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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백자

조선백자 朝鮮白磁

연질백자는 신라 말기에 경기도 용인군龍仁郡 이동면二東面 서리西里에서 청자*와 같이 만들어졌고 고려 초기부터는 햇무리굽 백자*가 소량 제작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추부백자(樞府白磁)의 등장과 함께 14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기벽과 유약이 두텁고 표면이 단단한 경질백자를 제작하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백자가 매우 성행해 국초부터 백자의 생산과 관리에 힘을 기울여 독특한 발전을 보였다.
조선백자는 경기도의 광주廣州와 관악산, 북한산 등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점차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광주요*는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으로 중앙관요였고 조선 백자가마의 핵심이었다. 광주요에서 주로 제작된 상품(上品)백자는 우수한 태토와 유약을 사용하고 갑발*(匣鉢)에 넣어 제작돼 형태와 색이 아주 우수한 것으로 ‘갑번(甲燔)’이라고 불렀으며 주로 왕실용이었다.
상품백자의 가마는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따르면, 경기도 광주요 중의 번천리樊川里 가마와 경북 상주군尙州郡 북추현리北楸縣里, 이미외리已未常里, 경남 고령군高靈郡 예현리曳峴里 등 4개소에 있었다고 한다. 조선전기의 백자는 빙렬*이 거의 없고 유약이 약간 두껍게 시유되고 은은한 광택에 약간의 푸른빛을 머금고 있다.
코발트 안료로 백자에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靑華白磁)는 15세기 중엽에 토청(土靑)이 개발되자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으로 백자의 제작이 위축되었다가 17세기에는 백자의 발색이 회백색이 되고 생산이 비교적 저조해진 반면 청화백자가 전에 비해 제작이 늘어나 절정기를 이루며 한국적인 익살스러운 문양이 나타난다. 18세기들어 유태가 맑고 투명해지면서 푸른 기가 약간 도는 청백색이 되고 청화백자의 생산이 다시 활발해지는데 패랭이꽃이나 난초 같은 한국적인 정취를 보여주는 문양이 특징적이다.
또한 백자가 다양화되기 시작하여 백자 제기(祭器)와 문방구 등이 제작되었다. 1752년에 관요*가 광주의 분원리分院里로 이전하면서부터 1883년 민영화되는 시기에 백자가 대중화되었다. 이 때 민화*풍의 문양과 대담한 기형이 나타나며 다양한 일상용기가 제작된다. 19세기에 이르면 다양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수요층이 다양해지면서 그릇의 격조가 떨어진다. 조선시대 백자의 특징은 달항아리에서 보듯이 기형이 원만하고 유연하면서 절제된 선을 지녔다. 실용적이고 기능적이라는 점과 단순간결하면서도 익살스러운 문양이 조선 백자의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