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EFING

제품설명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이 말이 딱 와 닿는 요즘입니다.” 우리 책 교열을 봐주시는 선생님이 내가 보내드린 마지막 교열 원고 말미에 덧붙여 주신 글귀다. 그렇다. 엄동설한 동짓달 매서운 추위보다 이 무렵 꽃샘추위가 오히려 더 춥게 느껴지는 법, 특히나 올 봄은 이래저래 어느 해 봄보다 물심양면 더 추울 것만 같다. 가뜩이나 미술판에 재미있는 일이 통 없는 요즘, 시국마저 이 지경이니 마땅한 기삿거리 찾기가 녹록치 않다. 매달 초, 우리 기자들은 머리를 쥐어 짜낸다. 이런 와중에 이번달은 내가 자진해서 총대를 맸다. 기자들이 제안했던 기획안은 숙성시켜 다음 달 이후에 소개할 예정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얼마 전 술자리에서도 엉뚱한 주제로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다름 아닌 〈제품설명서〉와 〈사용설명서〉의 차이에 대한 것이었다. 얼핏 보면 그게 그거 같지만 작정하고 따져보면 둘 사이엔 적잖은 차이가 있다. 아무튼 그 자리에선 〈사용설명서〉가 〈제품설명서〉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이라는 데 의견일치 했다. 제품의 제원(諸元)에 대한 단순정보가 담겨있는 〈제품설명서〉와 달리 〈사용설명서〉는 제품에 대한 객관적 소개를 넘어 그 것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법 또는 효용가치를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안내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품설명서〉를 〈사용설명서〉로 승화해서 활용하는 것은 사용자의 의지와 역량에 달렸다는데 공감했다. 이런 배경에서 이번 특집에 대한 〈제품설명서〉(절대로 〈사용설명서〉가 아니다)를 필자별로 구분해 아래와 같이 정리해봤다.

김권정 _ 태극기 역사에 대한 일반론적인 개론. 이번 기회를 계기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관람을 적극 추천 권장함.
목수현 _ 구체적인 문헌과 사료에 근거해 태극기의 역사를 서술. 한국 근대미술 전공자인 필자는 논문 〈일제강점기 국가 상징 시각물의 위상 변천〉 등을 발표했고, “미술을 단지 특정 영역의 것으로 한정하지 않고 시대의 정치와 문화를 통해 조망”한 성과를 높이 평가받아 2014년 김복진미술상을 수상했음.
노형석 _ 자칫 누락될 뻔 했던 해방공간 시기 태극기의 위상을 거론하면서, 태극기가 특정 세력의 독점물이 아님을 확인시킴. 이한열 영정을 그린 최민화 작가의 후암동 자택 모임자리에서 특집기획 얘기를 듣고 적극 참여의사를 밝히고 글과 자료를 보내왔음.
이경민 _ 10년 전 기획된 전시 서문임에도 불구하고 태극기를 둘러싼 표상의 정치학에 대한 논의가 여전히 유효함을 확인시킴. 게재된 모든 사진은 정식 절차를 거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사용했음.
이경란 _ 6월 민주항쟁 30주년을 맞아 동분서주 바쁜 와중에도 “태극기 잘못이 아니야”라는 제목의 짧지만 깊은 울림의 글을 보내줌. 새로운 공동체 속에서 누가 상징에 의미를 부여하는지 누가 상징을 소비하는지 가려내자고 주장함.
노순택 _ ‘역시 노순택이야!’ 소리가 절로 나옴. ‘이미지 전쟁’이란 타이틀을 내세운 이번 특집의 의도와 내용을 이보다 더 시각적으로 명료하게 전달할 수 있는 작가는 없을 듯함. 2007년 3월 특집 ‘386세대 미술인의 지금 여기‘를 비롯해 2016년 12월 동상 특집에도 결정적 사진자료를 제공했음.
최 범 _ 태극기는 공화국의 국기로서 근본적인 한계를 지닌 기호라고 지적함. 도상과 신화로서의 태극기를 도상학/계보학/ 역사학 관점에서 분석하고, ‘태극기=대한민국’이라는 기호(기표와 기의의 조합)를 공유하면서도 이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데 이견을 제시함. 그러면서 태극기 신화에서 벗어나자는 다소 과격한(?) 주장을 펼침.

눈물 없이 볼 수 없다. 작은 글씨를 읽을 때 말이다. 그래서 자주 인공눈물을 주입한다. 그러면 잠시라도 눈앞이 맑아진다. 누진다초점 렌즈를 장착한지도 이미 오래. 큰 효과는 없다. 안경을 벗은 채 코를 박고 보는 게 차라리 편하다. 종합감기약 같은 약(藥)을 사면 들어있는 ‘사용상 주의사항’ 설명서나 보험약관 같은 글씨는 왜 그리도 작은지 불만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 이유를 알게 됐다.

편집장 이준희 dam2@unitel.co.kr

HOT PEOPLE 이태호

2014년 5월호에 첫 연재를 시작한 〈이태호 교수의 진경산수화 톺아보기〉가 이번 호를 맞아 일단락된다. 때마침 이태호 교수가 기획한 〈한국미술사의 절정展〉이 2월 15일부터 28일까지 노화랑에서 열렸다. 전시를 통해 우리 미술사의 절정을 톺아보는 그를 만났다. 인터뷰에서 그는 작품성에 비해 저평가된 옛 유물과 과거 민주화운동, 현 시국을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진심 어린 애정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좋은 그림 실컷 보며 나름대로 인생을 즐겼습니다. 너무나 행복했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이태호의 ‘절정’은 지금 이 순간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미술사 인생 이모저모를 들어보자.

변곡점을 맞은 한국미술사가 이태호의 절정

2004년 노화랑에서 연 〈20세기 7인의 화가들〉 이후 13년여 만에 갖는 기획전입니다. 우선 전시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부터 부탁드립니다.
네. 〈20세기 7인의 화가들〉을 기획한 때가 2004년이었어요. 그때부터 노승진 노화랑 대표와 이와 유사한 전시를 꼭 다시 하자는 논의를 꾸준히 해왔고, 드디어 이번 2월에 〈한국미술사의 절정〉을 개최하게 됐습니다.

지금 시기에 〈한국미술사의 절정展〉을 연 이유가 특별히 있는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지속적으로 논의는 해왔지만 우리 둘 다 적절한 타이밍을 잡지 못했어요. 그러다 지난 2016년 6, 7월 무렵 ‘한국미술사의 절정’을 얘기해야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죠.

그 아이디어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좀 말씀해주세요.
그동안 연구해온 자료를 정리해서 그걸 토대로 최근 몇 차례 강의를 진행했어요. 그중 이번 전시의 기틀이 된 건 2012년 8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한 ‘한국미술사의 라이벌’ 강좌입니다.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추사 김정희와 다산 정약용, 청전 이상범과 소정 변관식, 대향 이중섭과 미석 박수근, 그리고 연암 박지원, 고암 이응로, 수화 김환기를 더해 조선 후기 도공부터 김환기까지 12명의 작가를 통해 우리 미술의 지난 300년을 되짚어 보는 내용이었습니다. 총 5차례 진행한 그 강의는 제게 조선시대와 근현대의 경계가 해체된, ‘우리’의 미를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 보는 계기가 되어줬습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많은 혼란기와 식민지시대를 겪으면서 우리의 문화유산과 예술작품이 턱없이 저평가되었죠. 그렇게 안 좋은 상황을 다시 회복시켜 놓은 사람이 바로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입니다. 무척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가까운 나라 일본과 중국만 봐도 이 세 작가의 스타일을 찾을 수 없어요. 우리 고유의 현대 형식을 그들이 일궈낸 셈이죠.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추구한 근본적인 아름다움은 다름 아닌 ‘조선미(美)’라는 겁니다. 저의 이러한 깨달음을 좀 더 구체화할 수 있었던 계기는 2016년 K옥션 아카데미에서 ‘한국미술사의 거장, 조선과 근대 12인의 화가’를 주제로 진행한 강의와 현장답사 수업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이 두 경우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절정’을 키워드로 그에 맞는 작가를 찾아보자고 제안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전시 준비에 돌입했습니다.

〈한국미술사의 절정展〉에 참여한 작가 모두 한국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거장들이더군요. 교수님과 노 대표님 두 분의 노고가 컸을 듯합니다.
얼마 전 전시장을 다녀간 분이 인터넷 사이트에 이런 평을 남겨 주셨어요. “미술사가와 화상과 소장가의 콜라보레이션이 잘된 전시”라고. 40여 년간 미술사가로서 개인 소장가의 작품을 발굴하며 논문을 쓰고 발표해왔어요. 그리고 노 대표는 40년 동안 화랑을 운영하며 두터운 인연과 신뢰, 경험 등을 쌓아왔고요. 우리 두 사람의 연륜을 조합한 결과물이 이번 전시로 구현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노화랑이 올해로 창설 4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40주년을 내세우자고 제안했지만 노 대표가 극구 반대했어요. 본인 때문에 전시의 의미가 퇴색되는 걸 원치 않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370억 원이 넘는 보험가액과 야간 경비 비용 지출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어요. 전시기간 동안 전시장에서 함께 작품을 보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득도하는 모습에서 단지 그림을 사고파는 화상이 아닌 ‘문화사업’으로써 미술계에 보답하고 싶다고 한 그의 깊은 뜻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고맙다고 전하고 싶네요.

전시 제목에서 유독 ‘절정’이란 단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 미술의 절정은 언제였는지 고민해본 적은 없었거든요. 교수님께서 보시는 한국미술의 절정은 언제인가요.
도록 글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데요. 우리의 역사에서 ‘절정’의 위업은 그 어느 때보다 변동의 시기를 겪으며 이룩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린 조선 후기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도기를 거치고 조선이 몰락한 후엔 식민지와 분단 시대를 연이어 겪었습니다. 분단 상황이 여전한 가운데 남한은 근대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격변을 또 한 차례 겪어야 했어요. 그러한 시대를 지나오며 우리는 승리와 좌절을 맛보고 패배감과 갈등을 경험했습니다. 이 300년이란 시간 동안 한국미술사에서는 가장 조선적인 것 또는 한국적인 것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가들이 배출됐어요. 그야말로 ‘절정’이 창출된 시기인 셈이죠.

지난 300년이 한국미술의 절정이라고 보신다면. 지금 우리의 미술은 어떤 위치에 있다고 보시나요.
그렇지 않아도 ‘절정 그 이후’에 대해 생각을 했어요. 한국미술의 과거를 돌아보면, 1960~1970년대에 서구의 모더니즘 미술을 수용하면서 앵포르멜과 단색화 물결이 이어졌고,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을 계기로 민중미술이 운동처럼 떠올랐죠. 광화문광장에서 펼쳐지는 촛불집회의 정신이 그때부터 이어져온 게 아닐까 싶네요. 저도 그 열기에 함께 호흡하며 “과연 우리가 지금의 하강기를 딛고 또 하나의 절정기를 맞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린 절정을 찍고 난 후 하강하는 지점 어딘가에 위치하는 것 같습니다. 단색화, 민중미술에 이어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디지털아트까지. 하강기이면서 혼란기인 것 같아요. 현재 한국 사회가 퇴행 몰락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잖아요? 이번 전시를 통해 앞서 말한 저의 의구심이 실현될 수 있기를,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지금 이 같은 ‘절정’의 작품들을 톺아보며 민주주의 사회가 성숙하고 문화의 격조가 상승하기를 바랍니다.

계속해서 리홀아트갤러리에서 진행 중인 〈미술사가들이 사랑한 질그릇과 무낙관 그림전〉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전시에 참여한 윤용이, 유홍준, 그리고 저, 이렇게 우리 세 사람은 미술사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친했습니다. 윤용이 교수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함께 근무했었고 유홍준 교수는 《월간미술》의 전신 《계간미술》 기자로 일하면서 알게 됐죠. 저흰 유독 사람들이 눈길을 잘 주지 않는 토기나 질그릇, 민화, 무낙관 그림들에서 느껴지는 미술사적 감동에 관심을 뒀어요. 유 교수는 “사람들이 사지 않는 게 화가 나서 샀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것을 볼 때마다 눈물겨워 구입하게 됐어요. 근대 수묵화의 작품성이 뛰어남에도 대다수가 서구 미술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안타까웠죠. 마침 명지대 미술사학과를 졸업한 제자 리우식이 성북동에 갤러리를 개관하는데 개관 기념전으로 저희 세 사람이 소장한 유물들을 한자리에 모아 전시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어요. 처음엔 잠시 망설였지만 학문적 도반으로 한 생을 같이하며 명지대 미술사학과를 세운 보람을 새길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생각에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오전에 전시장을 방문했는데 관객이 정말 많았습니다.
제작한 도록이 다 떨어졌다고 하니 반응이 좋은 게 아닐까요? 사실 예상하지 못햇습니다.

작품을 구입할 때 교수님만의 특정한 기준이나 취향이 있나요?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것 위주로 보는 편입니다. 토기의 경우 평범하지만 굉장히 아름다운 게 많아요. 신라 이전 토기, 질그릇을 보면 한국문화의 원형을 그대로 갖고 있어요. 고려 청자, 조선 백자도 작품성 면에서 좋긴 합니다만, 중국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태나 제작방식 등이 변형된 부분이 있죠. 그래서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인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백제 시대의 항아리도 백자 달항아리 못지않게 매우 아름답습니다.

이제 교수님 개인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네요. 저희 《월간미술》과는 2015년 5월호부터 오는 3월호까지 12번의 연재를 하셨는데요. 교수님 인터뷰를 앞두고 첫 회를 읽어보았습니다. 본문글에 앞서 “이 연재는 나로서는 조금 부담스럽고 색다른 시도”라는 말이 쓰여 있더군요. 그동안 《월간미술》 독자들과 만나온 소감을 짤막하게 말씀해주세요.
지난 연말에 정년 기념강연을 준비하며 그 동안 쓴 글을 세어 본 적이 있어요. 무려 583편이나 되더군요. 논문만 보면 180여 편 정도 될 것 같아요. 글 목록을 죽 훑어보니 대체로 청탁을 받고 쓴 글이었어요. 그런데 《월간미술》에 연재한 글들은 제가 ‘쓰고 싶은’ 글이에요. 미술사를 연구해온 40년의 시간을 되돌아보고 정년을 앞둔 나 스스로에게 정리할 시간을 주기 위해 제가 먼저 제안했죠. 12편의 〈진경산수화 톺아보기〉 연재를 통해 서울 전체를 아울러 봤어요. 서촌 필운대에서 시작해서 인왕제색도, 한강, 그다음에 북한강, 동대문파, 도봉산, 북한산, 이번 3월호에 실리는 서대문파까지. 한편으론 2010년에 쓴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2011년 우현 고유섭 학술상 수상)를 좀 더 세부적으로 다룬 겁니다. 처음으로 제가 하고 싶은 것을 원 없이 글로써 담아내고 수묵스케치를 해봤네요. 주변 지인들의 반응도 좋았던 것 같아요. 연락도 많이 받았거든요.

연재 글을 모아 책을 출간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계획하고 있어요. 퇴임 후엔 ‘서울산수연구소’ 설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서울뿐만이 아니라 전국, 동경, 북경, 파리, 베를린, 뉴욕 등으로 진출하고 싶어요(웃음). 사실 연재를 계속하고 싶긴 했습니다. 그러나 정년과 함께 백수가 되고 주변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았어요. 5~6개월 정도. 정리가 끝나면 다시 서울 연재를 시작하고 싶어요. 그땐 서울 전체가 아닌 ‘서울의 속살보기’를 콘셉트로 진행하고 싶습니다.

생각해두신 얘깃거리가 있다면요?
서촌의 옥류동 계곡 등지에 아름다운 풍경이 굉장히 많아요. 또 북한산도 전체만 봤지 면밀히 들여다보면 옛 선비들이 풍류를 즐긴 숨은 명소가 많습니다. 그러한 곳들을 독자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어요. 나도 그렇지만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온 자연 풍경이 알고 보면 작품 속에서만 봐온 인왕산, 보현봉, 문수봉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면 좋잖아요? 서울의 이야기를 보다 지엽적으로 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 부탁드려요.
그동안 좋은 그림 실컷 보며 행복했습니다. 나름대로 인생을 즐겼다고나 할까.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 겠지요.

진행 ㆍ정리 = 곽세원 기자

이 태 호 Lee Taeho
1952년 전라북도 옥구읍에서 출생했다. 1974년 홍익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1978년 홍익대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8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로 근무했다. 1982년부터 전남대학교 교수, 2003년부터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2016년 2학기에 정년퇴임했다. 전남대박물관장, 명지대박물관장, 문화재위원, 홍성 고암이응로생가기념관 명예관장, 한국은행화폐도안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까지 ‘고구려고분벽화’ ‘진경산수화’ ‘초상화’ ‘근대미술’ ‘민중미술 관련 논문 평론 등 600여 꼭지의 글과 저서 25권(공저 포함)을 발간했다.

SPECIAL FEATURE 이미지 전쟁, 누구의 것도 아닌 태극기

세상 모든 나라는 저마다 특색있는 국기(國旗)를 갖고 있다. 우리에게는 태극기가 있다. 태극기는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가장 강력한 이미지다. 2017년 3월, 과거 어느 때보다 태극기의 의미가 각별히 여겨지는 요즘이다. 모든 국민이 익히 알고 있듯이, 그 이유는 올해가 3·1만세운동 98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헌정사상 유례가 없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불행한 사태로 인해 국론이 극단적으로 분열된 까닭이 더 크다. 그래서 태극기를 바라보는 시선과 감정은 복잡 미묘하고 착잡할 수밖에 없다.
1919년 3·1만세운동을 필두로 그동안 태극기는 소용돌이치듯 급변해온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결정적이고 역사적인 현장에서 어김없이 펄럭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학생운동과 진보진영 중심으로 항쟁과 투쟁의 상징이었던 태극기는, 최근 ‘박사모’나 ‘어버이연합’ 같은 보수성향 단체세력의 상징으로 적극 활용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이처럼 시대적 배경과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따라 태극기를 해석하고 활용하는 입장은 첨예하게 대립된다. 그러나 이런 갈등 속에서도 ‘애국의 상징’이라는 공통분모로서 태극기 본연의 의미와 기능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런 배경에서 《월간미술》은 냉철한 현실 인식을 전제로 태극기의 역사와 사회문화적 맥락을 되짚어 보고 진단하는 기획기사를 마련했다. 특정 대상을 모티프로 설정하고 그것을 시각이미지 문화연구라는 측면에서 심층 분석한 이번 특집은 2016년 12월호 ‘시대의 얼굴, 동상의 진실을 파헤치다’의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진 후속 기사인 셈이다. 부디 이 두 특집을 통해 ‘미술과 함께’ 그리고 ‘사회와 함께’하고자 하는 《월간미술》의 의도와 진정성이 읽히고 전달되길 바란다. 기획 · 진행=이준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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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앞 세종대로에 위치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1전시장.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인 ‘데니( O.N.Denny ) 태극기’(1890년 추정)를 비롯해 김구 서명문 태극기(사진 오른쪽 위), 광복군 태극기(오른쪽 아래) 등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태극기가 전시되고 있다.

태극기의 등장부터 오늘까지

김권정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문학박사

국기(國旗)가 오늘날처럼 국가를 상징하게 된 것은 근대국가 성립 이후의 일이다. 근대 시민사회와 근대국가가 형성됨에 따라 국적(國籍)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국기가 발전하였다. 근대 시민사회 출발의 계기가 된 프랑스혁명 때 3색기(三色旗)가 사용된 이후 하나의 깃발이 국가를 상징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속속 등장한 유럽의 근대 시민국가들에서는 자유 · 평등 · 박애를 상징하는 프랑스 3색기를 모방해 나름의 국기를 제작 · 사용하였고, 현대 유럽 국가의 국기 대부분이 이때 제정되었다.

태극기가 대한민국 국기로 등장한 것도 이런 세계사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개항 이후 외국과 통상을 시작하며 국가 정체성을 상징할 국기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1882년(고종 19년) 5월 22일 미국과 정식 외교관계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이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 때 사용된 태극기 모습이 그 해 미국 해군부 항해국이 제작한 《해상국가들의 깃발》이란 책자에 ‘Ensign’기란 이름으로 실렸다. 또한 1882년 9월 박영효가 고종의 명을 받아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로 일본에 갈 때, 배 위에서 국기의 필요성을 느끼고 태극 문양과 그 둘레에 8괘 대신 건곤감리의 4괘를 그려 넣은 ‘태극 · 4괘 도안’의 기(旗)를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전한다.

국기 제정의 필요성에 공감한 고종은 1883년 3월 ‘태극·4괘 도안’의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 · 공포하였고, 이후 태극기가 공식적인 국기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883년 박정양 일행이 외교사절단인 보빙사(報聘使)로 미국에 갔을 때 호텔 숙소에 태극기를 공식 게양하였고, 1888년에는 미국 주재 조선공사관을 워싱턴에 개설하여 태극기를 국가의 국기로 사용하였다. 1893년 우리나라가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참여했을 때도 태극기를 사용하였으며, 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 참여하여 한국관을 개설하고 태극기를 사용한 것이 당시 책자에 표현되었다.

그러나 당시 국기 제작 방법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고, 일반 국민에게 널리 알리지 않은 까닭에 이후 다양한 형태의 국기가 사용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1942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기 형태를 일치시키기 위해 국기제작법을 제정한 적도 있으나, 한국민에게 제대로 알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태극기 제작법 통일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1949년 10월 국기 제작법 고시를 확정하여 발표하였다. 이후 여러 규정이 제정 시행되어 오다가 최근 국기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규정을 완비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태극기는 흰색 바탕 가운데 태극문양과 네 개의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四卦)로 구성되어 있다. 태극기의 흰 바탕은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의 순수성을 상징하며,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뜻이 있다. 태극문양은 우주 만물이 음과 양의 상호 작용으로 생성되고 궁극적으로 발전한다는 우주 자연의 생성원리를 표현한 것으로 붉은색은 존귀와 양을, 파란색은 희망과 음을 나타낸다. 4괘는 음양이 생성, 발전한 모습을 표현하며, 천지일월, 춘하추동, 동서남북, 인의예지 4가지를 각각 조합한 것이다. 이렇게 태극기는 우주 만물이 생겨난 근본 원리인 태극의 원리를 따라 제작된 것으로 우리 민족의 창조성과 궁극적인 발전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태극기가 단순한 상징 차원에 그치지 않고 역사 현장에서 우리의 열망을 담아내는 통합과 공존의 상징으로 오늘까지 함께 해왔다는 점이다.

국기 제정 이후 태극기는 공식 행사에 국가적 상징으로 등장하였다. 1896년 11월 독립문 기공식에 대형 태극기가 등장하였고, 독립협회 활동에 태극기가 게양되며 국기의 의미가 강조되었다. 국기가 국가의 권위 및 국가 자체를 대표한다는 의식이 국민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면서 태극기가 국권 회복과 독립의지를 나타내는 상징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일제 침략이 본격화되자, 안중근 등 12명의 동지는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단지동맹을 한 후 태극기를 펼쳐놓고 각자 무명지를 잘라 ‘대한독립’이라고 쓰며 항전을 다짐하였다.

태극기의 의미가 독립운동사에서 폭발적으로 등장한 것은 1919년 3·1운동 때이다. 3·1운동이 곧 태극기와 함께 준비되고 진행된 것이다. 수많은 학생 및 시민들이 만세운동을 위해 각자 태극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만세운동의 시위가 시작되면 맨 선두에는 대형 태극기가 앞장섰다. 태극기에는 독립에 대한 수많은 한국인의 열망이 글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독립선언서 및 시위 격문 등과 같이 태극기가 만들어져 전국으로 배포되었다. 이런 이유로 일제는 한국인이 태극기를 만들거나 지니고만 있어도 독립운동으로 간주하여 탄압하였다.

국권 상실 이후 국내외를 막론하고 태극기는 민족, 국권 회복 의식을 일깨우는 상징이었다. 국외 민족교육 현장에서 국기가(國旗歌)를 지어 부르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3·1운동 기념식에는 태극기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였다. 상해의 한국인들은 매년 3월 1일 독립만세기념일 축하식을 거행한 후 태극기를 들고 시내를 행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설립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태극기를 큰길에 세워 놓기도 하였다. 6·10만세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 때도 태극기는 독립의지를 강하게 보여주었다.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에서도 태극기는 독립운동의 얼굴이 되었다. 이봉창은 1932년 의거 이전 한인애국단 입단 때 태극기 앞에서 한인애국단 선서문을 가슴에 걸고 사진을 찍었다. 같은 해 4월 윤봉길도 거사 직전 자신의 집에서 대형 태극기를 배경으로 양손엔 폭탄을 들고 가슴에 선서문을 걸고 사진을 촬영하였다.

이처럼 태극기는 국권을 상실한 국가를 의미하며 독립사명을 고취하는 상징이 되어 독립을 외치는 이들과 함께 하였다.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각종 기념식에 태극기가 등장하였고, 태극기에 대한 경례로 시작하였다. 태극기가 한국인이 있는 세계 곳곳의 독립운동 현장에서 휘날렸다. 독립운동을 거치며 태극기가 국가 민족 독립의 상징으로 한국인의 뇌리에 깊이 인식되었다.

광복 이후 그 역사적 의미는 더욱 깊어져갔다. 광복 직후 개최된 3·1운동 기념식에서 태극기가 가장 높이 배치되었고, 전면에 내세워졌다. 각종 모임마다 태극기는 구성원들을 통합하는 상징으로 등장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축하식에서도 태극기가 기념식장 가장 높은 곳에 전면으로 배치되었다. 국민은 태극기 밑에서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태극기는 6·25전쟁과 같은 민족적 비극의 현장에서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내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전쟁 이후 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재건하고 경제개발을 통해 땀을 흘려야 했던 그자리에도 국민과 함께 하였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 중동의 근로자 등이 일터 현장에서 태극기를 보며 대한민국 국민임을 확인하고 자랑스러워하였다. 전 세계를 누비며 한국인 세일즈맨이 팔던 상품에도 태극기가 새겨져 있었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열망을 담은 4·19혁명, 유신반대운동,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등에서도 태극기가 휘날리며 민주주의의 정신과 민주화에 대한 시민사회의 갈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감동적인 스포츠 현장인 올림픽에서, 2002년 한일공동 월드컵 현장에서도 태극기가 선수와 국민을 대한민국이란 울타리에서 하나로 묶어 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태극기는 단순히 추상화된 국기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역사적 의미를 상징하는 존재다. 태극기에는 한국인의 고난과 영광이라는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 새로운 국가와 가치를 향해 함께 달려온 역사적 경험이 그대로 들어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사회에 빈번히 일어나는 갈등과 충돌을 넘어 역사의 현장에서 통합과 포용의 상징이 된 태극기를 보며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새롭게 찾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남상락 자수 태극기〉 등록문화재 제386호 독립기념관 소장 견직물에 자수 1919 1919년 4월 4일 충남 당진군 대호지면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사용하기 위해 독립운동가 남상락이 부인과 함께 명주천에 손바느질로 만들었다.

〈남상락 자수 태극기〉 등록문화재 제386호 독립기념관 소장 견직물에 자수 1919 1919년 4월 4일 충남 당진군 대호지면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사용하기 위해 독립운동가 남상락이 부인과 함께 명주천에 손바느질로 만들었다.

〈김구 서명문 태극기〉 등록문화재 제388호 독립기념관 소장 견직물에 바느질 1941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1941년 중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는 매우사(梅雨絲, 미우스오그) 신부에게 준 태극기. 광복군에 대한 지원을 당부한 김구 선생의 친필 묵서가 쓰여 있다.

〈김구 서명문 태극기〉 등록문화재 제388호 독립기념관 소장 견직물에 바느질 1941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1941년 중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는 매우사(梅雨絲, 미우스오그) 신부에게 준 태극기. 광복군에 대한 지원을 당부한 김구 선생의 친필 묵서가 쓰여 있다.

1-003722-000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등록문화재 제389호 독립기념관 소장 면직물에 바느질 1945 광복군 제3지대 2구대에서 활동하던 문웅명이 1945년 2월경 동료 이정수에게 선물 받은 것으로, 1946년 1월 문웅명이 다른 부대로 이임하자 동료 대원들이 독립을 염원하는 글귀와 서명을 남긴 태극기다.

〈불원복(不遠復) 태극기〉 등록문화재 제394호 고영준(전남 담양) 소유 면직물에 바느질 1907 조선말 전남 구례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 고광순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태극기로 “머지 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뜻의‘不遠復’글씨가 수놓아져 있다.

〈불원복(不遠復) 태극기〉 등록문화재 제394호 고영준(전남 담양) 소유 면직물에 바느질 1907 조선말 전남 구례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 고광순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태극기로 “머지 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뜻의‘不遠復’글씨가 수놓아져 있다.

SPECIAL ARTIST 강영민

하트는 사랑의 상징이다. 그런데 강영민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하트는 깊이 들여다보며 그 의미를 찾아야 할 것 같다. 언뜻 사랑의 의미가 사라지고 기호만 덜렁 남아있는 듯한 그의 작업은 익살스럽지만 예리한 정치적 목적성이 낭중지추(囊中之錐)처럼 번뜩인다. 그렇다면 강영민의 작업세계는 한 마디로 설명된다. “사랑의 부재를 통해 사랑을 말한다”는.

〈만국기 시리즈〉 벨벳에 잉크프린트 85×117cm  2012

〈만국기 시리즈〉 벨벳에 잉크프린트 85×117cm 2012

사랑의 화가 강영민론

이택광 | 경희대 교수

팝아티스트 강영민을 정의하는 말은 ‘발칙함’이다. 규칙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조롱한다는 의미에서 그는 발칙하다는 수사학에 걸맞은 작가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런 평가가 다소 단편적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강영민은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해온 이력을 뽐내지만 지금의 작가를 이해하는 시발점은 <사랑하면 진다>는 네 번째 개인전이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 그가 ‘하트 화가’로 두각을 나타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의 작품 주제에서 하트는 빠질 수 없는 아이템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사랑의 화가’이다. 하트를 그려서가 아니라, 겉으로 장난스럽게 보일망정 그는 끊임없이 사랑을 그리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렇게 부를 만하다고 본다. <사랑하면 진다>가 개인의 사랑을 그리고자 했다면, <만국기전>은 집단의 사랑을 그리고자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이미지와 구성을 관통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언제나 하트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누구는 “하트야말로 사랑 아니냐”고 항의할 것이다. 그러나 하트는 하트지 사랑일 수 없다. 사랑은 휘발되어버리고, 하트만 남는다. 하트는 싸늘히 식어버린 사랑의 화석이다. 강영민은 이 사랑의 흔적을 화폭에 남긴다. 그의 하트는 귀엽게 웃거나 입맛 다시거나 울고 있지만 도형으로 전락해 있다. 도형은 표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표정마저 기호화되어 있다. 이렇게 표정의 기호에 지나지 않는 하트가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혼란일까.

그의 하트는 사랑의 기호에서 누락되어 있는 것, 말하자면 사랑 자체를 지시한다. 사랑이 지워진 자리에 하트가 온다. 마치 사랑하는 것처럼 너스레를 떨지만 사실상 사랑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은 하트 기호일 뿐이다. 그의 진가가 드러나는 지점은 바로 <만국기전>이었다. <만국기전>에서 그는 태극기를 비롯한 이른바 국가 상징에 예의 무표정한 하트를 그려 넣고 ‘내셔널 플래그’라고 이름 붙였다.

태극기를 예로 들어보자. 그가 태극기에서 태극문양이 있어야 할 자리에 하트를 채워 넣자 갑자기 태극기는 다른 무엇이 되었다. 태극문양이 없는 태극기는 태극기가 아닌 것이다. 생긴 모양은 태극기처럼 착시를 일으키지만 곧 태극기라고 부를 수 없다는 사실을 관객은 깨닫는다. 태극문양의 자리에 하트를 그려 넣으면 하트기라고 불러야 할 터이다. 강영민은 이 작업을 통해 ‘내셔널 플래그’ 또는 ‘국기’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이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태극기는 태극문양이지 깃발 일반이 아니다. 다른 ‘내셔널 플래그’ 역시 그렇다.

그는 ‘내셔널 플래그’를 구성하는 요소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하트로 교체함으로써 ‘내셔널 플래그’의 의미를 드러냈다. 그 의미는 결과적으로 특정한 ‘내셔널 플래그’를 특별한 장소에 고정시키는 특수성의 산물이라는 것이 강영민의 메시지이다. 세상의 반응은 구태의연했다. 발칙하다는 찬사에서 신성 모독이라는 비난까지 쏟아졌다. 그가 건드린 지점은 어디일까. 강영민은 이런 작업을 통해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지던 국가와 상징의 결합 관계가 허구임을 폭로했다. 무릇 예술이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상성의 범주’를 해체하는 것이어야 한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사실에 도전해서 그 허구성을 드러내야 한다.

강영민의 작업은 이런 전략을 구사한다. 일단 하트라는 기호 자체가 사랑의 물신화에 대한 폭로이다. 왜 사랑은 하트로 표현되어야 하는가. 이 관계는 자명하지 않다. 그의 하트는 사랑을 대체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사랑의 상징에서 정작 빠져 있는 것이 사랑 자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귀엽고 아름다워야 할 사랑의 기호가 괴이하고 수상쩍은 까닭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사랑의 화가’라고 불려야 하는 것일까. 그는 사랑 자체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구조를 드러내고자 한다는 점에서 사랑의 급진성을 주장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사랑의 뿌리를 파헤치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하트는 사랑의 신화에 대한 패러디이다. 하트가 무엇인가. 바로 심장, 또는 마음의 상징이다. 심장에 마음이 담겨 있다는 발상 자체가 신화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과학적으로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사랑의 상징으로 하트를 인준한다. 강영민의 하트를 보면서 관객은 아무 의심 없이 ‘사랑’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이 하트의 기호에 없다. 이 공식을 그의 ‘내셔널 플래그’로 옮겨 오면 더 심각해진다. ‘내셔널 플래그’를 이루는 핵심적인 요소가 바뀌면 그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그렇다면 ‘내셔널 플래그’의 의미는 무엇일까. 모든 요소가 혼연일체를 이루어야 온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이 상징은 무엇일까.

강영민은 ‘내셔널 플래그’에 하트를 그려 넣음으로써 국가적 상징과 국가의 동일시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가 하트를 집어넣은 지점은 이데올로기와 주체가 만나는 접점이다.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호명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이데올로기를 요청한다. 이데올로기는 주체의 쾌락을 취한 필수요소이다. 태극기는 이런 의미에서 주체의 증상을 지속시키는 쾌락의 대상이다. 주체는 이 쾌락의 대상을 사랑한다. 이 주체의 사랑이 곧 증상이다. 강영민은 이 사랑의 대상을 하트로 기호화한다. 태극기의 태극문양이 곧 국가의 정체성이라면, 이 정체성이야말로 사랑의 대상이고 하트다.

광화문에 모인 탄핵반대집회 참가자들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이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태극기라는 국가적 상징의 의미이다. 태극기는 탄핵반대집회 참가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애국자’, 다시 말해서 ‘국가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태극기는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는 상징이다. 그러나 이 상징을 하트로 기호화하는 순간 문제가 발생한다. 이 ‘애국자’에게 이런 화가의 ‘개입’은 불순하게 보이거나 불경하게 받아들여진다. 왜 그럴까.

그 까닭은 이데올로기야말로 일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주체와 특수한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모두가 국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나의 사랑’만이 특별하다고 ‘애국자’는 믿는다. 그런데 강영민의 하트는 그 사랑이 실제로 일반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증하는 것이다. ‘나의 사랑’이어야 할 태극기에 대한 사랑이 하트의 일반성으로 환원될 때, ‘애국자’는 국가와 동일시했던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이다. 나만 태극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니 분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너의 사랑은 가짜다라’는 구별짓기가 등장한다. ‘국가에 대한 사랑’이 결코 ‘나의 사랑’만일 수 없다는 것, 더 나아가서 그런 국가에 대한 사적인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영민의 하트는 ‘애국’의 외설성을 적나라하게 증언한다.

역설적으로 강영민은 이처럼 사랑의 부재를 통해 사랑을 말하는 화가이다. 그에게 사랑은 유토피아적 충동이기도 하다. 사랑을 통해 강영민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허무주의를 넘어선 우리 존재의 지속성이다. ●

강영민은 1972년 태어났다.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했다. 2004년부터 7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국내외에서 열린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대안공간 루프 큐레이터(1999), 거리예술시장 희망시장 전시기획팀장(2002) 등을 지냈으며, 〈팝아트협동조합전〉(2014) 등 다수의 전시에 기획자로 참여했다. 현재 김포에서 작업하고 있다.

EXHIBITION TOPIC 사임당, 그녀의 화원

사임당, 그녀의 화원

더 이상 신사임당을 ‘한국을 대표하는 어머니상’ ‘현모양처의 표상’으로만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길 바라는 전시가 서울미술관에서 한창이다. 개관 5주년을 기념하는 이 전시에는 이미 뛰어난 작품성으로 인정받은 14점의 〈초충도(草蟲圖)〉를 비롯하여 총 15점의 작품이 관객을 찾아간다. 무엇보다 KBS 1TV 프로그램 ‘TV쇼 진품명품’에 2005년 공개된 후 처음으로 전시장 나들이에 나선 〈묵란도(墨蘭圖)〉에 주목하자. 이젠 사임당을 단순히 ‘女人’이 아닌, 시 · 서 · 화에 능한 예술가로, 시대적 제약에 굴하지 않고 자기 계발에 매진한 능동적인 한 ‘사람(人)’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오죽헌에는 정말 그 꽃이 피었을까

이홍주 |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사임당 신씨(1504~1551), 현재를 사는 우리는 조선시대 여성의 전형으로 흔히 그를 떠올린다. 그는 출중한 기량의 화가이면서 효녀이자 양처이자 현모인, 가부장적 유교사회에서 요구하는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추앙되어 왔다. 2009년에는 신사임당을 수수하고 점잖은 부인으로 그린 초상이 고액권 지폐의 도안으로 선정되어 과연 그를 한국역사를 대표하는 여성으로 삼는 것이 적절한지 논란이 일기도 했다. 최근엔 일련의 소설과 드라마가 신사임당을 새롭게 해석하며 또다시 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중이다. 16세기 전반의 조선을 살았던 한 여성이 왜 이렇게 끊임없이 관심의 대상이 되어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신사임당이라는 여성의 실체와 얼마나 가까운가.

지금 서울미술관에서는 화가 신사임당을 조명한 작은 전시가 열리고 있다. “사임당, 그녀의 화원”이라는 제목으로 안병광 서울미술관 관장이 소장한 신사임당 전칭의 〈초충도〉 15점을 선보이고 있다. 공개된 작품은 검은 종이에 채색으로 그린 〈초충도〉 10폭, 유지에 채색으로 그린 초충도 4폭과 송시열의 발문이 함께 장황된 〈묵란도〉 1폭이다. 규모는 작지만 그동안 공개된 적 없었던 작품들이 전시되는 것이라 주목할 만하다.

〈초충도〉는 수박, 양귀비, 구절초, 원추리, 가지, 오이, 달개비, 여뀌, 추규, 봉선화, 패랭이꽃, 맨드라미 등 우리 정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소담한 풀꽃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생쥐, 개똥벌레, 개구리, 잠자리, 나비, 벌, 방아깨비와 같은 동물들을 윤곽선 없이 화사한 채색만을 사용하여 묘사하였다. 색색의 화폭들은 과연 신사임당이 가꾸었을 법한 오죽헌의 정원으로 관람자를 이끄는 듯하다. 전시장의 두 면을 차지한 흑지 바탕의 10폭 초충도는 2002년 일본에서 열린 “조선왕조의 미(朝鮮王朝の美)” 순회전에서 공개된 바 있다. 매 폭을 신사임당 그림에 대한 조선시대 문인들의 찬사와 병치하여 대학자 율곡을 키워낸 어머니, 현모양처라는 타이틀 뒤에 가려진 위대한 예술가 신사임당의 면모를 드러내고자 하는 전시의도를 보여준다.

사실 ‘신사임당 초충도’가 한국회화사에서 16세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혀왔음에도 신사임당의 화가로서의 진면목을 증명하는 확실한 진작(眞作)은 남아있지 않다. 현재 전하는 작품들은 모두 그의 화풍을 반영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전칭작(傳稱作)이다. 두세 종의 식물을 조합한 장식적인 구도와 도안적으로 평면화하여 단순하게 그린 꽃잎과 잎, 열매의 형태, 이들을 서로 겹치지 않게 배치한 점에서 신사임당 작으로 전칭되는 초충도들은 자수를 놓기 위한 밑그림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특히 검은 공단에 색실로 〈오이와 개구리〉, 〈맨드라미와 도마뱀〉과 같이 유사한 구도와 소재의 화면을 수놓은 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 〈자수초충도병〉의 존재는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특히 이번에 출품된 흑지 바탕의 채색 초충도는 자수로 제작했을 때의 효과를 최대한 살려 그린 것이다. 장식성과 생동감이 묘하게 공존하는 매력이 있다. 이 작품은 10폭 중 7폭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초충도10폭병〉과 구도와 경물이 정확히 일치하고, 2폭이 강릉시 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 〈초충도병풍〉 속 화면과 일치한다. 이러한 사실은 ‘신사임당 초충도’로 일컬어지는 범본들이 반복적으로 자수와 회화로 모사되었던 정황을 시사한다.

이 전시에 출품된, 유지 바탕에 채색으로 그려진 4폭 초충도는 이보다 좀 더 원작으로부터 멀어진 모사도로 보인다. 화면의 한쪽 모서리로부터 대각선 방향으로 식물을 배치한 구도는 장식의 목적에 보다 충실하며, 화면에 등장한 검은 나비는 다른 작품에 대칭형으로 등장하는 나비와 달리 19세기 남계우 풍의 나비에 훨씬 가깝다.

이 전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묵란도〉는 2005년 KBS TV쇼 “진품명품”에 출품되어 진작으로 인정받아 1억3500만 원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받은 바 있다. 신사임당의 초충도에 이후 문인들의 관심을 촉발시킨 송시열의 발문이 함께 장황되어 있다. 사실 이 그림에 그려진 것은 난이 아니라 원추리꽃이다. 원추리 외에도 두어 가지 풀이 함께 자라고 있고 꽃을 향해 나비 한 마리, 벌 한 마리가 날아들고 있으며 바닥에는 방아깨비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이 역시 채색은 아니지만 수묵으로 그린 한 폭 초충도인 것이다. 이 그림이 난데없이 ‘묵란도’로 알려진 것은 그림에 쓰여진 송시열의 발문이 그의 문집 《송자대전》에 ‘사임당화란발(師任堂畵蘭跋)’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발문에서 이 그림이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손가락 밑에서 표현된 것으로도 오히려 능히 혼연히 자연을 이루어 사람의 힘을 빌어서 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하물며 그가 낳은 아들은 어떻겠는가, 과연 그 율곡 선생을 낳으심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신사임당_초충도_연도미상_종이에 채색 _27x24cm (2)

신사임당 〈초충도〉 종이에 채색 27×24cm연도미상

신사임당_초충도_연도미상_종이에 채색 _27x24cm (1)

신사임당 〈초충도〉 종이에 채색 27×24cm 연도미상

시대와 해석에 묻힌 사임당

서울미술관의 이 짧은 전시는 신사임당과 그의 〈초충도〉에 대한 기존의 인식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거나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의 작품을 규정한 많은 찬사를 그림과 나란히 보여주면서도 그 찬사들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모습으로 ‘화가 사임당’을 빚어냈는지를 고찰하지는 않았다. 이 전시를 보고 나서 뇌리에 남는 위대한 예술가 신사임당은 어떤 화가인가. 오죽헌의 정원을 가꾸며 이를 화폭에 옮긴 여성화가? 조선시대에는 이례적으로 당대 저명한 문인들에게 그 예술성을 인정받은 여성? 이것이 아쉬운 이유는 한국회화사에서 ‘신사임당 초충도’가 가지는 기존의 명성이 여러모로 문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신사임당 하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수박과 생쥐〉, 〈가지와 개구리〉 등의 작품들을 우리는 교과서에서 보아왔고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의 초상이 있는 오천원권과 오만원권 지폐에도 신사임당의 초충도가 들어있다. 그러나 신사임당 회화에 대한 근래의 연구에 따르면 신사임당이 살았던 16세기의 문헌 기록에는 그의 산수화나 묵포도도를 언급하였을 뿐 그가 초충도를 잘 그렸다는 기록은 전혀 발견되지 않으며, 초충도가 신사임당의 대표작으로 주목되고 여러 작품이 출현하는 것은 18세기의 현상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현상의 단서가 된 것은 다름 아닌 이 전시에 출품된 〈묵란도〉에 적힌 송시열의 발문이다. 이 그림은 율곡의 종증손 이동명이 한양의 어떤 이에게 구하여 1659년 송시열에게 발문을 요청한 것이다. 이 그림에 대해 송시열은 신사임당이 “율곡 선생을 낳았음이 마땅한” 근거로 삼아 이이의 학통을 이은 서인계 인사들에게 큰 의미가 있는 그림으로 만들었다. 이동명은 1676년에는 16세기 문인 소세양의 제화시가 있는 사임당의 산수화에도 송시열의 발문을 요청하였는데, 그 산수화에 대한 송시열의 태도는 ‘묵란도’와는 사뭇 달랐다. 송시열은 이 그림이 율곡의 모친이 그린 그림으로서는 적절치 않다 보았는데, 그림의 수준과 규모가 전문적인 화가의 것이고 소세양의 제화시에 스님이 등장하며, 외간 남성이 여성의 그림 위에 제화한 상황 등이 모두 가당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송시열은 신사임당의 그림을 그들 서인계 문인들이 존숭하는 율곡의 어머니에게 어울리는 화목과 성격으로 재규정했다. 이후 18세기부터 신사임당의 산수화는 역사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그의 그림은 초충도로 대표되었다.

이후 서인 노론계의 핵심인물 정필동이 1707년경 양양부사로 재임하며 입수한 사임당의 초충도 7폭에 송시열계 문인이자 숙종비 인경왕후의 오빠 김진규를 비롯한 신정하, 송상기 등 노론계 인사들의 발문을 받았다. 이 화첩은 결국 숙종의 장인 김주신의 소장품이 되었고 1715년 궁궐에 내입되어 숙종이 열람하게 된다. 숙종은 제시를 지어 무골법(無骨法)의 채색으로 그린 교묘한 그림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이를 모사하고 한 폭을 더하여 8폭 병풍을 만들어 대전에 들였다. 이 전시에 인용된 찬사 대부분이 사임당의 초충도에 대한 숙종과 노론계 문인들의 글이다.

신사임당을 둘러싼 여러 의미와 평가에는 두 가지 사실이 재료가 되었다. 그가 뛰어난 화가였다는 사실과 조선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인 율곡 이이의 어머니라는 사실. 신사임당의 그림 재주가 아니었다면 아무리 대학자의 어머니라도 주목받을 일이 없었을 것이고, 그 아들이 율곡이 아니었다면 그의 그림이 아무리 뛰어났어도 조선시대 일반 사가의 여성이 이렇게 풍부한 기록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신사임당이 뛰어난 화가이자 대학자를 길러낸 어머니였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가 어떤 화가였고 어떤 어머니였는지는 후대에 그를 평가한 남성들의 필요에 따라 다르게 규정되어왔다. 특히 ‘화가’ 신사임당은 후대 율곡 이이의 학통을 이은 서인-노론계 문인들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그들이 존숭하는 율곡의 어머니로서 어울리는 성격을 부여받게 되었다. 이후 19세기, 20세기에도 신사임당의 그림은 계속해서 율곡과 그를 키워낸 모범적 모성(母性)의 표상이 요구될 때마다 조금씩 다른 문화적 기능을 위해 호출되었다.

그러면 우리에게 남은 이 〈초충도〉들은 무엇을 반영하는가? 18세기의 상황에서 신사임당이 자수를 위한 밑그림으로 그린 초충도가 실제 존재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여러 신사임당 전칭의 초충도 양식을 비교하여 어떤 것이 신사임당의 실제 화풍에 가까운지를 규명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그렇다고 이 초충도들의 매력이 반감하는 것은 아니다. 이 그림들은 조선시대 여성들이 일상에서 가장 쉽게 접하던 동식물들을 아름답게 도안화하여 자수로 제작했던 전통의 산물이며, 또한 그림을 감상하고 평하며 그에 대한 시문을 적는 미술사적인 활동을 정치적으로 활용했던 문인-정치가들의 관습이 낳은 그 시대의 흥미로운 문화현상이기도 하다. 아들을 대학자로 길러낸 어머니의 자질을 드러내는 자수풍 초충도의 화가로만 신사임당을 수용할 것인가. 이 전시가 단순해 보이는 그림을 둘러싼 복잡한 여러 층위를 들추어 보는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 ●

신사임당_초충도_연도미상_종이에 채색_36x25cm (2)

신사임당 〈초충도〉 종이에 채색 36×25cm 연도미상

신사임당_초충도_연도미상_종이에 채색_36x25cm (1)

신사임당 〈초충도〉 종이에 채색 36×25cm 연도미상

CRITIC 때時 깔色, 우리 삶에 스민 색깔

2016.12.14~2.26 국립민속박물관

김용주 |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운영디자인 기획관

때時깔色, 우리 삶에 스민 색깔〉. 흥미로운 제목과 주제에 한껏 부푼 기대감을 가지고 현장에서 마주한 전시의 첫인상은 명료했다. 전시기획 방향과 공간 전개 방식은 본 전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흐름을 군더더기 없이 전달하고 있었다. 기획전시실로 연결되는 복도는 모든 색의 합인 블랙으로 도색되어 있어 과연 이 전시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관람자의 기대를 한층 고조시킨다. 블랙 컬러의 복도를 지나 전시실에 들어서면 시각적으로 대비되는 하얀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전시에서 하고자 하는 ‘색깔’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들려주기 위해 잠시 우리의 시선에서 색을 지워내는 듯하다. 그리고 얼마 후 하얗던 공간엔 각 영역에서 들려줄 색과 관련된 이미지와 텍스트들이 영상으로 투사되며 전시에 생기를 돋운다. 본 전시는 ‘우리의 삶 속에 스민 색깔’을 3개의 중주제, 11개의 소주제로 구성하며 전시실은 크게 7개의 물리적 영역으로 나뉜다. 단색(單色, monochrome)을 다루는 다섯 개의 영역과 배색(配色, color scheme)을 다루는 두 개의 영역, 그리고 다색(多色, polychrome)을 다루는 마지막 영역으로 구성된다. 각 색의 영역은 중앙 복도를 중심으로 대칭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배치의 공간 구조는 전시의 질서를 형성시켜주는 장치 구실을 하게 된다. 중앙에는 전시에 대한 전체 설명과 각 색 영역에 대한 배치도가 있어 관람 정보를 제공한다.
먼저 백(白)색 영역으로 들어서면 사물과 재질에 따라 백색의 빛깔이 같은 듯 다른 느낌으로 조화를 이루며 유물과 작품에 적용된 색의 미감과 의미를 전한다. 백색의 전시영역에서는 흑백(黑白)의 배색(配色) 조화를 함께 만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으며 공간 너머 반대 색인 흑(黑)색의 전시영역과 시각적 병치를 이룬다. 두 개의 반대되는 단색 전시영역 중간에 배색 전시영역을 배치하는 구성은 각 색의 미감과 의미를 전달하는 데 더욱 풍부한 설명이 되어준다. 예를 들면 하나의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 유의어와 활용어 그리고 반대어를 함께 제시하는 방식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 밖에도 각 색의 공간에서는 유물과 현대작품, 동시대 사람들에게 익숙한 주변 사물과 더불어 색을 나타내는 다양한 언어, 한시, 속담 등을 통해 우리 삶에 스민 색의 의미와 정서를 유??·???무형 콘텐츠를 활용해 다양한 방식으로 관람자에게 전한다. 단색(單色)과 배색(配色)의 전시 관람을 끝으로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는 다색(多色) 영역에 들어서면 공간적 개방감과 함께 색동과 이월오봉도 등 유물과 작품이 한눈에 펼쳐진다. 다색(多色) 영역의 오픈형 디스플레이 방식을 통해 앞서 들려주던 하나, 하나의 개별 이야기들이 합쳐져 절정을 이루듯 색의 클라이맥스를 느끼게 한다.
또한 이곳에는 관람자들이 미디어 매체를 통해 색 구성을 체험할 수 있도록 참여 코너가 마련돼 있다. 전시실에 들어서며 받은 첫인상이 전시를 다 둘러보고 나오는 마지막 발걸음까지 이어졌다. 어느 곳 하나 과함이 없는 구성은 명료했다. 전시디자인을 할 때 가장 어렵고 중요한 점은, 과하지 않게 전시 주제를 효과적으로 어떻게 드러낼 것인지에 대한 문제이다. 여러 전시 중 기획 의도와 디자인 콘셉트가 맞지 않아 전시 주제가 무엇인지 모호한 경우를 종종 본다. 전시디자인은 실내 장식이 아니다. 그리고 멋스러운 가구나 첨단 매체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전시 콘텐츠와 기획의도를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공간적, 시각적 논리를 만드는 것이 바로 ‘전시디자인’이다.
이렇게 기획된 전시는 새로운 관계와 의미를 형성한다. 즉 기획 스토리와 전시 공간구조의 관계, 공간과 관람자 움직임의 관계, 작품(유물)과 작품 사이 관계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관계들은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내고 주제는 같을 지라도 차별화된 전시를 가능하게 한다. 사실 그동안 ‘색(色)’을 주제로 한 전시는 여러 곳에서 있어왔다. 그러나 이번 전시가 차별화되어 관람자의 기억에 스미는 이유는, 전시 기획과 공간구조가 조화를 이뤘기 때문이다. 전시실을 거닐고 구획된 영역을 드나드는 행위는 책을 읽으며 책장을 넘기는 무의식적인 행위와 같다. 그리고 이 행위는 전시를 읽어내는 필요조건이 되며 전시실에 계획된 시선의 대비와 순차적 전개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자의 방식과 같다. 한동안 색과 관련한 전시라 하면 먼저 〈때時깔色, 우리 삶에 스민 색깔〉을 떠올릴 듯하다.

위〈때時깔色, 우리 삶에 스민 색깔〉 전시장 입구

CRITIC 박상우 뉴모노크롬: 회화에서 사진으로

2.9~3.5 갤러리 룩스

이필 | 홍익대 미술대학원 교수

사진이 애초에 모노크롬으로 시작되었다고 보았을 때 작가의 전시제목이 〈회화에서 사진으로〉 가는 뉴모노크롬이라는 점은 흥미와 의문을 동시에 던져주었다. 갤러리 룩스로 들어서자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익은 작품들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그림이 아닌 사진이 다양한 모노크롬 추상회화를 떠올리게 한다. 전시장에는 미술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말레비치, 아그네스 마틴, 이브 클랭, 앨런 매컬럼, 박서보, 이우환을 연상할 수 있는 작품들이 걸려있다.
다수의 작품이 주로 사각형과 원의 형상을 띠고 있고 그 제목도 〈추락하는 검은 원〉 혹은 〈검은 사각형의 비밀〉 등이다. 이러한 유형과 함께 붓이 휙휙 지나간 이미지로 구성된 〈터치〉, 전면 모노크롬 작품 〈모노 골드〉 등은 사진을 이용한 서구의 절대 추상, 추상표현주의, 모노크롬의 패러디로 보인다. 〈디지털 묘법〉이나 〈선으로부터〉는 박서보와 이우환의 회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박상우는 “회화는 오브제를 버림으로써 모노크롬을 실현”하지만 사진은 “반대로 오브제에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모노크롬의 놀라운 우주를 발견”한다고 하면서 오브제에 대한 미시적인 접근을 통해 추상의 세계를 추구한다.
박상우의 모노크롬 사진은 보는 재미보다 미술사와 사진의 주요 개념 및 담론들을 환기시킨다. 내러티브가 제거된 추상 사진이 인간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표현할 수 있는지는 언제나 논쟁거리였다. 카핀이나 하트만 같은 모더니즘 사진 비평가들이 픽토리얼리즘을 버리면서 순수하고 꾸미지 않은 사진적인 수단으로 승부할 것을 주장했고, 모더니즘 사진에서 그것은 근접촬영을 통한 추상으로 시도되었다. 모더니즘 추상회화의 옹호자 그린버그는 회화와 사진을 엄격히 구별하여 추상을 추구하는 사진을 경계했다. 박상우의 사진은 단순히 추상을 흉내 낸 모더니즘 사진은 아니다. 패러디와 역설의 전략이 개입되면서, 그의 사진은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주장한 포스트모던적 원본 없는 카피들로 보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의 사진 이미지는 반드시 무언가의 이미지라는 인덱스의 원칙을 따르고 있다. 크라우스의 인덱스 개념이 모더니즘 추상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의 추상 사진은 또 다른 역설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추상이 비대상성을 추구한다고 할 때 박상우의 이미지는 추상을 가장한 대상 사진이기 때문이다. 그는 오브제의 표면을 확대 촬영하여 모노크롬 회화의 형태로 제시한 “추상이면서도 현실인” 역설의 이미지들을 통해 가장 기계적이고 가장 물질적인 것으로 깊이와 인간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한다.
과연 이것은 가능한 일일까. 작가가 강조하는 오브제의 물성은 사진의 표면이라는 투명 유리에 갇힌 것일 뿐이다. 회화에서 사진으로의 전이는 작품 표면의 다양한 물성과 텍스처가 프린트라는 단일한 물성의 표면에 갇힌 채 시각적 일루전의 유희를 제공할 뿐이다. 동전의 표면이건 깨진 휴대전화 액정을 찍건, 사진의 표면 물성은 늘 동일하다. 사진의 표면성은 언제나 사진 해석의 한계가 되었다. 그러나 박상우는 사진의 표면을 통해 과학적 무의식의 세계, 비물질의 세계, 무의식의 세계마저 제시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그의 모노크롬 사진의 표면은 우리가 무의식의 세계로 진입하는 통로 역할을 하는 것일까. 이것은 회화의 모노크롬이 물질과 더불어 추구했던 세계이기도 하였으니 박상우의 〈회화에서 사진으로〉는 한편 모노크롬 회화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박상우 〈디지털 검은 사각형〉(오른쪽) 2016

CRITIC 이동수

2.1~28 갤러리 조은

고충환 | 미술평론

숨결의 시(작). 작가 이동수가 자신의 근작에 부친 주제다. 대략 숨결이 시작되는 곳, 숨결의 근원 정도를 의미할 것이다. 유형무형의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모든 존재는 결을 가지고 있다. 바람에도 결이 있고, 주름에도 결이 있고, 세월에도 결이 있고, 심지어는 마음에도 결이 있다. 존재 치고 결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 다르게는 길과 겹과 주름, 물리적으로는 파동과 파문과 파장, 동양학으로 치자면 기와 운과 생과 동의 상호작용, 그리고 운동으로 치자면 이행과 유격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모든 존재는 항상적으로 여기에서 저기로 이행 중이며, 그렇게 이행하려면 구조적으로 유격이 있어야 하고 길이 있어야 한다. 그 결(그리고 길)들의 궁극이 숨결(그리고 숨길)이다. 호흡이다. 최초의 숨결이 허다한 다른 결들로 분기되는 것으로, 그리고 그렇게 무명의 존재를 파생시키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숨결은 결들의 궁극이고 존재의 원인이다. 작가는 그 숨결이 시작되는 곳(것)을 겨냥한다. 궁극 중의 궁극을, 원인 중의 원인을 정조준 한다.
그림의 주제 치고는 좀 거창하다 싶다. 흔한 사발 아니면 다기에 담아내기에는 너무 큰 주제가 아닌가도 싶다. 아마도 숨 쉬는 그릇에서 처음 착상한 것일 터이다. 그릇은 숨을 쉬는데, 알다시피 이는 결코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실을 알고 보면 그 주제가 그렇게 거창하지만은 않을 수 있다. 다도 혹은 다례에서 보듯 차 한잔 마시는 행위 속에도 우주가 있고 각성이 있음을 생각하면 그다지 큰 주제가 아닐 수도 있겠다. 문제는 작가가 흔한 사발 아니면 다기 그림 속에 숨과 결을, 숨이 들고나는 길을, 존재의 원인을, 우주와 각성을 어떻게 담아내고 실현하는지를 살필 일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건 무슨 수학공식처럼 손에 잡히는 실체로서보다는 감각적인 아우라를 통해서 암시되고 감지되는 것일 수 있다.
사발 혹은 다기를 그린 작가의 그림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각각 숨을 강조하고 결을 부각한 경우로 볼 수 있겠다. 사발 표면에 바른 유약이 머금은 은근한 투명성 혹은 반투명성이 숨을 강조하고 있다면, 사발의 물성과 질감이 두드러져 보이는 또 다른 경우가 결을 강조한 것일 수 있겠다. 표면적으로 구분돼 보이지만, 숨과 결이 하나이듯 그 이면에서 하나로 통하는,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서로 공명하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런 공명은 모티프에 해당하는 사발과 검푸른 배경화면의 공명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검푸르다고 했다. 푸른 기미를 머금은 검은색이고, 빛의 기운을 함축한 어둠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수장된 사발을 보는 것 같고,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의 켜(질감)를 보는 것 같고, 어둠이 머금은 빛의 기미가 고요와 정적을 가만히 흔드는 것도 같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마치 찻잔 속에 담긴 우주 혹은 삼라만상처럼 존재의 원인에 대한, 숨결이 시작되는 곳(것)에 대한 명상에 가만히 빠져들게 만든다.

CRITIC 애나 한 Pawns in Space 0.5

2.16~3.18 갤러리 바톤

이승환 | 에이루트 디렉터

갤러리 바톤은 2월 16일부터 약 한 달간 애나 한의 작품으로 가득 차게 된다. 천장고 4m에 달하는 전형적 화이트큐브가 애나애나하게 바뀐 건, 작품 제작부터 설치까지 작가가 모든 걸 틀어쥐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혼자서 드로잉하듯 작품을 배치하고, 공간의 요소와 리듬을 통합하고 조율하는 재료들을 설치했을 것이다. 작가는 유학시절을 거쳐 귀국 후 여러 레지던시를 전전하며 여러 번 이사를 다녔는데, 그 경험이 아이러니하게 공간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고 한다. 작업실 환경은 2015년 에이루트에서의 개인전 때보다 나아졌으나 여전히 현실 공간(작업실)이 작품형식(전시장)의 모티프가 됐을 거다.
공간을 효과적으로 장악하는 방법 중 하나로 천장을 뚫거나 바닥을 쪼개는 게 있다. 이미 일리야 카바코프나 도리스 살세도 등의 작가가 쿵 뚫고 쫙 쪼갰으니 이후 웬만한 방법으로는 새로운 충격을 주기란 어려울 것이다. 애나 한은 공간 장악보다 ‘조율’을 선택했다. 그리고 일상적 오브제의 선택과 이들의 무심한 배열을 통해 얻어지는 생경함 대신 평면회화 본연의 매력에 집중하고 이 매력이 공간으로 넘치는 순간에 주목했다.
때문에 애나 한은 우선, ‘좋은 화가(painter)’다. 그녀는 기억을 물질로 바꿀 수 있다. 기억 중 절정의 순간을 잡아 캔버스 위에 고정한다. 물질로 전환될 때 기억은 예쁜 색과 최소한의 형태로 소환된다. 단색의 면이 광선에 따라 다른 느낌을 갖도록 섬세한 브러시 스트로크와 보카시(bokashi, gradation)를 계획하여 치밀하게 그려낸다. 색의 선택도 과감하다. 예쁜 색 선택에 주저함이 없다. 크건 작건 사각이건 다각이건, 스스로 선택한 프레임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넘친 기억은 작가를 공간 연출가로 만든다. 프레임 밖으로 확장된 세계는 3차원인데, 시시할 만큼 소소한 몇 가지 재료만 가지고 타블로를 효과적이고 경제적으로 공간화한다. 전시장으로 들어가서 왼쪽 상단에 걸린 〈Meteor Shower〉는 작품에 내재된 LED조명과 전시장 조명 덕분에 드러난 벽 ‘속’의 그림자까지 작품으로 맞아들인다. 〈Cast〉, 〈Sunset Boulevard〉, 〈Butterfly〉 등 작품 대부분이 천, 실, 조명, 크고 작은 캔버스를 마치 물감처럼 활용해 공간에 그린 ‘회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작업은 입구 쪽 스트라이프 벽면이다. 분홍과 연두, 이 두 색채가 아사무사하게(알 듯 모를 듯하게) 조합된 시트지는 프레임 안과 밖, 작품과 비(非)작품처럼 내 마음속에 그어진 경계를 흐트러뜨렸다. 그간 프레임 밖 세계를 상상하는 건 관람자의 몫이었다. 애나 한은 거기까지 과잉 친절을 베푼 걸까.

위 애나 한 〈Pawns in Space 0.5〉 전시광경

CRITIC 송창: 잊혀진 풍경

2.10∼4.9 성남아트센터 큐브미술관

이영란 | 미술칼럼니스트, 뉴스핌 편집위원

민중미술 진영의 대표적 화가 송창(65)은 30년 넘게 ‘분단’을 테마로 작업해왔다.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반도의 아픈 현대사와 대치상황을 특유의 질박하고 묵직한 회화를 통해 일깨우고 있다. 하지만 증강현실게임의 포켓몬이 뮤지엄과 문화유적지에 출몰하고, 4차 산업혁명이 논의되는 이 시점에서 ‘분단’은 일견 진부한 테마로 여겨진다. “아직도 분단을 붙들고 있느냐”는 시선도 있다. 혹자에게는 시대착오적인, 케케묵은 주제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해묵은 주제를 끈질기게 붙들고 작업해온 송창의 생각은 다르다. 분단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요, 천착해야 할 이슈라는 것이다. 남북 대치 상황이 더욱 첨예해진 현 시점에선 모두가 질문하고, 숙고해볼 과제라고 본다.
그런 그가 오랜만에 본격적인 미술관 개인전을 꾸미고 대작들을 발표했다. 1997년, 지금은 없어진 동아갤러리에서 개인전 〈기억의 숲-소나무〉를 개최한 뒤로 20년 만의 미술관 초대전이다.
경기도 성남아트센터 내 큐브미술관에서 〈송창-잊혀진 풍경〉이라는 타이틀로 4월9일까지 열리는 작품전에는 근작 및 신작 회화, 입체설치 등 40여 점이 출품됐다.
전시작들은 송창의 뚝심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민간인은 더 이상 진입할 수 없는 민통선지역의 쓸쓸한 벌판을 꾹꾹 눌러 담듯 그린 〈민통선 들녁〉(1990)이라든지, 임진강변을 절규하듯 그려낸 〈임진갯벌〉(1993) 같은 1990년대 작품도 포함됐지만 이번 개인전에는 2011~2015년 제작한 작품이 주류를 이룬다. 근작들은 형식상으론 신표현주의, 내용상으론 리얼리즘 미술의 성격을 띠지만 그 카테고리에 집어넣기엔 송창의 조형실험은 다분히 초현실적이다. 현대사가 초래한 민족의 절망과 한(恨), 초자연적 세계관 등이 작품 속에 강렬하게 응집돼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인 〈섬광〉(2015)을 보자.
흰 눈이 내린 비포장도로 위로 장갑차의 깊은 바큇자국이 검붉은 흙길을 드러낸 가운데 저 멀리 군부대가 쏘아올린 포탄의 불꽃이 석양의 하늘로 솟구친다. 움푹 패어 질척거리는 흙구덩이에 고인 물은 60년 전 전투에서 누군가 흘린 선혈처럼 핏빛이다. 그 피는 질척거리는 구덩이 아래로 흘러내리며 화가의 발치에서 멈춘다. 이제 비무장지대를 떠나야 할 시간이다. 해가 지면 민간인은 머물 수 없다. 두 동강 난 조국을, 절망적인 대치상황을 절절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꿈〉이라는 그림 또한 섬뜩하다. 비무장지대에 건설되고 있는 교각이 어느 날 끊어진 다리처럼 꿈에 등장한 듯하다. 남북 분단이라는 이 길고도 어두운 터털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작가는 질문한다.
이번에 송창은 2개 또는 3개의 화폭을 이어붙인 회화도 내걸었다. 〈그곳의 봄〉(2015)이라는 3면화는 중앙에 영국군 유해를 화장했던 검은 화장탑을, 왼쪽엔 화장장 앞에 흐드러지게 핀 노란 망개초를, 오른쪽엔 영국을 상징하는 개가 그려졌다. 이미지의 중첩을 통해 분단을 서사의 영역에서 서정의 세계로 이끈 것.
송창의 근작들은 사회학자 김홍중이 최근 설파한 〈파상(波像)〉이란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김홍중은 〈사회학적 파상력〉(2016)이란 책에서 ‘상상력’의 반대가 되는 ‘파상력’이라는 말을 창안했는데, 기존의 것들이 산산이 부서질 때가 바로 파상이라 했다. 결국 파상은 위기이자 카오스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한 자각과 각성은 다른 가능성을 열어준다. ‘분단’을 주제로 한 송창의 음울하면서도 토해낼 듯 절박한 그림들 또한 비극과 혼동을 그리되 그 속에서 움트는 또 다른 가능성, 곧 ‘파상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번에 작가는 삼베 끈을 화면 전체에 부착한 후 물감을 입혀 두터운 마티에르를 추구한 작업 등 다양한 실험을 했다. 대형 미사일을 입체로 빚어 “민중미술 하면 좌우 이념부터 따지는 통에 작가들이 많이 떠났다. 후배들도 무거운 주제는 잘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예술이야말로 다양성이 생명 아닌가. 한쪽으로 쏠린다면 그것은 고여 있는 물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민중미술은 죽었다’고들 하지만 역사와 삶을 성찰하는 미술로 변모하고 있다고 강조한 작가는 자신의 〈잊혀진 풍경〉이 〈잊어선 안 될 풍경〉이 되길 소망하고 있다.

위 송창 〈망각의 통로〉(왼쪽) 캔버스에 유채 227×182cm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