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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경산수화

실경산수화 實景山水畵

우리나라의 자연경관과 명소를 소재로 그린 산수화*. 조선후기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와 비교할 때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 중기에 걸쳐 실용적 목적으로 제작된 실경화들을 주로 지칭한다. 실경산수화는 고려시대에 전공지田拱之의 〈제주도〉(1007) 〈서산도瑞山圖〉를 비롯해 중국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던 이녕李寧의 〈예성강도〉 〈천수사남문도天壽寺南門圖〉 등이 제작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 초기로 이어져 내려와 명승명소(名勝名所), 별서유거(別墅幽居), 야외아집(野外雅集) 등과 같은 유형의 회화를 형성하면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명승명소를 소재로 한 실경산수화는 중국 황실과 사신들의 선물용으로 빈번하게 제작된 〈금강산도金剛山圖〉가 주종을 이루었으며 〈신도팔경도新都八景圖〉 〈한강도漢江圖〉 등과 같이 새로운 도읍지인 한양 근처의 명소들을 비롯해 지방관으로 부임했던 임지 근처의 특별히 좋은 경치들과 명산대첩의 절경들도 많이 그려졌다.
별서유거의 실경산수화는 왕유王維(우앙 웨이, 699~759)의 〈망천도輞川圖〉와 주자(朱子)의 유거지를 그린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등의 영향을 받아 사대부들이 자연을 벗삼아 전원생활을 즐기고 인격을 함양하던 처소나 별장 주위의 실경들을 선양하기 위해서 그린 것인데, 후손과 후학들이 정신적 고향으로 추앙하여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별서유거도 계열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중인층 여항문인(閭巷文人)들에까지 파급되었다.
야외아집류의 실경산수화는 사대부들이 동료들과 함께 경치 좋은 장소에 모여 시와 술을 즐기며 친목을 도모하던 광경을 그림으로 기록해 길이 되새기기 위하여 제작된 것으로 실경풍속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고려에서 조선중기까지 실경산수를 그린 작가로는 이녕을 비롯해 최경崔涇, 배련裵連, 안귀생安貴生, 이신흠李信欽, 이징李澄(1581~?), 김명국金明國(1600~?), 한시각韓時覺(1621~?), 조세걸曺世傑 등 모두가 화원이었으며, 조선중기부터 김시金禔(1524~1593), 이경윤李慶胤(1545~?), 조속趙涑(1595~1688)과 같은 문인화가들도 그리기 시작했다. 화폭은 현재 전하는 작품이 매우 드물어서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힘들지만 기록적이고 기념적인 제작의도를 구현하기 위한 화면구성의 토대 위에 동시대 정형산수화풍의 영향을 수용하며 전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실경산수화는 17세기 후반경에 이르러 점차 문인화* 이념 등이 가미되고 남종화*법의 영향이 커지면서 진경산수화풍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현존하는 대표적인 실경산수화로는 작자미상의 <관서명구첩關西名區帖>, 이신흠의 〈사천장팔경도斜川莊八景圖〉, 조세걸의 <곡운구곡도첩谷雲九曲圖帖>, 한시각의 〈북관실경도北關實景圖〉, 작자미상의 〈함흥십경도咸興十景圖〉 등이 있다. 이러한 18~19세기 전반의 실경산수화는 당시 한국적인 화풍으로 부상했던 풍속화와 함께 조선 말기에 들어서면서 쇠잔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