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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화

상주화 常州畵

강소성江蘇省 무진현武進縣 상주 지방에서 제작된 초충도*(草蟲圖). 당대(唐代)에 시작된 상주 초충화는 북송北宋 때에 이 지방의 특수한 화풍으로 자리잡았다. 거녕居寧(쥐 닝)이 특히 유명하며 그 후 원, 명대(元明代)를 거치면서 많은 작품 제작이 이루어졌다. 한 화면에 각종 곤충과 화초를 몰골*, 구륵전채*의 두 기법을 혼용하여 그려넣고 풍부한 색채를 활용하여 표현했다. 후에 몰골화조화를 주로 그린 청초(淸初) 운수평惲壽平(윈 서우핑)의 상주파(常州派)도 여기에서 영향을 받았다.

상징

상징 象徵 symbol(영)

그리스어 ‘symbolon’(함께 혼합된 것이나 식별 기호라는 의미)에서 유래. 질적, 형식적으로는 다른 두 가지의 것이 서로 독립적인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떤 의미로 관련을 맺고 한편이 다른 편을 표징(zeichen) 또는 대표하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결합되기 어려운 양 계기를 초논리적으로 매개하는 표현법이다. 일반적으로 감상적인 것에 있어 초감각적인 것(이성)이 표현되는 것이므로 미*(美)가 이념의 감상화, 감각적인 것의 정신화라는 측면에서 상징은 미학*상 극히 중요한 개념이다. 미학에서 상징은 마술적, 신비적, 종교적인 세계 질서에서 근대적으로 분리되면서부터 그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상징은 정태적인 알레고리*와 달리 감각적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경험 영역들의 지각과 인식을 위한 역동적이고도 창조적인 매개물이다. 따라서 예견자나 천재로서의 예술가는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진리와 가상, 이념과 현상 사이의 중개자가 된다.
상징은 고대 범신론적 우주론의 입장에서는 참되거나 신적인 것을, 관념론적 형이상학에서는 절대적인 것이나 비합리적인 것을, 경험론의 입장에서는 보편인간적인 것, 자연법적인 것, 원형적인 것을 의미한다. 상징은 자연적 상징(예를 들어 빛은 진리의 상징)과 관례적 상징(예를 들어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 등으로서 언어, 신화, 종교, 철학 등의 문화 영역과 사회 전반에 걸쳐 사용된다. 예술적 상징법의 분석과 해석은 도상학*에서 상징의 정신사, 문화사, 형식사적 연구, 예술의 정신분석 및 문예학적인 모티브* 연구 등을 형성했으며, 기호*(sign)로서의 상징은 기호학적 연구에도 영향을 끼쳤다. 미술에서는 전통적인 상징들이 그대로 쓰일 뿐 아니라, 예술가에 의해 새로운 상징이 창조되기도 한다. 가령 뵈클린Arnold Böcklin(1827~1901)의 회화, 메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의 희곡 등에서 볼 수 있는 공상적 상징이 그것이다. 한편 논리학, 수학, 자연과학에서 사용되는 상징은 일반적인 의미와 달리 기호 또는 부호라고 쓰인다.

상징주의

상징주의 象徵主義
Symbolism(영) Symbolisme(프)

1880년대 후반에 프랑스에서 시를 중심으로 시작된 문학운동. 미술에서는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1821~1867),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 랭보Arthur Rimbaud 등 시인의 영향 하에 반사실주의적인 경향을 지향했으나, 문예의 경우처럼 명확한 주장이나 운동으로 확립되었던 것은 아니다. 쿠르베Gustave Courbet(1819~1877)는 “회화는 본질적으로 구체적인 예술이다. 그것은 실재하는 사물의 재현에 의해서만 구성된다. 추상적 대상은 회화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라는 말과 같이 사실주의* 미학을 펼쳤고, 이러한 회화 이념에 대한 반발로 시인 모레아Jean Moréas는 1886년 9월 18일자 《르 피가로Le Figaro》 지에서 상징주의 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예술의 본질적 원리는 ‘사상에 감각적 형태를 씌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징주의의 목적은 물질세계와 정신세계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상징주의 시인들은 시적 언어를 내면생활의 상징적 표현으로 여겼으므로 화가들에게도 신비와 마술 등을 시각적으로 표현할 것을 요구했다. 상징주의 미술은 인간의 내면을 강조하고 비합리성을 추구함으로써 일상적인 이미지의 왜곡과 비사실적인 우화세계 및 주제의 기묘한 병치를 일으켰으며, 이는 19세기 중반 사실주의의 개념을 파기하는 것이었다. 현실적 주제보다는 신화적이고 신비한 주제를 도입하여 상상의 세계를 그리는 것은 어떤 감정이나 사고에 상응하는 조형세계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며, 해설이나 설명 없이 감정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미술에 대한 추구가 상징주의 화가들에게 가장 중요했음을 말해준다.
상징주의 미술에 대한 논평은 처음에는 고갱Paul Gauguin(1848~1903)과 퐁타방파* 및 나비파*와 관련된 것이었으나, 점차 퓌뷔 드 샤반느Pierre Puvis de Chavannes(1824~1898), 르동Odilon Redon(1840~1916), 모로Gustave Moreau(1826~1898), 카리에르Eugéne Carriére(1849~1906) 등의 신비적인 주제와 시적, 종교적인 관념을 표현한 세기말적 작품들을 포함하게 되었다. 고갱의 열광적인 후원자였던 평론가 오리에Albert Aurier는 1891년 3월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 발표한 논문 <회화에 있어서 상징주의>에서 예술작품은 사상이 있어야 한다. 사상을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므로 상징적이어야 한다. 일반적인 이해를 위한 양식으로 여러 형태와 기호를 제시하므로 종합적이어야 한다. 예술이 묘사하는 대상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에 의해 인지된 사상의 표지이므로 주관적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술은 결과적으로 장식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장식적인 그림이란 동시에 주관적, 종합적, 상징적 사상의 표현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종합적’이란 말은 종종 회화의 상징주의 운동과 시의 상징주의 운동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리고 적어도 어느 부분은 상징주의 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나비파 화가들의 작품에도 사용되는 단어이다. 나비파는 《상징주의자로서의 세잔느》(1907)를 쓴 이론가 드니Maurice Denis(1870~1943)에 의해 상징주의자들로 간주되었다. 그는 상징주의에 대해 “본래 신비적이거나 이상주의적인 운동은 아니다. 이것은 풍경화가와 정물화가들에 의해 시작된 것이지 영혼을 그리고자 하는 화가들에 의해 시작된 것 역시 아니다. 표현된 주체가 우리의 정신상태를 일깨우는 것이 아니라, 작품 그 자체가 최초의 감각을 전달하고 감정을 영속시킨다. 모든 예술작품은 어떤 경험된 감각의 혹은 더 빈번하게는 심리적 사실의 전위(轉位), 열정적인 등가물, 희화이다”라고 말하였다.
상징주의와 상징주의자들의 예술에 대한 개관은 여러 간행물을 통해 출판되었다. 《데카당Décadant》 《보그Vogue》 《상징주의자Symboliste》 가 1886년에, 《메르퀴르 드 프랑스》가 1891년에 출판되었다. 퓌뷔 드 샤반느는 “명료한 사상 각각에는 그것을 번역하게 하는 시각적 사고가 각각 따른다”고 믿었으며, 드니가 ‘회화의 말라르메’라고 부른 르동은 자신의 목적을 “인간의 감성을 아라베스크한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모로는 마티스Henry Matisse(1869~1954)와 루오Georges Rouault(1871~1958)를 비롯한 야수주의* 작가들의 스승이 되었으며, 카리에르는 몽환적, 문학적인 내용을 무채색조로 그렸다. 상징주의자들은 새로운 회화양식을 창조한 것은 아니었으나, 예술적 형식보다는 시적 사상의 표현, 마술과 종교적 신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 일종의 개인주의자들이었다.

상품미학

상품미학 商品美學
Warenästhetik(독)

상품의 미적 장식과 이러한 장식의 심리학적 작용 및 소비자들과 목표한 바의 경제적 결과를 향한 모든 기술이나 이론들을 포함한다. 그것은 상품 자체의 미적 형태화인 디자인, 전시를 통한 생산품의 이미지화와 그것에 대한 구매욕 및 여타 사회적 욕구의 충족, 유행의 변화 등과 관련된 것이다. 상품미학의 개념은 독일의 사회학자 하우크Wolfgang Fritz Haug에 의해 정립되었다. 하우크는 1971년에 출간된 저서 《상품미학의 비판Krithk der Warenästhetik》에서 인간에게 미적이고 감각적인 영향을 미치는 메커니즘을 디자인*과 연관된 상품미를 통해 분석했다. 그는 자신의 글을 ‘자본주의 내에서의 감각의 운명 및 욕구 발전의 사회적 분석에 관한 기교’라고 밝히면서 자본주의의 기제를 미적 주체, 객체 관계로써 풀었다. 하우크는 미적인 것* 그 자체의 실체화된 본질성 대신에 자본주의 사회의 통합적 유지를 위해 미적인 것이 어떻게 기능하는가에 관심을 가졌다.
이와 함께 후기 자본주의에서 자본의 움직임에 있어 점차 중요성이 커지는 영역인 상품미가 부각된다. 상품미는 상품 자체의 장식과 포장에서부터 디자인, 광고, 선전 그리고 팬시 산업 및 오락산업의 체제에까지 걸쳐있다. 상품미학의 비판은 단순히 생산물(사용가치)의 미적현상 그 자체를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의 미적현상의 ‘기능’을 연구한다. 또한 관찰자로 하여금 소유욕을 자극받고 구매충동을 일으키도록 하기 위하여 상품에 부여되고, 교환가치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위해 발전된 감각적 현상으로서의 ‘미*’를 고찰한다. 따라서 상품미학비판은 상품미학이라는 개념으로 지칭된 기능적 관계들의 과학적, 사회경제적 해명이라 하겠다.

상현좌

상현좌 裳懸座

→ ‘대좌’ 참조

상형문자

상형문자 象形文字
hieroglyph(영) hieroglyphika(그)

인물이나 동물 또는 사물을 그려서 그것에 관련된 단어나 음절 또는 소리를 나타낸 문자. 이 기호들은 주로 초기의 한자(漢字, 갑골문*)와 고대 이집트의 묘비나 문서에서 나타난다. 재현미술(모방미술)이 일찍부터 가졌던 기능들 가운데 하나는 사건과 사실을 기록하고 재생해내는 것이었다. 이집트 상형문자 기록 행위는 여러 이미지를 구사하여 하나의 낱말을 암시하는 수수께끼 그림의 원리를 차용하면서 회화적 이미지를 활용한, 진일보한 것이었다. 상형문자는 그 역사 전체를 일관하여 음성요소가 덧붙여진 그림 표기법으로 존속되었다.
이집트의 제1왕조 시대 점판암 팔레트*와 여타의 물체 위에 기록된 상형문자에서는 순수한 그림의 요소와 상형문자에 해당할 만한 것을 구별하기가 어려우며, 이런 기록과 표상 간의 밀접한 관계는 그 후에도 지속되었다. 부조*와 회화*에서 상형문자는 전체 구성의 완전한 일부로 다루어졌고, 자명하지 않은 행위와 대상물에 수반되는 ‘표지’로서 혹은 묘사 장면을 세세하게 설명하는 텍스트의 난(欄)으로 등장하였다. 이집트인은 기호의 장식적 가치를 잘 알고 있었고 각인된 부위는 눈에 거스를 만한 아무런 공백도 남기지 않은 채 대칭적으로 용의주도하게 구성했다. 각각의 상형문자는 세심하게 만들어져 아름답게 채색되기도 하였는데, 각인된 부위에서 등장하는 생물체(특히 새)는 날아가버리거나 해로움을 끼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사지가 절단되기도 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부터 상형문자와 관련된 전반적인 지식은 기독교의 발전과 더불어 4세기에 소멸하던 승려 계층에 국한되었다. 호라폴로Horapolo의 것으로 추정되는 4~5세기경의 한 작품에서는 여타의 작품들에 대한 환상적이며 우의적인 설명과 몇몇 기호들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결합되었다. 15세기초에 재발견된 이 작품은 르네상스 시대에 크게 유행했으며 문장(紋章) 양식에도 기여한 바 있다. 그 후 수세기 동안 1799년 로제타 스톤이 발견되어 19세기 이집트학에서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이집트 상형문자 각인 작품을 해독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행해졌다.

상황주의

상황주의 狀況主義
Situationalism(영)

1957년 ‘레트리스트 인터내셔널Lettrist Inter-national’과 ‘이미지니스트 바우하우스 운동Move -ment for an Imaginist Bauhaus’이 통합되어 이탈리아 코시오 다로시오에서 결성한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Situationist International’을 말한다. 고도로 이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상황주의는 서구 사회에 대한 자기분석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들은 공적인 활동에 활발히 참여하는 시민들을, 탈정치적인 대중매체가 제공하는 볼거리를 수동적으로 구경하기만 하는 무기력한 소비자로 전락시킨 책임이 자본주의에 있다고 비판했다. 상황주의의 이러한 관점은 1967년에 출간된 드보르Guy Debord의 저서 《구경거리의 사회Society of Spectacle》에서 정확하게 지적되었는데, 그의 견해에 따르면, 현대 세계가 모든 시적인 능력을 억압하고 미술을 장식품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잘못된 표상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기존 질서에 대해 격렬한 문제의식을 제기하였던 상황주의의 활동은 영화, 기고 그리고 직접적인 행동에 의해 정치, 관습, 사회에 대한 비평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그 기원은 인습에 얽매인 부르주아적인 삶을 철저히 붕괴시키고자 했던 초현실주의*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사실 상황주의는 초현실주의 미술의 전후(戰後) 양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 하지만 초현실주의가 심리학적 무의식을 강조했다면, 상황주의는 방향전환(détournement), 표류(dérive), 통합된 도시 생활(urbanisme unitaire)과 같은 개념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한 예로 요른Asger Jorn(1914~1973)은 부분적으로 파괴된 싸구려 복제품 위에 그림을 그려 방향전환된 작품을 전시함으로써 독창성과 원작자의 가치에 질문을 던졌다. 한편 통합된 도시 생활에는 개별 미술 영역을 넘어서는 작품-예를 들면 빌딩보다 큰 그림-이나 또 의미있는 사회적 상호작용 혹은 상황이 벌어지는 장소로서의 도시환경을 창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렇게 이론적인 측면에 대한 관심은 지적인 기반을 공유하면서 미술에서의 다양한 접근방식으로 발현되었지만, 공통적인 상황주의 양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상황주의 작가들은 실제로 미술 작품을 제작하기보다는 이론적 저술이나 정치조직 활동에 치중했다. 상황주의 사상은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총파업이 일어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 사건은 좌파 학생들의 주장을 구체화한 상황주의 포스터와 만화로 기록되었다.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은 내부 불화로 인해 1972년에 해체되었으나, 1989년에는 파리의 퐁피두센터*에서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소수 사람들이 통과하는 길에서On the Passages of a Few People through a Rather Brief Moment in Time>라는 제목으로 대규모 상황주의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이 전시회는 미술 작품과 역사적인 증거물 등을 통해 상황주의라는 고도로 정치화된 운동을 조명하고자 시도함으로써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상황주의는 영국의 펑크 아트*의 발달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고, 개념 미술*과 아르테 포베라*에 영감을 제공했다. 또한 광고의 시각적 언어를 전복시킨 크루거Barbara Kruger와 프린스Richard Prince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의 전략을 예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