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강수미의 공론장 1

안녕 좌담회 (2)

세대 미학, 미술주체의 문제

지금부터 내가 다루려는 최근(2013~2014년, 그리고 현재) 한국 미술계의 특정 현상은 분명 차이, 변화, 단절, 대립의 계기로서 ‘세대’ 문제를 품고 있고, 누군가 어떤 의도로든 촉발만 시키면 논쟁과 갈등이 확 불붙을 폭발력을 가졌다. 아직은 잠복 상태거나 미결정 상태라는 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행 추이를 보자면 일단 사건의 불씨는 점화됐으며 어느 쪽으론가 양상이 몰리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도 어렵다. 해서 우리 앞에는 그 잠복 혹은 미결정의 상태가 내부에 어떤 속성을 갖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형태로 마름되어야 할지, 혹은 어떤 방향과 가치를 좇아 바로 잡히고 정교해져야 하는지 고민할 과제가 놓였다. 요컨대 사회 어느 영역이나 마찬가지 듯 미술계에도 새로운 세대가 출현하고, 그 세대의 새로운 일과 자리와 존재가치가 필수적으로 요구되는데, 그것이 기성세대 및 체제와 어떻게 관계 설정을 하고, 제 위치를 잡으며, 어떤 기제들과 더불어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립하는가 하는 문제다. 이 지면에서 나는 그 문제를 크게 ‘세대 미학’이라 명명하고, 앞으로 몇 차례의 글쓰기를 통해 미술주체, 미술경향, 미술정치학, 미술제도, 미술비평 등 세부 논제에 따라 짚어보고자 한다. 우선 여기서는 미술의 주체가 관건이다.
요 근래 한두 달 사이 한국 미술계의 특정 지점에서 세대 갈등이 살살 불 지펴지는 모양새다. 앞서 지나가듯 언급했지만 사실은 좀 수상스러운 상태다. 그 양상이 세대 간 삶의 지향적 차이나 미학적 충돌로써가 아니라, 일부의 사람들 사이에서, 어딘가 배타적인 방식으로, 묘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때문에 일정 규모 이상의 사회 집단을 상정하게 되는 ‘세대’,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물리적・심리적 마찰이 떠오르는 ‘갈등’이라는 단어를 쓰기가 주저되기는 한다. 일단 갈등이라고 해도, 그 직접적 원인이나 소기의 목적이 분명치 않으며, 구도가 명확히 설정돼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대 갈등이라면 익은/기성세대와 젊은/신진세대, 이 두 진영의 당사자들 간 대립과 쟁투가 문제일 텐데 실제로 일의 전개는 전자가 후자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이슈를 주도하고 행동을 자극한 데서 시작됐다. 그 점에서 전도(顚倒)의 징후도 보인다. ‘청년’의 이름을 내세워 정작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는 ‘기성’이라고나 할까.
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고전적이면서 언제나 이미 급진적인 세대 갈등의 양상은 아방가르드의 친부 살해, 즉 전복의 의도를 가진 신참자가 반미학・반미술의 저항을 통해 기존의 미술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미술의 시작을 요구하는 식이다. 그에 비춰볼 때 지금 여기의 양상은 관계가 묘하게 꼬여있고, 제기하는 내용이 빈약하며, 요구사항은 보수적이거나 소시민적이다. 팩트 체크를 하자면, 지난 해 말 SNS 상에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일명 ‘청년관’을 신설하라는 요구가 미술세대 간 갈등의 이슈로 제기됐는데, 이를 처음 제기한 이는 기성 미술계에 자리를 잡은 선배세대 중 한 명인 비평가 임근준이다. 나아가 그는 온오프라인을 이용해 그 이슈를 붐업 시켰다(좌담회 ‘안녕 2014, 2015 안녕?’, 《한겨레21》 2015. 1.9). 그리고 한겨레 기자 노형석이 이를 이어 받았다.
즉 대안공간 루프 디렉터 서진석, <청춘과 잉여전>(커먼센터 2014.11.20~2014.12.31) 기획자 안대웅, 대안공간 이포 디렉터 박지원을 초대한 대담에서 그들의 주된 논의가 “자생성을 고민한 창작활동”(박지원), “여기를 발판으로 제도권에 들어가자, 작가 키우자는 식의 목표는 없다”(안대웅), “청년관 얘기는 숲보다 나무만 보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서진석) 등으로 이루어졌음에도 기사 제목을 “국공립미술관에 ‘청년작가들의 공간’을 허하라”(한겨레, 2015.1.18)로 뽑음으로써 논점을 선정적으로 좁힌 것이다. 그들은 제도권 내 청년 공간의 확보라는 이슈를 후배세대가 지금 여기서 풀고 획득해야 할 최우선 욕망의 과제로 설정해줌으로써 기성세대 vs. 신진세대, 기득권미술제도 vs. 청년작가의 갈등 구도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실제로 그에 동조하는 측은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의 한 필자가 쓴 것처럼 “팬덤층이 아닐까 의심”(배세은, indienbob.tistory.com/914)이 들 만큼 젊은 미술인 중 일부이며 사회적 집단성보다는 배타성을 가진 이들이다. 대담에서 안대웅이나 서진석이 각자의 뜻으로 말한 ‘미술계의 88만원세대’ 대다수가 아니라, 예컨대 트위터의 ‘팔로우’나 페이스북의 ‘좋아요’를 통해 서로 물고 물려 있는 그룹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현재 이슈 속의 ‘청년작가들’은 기성세대 미술을 낡고 진부한 것으로 격하시켜버릴 만한 어떤 전위적이거나 혁신적인 작품을 보유하고 있는가? 혹은 상상컨대 국가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청년관을 어느 날 떡하니 개설해주면 당당히 거기 들어갈, 그간 자신들의 은밀한 그룹 안에서 비아냥거렸던 기성작가들의 미술을 부끄럽게 할 만한, 독자적인 예술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인가? 혹시 선배가 제시해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청년관 신설’이라는 이슈를 복창하면서 정작 미술은 손 놓고 있지 않은가? 이를테면 이 형국은 아들(딸, 청년, 청춘, 젊은, 신진 등 그 지시어가 무엇이든)이 자신의 의지 대신 아버지(어머니, 중년, 노년, 늙은, 중견, 원로, 기득권 등등)의 욕망에 이끌려 아버지의 목을 치는 체 하면서 아버지의 사랑 받는 옆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노파심에서 부연하건대, 여기서 아버지는 라캉의 ‘대타자’ 혹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개념과 같다). 현재 한국 미술계에서 미술의 새로운 주체가 되고자 하는 이들은 사회에서 말하는 의미의 잉여가 전혀 아니다. 그런 자기 욕망의 당사자 말고, 정작 발화도, 행동도, 무엇보다 세대 너머 체재를 전복할만한 야심 찬 작업도 직접 수행하지 못한 채 이슈로 서로를 묶는 이들이 잉여 상태에 빠져 보인다. 게다가 그런 이들은 정작 자신이 속한 세대의 대다수 구성원들과 공감 및 연대는 고사하고 말하자면 스스로를/ 그들을 ‘왕따’ 시킴으로써 세대교체의 동력조차 없애버린 것 같다. 이를테면 특정 미술대학 출신이 아니고, 미술계의 누구와 어디가 영향력이 있는지 뒤쫓는 것보다 우선 미술을 계속할 것인가부터 해결이 안 나 고민이며, SNS 상에서마저 제 목소리를 낼 틈을 못 찾고 있고, 특정 취향 그룹의 크고 작은 위세를 고스란히 스트레스로 떠안고 있는 대다수 침묵하는 예비/무명/주변 미술가들이 진짜 청년세대의 실체다. 유행하는 퍼포먼스아트나 리서치 기반 미술과는 거리가 멀고, 요즘 대세인 협업을 하려 해도 스타일 좋은 디자이너 친구도 수완 좋은 기획자 친구도 없는 전국 곳곳에 박힌 미대 졸업생들이 우리가 고려해야 할 청년세대 전체다. 그 청년세대 구성원들의 진정한 욕망이 평소 튀는 언변과 취향의 동년배 일부가 모창 하듯 따라 외치고 있는 “그럴듯한 기회와 장소”(《한겨레21》 위와 같음)는 아닐 것이다.
처음부터 상황이 이렇게 흘렀던 것 같지는 않다. 우리가 넓은 의미에서 한국 현대미술 지형과 지세에 어떤 변화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느낀 2013년경으로 시계를 돌려보면 분명 새로운 주체가, 자신들의 목소리로, 자신들의 사고, 감각, 취향, 판단에 따라 만든 자신들의 환경에서 새로운 미술을 시도했다. 예컨대 ‘시청각’과 ‘커먼센터’는 기성미술제도에 편입하는 대신 독립된 전시공간을 꾸려 자신들의 미적 지향 및 취향에 부합하는 미술을 기획전 형태로 제시했다. ‘문래동창작예술촌’이나 ‘남서울예술인마을’은 문화예술의 핫스팟 대신 공장지대나 변두리동네 안에 자리 잡은 채 삶과 예술의 실증적 공존가능성을 보여줬다. 일군의 아티스트, 큐레이터, 디자이너, 엔지니어 등이 공동 창업하고, 공간을 공유하며 다원적이고 집합적으로 창작-생활하는 형식으로서 그 사례들은 청년미술세대의 특성과 성과를 예표 하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청년미술세대의 실체는 자신들이 나서서 미완/미생으로 평가 절하하거나, 제도권 미술관의 구성원 또는 “한국 미술계를 빛낸” 인물 등으로 전이하면서 보다 현실적인 목표가 설정됐다. 그것이 앞서 살핀 바 기성미술제도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서 일정 지분(쿼터)을 얻어낸다는 것이다. 불과 2년이 채 안 되는 이전에, 리슨투더시티의 작가 박은선은 다음 인용문처럼 당당하게 독립적 창작 시스템을 제시했다. 그런데 어떻게 분명 이 작가와 같은 세대에 속하는 젊은 세대의 일부는 오늘 여기서 시니컬하게 자신을 ‘잉여’라고 부르며, 공적 제도에 자신을 의탁하려 하는 것일까.
“독립적인 기금의 구축은, 국가와 기업의 패러다임에 휘말리지 않는 방법은 가능한가를 묻는 존재론적 실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실험은 개인의 우수함보다 집단적으로, 지역을 기반으로 실험해야 한다. 설사 그 방법과 규모가 보잘 것 없이 작다 하더라도 국가내부의 담론 안에 안주하는 큰 기관보다 다양하고 단단한 기반을 다질 수 있다.”-리슨투더시티 박은선, <미술 독립기금 구축하기>, 《미술생산자 모임 자료집》, 2013, p.49
강수미 동덕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