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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주의 선언

미래주의 선언 未來主義宣言 Manifesto of Futurist(영)

→ ‘미래주의’ 참조

미륵보살

미륵보살 彌勒菩薩 Maitreya(범)

석존 다음으로 부처가 될 보살 즉 미래불. 미륵은 친우를 뜻하는 미트라(mitra)로부터 파생한 ‘maitreya’를 음역한 것으로, ‘자씨(慈氏)’라고 의역되며 ‘매황려야梅喤麗耶’ 혹은 ‘자씨보살’로도 불린다. 원래는 유가유식학을 체계화한 실재했던 인도의 학승이었는데 법상종의 교조로 신비화되어 보살로 변신한 것이다. 석가불을 계승할 미래불로서, 《미륵하생성불경彌勒下生成佛經》 《석가보釋迦譜》 《대지도론大智度論》 등에는 미륵이 인도의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가정에서 태어나 수도하였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은 뒤 도솔천에 올라가 천인(天人)들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미륵보살은 미래불이 나타나서 석가모니가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들을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사상이 싹틈에 따라 등장하였다. 미래불인 미륵보살이 등장하면서 도솔천이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 불교의 이상세계인 극락과 같은 비중을 차지하는 불국정토가 되었다. 중국의 남북조(南北朝)시대에는 보살의 형태로 다리를 교차시켜 서있는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운강석굴*의 ‘담요오굴曇曜五窟’ 가운데 제 18, 19, 20굴은 모두 미륵, 연등(燃燈) 그리고 현세(現世)의 삼세불형식을 위주로 하는 반면 제17굴의 주상(主像)만이 보살의 복장을 한 미륵교각상이다. 한국에서 삼국시대에 미륵반가사유상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반가사유상*은 미륵보살이 이 도솔천에 머무르다 다시 태어날 때까지의 기간에 먼 미래를 생각하며 생각에 잠겨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미법산수

미법산수 米法山水

중국 북송北宋 때의 문인화가인 미불米芾(미 후, 1051~1107), 미우인米友仁(미 이어우르언) 등의 미파米派 화가들이 주로 그린 산수화*. 점을 여러 번 겹쳐 찍어서 형태를 표현하는 미점준(米點皴)을 구사하여 부드러운 곡선의 흙산이나 멀리 보이는 나무 등을 즐겨 그렸다. 특히 미점준은 비온 뒤나 짙은 안개가 낀 습윤한 자연경관을 그릴 때 많이 사용되었다. 이 미법산수는 원元나라 때의 고극공高克恭(까우 커꿍) 이후 명, 청대(明淸代)의 문인들이 즐겨 사용하였다. 한국에서는 조선 초기의 이장손李長孫, 서문보徐文寶를 비롯해 중기의 이정근李正根 등 도화서 화원들에게 전해졌으며, 후기에는 남종화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서 허련許鍊과 같은 문인화가들에 의해 널리 채택되었다.

미술계파

미술계파 美術界派 Mir Iskusstva(러)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걸쳐 일어난 러시아의 미술 운동.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1872~1929), 브노와Alexandre Benoia, 바크스트Léon Bakst(1866~1925), 뢰리히Nikolai Roerich, 골로빈Alexandre Golovine 등을 중심으로 이동파移動派의 교의(敎義)에 반항하였다. 자연의 모방보다는 자연의 해석이 훨씬 중요하다고 주장하였고, ‘예술을 위한 예술’을 기치로 내세웠다. 특히 장식미술* 분야에서 두각을 보였으며 무대미술*, 벽화*, 서적의 삽화 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미술과 공예 운동

미술과 공예 운동 Arts and Crafts Movement(영)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모리스William Morris(1834~1896)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공예 개량 운동. 1851년 대전시회 이후 영국에서 제조상품의 질에 대해 불만의 소리가 높아지고, 민속 예술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면서 제품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중세 장인들의 사회적 제도에 대한 향수 어린 관심을 갖게 된 데서 비롯하였다. 19세기말의 유럽 공예는 로코코식, 바로크식 등의 양식을 되풀이하는, 즉 위에서 밑으로 흐르는 특수 계급을 위한 공예가 조류였다. 또 한편으로는 기계 문명의 이용으로 말미암아 조잡한 상품이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러스킨John Ruskin(1819~1900)과 모리스 등은 그러한 공예를 배척 또는 개혁하여 고딕*의 미를 찬양하였고, 수공예를 존중하여 중세의 공장 길드(guild)로 되돌아가 예술활동과 노동을 일치시킴으로써 이상사회를 만들어보려고 하였다. 모리스는 자신의 집 건축과 가구에서, 그리고 1861년 모리스 마샬 앤드 폼커 회사를 통해 수공직물, 직조, 가구 등을 생산함으로써 기계시대에 수공업의 부활을 꾀하였다.
그러나 예술작품은 도덕적인 개념의 산물이며, 따라서 도덕 관념이 없는 기계는 예술을 생산해 낼 수 없다는 러스킨의 생각과는 달리 모리스는 완전히 기계를 배척하지는 않았다. 1860년 이후 모리스의 이러한 혁신 운동은 많은 건축가와 공예가들의 호응을 받았으며, 1880년대에 들어와서는 공예기술의 향상을 위해 ‘센추리 길드’ ‘아트 워커스 길드’ ‘공예전람협회’ 등의 단체가 조직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러스킨과 모리스의 미술과 공예운동은 공예를 사회 대중화하고 수공예를 존중하여 직인(職人)을 예술가로 끌어올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은 그들의 이상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 대신 프랑스의 아르 누보*, 오스트리아의 분리파* 운동으로 옮겨갔으며, 특히 바우하우스*의 설립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미술과 언어

미술과 언어 Art and Language, A&L(영)

제2차세계대전 이후 영미의 분석 철학과 그 방법론에 입각한 미학의 전개와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의 영향을 받아 1968년 영국에서 결성된 그룹. 미술과 언어는 일차적인 매체로 언어를 선택하고 손으로 만든 완성품을 거부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은 예술가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알리는 개념(언어)의 분석을 작업의 전면에 내세우기 위해서 의미론이나 문헌학의 느낌을 주는 복잡한 글이나 논문을 만들어 이를 출판하거나 다양한 방법으로 화랑*에 전시한다. 작품을 발표하는 방법도 인쇄물, 마이크로 필름, 세미나 등 다양하다. 그 결과, 전통적인 표현 수단은 극도로 억제되고 순수하게 언어에 의한 표현이 확립되었다.
미술과 언어 그룹은 처음에 뒤샹Marcel Duchamp(1887~1968)의 사상에 대한 비판과 미니멀 아트* 이론을 제기하는 일련의 작품을 제작했다. 그 후 예술의 개념에 관심을 두고 과학자들의 논문이 과학으로 간주되는 것처럼 예술가들의 논문도 예술로 간주될 수 있지 않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또한 미술의 언어학적인 측면을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철학적 태도를 견지하는 비평가들의 평론에 대항하였다. 1969년 5월에 창간된 정기간행물 《미술과 언어》의 부제인 ‘개념미술잡지’에서 알 수 있듯이, 미술과 언어는 미술을 문학적이고 개념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였다.
미국에서는 코주스Joseph Kosuth(1945~ )가 편집장을 맡았으며 르윗Sol Lewitt(1928~ ), 롱Richard Long(1945~ ), 디베츠Jan Dibbets(1941~ ) 등 많은 개념미술* 작가들이 참여하였다. 1960년대말 미술과 언어 그룹은 분석 철학 뿐만 아니라 사회학과 논리학, 언어학, 인류학 등에서 개념과 도움을 얻고자 다양한 분야에서 지식을 습득했다. 예술 개념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이 그룹은 1970년대 중반에 펴낸 저작물을 통해 예술 산업에서의 경제적 하부 구조, 즉 예술의 역할 등으로 그 관심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출간한 저서들의 모호한 내용과 외부인에 대한 지적인 허세와 위협적인 태도는 대부분의 비평가들로부터 냉혹한 비판을 받았다.

미술과 테크놀로지의 실험

미술과 테크놀로지의 실험 Experiments in Art and Technology(영)

→ 이에이티

미술관

미술관 美術館 museum(영, 독)

박물관에서도 특히 미술 작품의 수집과 보존, 전시를 담당하는 시설. 이 명칭의 어원인 뮤제이온(museion)은 뮤즈*에서 비롯되었다. 뮤즈 여신을 경배하기 위해 창건된 신전이 고전적 개념의 박물관으로서 종교적 봉헌물들을 사람들에게 개방하여 신앙심을 고양시켰다. 한편 세계 최초의 박물관이자 미술관은 3세기경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Ptolemaios Ⅰ가 알렉산드리아에 세웠던 거대한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로마 시대의 박물관은 개인 소장품을 진열함으로써 부와 명예를 과시하기 위한 장소였다. 중세 시대에는 수도원*이나 교회들이 박물관의 기능을 수행하였고, 따라서 종교적 경험을 예술 형태로 시각화하는 장소로서 이해되었다. 미술품이 그 자체의 문화적인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은 르네상스에 이르러서이며, 1539년 지오비오Paolo Giovio가 글에서 자신의 소장품을 ‘뮤자에움(musaeum)’이라고 지칭함으로써 미술관이라는 용어가 최초로 등장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관은 귀족들이 자신의 귀중품을 소장, 진열하여 과시하는 개인적 차원에 머물렀다.
본격적인 의미에서 현재와 같은 공공 미술관은 프랑스 혁명 직후인 1793년 현재의 루브르미술관의 전신인 ‘중앙미술관Musée Central des Arts’이 시민들에게 개방되면서 출현하였다. 그것은 대혁명이 내세운 평등의 이념에 따라 예술의 공유를 표방함으로써 미술관의 근대적인 개념 정립에 기초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개방 하루만에 3천여 점에 이르는 작품들이 도난을 당하자, 루브르미술관은 소장품 목록을 작성하고 시대별, 종류별, 재료별로 구분하여 관리할 수 있는 기초를 세움으로써 오늘날 미술품의 보존과 관리에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하였다.
한편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은 에카테리나 여제Ekaterina Ⅰ의 개인 컬렉션*을 소장하는 것에서 발전하여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일반 대중에게 문을 개방하였다. 이처럼 오늘날 세계의 주요 미술관은 대부분 시민 사회의 성립 이후 귀족이나 왕실의 수집품이 국가에 헌납되면서 생겨난 것이다. 한편 19세기초에는 최초의 개인 미술관인 영국의 덜위치갤러리Dulwich Gallery가 탄생하였고, 특히 독일의 글리토테크Glytothek와 알테스미술관Altes Museum 등은 당대 유럽뿐 아니라 20세기초 미국 미술관 건축의 표준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법령상 미술관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미술관의 주요 사업으로는 자료의 수집과 보존, 관리 및 전시, 학술적인 조사와 연구, 강연회, 연구회 등의 개최, 간행물의 제작 및 배포 등이 있다. 그 밖의 조건으로는 일반적으로 그 자료가 1백점 이상일 것, 1명 이상의 학예연구원, 일정 크기의 건물 및 토지, 100㎡ 이상의 전시실 혹은 2,000㎡ 이상의 야외 전시장, 일정 기간의 전시(연간 90일 이상 개방하되, 1일 개방 시간은 4시간 이상), 그리고 수장고와 사무실, 혹은 연구실과 자료실, 강당 등의 시설을 갖추어야만 설립이 가능하다. 또한 미술관은 공공기관이기 때문에 영리를 목적으로 작품을 매매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미술관은 단순히 예술품의 수집과 저장 뿐 아니라, 일반 대중의 교육을 위한 사회적 기능까지도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의 미술관은 열린 공간으로서 대중과의 소통을 통해서 수동적인 관람의 장소가 아니라, 새로운 문화를 창출할 수 있는 생산적인 공간으로 발전하고 있다.

미술비평

미술비평 美術批評 art criticism(영)

시각예술 분야에서 미술 작품의 미학*적인 가치나 특성을 평가하는 일. 작품을 설명하고 해석하여 그 가치를 판단함으로써 더 나아가서는 창조 활동의 본질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비평의 방법이나 태도는 평자의 세계관이나 미적 기준에 따라 달라지며, 현대의 미술 비평에서는 미술사가가 비평가를 겸하는 경우가 많다. 영국의 리드Herbert Read(1893~1968)나 이탈리아의 벤추리Lionello Venturi(1885~1961) 등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미술비평을 예술 작품에 대한 미적 가치판단이나 미의 이론추구로 이해한 벤추리의 견해에 입각해 보면, 고대 이래로 미술이론가나 미술사가는 모두 미술비평가로 간주될 수 있다. 미술 작품의 우열을 논하는 것은 유사 이래 미술이 등장하면서부터 시작되었으나, 미술비평이 독자적인 대상과 방법을 가지고 행하는 독특한 평론으로서 인정받게 된 것은 근래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3세기경 고대 그리스의 제노크라테스Xenocrates가 최초의 미술비평가로 알려져 있으며, 미술을 지적이고 이성적인 활동으로 이해하였던 르네상스 시대에 미술비평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미술사와 미술비평이 분리됨에 따라 비평의 독자적인 활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고전미의 이상으로 ‘고요한 단순미와 웅장함’을 강조하였던 빈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1717~1768)이나, 《라오콘*Laokoön》(1766)에서 시간과 공간을 기준으로 예술을 구분한 레싱Gotthold E. Lessing(1729~1781)이 당시의 대표적인 비평가들이다. 특히 살롱*평으로 등단한 디드로Denis Diderot(1713~1784)는 19세기 이후 미술비평이 하나의 전문화된 영역으로 확립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19세기 이전의 미술비평은 개별 작품 하나하나를 면밀하게 검토하기보다는 미술의 도덕적 목표와 이상(진선미)을 일반화하는 작업에 치중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중산층이 등장하면서 미술의 경제적 후원자가 소수의 권력자로부터 일반 시민계급으로 이행하였고 결과적으로 미술품 시장의 영역이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예술가와 애호자의 중개자로서 대중의 취향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한 비평가들은 특정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 평가의 대상도 동시대 미술로부터 과거의 작품에까지 널리 확대되었으며 미술비평은 독립된 지적 활동의 한 분야로 성립되었다.
또한 19세기에는 대규모 미술 전람회가 성행했고, 신문이 대중에 대량 보급되면서 신문을 통한 본격적인 미술비평 활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1821~1867)와 같은 문인이 쓴 살롱 미술비평은 당대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후 지금까지도 미술잡지나 저서 출판 등 저널리즘은 미술비평의 주요한 논쟁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한편 기존 미술의 표현양식과 개념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20세기에는 수많은 미술운동들이 새롭게 대두되었고, 일부 비평가들은 옹호자 또는 정신적 지도자의 역할을 자처하면서 그들을 선도하였다. 영국의 비평가 프라이Roger Fry는 대중이 후기인상주의*에 친숙해지도록 도와주었으며,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1909~1994)는 전후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미술사

미술사 History of Art(영)

미술작품을 조사 연구하고 그 역사적인 발전 과정을 추적하는 학문으로서 회화*, 조각*, 건축, 공예* 작품 자체의 역사뿐만 아니라 제작자의 전기, 기법 그리고 표현 내용의 연구 등도 포함한다. 또한 작품을 감정하고 평가, 분류, 해석하는 것, 사적 자료의 수집 등도 미술사의 중요 과제이다. 고대의 유적과 유품의 조사, 귀속(歸屬)의 결정 등은 일반적으로 고고학(考古學)의 분야에 속하지만, 고고학과 미술사와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은 관계로 미술사에서 다루어지기도 한다. 미술사학자는 역사적 관점에서 미술 전통의 양식 및 형식상의 전개를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현존하는 미술사에 관한 최초의 문헌에는 플리니우스Plinius(c.23~79)가 쓴 《자연사Naturalis Historia》(1세기)와 파우사니아스Pausanias의 《그리스 주유기(周遊記)Periegesistes Hellados》(2세기)가 있다. 전자는 연대기 순으로 명작들을 해설하는 형식이고, 후자는 미술을 지역에 따라 구분하여 설명하였는데 이러한 미술사 기술방식들은 후대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특히 《자연사》의 회화와 조각에 관한 장은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의 학자들이 당대의 제반 예술적 업적들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할 때에 하나의 유용한 모델로서 사용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기베르티Lorenzo Ghiberti(c.1378~1355)의 《비평사》를 시발점으로 하여 바자리Giorgio Vasari(1511~1574)의 《미술가 열전Le vite de’ più eccelenti architetti pittoroi et scultori Italiani》(1550)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특히 바자리는 역사가로서의 자신은 ‘제 양식의 뿌리와 원인을, 그리고 어떠한 이유에서 예술이 진보하고 혹은 쇠퇴하는 가를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생성, 완성, 쇠퇴를 반복하는 역사적 순환과정을 미술사에 적용하려 했던 것이다. 17세기에는 이같은 바자리의 정신을 이어 받은 멘더Karel van Mander(1548~1606, 네덜란드), 리돌피Carlo Ridolfi(1594~1658, 베네치아), 말바시아Count Carlo Malvasia(1616~1693, 볼로냐), 잔트라르트Joachim von Sandrart(독일) 등 많은 ‘열전사가(列傳史家)’들이 등장하였다.
한편 동시대 프랑스의 펠리비앙André Félibien(1619~1695)이나 이탈리아의 벨로리Bellori(c.1615~1695)같은 이론가들은 회화론이나 예술가 열전의 형식으로 역사 속에 미의 이론을 도입하려고 했다. 또한 아카데미*에서는 과거의 위대한 거장들의 모방을 중시함으로써 역사적인 지식을 중시하였다. 근대적 학문으로서의 미술사는 18세기 후반 양식의 변천에 의한 역사의 전개를 규명한 빈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1717~1768)에 의해 비롯되었다. 그의 저서 《고대 미술사Geschichte der Kunst des Altertums》(1764)는 조각과 회화를 당대 민족정신의 가장 고귀한 표상으로서 취급하였다. 독일어권의 여러나라에서 미술사에 아카데미적 권위를 부여했던 것은 이러한 빈켈만의 견해에 입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절대 정신의 자기 전개로서의 역사 철학을 얘기한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에 의해 강화되었다. 헤겔 이후에는 미술의 양식적 변화를 초래하는 요인이 무엇인가를 밝히는데 중점을 둬 텐느Hyppolyte Adolphe Taine는 이를 민족과 환경, 시대로, 젬퍼Gottfried Semper는 기술의 발달로 설명하였다. 한편 미술을 문화적 맥락 속에서 다룬 사가들 중에는 스위스 출신의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가 유명하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에 걸쳐 미술사는 학문으로서 엄밀성을 확립하게 되었는데, 인상주의*와 같은 19세기 미술운동의 영향과 ‘순수 시각성(pure visibility)’의 미학 이론은 오로지 형식*에 대한 분석으로서의 미술사를 추구하는 경향을 낳았다. 이러한 방식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부르크하르트의 제자인 뵐플린Heinrich Wölfflin(1864~1945)과 빈의 리이글Alois Riegl(1858~1905)을 들 수 있다. 특히 뵐플린은 상호 대립적인 개념들을 서로 짝지음으로써 미술양식의 특성과 발전을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프랑스에서는 포시용Henri Focillon(1881~1943)이 예술사의 본질에 대한 생물학적인 개념을 통해 형식주의*적 접근 방식에로의 새로운 방향 전환을 가져왔다. 이러한 양식사적 관점과는 대조되는 시각으로는 주제나 내용에 초점을 맞춘 도상학*적 연구(말레Émile Mâle,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 빈트Edgar Wind), 시대의 정신적 배경을 중시하는 경향(바르부르크Aby Warburg), 게슈탈트* 심리학과 정신분석을 원용하는 심리학적 방법(곰브리치Ernst Hans Gombrich) 등이 있다.
현재 미술사는 1844년 베를린 대학을 시작으로 많은 나라에서 정규 교과목으로 채택하고 있으며, 1932년 런던에서는 미술사만을 다루는 코트올드 미술연구소가 개설되었다. 미국 대학에서는 20세기초부터 활발히 연구되었는데, 주로 고대 고전기 이후의 서구 미술의 양식상의 발전과정에 대한 연구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