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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미술

로마 미술 Roman Art(영)

기원전 8~4세기 약 1100년 사이에 로마인들이 지배했던 지역의 미술. 이 지배지역은 도시국가로서의 로마로부터 지중해역과 서유럽 거의를 차지한 로마 제국까지 커다란 변천으로 이루어졌다. 기원전 8~4세기 초반(왕정시대~공화정치체제 전기)에 걸쳐 이탈리아 중부 지역의 일개 도시국가에 불과한 로마의 미술은 에트루스크 미술의 영향이 강하여 거꾸로 구분을 짓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로마인의 최고신 주피터Jupiter의 신전을 웨이이 출신의 우르카에게 장식시켰던 것을 두 문명간의 영향관계의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에서는 이미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도시로부터 직접 그리스 미술*의 영향이 있었다는 사실도 증명되고 있다. 이에 뒤이은 제2포에니전쟁 종결(기원전 201)까지의 시대는 경제적 기반의 변천이라는 필연성에 근거한 영토확장 추진으로 인한 실질적인 윤리성의 확립과, 이미 충분히 발달한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미술과의 직접적인 접촉에 의해서, 미술에서도 고유의 자연주의와 그리스로부터 들어온 고전주의가 병존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 후의 로마 미술 전개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과제가 되었다.
제2, 제3의 양 포에니 전쟁간의 약 반세기 동안은 로마가 동 지중해의 그리스 미술과 상접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 미술가들이 로마로 이주하기 시작하는 계기를 마련한 기간이었다. 그리스의 사상이 로마의 종교나 윤리관에도 영향을 미쳐 완결성을 지닌 세계관과 그 조형 표현의 고전주의가 로마 미술에 본질적으로 작용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그 예로는 조상숭배를 축으로 한 초상조각이며 전통적 종교관의 변질에 반발하여 매우 사실적인 표현으로 공화정의 초상 조각이 많이 제작되었다. <카피톨리노의 브루투스상>은 이러한 맥락 속에 위치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공화정 후기는 그리스 고전미술에 대한 동경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영향이 지대하였다. 로마에서는 고전 미술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없었어도 그리스인 미술가들의 활약에 의해서 헤르모도로스Hermodoros의 대리석 신전이나 티마르키데스Timarchides의 조각 등을 비롯해 수많은 고전주의 작품들을 볼 수 있었고, 그것이 그대로 로마 미술에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폼페이우스Pompeius Magnus와 술라Lucius Cornellius Sulla, 그리고 시저Caesar의 활약은 헬레니즘 왕국의 완전 지배와 그것을 능가할 도시 로마의 건설에 이르게 되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시저의 위업을 계승하면서 아그리파Marcus Vipsanius Agrippa와 더불어 제국관(帝國觀)의 구상으로 고전주의 미술을 채용하였다. <아라 파키스>,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상>, 콘코르디아 신전이 제정 초기의 로마 미술 양상을 특징짓는다. 대도시로 성장한 로마를 구성하고 거기에 내재하는 다양한 요소와 가치관 중에서 본질적인 활동 기반을 상실하고 교양주의화했던 네오 아티카주의 미술이 이러한 사회적 조건을 배경으로 해서 보급되어 나갔다. 콘크리트 공법과 벽돌을 대건축에도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 본질적인 벽 구조에 의해 석조 건축을 전제로 하는 그리스 건축의 주식*은 그 구조성으로부터 해방되어 더욱 자유로운 건축 장식의 요소가 되었다. 또한 도시 건축에 있어서 방향성을 포기한 신전을 그 내부 공간에서의 종교적 분위기를 의축(擬縮)하도록 의도하였다. 장대하고 호화로운 공공건축들 중 높이를 더욱 강조하여 개선문*이나 기념 원주* 등 새로운 건축의 장르를 낳게 되었다.
헬레니즘 미술*의 개인주의와 귀족성은 로마 사회 안에서 더욱 발전하여 개인 주택의 미술관화(化)와 미술에 대한 취미의 다양화로 향하게 되었으며, 주택 내부는 벽화로 장식되고 헬레니즘 회화나 조각이 모사되었다. 그 다양성 중에서 구하게 된 공통 가치가 공예품의 기법이나 재질에도 나타나, 두들겨서 밖으로 장식이 표출되도록 세공한 금속기, 카메오 세공에 의한 장신구나 글라스, 음각에 의한 귀석 장식품 등 헬레니즘 공예를 본질적으로 계승하면서도 그 레퍼토리를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 또한 아레초 토기 등을 새로 만들어 값싼 로마 글라스의 제법을 발명하는 등 일용품도 크게 향상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발전을 지탱시킨 것은 도시 문명을 중심으로 한 로마 경제의 확대로서, 도시 생활자들 간의 유행도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던 것에서 연유되었다.
회화는 건축 내부 공간의 성격에 종속되었기 때문에 회화 공간은 스케노그라피아에서 비롯된 ‘고대 원근법’과 ‘콤펜디아리아’로 호칭되었던 묘사법으로 표현되어 분위기나 환경과의 일치를 도모하게 되었다. 따라서 전통적인 신화화도 신화적인 풍경화로 변천되었다.
조각에서도 같은 추이를 나타내어 네오 아티카 양식의 보급은 엄격 양식, 고전 양식, 헬레니즘 양식들의 조각작품에서조차 그것들을 모방하는 과정에서, 오리지널 작품이 원래 갖고 있는 내용을 제거해버리고 로마 사회 내로 적응토록 하는데 성공하였다. 특히 폴리클레이토스Polykleitos 작품의 모조 조각은 광대한 로마 제국 전역으로 확산 보급되었다. 이 미술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 속에서 더욱 객관적인 표현 방법이 황제의 사적을 기념하는 역사적 부조*에 요구되었다. 공화정기의 개선화에서 유래하는 이러한 부조의 장르는 고전주의 미술환경 안에서 초월성을 지향하게 되었으며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자연주의를 재발견하기에 이르렀다.
로마 미술은 도시 로마의 발전과 깊은 관련을 가지며 그 발전 과정을 포메리움의 확대에서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원래 새점(鳥占)을 치는 성역으로 규정되었던 포메리움은 시가구역으로 성격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동심원꼴로 확대되어 나갔다. 이는 종교적, 사회적 측면을 지닌 도시계획이었으며 이로 인해 습지에 불과했던 캄프스 마리티우스도 포로 로마노 주변에 뒤떨어지지 않는 공공건축의 집중 지역이 되었다. 같은 전통을 갖는 동방 속주의 제도시는 로마 도시처럼 급성장에 따른 확장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으므로 옛 건물의 재건으로 시대의 변화에 순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도시가 존재하지 않았던 북아프리카나 서구에서는 경제상의 발전에 상응하는 계획도시가 건설되어 포룸(공공 광장)을 중심으로 한 격자꼴의 계획도시가 출현하기에 이르렀다.
도시 건축의 확립에 중요한 몫을 담당한 것은 네로 황제가 세운 도무스* 아우레아였다. 그 이전까지는 공공 욕장 등 외에는 사용되지 않았던 돔* 건축이 궁전에도 채용되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판테온에서 완성되었다. 고대 건축에 있어서는 이처럼 세속 건축의 형식과 공법이 종교 건축에 채택되는 일이 매우 드문데 이러한 적용이 이 시대에 일어났던 것은 종교와 세속 양축의 권위자로서 황제의 존재가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도무스 아루레아는 밀도가 고도화된 도시 내에서 광대한 정원을 갖춘 별장 건축이었으나 고밀도화된 도시에 적응하지 못하여 네로의 사후에는 공공 욕장으로 개축되었다.
프라비우스 조 미술에 있어서 자연주의와 채색주의는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에 이르러 더욱 견고해졌다. 트라야누스 황제의 기념 원주의 부조는 각선을 많이 사용한 저부조로서 거기에는 사실적인 자연주의에 의한 전쟁 묘사가 객관적 표현으로 명확히 나타나 있다. 자연주의의 대두는 하드리아누스 시대에 들어와 일시 중단상태를 맞게 된다. 그의 제국관은 특색이 있는 각 속주의 발전에 기초가 두어져서 그 독자성을 포섭한 제국을 건설하려 하였던 것이었다. 따라서 그 공적 기념 미술에는 고전주의의 부흥이 엿보이는 반면, 속주에 대두되는 건축활동의 활성화는 동방과 북아프리카, 유럽의 각 속주에서 상이한 건축양식으로 각기 전개하게 되었다. 이 고전주의의 부흥이 단명으로 끝난 후, 2세기 후반의 안토니누스 피네스 황제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에는 다시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의 자연주의가 나타나나, 객관적 사실적인 자연주의에 의한 표현과 내용 사이에는 변경(邊境)에서의 만족(蠻族) 문제와 경제적 침체에 의한 사회적 불안에 기인되는 괴리(乖離)가 생겨났다. 그때문에 자연에 존재하고 있었던 조화가 상실되고 표현요소는 과장되어서 표현주의*적 경향이 짙어졌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념원주 부조에서는 이미 인물상은 형태력을 잃고 서술성에 종속되어 있다. 또한 콘모두스 황제가 네로 황제의 거상을 자신의 상으로 개조한 배경에는 2세기 말의 미술적인 배경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3세기 전반 세베우스조 시대의 미술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진전시키고 있으나, 그 기반에는 미트라스교를 비속해 동방 종교의 유행과 사회적 불안, 각 속주의 도시 로마에 대한 상대적인 대두가 있었다. 갈로 로망 미술의 토착적 요소의 현재화(顯在化), 북아프리카에서의 대토지 소유층이 지지한 모자이크*와 동방 속주의 바로크적 경향의 진전이 로마 미술의 큰 특징으로 되었고 도시 로마의 미술 활동은 그들과 동일한 수준으로 되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건설한 스프리트(스파라툼)의 별궁은 형태가 해체된 고전성과, 그것으로 인한 거대성 지향 속에서 생겨난 것으로 당시의 수많은 황제 초상의 거대성과 과장된 위엄성이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한 쪽에서 <성 헬레나의 석관>(336~350경)처럼 서술성으로 추상화한 단순 형태에 의한 상징화와, <루도미시의 대석관>처럼 표현 대상을 형태나 구조의 복잡화로 처리한다는 양극화를 진전시켰다. 막센티우스 황제와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에 막센티우스의 바실리카*와 같은 대건축이 건설되는 한편,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과 같이 그 부조 패널을 현재 시대의 모뉴먼트*로부터 전용(轉用)에 의지한 모뉴먼트가 출현하였다. 그로 인해 시대와 사회를 배경으로 한 참된 창조력의 쇠퇴가 현저하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 미술은 그 형태 어휘를 초기 기독교 미술*과 비잔틴 미술*에 전하여 그들의 표현 범위에 큰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