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TOPIC| SHANGHAI Huang Yongping

 

황용핑 (40)

위 머리(头)> 객차, 철로, 동물박제 가변설치 2011~2016 2011년에 제작된 < Leviathanation >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당시 베이징에서 선보인 은 9.3m 차고와 머리가 없는 동물 40마리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번 작품에는 ‘좌회전 갈림길’ 철도를 함께 설치했다. 아래 < 곡마단(马戏团) > 나무, 대나무, 동물박제, 레진, 철 2012

<뱀 지팡이 Ⅲ: 좌회전 갈림길(蛇杖Ⅲ:左开道岔)>(3.18∼6.19)로 명명된 황융핑(黄永砅)의 개인전이 상하이 동시대예술박물관(上海当代艺术博物馆)에서 열렸다. 전시명은 익히 알려졌다시피 그리스·로마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는바,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순적 상황을 제시한다. 큰 스케일의 설치작업으로 유명한 작가는 일종의 경외감까지 자아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작가가 직면한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 궁금증을 풀어보자.

세상의 모든 충돌

권은영 예술학

중국 동시대 예술의 포문을 연 ‘85신조’ 미술운동의 대표적 단체 중 하나인 ‘샤먼다다(厦???)’의 중심에 서 있던 황융핑(?永?, 1954~)! 중국 저장미술학원(현 중국미술학원) 유화과를 졸업한 황융핑은 1989년 파리 퐁피두센터의〈대지의 마법사전〉을 계기로 프랑스로 건너가 정착했다. 그리고 10년 뒤, 1999년 그는 베니스 비엔날레 프랑스관 대표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가 후한루(侯瀚如)기획으로 3월 18일부터 6월 19일까지 상하이 동시대예술박물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설치작품을 선보이며 대규모 개인전을 연다.
상하이 동시대예술박물관 개관 이래 최대 규모의 설치작품이 등장했다. 바로 40미터에 이르는 황융핑의 〈뱀 지팡이Ⅲ(蛇杖Ⅲ)〉가 그 주인공이다. 〈뱀 지팡이〉는 이번 전시의 제목이자, 황융핑의 국제 순회전으로, 본래 2014년 로마 소재 이탈리아 국립 21세기예술박물관(MAXXI)에서 선보인 바 있는 작품이다. 당시 황융핑은 로마 지역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어, ‘종교 대항’이라는 주제로 총 8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이후 그는 자신의 개인전을 브랜드화하여 지난 2015년 베이징 소재 훙좐미술관에서 〈뱀 지팡이Ⅱ〉를 개최했다. 각각의 전시는 단순한 순회전이 아니라, 매번 소주제를 가지고 구성되는데, 두 번째 베이징 전시에서는 ‘영토 논쟁’을 주제로 했다. 왜냐하면 당시 중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영토’는 뜨거운 감자였기 때문이다.
3회를 맞는 올해 상하이 전시에서 기획자 후한루는 ‘좌회전 갈림길(左?道?)’을 통해서 세계 통치 역량의 운명에 대해 비판적 토론을 시도한다고 밝히고 있다. 가령 세계 경제체제와 중국의 경제체제는 상이하여, 여전히 완벽한 호환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또한 세계 대테러 공조는 또 하나의 세계 통치체제의 역량을 시험대에 올리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좌회전 갈림길’은 오늘날 세계의 흐름 속 우리의 운명’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갈림길’은 앞으로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의 표상이다. 세계화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제 지구 반대편 사건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으며, 유일무이한 정답과 이별한 지 오래다. 선택의 홍수 속에 사는 우리에게 ‘좌회전 갈림길’은 어쩌면 매일 맞닥뜨리는 우리 일상의 단편일지도 모른다. 이번 상하이 전시는 총 25점의 작품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첫 로마 전시 규모와 비교해보면 약 3배에 달한다.
줄곧 동서양의 문화 관계, 인간과 동물의 관계, 이데올로기 충돌의 표현 방식 그리고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작업을 해 온 황융핑에게 〈뱀 지팡이〉 속 뱀은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뱀과 용은 신화 및 종교 경전에 등장하며 지식과 지혜 그리고 동시대 공포와 기만 등 모순적인 의미를 보여줬다. 결국 그의 뱀은 동서양 문화의 접점에서 이데올로기의 충돌을 보여주는 표상인 셈이다. 또한 전시장에 대단한 존재감으로 등장하는 그의 〈뱀 지팡이〉는 관람객에게 일종의 경외감을 자아내며 문화 부호 자체가 가지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사색하게 한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이는 〈머리(?)〉작품은 25도로 기울어진 채 설치된 높이 7미터, 길이 11미터의 대형 설치작품이다. 〈머리〉는 본래 2012년 추즈제(邱志杰)가 기획한 〈상하이 비엔날레〉를 통해 상하이 동시대예술박물관에서 선보이고자 기획안이 만들어졌었다. 하지만 당시 실현되지 못했다가, 2016년 이번 개인전을 통해 비로소 현현되었다. 〈머리〉 작품이 이번 전시에서 갖는 의미 중 하나는 전시의 소주제 ‘좌회전 갈림길’의 은유라는 점이다. 기차의 한 끝에 이어진 철도는 두 갈래로 갈라지며 한 쪽은 에스컬레이터, 다른 한 쪽은 계단에 이어지며 동선으로 연결되고, 관람객으로 하여금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한다. 갈림길에서 좌회전할지 우회전할지 말이다.
〈머리〉에는 총 41마리의 머리 없는 동물이 등장한다. 작가는 “머리가 없는 동물은 일종의 위기감을 자아내지만 개체는 각자 따로 존재하며 사실 각자의 의미를 가진다”고 강조한다. 본 전시에는 머리가 없는 동물이 〈머리〉 작품 외에도 몇 번 등장한다. 전체 전시에는 총 75마리의 몸통밖에 없는 동물이, 〈머리〉, 〈곡마단(???)〉, 〈부가라치 산(布加拉什)〉 세 작품 속에 등장한다. 75마리의 동물 머리는 또 어디에 있을까? 작가는 2층 빨간 커튼 뒤 〈우두머리〉 작품 속에 동물의 머리들로만 구성된 작품을 배치하여 연결고리로 삼았다. 개체의 존재성을 강조하며, 그들 각자의 의미를 언급했던 작가의 이야기에서 대중사회 속 소시민의 존재와 그 가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이렇게 황융핑의 작품에는 동물 혹은 곤충의 형상이 자주 등장한다. 후한루는 1990년대 초 〈황화(??, Yellow Peril)〉에서 처음으로 메뚜기 형상이 등장했다고 회고한다. 여기서 황화는 황색 인종이 서양 문명을 압도한다는 백색 인종의 공포심을 함의하는 단어로 동양인을 의미한다. 당시 황융핑은 중국과 기타 문화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메뚜기를 이용하여 그는 중국인과 피식민자의 편견과 고정관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즉, 동물의 형상을 통해 양자 대립의 관계뿐만 아니라, 명확한 일대일 대입이 불가능하게 서로 뒤얽힌 복잡한 관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해외에서 많은 활동을 하는 황융핑은 사실 중국 미술사의 핵심 인물이다. 1989년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그는 중국에서 ‘샤먼다다(厦???)’라는 미술 단체를 조직하여 중국 미술사에서 전무후무한 파격적이고 전위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중국 저장미술학원을 졸업한 그는 저장(浙江)성 인근 푸젠(福建)성 샤먼(厦?)시에서 린춘(林春), 린자화(林嘉?), 차이리슝(蔡立雄), 자오야오밍(焦耀明) 등과 함께 ‘샤먼다다’를 조직했다. 단체 이름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이들은 다다이즘 정신을 따르며, 부정, 부조리, 저항, 허무주의 색채가 가득한 작품을 쏟아낸다. 이들이 대륙에서 큰 주목을 받은 계기가 된 것으로 단연 1986년 11월 23일 〈분소사건〉(焚?事件)을 들 수 있다. 당시 황융핑이 이끄는 샤먼다다 그룹은 “예술을 제거하지 않으면, 생활도 안정될 수 없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자신들의 작품을 샤먼신예술광장(厦?新????)에서 소각하는 행위예술을 단행한다. 이렇게 중국 미술사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황융핑의 이번 전시는 미술인들에게 중국 동시대 예술의 선봉에 있던 ‘자랑스러운’ 작가의 금의환향 전시로 포장되어 더욱 큰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정치적인 목소리가 담긴 작품도 적지 않은 이번 전시에 대해 중국 대륙의 예술계는 선배 작가에 대한 존경과 함께 매우 호의적이다. 전설적인 샤먼다다의 중심 인물의 상하이 동시대예술박물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설치 작품 전시일 뿐만 아니라, 후한루와 황융핑의 만남에서부터 본 전시는 개막 전부터 대륙 미술계에서 회자되었으며,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신작으로만 구성된 개인전이 아닌 구작이 다수 포함되었고, 〈뱀 지팡이〉는 세 번째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좌회전 갈림길〉은 중국 미술 애호가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호평을 받는 데 성공했다. 물론 〈뱀 지팡이〉는 매번 다른 소주제를 앞세워 새로운 이야기를 이끌었으며, 최근 연이은 테러 사건으로 ‘방향성’에 대해서 많은 이가 고민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과도 밀접하기에 더욱 큰 공감대를 불러일으킨 것은 아닐까? 이번 황융핑의 개인전을 통해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리는 청량함마저 느꼈다. ●

 소가죽, 양피, 대나무, 나무, 철 1570×1260×700cm 1997,사진 왼쪽은  알루미늄 2014 전시장 1층 가장 오른쪽에 설치된 화면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작품은 이다. ‘祸’는 냄비를 뜻하는 단어로 양 무리 속에 우뚝 솟은 소를 배치해 ‘양 냄비’ 속 소 한 마리를 비유한다. 소가 소를 먹어 걸리는 병의 원인을 신화적으로 해석해 사람이 소를 먹고, 소가 양을 먹고, 양이 사람을 먹는 구조로 인간의 잔혹함을 역설적으로 꼬집고 있다

< 양과(羊祸) > 소가죽, 양피, 대나무, 나무, 철 1570×1260×700cm 1997,사진 왼쪽은 <뱀 지팡이(蛇杖)> 알루미늄 2014
전시장 1층 가장 오른쪽에 설치된 화면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작품은 <양과(羊祸)>이다. ‘祸’는 냄비를 뜻하는 단어로 양 무리 속에 우뚝 솟은 소를 배치해 ‘양 냄비’ 속 소 한 마리를 비유한다. 소가 소를 먹어 걸리는 병의 원인을 신화적으로 해석해 사람이 소를 먹고, 소가 양을 먹고, 양이 사람을 먹는 구조로 인간의 잔혹함을 역설적으로 꼬집고 있다

 앞에서 포즈를 취한 황융핑

<양과> 앞에서 포즈를 취한 황융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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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TOPIC | BERLIN Julian Rosefeldt Manifes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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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Julian Rosefeldt < Manifesto > 2014/2015 ⓒ VG Bild-Kunst, Bonn 2016 아래 Julian Rosefeldt < Manifesto > 2014/2015 ⓒ VG Bild-Kunst, Bonn 2016

함부르거 반호프-게젠바르트뮤지엄(2.10~7.10)에서 열린 율리안 로제펠트(Julian Rosefeldt, 1965~)의 개인전 전시명은 ‘개인이나 단체가 대중에 대하여 확고한 정치적 의도와 견해를 밝히는 것’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 ‘매니페스토(Manifesto)’로 명명됐다. 프롤로그 포함 13개의 스크린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배우 케이트 블란쳇(Cate Blanchett)이 각각 분장을 달리해 아방가르디스트와 사상가의 발언을 연설조로 늘어놓는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이를 통해 로제펠트가 제시하는 “예술가가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무엇인지 살펴보자.

안녕하십니까? 모든 예술은 속임수입니다”

최정미 전시기획

전시를 기획한 안나 카타리나 게버르스와 우도 키텔만은 보도자료를 일레인 스터트번트를 인용해 “To give visible action to words”로 시작했다. 관람객으로 미어터지는 오프닝 그리고 일레인 스터트번트의 알 듯 모를 듯한 문구로 전시에 대한 궁금증은 증폭되었다. 긴 기다림 끝에 들어간 전시장은 어두웠고, 총 12개 프로젝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과 그 사이로 불안하게 움직이는 먼지 그리고 음향의 혼합 때문에 도망치듯 전시장 제일 뒤편에 설치된 스크린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완벽한 웨이브의 빨간 머리와 임플란트보다도 더 완벽해 보이는 가짜 이빨을 낀 듯한 케이트 블란쳇(이하 블란쳇)이 뉴스앵커와 리포터로 1인2역을 하고 있다. CNN뉴스 진행자 같은 발음과 억양으로 솔 르윗, 아드리안 파이퍼 그리고 일레인 스터트번트의 매니페스토에서 편집한 텍스트 “Good evening ladies and gentlemen, all current art is fake”를 외치고 있다. 리포터로 분한 또 다른 블란쳇은 억수같이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공격적이며 영웅다워 보이는 앵커 블란쳇을 받아주고 있다.
맞은편 벽에는 미국 남부 정통 보수파 어머니로 분신한 그녀가 점심 식탁에 둘러앉은 남편과 아들들을 위해 기도하는 형식을 빌려 다음과 같은 독백을 늘어놓는다. “I am for an art that is political-erotical-mystical that does something other than sit on its ass in a museum.” 청소년기 전으로 보이는 남자아이 셋은 눈을 뜨지도 감지도 않은 어정쩡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듯한 자세다. 남편은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아내의 중압감을 이겨내려는 듯 두 손을 모은 채 참고 있는 듯하다. 단지 식탁 앞에 조각상처럼 앉아 있는 개만 무념무상한 듯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있을 뿐이다. 다른 한 영상에서는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주식투자상담사가 “The iron network of speedy communications which envelops the earth”라고 외친다. 유가 하락, 주가 폭락, 중국 경제위기 등 마치 현재 세계경제를 예언한 듯하다. 베를린 중심에 있으며 단체 관광객의 핫스팟이기도 한 프리드리히스타트팔라스트 극장에서 러시안 악센트가 강한 안무가로 변신한 블란쳇은 외계인과 새를 합성한 듯한 복장 차림의 한 무용수들에게 마치 영웅처럼 “I demand the total mobilization of all artistic forces”라고 명령한다. 그녀의 과도한 연기는 거의 코미디에 가까운 수준이어서 관객은 실소하다가 시원하게 웃고 있다. 이렇듯 각 매니페스토 영상이미지는 설명하는 듯, 웃기거나, 역설적이거나 아니면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총 12편(프롤로그 1편)의 영상작품에서 교사, 펑크족, 퍼펫티어, 주식투자상담사, 노숙자, 매니저, 과학자, 장례식 주관자, 생산 근로자, 안무가 등으로 분한 블란쳇은 각 역에 맞는 연기력과 현란한 비주얼로 전시장을 꽉 채우고 있다. 할리우드도 울고 갈 완벽한 세트, 때로는 6시간 이상 걸렸다는 분장, 버즈 아이 뷰, 로 앵글, 클로즈 업 등 현란한 영화적 촬영 구도와 기법을 사용했지만,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과 분위기를 연출했다. 때로는 영상 촬영 장면을 그대로 보여주며 보이는 실제와 또 다른 실제를 부담 가지 않을 정도로 적절하게 섞어 놓았다.
율리안 로제펠트는 〈매니페스토전〉을 위해 지난 170년간 발표된 예술, 창작인의 매니페스토를 최대한 수집했다. 시인인 트리스탄 차라와 앙드레 브르통, 작가인 카지미르 말레비치, 클래스 올덴버그, 솔 르윗, 무용가 이본 레이너,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 그리고 영화감독 짐 자무시 등 60여 개 매니페스토를 모을 수 있었고 이를 12편의 연설문 형식이 아닌 연기할 수 있는 텍스트로 줄이고, 편집했다고 한다. 작가는 창작하지 않았고 단지 콜라주했을 뿐이라고 한다. 이렇게 재구성된 텍스트는 각 에피소드에서 역설적이며, 아름답고, 그로테스크한 형식으로 드러난다. 사조는 다다이즘부터 미래주의, 초현실주의, 플럭서스, 팝아트,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공산주의적 사고까지 총망라했다.
매니페스토는 과거 남성 전유물이었으며 주로 예술, 정치 분야에서 사용되었다. 이렇게 확실한 의도와 목적을 가진 매니페스토를 여성인 블란쳇에게 주었다. 그렇다면 율리안 로제펠트(이하 로제펠트)에게 예술인의 매니페스토란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는가. 2014년 후원자 중 하나이기도 한 바이리셔 룬드풍크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술인의 매니페스토는 예술계를 변화시키려는 것뿐만 아니라 세계를 변형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이를 위해 매니페스토의 시조라 할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부터 짐 쟈무시의 《영화를 만드는 규칙》까지 정리했다.” 또 한 인터뷰에서는 “예술가의 매니페스토를 통하여 행위 실험적인 에너지(performative Energie von Kunstlermanifesten)를 구현하려 했다. 또한 그 안에서 사고의 아름다움과 시적인 사유를 찾았다. 또한 그녀의 퍼포먼스를 통하여 인기도 없고 잘 읽히지 않는 매니페스토가 사람들에게 좀 더 다가오기를 바랐다”고 했다.
1965년 뮌헨에서 출생한 로제펠트는 건축을 전공했으며 현재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다. 2011년부터는 뮌헨 미술아카데미 영상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호프만 컬렉션, 쿤스트무제움 본, 쿤스트무제움 볼프스부르그, 올브리히트 컬렉션, DZ 컬렉션, MoMA, CAC 말라가, 버거 컬렉션 홍콩 등 세계 유수 미술관과 컬렉터들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매니페스토〉 는 ACMI, 뉴사우스 웨일스 아트 갤러리, 함부르거반호프, 스프렝겔미술관 후원을 받았으며 2016년에는 함부르거 반호프 외에 스프렝겔미술관, 한오버 그리고 루르트리날레에서 순회전이 열린다.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블란쳇 같은 여배우와 로제펠트의 협업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약 6년 전 블란쳇이 베를린에 방문했을 때, 베를린 소재 샤우뷰네 연극장의 극단장인 토마스 오버마이어와 함께 베를린니셔 갤러리에서 열린 로제펠트의 전시를 방문했다고 한다. 이때 이들은 우연히 만나게 됐고 로제펠트의 작품에 감동한 그녀가 작가에게 즉흥적으로 재능을 기부하겠다고 했다. 로제펠트는 이후 작품 콘셉트를 준비했고 이들은 작가와 영화배우로서의 단순한 기능적인 측면이 아닌 예술인으로서 아이디어를 긴밀히 교환하는 등 협업 형태로 일을 진행했다고 한다. 배우와 리서처로 융합된 블란쳇은 하루에 전혀 다른 두 역을 연기해야 하는 강행군에도 불구하고 모든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했다고 한다. 촬영은 2014년 베를린에서 12일간 매일 이루어졌으며 작가와 여배우는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촬영했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이 시리즈는 매니페스토 뿐만 아니라 블란쳇의 오마주(homage)이기도 하다고 전했다.
작가와 영화배우의 협업은 미디어아트 분야에서는 종종 이루어졌다. 하지만 연예인으로서 배우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여 콘셉트가 이를 덮어쓰고 예술작품으로서 완벽하게 융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배우가 작품 제작 과정에 깊이 연관된다거나 아이디어를 공유, 교환하는 일은 더울 드물 것이다. 〈매니페스토〉에서는 이러한 전례와 우려를 한 방에 날려준다. 각 영상작품 분량은 전시장에서 소화하기 쉽지 않은 약 10분 정도이다. 모든 작품을 다 감상하려면 약 두 시간 가량 소요된다. 관객은 영화관의 푹신한 의자가 아닌 등받이도 없는 딱딱한 전시장 나무의자나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있거나 벽에 비스듬히 서 있다. 음향도 겹친다. 그러나 놀랍게도 상당수의 관객은 각 매니페스토를 마치 책을 숙독하듯 하나하나 읽어 나갔다. 〈매니페스토〉는 크지 않은 공간에 이들을 약 두 시간 정도 잡아두는 데 성공한다. 작가가 말하는 ‘사고의 아름다움과 시적인 사유’가 전해지는 모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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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FACE 2016 라선영

인간을 말하다

더 이상 ‘조각’이라는 장르 개념은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설치, 영상 등이 대세를 이루는 지금의 미술계에서 나무로 인체 형상을 제작하는 라선영의 작업은 조금 특별해 보인다. 그렇다고 전통적인 작업은 아니다. 어쩌면 나무로 만든 인물조각이 전통적이라는 인식은 어디까지나 편견에 불과할 것이다. 작가는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을 따라가지 않고 그냥 자신이 하고 싶은 작업을 할 뿐이다.
인간의 다양한 행태에 관심이 많은 작가는 작업 초기부터 70억 명의 인물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나무를 깎는 행위는 그녀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가장 잘 맞는 표현방식이다. 나무 특유의 따뜻함도 인물 형상과 잘 어울린다. 그녀가 만든 인물조각은 특별한 기교도 디테일도 없다. 하지만 채색 작업을 통해 형광색 조끼를 입은 경찰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여중생 등 조각 하나 하나의 개성이 뚜렷이 드러난다. 작가는 나무 특유의 물성을 압도하거나 압도당하지 않고 사람 형태라고 인식할 만큼만 깎는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모든 작품은 그녀의 평생 프로젝트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다양한 인간 군상은 그 시대의 삶의 풍경을 반영한 거대한 아카이브가 될 것이다.
<런던>, <서울, 사람> 시리즈가 주변에서 관찰한 사람들의 풍경이라면 <빔(Beam)>, <타워>, <벽(Wall)> 시리즈는 인간의 내면세계, 특히 욕망에 관한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 실제로 인물조각은 당대의 열망 또는 염원을 그대로 담아낸다. 예를 들어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석기시대 다산의 상징이었고, 거대한 동상이 다수 제작된 시대에는 이데올로기 전달이 중요한 목표였다. 30cm 남짓한 크기로 바닥에 낮게 배치된 라선영의 목조 군상은 신이 사람을 내려다보듯 관객에게 전지적 시점을 부여해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만든다. 작가에게 조각품은 그 자체로도 의미 있지만 그것들이 연출된 상황도 중요하다.
6월 카이스갤러리에서 선보이는 개인전 <반짝이는 것들>에는 새로운 형태의 작업을 선보일 예정이다. 작가는 모두가 주목받고 싶어하는 동시대 세태를 담아내기 위해 목조로 제작한 신부(新婦) 형상을 도자기로 대량 제작했다. 깨지기 쉬운 재료인 도자기는 현대인의 연약한 자아와도 맞닿아 있다. 도자기로 만든 신부 부대를 바닥에 깔고 천장에는 반짝이는 종이로 만든 낙하산 부대를 매달을 계획이다. 능력이나 자질 없는 낙하산 인사처럼 이들 형태는 반짝여서 눈에 띄지만 옆에서 보면 제대로 안보일 만큼 얄팍하다. 이처럼 동시대 삶의 모순을 담아내다 보니 라선영은 목조각이 아닌 새로운 표현방식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녀의 작업에서는 하고 싶은 말과 재료적 특성, 표현방식이 일치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슬비 기자

라선영
1987년 태어났다. 이화여대 조소과와 영국왕립예술학교 조소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대중의 새발견>(문화역서울284), <플라스틱 신화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등에 참여했다. 6월 23일부터 7월 22일까지 카이스갤러리에서 3번째 개인전 <반짝이는 것들>을 개최할 예정이다.

 나무에 채색 가변 크기 2015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전시광경

<타워> 나무에 채색 가변 크기 2015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플라스틱 신화> 전시광경

NEW FACE 2016 김하나

불안전한 시대의 온화한 풍경

고요한 풍경, 느슨한 움직임. 새하얀 빙하는 세월의 흔적을 겹겹이 담고 이동하며 일상에서 볼 수 없는 낯선 풍경을 선사한다. 작가 김하나는 일상과 동떨어진 백색의 빙하에서 자신을 발견했다. 작가는 빙하가 지닌 수만년의 시간과 하얀 빙하 벽에 흡수되고 산란되는 수많은 빛과 빙하 층의 결, 사이의 틈과 구멍에 집중했다. 그는 실견한 빙하를 캔버스에 옮기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본 빙하 이미지와 영상자료를 통해 그만의 빙하를 상상한다. 실견하지 않은 물질을 그리다 보니 표현의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 거대한 자연에 억눌리지 않고 재해석할 수 있는 해석의 자유로움을 얻는다. 이미지를 통해 자연의 모습을 접하니 거대한 자연에 압도되지 않고 미시적인 부분에서 새로운 시각적 미학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빙하의 새하얀 ‘색’은 작가가 빙하를 선택한 첫 번째 이유다. 흰색은 빛을 머금고, 내뿜으며 빛의 스펙트럼을 키우는 특징이 있다. 빙하 주변에 빨간 토양이 있으면 빙하는 붉은 빛을 띤다. 시간과 날씨에 따라 흰색은 다양한 옷을 입는다. 작가에게 빙하는 프리즘과 같다. 빙하가 빛을 흡수해 새로운 색을 뿜어내듯 작가는 순백의 캔버스를 다양한 색의 온도로 채운다. 흰색과 다른 색의 자연스러운 만남은 그의 작업을 안온한 분위기로 만드는 결정적 순간이다. 그의 작업에 차가운 빙하는 존재하지 않는다. 빙하가 바다를 부유하듯 안단테로 그어진 붓의 속도감과 봄날의 꽃망울 같은 따뜻한 색이 유독 많이 사용됐다. 차가운 빙하가 아니라 따뜻한 빙하다.
빙하가 지닌 시간성은 작가의 불안감을 표현하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 그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담는 ‘도구’로 빙하를 선택한 데에는 그것이 지닌 불안한 운동성과 시간성도 한몫 한 듯하다. 빙하풍경은 천편일률적이지 않다. 물 위에서 천천히 흐르고 서서히 변화한다. 그러나 빙하가 녹아내릴때는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파괴력으로 소멸한다.
작가가 가진 불안감과 빙하의 관계를 살피다 보면 “왜 빙하일까?”라는 원초적인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 질문은 작가 스스로도 자주 던지는 물음이다. 처음 시작은 개인의 불안감에서 비롯됐다. 작가는 “졸업 후 작가로의 전환 과정에서 ‘나’를 찾고 안정이 되면, 그때 작업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작업 속에서 안정을 찾는 자신을 발견했다”며 “나를 받아들이는 시간 자체가 그림을 그리는 출발점이었다”고 말했다. 빙하는 곧 시간의 유한함을 나타낸다. 젊은 작가에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작업과 동행하는 숙명과 같다. 어쩌면 작가는 빙하의 가변성에서 그가 느끼는 불안함을 찾은 것은 아닐까?
이번 전시에는 2년 반 정도 준비한 작업이 출품됐다. 젊은 작가의 개인전 준비기간으로 꽤 긴 시간이다. 작가는 빠르게 변화하는 시간에 불안감은 느끼지만 조급함이 없어 보인다. 느리게 흐르면서 다양한 색을 머금고 풀어내는 빙하는 작가의 모습과 닮아있다. 물론 앞으로의 작업에서 다른 풍경이 펼쳐질 수도, 작업을 해나가는 속도에서 변화가 있을 수도 있다. 인터뷰 내내 작업을 시작하는 작가로서 작업의 변화 가능성을 열어두는 그에게서 그림에 녹아있는 찬찬한 부드러움과 침착함이 느껴졌다. 작업의 소재나 주제가 바뀌더라도 작품을 닮은 그의 모습이 작업에서 온전히 드러날 것이다.
임승현 기자

김하나
1986년 태어났다. 첼시 런던예술대학교 순수미술과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에서 활동 중이다. 2015년 커먼센터 그룹전 〈오늘의 살롱 2015〉에 참여했고, ‘2016년 Shinhan Young Artist Festa’에 선정되어 5월 2일부터 6월 8일까지 신한갤러리 광화문에서 개인전이 열린다.

〈 Untitled 〉 캔버스에 유채 130.3×162.2cm 2016

〈 Untitled 〉 캔버스에 유채 130.3×162.2cm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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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예선의 달콤한 작업실 8

옛날 음악을 들으러 갔다

집에 있던 J의 오래된 턴테이블을 작업실로 옮겼다. 뽀얗게 먼지가 앉은 LP판들도 박스에 담아왔다. 오랫동안 내버려둔 물건이라 제대로 소리가 날까 모르겠다. 망가진 바늘칩을 새것으로 바꿔 끼우고 카트리지를 이리저리 움직이니 플래터가 뱅글뱅글 돌아가기 시작한다. 아무 판이나 꺼내서 얹었다. 존 덴버가 희생양이 되기로 했다. ‘퍼햅스 러브’. 존 덴버의 미성이 매끄럽게 뻗어나가면 플라시도 도밍고가 바이브레이션 바리톤으로 중후하게 이어가는 그 노래.
판이 돌아가자 클래식 전주부터 울렁울렁하더니 존 덴버의 미성은 어디 가고 테이프 늘어진 노랫소리를 뱉어낸다. 존 덴버가 머쓱해할 만큼 한바탕 웃음이 터져나왔다. 벨트가 늘어진 모양이다. 회전 속도를 조절하는 버튼을 눌러보고 카트리지의 이음새를 살펴보고 여러번 돌려보니 본래의 속도를 찾아간다. 존 덴버의 울렁증도 줄어들었다. 그제야 나는 낡아서 너덜너덜해진 종이재킷에 든 LP들을 박스에서 꺼낸다.
“세상에! 이게 언젯적 물건이야!”
리차드 클레이더만의 피아노, 폴 모리아 앙상블의 추억의 영화음악, 1980~1990년대 유행했던 음악들이 뛰쳐 나온다. 들국화, 015B, 이문세, 팻 매스니, 비틀스 베스트, 퀸, 조지 마이클, 그리고 유재하.
한 장의 앨범을 발표하고서 영면에 든 유재하. 그 빛나는 목소리를 들으며 뭉클한 시간이 흘렀다. CD의 선명한 음질과 다른, 먼 곳에서 들리는 듯하면서 조금은 느린 사운드가 스피커에서 울린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나 ‘여행스케치’처럼 낭만이 풀풀 쏟아지는 이름들 앞에서는 그만 머쓱해진다. 직경 30cm짜리 재킷을 더듬어보니 엉성한 레이아웃과 강렬하지만 빛바랜 컬러가 눈에 안긴다. 지금의 산뜻함, 세련됨과는 다른 손맛 나는 물건이라고 해두자.
1990년대의 풋풋한 대학생 밴드인 ‘015B’는 혜성처럼 등장했었지. 보컬 윤종신의 목소리가 더할 나위없이 맑고 곱다. 나는 무한궤도의 신해철을 더 멋진 아티스트라 여겼지만 윤종신의 감미로움을 멀리할 수는 없었던 기억이 난다. 20년 전에 말소된 소리들이 기억처럼 퍼져나온다. 음악은 기억과 접목되어 있다. 지금과 완전히 다른 존재로서 내 몸이 떠오른다. 음악을 듣고 노래를 따라 부르던 나, 혹은 우리. 영화 <더티 댄싱>의 사운드 트랙은 영화보다 아름다웠다. ‘헝그리 아이즈’의 신나는 리듬, ‘쉬 라이크 더 윈드’의 나긋한 발라드. 리듬이 분명하고 흥겨운 가사가 명쾌하다. 그땐 음악이란 들으면서 몸을 흔드는 거였다. 어쩌면 온몸을 관통하는 감미로운 ‘음악의 시대’였다. 지금과는 다른 음악의 시대를 살아왔던 것 같다.
턴테이블을 가져다두었다고 하니 친구들이 구경하러 왔다. LP를 모으고 듣던 세대들이라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다. 책장 어딘가에 꽁꽁 싸인 채 꽂혀 있던 LP들, 그러나 아무렇게나 처분할 수 없는 것들을 작업실에 가져다주기도 했다. 하나하나 꺼내서 먼지를 닦아내고 플래터에 올리면 약간의 뜸을 들인 후 음악이 시작되었다. 그 잠깐의 무음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영화가 시작된 직전의 암전에서 느끼는 기대감과 같다고 할까? 아날로그 시대의 음악이란 그런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검은 비닐을 고르고, 먼지를 닦고, 바늘을 제자리에 두기 위해 움직이고 바늘이 검은 홈 사이의 굴곡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보고 굴곡의 신호가 모여 음악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이 시작되기 전 약간의 쉼표, 두어 마디 정도 튀거나 지지직거리는 소리도 감수하는 것. 수고로운 노력이 필요한 것들은 더 큰 아름다운 무언가를 돌려준다.
한번은 J가 LP가 한가득 담긴 상자를 들고 왔다. 오래 알고 지내던 선배의 LP라고 했다. 그는 하던 일이 잘 안 되어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해야 할 상황이었다. 오죽했으면 낡은 LP까지 모두 꺼냈을까. J는 LP 상자를 홍대 앞 중고 LP가게에 가져갔다. 가게에서는 이유를 대며 선배의 LP를 구입하지 않았다. J는 미안한 얼굴로 묵직한 상자를 선배에게 도로 가져갔다.
“차라리 다행이래.”
그날 저녁 J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옛 추억이 담긴 물건들인데 그것마저 모두 팔렸다면 얼마나 쓸쓸했겠냐며.”
LP 상자를 다시 받아들고 안심했을 선배를 생각하니,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버릴 수 없는 추억이 있음을 알겠다. 먼지가 자욱한 다락 한 켠에 놓여있더라도 추억이라 부를 수 있는 물건들이 있어서 우리의 슬픔은 줄어드는 지도. 무용해 보이지만 간절한 물건들이 있다. 이 물건들은 삶의 드라마를 하나씩 품고 있다. ●

CRITIC 한운성 디지로그 풍경

이화익갤러리 5.4~24

박영택 경기대 교수
한운성의 그림은 항상 특정한 형상이 화면 중심부를 차지하고 주변은 단호한 색면으로 마감되어 있는 형국이다. 구상(재현)과 추상이 공존하고 은유적인 이미지와 평면의 화면이 맞물려 있으며 익숙한 일상의 편린들이 느닷없이 발췌되어 나앉는다. 구체적인 삶의 공간에서 분리되어 적막한 화면에 내던져진 듯한 그 이미지는 작가가 현실에서 발견한 이미지이자 생각거리를 안겨준 이미지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마치 실존하는 것처럼 단단한 존재감을 구현하며 직립해 있다. 오로지 그 이미지만을 독점적으로 강조하는 연출은 사실적인 묘사와 경쾌하고 활력적인 붓질과 짙은 그림자를 거느리며 등장한다. 그리고 배경은 그 이미지를 강조해주는 모종의 막 기능을 하면서 펼쳐진다. 일종의 도상에 해당하는 그 이미지는 작가에게 있어 자신의 시대를 드러내 의미심장한 상징일 것이다. 찌그러진 콜라 캔을 비롯해 1980년대 초에 등장한 받침목과 이후 문, 벽, 매듭, 신호등, 박제, DMZ 풍경, 과일. 그리고 이번 전시에 출품된 건물의 외관을 그린 그림 등이 모두 그러하다. 특정 오브제를 채집하고 이 오브제를 평면의 화면에 배치, 배열한 후 그것의 존재성을 강렬하게 부각시키는 일련의 조형적 장치를 세심하고 감각적으로 부려놓은 그림들이다.
근작인 <디지로그 풍경> 시리즈는 디지털로 채집한 건물의 파사드 사진을 아날로그 방식인 그리기로 옮겼다는 의미인 듯한데 이를 통해 건물의 외관 뒤에 자리한 본질이 뭔지 질문하거나 괴이한 껍데기로 치장한, 천박한 한국의 풍경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이 작업은 이미 2011년 초반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한운성이 채집하고 배열한 상징적 이미지들, 오브제들은 산업사회와 인간 소외, 분단, 유전자 조작, 급변하는 한국 사회의 단면 등을 암시하는 징표들이다. 생각해보면 그가 오랫동안 그려온 이미지는 현대 문명과 동시대 한국사회가 대면한 여러 문제를 골고루 건드리고 있는 모종의 징후적인 이미지들이고 그 이미지를 빌려 현실을 응시하는 자신의 내면을 은연중에 투영해왔다고 본다. 작가는 감각적인 재현술을 지닌 그의 손의 기능을 발화시키면서도 일반적인 구상화의 관행에서 벗어나면서 동시에 현대미술로서 편입될 수 있는 구상, 다시 말해 평면성과 추상적 요소가 공존하는 구상화를 고려하는 한편 내용주의와 형식주의의 긴장감 있는 균형을 고려한다. 보편적인 구상화로 보이지만 실은 그 이미지는 매우 얇은 물감의 물성의 흔적, 납작한 화면의 평면성이 두드러지게 검출되는 화면이자 그러면서도 매우 환영적인 이미지를 다소 기이하게 드러낸다.
그 같은 그림은 결국 지난 1960~1970년대의 추상 일변도의 화단과 1980년대의 민중미술, 그 양극단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그 모두를 아우르는 나름의 전략적 측면이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캔버스의 2차원성과 이미지의 3차원성을 혼재시키는 한편 미니멀리즘과 색면 추상을 껴안고 있고 다시 그 위에 사회성 짙은 메시지를 올려놓으면서도 여전히 손으로 그려지는 그림의 맛과 환영성을 올려놓고 있는 것이 한운성의 그림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써놓고 보면 한운성의 그림은 너무 많은 고려 속에서 풀려나온다는 느낌이다. 그것들은 기실 작가 작업의 알리바이를 만들어온 것들이자 그만의 그림 특성을 구현해온 것들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한운성의 그림을 일련의 틀/경계 안에서 제한해왔던 것은 아닐까?

위 한운성 <생텍쥐페리 기념관>(맨 왼쪽) 종이에 아크릴 2015

CRITIC 이상길 Contact

미부아트센터 5.13~6.23

김승호 동아대 교수
Contact. 조각가 이상길의 주관심사다. 형태가 공간으로, 공간이 형태로 드러나는 중견작가의 노정이다. 대작과 소작이 면적이자 구형적인 조각에 첨가되어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이 공존하고, 차갑고 화려한 형태들로 물질적이자 정신적인 경계마저 무색해지는 콘택트다. 중견조각가의 주관심사를 파악하는 기준이 보편적인 기준을 넘어선다. 이상길이 선택한 ‘콘택트’는 칼 세이건(Carl Sagan)이 1985년 발표한 공상과학소설의 제목이자 1997년 세계의 주목을 받은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서둘러 우리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중견작가의 노정이 그다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콘택트>는 우주에 있다는 베가성의 아름다운 해안에서 아버지의 형상과 짧은 만남을 이룬 엘리 애러웨이(조디 포스터)가 지구와 우주를 넘나든다는 줄거리의 공상과학영화다.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면서 경험한 은하계의 수많은 정보와 여행 중 카메라에 찍힌 영상자료가 시청각적 증거물로 채택되었다. 우리에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고, 공상이 공상으로만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도 남겼다. 지구라는 현실세계가 가상세계인 은하계를 인식하는 조건인 반면에, 조디 포스터의 탐구 욕구와 교신 연구는 그를 마침내 보이지 않는 세계로 내몰았고 불가능이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까지 담았다. 우주선이 발사된 직후 바다에 추락하여 실패로 끝났다는 주변의 주장과 설득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18시간이라는 은하계의 시간이 기록되어 실재/우주와 가상/베가성의 경계마저 되물은 <콘택트>다.
Contact. 서구에서는 문화산업의 축이 된 반면에, 우주는 볼 수 있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아우르면서 우리들 삶 속에 스며 있다. 달에 계수나무와 토끼가 있다는 이야기는 우주를 눈으로 보려는 우리에게 상상력을 자극했고, 볼 수 없는 우주는 신비로움과 동시에 경외감을 갖게 하여 우리에게 이상길의 조각세계에서 경험해보라고 초대한다. 관조로 초대한 콘택트의 미술세계에 응할지 머뭇거릴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더라도 우주에 대한 호기심은 “보이는 것 너머에 대해 상상할 수 있을 때 예술은 풍요로워질 수 있다”(최태만, <내 마음의 우주선에서 보내온 신호>, 2006, 전시도록에서 인용)는 작가의 주장과 상반되지 않을 것이다. 물질과 제작 방식이 빚어낸 형태미를 꼼꼼히 뜯어보자. 촘촘하게 용접한 흔적이 안으로 그리고 밖으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원추형과 반원추형, 크기가 다양한 입방체의 작품들이 배치되어 우주공간으로 향하는 관객의 상상력이 풍요로워지고, 네거티브와 포지티브가 조우한 강한 원색의 추상적 형태(타원형)들로 촉각의 세계는 풍부해진다. 색이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강령이 내포된 최근의 신작들, 오목과 볼록의 각기 다른 형태가 상호 보완하는 변곡점들도 다양하다. 그러한 이계도함수f(x)의 부호가 바뀌는 방법마저 두 가지 색이 합쳐져 오목과 볼록의 상태가 바뀌는 지점들이 다채롭다. 수학적이자 과학적인 작품 제작 원리로 현대미술을 관통한 신작들이 눈에 띈다. 서둘러 해명하자. 볼 수 없는 우주가 작가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형태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선사한 반면에, 미술은 색이 형태이고 형태가 색이라는 형식미에서 구체화되었고 오목과 볼록의 변곡점들이 작품의 제작 방식에 예속된다는 것이 이번 전시의 특징이다.
2016년 이상길의 전시 는 공간으로 상상하고 볼 수 없는 세계와의 교신을 요구한다. 전시에서 작업 방식의 다양성이 획득된 반면에, 관조로 초대 받은 우리는 미지의 세계를 가시화하는 것이 미술의 임무라는 진리에서 상상하고 교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위 이상길 <Contact> 스테인레스 2016

CRITIC 박종규 Maze of Onlookers

리안갤러리 서울 5.12~6.30

윤진섭 시드니대 명예교수
이처럼 파당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단어를 쓰고 싶지는 않지만, 지역에 거주하는 작가가 서울에 올라와 작품을 발표하는 일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른다. 작품의 운송에서부터 설치에 이르기까지 신경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이다. 특히 지역에서는 유명할지 몰라도 서울 화단에 이름이 다소 생소한 작가의 경우, 모종의 심리적 부담감도 작용한다.
박종규의 경우, 서울 화단 입성을 대대적으로 알린 이번 개인전은 그의 존재감을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그는 지난해 경북 영천 시안미술관에서 가진 초대전이 큰 성공을 거둔 여세를 몰아 이번 전시에 임했다. 회화는 물론, 설치, 오브제, 미디어아트에 이르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다양한 매체를 동원하여 지난 수년간에 걸쳐 관심을 기울여온 주제를 성공적으로 구현했다. 원래 시안미술관의 전시 프로그램 목적이 주목받는 지역 작가를 선정하여 국제적인 작가로 육성한다는 데 있었던 만큼, 전시 규모 역시 타이틀에 걸맞게 대규모였고, 박종규는 그러한 목적에 부응해 자신의 전 역량을 전시에 투여한 바 있다. 따라서 그의 이번 리안갤러리 서울 전시는 말하자면 지난해 시안미술관 전시를 축소하여 서울에 선보이는 매우 의미있는 행사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상업화랑의 전시는 일정한 한계를 지니게 마련이다. 최근 들어서 일부 메이저급 화랑들이 설치나 미디어아트와 같은 비정형적인 전시 형태를 지향하고 있는 것처럼, 리안갤러리 역시 정통적인 회화의 매체인 캔버스의 틀을 벗는 과감한 시도를 감행했다. 1층 전관을 이용해 벽면에 직접 작품을 설치하는 벽화 형태를 취한 것이다. 이 작품은 자신이 수년간 추구해온 컴퓨터 드로잉의 일부이다. 흑백의 선이 자아내는 과감한 시각적 콘트라스트가 압권인 이 거대한 설치작품은 지하 전시장으로 들어가기 전 긴장감을 유발하는 동시에 궁금증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박종규의 선과 점(dot)을 이용한 대형 그림들은 사물의 이미지에 대한 디지털적 번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인코딩(Encoding)’은 컴퓨터를 활용한 박종규의 작업 요체를 설명해주는 표제어이다. 흔히 ‘암호화하다 혹은 암호로 고쳐 쓰다’는 의미를 지닌 ‘인코딩’이란 단어는 실제의 세계를 기호의 세계로 변환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점자처럼 보이는 점은 점자가 의미하는 세계와는 관계없이 실제의 세계를 암호로 전환한 기호의 세계이다. 마찬가지로 바코드를 연상시키는 박종규의 선의 회화는 경제적 교환 기호체계로서의 바코드와 관계 없이 컴퓨터상의 픽셀(pixel)의 조합이 이루는 이미지의 세계이다.
박종규는 컴퓨터가 수행하는 이 픽셀의 조합 원리를 사용하여 특정한 대상을 찍은 사진이나 심지어는 음악조차 ‘코드화’하여 이미지로 전환한다. 따라서 박종규의 점이나 선 그림들은 지극히 기계적인 성격의 회화인 것이다. 이처럼 그가 시도하는 새로운 회화적 방법론은 작가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는 순수한 기계적 드로잉이라 할 수 있다. 그 기계적 드로잉을 입체로 구현한 것이 이번 전시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기계가 수행한 거대한 그림들과 각기 다른 장면을 보여주는 20여 개의 모니터가 매달린 구조물에 사운드와 시각물이 결합, 게다가 전시장에 들어온 관객의 모습이 투명된 모니터 등 박종규는 특유의 융합적 사고를 통해 전시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 나가고 있다.

위 박종규<2016 Maze-201651236-40>(왼쪽위) 포멕스, CNC 2016

CRITIC 권경환 & 금혜원 한숨과 휘파람

원앤제이갤러리 4.15~5.13

김남인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노래의 기원을 두려움과의 관계에서 찾기도 한다. 어두운 곳을 혼자 걸어갈 때,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아이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존재는 감지하지만 정체를 파악할 수 없을 때, 아이는 발소리를 크게 하고 노래를 부르며 자기 주변의 공기를 흩뜨려 본다.
권경환·금혜원의 2인전 <한숨과 휘파람>은 지금 시대의 이주(移住)와 정주(定住), 그리고 그것이 파생시키는 삶의 상태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권경환은 철제 앵글을 활용해 전시장 곳곳에 어떤 구조물들을 설치해 놓았다. 작품들은 최소 단위의 앵글들이 연결된 형태이기 때문에 조립, 분해, 재조립이 용이하지만, 추상적이면서도 아직 하나의 완결된 기능성에 이르지 않은 상태라 불안정해 보이기도 한다. 벽의 한쪽 구석이나 모서리의 형태에 맞춰 설치된 크고 작은 구조물들은 주어진 공간의 크기가 구조물의 규모를 결정짓는 공간의 메커니즘을 부각시킨다. 색이 칠해진 앵글들을 볼 수도 있는데, 이때 그가 사용한 재료는 외부 구조물의 부식을 막는 방청도료이다. 임시 구조물의 건축용 재료들은 작가에 의해 추상적, 기하학적 형태들로 만들어지고 전시장에 배치된다. “가정식 조각-균형”과 같은 작품 제목은 현재 주거문제로 말미암아 이동과 정착을 빈번히 반복해야 하는 사람들이 편의를 위해 선택하는 조립과 해체식 가구를 구체적으로 떠올린다.
권경환의 작업이 공간을 실질적으로 점유하고 그곳에 맞추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상기시킨다면, 금혜원의 사진작업들은 공간을 한때 점유했었으나 이제는 떠나가버린 삶의 흔적들을 보여준다. 5년 이상 사용되지 않는 공간으로 남아있던 질병관리본부의 건물 내부를 촬영한 작가의 사진들에는 무신경하게 놓인 판자, 영화 포스터, 낡은 의자와 전화기 등이 등장한다. 얼룩덜룩해진 녹색의 유리창 시트지를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빛은 절대적이면서도 상대적인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 캐비닛 안의 물건들은 정체를 쉽게 알아볼 수 없게 먼지가 자욱하고, 누가 누웠을지 모르는 침상은 그 부재의 존재감을 드러낼 뿐 시커멓게 때가 타 있다. 당직실이 갖는 공간의 임시성은 많은 사람이 머물러야 했지만 결국 주인 없이 방치될 수밖에 없는 공간의 운명을 예견한다. 사진의 구체적 시간성은 영화 <타이타닉>(1997)의 포스터와 같은 사물들의 존재로 암시될 뿐이다. 내부의 공간 곳곳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버려진 공간들로부터 어떤 정서들을 이끌어낸다. 한 개인이 사용했을 물건들이 버려진 채 나동그라져 있는 장면을 가만히 보다 보면 지금의 삶들에 존재하는 숱한 유기(遺棄)의 가능성이 떠오르기도 한다.
1층과 2층 전시장이 무게 중심을 달리해가며 두 작가의 작품을 공간상에 함께 배치했다면 3층에 전시된 <한숨과 휘파람>(2016)은 금혜원의 사진 속 공간이 물리적 공간으로, 권경환의 기하학적 조형물들이 내러티브의 단서들로 치환된 듯한 설치작품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본 설치작업에는 ‘소리’가 작품의 새로운 요소가 된다.
오랫동안 버려진 빈 공간에서는 어디서 나는지 알 수 없는 바람소리, 삐걱거리는 소리, 금속 울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짐을 정리하며 한동안 사용하던 책장을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는 이주자들이 있을 것이다.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공간을 찾고 그 공간 안에서 살아갈 방법들을 궁리한다. 그 궁리는 실질적이지만 또한 절박한 것이기도 하다.
이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자.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는 소리처럼 삶의 토대에 대한 두려움은 산포된다. 발소리와 노래를 말한 이유는, 이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길을 터가는, 옮기고 옮아가는 많은 사람의 움직임 속에서, 두려움을 헤쳐 나가는 예술 행위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두 작가의 작품이 서로의 이해를 도우면서 한편으로 새로운 문제의식의 지점을 환기시키는 전시였다.

위 원앤제이갤러리에서 열린 <한숨과 휘파람> 전시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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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 허윤희 새의 말을 듣다

LIG 아트스페이스 한남 스튜디오 엘 5.12~6.9

김최은영 미학
간단하지 않았다. 목탄, 발, 나무, 별, 물. 낱개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상들이다. 이들은 허윤희의 움직임을 거치면서 더 이상 간단하지도 분명하지도 않게 된다.
현대 시각예술 작품을 마주할 때 파악되는 지점은 대부분 작가의 개념 즉 머릿속이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선 작가의 몸이 보였다. 거친 목탄을 휘두르고, 지우고, 다시 채워 넣고, 힘을 주고, 멈췄다가 휘몰아치는 행위 말이다. 여기서 작가의 손이라고 표현하지 않은 이유는 축적된 선과 지워진 흔적들이 손을 넘어 팔, 그리고 어깨와 허리 즉 몸을 사용해야 나올 수 있는 범위이기 때문이다. 몸은 예술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다. 그것은 대상으로서의 중요성뿐 아니라 체득(體得)이란 단어처럼 덕(德=得)을 깨닫는 것은 머리가 아닌 몸(體)으로 조어(造語)된 것에서 그 연유를 유추할 수 있다. 몸으로 얻은 진리는 머리로 학습한 지식과는 분명 다르다. 허윤희 그림과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이러한 풀이를 충분히 가능케 한다. 발이 나무가 되고, 혈관처럼 보이는 선이 나무의 결이 되는 모습은 기괴하지 않고 원래 그러한 것이 있는 양 자연스럽다. 게다가 작가의 행위가 중요한 흔적으로 화면에 남았다. 선은 흐르고 있다. 정지된 채 죽어버린 풍경이 아닌 움직이는, 살아있는 선이다. 그래서 <발-춤>은 또렷하게 발-춤으로 보인다. 낱개의 발과 춤처럼 간단하진 않고, 분명하게 ‘무엇’이라고 명명할 수 없지만 동감할 수 있는 시각언어다.
마르고, 울창하지 않고, 쓸모없어 보이는 산길에서 스쳤을 나뭇잎, 풀꽃, 이름 모르는 새는 목탄만이 가지고 있는 미묘한 색감과 거친 질감, 지웠을 때 뿌옇게 드러나는 효과를 통해 탁월한 감정을 부여받는다. 허망하고 애잔하다. 경쾌하진 않지만 절대 비극은 아니다. 존재했던 모든 것은 목탄처럼 지워질 것이다. 그러나 지워도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는 목탄의 흔적처럼 실존이다.
사라질 생명성에 대한 <헌화>와 아련한 기억 어디쯤에 있던 <새>는 아름답게 다듬어지고 정형화된 비례를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러나 마음을 움직인다. 보는 이의 생각을 흔드는 일. 감정이 움직이는 일. 예술의 역할이다. 허윤희는 비미(非美)적인 것에서 아름다움을, 터무니없는 조합에서 평범한 이치를, 마르고 썩은 것에서 생명의 의의를 추구하려 했다. 겉은 말랐지만 내용은 풍만하고, 옅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짙으며(外枯而中膏, 似淡而實濃), 현란함이 극에 도달하면 평담함으로 돌아간다(絢爛之極, 歸于平淡)는 소식(蘇軾, 소동파)의 이야기와 너무도 닮아 있다. 수많은 선이 중첩되고, 삭제됨을 반복하며 작가는 화면을 닦듯 마음을 닦았을 것이다. 그렇게 고스란히 담겨진 이야기는 울림이 된다. 사라질 숙명을 알면서 진행한 벽화작업과 명성이나 환금과는 거리가 먼 목탄회화는 얼마나 그 속성이 닮아있는지. 감탄과 감동을 강요받는 요즘의 시각예술 작품 속에서 간단하고 단순한 도구인 목탄을 쉽게 버리지 않은 작가의 공력은 이제 공감으로 되돌려 받아야 한다.

위 허윤희 <도시>(왼족) 종이에 목탄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