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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상주의

신인상주의 新印象主義
Néo-Impressionsme(프)

19세기말에 프랑스에서 쇠라Georges Seurat(1859~1891)와 시냑Paul Signac(1863~1935) 등을 중심으로 행해진 점묘주의* 이론이자 운동. ‘신인상주의’라는 용어는 인상주의*의 기법을 과학적으로 더욱 발전시키고 동시에 인상주의의 경험적 사실주의에 반발하여 고전주의*적 정신의 부활을 꾀한다는 기치 하에 쇠라가 1884년 5월의 앙데팡당전*에 출품한 <아스니에르에서의 목욕Baignade à Asniéres>을 보고 비평가 페네옹Félix Fénéon이 붙인 것이다. 당시 25세였던 쇠라는 여기서 후에 이 운동의 이론적 대변자 역할을 한 시냑을 만나 ‘앙데팡당 미술가 협회’라는 새로운 그룹을 만들었고, 22세의 젊은 비평가 페네옹은 같은 해 이 운동을 돕기 위해 《르뷔 앙데팡당Revue Indépendante》을 창간했다.
1885년에는 시냑이 피사로Camille Pissaro(1830~1903)를 운동에 참가시켰으며, 크로스Henri-Edmond Cross(1856~1910), 루스Maximilien Luce, 뒤부아-피에Albert Dubois-Pillet(1845~1890) 등이 뒤를 이었다.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 툴루즈-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1864~1901), 고갱Paul Gaugain(1848~1903) 등도 영향을 받아 한때 신인상주의적인 작업을 했다.
점묘주의 혹은 분할주의*는 신인상주의가 사용하는 독창적인 테크닉의 기반을 이루는 것으로서, 캔버스*에 색칠을 할 때 순색(純色)만을 사용하되 이를 일체 팔레트*에서 뒤섞지 않고 작은 점으로 찍어나가는 방법을 말한다. 이 경우 색조의 순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보는 이의 망막에서 중간색이 형성되므로 더욱 강렬하고 밝은 색채 효과를 거두게 된다.
사실 이런 방법은 와토Jean Antoine Watteau(1684~1721), 들라크루아Ferdinand Victor Eugène Delacroix(1798~1863),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1775~1851) 등이 이미 사용하였다. 인상주의자 중에서는 르누아르 Auguste Renoir(1841~1919)가 최초로 실행했고 헬름홀츠Herman von Helmholtz, 후드O.N. Hood, 쉬브렐Michel-Eugène Chevreul 등의 색 이론에 친숙하던 모네Claude Monet(1840~1926)는 상당히 체계적으로 사용했으며 점묘주의라는 말 역시 르누아르와 모네에 관련되어 쓰이고 있었다. 따라서 신인상주의자들은 단순하고 직관적인 점묘와 자신들의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점묘를 구별하고자 하였으며 ‘분할주의Divisionnisme’라는 용어를 선호하였다.
시냑은 1899년 《라 르뷔 블랑시》에 발표한 ‘외젠 들라크루와에서부터 신인상주의에 이르기까지’에서 터치의 체계적인 분할에 의거한 분할 묘법을 설명하였다. 그에 따르면 분할묘법은 비잔틴 모자이크*의 작은 입방체들과 다를 것이 없는 단순한 점묘법*(pointillisme)과는 구별되는 것이어서 ‘분할한다는 것은 ①순수한 물감들(프리즘의 모든 색상과 모든 색조)의 시각적 혼합 ②각기 다른 요소들의 분리(고유색, 광선의 색깔 및 그 반사 등) ③각 요소들 간의 균형 및 비례(콘트라스트, 점차적인 변화 및 분산 등의 법칙에 의해) ④화폭의 크기에 알맞은 터치의 선택 등의 수단에 의해 밝은 빛, 화려한 색채 및 하모니의 이점을 최대한 살리는 것’을 말한다.
1886년 이후 쇠라와 그의 동료들은 젊은 과학자이자 미학자인 앙리Charles Henry와 쉬브렐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추종했다. 앙리는 1885년 《과학적 미학 입문》에서 세련된 이론을 선보였으며, 1889년 재편집된 쉬브렐의 《동시적인 대비의 법칙에 관하여》는 이들에게 거의 교과서적인 저작이었다.
1886년 5월에 쇠라는 제8회이자 마지막 <인상주의자 전시회>에 신인상주의의 회화적 선언인 <라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를 출품하였다. 질서정연한 기하학적 구조 안에서 작은 점들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르네상스 원근법*의 고전적 전통, 고전주의*의 엄숙한 질서, 빛과 색채 그리고 형태에 대한 현대적인 관심을 종합한 것이다. 1887년부터 1891년 사이 쇠라는 과학적 이론들을 표현적이고 정서적인 선과 색조로 환원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해 나가면서 전통적인 아카데미* 이론과의 접목을 시도하기도 한다.
회화적인 여러 요소들의 과학적 배치가 정서나 정조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믿음은 푸생에 의해 일찍이 표명된 바 있으며, 후일 아카데미의 기본학설로 받아들여지면서 르브룅Charles Lebrun(1619~1690), 펠리비앙André Félibien des Avaux(1619~1695)에 의해 유행되었다. 색채분할 등 인상주의의 기법을 더욱 체계화시키는 동시에 신인상주의자들은 인상주의의 경험주의적 사실주의에 정면으로 대비되는 정신, 즉 그림이란 신중하게 고려되고 계획될 수 있으며 과학적으로 계산된 효과가 예견되고 지향될 수 있다는 사고를 도입했다. 쇠라가 현대 회화의 혁신적인 인물로 인정받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