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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강석굴

운강석굴 雲岡石窟 Yün-kang(중)

중국 산서성山西省 대동大同의 서쪽 15㎞지역인 운강진雲岡鎭에 있는 석굴사원. 무주천武州川의 남서쪽 벼랑을 파서 만든 것으로, 전체 길이는 약 1km이며, 대굴 21개 중굴 20개와 무수한 소굴, 불감*(佛龕)으로 되어 있다. 석질은 밝은 색의 사암(砂岩)으로 거의 전부가 북위北魏 시대에 조성된 것이며 벽에 직접 조각하여 색을 칠하였다. 《위서魏書》 〈석노지釋老志〉에 화평 원년(460), 사문통(沙門統) 담요曇曜(탄 야오)의 발의로, 석가불*, 미륵불, 아미타불*, 약사불, 비로자나불*의 오대불(五大佛)을 다섯 석굴 속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것이 제16~20동의 소위 담요오굴(曇曜五窟)인데, 석굴군의 서쪽에 있다.
제일 큰 석굴은 돔*형식의 제19동으로 높이 16.48m의 좌불본존(坐佛本尊)을 중심으로 둘레벽의 천불(千佛), 좌우협동(左右脇洞)으로 되어 있고, 협동에는 협시*불(脇侍佛)에 해당하는 큰 상이 있다. 제20동의 본존은 높이 13.46m의 좌불인데, 앞쪽 벽이 무너져서 상이 노출되어 있다. 어깨 폭이 넓은 상체나 융기선으로 된 옷주름의 표현은 서방 양식을 연상시키고, 협시와 같이 평평하면서 늠름한 얼굴 모양은 운강 초기의 특징을 보여준다. 제18동은 높이 16.38m의 본존 입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 입상이 있고, 다시 그 협시상과 본존 사이에는 보살이 있으며 위쪽에는 십대제자가 있다.
제17동의 본존은 높이가 16.25m에 두 다리를 교차시킨 교각의 미륵상이고, 제16동의 본존은 높이 13.5m의 불입상인데, 둘 다 얼굴모양이나 체구는 풍만하고 법의는 얇아서 굽타 양식과 중앙아시아*의 여러 기법을 종합한 운강 특유의 양식을 보여준다. 석굴군의 중앙에 위치하면서 담요 5굴과 같은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제7, 8동은 작은 감을 나란히 배치한 석굴인데, 이것은 뒤이어 제9, 10동, 그 다음으로 제1, 2동이 만들어지고, 태화 18년(494)에 효문제孝文帝가 낙양洛陽으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제5, 6동도 만들어져, 전부 21개의 대굴이 거의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이 석굴은 탑을 중앙에 배치한 탑굴도 있어서 인도의 고대 탑원굴 형식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초기의 담요 5굴, 제7, 8동과 말기의 제5, 6동에서는 꽤 심한 양식적 차이를 볼 수 있는데, 초기의 불상에서 볼 수 있는 형태상의 특징 즉, 균형이 맞지 않는 소박한 형태는 말기 불상*에 이르면 보다 세련되고 잘 다듬어져서, 신체 표현도 눈에 띄게 화사해진다. 신체에 밀착된 얇은 법의와 융기선으로 처리된 옷주름은 말기가 되면 전신을 덮은 두꺼운 주름으로 나타나고, 옷자락이나 소매부분에서는 지느러미처럼 넓어진다. 보살과 공양인상*(供養人像)도 초기의 거칠고 뻣뻣한 모습에서 부드럽게 변한다. 또한 선비족(鮮卑族)이 중국과 동화되면서 중국식 복제(服制)를 채택하는 등의 정치적인 원인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제21동 이하 서쪽에 있는 동굴들과 오화동(五華洞, 제9~13동) 등의 소불감(小佛龕)은 낙양 천도 이후, 즉 용문기(龍門期)에 만들어졌다. 운강석굴 양식이 어느 정도의 범위까지 퍼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북위가 지배했던 화북華北 일원까지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되며 인도 및 중앙아시아의 문화교류 및 한국과 일본의 고대문화에 영향을 준 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