects 개막전은 718연합창이 798 예술구로 승화하는 전환점이 됐다. 2000년대 초반, 798예술구는 작가촌과 화랑가 두 가지 성격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발전한다. 낡은 공장지대가 문화예술 중심지로 재탄생한 798사례는 중국 정부가 주관하는 국제문화창조기업박람회에서 2006, 2007년 2회 연속   ‘중국 최고 창의적 공원中國最佳創意园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하지만 798예술구의 성장은 임대료의 상승을 불러왔고, 작가들의 엉덩이를 들썩이게 했다.
실제로 1990년대 말부터 798예술구 외곽에 작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전략적인 예술구도 만들어졌다.   1999년 도예 디자이너 출신의 웨이강韋崗이 페이자费家촌 지역의 장아찌 공장을 개조한 ‘샹그리라香格里拉예술공사’ 작업실이 문을 열면서, 페이자촌에 자연적으로 작가 중심의 예술구가 형성된다. 반면 차오창디草場地 예술구는 2002년 ‘베이징 차오창디 문화예술센터’가 투자해서 건설한 계획 예술구이다. 이렇게 베이징에는 자연 발생적인 혹은 계획적인 예술구가 십수 개에 달한다. 경제 발전 속도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베이징 미술계의 현장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두 전문가에게 들어봤다. 왕춘천 중앙미술학원 미술관 학술부 부장과 마쉐둥馬學東 예술시장분석연구센터(AMRC) 디렉터를 통해 중국 학술계와 시장의 시각을 비교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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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베이징 (11)왕춘천王春晨
중앙미술학원 미술관 학술부 부장
(2013년 베니스비엔날레 중국관 큐레이터)

중국 동시대미술은 3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난 30년간 베이징 미술현장의 중심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간단히 설명해달라.
1980년대 중국에는 현대적인 개념의 예술구가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진정한 의미의 개방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기였으므로, ‘작가’들도 대부분 교편을 잡고 있었고, 보편적으로 자신의 집 혹은 직장에서 작업을 겸했을 뿐, 작업만을 위한 공간은 없었다. 현대적인 의미의 첫 예술구라면 둥춘東村을 꼽을 수 있다. 1990년대 둥춘을 시작으로 위안녕위안圆明园, 쑹좡宋庄에 작가들이 모여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베이징 변두리 여기저기에 예술구들이 생겨난다. 베이징에 본격적으로 예술구들이 등장한 것은 2000년대에 들어서라고 할 수 있다. 798예술구를 비롯하여, 지우창酒廠, 추이거좡崔各庄, 페이자춘费家村, 이하오디一號地국제예술구 등이 비슷한 시기에 생겨났다. 이어서 헤이차오黑橋, 차오창디草場地, 다산쯔환태大山子環鐵국제예술성 지역에 예술구가 형성되었고, 비교적 최근에 스산링十三陵, 창핑昌平, 샤오탕싼小唐三 등지에 작가들이 모이고 있다. 작가들이 공간을 찾아 자유롭게 이동하고, 작가들이 모이는 곳에 자연스럽게 예술구가 형성되는 분위기이다. 대부분의 예술구가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에 반해, 정부가 주도하여 정책적으로 개발한 예술구도 있다. 베이징 남쪽에 위치한 관인당觀音堂 예술구가 대표적인데, 관인당 예술구는 실패했다고 본다.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예술구도 모두 성공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2010년 비교적 활발하게 움직이던 정양正陽 예술구는 정부 개발 정책에 의해 사라진 곳 중 하나다. 당시 몇몇 예술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정부의 도시관리정책하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013년 가을, 몇몇 화랑이 798예술구를 떠나면서 매체에서 798예술구 상업화를 우려했다. 798예술구가 여전히 베이징을 대표하는 예술구라고 할 수 있나?
798예술구는 하루가 다르게 번화해졌고, 사람들로 붐볐지만 이곳을 꽉 채운 사람들이 모두 미술작품에 관심이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결국 화랑 입장에서 798이 번화해진다 해서 꼭 작품 판매량 증가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반면 798 땅값은 오르고, 월세를 감당하기 어려운 화랑은 안정적 운영 안정을 위해 798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798의 주요 화랑들은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고, 몇몇 화랑의 이동이 798 전체 위상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본다. 결국 건강한 생태계를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예술구는 798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상하이로 몇몇 기관이 이동했지만, 여전히 주요 예술 관련 기구와 대표 예술가들은 비록 경쟁이 치열하지만 여전히 베이징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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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SONY DSC마쉐둥馬學東
AMRC 예술시장분석연구센터 디렉터

지난 30년 중국 동시대미술의 변화에서 예술구와 시장의 관계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달라.
베이징 최초의 예술구 개념은 예술가 집성촌에서 비롯되었다. 현재 예술구는 예술산업구 개념으로 화랑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작가 작업실과 기타 기관들도 공존한다. 하지만 문화 및 디자인 방면에 편중되어 있다. 전통 서화시장을 제외한다면, 대표적인 곳이 798예술구이다. 2013년 통계에 따르면 베이징에는 523개의 화랑이 있다. 그중 중국화 교역을 전문으로 하는 유리창에 255개 전통 화랑이 집중되어 있으며, 798예술구에 157개의 화랑이 모여 있다. 그리고 차오창디 예술구에 28개, 지우창예술구에 7개, 싼리둔三里屯 지역에 9개, 융허궁雍和宫 주변에 4개, 쑹좡에 37개, 22위안제22院街 예술구에 11개, 관인당에 15개 화랑이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예술구 개념의 변화는 실제 예술환경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즉, 중국 예술산업 발전의 변화를 이른다. 예술시장이 발전한 지금의 예술구는 화랑가의 의미가 강하다. 작가 작업실도 공존하지만, 화랑이 중심이 되고 음식점, 카페, 예술 상품점, 디자인 전문점 등 창의적인 문화산업 기구들이 함께하면서 ‘산업’ 성격이 가미되었다.

현재 대륙 미술계 발전에 베이징 예술구가 어떤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지난 12월 12일, 베이징에서 개최된 ‘제5회 중국 예술품시장 최고 논단’에서 베이징시 문화국 관위關宇 부국장은 베이징이 대륙에서 예술가, 화랑, 경매회사, 미술관, 박물관 등이 가장 많이 분포하는 문화예술의 도시라고 강조한 바 있다. 특히 베이징의 예술구는 대륙 미술현장의 중심으로서 중국 동시대미술 발전의 기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대륙 미술계를 선도하고 있다. AMRC 통계에 따르면, 현재 베이징시에는 총 520여 개의 화랑이 운영되고 있으며, 115개의 경매기관이 2013년 한 해 26만6957점을 거래했다. 동시에 21개의 예술품산업박람회(아트페어) 덕분에 베이징은 매달 풍성한 예술행사들로 가득하다. 더욱이 베이징시 한 해 경매 낙찰총액은 약 280억 위안(한화 4조9862억 원)으로, 전국 낙찰총액의 64%를 점유하고 있다. 여기에 각종 박람회, 화랑, 인터넷 거래량 등을 합산하면, 베이징시는 작년 한 해 미술품 거래액이 약 450억 위안(한화 8조136억 원)으로 산출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798예술구가 있다. 798예술구는 베이징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화랑, 작가 작업실, 비영리 기구 등을 갖춘 예술 환경이 매우 풍부한 단지이다. 대형 유명 화랑도 많을 뿐만 아니라, 유동 인구를 흡수하며, 동시대예술을 전파하는 기지로 그 영향력도 상당하다. 798예술구는 이미 베이징의 문화를 상징하는 명함과도 같은 존재이다. 베이징시 분포 화랑 중 30%에 해당하는 157개의 화랑이 798예술구에 집중되어 있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베이징=권은영 통신원

SPECIAL FEATURE 세계 미술현장의 새 지형도 香港

2014년 5월 열린 에 전시된 마이클 린의 작품

2014년 5월 열린 <아트바젤 홍콩>에 전시된 마이클 린의 작품

잘 키운 아트페어 하나가 가져온 홍콩 미술시장의 변화
황희경  연합뉴스 문화부 기자

홍콩 아트페어가 막 성장하던 때만 해도 사람들은 홍콩을  일러 아시아 미술시장의 허브라고 했다. 그러나 이제 홍콩은  런던과 뉴욕에 이어 세계 미술시장의 3대 허브로 자리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다. 그 중심에는 지금은 <아트바젤 홍콩>으로 이름을 바꾼 <아트 HK>가 있다.
미술 분야를 취재하면서, 그리고 홍콩에서 3년간 지내며 지켜본 <아트바젤 홍콩>의 변화는 놀라웠다. 2008년 <아트 HK>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지 불과 5년 만에 급성장했고 그 가능성과 잠재력을 지켜본 바젤 아트페어에 인수되면서 거래 금액에서나 참여 갤러리 면면, 관람객 수 등에서 세계 수준의 아트페어로 위상을 확고히 했다. <바젤 아트페어>가 1970년 설립돼 40여 년의 역사를 지닌 행사라는 점을 생각하면 채 10세도 안 된 <아트바젤 홍콩>의 성장은 대단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아트바젤 홍콩>의 성장은 연쇄적으로 홍콩 미술시장의 확대로 이어졌다. <아트바젤 홍콩>을 전후한 기간은 ‘아트 위크art week’로 불리다가 이제는 ‘아트 먼스art month’로 불릴 정도로 각양각색의 미술 행사가 끊이지 않는다.
최근 몇 년간 홍콩에서는 <아트바젤 홍콩> 개최 기간에 맞춰 열리는 위성 아트페어가 속속 생겨났다. <아트바젤 홍콩>이 처음 열린 2013년 5월에만 아시아 컨템포러리 아트 쇼와 홍콩 컨템포러리, 스푼 아트페어 등 4개의 아트페어가 열렸다. <아트바젤 홍콩>의 높은 진입 장벽과 비싼 부스 임대료에 부담을 느낀 갤러리들은 나름대로 특색을 갖춘 위성 아트페어에 참가해 틈새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자리를 잡은 아트페어들은 이제 <아트바젤 홍콩>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일정으로 개최되기도 한다.
<아트바젤 홍콩> 기간엔 경매도 풍성하게 열린다. 크리스티 홍콩 봄 경매는 <아트바젤 홍콩>을 찾는 사람들의 필수 코스가 됐고 서울옥션을 비롯해 여러 경매사도 <아트바젤> 기간을 전후해 경매를 연다. 중국 고미술품을 많이 내놓는 중국 경매사들의 프리뷰 장에서는 마치 시장처럼 출품작들이 빼곡하게 전시된 가운데 중국 컬렉터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는 광경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아트바젤 홍콩>은 이처럼 홍콩의 미술시장 활성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홍콩에서 벌어지는 대형 미술판은 ‘그들만의 잔치’일 뿐 정작 홍콩 작가들과 홍콩 대중은 소외되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이런 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도 눈에 띈다. 홍콩 정부는 미술시장이 아닌 미술 전반을 키우려 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홍콩 주룽九龍 반도 서부 지역에서 진행되는 ‘웨스트 까우룽 문화지구West Kowloon Culutre District’에 들어설   ‘M+ 시각문화미술관’(이하 ‘M+미술관’)이다. 사실 웨스트  주룽 문화지구는 사업이 계속 지연되고 비용 부담이 늘어나면서 홍콩에서는 상당한 비판을 받는 사업이다. 그러나 M+미술관이 2017년 완공돼 본격적인 전시를 시작하면 사실상 제대로 된 미술관이 거의 없는 홍콩의 미술지형에 변화가 예상된다.
영국 테이트모던의 초대 관장을 지낸 라르스 니트브를 총디렉터로 영입하고 한국 출신의 큐레이터 정도련 씨를 수석큐레이터로 영입한 M+미술관은 꽤 공격적으로 컬렉션에 나서고 있다.
2012년에는 중국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컬렉터로 평가되는 스위스 컬렉터 울리 지그로부터 중국 미술품 1640여 점 기부를 이끌어냈다. 그가 기부한 미술품들은 약 13억 홍콩달러 (약 1억6800만 달러)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평소 소장품을 중국에 돌려주겠다고 말했던 지그는 중국 당국의 미술품 검열을 우려해 중국 영토지만 상대적으로 독립성이 있는 홍콩에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M+미술관은 또 중화권 ‘큰손’ 기부자들 덕분에 <아트바젤 홍콩>에서도 작품들을 사들이는 한편 홍콩 작가를 비롯한 중화권 작가 미술품은 물론 다른 아시아 지역 미술품 소장에도 적극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콩 화랑협회는 2013년부터 ‘갤러리 위크Gallery Week’ 행사를 시작해 아직 갤러리 방문이 문화로 자리 잡지 못한 홍콩에서 홍콩인들이 갤러리를 가까이 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고 있다. 올해 11월 26일부터 12월 5일까지 열흘간 열린 두 번째 갤러리 위크에는 50여 개의 크고 작은 갤러리가 참여해 작가와의 대화, 오픈 스튜디오, 워크숍 등 100여 개 행사를 소화했다.
과거 갤러리들이 홍콩섬의 금융 중심지인 센트럴 주변 지역에 집중됐던 것에서 벗어나 홍콩의 외곽 지역에 새롭게 둥지를 틀고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갤러리들의 이동에는 홍콩의 살인적인 도심 임대료를 견디지 못한 측면이 크긴 하지만 홍콩 작가들을 위주로 개성 있는 프로젝트를 펼치면서 홍콩의 미술판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특히 홍콩섬 동부의 차이완柴灣은 최근 홍콩의 개성 있는 미술가, 디자이너, 음악가들이 모이는 새로운 예술지구로 각광받고 있다. 옛 공장 창고를 개조해 만든 전시공간과 작업 스튜디오 등이 속속 들어서면서 일부 평론가들은 이곳이 제2의 ‘뉴욕의 첼시’가 될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

SPECIAL FEATURE 세계 미술현장의 새 지형도 上海

상하이 (15)

상하이, 예술신천지
민은주  (주)비핸즈 ArtN 사업부 부장

와이탄外滩은 상하이를 상징하는 지역으로, 상하이의 역사와 현장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지역이다. 황푸강을 경계로 서쪽으로는 19세기 말 유럽 각국의 건축 양식에 따라 지어진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20세기 말 국가적 개발 프로젝트에 따른 건축물들이 지금도 한창 건설 중이다. 명실상부 상하이는 국제도시로 빠르게 발전하면서 중국의 경제 수도로 자리를 잡았지만, 상하이가 ‘중국’을 대변하는 도시라 할 수 없는 이유는 이 도시가 가지고 있는 매우 특별한 역사와 중국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는 특수한 환경 때문이다. 국제적 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상하이에서는 매년 국제적인 예술행사가 열리고 있으며 전 세계에서 그 현장을 주목하고 있지만, 이를 오늘날 중국미술의 현장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하이에서 방문할 만한 미술 현장이라고는 미술관과 박물관이 모여 있던 런민人民광장과, 모간산루莫干山路, 타이캉루泰康路, 훙팡紅坊, 그리고 도축장을 개조한 1933 라오창팡老場坊 정도였다. 한때는 방직공장으로 사용되다가 공장 철수 이후 예술지구로 탈바꿈한 M50 모간산루는 뉴욕의 소호나 베이징의 798처럼, 산업공간이 예술공간으로 활용된 유사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M50이 그들 지역과 다른 점이 있다면, M50은 예술가나 갤러리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생겨난 지역이라기보다는, 초기부터 예술지구로 계획해 예술가, 디자이너, 출판사, 갤러리 등 문화 관련 업종 입주자들을 유치했던 점이다. M50보다 훨씬 이후에 조성된 훙팡예술구와 라오창팡도 상황은 비슷하다. 단지가 조성되고 건물을 리노베이션하면서부터 예술 문화지구를 목표로 두고, 문화 인구를 유입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콘텐츠 부족과 비접근성, 유지 비용 증가 등의 이유로 초기에 자리 잡은 예술인들과 문화 관련 업체들은 그곳을 떠나거나 상업적인 업종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했다. 재개발 계획 안에 포함되어 철거 위기에 놓였다가 예술가들과 원주민들의 노력으로 지금의 문화지구로 자리 잡은 타이캉루泰康路의 톈즈팡田之坊은 상하이 안에서도 성공사례로 꼽히고 있으나, 이 또한 순수한 예술지역이라기보다는 대중적인 문화지역으로 주목받고 있다. 타이캉루가 다른 예술지역과 달리 방문객들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이 지역 고유의 상하이 건축양식인 스쿠먼石庫門식 건물들이 한몫을 했다. 거주자 5명 중 1명이 외국인이라는 상하이는 중국에서도 외국인 거주율이 가장 높다. 나머지 4명 중 2명 이상이 외지인이다. 그렇다 보니, 그들과 그들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상하이의 특징을 담은 건축물과 젊은 디자이너들의 개성있는 아트숍의 매력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예술지구는 아니지만, 개발 초기부터 이러한 요소들을 염두에 두고 조성된 대표적인 지역이 신톈디新天地와 쓰난공관思南公館 같은 곳이다. 타이캉루는 이들 지역과 함께 상하이의 대표적인 관광지로서 상하이의 고건축 양식과 트렌디한 디자인숍들로 일년 내낸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초기 예술지구를 꿈꾸며 조성된 몇몇 대표적인 예술구가 흥행의 맛을 보지 못하고 있다 해서, 상하이의 예술활동이나 미술시장이 침체되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우선, 상하이에는 수십 개의 소규모 예술지역이 있다. TOP라 불리는 타오푸창이위안桃浦創意圓에는 Shangart gallery에서 후원하는 작가들이 모여서 작업을 하고 있으며, 스위스의 Swatch사가 지원하는 상하이 스와치아트피스호텔 레지던시Shanghai Swatch Art Peace Hotel Residency에는 전 세계에서 온 예술가 20여 명이 함께 작업을 하고 있다. 모사화가들과 지역화가들이 모여 있는 상하이화가거리上海畵家街에는 장식미술품을 판매하는 수십 개의 화랑이 모여 있으며, 2577 창이다위안2577創意大院, 둬룬루문화거리多倫路文化街 등과 같이 알려지지 않은 수십 개의 이름 없는 예술 지역이 존재한다. 이뿐만 아니라, 상하이에서는 대규모 국제 예술행사부터 소규모 단체의 전시 오픈까지, 매주 크고 작은 문화행사가 일상처럼 열리고 있다. 한마디로 자유롭고 다양한 형태의 예술활동이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상하이의 다양한 예술현장에 실제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최근 몇 년 동안 설립된 대규모 사립미술관들이다. 상하이 시정부市政府는 시립미술관에 예산을 들이기보다는 기업을 통한 대규모 사립미술관을 지원하는 정책으로 상하이의 예술현장에 자본 유입을 도모했다. 현재 상하이를 대표하는 몇몇 대규모 사립미술관은 ‘자본의 꽃은 예술’이라는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미술관의 건축부터 소장품 가치까지 그 규모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
현재 상하이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는 PSAPower Station of Art, 上海當代藝術博物館는 1897년에 세워진 난시南溪발전소가 1955년에 황푸강 남쪽으로 이전하면서 세워진 건물이다.  165m 높이의 굴뚝이 상징인 이 발전소 건물은 2007년까지 전력 발전소로 사용되다가 2010년 상하이엑스포 당시 미래관으로 사용되었으며, 2012년 10월에 PSA라는 이름으로 중국 현대미술의 혁신과 발전을 상징하는 미술관으로 재개관했다. 상하이시의 중심 런민광장에 위치한 MOCA Shanghai(상하이당대미술관)는 홍콩의 쿵밍광재단龚明光基金의 기금으로 설립되었으며, 아라타 이오자키Arata Isozaki가 설계한 독특한 건축물로 주목을 받은 히말라야喜瑪拉雅미술관은 2012년 상하이 쩡다그룹增大集团의 투자로 재설립 되었다. 독립된 커미티로 운영되는 상하이 록번드 현대미술관RAM, Shanghai Rock Bund Art Museum과 와이탄3호미술관, 와이탄18호 아트센터는 19세기 말에 건축된 유산을 보전하는 동시에 현대미술을 보급한다는 역사와 문화의 상징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2012년에 개관한 룽龍미술관과 2014년에 개관한 YUZMYuz Museum Shanghai은 각각 류이첸劉益謙 부부와  부디탁Budi Tek이라는 개인 컬렉터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미술관의 규모와 소장품의 가치는 타 공립 미술관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이와 같이 기업들과 컬렉터들이 상하이에 대규모 미술관을 설립하게 된 배경은 이미 언급했던 것과 같이 상하이 시정부의 지원이 가장 큰 힘이 되었다. 중국 제1의 경제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그 경제 기반이 중국의 부끄러운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상하이시는 오랫동안 문화적인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푸둥개발과 대도시 프로젝트로 자본이 집약된 상하이에서 문화적 열등감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은 현대미술과 컬렉션에 투자하는 일이었다. 더불어, 상하이의 개발프로젝트로 거대한 수익을 얻게된 기업과 투자자들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공익적인 활동 의무를 갖게 되었는데, 가장 효과적으로 시정부와 시민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미술관 설립이었다.
도시 전체가 개발계획 안에 놓인 상하이는 이미 개발된 곳이나, 현재 개발이 진행 중인 곳, 혹은 계획 중이거나 보존구역으로 지정된 곳, 어느 곳에서도 예술가들을 위해 쉽게 자리를 내어주지 못하고 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그 순수한 예술의 자리를 자본이 차지하고 있는 것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 기다리며 지켜봐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상하이의 유수한 미술관이 순수한 예술을 지원하고, 교육하며, 보급하는 긍정적인 역할로 그 임무를 다하기를 모두가 기대하고 있으며, 상하이라는 도시가 매우 특수한 배경과 환경 아래 발전하고 있듯이, 예술과 문화의 성장도 다른 도시와는 다른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음은 주목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

 

훙팡조각센터 외부전경
2, 3  상하이에 진출한 학고재갤러리 상하이(왼쪽)와 아라리오갤러리 상하이
4  타이캉루 거리 전경
5  락번드 아트스트릿 전경
6  난시발전소 자리에 세워진 PSA(Power Station of Art) 외관

SPECIAL FEATURE 세계 미술현장의 새 지형도 とうきょう

도쿄 (16)

구로세 요헤이가 기획한 카오스*라운지의 2014년 전시 <캬라 크래쉬!character+ crash!> 전시광경. 구로세 요헤이 제공

동시대미술이라는 의식이 머무르는 장소
마정연  미술사/미술비평

이제 젊은 세대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말이 되어버렸지만, 긴자를 걸어다니며 구경한다는 의미의 단어가 따로 있을 정도로 긴자는 특권적인 장소다. 본지와 같은 이름의 일본잡지 《월간미술》이 창간 400호 기념으로 기획한 보존판 갤러리 가이드(2009년 1월호)가 여전히 긴자 화랑가의 이야기로 시작하듯, 불황 속에서도 긴자의 화랑가는 여전히 건재하다. 그렇지만 현대미술을 대상으로 생각할 때는 사정이 다르다. 현대미술의 선구적 거점이었던 긴자의 두 화랑, 도쿄 화랑(1950~)과 미나미화랑(1956~1979), 그리고 전후 그곳에서 활동한 전위예술 작가들에게 현대미술이란 모던아트라는 외래어의 번역어이기 이전에 일본화 대 서양화로 분류되는 당대 미술계와 자신들이 추구하는 동시대의 새로운 예술을 차별화하려는 의식을 표현하는 용어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 기사에서는 긴자를 벗어나 동시대미술이라는 의식이 머무르는 장소를 중심으로 일본 현대미술 거점 변화를 소개하려 한다.

일본 최초의 대안공간
‘세이부/세존 문화’란 말에 익숙하지 않은 국내 독자에게도 친숙한 브랜드 MUJI의 창설에 관여한 크리에이브 디렉터인 고이케 가즈코가, 도쿄 동부 지역의 사가란 곳에 위치한 오래된 식량창고 건물(1927년 준공)을 개조해 1983년 개관한 비영리 전시공간 사가쵸는 일본 최초의 대안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2,30대의 젊은 작가가 국공립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여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던 시절, 오타케 신로, 모리무라 야스마사, 스기모토 히로시를 비롯한 약 400명의 국내외 작가가 이곳을 거쳐갔다.
흥미로운 것은 사가쵸 전시공간이 입주해있던 이 식량창고 건물에 몇몇 신진세대의 기획 화랑이 모여들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갤러리스트 사타니 슈고는 2000년 부친의 사타니화랑에서 독립해 자신의 갤러리 슈고아츠ShugoArts를 설립하기 전부터 이곳에서 자신과 동세대 작가들의 전시를 수차례 기획했다. 그 후, 1996년 도미오 고야마갤러리Tomio Koyama Gallery, 1998년 타로 나수TARO NASU가 이 건물 2층에  문을 열었다. 3층에 위치한 사가쵸 전시공간은 2000년에 활동을 마감하고, 이전부터 스태프로 활동해 온 고야나기 아츠코의 갤러리 고야나기가 공동 운영한 RICE Gallery by G2가 2001년 이 장소를 물려받았다. 이듬해인 2002년 11월, 마지막 전시 <Emotional Site>를 끝으로, 아름다운 건물은 철거되고 그 자리에 아무런 특징도 없는 고급 맨션이 세워졌다. 그렇지만, 긴자의 화랑가처럼 특정 지역의 이미지에 의존하지 않고, 새로운 장소를 함께 만들어내는 현대미술 갤러리들의 협업 단서가 일본 최초의 대안공간과 맞닿아 있었다는 사실은 기억해야 할 역사로 남았다.

롯폰기의 새로운 이미지
여섯 그루의 나무라는 뜻의 롯폰기 지역 내에서도 ‘감자 씻기 언덕’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이모아라이자카. 이곳에 아트 컴플렉스 빌딩이 자리하고 있던 시기가 있었다. 갤러리 고야나기의 고야나기가 부동산업계의 대기업 모리 빌딩의 사장이자 모리미술관 창설자인 모리 미노루에게 직접 건의해, 미술 관계자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5년간 대여한 것은 모리미술관이 개관하기 약 반년 전인 2003년 4월의 일이었다. 지진에 취약한 건물의 특성 때문에 오래 머물지는 못했지만, 이곳에는 OTA FINE ARTS, TARO NASU, Roentgenwerke 등과 현재는 에비스로 이전한 아트 바 TRAUMARIS가 입주해있었다. 이 시기에 이모아라이자카는 갤러리 고야기, 도미오 고야마갤러리, 다카 이시이갤러리가 모인 시카와의 창고, 다카하시 컬렉션 가구라자카 야마모토 젠다이, 고다마갤러리 등이 모인 가구라자카의 인쇄공장 등과 더불어 2000년대 현대미술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그 후, 국립신미술관과 리뉴얼해 이전한 산토리미술관이 2007년에 개관하여, 모리미술관과 더불어 ‘롯폰기 아트 트라이앵글’이라는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모리미술관의 개관은 사회 일반에 현대미술의 존재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받는데, 문화예술지역으로서의 롯폰기라는 자기 이미지를 그려내고자 했던 모리빌딩의 전략 역시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리적인 거점에서 네트워크 속으로
개관 20주년을 앞둔 도쿄도현대미술관이 들어선 곳은, 1995년 당시에는 좋은 입지조건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 도쿄도현대미술관 주변에 디자인 사무소, 미술관계 서점, 작은 갤러리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두 개의 지하철 노선이 지나가는 기요스미시라카와역이 개통되고, 2005년 신카와의 갤러리들이 기요스미로 이전해 같은 창고 건물에 둥지를 틀면서부터 기요스미시라카와 지역은 한때 ‘도쿄의 소호’라고 보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슈고아츠, 다카 이시이 갤러리, 도미오 고야마 갤러리 등 현재 입주해있는 7개의 갤러리 가운데 3개의 갤러리가 2014년 12월을 끝으로 이 장소를 떠나고, 2015년 봄 무렵에 건물 자체가 철거될 예정이니, 2015년 도쿄의 갤러리 지도는 또다시 변화될 전망이다.
2004년부터 이 지역의 변천 과정을 지켜봐 온 도쿄도현대미술관의 큐레이터 야부마에 도모코는, 결과적으로 도쿄의 현대미술 중심처럼 보인다고는 해도, 이러한 변천은, 어디까지나 미술관이 더 이상 중심이 아닌 시대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강조했다. 지금은 미술관의 헤게모니보다는, 크고 작은 이벤트를 함께 기획하고, 허물없이 소규모 스터디 모임을 하거나, 트위터상에서 대화를 주고받으며, 거주 공간 안에 마련한 아틀리에에서 인터넷 중계 방송을 하는 등, 다양한 형식의 자발적인 정보발신과 상호 교류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한다는 말이다. 2014년 발간된 저서 《예술에 있어서 가치란 무엇인가》에서, 인터넷 공간을 포함한 작가와 작품의 노출 형태 전체를 갤러리로 생각하는 개념 전환이 필요한 시대라고 한 미즈마 아트 갤러리의 미즈마 스에오씨의 견해 역시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인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직후, 일본의 중심이 오사카와 교토 등 서일본 지역으로 이동하리라는 전망이 우세했지만 2014년 현재도 경제, 문화, 정치의 중심이 도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지리적으로 한국에 가까운 세토우치 내해 지역의 존재감이 높아졌다고 《REALTOKYO》, 《REAL KYOTO》의 발행인 겸 편집장 오자키 데쓰야는 지적한다. 후쿠타케 재단이 운영하는 Benesse Art Site Naoshima 및 동 재단이 중심이 되어 2010년에 시작된 아트 세토우치, 의욕적인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히로시마시 현대미술관, 유서 깊은 사립 미술관인 오하라미술관, 젊은 기업인 컬렉터가 등장한 오카야마 지역 등이 현대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동력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한편, 옛 수도인 교토에서도, 최근 국제무대예술제 KYOTO EXPERIMENT, 현대미술 이벤트 NUIT BLANCHE KYOTO, 국제사진페스티벌 KYOTOGRAPHIE 등이 활발하게 개최되고 있다. 그리고 교토 교외에서 도심으로 재이전이 결정된 이래, 교토시립예술대학 주최의 다양한 준비 활동이 펼쳐지고 있다. 미술시장의 중심이 아직 도쿄에 있다고는 하나, 흥미로운 움직임은 서쪽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오자키의 견해다.
2010년대 일본 현대미술의 중심거점은 어디일까. 본 기사의 취지를 넘는 대답이지만, ‘후쿠시마’여야만 한다고, 젊은 아티스트 컬렉티브 카오스*라운지의 미술가, 미술평론가 구로세 요헤이는 말했다. 물론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라,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사회의 트라우마를 일컫는 개념으로서의 후쿠시마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후쿠시마를 의식하지 않은 작품 제작과 비평은 불가능해졌다는 견해는, 구로세 이외에도 실로 많은 이가 공유하는 문제의식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구로세는 “시대란 자신들이 규정하는 것이 아니지만 ‘포스트 후쿠시마’가 보다 구체적인 부흥과 재건의 언어가 되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