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애나 한 Pawns in Space 0.5

애나 한 (7)

2.16~3.18 갤러리 바톤

이승환 | 에이루트 디렉터

갤러리 바톤은 2월 16일부터 약 한 달간 애나 한의 작품으로 가득 차게 된다. 천장고 4m에 달하는 전형적 화이트큐브가 애나애나하게 바뀐 건, 작품 제작부터 설치까지 작가가 모든 걸 틀어쥐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혼자서 드로잉하듯 작품을 배치하고, 공간의 요소와 리듬을 통합하고 조율하는 재료들을 설치했을 것이다. 작가는 유학시절을 거쳐 귀국 후 여러 레지던시를 전전하며 여러 번 이사를 다녔는데, 그 경험이 아이러니하게 공간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고 한다. 작업실 환경은 2015년 에이루트에서의 개인전 때보다 나아졌으나 여전히 현실 공간(작업실)이 작품형식(전시장)의 모티프가 됐을 거다.
공간을 효과적으로 장악하는 방법 중 하나로 천장을 뚫거나 바닥을 쪼개는 게 있다. 이미 일리야 카바코프나 도리스 살세도 등의 작가가 쿵 뚫고 쫙 쪼갰으니 이후 웬만한 방법으로는 새로운 충격을 주기란 어려울 것이다. 애나 한은 공간 장악보다 ‘조율’을 선택했다. 그리고 일상적 오브제의 선택과 이들의 무심한 배열을 통해 얻어지는 생경함 대신 평면회화 본연의 매력에 집중하고 이 매력이 공간으로 넘치는 순간에 주목했다.
때문에 애나 한은 우선, ‘좋은 화가(painter)’다. 그녀는 기억을 물질로 바꿀 수 있다. 기억 중 절정의 순간을 잡아 캔버스 위에 고정한다. 물질로 전환될 때 기억은 예쁜 색과 최소한의 형태로 소환된다. 단색의 면이 광선에 따라 다른 느낌을 갖도록 섬세한 브러시 스트로크와 보카시(bokashi, gradation)를 계획하여 치밀하게 그려낸다. 색의 선택도 과감하다. 예쁜 색 선택에 주저함이 없다. 크건 작건 사각이건 다각이건, 스스로 선택한 프레임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넘친 기억은 작가를 공간 연출가로 만든다. 프레임 밖으로 확장된 세계는 3차원인데, 시시할 만큼 소소한 몇 가지 재료만 가지고 타블로를 효과적이고 경제적으로 공간화한다. 전시장으로 들어가서 왼쪽 상단에 걸린 〈Meteor Shower〉는 작품에 내재된 LED조명과 전시장 조명 덕분에 드러난 벽 ‘속’의 그림자까지 작품으로 맞아들인다. 〈Cast〉, 〈Sunset Boulevard〉, 〈Butterfly〉 등 작품 대부분이 천, 실, 조명, 크고 작은 캔버스를 마치 물감처럼 활용해 공간에 그린 ‘회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작업은 입구 쪽 스트라이프 벽면이다. 분홍과 연두, 이 두 색채가 아사무사하게(알 듯 모를 듯하게) 조합된 시트지는 프레임 안과 밖, 작품과 비(非)작품처럼 내 마음속에 그어진 경계를 흐트러뜨렸다. 그간 프레임 밖 세계를 상상하는 건 관람자의 몫이었다. 애나 한은 거기까지 과잉 친절을 베푼 걸까.

위 애나 한 〈Pawns in Space 0.5〉 전시광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