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1 2 7

석가불

석가불 釋迦佛 Śākyamuni(범)

역사적으로 실존한 인물로, 석가는 석가족(釋迦族) 출신의 성자라는 뜻인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약칭이며 본래의 이름은 싯다르타Siddhārtha悉達多, 성은 고타마Gotama喬答摩, 瞿曇이다. 석가족 출신으로 고대 인도 북부의 카필라국迦毗羅衛國 정반왕淨飯王의 장자로 태어났다.
29세에 인간 세상의 삶, 늙음, 병, 죽음이란 고뇌에 대해 깨달은 바가 있어, 출가하여 고된 수행을 한 끝에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때가 35세(일설에는 30세라 함)로 이 사람이 바로 불교의 창시자다. 후에는 줄곧 인도 북중부의 갠지즈강 유역에서 불교를 전파하였으며 제자도 500명이나 되었다고 전한다. 80세에 세상을 떠났고, 제자들로부터 ‘현세불(現世佛)’로 추앙받았다.
《대승의장大乘義章》19권에는, “중생들이 느끼기에 뜻이 서로 통하는 듯했고, 여래께서 교화를 보이시니 사물도 함께 호응하였으므로, 응이라 이름하였다(衆生機感 義如呼喚 如來示化 事同嚮應)”라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응신불(應身佛)’이라고도 부른다. 응신불은 세상의 중생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삼계육도(三界六道)에 서로 다른 상태로 현신한 것임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조각*은 ‘얼굴은 달처럼 맑고 풍만하게(面淨萬如月)’ ‘귓바퀴는 축 늘어지게(耳穿環豊)’만들며, 단정하고 자상한 모습에, 육계(肉髻), 파상계(波狀髻), 나계(螺髻)를 하고, 양 눈썹 사이에는 백호상(白毫像)이 있으며, 가부좌(跏趺坐), 수좌(垂坐) 및 교각좌(交脚坐)를 한 형상으로, 도덕성의 완미(完美)를 표시한다. 또한 서로 다른 정태(情態)에 따라 각종 다른 손 모양을 구별하며, 복식엔 인도의 우견편단식(右肩偏袒式) 가사 및 통견대의식(通肩大衣式) 가사, 중국 고대 한족(漢族)의 면복(冕服)을 모방한 포의박대(褒衣博帶)식이 있다.
석가상은 인체의 형상을 빌려 불상*을 처음으로 표현할 때부터 나왔으며, 탄생불을 비롯해서 출가하여 고행하는 고행상(苦行像), 구도 중에 모든 장애를 물리치는 항마상(降魔像), 정각을 이룬 성도상(成道像), 대중을 교화하는 설법상(說法像), 열반에 든 열반상(涅槃像) 등이 있다.
대승불교시대에 들어서는 석가가 지닌 여러 가지 성격을 실체화하여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불* 등 보다 많은 불이 탄생하게 되었다. 운강석굴* 제119굴 정중앙에 천불가사(千佛袈裟)를 입은 입상, 제20굴에 웅대하고 기백에 찬 석가좌상 및 용문석굴* 빈양중동의 석가상 등은 모두 걸작이다.

석각

석각 石刻 shin-ko(중)

돌에 새긴 문자 회화를 말한다. 각석(刻石), 비갈(碑碣), 묘지(墓地), 탑명(塔銘), 부도*(浮屠), 경당(經幢), 조상기(造像記), 석궐(石闕), 마애(磨崖), 매지별(買地莂) 등을 총칭해서 석각이라고 한다. 진대(秦代)무렵부터 점차 만들어졌는데, 그 이전부터 청동기 등에 새겨진 금문*(金文)과 나란히 ‘금석(金石)’이라고 칭한다. 암석은 금속처럼 수명이 길며, 금속에서는 큰 글자를 만들기 어려운데 비해, 석재에서는 큼직한 것을 새길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따라서 석각의 문자와 그림은 후세에 전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작품으로 생각되고 존중되었다.

석고문

석고문 石鼓文

당초(唐初)에 중국 기주岐州 옹현雍縣에서 발견된 10개의 북모양의 돌에 새겨진 현존 최고의 한자 각석문(刻石文). 주문*(籒文)으로 쓰여진 사언시(四言詩)는 매 10수가 1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발견 당시 이미 상당 문자가 결손된 상태였다.
각석의 제작자 및 시기에 대해서는 당唐 장회관張懷瓘(즈앙 후에이꾸완, 8세기 전반기 활동) 등의 ‘주선왕대수설(周宣王大狩說)’, 송宋 동유董逌(똥 여우), 정대창程大昌(츠엉 따츠앙) 등의 ‘주성왕설(周成王說)’, 정초鄭樵(즈엉 치아오)의 ‘진각설(秦刻說)’, 금金 마정국馬定國(마 띵구어)의 ‘북주설(北周說)’ 등이 있는데 현대 사학자들은 선진(先秦)시기로 추정한다. 원석은 현재 북경고궁박물원北京故宮博物院에 소장되어 있다.

석관

석관 石棺
sarcophagus(라, 영)

사르코파구스(sarcophagus)는 고대 그리스*, 라틴인들이 조각한 돌이나 테라코타*로 된 관에 붙인 명칭. 플리니Pliny(c.23~79)에 따르면, ‘살을 먹어 치운다 lithos sarcophagos’는 뜻을 가진 이 명칭은 시신을 분해하는 성질을 갖고 있는 점판암으로 관을 만들거나 관 둘레를 두르던 관습에서 나왔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기원전 3000년대부터 목제, 도제관을 사용하였으나, 석관은 아시리아* 제국 때에야 사용되었다. 아슈르에서 출토된 기원전 9세기의 석관들은 비문에 의하여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장식은 없었다.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7세기부터 석관을 만들었고 기원전 6세기부터는 오리엔트의 영향으로 건조물을 모방한 모뉴멘털적인 석관도 출현한다. 기원전 4세기 중기 이후의 헬레니즘* 왕국 동부에서는 사면에 정교한 부조*장식이 덮이고 색이 선명하게 칠해진 석관이 나타났다. 이것은 후에 서부에서 발달한 삼면에만 조각을 한 ‘로마식’과 구별하여 ‘그리스식’이라고 부른다.
기원전 5세기부터 서기 1세기까지 이탈리아의 서부 에트루리아 지방의 상류층에서는 돌, 설화석고*, 테라코타 등으로 석관을 만들었다. 이 석관의 특징은 한쪽 면에만 부조를 했다는 것과 누워있는 형태의 죽은 사람의 모습을 관 뚜껑에 조각했다는 것으로, 이는 훗날 로마*와 초기 기독교 미술*에도 영향을 주었다. 기원전 5세기부터 서기 1세기말 또는 2세기초까지의 로마에서는 화장 풍습이 있어 매장용 석관은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트로이 시대부터 로마와 이탈리아에서도 매장이 증가해 3세기 중기에는 널리 퍼졌다. 그리스 본토에서 시작된 소위 ‘아티카식’ 석관이라 하는 것은 사면에 신화의 장면이나 화환이 조각되어 있고, 사자(死者) 형상의 부조와 정교한 관뚜껑 장식을 특징으로 하며 2~3세기에 서쪽 지방으로 전래되었다.
3세기의 기독교 석관은 조각 등에서 부활과 구원의 주제가 보일 뿐 이교도의 것과 양식상의 차이는 없다. 4세기경에는 아시아식에 기초한 작은 기둥 사이에 인물을 깊게 부조한 ‘기둥식’ 석관이 유행하였으며, 5세기경 기독교 석관에는 고전 그리스 전통이 부활한 것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석관은 그 표면에 신화, 전투, 꽃모양 장식 등이 모티브*로 사용된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일상생활이나 공적활동의 모습이 새겨지거나 비문이 있는 경우도 많아 고고학, 미술사*, 종교, 사상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석관도 그 도상*을 제정기의 석관장식 부조에서 이어받은 경우가 많으며 중세 이후에도 장식 모티브*로 계승되어 르네상스의 조각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석기

석기 炻器 stoneware(영)

돌과 같이 단단하게 구워진 여러 색깔과 질감을 지닌 도자기. 섭씨 약 1,200도에서 1,280도 사이의 온도로 소성되며 대개 형태가 완성된 상태에서 유약을 씌운다. 미국 요업협회가 1950년에 발표한 분류법에는 석기를 ‘내화점토를 주성분으로 하여 구운 물건. 유약이 있고 없음을 불문하고 흡수량 0에서 10%까지’라고 정의하고 있다.

→ ‘자기’ 참조

석등

석등 石燈

불전 앞에서 불을 밝히기 위해 세우는 석조물. 불교에서 등불을 밝히는 공양을 으뜸으로 여겼기 때문에 등불을 안치하는 공양구의 하나로서 만들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기본형은 하대석(下臺石), 중대석(中臺石, 간주석), 상대석(上臺石), 화사석(火舍石), 옥개석(屋蓋石)의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며 옥개 위에는 보주(寶珠)를 얹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본적인 평면은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4각, 6각, 8각으로 되어 있다. 경전에 의하면 동제, 철제, 와제, 목제 등 다양한 종류의 재료로 만들어진다고 하지만 현재 석제가 가장 많이 남아 있다.
한국에서는 백제 미륵사지彌勒寺址에서부터 그 예를 찾을 수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백제의 8각등 석등 형식을 계승, 발전시켰다. 대표적인 예로는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 앞 석등〉 〈법주사法住寺 사천왕석四天王石〉 등이 있다. 특히 간주석 대신에 쌍사자가 배치되어 있는 경우도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까지 제작되었다. 〈법주사 쌍사자 석등〉이 유명하다. 또한 간주석에 장구통과 같이 마디가 있는 것도 있는데 주로 호남지역에 세워졌다.
이 밖에도 화엄사華嚴寺 4사자 3층석탑 앞의 석등은 간주석에 스님모습의 인물좌상을 안치시켜 특이하다. 고려시대 석등은 삼국시대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퇴화해가는 경향을 띠며, 조선시대는 사원 건립의 위축과 함께 쇠퇴하고 말았다.

석채

석채 石彩

진하고 강하게 쓰는 색채. ‘진채(眞彩)’ 또는 ‘농채(濃彩)’와 같은 뜻으로, 그렇게 그려진 그림을 석채화, 진채화, 농채화라 한다. 한국에서는 중국에서 개발된 그 특수한 광물질 채색 원료를 흔히 ‘당채(唐彩)’라고 한다.

석판화

석판화 石版畵 lithography(영)

물과 기름의 반발력을 이용한 평판법에 의한 판화. 목판화*처럼 부조*의 형태로 모양을 조각*하거나 선 인그레이빙*에서처럼 선을 음각하는 것이 아니라, 석회석으로 된 평평한 판 표면에 그림을 직접 그린 후 찍어내는 방법이다. 본래는 두껍고 무거운 석판석을 사용했으나 오늘날에는 가볍고 일그러지지 않으며 취급하기 쉬운 아연판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1798년 독일의 극작가 제네펠더Aloys Senefelder(1771~1834)가 발명한 것이 석판 인쇄법으로 발전했다. 석판 위에 유성 잉크나 크레용으로 도안을 그린 후, 특별한 화학용액을 발라 도안을 고정시킨다. 그 다음에 전체에 물을 칠하면 물과 기름의 반발력으로 인해 물이 판에는 스며드나 도안에는 스며들지 않는다. 그 후 유성 잉크를 바른 롤러로 석판을 한 번 밀어주면 물이 묻은 판에는 잉크가 묻지 않고 크레용이나 유성 잉크로 그린 부분에만 잉크가 묻게 되어, 그 위에 종이를 얹고 힘을 가해 찍어내면 원래의 도안 그대로 좌우만 바뀐 채 찍혀나오게 되는 것이다.
석판의 장점은 제판사의 협력만 얻는다면 누구든지 제작할 수 있으며, 한 판에 여러 번 인쇄할 수 있어 인쇄매수가 많다는 것이다. 제네펠더는 재료에 직접 도안을 그리는 직접 제판법 외에 일단 다른 종이에다 도안을 그린 후 판재 위에 전사하는 전사 제판법도 고안해냈다. 그가 예견했듯 석판화는 매우 융통성 있는 매체여서 석판 대신 플라스틱, 아연, 알루미늄 판을 대신 사용할 수도 있고 펜이나 크레용 대신 붓을 사용해 판 위에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그 밖에도 화가의 기발한 착상에 따라 여러 질감을 표현하는 것도 가능하며, 여러 장의 석판을 이용해 다색 인쇄를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석판화는 펜이나 크레용으로 그린 단순한 선으로 된 형태에서부터 여러 질감과 투명한 효과를 내는 다색 인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
석판화는 19세기에 들어와서 많은 화가들의 주목을 끌었다. 고야Francisco de Goya(1746~1828)는 노년에 특히 많은 석판화를 제작했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1798~1863)는 석판화로 1828년 괴테Goethe(1749~1832)의 《파우스트Faust》 삽화를, 모네Claude Monet(1840~1926)는 1874년 포Edgar Allan Poe의 《갈가마귀》 삽화를 석판화로 그렸다. 19세기말은 다색인쇄 석판화가 꽃 핀 시기이다.
일본 목판화인 우키요에*(浮世)의 영향을 받은 툴루즈-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1864~1901), 보나르Pierre Bonnard(1867~1947) 등이 이전까지의 서양의 석판화와는 다른 밝고 자극적인 문양의 다색 석판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특히 툴루즈-로트렉은 석판화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을 수 있으며, 포스터*를 위시한 여러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대가이다. 20세기에 들어와 인쇄술의 진보와 함께 석판화는 다른 회화 기법에 필적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많은 화가들에 의해 다양한 표현 기법이 연구, 시도되고 있다.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 루오Georges Rouault(1871~1958), 보나르,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 등과 에콜 드 파리*의 유명한 화가들은 대부분 석판화를 이용한 작품들을 다수 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