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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쿠호시대 미술

하쿠호시대 미술 白鳳時代美術

여러 호족들의 연합정권으로 인해 불안정했던 조정이 권신(權臣) 소가蘇我의 권세를 꺾어 중앙정권을 장악하고 당唐을 본떠 국가를 건설한 645년의 다이카노카이신大化の改新으로부터 헤이조平城(현 나라奈良)로 천도한 710년까지의 미술. 국가의 보호를 받았던 불교는 헤이안(飛鳥)시대와 마찬가지로 미술 문화의 중심역할을 하였다.
이 시대의 미술양식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양식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한반도를 거쳐서 일본에 전해지던 중국 대륙의 미술양식이 견당사(遣唐寺)의 파견에 따라 직접 일본으로 들어오게 되고,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에 따른 망명인들에 의해서 새로운 기술과 양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효덕조孝德朝부터 천지조天智朝까지는 헤이안 양식의 여운을 지닌 작품들이 존재하고, 천무조天武朝 이후에는 수隋, 당唐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도 나오게 되었다.
건축:호류지法隆寺의 금당金堂, 오중탑五重塔, 중문中門, 회랑回廊의 일부가 하쿠호시대의 건축이다. 그 특징으로는 중간이 굵은 엔타시스적 기둥과 처마밑 두공*에 구름 모양의 첨차를 사용한 것을 들 수 있다.
조각:하쿠호 전기에 속하는 대표적 조각은 도쿄東京국립박물관 소장의 〈신해명관음보살상辛亥銘觀音菩薩像> 등을 들 수 있는데, 좌우에 지느러미 모양으로 넓어지는 천의(天衣)의 형식 등 아직 헤이안시대의 양식이 남아 있지만 얼굴에는 엄숙함이 줄어들고 어린아이의 얼굴에 가까운 표정을 보이고 있다. 또한 북제北齊, 북주北周 양식을 보이는 〈관심사觀心寺 관음보살觀音菩薩〉, 당당한 체구나 둥글둥글한 얼굴 생김에서 수의 영향을 느끼게 하는 〈당마사當麻寺의 본존미륵상〉 등이 전기 시대의 작품들이다.
후기의 작품으로는 살집이 좋아지고 법의의 질감이나 주름이 사실적으로 묘사된 〈법륭사 대보장전大寶藏殿의 귤부인주자 아미타삼존상橘夫人廚子 阿彌陀三尊像〉, 체구와 조화 비율이 실제 사람에 가까워지고 치마를 통해서 허리나 다리의 선을 뚜렷하게 들여다보이게 만들어 초당(初唐)의 영향이 배인 〈약사사藥師寺 동원당東院堂 성관음상聖觀音像〉 〈약사사 약사삼존상〉 등이 있다.
회화:하쿠호 시대의 회화를 대표하는 작품은, 석실 세면에 성장한 남녀 인물과 현무, 백호, 청룡이 그려지고 천장에 성숙(星宿)이 그려진 〈다카마쓰쓰카高松塚 벽화〉와 1949년 화재로 상실된 대소 12면의 〈호류지 벽화〉가 있다. 이 벽화에는 약사藥師, 석가釋迦, 아미타阿彌陀, 미륵彌勒의 정토가 잘 표현되어 있다. 불보살의 몸이나 의복문양에 짙은 음영*을 나타내어 입체감을 살린 점과 철선묘*(鐵線描)라 부르는 비수 없는 탄력성 풍부한 선이 사용된 점이 특징이다.

한국 청동기시대 미술

한국 청동기시대 미술 韓國靑銅器時代美術

주로 청동기 유물을 대상으로 해서 그들의 형식 변천과 공반관계(共伴關係)를 고찰하면, 대체로 기원전 10년경부터 시작하여 서기 4세기 전후까지를 청동기시대로 보고 있다. 이를 다시 대표적 유물인 동검(銅劍)의 형식 분류에 따라 , 제1기를 요녕식(遼寧式) 동검시기, 제2기는 Ⅰ식 세형 동검시기, 제3기는 Ⅱ식 세형 동검시기로 나눈다.
제1기의 청동기는 기원전 700~600년경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요녕지방에서 출토된 유물과 비슷한 형식이며 공반유물로는 석기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제2기에 이르러서는 석묘(石墓)계통의 분묘에서 출토되며, 종교적 색채의 청동기도 출토되기 시작한다. 공반유물로는 비실용화된 마제석촉(磨製石鏃), 천하석제식옥(天河石製飾玉), 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 흑색장경호(黑色長頸壺) 등이 있다. 제3기에서는 공구(工具), 용기(容器), 거여구(車輿具) 등 일상생활의 실용품들이 토광묘(土壙墓)에서 출토된다. 공반유물로는 석기가 소멸되고 철기가 대량으로 나타난다. 또한 낙랑고분(樂浪古墳)의 출토품과 동일한 종류의 한식유물(漢式遺物)이 동반되고 있다.
분묘:가장 전형적인 것은 네 벽과 바닥 및 뚜껑을 각각 1장의 판돌로 조립한 석관묘(石棺墓)이다. 또한 북방식(탁자식)과 남방식(바둑판식)으로 구분되는 지석묘(支石墓)가 있다. 동검이 부장되며 돌로 구축된 동검석묘(銅劍石墓)는 지석묘와 석관묘 사이에 새로이 채택된 무덤으로 추정된다. 매장 시설로서 목관이나 목곽이 사용된 토광묘는 청동기시대에서 초기철기시대로 변천함에 따라 나타나는 고분구조이다.
토기: 청동기 시대에 사용된 토기* 전체를 가리켜 무문토기(無文土器)라고 명명한다. 이들 토기의 종류들은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음식을 끊이는 자비용(煮沸用)으로 사용한 원통형의 토기이다. 그리고 저장의 용도로 쓰인 호형(壺形)토기와 음식물을 담기 위한 접시, 굽접시, 대접 등이 있다. 무문토기는 태토 속에 굵은 모래알이 포함되어 있어, 표면을 매끈하게 하는 작업이 뒤따른다. 이 표면처리의 특수한 기법으로 홍도(紅陶), 흑도(黑陶)가 있다.

한림도

한림도 寒林圖

산수화*의 한 화제(畵題)로, ‘한림’이란 잎이 다 떨어진 쓸쓸한 숲을 의미한다. 한림이란 용어는 이미 당시(唐詩)에 보이지만 화제로 취급된 것은 당말오대(唐末五代)부터이다. 주로 화북계(華北系) 산수화가들에 의해 산수화의 점경(点景)이나 주경(主景)으로 그려졌다.
한림도는 이성李成(리 츠엉)에 의해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성은 오대 말기부터 북송北宋 초기에 걸쳐 화북지방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겨울 풍경을 전문으로 했는데, 가지들의 곡선 장식과 더불어 벌거벗은 나무들을 통해 자연의 장엄함과 황량함을 표현하였다. 송대(宋代)의 허도녕許道寧(쉬 따오닝), 곽희郭熙(구어 시) 등의 작품은 이성의 작풍(作風)을 이어 받았다. 한림도에는 풍설(風雪)에 부대껴 끝이 게발톱처럼 표현된 나뭇가지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해조묘*라 불리는 이러한 기법은 이성, 허도녕, 곽희와 원대(元代)의 이곽파* 작품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한림도화원

한림도화원 翰林圖畵院

북송北宋 전기의 화원(畵院). 화원 제도의 기원은 당대(唐代)에도 보이며 오대(五代)의 후촉後蜀, 남당南唐에서 제도화되었다. 북송시대에는 태종太宗과 신종神宗 모두가 회화를 좋아해 이를 적극 후원하였다. 따라서 황실에서는 오대의 화원제도를 계승하여 한림도화원을 건립하고 내시성內侍省 밑에 두었다. 대조(待詔), 예학(藝學), 지후(祗候), 학생 등의 직급과 정원, 승진제가 확정되고 무인계 관직이 주어지게 된 것은 진종眞宗(998~1022)에 이르러서라고 추측된다.
진종에서 휘종徽宗(1067~1125)에 이르는 사이에 여러번 제도가 변혁되었다. 특히 휘종의 화원개혁에서는 직업화가로서의 질적 향상이 도모되고 원체화*(院體畵; 화원회화양식)가 확립되어 후세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화원화가는 주로 궁정용, 외국 사신들에게 증여하기 위한 회화, 궁정 사관 관공서에 필요한 장식화 등을 제작하였다. 주로 제왕과 궁정의 심미안을 반영하였고, 북송 전기 예술의 발전과 번영을 보여준다.

할렌키르헤

할렌키르헤 Hallenkirche(독) hall church(영) église halle(프)

광간식 성당(廣間式聖堂)이라 한다. 기독교 성당 안에서 신랑*과 측랑*의 높이가 똑같이 되어 있는 형식의 성당. 이 형태는 로마네스크*식 건축에서 개발되었으며, 특히 독일의 후기 고딕*식 교회에 자주 나타난다.

해경화

해경화 海景畵 Seascape(영)

바다를 주제로 한 그림. 고대의 신화나 해상전투 또는 해적행위 같은 사건들을 묘사한 그림 속에서 즐겨 다루어졌다. 고대 회화*의 주된 관심은 인간이었기 때문에 바다나 강은 대개 관례적으로 묘사되거나 신성(神性)이 깃들어 있는 형태로 표현되었다. 풍경화*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던 로마 시대에도 해경화에는 이르지 못했다. 또한 브뤼겔Pieter Bruegel(c.1525~1569) 역시 배에 대한 관심을 보였으나, <이카루스의 추락>에서 보여지듯이 중심 주제에 부속된 것이었다.
한편 거센 바다 위의 배를 즐겨 다룬 그의 만년의 회화들은 바다 그 자체에 대해 주목하고 있는데, 이러한 화풍은 17세기의 네덜란드 화가들에 의해 주로 시도되었다. 핸드릭 코르넬리스 브룸, 비에링겐 코르넬리스 클래츠 등이 있으며, 1625년경 반 에르트벨트Andries van Eertvelt는 다채로운 플랑드르 양식의 낭만적인 해경화를 보여주고 있다. 18세기의 영국 화가들로는 모나미Peter Monamy, 스콧Samuel Scott 등이 있다. 그 후 터너William Turner(1775~1851)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영국 해경화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19세기에 이르면 보닝턴Richard Parkes Bonington, 코트맨John Sell Cotman 같은 뛰어난 해경화가들에 의해 풍경화와 해경화 간의 구분이 희미해지기 시작하며, 근대와의 간격을 메워주고 있는 윌리W. L. Wyllie는 특히 독특한 물의 색채를 통해 수많은 해경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해삭준

해삭준 解索皴

피마준*에서 약간 변형된 동양화 준법*. 밧줄을 풀어헤친 것같이 꼬불꼬불한 필촉으로 처리되는 것이 특징이다.

해상화파

해상화파 海上畵派

중국유파의 하나로 ‘해파(海派)’라고도 한다. 아편전쟁(1840~1842) 이후 상해上海는 통상항구로 개방되었고, 각지에서 몰려든 화가들의 수가 늘어나 회화 활동의 중심이 되어서, ‘해파’라는 명칭이 생겼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전통의 기초 위에 파격적인 참신함과 자유로운 유파를 추구하여 개성이 분명하다. ②품학수양(品學修養)을 중시한다. ③민간 예술과의 관계 속에서 아속공상(雅俗共賞)의 경지를 이룩한다. ④외래예술을 흡수한다. ⑤그림모임(畵會)들이 일어나 융성한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조지겸趙之謙(자오 즈지앤, 1829~1884), 허곡虛谷(쉬 꾸), 임이任頤(르언 이), 오창석吳昌碩(우 츠앙스, 1842~1927), 황빈홍黃賓虹(후앙 빈홍, 1864~1955) 등이다.
이 밖에 임태任態(르언 슝), 포화蒲華(후 화), 호공수胡公壽(후 꽁서우), 장태張態(즈앙 슝), 오우여吳友如(우 이어우르우), 정장程璋(츠엉 즈앙), 오경운吳慶雲(우 칭윈), 임훈任薰(르언 쉰), 전혜안錢慧安(치앤 후에이안), 사복沙馥(사 후), 황산수黃山壽(후앙 산저우), 예묵경倪墨耕(니 모징), 조자운趙子雲(자오 쯔윈), 왕일정王一亭(우앙 이팅), 빙초연(빙)招然(훵 츠아오르안), 정우창鄭牛昌(즈엉 우츠앙) 등이 있다. 《해상묵림海上墨林》에 기록된 화가의 수는 700여 명에 이른다.

해서

해서 楷書 kái -shu(중)

한자 서체*의 일종. ‘정서(正書)’ 혹은 ‘진서(眞書)’라고도 한다. 예서*의 왼삐침과 오른삐침을 없애고 방정한 체를 이룬 것으로, 옛날에는 예서에 포함되었으나 육조(六朝)시대에 이르러 정서 또는 진서의 명칭이 붙었다. 옛날에는 해법이라고 하여 서법을 모방한다는 의미로 쓰였으므로 서체에만 한정된 명칭은 아니었다.

해양사가

해양사가 海陽四家

→ 신안화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