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1 2 7

해조묘

해조묘 蟹爪描

동양화에서 나뭇가지를 그리는 기법. 마른 나뭇가지의 구부러진 형상을 게의 발처럼 날카롭게 그리는 수지법*(樹枝法)이다. 화북계통 산수화에서 앙상하게 헐벗은 한림(寒林)의 가지나 말라 죽은 고목(枯木)의 가지를 그릴 때 사용한다. 이곽파*李郭派 산수에 많이 쓰였으며 조선초기의 안견파*安堅派도 이를 받아들여 애용하였다.

해체

해체 deconstruction(영)

→ 탈구축

해칭

해칭 hatching(영) hachure(프)

판화*나 소묘*에서 세밀한 평행선 또는 교차선을 써서, 대상의 요철이나 음영을 표현하는 묘법이다. 빛의 미묘한 반사의 복잡한 것에서부터 지도, 제도 따위의 간단한 것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해칭이 있다.

해프닝

해프닝 Happening(영)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 주로 행해졌던 비연극적, 탈영역적(脫領域的)인 연극 형식이며, 우발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현대 예술의 각 분야에서 시도되고 있는 표현운동의 한 가지. 해프닝은 주제, 소재*, 액션*의 변화에 따라 여러가지 형식으로 전개하여 이른바 예술과 일상 생활과의 경계를 없애려는 것이 하나의 특색이다. 특히 미술에서는 화가의 제작 행위 그 자체를 하나의 표현으로 본다는 주장에서 발전한 것으로, 액션 페인팅*의 행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테면 여러 가지 물체와 만남으로써 바로 눈 앞에 있는 이벤트를 발생시켜 그것을 직접 체험한다는 일종의 ‘실연(實演)’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해프닝의 선구로는 미래주의*와 다다*의 즉흥연기 등을 거론할 수 있지만 직접적으로는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과 케이지John Cage 등 뉴욕에서 활약한 일련의 화가들과 관련이 있다.
초기에 이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던 작가 중의 한 사람인 올덴버그Claes Oldenburg(1929~ )는 회화와 조각의 결합을 꾀하고 대중의 행동을 작품에 끌어들였는데, 그는 현실 전체를 원동력으로 하여 다시 변경된 현실을 창조하려는 욕망 표현의 수단으로서 해프닝을 간주하였다. 해프닝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캐프로Allan Kaprow(1927~ )인데, 그는 이런 매개체를 최초로 실연에 옮긴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움직이는 사람과 사물을 콜라주*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한편 같은 시기에 올덴버그, 휘트먼Robert Whitman, 그룸스Red Grooms, 다인Jim Dine 등은 비슷한 경향의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중을 위한 그들의 이벤트는 일반적으로 내용이 없는 각본과 즉흥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 작가들은 해프닝에서 무용수나 단편 영화, 연설 그리고 조잡하게 제작된 구조물을 이용했다.
우연성은, 해프닝의 현장에 자유롭게 참여한 관중의 예기치 않은 행동을 수용한다. 우연성의 수용은 전위 음악가 케이지의 이론에 영향받은 것으로, 그는 오래 전부터 작품에 우연한 사건을 도입하여 예술과 생활의 경계를 허물어뜨려야 한다고 주장해 왔었다.
많은 비평가들은 블랙 마운틴 칼리지*에서 공연한 1952년의 실연을 들어, 케이지를 해프닝의 최초의 대표적 작가로 꼽고 있다. 위의 공연에는 전위 무용수인 커닝햄Merce Cunningham, 화가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피아니스트인 튜더David Tudar 등 많은 예술가들이 참여했다. 1960년에 가까워지면서 여러 작가들은 이 새로운 예술의 특성을 정의하려고 시도했다.
캐프로는 자신의 작품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상점 정면이나 다락방과 같은 상황에서 도시와 농촌의 풍경으로 옮겨가면서 대중을 초청, 거의 의식적이고 계산된 사건의 연속 속에 결합시키고자 했다. 휘트먼은 각기 다른 장치로 연속물을 마련하고 주어진 배경 속에서 행동을 계속하여 연극에 보다 더 접근해 갔다. 다인은 위협적이고 무시무시한 효과가 강조된, 해프닝으로서의 사이코 드라마를 시험했다. 조각가인 올덴버그는 움직이는 대상에 대한 활성화된 반응에 관심을 집중했다.
해프닝은 복합적인 매체에 관심있는 작가들에게 계속적으로 탐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들은 춤, 작곡된 음악, 전위적인 연극 형식의 일면을 포용해왔다. 해프닝은 이미지의 단절이나 전통적인 일차원적 구성에서 진전을 보이지 않아 어느 정도는 연극과 구별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다른 어떤 예술 형태보다도 연극적인 면이 많다.

행궁

행궁 行宮

유사시 왕이 정무를 집행하기 위해 건립된 시설로 왕도(王都)와 인접한 경기 지역에만 남아 있는 특별한 형식.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화성의 세 행궁이 대표적인데, 현재 건물들은 없어졌으나 내전(內殿)과 외전(外殿)의 건물터에 석축과 초석이 남아 당시의 장대했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행동미술

행동미술 行動美術 Behaviour Art(영)

신체미술*(Body Art)이라고도 한다. ‘비헤이비어(behaviour)’는 태도, 동작의 뜻으로, 여기에는 인간의 외관을 추구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개념미술*에서 발전한 것으로 모든 과학이 정신 구조와 육체 구조라는 도식화된 인과관계를 방법론적으로 문제삼고 있는 데 대해서 행동미술은 특수한 육체의 운동 및 변화의 제조건 또는 각 순간 마다 변화하는 육체의 현상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행동미술은 과정미술*과 마찬가지로 관념을 생산하는 개념미술의 필연적인 진전으로 볼 수 있다. 개념미술에서 행동미술로의 전개는 길버트와 조지Gilbert & George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변화의 과정을 시각화하기 위해 그들 자신의 육체를 유일한 소재로 이용했다. 미국에서 행동미술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아콘치Vito Acconci, 오펜하임Denis Oppenheim 등이 있으며, 독일에서는 링케Klaus Rinke와 칼렌Wolf Kahlen 등이 같은 경향의 작업을 하고 있다.

행서

행서 行書 hsig-shu(중)

한자 서체*의 명칭. 후한後漢 초의 유덕승劉德昇(리우 떠성)이 시작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다. 해서*와 초서*의 중간 정도의 서체로, 예서*가 자연스럽게 간편화된 것이다. 행서가 서체로 인정받게 된 것은 후한으로부터 삼국시대의 위魏나라에 이르는 시기의 일이라고 여겨진다. 목간(木簡)이나 왕희지王羲之(우앙 후에이즈)의 서간 등에 행서의 실례가 전해지고 있다.

행운유수묘

행운유수묘 行雲流水描

→ ‘인물십팔묘’ 참조

향당산석굴

향당산석굴 響堂山石窟
Xiangtangshan(중)

중국 하북성河北省과 하남성河南省 경계에 있는 북제北齊 시대(550~577)의 불교석굴. 남북으로 수십킬로미터에 걸쳐 위치하며, 남향당산은 하북성河北省 고성진鼓城鎭에, 북향당산은 하남성河南省 의정리義井里에 있고 현재는 하북성 봉봉시峰峰市 관할하에 있다.
남향당산은 상하 2층에 도합 7개굴이 있으며 하층의 제1굴(華嚴洞)과 제2굴(般若洞) 및 상층의 제3굴(空洞), 제4굴(拱門洞), 제5굴(釋迦洞), 제6굴(力士洞), 제7굴(千佛洞)의 전부가 북제시기에 개착(開鑿)되었다. 북향당산도 7개굴로서 동동(東洞, 제3굴, 刻經洞), 중동(제4굴, 釋迦洞), 서동(제6굴, 佛洞)의 3대굴은 북제시기의 것이나 그외에 수대(隋代)의 제1굴(二佛洞), 제2굴(大業洞)과 당대(唐代)의 제7굴(倚佛洞), 명대(明代)의 제5굴(嘉靖洞) 등의 작은 굴도 있다. 대부분이 탑묘굴(塔廟窟)로서 내부 중앙의 기둥 정면에 3~5존상이 있다.
북향당산의 동동은 존상굴(尊像窟)로 안벽 및 좌우 양벽의 감내(龕內)에 칠존상을 새겨놓았다. 조상은 둥그스름하고 충실한 체구와 유려한 옷무늬, 섬세하게 표현된 구슬 목걸이를 지니고, 장식문양으로는 넓다란 잎을 가진 당초문*이 많은 북제시대의 전형을 보여준다.
남향당산 제2굴 앞벽 상부에 있던 석가설법도 부조*와 기둥 정면의 아미타정토도(阿彌陀淨土圖)부조는 현재 프리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밖에 불상 머리부분이나 향당산에 남아있지 않는 조각들도 구미 각국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북향당산 석굴이 있는 고산鼓山 기슭에는 북제시대의 상락사 절터가 남아 있다.

향완

향완 香垸

향완은 불전(佛前)에 향을 피우는 향로의 일종으로, 그릇 모양의 몸체에 나팔모양의 높은 받침대가 있는 완형(垸形)의 향로를 일컫는다. 병향로(柄香爐)가 승려들의 행렬에 주로 쓰인 반면, 향완은 주로 공양용으로 쓰였다.
형태는 노신(爐身)과 받침으로 나뉘고 노신의 동체(胴體)는 깊숙한 발*(鉢) 모양에 구연부에는 넓고 납작한 전을 수평으로 돌렸다. 받침인 대좌부(臺座部)는 아래로 내려오면서 점차 넓어져 나팔형으로 퍼져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노신과 대좌*는 못으로 연결하여 고정시켰는데 쉽게 분리될 수 있다.
향로 표면 전체에 정교하고 세련된 은 입사*(入絲)로 시문된 문양은 귀족적인 아취를 잘 보여준다. 노신부를 보면, 원문(圓文) 안에 범자(梵字)를 중앙에, 간지(間地)에는 보상당초문을, 밑에는 앙련(仰蓮)이 배치되었으며, 기대부에는 복련(伏蓮), 용문, 여의두문*, 운문, 당초문 등이 장식되었다. 이러한 향완에는 거의 대부분 명문*이 기록되어 있어 불교공예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에는 드물고 고려시대*에는 많이 제작되었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시대를 통해 변화하지 않고 유행됐으며 조선시대*에서도 향로의 기본형태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