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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전주의

신고전주의 新古典主義
Néo-Classicisme(프)

로코코*와 후기 바로크*에 반발하고 고전 고대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함께 18세기말부터 19세기초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나타난 예술 양식. 고대적인 모티브를 많이 사용하고 고고학적 정확성을 중시하며 합리주의적 미학에 바탕을 둔다.
신고전주의 예술은 형식의 정연한 통일과 조화, 표현의 명확성, 형식*과 내용*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며, 특히 미술에서는 엄격하고 균형잡힌 구도*와 명확한 윤곽, 입체적인 형태의 완성 등이 우선시된다. 고대에 대한 관심은 18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폼페이와 헤라클레네움, 파에스툼 등의 고대건축의 발굴과 동방 여행에 의한 그리스 문화의 재발견 등이 계기가 되었으며, 프랑스 혁명 전후 고대에 대한 동경이 사회 전반을 풍미하였다.
학자들은 저술을 통해 고대의 유물과 예술품들을 소개하였으며, 카일루스Comte Claude-Philippe Caylus(1692~1765)의 <고대 이집트, 에트루리아, 그리스, 로마, 갈리아 지방의 유적 목록집>(1752~1767)이나 피라네시Giovanni Battista Piranesi(1720~1778)의 <로마의 위대성>(1751), <로마의 유적>(1756), <로마인의 사치와 건축에 관하여>(1761)는 그 중 대표적인 것이다. 독일의 예술사학자 빈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1717~1768)은 그의 저작 <그리스 회화와 조각에 있어서의 모방에 관한 연구Gedanken über Nachahmung der Griechischen Werke>(1755), <고대미술사Geschichte der Kunst des Alterthums>(1764) 등을 통해 이 양식의 미학적 근거를 완성했다.
화가 멩스Anton Raffael Mengs(1728~1779)는 로마에 자신의 스튜디오를 만들어 이 새로운 이념을 전파하는 국제적인 사교장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중도적인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명성이 라파엘로Raffaello Sanzio(1483~1520), 코레지오Correggio(1490~1534), 티치아노Tiziano(1485~1576) 등 대가들의 수법을 사용하고, 조용한 단순성과 고귀한 위풍이 적절히 표현된 고대의 모범들 – 아폴로 벨베데레, 라오콘* 등 – 의 제반 요소들의 기초에 이른바 그랜드 매너*를 추구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 그의 <파르나수스>(1761)나 동료 해밀턴Gavin Hamilton(1723~1798), 비엥Joseph-Marie Vien 등의 작품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무미건조하고 인공적인 양식들이 나타났다. 멩스와 마찬가지로 빈켈만도 현대 예술은 고대의 조각*이 이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바와 자연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고대 예술에서 발견되는 도덕적 품성을 특히 강조하였다.
프랑스에서의 신고전주의 운동은 로코코 양식의 번잡스러움에 대한 일종의 반발, 루이 14세 시기의 그랜드 매너에 대한 향수, 푸생Nicolas Poussin(1594~1665)의 고전주의*에 대한 회귀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면서 강한 도덕적 합의도 함께 이루어졌다. 또한 사회의 제반 혁명적 변화나 시민사회의 삶 속에 ‘고대 로마적’ 덕성을 세워보고자 하는 욕구 등이 이 운동과 관련되어 있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대혁명 당시 철저한 공화주의자로 나중에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았던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1748~1825)가 있으며, 그의 작품 <호라티우스가의 맹세> <소크라테스의 죽음> <브루투스와 그의 죽은 아들> 등은 신고전주의 정신을 잘 드러내보이고 있다. 다비드의 성과는 앵그르Jean-Auguste Dominique Ingres(1780~1867)에게 계승되어 프랑스 회화의 한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신고전주의는 건축에서도 충분히 발현되었는데, 영국의 아담 형제François Gaspard & Lambert Sigisbert & Nicolas Sébastien Adam, 독일의 랑그한스Carl Gotthard Langhans(1732~1808), 프랑스의 샬그랭Jean-François Chalgrin, 브로냐르Alexandre Théodor Brongniart, 르두Claude Nicolas Ledoux(1736~1806) 등이 대표적이며, 조각가로는 이탈리아의 카노바Antonio Canova(1757~1822)와 토발트센Bertel Thorwaldsen 등이 활발히 활동했다.
신고전주의 운동은 미국으로도 건너갔으며, 조각가 파워스Hiram Powers(1805~1873), 그리너프Horatio Greenough(1805~1852), 화가 반델린John Vanderlyn 등이 등장했다. 신고전주의는 고대의 모범들을 신중하고 의식적으로 모방한다는 점에서 그전에 간헐적으로 일어났던 고전부흥 운동과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19세기에 일어난 ‘신그리스Neo-Greek’ 운동과도 다른데, 왜냐하면 그리스 정신을 얘기하는 여타의 저작들이 사실은 거의 모두 후기 헬레니즘과 로마의 복제품들로부터 기인했기 때문이다.

신광

신광 身光 vali-cakra(범)

→ ‘광배’ 참조

신구상회화

신구상회화 新具象繪畵
Nouvelle figuration(프)

1960년대 초부터 파리, 런던, 뉴욕 등지에서 부상한 구상 회화의 경향을 가리키는 명칭. 신구상은 프랑스 비평가 페리에J. L. Perrier와 라공Michel Ragon이 전후 추상미술*에 대립하여 1960년대 초 새롭게 부활한 구상화 경향을 나타내는 용어. 파리 마티아스 펠스 화랑에서 열린 두 번의 전시회에서 이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다.
1960년대 초 등장한 구상화의 경향들은 가시오- 탈라보Gerald Gassiot-Talabot가 정의한 서술적 미술, 피에르 레스타니Pierre Restany가 정립한 누보 레알리슴 *등과 혼동되어 사용되기도 하며, 어떤 비평가들은 팝 아트*를 이 경향 속에 넣어 이해하기도 한다. 또 루시 스미드Edward Lucie-Smith와 같은 평론가는 그의 저서 《70년대》에서 구상적 회화라는 타이틀 아래 세 가지 형상성을 구분하고 있는데, 바로 ‘사실주의자 회화’(여기에는 포토리얼리즘 등이 포함된다), ‘구상적 표현주의’ ‘서술적 구상*’이다. 신구상의 특징은 “추상의 폐허 위에서 신구상의 개념이 정의되기 시작한다. 이는 과거로 되돌아가려 함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계를 보여줄 수 있고 그것을 나타내줄 수 있는 새로운 구조를 창조하기 위해 탄생한다”라는 장 루이 페리에의 말에 잘 나타나고 있다.
아다미Valerio Adami(1935~ ), 에로Gudmunder Gudmundsson Erro, 모노리Jacques Monory, 텔레마크Hervé Télémaque 등이 보다 그 표현 방식을 분명하게 한 작가들이다. 반면 아펠Karel Appel(1921~ ), 베이컨Francis Bacon(1909~1992), 뒤뷔페Jean Dubuffet(1901~1985)와 같은 초기의 작가들은 이들보다 덜 냉정하고 객관적인 구상감각을 보였다. 이들은 일상적 현실과 신화 사이의 숨겨진 관계를 분석하고 미디어와 정치 등 인간의 동시대적 상황을 드러내려 했다. 이들이 사용한 기법도 BD, 영화기법과 유사한 분할, 사진과 에피스코프의 사용, 밋밋한 색조의 아크릴화 등으로 서로 유사하다.

신농도

신농도 神農圖

동양 인물화*의 한 화제(畵題). 신농은 중국의 전설상의 제왕(帝王) 중 하나이다. 백성에게 농사짓는 법과 제약법(製藥法), 시장을 개설하여 교역(交易)을 하는 법 등을 처음으로 가르쳤다고 한다. 농업의 신, 의약(醫藥)의 신, 역(易)의 신, 불의 신으로 숭앙된다. 그림에는 대체로 그가 풀옷을 입고 풀을 맛보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삼재도회三才圖會》의 삽화나 《성군현신상화책聖君賢臣像畵冊》(대북 고궁박물원 소장) 등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농사의 신이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지고 있다. 7세기에 축조된 오회분 4호묘와 5호묘에는 여러 신선들 외에 농사의 신, 야철(冶鐵)의 신, 제륜(製輪)의 신 등 인류 문명의 발달에 크게 기여한 전설적인 인물들의 모습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중 농사의 신은 흰 뿔과 푸른 눈을 한 사람의 형상으로 오른손에 벼이삭을 들고 앞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신도비

신도비 神道碑

죽은 이의 일생을 기록하여 묘역에 이르는 동남쪽 입구에 세운 비*. 신도(神道)는 신이 묘역에 이르는 길을 뜻하며, 풍수사상에 의해 묘의 동남쪽에 세운다. 조선시대에는 정2품 이상의 관직과 업적, 학문으로 후세의 모범이 된 사람의 묘에 신도비를 세웠다. 신도비는 대체로 비의 덮개 부분인 개석(蓋石), 비문을 새긴 비신(碑身), 비신을 꽂아 세우는 기대(基臺)로 구성되며, 기대 아래에 비 전체를 받치는 대좌*(臺座)가 있는 예도 간혹 있다.

신라 미술

신라 미술 新羅美術

신라는 사로斯盧라는 성읍국가가 핵심체가 되어 4세기로 들어서면서 실질적인 왕국으로 발전한 나라이며,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356~402)시대가 신라왕국 전환기의 김씨 왕족의 세력정착기로 파악되고 있다. 7세기 중엽에 백제, 고구려를 차례로 정복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단일국가를 이룩하였다. 신라의 미술 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는 경주 시내에 분포하고 있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과 이곳에 부장된 금은장신구, 칠기*, 무구, 마구, 유리기, 토기* 등의 부장품과 황룡사를 비롯한 절터 등의 불교 유적과 불상, 와당 등의 불교 조각과 건축물들이 있다.
고분:돌무지덧널무덤은 지하나 지상에 덧널을 짜넣고 그 속에 널과 껴묻거리를 넣은 후 덧널의 상부에 돌을 쌓고 그 위에 봉토를 씌우는 특이한 구조로 고구려나 백제, 가야와는 다른 독특한 형식이다. 대표적인 무덤으로 〈금관총金冠塚〉 〈금령총金鈴塚〉 〈서봉총瑞鳳塚〉 〈식리총〉 〈천마총天馬塚〉 〈황남대총皇南大塚〉 등이 있다.
공예:장신구로는 관귀고리, 목걸이, 허리띠, 금동식리(金銅飾履) 등이 있다. 관은 내관과 외관으로 되어 있는데, 내관은 중국에서 변(弁)이라 부르는 삼각형의 모자형이고 내관의 앞면에 새날개 모양의 장식을 꽂았다. 외관은 둥근 테에 세개의 출자형(出字形) 장식관과 두개의 사슴뿔 모양의 장식관을 작은 못으로 고정시켰고 여기에 금판으로 만든 장식과 곱은 옥*(曲玉)을 달았다. 귀고리는 귓불에 끼는 윗고리가 굵은 태환식(太鐶式)과 가는 세환식(細鐶式)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으며 중간 장식과 끝장식은 여러 가지 형태이다.
허리띠는 금, 은, 금동으로 만든 네모난 둥근 판에 하트형 또는 둥근 모양의 고리 여러 개를 가죽 또는 천으로 된 허리띠 표면에 작은 못으로 박고 여기에 여러 줄의 긴 장식을 달았다. 장식에는 손칼, 족집게, 약통 등이 있어, 각종 일상도구를 몸에 지니고 다녔던 북방 유목민족의 풍습과 연결된다. 무기로는 손잡이 끝에 둥근 고리가 달린 환두대도*(環頭大刀)가 대표적이다.
용기류에서는 서역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리기가 주목되는데,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에서 출토된 잔(盞)과 황남대총 남부에서 출토된 봉수형병(鳳首形甁)이 있다. 토기로는 밀폐된 가마*에서 고온으로 구워진 아주 단단한 긴 목항아리, 짧은 목항아리, 굽다리접시가 중심을 이루고 그 외에는 그릇받침 손잡이 달린 잔, 동물, 배 모양의 이형토기(異形土器)들도 있다.
회화:신라의 회화는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을 받으면서 신라 고유의 회화양식을 구축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 중에서 화적(畵跡)이 가장 알려지지 않았으나 천마총(天馬塚) 출토의 자작나무 껍질테에 그려진 천마도(天馬圖), 기마인물도(騎馬人物圖), 천마총, 황남대총(皇南大塚)에서 출토된 칠기(漆器)에 그려진 화염문, 봉황문 등이 발굴되었다. 이들 회화적 요소들은 공예를 주로 하던 장인들의 솜씨라는 점에서 당시 최고수준의 회화를 엿보기에는 미흡하나 능숙한 묘사력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에는 채전(彩典)이 설립되었음을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하여 알수 있는데, 후대의 도화원圖畵院과 같이 화원들이 활동을 한 국가기관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신랑

신랑 身廊 nave(영) nef(프)

‘배’라는 의미의 라틴어 ‘나비스(navis)’에서 유래한 건축 용어. 초기 기독교의 바실리카*식 교회당의 내부 중앙 부분으로 측랑*이 양쪽에 붙어 있는데, 열주*에 의해 구분된다. 정면, 현관 복도에서 내진*에 이르는 중앙의 긴 부분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로 사용된다.

→ ‘내진’ 도판 참조

신미술가협회

신미술가협회 新美術家協會
Neue Künstler-vereiningung München, NKV(독)

뮌헨을 지배하고 있던 유겐트슈틸*에 반대하고 후기 인상주의*와 야수주의*적인 경향에 의거하여 1909년 1월 설립된 표현주의* 작가들의 협회.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 카놀트Alexander Kanoldt, 에르프슬뢰Adolf Erbslöh가 주도하여 성립되었으며, 야블렌스키Alexej von Jawlensky(1864~1941), 쿠빈Alfred Kubin(1877~1959), 뮌터Gabriele Münter(1877~1962), 베레프킨Marianne von Werefkin(1860~1938) 등도 창립 회원이었다.
그 밖에 바움Paul Baum, 호퍼Carl Hofer(1878~1955), 베흐데예프Vladimir von Bechtejeff, 보시Erna Bossi, 코간Moissey Kogan, 무용수인 자하로프Sacharoff 등도 1909년에 잠시 참여했으며, 1910년에는 프랑스 작가인 지리외Pierre Girieud와 르 포코니에Henri Le Fauconnier(1881~1946), 1911년에는 제2회 전시를 보고 감명 받은 마르크Franz Marc(1880~1916)와 피셔Otto Fischer가 가입했다. 피셔는 이후 칸딘스키가 떠난 후 이 협회의 대변인이 되었다. 이 협회의 전시회는 모두 세 번에 걸쳐 개최되었다. 1909년의 첫 전시는 보수적인 관중이 그림에 침을 뱉을 정도로 대중과 비평가 모두에게 지나치게 급진적인 경향을 보였다.
두번째 전시는 보다 유럽적인 성격을 띠어 러시아의 부르류크 형제David & Vladimir Burljuk, 데니소프Wassili Denisoff, 모길레프스키Alexandre Mogilewsky 등과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 루오Georges Rouault(1871~1958), 브라크Georges Braque(1882~1963), 드랭André Derain(1880~1954), 반 동겐 Kees van Dongen(1877~1968),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k(1876~1958) 그리고 독일의 조각가 샤르프Edwin Scharff와 회트거Bernhard Hoetger 등 많은 초대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그러나 에르프슬뢰가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는 칸딘스키의 추상을 거부하자 칸딘스키를 비롯해 그와 예술적 사상을 함께 발전시켰던 뮌터, 야블렌스키, 마르크 등이 탈퇴하였고 회원 대다수는 유겐트슈틸과 야수주의적인 양식을 혼합한 경향으로 작업하게 되었다. 칸딘스키와 그의 추종자들은 청기사파*를 새로이 설립하였고, 신미술가협회의 제3회 전시일자와 같은 날에 최초의 전시회를 열게 된다.

신사

신사 神寫

대상에 내재되어 있는 정신성을 표현해 내는 것. 형사*(形似)와 대비되는 동양회화 용어이다. 직역하면 ‘정신의 닮음’이다. 훌륭한 그림은 본래 형사와 신사가 통일되어야 하는데 ‘형(形)’과 ‘신(神)’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시대마다 그 입장이 달랐다.
중국 춘추(春秋)시대로부터 양한대(兩漢代)까지는 형사를 더 중시했다. 그러나 동진東晋(317~420)의 고개지顧愷之(꾸 카이즈, 346~407)가 전신*론을 제시하면서부터 신사가 중시되기 시작했다. 아울러 그는 전신을 획득하는 방법으로 ‘이형사신(以形寫神;형상으로 정신을 그린다)’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남북조(南北朝)에서 수隨, 당唐에 이르는 동안은 ‘형’과 ‘신’이 함께 중시되었다.
송대(宋代)에 이르러서는 문인화*론의 발달로 신사가 더욱 중시되었다. 신사는 문인화의 이론이 정착되면서 회화 비평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북송北宋의 소식蘇軾(쑤 스, 1036~1101)은 “형사로써 그림을 논하는 것은 어린 아이의 견해와 같다”고 말했다. 원문袁文(위앤 원)은 “그림을 그릴 때 형의 묘사는 쉽지만 신의 묘사는 어렵다. 형이란 그 형체(形體)요, 신이란 그 신채(神彩)이다. 무릇 사람의 형체란 그림을 배우는 사람이면 모두 그려낼 수 있지만, 신채에 이르면 스스로 남을 앞지르지 못하면 표현해낼 수 없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진정한 신사는 형신겸비(形神兼備)를 통해서 얻어질 수 있다.
북송의 황휴복黃休復(후앙 시어우후, 10세기말~11세기초)은 육법*을 논하면서, “오직 형사와 기운(氣韻) 이 두 가지를 먼저 내세워야 한다. 기운은 있는데 형사가 없으면 바탕(質)이 무늬(文)를 앞서게 되고, 형사는 있는데 기운이 없으면 화려하지만 내용은 사라져 버린다”고 하였다. 여기서 ‘기운’이란 곧 ‘신사’이다. 조이도晁以道(츠아오 이따오), 양신楊愼(양 선) 등도 “그림이란 그저 형상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형신(形神)을 함께 있도록 하여야 한다”고 했다.

신사실주의

신사실주의 新寫實主義
New Realism(영)

신사실주의는 이미 1962년에 미국과 프랑스에서 팝 아트*를 달리 부르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용어는 미국에서 팝 아트의 의미로는 널리 통용되지 못했고 대신 새로운 형태의 사실주의*를 의미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사실주의는 인본주의적인 내용을 지녔고, 관찰한 실재 사물을 사실로 착각하도록 묘사했으며, 추상*에서 나온 평면적인 화면공간을 배격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뉴리얼리즘은 1950년대를 장악한 추상표현주의*에서 근본적으로 탈피한 미술임에도 불구하고 평면화된 공간, 거대한 캔버스*, 모더니즘* 회화의 단순화된 색채사용 등의 특징을 받아들였다.
신사실주의는 너무나 포괄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추상표현주의나 미니멀리즘을 추상으로 분류하는 식과 마찬가지로 신사실주의를 구상*이라고 간단히 정의하는 방법 외에는 정확한 의미를 규정지을 수 없다. 신사실주의는 포터Fairfield Porter의 평화스러운 풍경에서부터 닐Alice Neel의 교묘하게 내면을 드러내는 심리학적 초상화*, 그리고 펄스타인Philip Pearlstein(1924~ )의 추상화된 누드화에서부터 베크먼William Beckman의 지적인 자화상*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또 신사실주의란 용어는 비제스처적이거나 비표현적으로 물감을 다루는 기법을 의미하며, 이로써 표현대상의 외형을 충실히 전달하려는 경향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