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GHT & ISSUE 우리 옛돌 박물관

우리옛돌 (31)

성북동에 터 잡은 우리옛돌박물관

2015년 11월 11일 ‘우리옛돌박물관’이 성북동 언덕에 들어섰다. 경기도 용인에 위치했던 세중옛돌박물관의 지리적 한계를 벗어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새집을 마련한 것이다. 이곳에서는 능묘조각인 문인석, 장군석, 석수, 향로석, 장명등, 망주석과 민간 신앙과 그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동자석, 장승(혹은 벅수), 솟대 등 다양한 옛 돌조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석조문화재’라 하면 딱딱하게 느꼈을 텐데 ‘옛 돌’이라 부르니 우리 선조의 ‘바위 사랑’이 느껴지는 것이 어딘지 정이 간다. 그러나 소박한 이름에 비해 규모는 압도적이다. 국내 최대 석물 전문 박물관으로 약 5500평(18,155 여m2) 부지에 천신일 우리옛돌문화재단 이사장이 40년 동안 수집한 옛 돌조각(석물 1242점, 자수 280점, 근현대 한국회화 78점)이 전시되어 있다. 천 이사장은 “석조 유물에 대한 진위 장물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에 골동상 허가가 있는 사람을 통해서만 석조물을 구입했다”고 한다.
워낙 많은 양의 옛 돌조각이 있지만, 유독 눈에 띄는 공간은 단연 야외전시관이다. 돌 조각은 자연에 사람의 공이 들어가 깎고 새기기를 반복해 만들어진다. 이후 해를 쬐고 바람을 맞으며 시간이 흘러 완숙해져 간다.
자연과 인간이 함께한 협업이 바로 우리 옛 돌이 지닌 예술적 아름다움이 아닐까? 산책로를 겸한 ‘돌의 정원’은 수복강녕과 길상의 기원이 뚜렷이 드러난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좌우로 가득 서있는 문인석과 장군석은 관람자를 든든하게 보호한다. 또한 주제별로 석조물의 특징을 살려 구성한 정원은 옛 돌조각으로 펼칠 수 있는 전시기획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제주 올레 길이 연상되도록 제주지역 동자석으로 꾸민 섹션이 한 예다. 동자석이나 벅수 등은 민중의 정서가 담긴 질박하고 해학적인 아름다움이 그 특징이다. 전시장을 둘러보며 안녕과 화복을 비는 시간을 갖는 것도 의미 있지만, 우리네 얼굴의 원형을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안타깝게도 국내 석조 전문가의 수는 매우 적다. 박물관에서 소장품을 중심으로 연구 중이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제작시점이나 지역을 포함해 우리 옛 돌의 문화사적 가치를 밝히는 학술적인 연구가 수반돼야 한다.
천 이사장은 “석조유물을 연구하는데 우리 박물관이 도움이 됐으면 한다”며 “앞으로 다양한 분야와 공유하고 지속적인 후원을 통해 우리 옛 돌 연구에 힘을 실을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임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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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서양미술사에 대한 활발한 저술과 번역 활동으로 잘 알려진 노성두 박사가 <루벤스는 조선인 안토니오 코레아를 그리지 않았다>라는 파격적인 제목의 원고를 《월간미술》에 보내왔다. 이에 앞서 노 박사는 독서신문 《책과 삶》에 연재 중인 ‘노성두의 그림읽기’(2015년 10월호, 11월호)에서 “현재 LA게티미술관에 있는 한 뼘 반짜리 초상 소묘의 주인공을 둘러싼 논의의 역사는 꽤 길고 깊지만, 조선인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처음 주장했다. 이후 시사월간지 《신동아》(2015년 12월호)에 같은 논지의 글을 게재해 논쟁의 불을 지폈다.
공교롭게도 같은 달 《월간조선》에 ‘[역사추적] 루벤스 作 <한복 입은 남자>로 본 神話의 탄생과 소멸-임진왜란 때 유럽으로 간 조선인 안토니오 코레아, 그는 어떻게 신화가 되었나’제하의 김성동 기자 글이 실려 ‘루벤스의 조선인 그림’ 논쟁은 더욱 뜨거워졌다. 때마침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리히텐슈타인박물관 명품전-루벤스와 세기의 거장들전>(2015.12.12~4.10)이 열리고 있다. 물론 이 전시에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가 전시되지는 않지만 노성두 박사의 이 같은 문제 제기는 여러 면에서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월간미술》은 향후 이 문제에 대한 발전적인 논의가 지속되기 바라며, 노 박사의 글을 소개한다.

“루벤스는 조선인 안토니오 코레아를 그리지 않았다”

노성두 미술사

〈한복 입은 남자〉. 페테르 파울 루벤스 (Peter Paul Rubens)가 유일하게 조선인을 모델로 그린 것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우리에게는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한데, 현재 LA 게티미술관에 있는 이 그림이 1983년 11월 29일 크리스티 경매에서 소묘작품 사상 최고가인 32만4000파운드에 낙찰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안토니오 코레아는 역사적 실존 인물이다. 피렌체 출신의 이탈리아 상인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가 기록하고 사후 출간된 《나의 세계 일주기》에는 조선의 해안 지방에서 왜구에게 납치되어 터무니없는 헐값에 노예시장에 나온 조선인 이야기가 실려 있다. “조선인 다섯 명을 12스쿠디보다 조금 더 쳐서 매입하고 세례를 받게 한 다음 그 가운데 넷은 인도 고아에서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 풀어주고 한 명을 피렌체까지 데리고 왔는데, 현재 그는 로마에서 안토니오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고 알고 있다”는 내용이다.
1979년 10월 7일 김성우(한국일보 기자)가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코레아 성씨가 원래 조선인 안토니오의 후손이라는 요지의 기사를 발표하면서 국내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또 1992년에는 임진왜란 400주년에 즈음하여 알비의 시장과 주민들을 국내 초청하고, DNA 검사를 하는 등 법석을 떨다가 한국인의 혈통과 전혀 무관하다는 허탈한 결론에 이르기도 했다. 이듬해 1993년에는 소설가 오세영이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에서 영감을 얻어 집필했다는 《베니스의 개성상인》이 판매부수 200만 부를 훌쩍 넘기며 국내에 안토니오 코레아 열풍에 다시 불을 지폈다.
지금까지 발표된 다수의 소설과 다큐멘터리, 드라마, 뮤지컬, 논문이 예외 없이 게티 소묘의 주인공이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2011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야심차게 준비한 전시 〈초상화의 비밀〉이 열렸을 때 박물관 건물 전면을 채우는 거대한 걸개그림에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가 집채보다 큰 사이즈로 등장해서 우리의 가슴을 뛰게 했고,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은 방미 일정 중 시간을 쪼개어 게티미술관을 찾아 루벤스의 소묘에 심심한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안토니오 신화는 픽션과 팩트와 팩션 사이를 넘나들면서 군더더기가 많이 붙는다.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의 더께를 벗겨내고 기록의 근거를 치밀하게 추적한 연구서가 《조선 청년 안토니오 코레아, 루벤스를 만나다》이다. 부산대 사학과의 곽차섭 교수가 2004년 푸른역사에서 출간한 단행본인데 지금은 절판되었다. 곽차섭은 책에서 루벤스가 그린 게티 소묘의 주인공은 조선인이며, 그 조선인은 다름 아닌 안토니오 코레아라고 주장한다. 논의를 전개하기에 앞서 필자의 결론을 앞당겨 밝히면 이렇다. “루벤스는 조선인도, 안토니오 코레아도 그리지 않았다.”
《월간조선》 2015년 12월호 ‘루벤스 작, 〈한복 입은 남자〉로 본 신화의 탄생과 소멸’ 제하의 기사는 그간의 안토니오 코레아
논쟁을 정리하고 있다. 김성동(월간조선 기자)은 안토니오 코레아 신화가 1979년에 탄생했다가 2015년 11월 노성두에 의해 소멸된 것으로 보고, 이에 대한 곽차섭의 입장을 간단히 소개했다. 먼저 곽차섭의 논리를 들어보자. 그는 세 가지 근거를 내세워 루벤스 소묘가 조선인을 모델로 했다고 확신한다.
1. 머리에 조선 방건을 쓰고 있다.(서양사학자 곽차섭 주장)
2. 상투를 틀었다.(한문학자 강명관 주장)
3. 조선 철릭을 입었다.(복식사학자 석주선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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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루벤스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의 기적〉(부분) 오른쪽 루벤스 〈한복 입은 남자〉(부분)

여기서 ‘조선 방건’이 곽차섭의 유일한 관찰이다. 1934년 영국 미술사학자 클레어 스튜어트 워틀리가 루벤스 소묘에 대해 ‘조선인 특유의 투명한 말총모자’를 언급한 적이 있고, 곽차섭이 이를 조선 방건으로 확정한 뒤 지금까지 별다른 이의 제기 없이 학계에 수용되었다. 현재 게티미술관에서도 〈한복 입은 남자〉라는 작품 제목을 공식화하고 있다. 그런데 ‘한복 입은 남자’는 한 명이 아니다.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박물관에 걸려 있는 루벤스의 대형 제단화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에도 같은 인물이 나온다. 제단화 속의 동양인과 게티 소묘의 주인공을 비교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복식과 차림새가 일치한다.
또 두 사람의 용모를 비교해도 쌍꺼풀 진 눈, 바깥으로 솟은 눈꼬리, 깡총한 눈썹, 내려앉은 콧부리, 단단한 콧날, 돌출형 치아와 도톰한 입술, 동그란 광대뼈, 좁은 하관, 그리고 귓불 등이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학계에서는 둘을 동일 인물로 보고, 이 점에 곽차섭도 동의한다. 빈 제단화는 원래 북유럽 가톨릭의 전초기지 가운데 하나였던 안트베르펜에 새로 지은 예수회 교회인 이냐치오 로욜라 교회(1779년에 카를로 보로메오 교회로 개칭)의 중앙 제단화 두 점 가운데 한 점으로, 작품 주문시점이 1617년이다.
학계에서는 루벤스가 제단화를 주문받고 나서 준비작업의 일환으로 게티 소묘를 제작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제작 시점이 1617년경이 된다. 하지만 곽차섭은 10년 정도 앞당겨서 1607~1608년경에 소묘가 그려졌고, 게티 소묘는 제단화의 동양인과 동일 인물이기는 하지만 제단화 주문과 무관하게 작업되었으며, 동양인의 정체가 다름 아닌 조선인 노예 출신인 안토니오 코레아라고 본다. 곽차섭의 논리는, 루벤스가 로마 체류시절에 조선인 안토니오를 만났고, 나중에 소묘를 활용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동양인 모델을 그려서 챙겨두었고, 우연히 10년 뒤 안트베르펜 예수회로부터 예수회 선교와 연관된 제단화 주문을 받고는 고이 모셔둔 조선인 소묘를 다시 꺼내서 제단화 밑그림 그릴 때 활용했다는 것이다. 현재 게티미술관은 곽차섭의 주장과 달리 소묘의 제작시점을 1617년으로 표기하고 있다.

방건과 크기의 문제
곽차섭은 게티 소묘의 주인공이 조선 방건을 착용했으니 당연히 조선인이라고 말한다. 깔끔한 논리이다. 실제로 곽차섭은 책의 상당 부분을 방건에 대한 설명에 할애하면서 풍부한 증거 자료를 제시한다. 하지만 그의 방건 이론은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 방건은 사각형의 관모로, 정육면체에 가까운 형태이다. 상하를 제외하고 네 개의 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면은 굵은 사각형 테두리 안을 가는 올로 엮어 채워서 만든다. 4개의 면을 나란히 엮으면 정육면체에 가까운 반듯한 형태의 방건이 완성된다. 그런데 게티 소묘의 관모는 네모난 형태가 아니라 원통형이다. 각도 보이지 않고 면도 보이지 않는다. 사각형의 굵은 테두리도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서 곽차섭은 “언뜻 보기에 드로잉 속의 방건은 사각형이 아니라 둥근 모양인 듯도 하지만, 이는 여러 해에 걸쳐 사용함으로써 각진 부분이 완화된 결과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조선 청년 안토니오 코레아, 루벤스를 만나다》 89쪽)라고 해명한다.
방건을 여러 해 사용했더니, 가는 올은 멀쩡한데 굵은 바깥 틀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세로로 각진 부분 역시 저절로 펴져서 원통형으로 변신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방건은 벗어둘 때 납작하게 눌러 접어서 보관하기 때문에 올이 풀리고 해져서 나달나달할 때까지 써도 각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생선구이 석쇠를 오래 썼더니 가는 철사로 엮은 망은 멀쩡한데 바깥을 두른 굵은 철사심이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을까? 실물 방건과 그림 속 관모를 비교해보면 간단히 알 수 있다. 논리적 추론이라기보다 호그와트 마법학교에서나 통할 기적에 대해 지금껏 아무 이의 제기가 없었다는 사실이 더 불가사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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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차섭이 저지른 또 하나의 치명적 오류는 작품 해석은 반드시 작품 관찰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미술사 방법론의 대전제를 무시한 점이다. 작품 관찰보다 자신의 학식과 역사적 상상력을 우선시한 것이다. 게티 소묘는 완전한 상태가 아니다. 애당초 루벤스가 완성한 소묘작품의 크기는 현재 상태보다 조금 더 컸을 것이다. 소묘의 가장자리를 관찰하면 원작의 상단과 하단이 잘려나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루벤스의 소묘 〈한복 입은 남자〉는 종이 가장자리를 따라서 상하좌우에 테두리 선이 그어져 있다. 그런데 작품 속 관모의 세로 올을 표현한 선들이 수평으로 그어진 테두리 선을 넘어서 종이 끝까지 뻗어 있다. 작품 하단부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관찰된다. 루벤스가 동양인 모델을 그리면서 관모와 발목을 끊어먹지 않았다고 보고, 원작에서 잘려나간 부분을 복원해보자. 복원 기준은 빈 제단화이다. 제단화의 동양인을 터잡아 잘려나간 부분을 복원하면, 게티 소묘의 주인공이 쓰고 있는 관모는 각이 진 방건 형태가 아니라 높이가 훨씬 올라가는 원통형이 된다. 방건을 쓰기 전에 망건을 두르지 않은 데 대한 궁금증도 자연스레 해소된다. 그의 관모는 방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곽차섭의 책 12쪽의 도판에는 그림 가장자리에 테두리선이 보이지 않는다. 만약 처음부터 부실한 도판을 보고 주장을 개진했다면, 스스로 방건 이론을 철회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소묘 작품의 상·하단 테두리 선을 실수로 놓쳤거나, 테두리선은 보았지만 관모의 세로 올이 테두리 선을 관통하는 부분의 디테일을 보지 못했거나, 혹은 자신의 논리를 관철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소묘의 디테일을 무시했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월간조선》 2015년 12월호 (364쪽) 김성동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곽차섭은 “노 박사는 그림 속 인물이 착용하고 있는 것이 조선 방건과 철릭이 아니기 때문에 제 주장이 틀렸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그림 속 인물이 착용하고 있는 방건과 철릭이 어디 것인지를 밝혀야 하고 혹시 그것이 중국의 것이라면 그 시대 그와 유사한 모자와 옷을 증거로 제시해야 한다. 그러한 증거가 없다면 여전히 제 견해는 가능성이 있는 가설”이라고 항변하면서, 방건 이론을 고수하고 있다. ‘동그란 네모’, 또는 ‘네모난 동그라미’를 논리학에서는 ‘형용모순’이라고 한다. 곽차섭의 항변에 대해서 이렇게 되묻고 싶다.
“가령 미켈란젤로가 그린 우피치 미술관의 〈도니 톤도〉 배경에 나오는 알몸의 청년들이 우리 은하계에서 200만 광년 정도 떨어진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라는 주장을 누군가 제기했을 경우, 그 주장을 반박하려면 알몸의 청년 모두의 이름과 주소지를 밝혀야만 하며, 그렇지 못하면 외계인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말씀이신지?”
곽차섭은 또 다른 근거로 그림 속 인물이 조선 철릭을 입고 있으니 조선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소묘에는 철릭에 넓은 목깃이 접혀 있을 뿐, 조선 철릭의 특징인 동정이 달려 있지 않다. 또 무릎 뼈 바로 아래에 걸칠 정도로 짧은 조선 철릭에 비해서 게티 소묘의 철릭은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이가 풍성하다. 그런데도 정말 조선 철릭일까? 게티 소묘의 철릭은 루벤스가 1617년경 그린 예수회 선교사 〈니콜라스 트리고의 초상〉이나 같은 시대 마테오 리치가 입고 있는 중국식 철릭과 형태가 훨씬 유사하다. 곽차섭은 그의 책(95쪽)에서 원작 소묘의 흑백 프린트에다 목깃 안쪽에 마치 조선식 철릭의 동정이 달려있는 것처럼 굵은 검정색으로 가필한 도판을 붙여두었다. 정작 루벤스는 그린 적이 없는 동정이 사학자의 신비로운 손길에 의해 홀연히 현현한 것이다. 남의 작품에다 없는 동정을 슬그머니 그려 넣고 주인공의 신분과 국적을 세탁하려고 한 것일까?
조선 방건을 쓰고 조선 철릭을 입었으니 조선인이 당연하다는 주장의 근거는 모두 깨진 셈이다. 다시 말해 루벤스 소묘의 주인공은 조선인이 될 수 없다. 조선인이 어쩌다 이국의 복식을 입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같은 논리로 태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말레이시아 사람이 그랬을 가능성도 똑같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별 의미가 없다.
엉터리 방건과 위조 철릭을 내세운 곽차섭은 또 루벤스가 안토니오 코레아를 1607~1608년에 로마에서 만나서 소묘를 제작했다고 주장한다. 게티 소묘의 주인공이 조선인이라는 전제가 성립한 연후의 주장이므로 그의 안토니오 코레아 이론은 당연히 배척되어야 하겠지만, 여기서 잠시 입장을 바꾸어서 거꾸로 접근해보자. 만약 곽차섭의 주장대로 루벤스가 조선인 안토니오를 로마에서 만나서 모델이 돼줄 것을 요청하고 소묘 작업을 진행했다는 추리가 성립하려면 어떤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할까?

 루벤스 〈니콜라스 트리고의 초상〉 44.6×24.8cm 1617(뉴욕 메트로폴리탄 소장)

루벤스 〈니콜라스 트리고의 초상〉 44.6×24.8cm 1617(뉴욕 메트로폴리탄 소장)

1607~1608년, 루벤스는 건강 상태와 재정 상태가 최악이었다. 또 로마에 신축한 예수회 교회인 키에사 누오바 교회의 주제단화를 그리기로 하고 근 1년에 걸쳐 완성했으나 교회 측으로부터 작업 대금도 못 받고 거부당한다. 두 번째 제단화에 전념하던 중 가까스로 완성했을 무렵 고향 안트베르펜에서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급한 전갈을 받고 제단화의 공개도 못보고 귀향길에 오른다. 그런데 이 시기에 장차 10년쯤 뒤에 안트베르펜 예수회 교회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제단화 주문에 대비하여, 예수회가 선교 활동을 벌인 인도, 중국, 일본을 대표할 인물상을 모색하던 가운데, 유럽에 이미 꽤 진출해 있어서 모델을 구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한 중국인은 제쳐놓고, 예수회 선교와도 상관없고 외교관계도 없어서 유럽 전체에 겨우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조선인을 굳이 수소문해서 조선인 노예 출신인 안토니오를 찾아낸 뒤, 그에게 혹시 동양의 고관대작이나 외교 관료나 고위 성직자가 걸칠 만한 의관을 갖고 있는지 확인한 다음, 의관정제하여 초상소묘의 모델로 서줄 것을 요청하고,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모델료를 지불하고 그림을 그렸어야 한다.
한편, 조선인 안토니오는 왜구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린 뒤에, 파란만장한 삶의 역경과 거친 역사의 파고를 거치면서도, 자신의 신분과 어울리지 않는 황금비단 철릭과 사치스러운 이국풍의 가죽신발과 높은 관모를 끝내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플랑드르 화가의 모델을 설 때 요긴하게 활용하는 일이 가능했을까? 나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곽차섭의 주장은 불가능에 가까운 성립 확률을 수차례 중첩해 논리의 차원을 크게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차라리 조선 천재 김시습이 다섯 살 연상의 어우동을 갈라파고스에서 만나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낳았다는 쪽에 베팅을 하겠다. ●

SPECIAL ARTIST 박불똥

 

 1996

<정치하는 것들한테 국민 여러분께서 주시는 선물> 1996

2016년 새해 첫 작가론으로 작가 박불똥을 소개한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박불똥을 호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김동일 교수의 말처럼, 지금 우리에게 박불똥의 작품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박불똥은 일찍이 1980년대부터 기존 화단에 팽배한 순수미술의 이념을 거부하고 극복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대중매체 시대의 예술이라는 명제가 주는 실천적 의미에서 포토콜라주 작업을 비롯해 이땅의 불편한 현실과 모순을 독특한 조형어법으로 들춰냈다. 30년 넘게 그의 보여준 행보는 ‘시각이미지 생산자’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실천적 예술가의 한 표상이다.

 

박불똥, 혹은 ‘불’과 ‘똥’ 사이

김동일 대구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

박불똥은 누구일까?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박불똥을 호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2000년대도 십수년이 지난 지금 박불똥은 사라지길 거부하는 1980년대 미술의 망령일까? 혹은 새로운 세상을 거부하는 철없는 돈키호테일까? 그것도 아니면 혹여 1980년대와 동시대미술 이론과 실천 사이의 공백을 채워줄 소중한 퍼즐의 한 조각은 아닐까? 평자에게 박불똥은 언제나 하나의 수수께끼이자 도전이었다. 박불똥이 작품에서 보여준 파격과 신화가 생산해낸 신비한 아방가르드적 인상은 의외로 박불똥을 둘러싼 사회 현실과 당대 한국 미학장의 구조, 그리고 이 두 개의 구조 사이에서 맹렬히 균열하는 박불똥 미술의 극복되지 않는 모순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치장에 불과했다. 박불똥은 미술장과 사회구조라는 서로 다른 조각들이 맞물려 들어가는 이음새에 해당한다.
박불똥은 불이다. 우리 미술사에서 여전히 민중미술이라는 이름으로 타올랐던 불꽃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 하나는 분명히 박불똥일 것이다. 그 불은 가장 먼저, 가장 화려하게 타올랐고, 또 가장 오랫동안 꺼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박불똥은 민중미술이 민미협으로 조직화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한국미술, 20대의 힘>전(1985, 아랍미술관)을 통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시작부터 민중미술과 함께 한 셈이다. 자신의 젊음을 민중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미술사에 각인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미술가로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민중미술가라는 자격은 평생 그의 삶을 짓누른 멍에이기도 했다. 그는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소위 민중미술 전성기에 그 이름의 시장가치를 누리면서 적당히 민중미술가를 포기하지 못했다. 그때 그는 너무 젊었다. 그의 눈빛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이른바 문민정부라는 위장된 민주주의 아래에서 민중미술이 이른바 풍경화라는 형태로 무장해제될 때조차 시들지 못했다. 그의 불이 가장 젊고, 강렬하게 타올랐을 때, 그의 붓은 칼이 되었다. “스스로 ‘나는 살아 있다’라고 외치며 삶에 대한 애착으로 충만한, 진정한 예술가이기를 원한다면 그는 갈고 닦은바, 무기인 붓으로 시대의 압제자들에게 달려들어 가당찮은 수염과 계급장과 발톱을, 이빨을 뽑고 떼어내고 불태우는 투혼을 발휘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붓으로 압제자들의 목을 찔러 피라도 맛보는 열사적 분노까지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1 물론 박불똥의 폭력은 미학적 은유와 풍자로 나타났다. 예컨대 박불똥이라는 이름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킨 <코화카염콜병라>(1988)은 당대 대한민국의 모순의 기저에 있는 미국의 존재와 미국적 자본주의의 심장에 화염병을 투척하려는 시도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 화염병이 미국과 미국적 자본주의의 시각적 상징인 성조기와 코카콜라병을 재료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상대방의 칼을 빌려 상대를 공격한다는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를 기도하는 미학적 전복인 셈이다. 칼이 된 박불똥의 붓은 가장 효과적으로 적을 공략한다. 그가 위장된 권위와 힘을 능멸하는 데에 필요했던 것은 지퍼 사이로 내민 검지손가락 하나면 충분했던 것이다(<실수>, 1996). 박불똥이 붓을 칼 삼아 휘두를 때, 그의 미학적 실천의 주된 방법론은 이른바 포토콜라주였고, 그가 채집한 대중매체의 시각이미지를 자르고 붙일 때 칼은 붓을 대신했다(그의 작업실은 자본주의가 산출해낸 시각이미지들이 분해되고 분류되고 실험되고 재조직되는 정갈한 실험실을 닮아있다).
박불똥은 지독했다. 박불똥의 지독함은 그의 미학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였다. 성완경은 이를 정확히 간파하고 다음과 같이 썼다. “박불똥의 작품에는 무언가 치열하고도 지독한 것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경이로움의 원천이다. 특히 포토콜라주 작품에서 ‘만든 자’와 ‘보는 자’를 함께 감전시키는 그 놀라운 ‘눈뜸’의 비밀은 바로 이 지독한 돌격, 치열한 장악, 공격적 이성에 의해서만 결국 획득되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신선하고도 풍요로운 충돌이라는 것을 빼놓고서는 달리 얘기될 수 없을 것이다.”2 그의 지독함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1980년대 그의 지독함이 칼이 되었다면, 1990년대의 그것은 편집증적 관찰욕으로 나타났다. 그는 이윤과 자본의 논리에 흥건하게 젖어버린 욕망을 탐닉했다. 그에게 욕망은 동시대 자본주의가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새롭게 포섭하는 통로였다. 자본에 의해 감전된 육체는 이윤을 생산하고 축적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자본은 육체를 통해 욕망을 부추기고, 그렇게 부추겨진 욕망은 상품의 소비를 유도한다. 그러나 그러한 소비는 달력 속의 벌거벗은 육체를 향한자위와도 같은 것이다. 자본주의가 욕망을 호출하는 이유는 결코 충족되지 않는 결핍을 강제함으로써 더 큰 소비를 유도하기 위해서다. 1990년대 남한 사회의 급격한 소비자본주의로의 이행은 분단이라는 기존의 모순과 결합했다. 그 결합 속에서 욕망의 대상으로 재구성된 여성의 육체는 지배권력에 의해 정치적 체제경쟁의 도구로 이용된다. <대북삐라>(1992)는 반라의 여배우가 “녹음의 계절, 의거월남의 가장 좋은 기회”라는 문구와 함께 등장한다. 이때 여배우의 육체는 이중적으로 재구성된다. 첫째 그것은 이윤 획득을 위해 상품으로 구성된 자본주의적 육체인 동시에 둘째 남북의 정치적 대립 상황에서 이데올로기적 무기로 또다시 재구성된 육체였다. 이처럼 박불똥이 1990년대 보여준 편집증적 관찰자로서의 지독함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상 속에서 분단과 자본이 한국사회를 재구축하는 과정을 인류학적 참여관찰과 유사한 방식으로 채집해냈다. 1980년대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1990)가 거시적인 전체 속에서 재구성되는 일상을 드러내고자 했다면, <칼스호프>(1992), <개밥에 도토리>(1996), <시집간포르노테이프>(1996) 연작은 일상의 작은 편린을 통해 거시적인 사회구조를 드러내는 방식을 취했다.

2012 못쓸것-Road3

< 못-쓸-것 Road #2 > 112×300cm 2012

박불똥은 똥이다. 그의 지독함은 1980년대의 칼로도, 1990년대의 편집광적 채집으로도 충족되지 않았다. 2000년대 박불똥은 사회공간의 모순을 자신의 삶을 통해 극단적으로 체험한다. 그것이 자의건 타의건 박불똥은 참기 어려운 빈곤 속에 자신을 놓는다. 그는 기꺼이 ‘쓰레기’가 되는 삶을 선택한다. “백번이라도 부인하고 싶지만 나는 인생과 예술 양면 모두 패색이 완연한 ‘루저’이다. 신용불량자, 국세고액장기체납자, 파산자, 연이은 대인관계의 실패로 낙인된 성격파탄자, 철지난 민중미술의 갑옷을 여태 걸치고 다니는 지진아 아阿큐Q… 하여 스스로 나는 나를 가차 없이 쓰레기라 치부한다.”3 박불똥은 쓰레기가 된 삶 속에서 기꺼이 자신의 예술 또한 ‘똥’이 되는 것을 받아들인다(“그리하여 나는 완존히 똥 되야부렀다”.4 중요한 것은 그 속에서 박불똥이 자신의 삶과 예술을 쓰레기-똥으로 만드는 힘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경로는 어떠한지를 추적했다는 점이다. 그 힘이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숫자로, 돈으로, 은행계좌로, 카드를 통해 박불똥의 삶을 유린하고 있다는 점이다(<데스노트>, 2011). 우리 삶을 겁박하는 악마는 바로 “무시무시한 금융자본주의”5라는 외양으로 나타난다. 더 중요한 것은 박불똥이 자신과 자신의 삶을 쓰레기-똥으로 전락시키는 사회적 힘들에 자신의 예술을 통해 맞서고 있다는 점이다. 박불똥은 최근 작업에 예술의 이름으로 자신의 주변에서 쓰레기가 된 것들 하나하나를 호명해내고 있다. 박불똥의 2000년 이후 작업들은 쓰레기가 된 자신의 삶과 효용을 잃어버린 사물들을 보듬어 안고자 하는 시도였다.
불과 똥 사이. 그러나 박불똥은 맹목적인 불도, 자폐적 똥도 아니었다. 이 점은 박불똥을 정말 이해하기 어렵게 하는 점이기도 하다. 그토록 맹렬했던 불은 어느새 똥이 되어 있고, 그 똥은 또다시 맹렬하게 화염을 내뿜는 불로 변해 있다.6 그는 불과 똥 사이를 왕복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박불똥은 미학적 방식으로 불과 똥을 변환한다. 박불똥을 이해한다는 것은 박불똥이라는 동전의 앞뒷면을 이루는 불과 똥을 본다는 것이 아니라, 불과 똥 사이의 미학적 변환을 탐지해내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변환 과정에서 오히려 똥은 불보다 더 맹렬하게 타오른다. 실제로 <된장1>(2006)은 자신의 똥을 칼로 삼아, 독재자와 지도자를 구별할 줄 모르는 우리 자신의 우둔한 분별력을 난도(亂刀)한다. 분명한 것은 박불똥은 그 자신이 민중의 한 사람이자 예술가로서 이 사회의 ‘더러운’ 시절들을 헤쳐나가고 있다는 점이며, 나아가 박불똥이 세상과 그의 삶을 헤쳐나가는 방식은 잔혹하리만큼 치열한 현실 문제의식과 미학적 실천이라는 점이다. 이때 박불똥의 ‘불’과 ‘똥’은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는 미학적 방법론의 두 극점을 보여준다.●

1 박불똥, “칼이 필요한 현실과 칼이 되어야 하는 붓.”(1987) 『민족미술 영인본 1986~1994.』 민족미술협의회 편, 도서출판 발언. 1994. 87쪽
2 성완경(1986). “탁월한 형상화 이미지와 이미지의 신선하고도 풍요로운 충돌.” 서울미술관 ’85 문제작가전 추천평론
3 박불똥 <못-쓸-것>(2012, 트렁크갤러리) 작업노트 중에서
4 박불똥은 <일상의 연금술전>(국립현대미술관, 2004) 전시장에서 실수로 무너지고 으깨진 연탄을 그대로 전시하면서(<파고다-작품에 손대지 마시오-b>) 그 상황을 유쾌하고도 풍자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삶에 비유했다. “아무튼, 화단 활동 20년 만에 처음 발 들여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리하여 나는 ‘완존히 똥 되야부렀다.’ 미필적 고의로?.” 박불똥 외. (2014.) 《박불똥 모순 속에서 살아남기》 현실문화연구. 209쪽
5 박불똥, <시>의 일부. 박불똥 외. (2014.) 『박불똥 모순 속에서 살아남기.』 현실문화연구. 337쪽
6 대체로 그의 초기작에 해당하는 <눈빛>(관훈갤러리, 1985), <졸작>(그림마당 민, 1987), <결사반대>(그림마당 민, 1989),
<관능의 불구에 대한 자백>(금호미술관, 1992), <박불똥의 좔>(갤러리자인제노, 2011), 최근 <퀑, Bang!>(나무화랑, 2014)이 불에 해당한다면 <사유재산>(사비나 미술관, 2001), <토끼와 거북>(갤러리아츠윌, 2011), <박불똥의 형이하 악>(관훈갤러리, 2011), <못-쓸-것>(트렁크갤러리, 2012)은 똥에 해당한다.

박 불 똥 Park Bulddong
1956년 태어났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1985년 첫 개인전 <눈빛>(관훈미술관)을 시작으로 <졸작>(그림마당 민, 1987) <결사반대>(그림마당 민, 1989) <관능의 불구에 대한 자백>(금호미술관, 1992) <사유재산>(사비나갤러리, 1999) 등 11번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현재 민족예술인총연합회, 민족미술협회 회원이며, 경기도 남양주 마석에서 작업하고 있다.

ARTIST REVIEW 강홍구

강홍구의 작업 장르를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작업을 설명하는데 필수적으로 함께 하는 단어는‘회화’와 ‘사진’. 사진 위에 그려진 그의 그림은 생경함보다는 독특한 감각을 자아낸다. 2015년 11월 27일부터 12월 23일까지 원앤제이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 〈언더프린트: 참새와 짜장면〉은 이러한 두 평면의 만남이 독특하게 조화를 이룬 작업으로 주목받았다. 필자는 그의 작업이 “뷰파인더와 피사체의 포획 관계를 넘어, 형상의 구축(image constructing)과 ‘그림을 서서히 드러나게 하는 운동을 주도하는 것’으로서 ‘모티프’라는 회화 실천적 관계를 고려하도록 요청하는 작업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강홍구의 평면 각뜨기와 양생

강수미 동덕여대 교수

대부분의 사람에게 세계는 지극히 세속적인 사실 무더기인 동시에 그 사실들이 대강대강(凡) 통속적인(俗) 상태로 지각되는 곳이다. 사실의 무차별적 집합, 흔해빠진 지각 경험이 그렇게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퍼져있는 양태, 그것이 곧 우리가 말하는 ‘일상’의 실체다. 물론 이때 무차별성과 범속함은 아이러니하지만 우리가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는 실생활을 평생 질리지 않고 살게 하는, 우리가 평범하다며 무시하기도 하는 현실을 상도(常度)에 어긋남 없이 이어나가게 하는 강력하고도 기본적인 힘이다. 하지만 특별한 인식 및 감각능력을 갖고 있고 그 힘을 제대로 발현시킬 표현 매체 및 방법론을 지닌 예술가는 대강대강과 듬성듬성의 세계를 끊임없이 세공하고 밀도를 채운다. 또 통속적 경험과 덩어리진 지각을 평면적인 틀에서 해방시켜 다양한 지점과 층위로 횡단, 분할, 이접, 중층화, 복수화, 변형, 변질, 변성시킨다. 그렇게 해서 일상의 무차별성으로부터는 비범한 차이를, 실재로부터는 풋내와 핏물을 제거하고 아주 작은 미적 가치라도 구해낸다. 그럴 때의 예술가는 “두께 없는 칼날이 틈이 있는 뼈마디로 들어가”1 정확하고 군더더기 없이, 어떤 남용도 잉여도 범하지 않고 소의 살과 뼈를 발라냈던 중국 문혜군 시절의 요리사처럼 도(道)로써 일한다. 요컨대 포정의 소 각뜨기(?丁解牛).
강홍구는 이를테면 내가 생각하는 한국 현대미술계의 탁월한 ‘예술가-포정’ 중 하나다. 이 작가만큼 신물 나는 일상 현실로부터-아니 사실은 절대적으로 바로 그것으로부터만-비범하면서도 결코 젠체하지 않는 이미지를 떠내는 이가 없다는 뜻에서다. 또한 이 작가만큼 겉보기에 힘들이지 않고, 대단한 각오나 철두철미 심각함도 자랑하지 않으면서 날것의 현실로부터 즐거운 것, 기분 좋은 것, 감상할 만한 것 그러나 송곳 같은 의표가 있고 영양가 높은 비판성이 담긴 무엇을 발라내기 어렵다는 뜻에서다. 요컨대, 작가가 말하는 “시시한 것”으로부터 미학적 용어로 ‘미적인/감각 지각적인 것(the aesthetic/aisthetikos)’ 각뜨기.
비린내를 풍기며 아무렇게나 엉켜있는 듯하고, 무더기져 뭐가 뭔지 모르겠는 리얼리티 내부에도 분명 나름의 결이 있고 틈이 있다. 또 가치와 의미의 마디들이 존재한다. 작가 강홍구는 먼저 바로 그 결을 따라, 어떤 틈 안으로 카메라 렌즈를 들이밀어서 생짜 원초적 이미지를 포획(capture)한다. 그런 다음 그 원초적 이미지 무리를 현실의 피상성2에 내버려두지 않고, 스스로 “B급”이라 낮춰 부르는 자신의 예술 역량에 따라 자르고 접붙인다. 이때 ‘자르기’와 ‘접붙이기’는 현실에 내속된 동종 혹은 이질의 마디들, 결절들로 침투해 의도를 갖고 혼합 편집하는 실천법인 만큼 무차별로부터 비판적 인식의 거리를 확보하고, 예술인문적 실체를 증가시키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런 작업 과정 및 창작의 방법론은 강홍구의 초기 전시에 속하는 《강홍구》(1992)와 《위치, 속물, 가짜》(1999)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드라마 세트》(2003) 《오쇠리 풍경》(2004) 《풍경과 놀다》(2006)로 이어졌고, 《사라지다-은평 뉴타운에 대한 어떤 기록》(2009)과 《사람의 집-프로세믹스 부산》(2013)을 통해 하나의 정점을 이뤘다.
여기까지 한 후, 강홍구는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궤도 하나를 발명해낸다. 이 작가의 원래 전공 분야인 ‘회화’와 지난 20여 년간 자기 작업의 주 무대였던 ‘사진’이 상호 중층결정 작용을 하는 평면이 그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그 집》(2010), 《녹색연구》(2012), 그리고 《언더프린트: 참새와 짜장면》(2015)에서 구현한 평면인데, 쉽게 말해 ‘사진 위의 그림’이다. 별것 아닌 것처럼 들리는 이 사진 위의 그림이 내가 강홍구의 작업을 ‘예술사진’이든 ‘사진예술’이든 간에 결코 사진에 한정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는 근거다. 이를테면 그의 예술은 사진과 인화지/전자기기 모니터의 관계 구도로 파악해서는 핵심을 놓친다. 대신 이미지 일반과 평면의 관계 속에서 이해될 때 가치가 솟아나고 즐김이 증폭될 것이다. 나아가 뷰파인더와 피사체의 포획 관계를 넘어, 형상의 구축(image constructing)과 “그림을 서서히 드러나게 하는 운동을 주도하는 것”으로서 “모티프”3라는 회화 실천적 관계를 고려하도록 요청하는 작업이다.

코끼리

〈코끼리〉 사진 위에 아크릴 35×100cm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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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전경

평면의 위와 아래로 운동
매체학자 플루서는 ‘피상성’과 ‘평면’을 실제 현상, 그림, 사진, 비디오, 컴퓨터그래픽 등 대상을 가리지 않고 광의적으로 사용하는데4, 이는 논쟁이 필요하다. 그도 알다시피 피상성, 가시적 표면, 평면이라는 범주에는 인간의 의도, 행위, 제작, 장치, 환경, 역사 등이 작용하는 방식과 정도 차에 따라 매우 상이한 이미지 종(種)이 포함될 수 있고, 그런 만큼 각각에게는 공통성보다는 분별 가능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1996년 강홍구가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저수지의 개들’ 스틸을 차용해 자신의 얼굴과 합성한 디지털 자화상 〈나는 누구인가〉는, 2015년 아스팔트바닥을 딛고 서 있는 자신의 두 발부리를 찍고 그 사진 위에 아크릴물감으로 생선 대가리와 꼬리를 그려 넣은 〈고등어〉와 피상성 과/또는 평면이라는 이슈에서 동일시될 수 없다. 전자가 통속과 기성의 이미지를 가져다 이리저리 비틀어 가짜와 거짓을 보여준다 한들, 그것이 사진인 한 〈나는 누구인가〉는 실재의 지표(index)인 동시에 그 실재의 피상성 파편들이 꿰매진 피부다. 또 인화지에 현상되든 전자 모니터에 띄워지든 간에 그것은 결코 아무것도 없는 데서부터 출현하기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이미지다(뭔가가 찍혀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 인화지나 모니터는 사진영상의 역사가 얼마가 됐든 새로 생산되는 모든 이미지가 언제나 제로 그라운드에서 실재의 조각들로부터 얻어내야만 하는 것이다(심지어 그것이 다른 이의 사진을 표절, 차용, 변조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반면 후자 〈고등어〉는 미학적으로 그다지 대단할 것 없어 보여도 실재의 객관적 존재와 작가의 주관적 행위가 중층결정 작용한 결과다. 이를테면 고등어 머리와 꼬리를 우둘투둘한 질감의 터치로 그린 것은 작가가 그 회화적 표현 아래 이미 각인돼 있는(언더-프린트) 아스팔트평면의 물질성을 감각적으로 모티프에 투입한 결과이며, 또 그 역작용의 결과인 것이다. 메를로 퐁티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림을 나타나게 하는 운동의 견인체로서 아스팔트바닥이라는 모티프의 영향관계.
이런 맥락에서 최근 강홍구의 ‘사진 위의 그림’ 작업은 지표나 실재의 피상성 같은 기준 대신, 사물/모티프의 물리학적이고 위상학적인 운동 및 평면이라는 특수 환경(하나의 차원이자 회화예술의 역사적 현존으로서)의 조직화에 초점을 맞춰 비평해야 한다. 요컨대 이런 것이다. 초기 이 작가의 사진합성작업들은 포정의 소 각뜨기처럼 삶의 피상성으로부터 어떻게 군더더기 없이 정확하고 날선 이미지를 해체해낼 것인지에 맞춰져 있었다. 골계미를 뽑아내는 창작 말이다. 그런데 현재 그의 사진 위 그림 작업들은 평면과 평면 사이로, 평면의 위와 아래로 ‘강홍구’라는 주체의 주관성(subjectivity)을 집어넣는 양생(養生)과 양화(+)의 미술이다. 그렇게 해서 리얼리티의 무서운 구멍, 삶의 냉혹한 벽, 일상의 강압적 틈에, 모티프의 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상실한 소망이미지와 범속한 자유의 이미지를 메워 넣는 것이다. 플루서는 평면은 곧 ‘표면’이고 ‘피부’라고 봤지만5, 이미지의 세계에서 진짜로 빚어지는 사태는 그렇지 않다. 평면은 사물/사태에 대한 정확한 틈입, 해체, 구축의 일들이 중층결정되는 공간이고, 그런 한 단순한 표면이나 피부가 아니다. 그것은 2차원과 3차원과 4차원의 한가운데서 두께 및 부피가 쉬 바뀌지 않는 독특하고 강한 몸이다. 현재 강홍구가 《언더프린트: 참새와 짜장면》에서 보인 ‘찍은 평면’으로서 벽과 담, 그 위에 ‘그린 평면’으로서 짜장면 다섯 그릇, 토끼 인형, 벽돌 위 참새, 세잔의 〈사과와 오렌지가 있는 정물〉 등이 구축하고 있는 몸이 바로 그 현현이다.●

쿠르베

〈쿠르베〉 사진 위에 아크릴 100×170cm 2015

1 장자, 오강남 풀이, 《장자》, 현암사, 1999, pp. 146-154. “동양에서는 엄격히 따져 궁술, 검술, 유술 등 ‘술(術)’의 연마를 목표로 하는 훈련과 궁도, 검도, 유도 등 궁극적으로 ‘도(道)’와 하나가 되어 자연의 움직임과 합일하려는 수련을 구별했다. 말하자면 여기서 포정은 ‘해우술’이 아니라 ‘해우도’를 터득한 것이다.”(p. 152)
2 여기서 ‘피상성’은 말 그대로 가시적 표면으로 나타난 형상적 속성을 가리킨다.
3 Maurice Merleau-Ponty, Sens et non-sens, 권혁면 역, 《의미와 무의미》 중 “세잔느의 회의”, 서광사, 1985, p. 27.
4 Vilem Flusser, Lob der Oberflachlichkeit, 김성재 역,《피상성 예찬》, 커뮤니케이션북스, 2006, pp. 2-5 및 45-49 참조.
5 같은 책, p. 57.

강 홍 구 Kang Honggoo
1956년 태어났다. 목포교육대를 졸업하고 홍익대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2년 갤러리 사각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15회 이상의 개인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미술관 밖에서 만나는 미술이야기1,2》 《앤디 워홀:거울을 가진 미술사의 신화》《시시한 것들의 아름다움: 우리시대 일상 속의 시각문화 읽기》 등의 저서가 있다.

ARTIST REVIEW 진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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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자유의 전사> 레진 실리콘 혼합재료 90×140×90cm(높이, 각) 2015 아래 < UFO의 공격을 받은 슈퍼신의 광장> 혼합재료 360×165×50cm 2015 <UFO의 공격을 받은 슈퍼신의 광장>(벽면 설치작업, 부분) 3D그래픽 랜티큘러 79×140cm(각) 2015

5년만에 열린 진기종의 개인전은 <무신론보고서>(갤러리 현대, 2015.12.4~1.3)라는 부제를 달았다. 매스미디어가 전달하는 정보에 불신 가득한 시선을 보냈던 그가 이번 전시에는 한 치 앞 운명도 예견할 수 없는 인간이 현재 놓인 상황을 집요한 작업방식으로 펼쳐보인다. 그의 작가 노트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다. “과연 신은 존재할까? 그 신이 지명했다는 대리자의 말 또한 진실일까? 인간은 왜 신을 믿을까?” 이 연속되는 질문에 작가가 스스로 한 대답을 들어보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보고서

류한승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진기종이 <CNN>을 발표한 것은 2006년이다. <CNN>은 자타가 인정하는 그의 초기 대표작. 플라스틱 거품 사이를 빙빙 도는 비행기, 그리고 엉성한 자막과 CNN 로고. 이어서 그는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을 다룬 <Discovery>와 자연 다큐멘터리의 촬영 과정을 폭로한 <National Geographic>을 연달아 선보인다. 카메라, 모터, 조명, 장난감 등으로 만든 장면이 TV 모니터를 통해 중계되는 구조인데, 관객은 그 기발함과 재치에 절로 미소 짓게 되지만 그가 다루는 주제의 무거움을 알아차리는 순간 웃음기는 싹 사라진다. 완벽한 데뷔.
그의 초기 작업에서는 크게 두 가지의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첫째, 진기종은 카메라 렌즈를 통해 어떤 상황을 포착했지만, 오히려 그는 카메라 렌즈 밖의 세상에 관심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카메라 앵글 안에서 벌어지는 통제되고 편집된 상황을 끄집어내기 위해 그는 과감히 카메라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둘째, 그는 오브제를 정교하게 만들지 않았다.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드라마 세트장을 꾸밀 때 너무 잘 만들 필요가 없다. 그저 카메라 렌즈가 소화할 정도로 대상을 재현하면 된다. 어느 수준만 넘어가면 그것들은 진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진기종의 TV 모니터에서도 그럴싸한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그의 오브제를 바라보면, 그것들이 얼마나 허술하고 단순한 것인지를 금방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소소한 재미가 있다. 오밀조밀한 것들이 하이테크가 아닌 로테크에 의해 귀엽게(?) 움직이고 있으니까.
이처럼 진기종은 소형 카메라, TV 모니터 등 전자 장비를 활용하여 현대사회의 매스미디어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느냐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더불어 카메라 앵글 안의 이미지는 언제든 조작될 수 있는데, 그런 조작은 누가, 왜, 어떻게 하며, 또 그것이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지를 다루는 것이 그의 작업이다. 이는 사회에 내재한 여러 미시적 힘의 관계를 드러내는 일종의 ‘계보학적’ 접근과 닮아 있다.
카메라를 통해 렌즈 밖 세계를 바라보던 진기종의 작업은 다소 변화를 맞이한다. 그가 카메라의 렌즈가 아닌 맨눈으로 어떤 상황을 바라본 것이다. 그것이 바로 ‘디오라마’ 연작이다. 디오라마는 역사적 사건을 미니어처로 재현하는 것에서 유래했다. <CNN>의 경우 역사적 사건을 작은 오브제로 만들었기에 넓게 보아 디오라마로 칭할 수도 있다. 하여튼 디오라마 작업에는 카메라와 모니터가 없다. 그렇지만 디오라마 시리즈에서도 어떤 한 장면을 선택하고 그 장면이 왜 벌어졌는지를 추적한다는 측면에서 앞의 작품과 같은 맥락이다. 단지 카메라와 모니터가 없기 때문에 미디어 비판이 사라졌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었기에 도리어 사건 자체에 더 집중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디오라마 연작이 처음 소개된 것이 2010년 <지구 보고서> 개인전이다. 작가는 미국 뉴스 방송사 <CNN>과 아랍계 위성방송 뉴스채널 <알자지라>에서 영감을 받아 주로 석유, 전쟁, 환경 등을 다루었다.
이번 개인전 소재는 ‘신’과 ‘종교’이며 전시제목은 “무신론 보고서”이다. 과거 카메라 렌즈로 볼 수 없는 영역을 보고자 했듯이, 계속해서 그는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역을 보고자 한다. 그의 신(종교)에 대한 보고서는 대략 세 갈래인 것 같다.

 미니어처보트 PVC필름 영상설치 가변설치 2011

<항해> 미니어처보트 PVC필름 영상설치 가변설치 2011

여행의 종착점은 결국, 인간
첫 번째는 ‘종교와 개인’의 문제이다. 그와 관련된 작업은 <염주와 기도>이며 영상과 입체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니터에는 조계사에 다니는 한 할머니가 등장하고, 그 앞에는 큼직한 염주와 손이 설치되어 있다. 작가는 절에서 염주를 돌리며 기도하는 할머니들이 도대체 어떤 내용을 기도하는지가 궁금했다고 한다. 대략적으로 예상할 수 있듯이, 할머니가 기원한 것은 심오한 불교 교리도 아니고, 국가와 세계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식들이 잘되라는 정도이다. 이는 아마도 교회를 다니거나 성당을 다니는 평범한 어르신들의 기도와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성직자가 아닌 이상, 평범한 사람이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어떤 절대적·형이상학적 신을 믿기보다는 자신에게 필요한 신을 스스로 구성하는 게 아닐까.
두 번째는 ‘종교와 종교’의 문제이다.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하려는 미국의 특수부대원과 빈 라덴을 지키려는 알카에다 부대원이 서로 마주보며 각자가 믿는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자유의 전사>이다. 이 두 군인은 모두 실물 사이즈로 재현되었고, 이들이 지닌 각종 무기, 장비, 군복 등도 대부분 실물이라고 한다. 단 총은 한국의 사정상 모조품. 첨단장비로 무장한 미군은 오른손에 묵주를 들고 자신이 믿는 하느님에게 기도하고 있다. 반면 재래식 무기를 가진 알카에다 부대원은 오른손에 수브하(이슬람교에서 사용되는 묵주)를 들고 자신이 믿는 알라에게 기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종교는 한 뿌리에서 나왔다고 일컬어진다. 그러면 결국 같은 신에게 기도하는 셈인데, 혹시 이들이 믿는 신은 인간이 스스로 구성한 게 아닐까.
세 번째는 ‘종교와 외계인’이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할 수 있지만, 작가는 지구상의 종교들은 대체로, 일부 사이비 종교를 제외하고, 외계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이야기한다. 보통 종교의 절대자는 하늘에 있는 것으로 상정되는데, 그 하늘 너머에 있는 외계인은 그들에게 당황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드넓은 우주에 생명체가 지구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내용을 다루는 게 이른바 ‘슈퍼신’ 시리즈이다. 진기종은 이슬람교, 천주교, 기독교(개신교), 불교, 유대교 등을 혼합하여 가상의 신종 종교를 만들었다. 외계인이 지구에 왔는데, 이 신흥 종교의 사제들이 외계인을 공격하고 있다. 아마도 자신들의 교리를 주장하기 위해 외계인을 적대시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 외계인들이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있다. 분명 지구까지 올 정도면 고등생명체일 텐데 이들은 힘이 없다. 지구라는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한 듯. 어쩌면 그들은 지구인을 배척할 생각이 애당초 없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이번 전시를 보다 보면 반복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구슬’이다. 그것을 가톨릭에서는 묵주라고 하고 불교에서는 염주라고 하는데, 사실 이슬람교, 힌두교, 그리스정교에서도 이와 비슷한 것들이 있고 그 용도도 비슷하다. 전시에서 이 구슬은 일종의 ‘라임(rhyme)’으로서 전시에 시각적 악센트를 주는 동시에 여러 종교를 하나로 묶는 매개체로도 작동한다. <신을 향한 항해>에서 세계 5대 종교의 사제 5명이 한 배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그런데 사제들의 육체는 없고 휘황찬란한 금빛 사제복만 남아 있다. 금빛. 작가는 대다수의 종교가 금으로 무언가를 장식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작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의외로 종교들은 서로 공통점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전시명은 ‘무신론 보고서’이지만, 그렇다고 진기종이 신을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바라보는 지점은 우리가 신 그 자체에 다가가기보다는, 우리가 생각하는 범위 내에서 자신만의 신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물론 그것이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음).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로 환원되는 듯하다. 이번 전시에서 진기종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찾아 여행을 떠났지만, 결국 그의 종착역은 우리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진 기 종 Zin Kijong
1981년 태어났다. 경원대 환경조각과를 졸업했다. 2008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국내는 물론 타이완, 독일 뒤셀도르프 등지에서 8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한국과 독일, 브라질, 터키,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열린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출품했다. 현재 몽인아트스페이스레지던지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EXHIBITION FOCUS William Kentridge Peripheral Thin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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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시간의 거부> 5채널 영상설치 사운드 나무 2012 아래 <위비는 진실을 말한다> 35mm 컬러영상 (디지털로 변환) 사운드 1996~97와 <그림자 행렬> 35mm 애니메이션영상 1999이 순차적으로 상영되고 있는 전시장 광경

직전 세기 악명 높았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가 펼쳐진 남아프리카공화국. 이곳에서 급진적 활동을 하던 집안에서 태어나 그 실상을 전한 작품으로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는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 1955~)의 한국 첫 개인전 <윌리엄 켄트리지-주변적 고찰>(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015.12.1~3.27)이 개막, 진행 중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잘 알려진 그의 목탄 드로잉 애니메이션을 비롯, 영상과 음악, 역사 등이 망라된 대표작이 출품됐다. 동서고금의 역사와 문화, 정치가 담긴 켄트리지의 전시를 살펴보면서 그가 제시하는 키워드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생각해 본다.

불확실성의 예술가, 윌리엄 켄트리지

이윤희 미술비평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백인 예술가로, 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과 관련된 정치적 격동기를 연상시키는 작품들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아왔다.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작품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개인전에도 포함된 애니메이션 형식의 작품들이지만, 그는 드로잉을 기본으로 하여 문학과 공연예술까지 아우르는 다매체적 작업을 지속해왔다. 남아공 출신의 백인이면서, 기존의 매체 개념에 국한되지 않는 탈장르적 경향을 보이는 작가임과 동시에, 자신이 처한 지역의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해 왔다는 이력은 그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 특성들을 담지하고 있는 이 시대의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는 데 촉매가 되었다.
남아공의 거의 모든 백인이 그러하듯이, 그는 조상이 선택한 이주를 통해 그곳의 일원이 되었다. 남아공의 백인 이주는 이미 17세기부터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켄트리지 가문은 유대인 혐오기류가 전 유럽에 팽배하던 19세기 말에 이주했다. 유대계인 그의 가문은 박해를 피해 증조부 시절에 남아공에 정착했고 몇 세대에 걸쳐 정계와 법조계에 영향력을 가지는 가문으로 성장했다. 변호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넬슨 만델라와 살해당한 흑인 인권운동가 스티븐 비코의 편에 서서 활동한 인물이다. 특정 작가의 작품을 논할 때 그가 어떤 집안 출신이라는 점을 이처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은 대개 불필요한 일이겠으나, 켄트리지의 경우 당시 남아공의 상황과 집안 배경은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열쇠가 된다.
1989년의 <요하네스버그, 파리 다음으로 위대한 도시(Johannesburg, 2nd Greatest City after Paris)>를 시작으로 2003년의 <조수간만표(Tide Table)>에 이르는, <프로젝션을 위한 드로잉(Drawings for Projection)> 연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이해하는 데도 그의 출신 배경은 참고가 될 만하다. 이 연작들에서 각각 탐욕스러운 자본가와 예민한 예술가의 면모를 보이는 두 인물은 모두 어딘지 작가의 얼굴을 닮아 있다. 한 사람은 줄무늬 양복을 입은 풍채가 좋은 인물이고, 다른 한 사람은 줄곧 누드로 등장해 유약한 느낌을 주지만, 둘 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백인 남성이다. 펠릭스(Felix Teitlebaum)라 이름 붙여진 누드 남성은 켄트리지 자신의 현재 모습을 반영하여, 양복을 입은 소호(Soho Eckstein)라는 인물은 켄트리지가 조부 사진을 참조하여 그린 것인 만큼, 두 인물이 모두 작가를 닮아있는 것은 당연하다. 두 인물은 대개는 명백하게 구분되지만 때로는 비슷해 보이고 어느 순간 한 인물이 다른 인물로 변용되기도 하는데, 이는 켄트리지가 가진 이중적 정체성의 반영인 것으로 해석될 여지를 부여한다. 그는 반(反)아파르트헤이트 전선에 선 집안의 일원이지만, 백인 거주지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면서 흑인 고용인의 도움을 받고 백인 소년들을 위한 학교를 다니며 유럽적 문화와 전통을 교육받았다. 자신이 스스로 가해자편을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남아공의 백인이라는 자기 존재 자체가 모순적 정체성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박해를 피해 아프리카에 정착한 유대인의 후손인 자신은, 완전한 백인 가해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종주의에 맞서는 투사도 아니고, 그 두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정치적으로 모순된 존재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성찰이 내재하며 동시에 유럽적 전통에 뿌리를 둔 자신의 예술적 감성에 대한 고뇌도 엿보인다. 그는 유럽 전통의 미술뿐 아니라 문학과 음악에 조예가 깊다. 그의 전방위적인 활동은 게오르크 뷔히너(Georg Buchner)의 희곡을 패러디한 작품(<하이펠트의 보이체크(Woyzeck on the Highveld)>(1992))과 괴테의 파우스트를 남아공의 상황에 빗댄 작품(<아프리카의 파우스트!(Faustus in Africa!)>(1995))으로부터,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몬테베르디의 <율리시즈의 귀환>, 쇼스타코비치의 <코> 등의 기존 오페라를 새로이 해석해 자신의 영상프로젝션, 무대디자인과 더불어 공연으로 올리는 작업에 이르렀다. 그는 유럽의 고전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다시 그리고, 다시 써서, 다시 제시한다. 그가 과거의 예술에 개입하여 다시 제시하는 메시지는 최신의 세트장과 영상과 의상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문학작품이나 오페라 속의 줄거리에 배태되어 있는 모순적 상황들을 끄집어내서 반복하고 회의하는 방식인 것이다. 기존의 작품에서 선명했던 서사는 비틀어지고 균형감을 잃고 모호한 종말을 맞는다.

(사진 오른쪽) 철 알루미늄 자전거부품 발견된 오브제 253×150×150cm 2012

<무제(풀무)>(사진 오른쪽) 철 알루미늄 자전거부품 발견된 오브제 253×150×150cm 2012

견고한 상식을 깨다
기존의 명확했던 것을 곱씹어 회의하는 방식은 그가 작업실에 앉아 그림을 그릴 때에도 개입되는 태도이다. 잘 알려진 바대로, 그의 애니메이션은 종이 위에 목탄 드로잉을 기본으로 한다. 단색의 한계뿐 아니라 정착액을 뿌리기 전에는 지워지거나 번지기 쉬운 단점을 가지고 있는 목탄은 유럽미술의 전통에서 볼 때 결코 주된 재료가 아니다. 그러나 켄트리지는 목탄의 단점을 자신의 드로잉 작품, 드로잉을 기반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형식의 작품에 동력으로 삼았다.
그는 종이에 목탄으로 어떤 형상을 그리고, 그린 형상을 부분적으로 지우고 거기에 덧그리는 과정을 사진으로 찍어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 대개 7~8분 정도 되는 한 작품에 적게는 20장, 많게는 60장의 드로잉 작품이 사용되는데, 분당 수백 장이 사용되는 셀 애니메이션과 비교해볼 때 많은 연속 장면이 종이 한 장으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방식이다. 연속된 장면, 그러니까 커피포트가 엘리베이터로 변했다가 수직갱도로 변하는 장면이나 검은 전화기가 고양이로 변하는 장면, 건물에 물이 들어차 잠기는 장면, 빈 벽에 그림이 차례로 걸리기 시작해 벽 전체에 빼곡히 들어차는 장면 등은 각각 하나의 종이에 그려진 그림이다. 물론 최종적인 드로잉은 그 자체로 하나의 드로잉 작품이다. 무엇인가를 그리고 번지게 하고 사라지게 하고 그 위에 새로운 것을 그리는 이러한 방식은, 하나의 화면이 구조적 완결성을 가진다는 기존의 견고한 상식을 흩어버린다.
게다가 그린 것을 지우고 덧그릴 때, 이미 그려진 것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고 화면에 흔적을 남긴다. 그는 처음 목탄 드로잉을 할 때 지울 부분을 완벽하게 지우려 노력했지만, 지워지지 않고 남는 흔적들이 일종의 시간의 은유를 담을 수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과거를 깨끗이 세탁한 현재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지워진 흔적들과 그 위에 덧그려지는 형상들이 정지된 화면의 제한을 뛰어넘게 하는 것이다.
매끈하게 완결된 화면 대신 덜 지워진 흔적 위에 중첩해서 그리는 것은, 스토리보드 없이 시작해 형성 과정 그 자체의 순간에 의존하는 서사 구성 방식과 더불어, 그의 작품 기저에서 추구되는 가치가 명료성, 일관성, 완벽성에 대한 거부임을 보여준다. 물론 그의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은 끊임없이 일관되고 명료한 의미를 찾는 기존의 습성을 버리기 어렵다. 그리고 그것은 켄트리지가 관객을 낚아 올리는 미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예컨대 소호의 부인과 펠릭스가 사랑에 빠질 때 등장하는 물고기, 점점 차올라 범람하는 홍수의 이미지 등은 관객을 도상학적 해석의 늪에 빠뜨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료한 해석이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기독교나 그리스로마 전통의 도상을 넘어, 각 사물에 대한 개인적 도상학을 구축하여 해석의 여지를 개방하고 넓히는 것 역시 그의 작품 전반에서 보이는 특성이다.
다채널 영상작품들은 해석 그 자체를 분열시키는 더욱 유용한 수단이 되고 있다. 여덟 편의 영상이 동시에 상영되는 <나는 내가 아니다, 말은 내 것이 아니다(I am not me, the horse is not mine)>(2008)에서 타틀린의 기념비가 여러 채널에서 반복되는 점, 오페라 <코(The Nose)>에서 사용되었던 코의 형상이 빈출하는 지점 등이 일관된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만, 한눈에 일별하는 것이 불가능한 스크린상의 내용이 단일한 결말을 보장해주지는 않는 것이다. 심지어 그의 퍼포먼스의 일환인 강연에서는, 켄트리지 스스로 연사가 되어 미리 준비된 발언을 하지만 자신의 강연 내용을 혼란에 빠뜨리는 영상들이 상영되어 때로는 코믹하고 때로는 골치 아픈 메시지 해독의 시간을 청중에게 선사하기도 한다. 이처럼 켄트리지의 작품에 대한 해석은 어느 하나로 수렴되기보다는 단서가 되는 특정 지점으로부터 무한히 발산된다. 남아공에 사는 백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성찰이 다른 나라의 정치 상황으로까지 이어지는 사고의 궤적, 세계의 가장 변두리에서 사적인 고뇌와 슬픔을 표현하는 소재의 착종, 그리다가 중간에 멈추어버린 것 같은 수많은 드로잉 작품, 서로 지지하다가도 배반하는 내용의 영상의 동시 상영, 잘 알려진 고전 작품들의 재맥락화 등, 이 모든 켄트리지의 작품활동을 아우를 수 있는 단 하나의 지점은 불확실성에 대한 신뢰이다. 불확실성만이 확실하다는 것, 이는 논리적 귀결을 예견하고 어느 지점에 깃발을 꽂아 그 방향으로 달려갈 수 있었던 시대가 종결되었고, 이제는 장님이 지팡이를 더듬듯 어디가 길인지 더듬어가며 걸음을 내디딜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불확실한 가운데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아주 없지는 않은, 그리하여 이해 가능과 불가능의 사이에서 생각에 생각을 더하게 되는 것이 그의 작품을 바라보는 즐거움이자 괴로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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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국내 첫 개인전 연 윌리엄 켄트리지 William Kentridge

“예술 없이는 인생이 지속될 수 없다”

IMG_0240우선 한국에서의 전시를 축하한다. 먼저 소감을 묻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하고 싶다
직전에 중국 베이징의 울렌스현대미술센터(Ullens Center for Contemporary Art)에서 전시(2015.6.27~2015.8.30)를 열었다. 이번 한국에서의 전시는 이보다 규모가 더 크다. 어떻게 보면 새로운 공간에서 전시를 한다는 것은 작품과 공간의 만남, 일종의 대화가 시작되는 것인데 아직 공간에 친숙하지 않아서 서로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진 않고 있다.
역사적 공간에서 전시되는 당신의 작업과 제도화되고 권력화된 화이트 큐브에서 보여지는 당신의 작업은 어떤 차이를 가질 것으로 보는가?
예를 들면 <Refusal of Time>은 어디에서 전시되든 매번 변화를 주었다. 그런데 다르게 보여준다해도 투박함이 있어야 하는데 이 작품을 설치할 때 완벽하고 깔끔한 공간이 아니라 항상 거친 공간에 설치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작품을 운반할 때 썼던 박스, 벽에 설치하고 남은 나무조각들을 이용했다.
예전에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불가능할 것을 안다. 하지만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작가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은 무엇인가?
아티스트가 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관람객은 작품을 보면서 어떤 변화가 가능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지 않을까. 나도 영화나 소설, 미술작품 등을 보고 내 자신을 바꾸지는 않았지만 나 자신을 확인하고 소신을 갖게 된 경험이 있다. 즉 자아를 구성하는 데 기여한다는 말이다.
예술에 과연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있을까? 이에 대해 <다른 얼굴들> 작업과 연계하여 생각을 들어보고 싶다
내 작품이 어떤 이에게는 치유의 힘이 될 수 있겠지만, 나는 사실 예술 없이는 인생이 지속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예술이라고 하면 전문적인 예술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상상력, 은유,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상황에서 우리가 구현하는 의미에 동의하는 것이 있다. 이것 없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항상 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는다. 작업에서 기본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것인가?
내게 컬러감이 있었다면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었을 텐데. 흑백 작업은 내가 컬러 작업을 못하기 때문이다.(웃음)
<Lesson> 연작을 보면 켄트리지가 켄트리지에게 질문한다. 자기를 타자화한 작업처럼 보인다
내가 만약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았다면 더 이상 작업을 안해도 되겠다.(웃음) 모든 작업은 나를 찾기 위한 답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생을 마감할 때 이게 바로 나였구나 확인하는 것 같다. 사람은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다. 그래서 여러 명의 나를 작업실로 불러 재미있는 대화를 하는 것이다. 이 상자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 그 프로세스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업을 떠나 당신이 기억하는 성장과정을 듣고 싶다
좋은 질문이다. 예전에 아버지가 찍어주신 영상을 보면, 좀체 가만있지 않았다. 뭔가를 항상 보여줘야 했다. 그러니깐 자신의 존재감을 강조하며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무엇인가를 항상 만들고 확인받고자 했다. 그래서 할아버지, 어머니에게 많은 드로잉을 선물했다. 그 드로잉과 지금 내 작업과 무엇인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당신의 작업은 딱히 어떻다 설명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내 작업은 무엇이다”라는 말을 직접 듣고 싶다
나는 메시지 등 작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를 고려하지 않는다. 단지 무엇인가 만들어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그러니까 제작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황석권 수석기자

WORLD TOPIC | BEIJING Ai Weiw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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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 왕씨사당(汪氏祠堂) > 명말대 1300여 개의 나무조각에 채색 2100×1680×942cm 2015 < Chandelier >(아래 설치작업) 구리 수정 조명 400×241×231cm 2015(갤러리 콘티누아 설치작업) 아래 < Spouts installation > 1만여 개의 송대 주전자 꼭지 495×430cm 2015(당인당대예술공간 설치작업)

중국 작가들에게 물었다. 지금 베이징에서 누가 가장 ‘핫’한 작가냐고. 십중팔구의 대답은 한결같이 ‘아이웨이웨이’였다. 중국 당국에 여권을 압수당하고 가택연금당했던 중국 미술계의 앙팡테리블 아이웨이웨이의 전시가 베이징 5개 전시장에서 동시에 열렸다. 중국 정부 기관의 허가를 받은 첫 개인전이라는 점도 놀라운 일이고, 전시장 벽을 뚫는 등의 파격적 상황과 결부되어 전시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다는 점도 눈길을 끌고 있다. 아이웨이웨이가 전시장에서 풀어낸 고심의 흔적을 살펴보도록 한다.

베이징의 앙팡테리블, 아이웨이웨이

권은영 미술사

한 도시에서 생존 작가의 개인전이 5개의 각기 다른 기관에서 열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중대형 화랑이 손을 잡고 공동으로 기획하여 벽을 뚫어가며 한 명의 작가 개인전을 동시에 개막, 행사를 추진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일 것이다. 베이징은 물론 중국 내외의 예술 애호가들의 시선을 집중시킨 대망의 주인공은 바로 아이웨이웨이(艾未未)이다. 중국 정부의 허가를 받고 베이징에서 정식으로 당당하게 첫 개인전을 여는 그가 우리에게 당당히 쏟아내는 이야기에 어찌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미술계뿐만 아니라, 정치사회 관련 소식에서도 왕왕 접하게 되는 아이웨이웨이. ‘반체제 예술가’라는 수식어가 식상할 정도로 그는 끊임없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안에서는 서슬 퍼런 비판을 받고 밖에서는 손바닥이 뜨거워질 만큼의 박수를 받아왔다. 2011년 81일간 구금당했던 그가 4년여 만에 중국 정부로부터 여권을 돌려받았다는 소식이 한창 회자되던 중에 돌연 중국 주재 영국대사관이 6개월 비자가 아닌, 20일 단기 비자만을 발급해줬다는 소식으로 다시금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지칠 줄 모르고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그가 1993년 중국에 귀국하고 처음으로 중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 공개적으로 개인전을 쏟아냈다. 지난여름, 아이웨이웨이는 베이징의 5개 공간에서 서로 다른 4개의 개인전을 연이어 선보였다. 중국의 한 기자는 “베이징에서 그의 이름을 공공연하게 입 밖에 낼 수 있는 날이 올줄 몰랐다”며 그의 전시 소식을 전했고, 그의 전시는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6월 6일, 베이징 798예술구의 대표적인 화랑인 이탈리아계 ‘콘티누아 화랑(Galleria Continua)’과 화교계 ‘당대당인예술센터(?代唐人??中心)’가 ‘아이’, ‘웨이웨이’로 작가 이름을 사이 좋게 나누어 걸고 그의 개인전을 동시 개막했다. 이틀 뒤 같은 798예술구의 ‘마금석공간’(魔金石空?)에서 역시 ‘아이웨이웨이 개인전: AB형’(艾未未?展:AB型))이 개막했다. 그리고 건축가로서 아이웨이웨이 자신이 2007년 설계한 차오창디(草?地) 예술구의 미국계 ‘체임버스 파인 아트(Chambers Fine Art)’에서 6월 13일 <호랑이(彪)전>을 개막하고, 뒤이어 19일 같은 예술구의 ‘305박물관(305 Museum)’에서 <대단한 일(挺事?的)전>을 단 하루 선보였다. 지난 4년간 꾹꾹 참고 숨겨두었던 이야기 보따리를 한달음에 풀어놓은 그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역시 그는 ‘중국’이라는 큰 화두를 꼭 쥐고 있었다. 유구한 역사, 사회주의 국가 건설, 문화대혁명, 개혁개방,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 퇴색한 전통 그리고 인권. 가장 먼저 아이웨이웨이 개인전 축제의 포문을 연 ‘콘티누아 화랑’과 ‘당대당인예술센터’의 공동 기획전 <아이>, <웨이웨이>는 하나의 벽을 사이에 두고 있던 두 개의 전시공간을 뚫어 명나라 시대의 건축물을 세워 큰 관심을 받았다. 아이웨이웨이는 중국 전역을 다니며, 시간을 머금은 사연 많은 사물들을 모으기로 유명하다. 이번에 그는 장시(江西)성 우위안(?源)현 샤오치(?起)촌에 있던 400여 년의 역사를 품은 ‘왕가의 신주단지를 모시고 있는 사당(汪家祠)’을 통째로 베이징에 옮겨왔다. 본래 왕가에서 선조들에게 제사를 지내던 건물을 ‘월국공’(越?公) 왕화(汪?)가 개보수하여 다시 지은 왕가사당은 제사를 지내고, 축전을 하는 등 집안의 중대사를 함께한 가문 회합의 중심에 서서 전통을 쌓아왔다. 하지만 1950년대 지방 유지였던 왕씨 일가는 사회주의 혁명의 타파 대상으로 지목당했고, 왕가사당은 국가가 몰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왕씨 일가는 물론 국가로부터 방치된 사당은 결국 중당(中堂)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소수의 편에 선 작가
1500여 개의 부분으로 해체되었다가 다시 조립된 전시장 속 왕가사당은 사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중국의 화려했던 근세는 물론 질곡의 근대, 그리고 현대 중국의 풍파를 고스란히 머금었으니 오죽할까. 결국 왕가사당은 왕씨 일가의 가문의 역사에서 시작하여, 중국 전체의 역사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미술 전문 매체 《야창(雅昌)》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선조의 기억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흔적으로 남아 있다. 인류 문명은 한 줄기 강과도 같아 아주 먼 곳에서부터 흘러 흘러 오늘의 모습을 하고 있다. 누구든지 이 강이 어떤 경험을 해왔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오늘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며 정체성의 문제를 꼬집고 있다. 사람들이 종종 망각하지만, 좋든 싫든, 자랑스럽든 부끄럽든,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오늘의 우리를 다시 한번 각인시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체임버스 파인 아트의 <호랑이전>을 읽을 수 있다. 화랑의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에 뿌리가 잘린 대형 고목이 터줏대감처럼 서 있다. 마치 리처드 세라의 <기울어진 호>를 떠올리게 하는 대형 고목은 대문과 화랑 입구 사이를 막고 있어서, 관람객은 고목을 빙 돌아 화랑에 진입할 수밖에 없다. 또한 육중한 고목의 존재감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한걸음에 화랑에 진입할 수도 없게 만든다. 시골 마을 어귀에나 있었을 법한 대형 고목에 눈길을 주다 보면 돌연 고목의 가지 가지가 왠지 부자연스럽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사실 고목의 가지들은 자연 그대로의 줄기에서 뻗어 나온 가지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붙여 놓은 가지들이다. 2009년부터 청나라 시대 이전 사찰의 고목을 수집해 온 작가는 서로 다른 고목의 뿌리와 줄기들을 융합하여 또 다른 거대한 고목을 만드는 새로운 연작을 하고 있다. 그가 주목하는 지점은 역시 중국의 전통과 관련이 있다. 중국은 명나라 시기를 제외하고 그 전후에 굴곡 많고 여러 가지가 얽히고 설킨 고목을 이용하여 가구를 만들거나 장식물을 만드는 전통이 있다. 명나라 시기의 단아한 가구와는 상반되는 이러한 화려하고 희귀한 형태의 가구는 지금도 중국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작가는 전통 공예에 속하는 고목을 활용한 가구를 예술작품으로 승격시켜 다시금 중국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중국의 과거를 이야기하던 작가는 798예술구에서 <AB형>이라는 제목으로 오늘의 중국을 이야기했다. ‘경고’ 문구에 자주 사용되는 노란색으로 사방이 칠해진, 좁은 벽으로 양분된 전시장을 수백 포기의 “철 잡초”(?草)들이 관통하고, 천장에는 일상 생활에서 지나치기 쉬운 옷걸이를 모빌처럼 엮어 늘어뜨렸다. 앞선 3곳의 전시장에서 수백년 혹은 수천년의 시간을 머금은 사물들로 소통했던 데 반해, AB형 전시장에선 철, 잡초, 옷걸이라는 현대사회 일상 소재들로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잡초는 한없이 약하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반면 철은 본래 건축 자재이면서도 강인함을 상징한다. 이 두 상반되는 성질을 머금은 <철 잡초>와 <옷걸이 모빌>을 통해 작가는 일상의 사소한 문제들을 꼬집고 새로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민초를 연상하게 하는 <철 잡초>를 보고 있자니, 소수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곤 하는 작가의 오늘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번 일련의 개인전에서 전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비교적 온화했다. ‘반체제’, ‘인권’ 등 윗선의 심기를 거스르던 목소리는 잦아들고, 대륙 모두의 공공의 적 ‘사인방’에 대한 인민의 눈높이에 맞춘 일침이 돋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의 SNS에 작업실에서 도청기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올라 안타깝다. 현 정부와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그의 모습에 만감이 교차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리라. 무더웠던 올여름 798예술구를 더욱 뜨겁게 달구던 아이웨이웨이 전시들이 하나 둘 막을 내리고 있다. 갤러리 콘티누아만이 아이웨이웨이와 함께 올 연말을 마무리할 듯싶다. 그가 들려주는 400여 년 중국의 역사 이야기는 2015년 말까지 계속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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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웨이웨이 Ai Weiwei
1957년 태어났다. 베이징 영화학교를 졸업했다. 1981년 미국에 거주하면서 행위예술과 설치미술 작업을 시작했다. 1993년 중국으로 돌아온 그는 실험예술가의 모임 ‘이스트빌리지’를 결성하기도 했다. 베니스 비엔날레(1999), 카셀도쿠멘타(2007), 광주비엔날레(2012) 등에 출품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국가체육장 냐오차오(鳥巢)를 헤르초크&드뫼롱과 협업하여 설계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 정부가 올림픽을 지나치게 선전한다는 이유로 정작 개막식에는 불참했다. 2011년 공안에 연행되어 81일간 구금되기도 했으며, 여권을 압수당하고, 1년여 가택연금을 당하는 등 중국 정부에 대항하는 대표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NEW FACE 2016 김지영

내가 할 수 있는 말, 예술에 대한 믿음

2014년 4월 세월호 침몰 사건은 전 국민을 충격의 도가니에 빠트렸으며, 많은 예술가 역시 이 자장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당시 작가들은 현실이 이러한데 예술은 사치라며 회의감에 빠지기도 했고, 작업에 이 사건을 언급하기도 언급하지 않기도 어려운 상황이라며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작가 김지영 역시 같은 고민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사건과 자신의 거리를 조율하며 이를 주제로 꾸준한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최근 성북동 한옥을 개조한 오뉴월 이주헌(利宙軒)에서 열린 개인전 <기울어진 땅 평평한 바람>(2015.11.19~2015.12.10)에서 작가는 원래 평평한 전시장 시멘트 바닥을 기울어진 마룻바닥으로 변모시켰다. 이외에도 심장박동과 유사한 북소리,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 푸른색 조명, 깨진 화분 속 말라 비틀어진 식물들, 작가와 지인의 자는 모습을 그린 그림 등 전시장 곳곳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특정한 상황을 떠올리는 은유적인 장치가 된다. 관람객이 전시장을 들어서면 거대한 파도 앞에, 혹은 배 안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작가는 “전시장 자체가 각자의 호흡으로 사유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한다”고 설명했다.
김지영은 이 사건 발생 후 광화문 시위현장, 안산 분향소를 찾아갔지만 직접 팽목항에 내려간 것은 지난해 10월이 처음이었다. 정작 내려가서 보니 그냥 평범한 바다여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동안 팽목항 앞바다에 막연한 공포를 가졌던 것이다. 그때 작가는 사람들이 세월호 사건을 그 자체로 바라보지 못하고 공포와 두려움으로 스스로 거리감을 만들고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그런 공포심을 조성하는 사회구조가 땅을 기울어지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이때 전시 제목의 ‘평평한 바람’은 죽음이 이 땅 위에 공존함을 암시한다. “타인의 고통, 이들의 죽음을 공동의 사건으로 인식하고 각자의 거리를 인정하며 공감할 때 연대의 가능성이 만들어집니다. 많은 사람의 공감이 깊어질 때 사회가 변할 수 있는거죠.”
김지영은 과거 작업에서 삶의 이면에 도사린 폭력성에 관심을 가지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을 시도했다. 작가는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내가 감히 무엇을 말해도 되냐보다 어떻게 말하는지가 더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내가 오히려 미술의 힘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 가능성을 의심하고 스스로 제한을 두고 검열한 것은 아닌지 질문하게 된 것이죠.” 그런 고민 끝에 나온 작업이 사무소 차고에서 선보인 <선할 수 없는 노래>였다. 그리고 각자의 거리감 자체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 2014년 4월부터 1년간 진도 바다의 풍속을 비트로 변환시킨 북소리를 듣고 그날의 파도를 상상해서 그린 <4월에서 3월으로>를 선보였다. 세월호 사건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것처럼 작가는 앞으로 변주를 계속하며 자신의 방식으로 이 사건을 말할 예정이다. 예술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들여다보고 몰두하게 하는 힘을 가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슬비 기자

김지영
1987년 태어났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전문사 과정을 마쳤다. 반지하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교역소, 사무소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아트스페이스 풀, 아마도예술공간 등에서 열린 그룹전에 참여했다.

 종이에 아크릴 20점 각 38×33cm 2015

<수면> 종이에 아크릴 20점 각 38×33cm 2015

 

NEW FACE 2016 이지연

기억하나 헤매고, 그리고 발견하다

‘기억’은 사실 부정확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이다. 또한 기억의 맥락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만 취사선택한 결과물이 기억이다. 이지연 작가가 벽면을 통해 제시하는 공간이 ‘기억’에 근거한 것이라는 말에 기자는 그 부정확함을 먼저 떠올렸다. “평면작업 <기억을 그리다-reminiscent> 연작은 기억 속 장소인 외가가 대상이에요. 2003년 돌아가신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붙잡고 싶어서 그 장소를 그렸지요.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외가 친척들도 아무도 그림에 나오지 않고 어떤 상황이 나타나지 않는데 처음부터 그릴 이유도, 그리고 싶은 것도 없이 공간만 그리게 되었죠. ‘기억’을 이야기하려면 늘 이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 최근의 공간작업들은 그런 기억이라기보다는 공간 자체와 그 안의 놀이로 가려 해요.” 작가에게 그래서 ‘기억’이란 “공간을 지각하고 인지하는 방식의 배경”으로 정의된다. 그래서 작가가 제시하는 공간은 필연적으로 관람객의 ‘헤매임’을 요구하는 것 같다. 누군가의 철저히 사적인 기억의 결과물인 작업 앞에서 관람객은 어쩔 수 없이 ‘타인’이기 때문이다. “관람객에게 ‘어딘가?’를 상상하게 하는 것이 출발점이었어요. 전에 어떤 관람객이 53점으로 구성된 <5월의 일지를 들춰보다part4>(2009)를 보며 ‘추리소설의 장면’이 생각난다고 한 적이 있어요. 작가로서 굉장히 반갑고 신나는 경험이었죠. 그 헤매임 자체를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관람객의 그러한 ‘즐김’은 선 이외의 벽면 공간을 상상력으로 채워넣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이 작가의 작품은 월페인팅, 캔버스 작업, 그리고 조각작업으로 나뉜다. 그런데 대부분 작업은 평면에서 구현되는 입체에 대한 고전적 해석, 즉 환영을 구축하는 과정으로 읽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맥락이라면 <호기심 상자_소파에 누워 천정을 걸었다>(2014)는 이례적이다. 작업이 대부분 관람객의 정상적 직립 자세에서 자연스럽게 시선을 보내는 행위에서 발견되는 것이라면, 이 작업은 위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들어야 하거나 누워야 하는 수고를 요하기 때문이다.
“<호기심상자_소파에 누워 천정을 걸었다>는 전시장소가 큰 영향을 주었죠. 클레이아크미술관의 세라믹창작센터 입주 작가 전시였는데 입주해 있는 동안 미술관을 많이 돌아다녔어요. 제목의 ‘소파에 누워서 천정을 걸었다’라는 말 자체가 제가 어릴 적 놀던 방식이에요. 바로 외가의 가옥 구조가 그랬습니다. 집 안 구석구석 안 보이는 곳이나 벽 너머, 계단 뒤나 문 사이사이에 새로운 공간에 대한 상상을 하였지요. 말씀하신 ‘특별한 차별성’이라고 하면, 다른 작업들이 ‘제가 떠올리는 방식’의 ‘이미지’를 보도록 했다면, 이 작업은 ‘제가 바라보던 방식’에 가까운 ‘시선 또는 자세’를 요청-요구한 점일까요?”
장소와의 상호 교감이 작업에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이에 대해 이 작가는 “평면작업이든, 벽면 작업이든 전시장을 필연적으로 고민하게 된다”고 털어놨다. “입체적인 설치가 아닌 경우에도, 공간을 자주 살피려 하는데, 벽면 설치작업의 경우는 공간의 구조나 규모가 이미지의 구상에 영향을 줍니다.” 최근 문래동에서 7&1/2의 기획으로 작업한 <존재하지 않은 경계>는 작가의 공간에 대한 고려가 십분 발휘된 작업이다. 이 작가의 작업은 시공을 초월하여 관람객이 상상력을 발휘해 각자의 ‘놀이방식’을 찾았으면 한다는 바람을 드러남이다. 그 ‘놀이방식’은 현재 부산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녀의 이력에는 근 5년간 전국 각지 레지던시프로그램에 참여한 경력이 빼곡이 적혀있다. 스스로 한 곳에 정주하기를 거부하는 작가의 근본적 습성이 지금의 작업을 낳은 것 같다. 지금 놓인 ‘상황’ 그 자체가 작업의 동력이라는 이지연 작가의 또 다른 ‘기억’과 ‘상황’은 무엇일까?
황석권 수석기자

이지연
1980년 태어났다. 이화여대 조형예술대 회화판화 전공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9년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지금까지 8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또한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출품했다. 현재 부산 예술지구P 레지던시프로그램 입주작가이다.

 가변설치 2015

<존재하지 않는 경계> 가변설치 2015

 

NEW FACE 2016 강신대

동시대의 이미지를 박제하다

하루 동안 스쳐가는 이미지는 셀 수 없이 많다. 그중 대다수는 다음 날이면 기억에서 사라진다. 이 경우 이미지는 내러티브를 잃고 이미지 그 자체로 떠다니는 껍데기일 뿐이다. 인터넷에 부유하는 수많은 이미지는 그 생산·유포자의 의도 및 상태는 상실된채 본래 의도와 무관하게 추상화되어 소비자의 구미에 맞게 요리된다.
작가 강신대의 관심은 ‘이미지’에 있다. 미술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이미지의 정의를 넘어 작가는 “총체적 방식의 이미지”를 다루려 한다. 이에 따르면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개념도 이미지로서 형상화할 수 있다. 물신주의적 관점으로 형상 자체를 추적하고 풀어나가는 것이 그가 집중하는 ‘이미지 이론’이다. 작가는 “미술관 안에 전시된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를 넘어 일상을 지배하는 이미지의 논리, 형상화의 과정 표현방법을 고민 중”이다.
2015년 여름 강원도 철원군 동송에서 열린 ‘리얼 DMZ 프로젝트’에서 선보인 <#DMZ>는 ‘DMZ’란 키워드를 물질화하여 이미지로 치환하는 작업이다. 작가는 웹상에 ‘DMZ’란 키워드를 입력한 후 검색되는 이미지들을 ‘이미지 수집 프로그램’ 과 ‘영상 처리 프로그램’을 통해 수집하고 축적했다. 같은 시각 동네의 한 통신사 상점에 설치한 TV에 실시간으로 수집되는 영상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코드화된 이미지는 단어의 의미와 깊은 유대를 갖는 경우도 있지만 연예인, 상업광고, 주식시장 등 개념어로 제시한 단어의 뜻과 전혀 무관한 형상인 경우도 많았다. 수집되는 속도에 따라 이미지는 때로는 눈 깜짝할 사이 흘러갔다. 작가는 주관적 판단 과정을 통해 이미지 선별하기를 거부하고, 컴퓨터가 수집한 코드화된 이미지를 통해 일상적으로 유통·소비되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렇게 모인 이미지가 전시 마지막에는 약 4000만 개에 달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이미지를 저장할 수는 없다. 마치 CCTV 화면처럼 프로그램은 계속해서 구동하지만 저장 공간에 한계에 부딪쳐 이미지가 쌓여갈수록 오래된 파일은 사라진다. 결국 이미지는 허상이다. 저장되지 않고 사라지고 흩어질 수밖에 없는 이미지에 물성은 없다. 또한 이미지 수집에서 작가의 주관성이 전적으로 배제될 수 없다. 작가는 주관적인 의도를 갖고 키워드를 선택하고 입력한다. 그리고 컴퓨터는 키워드의 조종에 따른다. 작가는 ‘기계’ 사용을 일종의 위장술로 취함으로써 이미지가 가볍게 소비되면서도 동시에 생각을 지배하는 정치적 측면에 주목한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가치로 미술을 평가했을 때 “쓸모없음”으로 구분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 지점에서 ‘미술에서 정치적인 것’이 지닌 가능성을 보았다. 정치적인 매개의 논의가 발화하는 유일한 곳이 미술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다. 시각미술이 이를 소재로 휘발시키기보다는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때 메시지는 허상의 이미지가 지닌 유일한 내러티브의 매개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임승현 기자

강신대
1988년 태어났다. 계원예대 현대예술창작&기획과를 졸업하고 현재 성공회대 사회과학부에 재학 중이다. 갤러리27에서 열린〈태도상정〉이후 〈사유하고, 사유하라〉,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 2015〉에 참여했다.

 < #DMZ >(실시간 이미지 수집 프로그램, 실시간 영상처리 프로그램 2015) 나래 정보통신에 설치된 전시 전경 ⓒ김태동

< #DMZ >(실시간 이미지 수집 프로그램, 실시간 영상처리 프로그램 2015) 나래 정보통신에 설치된 전시 전경 ⓒ김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