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김보민 먼 목소리

김보민 (5)

6.8~29 포스코미술관

정필주 | 예술사회학, 미술평론

라인테이프를 사용해 표현한 현대적 풍경을 주로 수묵 담채 산수를 통해 강조하거나 대비하는 방식은 2006년 개인전 데뷔 이래 작가 김보민이 구축해온 작품세계의 특징이다. 다만, 테이핑을 통한 현대적 공간이든 전통적 세필과 농담 효과에 의한 공간의 기억과 그것을 매개로 하는 전승 설화이든 관계없이, 그 공간은 매번 달라지지만 우리가 느끼는 익숙함을 배반할 정도로 기이하거나 추상적이진 않다. 거의 10여 년간 계속된 작가의 풍경 탐구는 이제 누구나 한 번쯤은 스쳐 보냈을 찰나적 삶의 단편 속에 매우 사적인 친밀함을 쉽게 뿌리내리게 하거나, 목동, 선유도 등 집단적 기억이 굳건한 대도시 속 현실적 공간에 전승 설화나 작가 스스로의 상상적 세계를 무리없이 연결해낼 만큼 능숙해졌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이러한 능숙함이 약속하는 현실적 삶과 그 공간이 담아온 기억의 단편 간의 멋들어진 연결 사례 중 마음에 드는 한 쌍을 선택하기만 하면 되는 걸까? 김보민은 단지 자신이 구축한 전지전능한 시점의 날렵하면서도 굳건한 화법을 통해 일련의 작품 리스트를 쉼 없이 갱신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가?
포스코미술관 제2기 신진작가 공모전의 일환으로 6월 8일부터 29일까지 개최된 김보민의 개인전 〈먼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김보민이 단순히 설화적 공간의 갖가지 재림 사례를 ‘발견’했음에 만족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과거에 비해 더욱 비중이 높아진 전통 산수는 현대적 풍경과의 경계에 머무르지 않으며 때론, 무채색의 현대적 풍경에 색과 생동감을 불어넣기도 한다. 이는 분명히 초기작에 비해 보다 적극적으로 현실 공간을 자신의 주관적 인식을 통해 정의하고 발견하려 하는 것일 수 있다. 실제로 서울 강서구의 풍경에 설화적 공간을 풀어낸 작품 ‘개화’나 ‘제차파의’ 등은 그러한 시도의 훌륭한 사례로서 손색이 없다. 다만, 유채색의 미려한 설화적 산수가 갖는 매력이 곧 모노톤의 테이핑된 콘크리트 도시 속 일상성을 대신하여 김보민 작품세계의 주인공이 된 것은 아니다. 전통 산수에 대한 김보민의 접근은 현실적 공간의 존재 이유 자체를 위협할 정도로 엄격하진 않으며, 오히려 그 표현은 의도적으로 다운 그레이드되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딛고 있는 대지에 켜켜이 쌓여 있는 선조들의 삶과 그 설화적 전승은 성스러움 대신 친숙함을 갖게 된다. 나아가 이러한 친숙함은 현실 공간의 일상적 단조로움과 그 맥을 함께하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작가의 심정적 지지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김포공항에서 남산, 한강에서 재개발 지역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풍경 속에 내려앉은 설화적 공간과 이야기들은, 무채색의 현실적 공간의 일상성 속에 숨은 삶의 기억을 대체하는 대신 그들을 되짚어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실마리 역할을 자처한다.
일상적 단조로움을 그려내는 무채색의 테이핑을 회색의 이상향에 대한 도시민으로서 김보민의 믿음이 실체화한 것으로 본다면, 작가의 작품 하나하나는 전통 산수와 유채색의 설화적 공간에 대한 일관된 수구초심이라기보다 서울이라는 회색 현실 공간 속 우리들, 그리고 작가 자신의 삶에 대한 애정어린 질문에 가깝다. 설화적 전승이 갖는 매력과 전통 산수에 대한 작가 본인의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김보민은 설화나 먼 과거 속 인물의 ‘먼 목소리’만을 빌려, 회색의 이상향에 거주하는 우리들에게 대화를 권하고 있다. 모든 답을 내놓는 대신, 대화의 상대를 비워둘 줄 아는 작가를 만나기 힘든 현대미술계에서 김보민과 같은 작가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은 역시 기쁜 일이다.

위 김보민 〈곰달래〉(왼쪽) 모시에 수묵담채, 테이프, 금분 145.5×97cm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