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1 2 7

신조형주의

신조형주의 新造形主義
Neo-Plasticism(영)

네덜란드 화가 몬드리안Piet Mondrian(1872~1944)의 엄격한 기하학적 추상 양식과 그의 작품으로 형상화되는 예술에 관한 철학적 사상. 그는 예술은 ‘탈자연화(denatralized)’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는 미술작품에서 자연의 재현적 요소를 제거하고 순수한 추상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입체주의*와 신지학 등의 영향으로 화면에서 재현적 요소들을 점차 감축해가는 작업을 지속하다가 결국에는 조형요소를 수직선과 수평선, 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 백색, 회색, 검은색의 삼무채색의 8가지로 환원하였다. 보편적인 리얼리티를 구현하고자 했던 그는 이러한 방법을 통해 가변적이고 특수한 것에서 탈피, 불변하고 보편적인 법칙이라는 이상을 표현할 수 있다고 여겼다.
신조형주의는 양차 대전 사이에 유럽 각지에서 등장한 추상의 개념 중에서도 가장 순수성이 중시된 경우였다. 몬드리안은 철학자이자 신지학자였던 쇤마커스 박사Matthieu J.H. Schoenmaekers의 저술로부터 영향을 받아 ‘신조형(nieuwe beelding)’이라는 용어를 채택하였으며, 이는 그의 첫 출판물이자 1917~1918년에 11회에 걸쳐 《데 스틸》 지에 연재된 ‘회화에서의 신조형주의De Nieuwe Beelding in de Schilderkunst’에서부터 사용되었다. 1921년에 발표한 소책자 《신조형주의, 조형적 등가의 일반원리Le Néo-Plasticisme, Principe général de l’ équivalence plastique》는 1925년에 바우하우스* 총서의 하나로 재간행된다. 신조형주의는 1920년대의 구축주의* 운동과 디자인 및 이후의 추상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신중

신중 神衆

신중은 여래상이나 보살상과 같이 직접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신앙의 대상과 신앙인을 보호하는 의무를 지닌다. 신중은 정법을 수호하는 기능뿐 아니라 대승불교시대에는 호국의 기능까지 갖게 되었다. 신중은 원래 인도의 재래신들이 불타의 자비심에 감동되어 불교에 귀의한 후 불법의 유통과 옹호를 맹세한 성중(聖衆)을 말한다. 이후 불교가 각 지역에 전파되면서 그 지역의 토속신도 신중으로 유입되었다.
인도의 신으로는 제석천*, 대범천, 사천왕상*, 팔부신장 등이 있고, 중국의 도교적인 신인 칠성과 우리나라의 산신, 조왕신이 포함된다. 중국에서 신앙되었던 신중은 《금광명경金光明經》 〈귀신품鬼神品〉과 《재천의궤齋天儀軌》에 근거한 20천중으로 이들의 명칭은 대범천왕大梵天王, 제석천*帝釋天, 다문천왕多聞天王, 지국천왕持國天王, 증장천왕增長天王, 광목천왕廣目天王, 금강밀적金剛密迹, 마혜수라천摩醯首羅天, 산지대장散脂大將, 대변재천大辯才天, 공덕천功德天, 위태천*韋駄天, 견견지신堅牢地神, 보리수신菩提樹神, 귀자모신鬼子母神, 마리지천摩利支天, 일궁천자日宮天子, 월궁천자月宮天子, 사갈라용왕娑羯羅龍王, 염마라왕閻摩羅王이다. 명대(明代)에는 긴나라*緊那羅와 도교적인 신인 자미대제紫微大帝, 동악대제東岳大帝, 뇌신雷神이 추가되어 24천신이 신앙되었다. 한국에서는 통일신라시대*부터 화엄신중이 신앙되었고 조선시대에도 민간신앙과 밀교신앙이 결합되어 크게 신앙되었다.
이러한 신중신앙은 신중탱화(神衆圖)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중탱화는 대웅전, 극락전을 비롯한 모든 불전에 봉안되는 필수적인 불화로서 불전의 내부를 향하여 오른쪽 또는 왼쪽에 모셔진다. 신중탱화에 등장하는 신중은 천부, 천룡부, 명왕부로 나눌 수 있는데, 천부(天部)는 제석과 범천, 마혜수라천을 비롯한 천(天)들이고, 천룡부(天龍部)는 위태천과 팔부중을 비롯한 무장신들이다. 명왕부(明王部)에 등장하는 신들은 예적금강과 4금강, 8보살 등이다. 이들을 표현한 신중탱화의 형식은 18세기에 정착되었고, 이후 다양한 형식의 탱화가 다수 제작되었다.

신즉물주의

신즉물주의 新卽物主義
Neue Sachlichkeit(독)

제1차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일어난 미술운동. 개인의 내부로 침잠하려는 표현주의*와 엘리트주의적인 추상에 반대하고, 전후 혼란상을 사회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며, 사물 자체에 접근하여 객관적인 실재를 철저히 파악하려는 사실주의적인 특성을 지녔다. 1925년 만하임 쿤스트할레의 관장 하르트라우프Gustave Hartlaub가 ‘적극적이고 만질 수 있는 실재에 대한 충성을 지속해왔거나 되찾은 예술가들’의 <신즉물주의>전을 개최하면서 처음 사용되었다. 그는 명확하고 숨김없이 일상의 타락과 불쌍한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하고자 했던 1920년대 초 베를린 미술, 문학운동을 기술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다.
주로 뮌헨을 중심으로 형이상학적 경향의 전원풍으로 돌아간 카놀트Alexander Kanoldt와 슈림프Georg Schrimpf 등도 신즉물주의자에 속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작가들은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그로츠George Grosz(1893~1959), 딕스Otto Dix(1891~1969), 샤드Christian Schad(1884~1982) 및 베크만Max Beckmann(1884~1950)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딕스와 그로츠는 철저한 세밀묘사, 강한 색채와 과장된 캐리커처* 등의 방법으로 전쟁의 공포와 도시 사회의 퇴폐적인 면, 노동자들의 소외와 자본주의의 병폐, 성(性)의 폭력적 측면 등을 가차없이 그려냈다. 이들의 조형정신은 다다*, 초현실주의*, 이탈리아의 형이상학적 회화*와 연관되며, 사실주의적이면서 환상적인 이들의 표현방법으로 인해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신즉물주의는 현실의 객관적인 기록과 초현실적인 환상의 양극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기술지상(技術至上), 기계숭배, 소외와 물상화 현상을 긍정하기 쉬운 일면도 지니고 있었다. 한편 건축이나 공예* 분야에서 역사적 양식의 단순한 모방을 떠나 합목적성, 실용성을 추구한 1920년대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이 용어를 쓰기도 한다. 신즉물주의는 1930년대에 현실 비판적이고 사회적 병폐를 신랄하게 드러내는 요소로 인해 나치에 의해 퇴폐미술로 낙인찍혀 탄압을 받았다.

신체미술

신체미술 身體美術 Body Art(영)

신체미술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미술동향의 하나로서 인간의 신체를 표현과 조형의 매체로 사용한다는 데에 특징이 있다. 신체를 통한 행위가 미술 전개의 계기가 되므로 행위미술이나 행동미술*과 동일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신체미술은 개념미술*의 한 부류에 속하며 언어나 여타 재료의 개입 없이 육체적인 교감이나 감각을 통해 관람자에게 접근하게 된다. 이는 1960년대의 차가운 미니멀리즘*을 거부하는 한편, 당시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하던 신체에 대한 경향, 즉 병적인 섹스나 마약과 같은 것에 대한 미술가들의 반응이기도 했다. 주로 공공장소나 사석에서 열리는 퍼포먼스*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므로 비디오나 필름에 담겨진 기록의 형태로 보존되고 전시된다.
신체미술은 주로 자학적인 마조히즘이나 정신적 또는 심령적인 부분에서 영감을 얻어 전개된다. 육체의 모습을 왜곡한다든지(주르니악Michel Journiac), 자기 몸을 계획된 패턴에 따라 면도날로 긋는다든지(판Gina Pane), 구토, 찌푸리기 등의 행위를 통해 신체를 변형시키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신체를 공격하고 인체를 새롭게 재인식시킨다. 또는 영적 체험의 일환으로 자신의 몸을 공중에 띄우려고 시도하거나 근동의 고대 여신상 같은 자세의 자기 모습을 흙으로 재현하는 등 신체적 행위를 통해 정신적 구도에 이르려는 작업들을 행하기도 한다.
신체미술의 선례로는 1919년 뒤샹Marcel Duchamp(1887~1968)이 별 모양으로 머리를 깎음으로써 보여준 다다*적인 제스처나 1960년대의 만조니Piero Manzoni(1933~1963) 및 클랭Yves Klein(1928~1962)의 인체 작업들을 들 수 있다. 신체미술 경향은 조각이 애초 인간의 신체에 특별한 관심이 있으며, 조각가들 또한 인체를 날카롭게 인식하는 한편 관람자와 작품 사이에서 일어나는 생리적인 감정이입*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조각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따라서 조각가들이 자신들의 신체를 미술의 직접적인 매체나 주제, 대상으로 취급하게 된 것은 필연적인 과정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신표현주의

신표현주의 新表現主義
Neo-Expressionism(영)

‘신표현주의’라는 용어가 어떠한 경위로 처음 사용되었는지에 관한 기록은 없지만, 이미 1982년에는 새로 등장한 독일 미술과 이탈리아 미술을 설명하는 용어로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대중 매체가 지어낸 다른 많은 미술 운동의 명칭이 그러하듯이 대부분의 미술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신표현주의로 분류되는 데에 거부감을 나타냈다. 신표현주의는 미술사에 등장했던 모더니즘*과 개념미술*에 반발하여 나타난 미술이다.
신표현주의 미술가들은 자신들이 교육받아 온 토양인 개념미술 형식에서 등을 돌린 후 이젤에 그림을 그리고, 주형을 뜨거나, 손으로 깎아 조각*을 만드는 전통적인 미술 제작 방식을 선택했다. 신표현주의는 모더니즘과 모더니즘 이전의 미술에서 영감을 찾은 반면 미니멀리즘*의 절제와 개념미술의 냉정함을 버렸다. 그리고 알레고리*나 제스처*적인 물감처리와 같이 이전에 금기시되던 수단을 통해 격렬한 감정을 표현했다. 신표현주의는 널리 확산되었고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대표하며 또 세대교체를 상징한다.
신표현주의 미술의 형식이나 내용을 일반화하여 설명하기는 힘들다. 신표현주의의 이미지는 신문의 헤드라인과 초현실주의*의 꿈에서부터 고대 신화와 삼류 소설의 표지에 이르기까지 그 원천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독일 미술가들은 자국의 문화가 철저히 부정되어 버린 제2차세계대전 이후를 주제로 하기 위해서 20세기초의 표현주의* 기법을 답습했다. 슈나벨Julian Schnabel(1951~ )같은 미국 미술가들은 역사적 이미지를 절충하여 사용함으로써 매우 개인적이면서 암시성이 풍부한 작품을 창조했다.
그밖의 미술가들은 동시대 사건을 다루면서 날카로운 사회 비평을 가한 작품을 내놓았다. 전통적이며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형식과 격렬하고 감정적인 내용의 작품으로 회귀한 신표현주의는 1980년대의 미술 시장이 폭발적인 호황을 누리는데 일조했고, 국제 미술계에서 누려왔던 미국 미술의 우위에 종지부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