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강수미의 공론장 6

press-perf. #14

세대 특정적 미술? 오늘의 미술

동시대 미술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 젊어 보인다. 굳이 연령이나 생물학적 젊음을 따져서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음악계에서처럼 현대미술 분야에서도 ‘신동(神童)’ 소리가 울려 퍼져야 할 것이다. 나이보다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미적 취향, 미술제도 및 시스템의 작용 주기와 교체 속도, 예술적 역학구도나 영향관계의 양상 등을 두루 고려해보니, 동시대 미술계에서 젊음을 한 특성으로 꼽을 수 있겠다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미술은 조형적 원숙함, 미학적 깊이, 경험에 입각한 눈의 통찰과 손의 숙련을 중시했다. 같은 맥락에서 미술계는 ‘신동’이나 ‘영재’에 상당한 가치를 두는 여타 예술 분야들과는 달리 ‘중견’이나 ‘대가’를 바탕으로 꾸려져왔다. 그러던 것이 대략 1990년대 초부터 본격화된 현대미술, 특히 영국발(YBAs) 센세이션 미술이 주도한 무대에서는 ‘영 아티스트(young artist)’가 각광받는 현상이 벌어진다. 게다가 ‘앙팡테리블 (enfant terrible)’인. 또 20세기 초 아방가르드운동의 전위적 실험과 도발적 새로움과는 다른 맥락에서 끊임없는 변화와 새것으로의 교체를 무한 긍정하는 현상이 이어진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 두 가지가 오늘 여기의 미술을 방부 처리된 듯, 영원한 젊음으로 보이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큰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그 현상은 “우리는 도처에서 모험을” 하며 “당신에게 광활하고 낯선 영토를 주려”1 한다고 선언한 근대 아방가르드 시인의 정신이 아니다. 그보다는 역사의 발견 자체를 위해 “몰역사적인 오래됨의 창고”를 뒤지며 “영원히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2 것처럼 구는 동시대미술의 핵심 방법이 바로 변화와 교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꽤 오래전 한 정치인은 ‘삼겹살 불판을 갈 듯이 낡고 썩은 정치판을 갈아야 한다’고 주장해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지금 미술계의 판 갈이는 가히 유행을 위한 유행의 교체, 변화를 위한 변화의 갱신이다. 요컨대 시간의 층, 경험의 층, 다양성의 층, 주체의 층, 세대의 층, 형식의 층, 가치의 층, 의미의 층이 퇴적돼 종합적 구조가 되고 중층결정되는 곳이 아니다. 대신 액면가(face value)가 싱싱한 것들을 ‘잘라내기-붙여넣기’ 하는 피상성의 무대가 바로 동시대 미술판이다. 이 미술판에서는 새로운 것이란 기존의 것들을 감각적으로 디제잉(DJing)해서 기발한 각도로 보여줘 즉각적인 자극을 유발하면 충분한 무엇이고, 그에 성공할 경우 뒤집어 새로운 오리지널의 자리에 등극하는 무엇이다. 동시에 종합은 진지한 성찰과 필터링의 투명한 결과라기보다는 물리적 파편들의 무시간적 연쇄, 미술사에 대한 토르소식 참조와 재활용, 디지털 데이터 오버레이, 네트워크 자동 동기화 등등과 동의어가 됐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현대미술, 어느 때부턴가 고유명사처럼 ‘컨템포러리 아트(contemporary art)’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미술이 만년 젊을 것처럼 움직이는 이유다.
하지만 정말 그것들이 동시대미술의 총합일까? 그것들이 현대미술을 대표할까? 가령 그 경우 액면가가 싱싱하지 않은 전통적이고 일반화된 미학, 디지털 메커니즘이나 앱 네트워크와 동기화 안 되는 조형예술 작품들, 젊지 않은 미적 경험 세대 및 즉각적이지 않은 시각기교를 익힌 작업자들은 지금 여기 말고 언제, 어디의 미술로 분류되어야 할까? 앞선 정치인의 말처럼 새것들로 전면 교체되면 그것으로 좋은가?
우리는 이와 같은 질문에, 철학자로서 인간의 감각적 현존과 동시대예술의 추이에 관한 중요한 미학 논변을 제공해온 장 뤽 낭시(Jean-Luc Nancy)를 잠깐 참조해보기로 하자. 그는 2006년 밀라노의 아카데미아 디 브레라(Accademia di Brera)가 주재한 ‘컨템포러리 아트에 관한 강연’에서 그 용어 대신 자신은 ‘아트 투데이(Art Today)’라는 말을 쓸 것이라며, 그 논거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첫째, ‘컨템포러리 아트’는 인상주의, 초현실주의, 포비즘, 아방가르드처럼 굳어진 하나의 관용구로서 그 나름의 방식으로 미술사에 속한다. 둘째, 그것은 경계가 가변적이지만 지난 20~30여 년 이전의 미술은 포함하지 않으며, 항상 유동적인 기이한 역사적 범주다. 셋째, 그 범주로 따지면 오늘, 세상의 어딘가에서 제작되는 일군의 작품들은 그 공속성에도 불구하고 컨템포러리 아트에 속하지 않는다. 예컨대 고전적인 기법으로 그린 형상회화 같은 것 말이다.3 여기서 자세히 논할 여유는 없지만, 낭시의 이 같은 설명은 그 자체로 컨템포러리 아트의 정체와 한계를 간명하게 드러낸다. 즉 최근의 미술계가 쉽고 느슨하게 지금 여기의 미술에 갖다 붙이는 그 말이 동시대미술의 보편성도, 미술사의 큰 내러티브도, 현재 실행 중인 미술에 대한 어떤 의미의 종합도 담보하지 않는/못한다는 뜻이다. 또한 리얼리즘, 큐비즘, 보디아트처럼 특정한 미적 속성을 분석하고 명칭을 부과하는 데 무관심/실패하기 때문에 대략 ‘동시대’라는 모호한 범주로만 지칭한다는 사실이다.
사태가 이와 같다면,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용어 사용이 아니다. 오히려 “그 나름의 방식”을 가진 컨템포러리 아트가 마치 지금 여기 미술을 일반화하고 총괄하는 것처럼 작용하면서 불러일으키는 예술적 경향의 배타성, 미적 취향의 편식, 미술 주체들 간의 경시와 차별 따위를 묵인하거나 심지어 당파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문제다. 낭시가 예로 들었듯이, 클래식 회화 기법으로 형상에 충실한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오늘의 미술이 아닌 것은 아니다(나는 여기서 김홍주, 김보중, 임동식 같은 이들의 그림이 떠오른다). 또 현재 미술계에서 ‘퍼포먼스 아트’라는 이름으로 유행 중인 작업을 1950~1970년대부터 이미 해왔으나 2000년대 들어서서 ‘영 아티스트’처럼 각광 받고 있는 작가들이 나이나 경력 면에서 젊다/청년이라고 할 작가들의 파이를 빼앗는 것도 아니다(이승택, 김구림, 이건용 등이 말이다). 유행이나 대세와는 상관없이 창작을 하고, 현대미술 우세종의 맥락과는 다른 경로로 미술을 보며, 시대착오적이더라도, 흥행하는 장소와 시간에 부응하는 활동은 아니더라도, 오롯이 ‘오늘의 미술’이라는 장(場)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2010년대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공기처럼 흡입하며 성장한 디지털 웹과 앱 기반 미디어 환경 속의 감각지각을 새로운 가시성/표피의 작품들로 보여준다(일민미술관의 <뉴 스킨>). 동시에 다른 쪽에서는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름 없는 장인과 이름이 있더라도 예술가 주체를 주장할 수는 없었던 이들이 면면히 쌓아올리고 정교히 한 한국문화예술의 전통을 역사의 무게를 딛고 전개시킨다(리움미술관의 <세밀가귀>). ‘좋은 미술계’라는 것이 가능하고 또 유의미하다면, 이와 같은 예술 실천이 억압 없이 다양화하는 곳이다.
지난 2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청년관을 신설하라’는 이슈에 대한 논의로 시작한 이 ‘공론장’ 연재가 벌써 약속한 6회를 채우며 끝을 보게 됐다. 그간 나는 처음 글을 개시할 때 중요하게 상정한 ‘세대 미학’이라는 화두를 미술주체의 문제, 경향의 문제, 미술정치학의 문제, 미술제도의 문제, 미술비평의 문제로 나눠 공론화하려 애썼다. 그리고 이 마지막 편에서는 종합의 의미에서 동시대미술의 층위를 보려 했다. 글쓴이 입장에서는 그 사이 얼마만큼 생산적이고, 어느 정도로 의미 있는 논의들을 지금 여기 우리의 미술계에 이끌어냈는지 모를 일이다. 여기저기서 직간접적으로 전해지는 반응과 몇몇 독자의 구체적 의견을 통해서 대략 그 반향을 가늠해볼 수 있을 뿐. 다만 한 가지, 일련의 글을 통해 내가 분석하고자 했던 것은 어느 세대에 특정된 미술이 아니라, 오늘의 미술을 이러한 양태와 성질로 구성하고 있는 요소 및 힘의 작용이었다는 점은 강조해두고 싶다.
사람들 앞에 처음 TV가 켜졌을 때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새로운 시각경험을 했듯이, 스마트폰이 처음 우리 손에 쥐어진 후 나이나 삶의 연륜에 상관없이 낯선 미디어 환경에 응했던 것처럼 감각지각의 세계, 예술의 세계에서 ‘세대’는 개별성과 공속성의 역학을 동시에 고려할 때 존재감 있는 주제다. 언제까지든 젊은 미술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영원히 늙지 않는다는 그 자체가 지옥의 형벌과 같다. 그 점에서 컨템포러리 아트의 싱싱함은 좀 무시무시하다.강수미 동덕여대 교수

1 레나토 포지올리, 박상진 옮김, 《아방가르드 예술론》, 문예출판사, 1996, p.15의 기욤 아폴리네르 시에서 재인용.
2 장 필리프 앙투안, <동시대의 역사성은 지금이다!>, 알렉산더 덤베이즈 & 수잰 허드슨 엮음,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부 옮김, 《라운드테이블》, 2015, p.48.
3 Jean-Luc Nancy, <Art Today>(Charlotte Mandell(trans.)), 《Journal of Visual Culture》 9, 2010(May 27), pp. 91-99 중 91. The online version of this article can be found at: http://vcu.sagepub.com/content/9/1/91.citation

위 2005년 쌈지스페이스에서 열린 <타이틀매치: 이건용 VS 고승욱전>은 당시 원로 작가 이건용(오른쪽)과 차세대 주자 고승욱이 ‘된장과 케첩’ 퍼포먼스를 통해 세대 간 소통과 생산적 대화를 모색한 대표적인 전시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