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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착인화

밀착인화 密着印畵

현상된 필름과 같은 크기로 인화하는 것을 일컬음. 밀착인화는 필름 유제면과 인화지 유제면을 마주 대고 밀착인화용 유리로 눌러 노광을 주어 인화를 한다. 35mm필름의 전체적인 사진 내용과 확대할 프레임을 설정하기 위하여 인화를 위한 예비작업으로 밀착인화를 하며, 4×5, 8×10인치 크기의 네거티브 필름은 질이 좋은 인화를 얻기 위해 최종인화로서 밀착인화를 하기도 한다.

밑칠

밑칠 underpainting(영)

유약칠이나 바림, 유화의 물감을 덧바르기 위해 밑바탕 또는 그 색깔 위에 물감의 발색(發色)을 좋게 하려고 일정한 색의 물감을 칠하는 것. 표현하려는 색조를 살리는 색깔을 선택해야 하며 유화에서는 중간색 중 하나를 사용하기도 한다. ‘알라 프리마Alla prima’, 즉 밑칠 없이 한 층의 안료로 회화 표면이 완성되는 방식의 회화가 보편화된 19세기 후반 이전까지는 대부분의 회화가 여러 층으로 되어 있었다.
템페라* 화법에서는 밑그림을 그린 후 흙빛이 도는 초록색 도료 위에 밝은 색부터 덧칠해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을 표현했으며, 이 방법은 특히 14세기 회화에서 흔히 나타난다. 15세기와 16세기초 많은 이탈리아 화가들은 플란더스의 영향을 받아 템페라를 밑칠용으로 사용했다. 18세기의 거의 모든 영국 화가들은 넬러Sir Godfrey Kneller(1646~1723)의 방식대로 중간색으로 밑바탕을 칠한 후, 그 위에 유약, 칠바림 또는 진한 색을 칠해 음영과 부분적인 색을 표현하고 가장 밝은 부분은 두꺼운 임파스토*로 맨 나중에 칠했다. 이때 나중에 칠한 색이 밑칠과 결합해 짙고 선명한 효과를 내기도 했다.
19세기 회화에서는 극단적으로 어두운 색과 밝은 색을 피함으로써 각각의 색이 더 차분해지고 짙어졌다고는 하나 완성작의 색채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이상의 불투명한 물감을 칠하는 방식이 마련되어 밑칠의 색이 어두워졌다. 18~19세기에는 광택이 없는 애벌칠 도료로 종종 수성 물감을 여러 번 덧칠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보통 단색으로 먼저 칠한 후에 덧칠함으로써 밝은 색은 약화되고 어두운 색은 보강되었다.

바니시

바니시 varnish(영) vernis(프)

수지를 휘발성 기름 또는 건성 기름에 용해한 것으로서 용해유(溶解油), 가필유(加筆油), 마무리용의 세 가지 종류로 나뉜다. 첫째 용해유로는 묘화용(描畵用) 바니시가 있으며 그림을 그릴 때 물감에 섞어서 사용한다. 주요한 목적은 그림 물감에 감칠맛을 주어 화면에 물질적인 밀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둘째 가필용 바니시는 그리는 도중에 그림의 일부가 건조되어 상실된 휘도(輝度)를 다시 회복하고자 할 때 사용하며, 비베르 및 뒤로제의 바니시가 유명하다. 셋째 마무리용 바니시는 화면의 보존을 위해 사용하는데, 그림을 완성한 후 일정 기간이 지난 다음 칠해 준다. 이 밖에도 윤기를 지우고 광택 효과를 가라앉히고 싶을 경우에 쓰는 바니시가 있으며, 그 중에서 셀로니스가 대표적이다.

바로크 미술

바로크 미술 Baroque Art(영)

1600년경부터 1750년까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가톨릭 국가에서 발전한 미술 양식. 르네상스 미술*의 단정하고 우아한 고전 양식에 비하여 장식이 지나치고 과장된 건축과 조각에 대한 경멸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바로크라는 단어는 ‘불규칙한’ 혹은 ‘변덕스러운’ ‘현란한’이라는 의미로 통용되기도 하는데 이는 ‘비뚤어진 진주’라는 뜻의 포르투갈어 barroco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과거 예술관계 문헌에서 경멸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로 통용되었던 바로크는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와 뵐플린Heinrich Wölfflin(1864~1945)에 의해 미술사 및 비평용어로 사용되면서 전문적인 용어로 격상되었다. 이후 바로크 미술은 르네상스 미술에 대립하는 개념으로 상정되어 미술사에서 매너리즘*과 로코코 미술*의 사이에 위치하며, 17세기 유럽의 시대정신과 부합하는 외향적이고 격동적인 경향을 일컫는다.
바로크 미술은 전체에 종속되는 부분들의 조화를 통한 균형*을 강조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균형이란 각각으로도 완벽한 부분들이 모여 이루는 전성기 르네상스의 전체적인 균형에 비할 수는 없지만, 매너리즘의 의도적인 부조화나 로코코의 단편성보다는 르네상스의 균형에 가깝다. 바로크가 추구하는 화합은 형식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신체적인 참여를 하게 함으로써 정신적인 참여를 유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바로크 미술은 16세기 르네상스의 조화와 균형, 완결성에 대하여 양감, 광채, 역동성에 호소하였으며 과격한 운동감과 극적인 효과를 특징으로 한다.
바로크 건축에서는 거대한 양식, 곡선의 활용, 자유롭고 유연한 접합 부분 등이 부각된다. 조각에서는 비상(飛翔)하는 듯한 동적인 자세와 다양한 의복의 표현 등이 돋보인다. 대표적인 바로크 조각가는 이탈리아의 베르니니Bernini Gianlorenzo(1598~1680)로 그는 동적이고 환각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성 베드로 성당의 내부 장식을 완성하였다. 한편 바로크 회화는 대각선 구도와 원근법*, 격렬한 명암 대비, 단축법*, 눈속임 기법*의 사용 등을 특징으로 한다. 17세기초 이탈리아의 카라밧지오Caravaggio(1571~1610)가 바로크 회화의 창시자이며, 그의 영향력은 스페인과 북유럽에까지 퍼져 많은 추종자들을 낳았다. 특히 루벤스Pieter Paul Rubens(1577~1640)와 렘브란트Rembrandt(1606~1669)를 배출한 플랑드르와 네덜란드는 바로크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이밖에도 스페인에서는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1599~1660)가, 프랑스에서는 푸생Nicolas Poussin(1594~1665)이 활동하였다.

바르비종파

바르비종파 École de Barbizon(프)

1835~1870년경 파리 근교인 퐁텐블로 숲 외곽의 바르비종에서 머물며 활동했던 일단의 프랑스 풍경화가들을 지칭한다. 루소Théodore Rousseau(1812~1867), 코로Camille Corot(1796~1875), 밀레Jean François Millet(1814~1875), 도비니Charles-François Daubigny(1817~1878), 뒤프레Jules Dupré(1811~1889), 스페인 화가 디아즈Narcisse-Virgile Diaz(1807~1876) 등이 이에 속한다. 그들은 아틀리에*의 실내 제작을 지양하고 직접 자연으로 나아가 그 속에서 풍경을 그렸다. 또한 자연주의*적인 양식을 지향하였으며, 자연에 귀의하여 자연과의 내밀한 교감을 나누고자 했다.
바르비종파 화가들의 자연에 대한 애정은 개인의 관심에 따라 다른 화풍을 띠었다. 예를 들어 코로 같은 작가는 태양광선과 날씨에 따라 미묘하게 변화하는 친근한 풍경을 포착했고, 밀레는 자연과 어우러져 일상적인 노동에 전념하는 농부나 목자를 주제로 삼았다. 바르비종파에서 비롯된 근대 풍경화는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자연관을 거부하고 자연을 직접 관찰하는 사실주의*와 인상주의*로 넘어가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바르후트

바르후트 Bhārhut(범)

중인도 북부 나고드Nagod에 위치한 불교 유적지로서 슝가 시대*의 중요한 스투파*가 남아 있었다. 복발(안다*)은 없어졌고 현재는 울타리(베디카*)와 문(토라나*)의 일부만이 캘커타의 인도 박물관과 미국, 유럽의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문에는 날개 달린 사자가 등을 대고 있는 페르세폴리스*식 주두*, 팔메트* 문양 등 서아시아 기원의 장식 요소들이 혼합적으로 사용되었다. 울타리 기둥에는 약샤와 약시*상들이 조각되었고 울타리에는 그 밖에도 본생담*과 불전을 나타낸 부조*들이 새겨져 있다. 이 부조들은 산치* 제2탑의 조각과 비교해 볼 때 산치보다 늦은 시기의 것으로 여겨지며 약 기원전 100년경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바빌로니아 미술

바빌로니아 미술 Babylonian Art(영)

바빌로니아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발생한 최고(最古)의 문명으로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위치한 현재의 이라크 남부 지방을 가리킨다. 최초의 주민들은 수메르인들로 남아있는 유적들을 보면 예술적인 기량이 뛰어난 민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기원전 3천년 이전부터 문자를 발명하여 그들의 문화와 종교, 예술을 고대 서아시아 전역에 전파하였다.
바빌로니아에서는 예술가와 장인의 구별이 없었고 그들의 기술은 지혜의 여신인 에아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고 여겨졌으며 존경을 받는 존재였다. 기원전 3천년경 바빌로니아의 도기 제작은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르렀으나, 가장 훌륭한 도기는 바빌로니아가 아닌 인접 지역에서 발견된다. 그곳은 재료도 부족하고 문명도 뒤지는 등 여러 가지로 바빌로니아보다 미개한 지역이었지만, 아시리아의 아르파시야와 이란의 수사에서 출토된 도자기는 모양도 아름답고 채색 장식의 취향과 기술도 뛰어나다.
바빌로니아의 건축에는 진흙과 짚으로 만든 벽돌과 삼목이 주재료로 사용되었다. 궁전이나 신전의 외벽은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되었으나, 내구성이 없는 진흙 벽돌로만 되어 있어 오래가지 못했다. 때로는 구워낸 벽돌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내구성이 없는 자재를 사용했기 때문에 바빌론의 건축물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바빌론 건축의 특징적인 요소는 약간 튀어나온 버팀벽이 달린 정면과 계단을 쌓거나 삼각형 모양으로 된 수직의 수로이다. 또한 가장 독특한 건축물은 지구라트*라는 거대한 계단식 탑이다. 이것은 모든 주요 신전에 필수적인 것이었는데, 거대한 진흙 벽돌을 층층이 올라갈수록 점점 작아지게 쌓고 꼭대기에는 성전을 만들어 바깥 계단으로 가게 되어 있다.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한 기원전 2500년경에는 팔짱을 낀 자세의 자연스러운 환조 석회상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특히 아시리아 돌공예의 진정한 매체는 저부조이다. 벽화와 함께 발달된 부조는 채색이 되어 있으며 입체적 효과를 덧붙인 좀더 정교한 벽화의 변형이다. 한편 벽화는 고운 바탕의 흰색 석고벽에 검은 색으로 윤곽을 그린 다음 적색과 흑색으로 칠했으며 청색과 황색, 녹색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였다. 벽화는 전형적인 왕실 의식, 제사, 서임식, 사자 사냥 장면 등을 묘사한 것으로, 부조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습에 따라 머리와 다리는 옆모습, 몸통은 앞모습이며 눈은 보통 앞을 바라보고 있다.
바빌로니아 고유의 특징적인 조각은 매우 단단한 돌로 만든 작은 원통형 도장에 무늬를 조각한 미니어처*이다. 기원전 5000~3000년 사이에 거의 보편적으로 사용된 이 도장은 서아시아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발달 순서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장 뛰어난 작품들은 아카드 시대에 제작된 것들이다. 그 외에도 조개나 유리, 돌, 상아로 모양을 만들고 조각을 해서 큰 작품을 장식하거나 모자이크* 조각으로 사용했다. 동이 사용된 예는 유사 이전에도 많이 발견되었으나 많은 양을 사용하고 또 장식용으로 금속을 쓴 것은 바빌로니아인들이 최초였다. 그들은 금, 은, 동, 청동으로 작품을 제작했으며 청동 적조물로 신전이나 궁전 입구에 괴물상을 만들어 세우기도 하였다.
한편 수메르와 아카드 시대 이후의 바빌로니아 미술은 바빌로니아의 역사적 발전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세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①기원전 2천년 전반에 해당하는 고(古)바빌로니아 시대에는 신전보다 궁전이나 주거 건축이 중시되면서 지무리 림의 대규모 궁전을 비롯해 라르사, 우르크 등에 많은 궁전이 만들어졌다. 미술은 수메르 미술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사실적이고 강건한 셈 민족의 고유성을 반영하였다. 함무라비 법전비(碑)의 부조나 마리에서 출토된 아리발로스를 쥔 여신상 등이 유명하다. 특히 이 세대를 특징짓는 것은 테라코타*로 제작된 남성상과 신상, 동물상, 예배자상이다. 회화로는 왕권신수(王權神授), 공희(供犧) 장면 등이 그려진 마리 왕궁의 벽화가 대표적이다.
②제2세대에 해당하는 중(中)바빌로니아 시대(기원전 2천년 후반)의 유적으로는 지구라트가 있으나, 이 때는 바빌로니아에서 문화가 가장 쇠퇴한 시기였다. ③아시리아를 정복하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까지 지배했던 신(新)바빌로니아 시대(기원전 1천년 전반)에는 바벨탑이나 공중정원과 같은 뛰어난 기량의 건축물들이 제작되었으며 이것들은 아직까지도 고대 불가사의로 남아있다.

바실리카

바실리카 basilica(라)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에 재판소나 집회장, 시장, 관공서, 지붕이 있는 야외극장 등 상업적 용도보다는 공공의 목적으로 사용된 대규모 건물을 지칭한다. 그러나 점차 장방형의 회당이라는 특정 형태를 취한 건축을 지칭하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 신전을 로마식으로 발전시킨 형식이며 그리스 신전보다 내부 공간이 넓다. 바실리카라는 명칭도 ‘왕족의’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나온 것이며,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바실리카는 폼페이에 있다.
그러나 최초의 바실리카라고 알려진 것은 기원전 2세기초 로마에 건설된 건물들로서, 중앙의 넓은 복도를 열주*랑으로 둘러싸고 천장을 높게 해서 창문을 달았고, 개방된 주랑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포르 로마노가 이에 해당한다. 바실리카의 한쪽 끝 혹은 양쪽 끝에는 집정관이나 제정자가 앉을 수 있는 자리에 해당하는 애프스*가 있고, 그 앞에는 희생단이 놓였다. 이런 형태의 바실리카는 로마 제정 초기에 지중해 중심과 동부의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또한 1세기 후반 로마의 궁정에서 볼 수 있는 긴 측랑과 동쪽 끝에 애프스가 있는 집회실을 일컬어 바실리카라고 하기도 했고, 아무 장식도 없는 장방형의 집회장을 포함해서 여러 형태의 공공 건물을 지칭하기도 했다.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식으로 인정한 312년 이후에 바실리카는 기독교 의식을 공적으로 치를 수 있는 교회 건물로 사용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는 교회법에 따라 역사가 오래되거나 위대한 성인 또는 역사적 사건 등과 관련되어 국제적으로 예배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는 특정 교회 건물에 바실리카라는 명칭을 부여한다. 이에 따라 바실리카라는 이름이 붙은 교회는 교황과 추기경, 총대주교를 위해 대제단을 보유할 수 있는 권리와 특별사면권 등 특별한 권한을 지닌다. 한편 4세기경의 문헌에서는 콘스탄틴 대제 시대의 교회 뿐만 아니라 다양한 건축 양식에 바실리카라는 명칭이 나타나 있는데, 다수의 사람들을 수용하는 커다란 홀이나 혹은 로마 주택에서 열주가 있는 큰 방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처럼 대체로 바실리카라는 용어는 특정한 건축 유형을 칭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의 용도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바우하우스

바우하우스 Bauhaus(독)

1919년 건축가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1883~1969)가 바이마르에 설립한 건축, 공예, 디자인 등의 종합예술학교. 바우하우스는 독일어로 ‘건축가의 집’이라는 뜻이며 건축을 주축으로 하여 기능적이고 합목적적인 새로운 미를 추구하였다. ‘종합 예술(Gesamtkunst)’ 개념을 통하여 각 예술 영역 간의 상호교류를 강조하였고, 미술과 기술의 종합을 통해 현대 예술을 부흥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파이닝거Lyonel Feininger(1871~1956), 클레Paul Klee(1879~1940), 이텐Johannes Itten(1888~1967), 앨버스Josef Albers(1888~1976), 슐레머Oskar Schlemmer(1889~1943),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 등 교수진이 여러 분야에 걸쳐 망라되어 있었으며 인재들도 많이 배출하였다. 학위를 얻으려면 6개월간의 예비 과정을 거친 다음, 특정 공예 분야에서 3년의 도제 훈련을 받고 건축 분야에서 일정 기간의 연구를 마쳐야 했다.
바우하우스 교육은 이론과 실제를 병행함으로써 일상생활의 기능성과 밀착된 합리적이고 유용한 미술을 창조하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바우하우스는 기계에 의거한 대량 생산을 적극적으로 고취함으로써 숙련된 기술의 디자인을 근대 산업 기술과 조화시키려 시도하였다. 1925년 데사우로 이전하면서 기능주의*의 개념이 부활하였다. 즉 모든 창조는 유용해야 하며 가장 현대적인 기술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로피우스에 이어 교장이 된 마이어Hannes Meyer(1889~1954)는 산업과 미술의 결합에 한층 역점을 두어 기능주의를 넘어 사회주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는 형식주의에 빠져버린 바우하우스의 조형감각을 경고하면서 바우하우스는 예술이 아닌 사회적 현상이며 디자이너의 창조적 활동은 사회와 민중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이후 미스 반 데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1886~1969)가 교장으로 역임하였으나, 주(州)정부의 압력을 받아 1932년에 베를린으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33년 나치에 의해 ‘문화 볼셰비즘의 소굴’로 간주되면서 완전 폐쇄되었고, 바우하우스의 멤버들은 파리와 런던, 미국 등지로 망명하여 바우하우스의 사상을 세계적으로 퍼뜨렸다. 한 예로 그로피우스는 1937년 시카고에 뉴 바우하우스*를 설립하였다. 1920년대 건축과 디자인 분야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바우하우스는 국제적 양식 창출에 공헌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바이오모픽 아트

바이오모픽 아트 biomorphic art(영)

생명형태적 혹은 생물형상적 미술로서, 특히 자연에서 발견되는 현상들에 기초를 둔 불규칙하고 우연한 형태에 근거한 추상 미술을 가리킨다. 기하학적 추상*과 더불어 대표적인 추상 미술의 한 형식으로 손꼽힌다. 루시-스미스Edward Lucie-Smith의 정의에 의하면 ‘바이오모픽’이란 자연 속에서 보여지는 형태들에 근거를 두고 있는 불규칙한 추상 형태들을 포함한다. 주로 꽃이나 식물, 남성과 여성의 성기(性器) 및 생명체 혹은 생명 현상과 연관된 모티브*를 사용하는 유기체적인(organic) 양식이다.
1930년대에는 기하 추상이 퇴조하면서 비(非)기하학적인 바이오모픽 회화가 부각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1920년대에 인간이나 생명을 지닌 유기체, 신화의 세계 등을 탐구했던 초현실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물형태주의는 아르프Jean Arp(1887~1966), 미로Joan Miró(1893~1983), 고르키Ashile Gorky(1904~1948)와 같은 초현실주의 작가뿐만 아니라 자연 특유의 생명력에 고무된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와 레제Fernand Léger(1881~1955), 칼더Alexander Calder(1898~1976) 등의 작품 속에도 반영되었다. 바이오모픽 아트는 엄격한 기하 추상을 탈피하여 유기적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고 그것을 예술로 승화하는데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