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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화

남종화 南宗畵

중국 명말(明末)의 막시룡莫是龍(모 스롱), 동기창董其昌(똥 치츠앙, 1555~1636), 진계유陳繼儒(츠언 지로우)가 제시한 남북종론에서 나온 북종화*에 대립되는 개념의 산수화* 양식. 문인들이나 사대부가 주류를 이루는 문인화*와 혼용되어 남종문인화라고도 부르는데, 대개 남종화는 산수화를 의미하고 문인화는 산수화 외에 사군자, 화조화 등 좀더 넓은 범위를 가리킨다. 남종화의 계보는 당唐나라의 왕유王維(우앙 웨이, 699~759)를 시조로 하여 오대송초(五代宋初)의 동원董源(똥 위앤)과 거연巨然(쥐 르안)을 거쳐 미불米芾(미 후, 1051~1107), 미우인米友仁(미 이어우르언), 실질적 개조(開祖)인 황공망黃公望(후앙 꽁왕), 예찬倪瓚(니 짠), 왕몽王蒙(우앙 멍), 오진吳鎭(우 즈언) 그리고 명대(明代)의 심주沈周(선 저우, 1427~1509), 문징명文徵明(원 즈엉밍, 1470~1559)과 예림백세(藝林百世)의 스승으로 일컬어지는 동기창 등으로 이어진다.
화풍상의 특징은 수묵선염을 주로 하여 부드러운 느낌을 강조하였다. 준법*(皴法)도 비교적 부드럽고 우아한 피마준*(披麻皴), 미점*(米點) 등을 자주 사용하고 발묵*(渤墨)과 파묵*(破墨)을 애용하여 운치 있는 산수를 표현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조선 초부터 부분적으로 유입되다가 후기부터 크게 유행하여 조선화단에 큰 획을 그었다. 그러나 남북종론은 문인화와의 모호한 구분과 회화양식에 대한 편협적인 가치평가로 인해 현재 많은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남진북최

남진북최 南陳北崔

중국 명말(明末)에 활약한 진홍수陳洪綬(츠언 홍서우, 1598~1652)와 최자충崔子忠(츠웨이 쯔총, ?~1644) 두 화가를 이른다. 진홍수는 남방의 절강성浙江省 출신이고 최자충은 북방의 산동성山東省 출신이어서 그 호적수를 나타내기 위해 ‘남진북최’라는 말이 생겼고, 《국조화징록國朝畵徵錄》에 그 용례가 보인다. 명말에 이르러 왕조의 부패가 구제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고 사회적 혼탁양상이 가속화하자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이며 골동취미적인 경향의 그림이 성행하였다. 진홍수와 최자충의 그림은 이러한 경향을 대변하는데, 두 사람 모두 인물화에 뛰어났다. 진홍수의 화풍은 기이하고 생졸하며, 과장되고 변형된 조형을 즐겨 사용하였다.
고개지顧愷之(꾸 카이즈, 344~406)에서 유래된 고대 인물화 양식을 풍자적으로 묘사하는 등 전통적 방식을 연구하였다. 명말의 혼란과 붕괴 상황 속에서 자신의 화풍을 전통에 의지한 것은 고도의 개인주의적인 자아탐구일 뿐만 아니라 명明 왕조나 문화에 대한 충성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인물 뿐만 아니라 화조도 잘 그렸다. 나아가 역사화와 풍속화*에 뛰어났는데 이공린李公麟(리 꽁린, 1040~1106)과 조맹부趙孟頫(자오 멍후, 1254~1322)의 화법(法)을 겸비하였고 설색(設色)은 오도현吳道玄(우 따오쉬앤)의 유법(遺法)을 얻었다.
최자충 역시 명말의 혼란스런 세상을 그림으로 표현한 화가였다. 그는 명말의 서화고동취미(書畵古董趣味)를 반영하는 인물화들을 많이 그렸다. 이는 명말청초(明末淸初)의 혼란기에 전통에 의탁하여 현실 상황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이상적 취향의 문인화풍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최자충의 화풍도 전통을 추구하여 당唐, 송宋 화풍을 따랐다. 따라서 묘사기법이 세밀하고 치밀하며 색채가 청려하였다.

남화

남화 南畵

일본에서 18세기와 19세기에 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린 회화양식. 이 회화 양식은 17세기와 18세기에 중국 청淸에서 발달한 개성파 화풍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청의 회화 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구도는 물론 붓놀림에서도 중국 문인화*의 요소들을 과장하여 새로운 양식으로 변형시켰으며 이들의 그림에는 유머감각이 돋보인다. 이케노 다이가池大雅, 요사 부손與謝蕪村, 우라가미 교쿠도浦上玉堂는 대표적 남화파 화가들이다. 이 새로운 중국 회화양식이 나가사키항을 통해 일본으로 들어온 것은 18세기 초 일본 지식인들이 외부 세계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을 때였다.
중국에서는 1679년에, 일본에서는 1748년에 출판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은 남화의 화풍을 형성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19세기에 접어들어 남화는 교토京都에서 주축을 이루는 화파로 성장하였으나 차츰 독창성을 잃고 구태의연해져 뚜렷한 양식이나 충실한 구도감각을 상실하면서 기교에만 치중하여 20세기에는 크게 퇴조하고 말았다.

납화법

납화법 蠟畵法 encaustic(영)

그리스-로마 시대에 벽화 또는 넓은 판자에 그린 화법. ‘색을 구워 넣는다’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안료를 벌꿀에 녹이고-이때 온화(穩和)제로 기름이나 송진을 첨가하기도 함-그것이 따뜻할 동안에 브러시(brush) 또는 주걱을 사용하여 목판이나 상아 또는 대리석에 그리는 화법으로서, 특히 주걱의 뜨거운 정도에 따라 화면에 광택이 있는 층이 생겨난다. 기원전 4세기경 시키온Sikyon 화파의 중심인물인 팜필로스Pamphilos에 의해 발명되었다고 전해진다. 처음에는 주로 건축의 채색에 쓰여졌으나 결국 회화의 한 기법으로 널리 이용되어졌다. 엔카우스틱은 기독교 시대 초기 수백년 동안에 가장 흔하게 쓰여지던 기법이었으나, 8~9세기에는 쓰이지 않게 되었다. 17세기에는 카일루스백작Caylus(1692~1765)이 이 기법의 활용을 다시 소생시키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9세기에 테레빈유*에 용해된 납을 섞은 여러가지 혼합제가 프랑스와 영국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 기법은 다루기가 힘들어서 크게 이용되지 못했다. 오늘날 납은 색채를 더욱 쉽게 바르기 위해 송진과 혼합해서 쓰고 있다.

낭만주의

낭만주의 浪漫主義 Romanticism(영)

18세기말부터 19세기초에 걸쳐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일어난 예술상 및 철학상의 경향. 개성을 존중하고 자아의 해방을 주장하며 상상과 무한한 것을 동경하는 주관적, 감정적인 태도가 그 특징이다. 따라서 이는 정신 생활의 전역에 영향을 미친 주의 또는 경향이며 미술상으로는 고전주의*라든가 바로크 등에 대해 일컬어지는 것같은 독자적인 명확한 양식을 낳게 한 것은 아니다.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의 차가운 형식 존중에 대한 반동이라는 형태로 나타나, 프랑스에서는 제리코Théodore Gericault(1791~1824)에서 시작되어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1798~1863)에 이르면서 자유분방한 색채, 유동적인 필치, 동감에 찬 구성을 갖춘 영웅적 작품을 남겼다. 특히 들라크루아의 동방 취향 또는 이국 취미에 의한 후기 작업은 낭만주의의 한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낭만주의의 이러한 특성은 회화사상 독일 중세 혹은 초기 르네상스의 종교적 정열과 결합된 나자렛파*, 룽게Philipp Otto Runge(1777~1810),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1774~1840)의 범신론적 풍경화 속에서도 뛰어난 선구자적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내용

내용 內容 content(영)

형식이 내용의 존재 방식이자 대상의 표면 현상이라면, 내용은 예술작품에 있어서 그 안에 포함된 것, 또는 미적 대상*의 정신적인 것이나 내적인 면에 의존하는 미적 가치체계를 가리킨다. 예술의 내용은 항상 삶의 경험적인 현실을 시적, 예술적 현실로 변화시키는 형식을 통해서 매개된다. 그러므로 예술과 형식은 서로 분리할 수 없다. 모든 존재하는 제 요소나 그 이행의 과정을 통합하여 일정한 존재, 일정한 과정으로 만드는 것이 형식이며 그 안에 통합되어 있는 것은 내용이다. 따라서 어떠한 것도 형식과 내용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을 분리하여 형식에만 주목하면 형식주의*가 된다. 형식과 내용의 불가분성이 사물에 갖추어져 있지만, 형식과 내용에는 서로 대립되고 모순되는 성격이 있다. 형식은 고정적이고 비교적 변하지 않는 성격을 갖지만, 내용은 동적이고 이행하는 성격을 갖는다. 형식의 이러한 특성은 사물을 일정한 상태로 보존시키지만, 내용 자체가 그 형식 하에서 동적, 변이적인 성격을 발휘하여, 그때까지의 내용을 통합하여 유지시키고 있던 형식과 일치하지 않게 된다. 내용은 자기에 일치하는 형식을 요구한다. 이 모순의 진행 결과, 내용은 새로운 형식을 갖게 되며 낡은 형식을 폐기시킨다. 그럼으로써 사물은 종래와는 다른 것으로 변화한다. 이와 같이 형식과 내용은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다.

내진

내진 內陣 choir(영)

건축 용어. 교회당에 있어서 애프스*와 신랑* 사이 또는 애프스와 익랑* 사이에 있는 장방형 또는 정방형 모양의 장소. 즉 신랑부의 동쪽 부분으로 성가대석과 제대를 포함하여 말한다. 그리고 이는 종종 내진 칸막이에 의해 신랑부에서 구분된다. 서쪽 끝이 성가대석이며 이에 대해 동쪽 끝이 제대가 있는 곳이다. 로마네스크에서는 측랑을 연장해서 내진의 주위에 주보랑을 형성하고 또 동쪽의 내진에 대해 서쪽에도 내진을 마련하는 이중 내진 형식도 나타났다.

넛 오일

넛 오일 nut oil(영)

회화 재료. 유화용 물감을 녹이는 기름의 일종으로서, 호두열매로 짠 기름을 말한다. 건조, 찰기, 광택 등은 린시드유*와 포피유의 중간 정도이다.

네거티브 프린트

네거티브 프린트 negative print(영)

→ 음화

네오 다다

네오 다다 Neo-Dada(영)

1957년 무렵부터 미국 회화에 나타났던 새로운 경향. 공식적인 용어로서 사용된 것은 1958년 1월 《아트뉴스Artnews》지에 익명으로 게재된 평론에서 존스Jasper Johns(1930~ ), 캐프로Allan Kaprow(1927~),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1925~), 톰블리Cy Twombly(1929~ ) 등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예가 처음이다. 그 후 네오다다는 캐프로와 톰블리의 작품보다는 존스와 라우센버그의 작품과 주로 연결지어져 왔다.
《아트뉴스》에서 다다*라는 이름을 연관시킨 것은 제1차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다다 운동의 두 가지 측면 때문이다. 첫째는 과녁과 숫자와 지도가 캔버스 화면 전체를 덮는 존스의 회화에 내포되어 있는 다다와 같은 역설과 애매모호함 때문이다. 둘째는 라우센버그가 폐품과 발견된 오브제*를 사용하여 회화와 조각이 합쳐진 컴바인 페인팅*을 창조한 데에는 뒤샹Marcel Duchamp(1887~1968)과 슈비터즈Kurt Schwitters(1887~1948) 및 다른 다다이스트들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의 다다 운동이 주로 기성 가치의 부정을 목적으로 파괴와 반항으로 시종일관한 데 비해, 네오 다다는 반예술*적 활동을 그대로 창조 행위로 전환하고 여기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려는 특색이 있다.
인쇄물, 폐물 등을 모은 라우센버그의 컴바인 페인팅과 1958년 처음 개인전에서 발표했던 존스의 깃발과 표적의 회화는 비속한 것으로 여겨졌던 사물을 예술의 가운데에 적극적으로 참가시킴으로써 예술과 비예술, 예술과 생활의 경계를 다시금 묻고 생각해 보려는 것이었다. 네오다다는 추상표현주의*와 팝 아트* 사이를 잇는 역할을 했다. 존스와 라우센버그는 추상표현주의의 특징인 제스처*적인 붓질과 거대한 스케일은 물려받았지만, 추상표현주의가 추구한 숭고함을 배격하는 대신 일상적인 이미지를 표현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존스와 라우센버그가 팝 아트*의 발전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네오 다다의 유럽판은 신사실주의*이다.

→ ‘다다’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