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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

유화 油畵
oil painting(영) peinture á l’huile(프)

안료를 녹이는 매재*로서 린시드유*를 사용한 그림. 유채화라고도 한다. ‘유화’라는 용어는 그림을 그리는 방법에 대해서도 쓰여지고, 그러한 방법으로 그려진 그림에 대해서도 쓰여진다. 유화 기법의 특징은 다른 기법과 비교해서 색조, 색의 농담을 쉽게 얻을 수 있는 동시에 선적 표현도 가능하고 광택, 반광택, 무광택의 효과, 혹은 불투명, 반투명, 투명의 묘법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으며 두꺼운 칠, 얇은 칠, 혹은 기복의 변화가 있는 화면 등 재질감의 표현이 가능하다. 또한 제작 중의 색과 건조 후의 색의 변화도 없는 등의 장점을 가진다. 여러 시대에 걸친 각 유파의 기법이 구조와 외양에 있어서 다르기 때문에, 그림의 방법과 재료 등 매우 다양한 범위에 걸쳐 사용되었다. 그러나 유화라고 부를 때 그 공통적인 특징은 매재에 건성유*를 사용하는 것이다.
유화가 15세기 초반 반 아이크van Eyck에 의해 발명되었다고 하는 바자리Giorgio Vasari(1511~1574)의 주장은 잘 알려져 있지만, 유화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반 아이크는 햇빛에 쬐지 않고서도 마르는 바니시*를 연구하는 동안 린시드유와 호도유에서 이러한 성징을 발견하였다. 반 아이크는 이러한 기름을 색소에 대한 매재로 사용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기름이 이보다 훨씬 이전인 중세에 이미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어쨌든 반 아이크가 보다 나은 유연성, 보다 풍부한 색조, 보다 범위가 확장된 명암을 유럽 회화로 유입하면서 유화의 기법상 하나의 혁명을 실현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와 같이 초기 플랑드르파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이 새로운 화법이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에 의해 이탈리아로 전해졌고, 이때부터 새로운 유화 방법의 보다 큰 잠재력이 표출되기 시작하여 점차 종래에 성행하던 템페라*화와 교체되기에 이르렀다. 세부적인 명암의 변화, 색채와 대기의 자연주의적인 재현, 공간에 입체적으로 표현되는 형식, 색조의 미묘한 변화와 혼합 등 이러한 특징은 템페라로는 처리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제 물감은 조직적인 특질을 갖고 있는 실체로 인정되고, 그 자체의 표현성을 살리면서 사용되기에 이르렀는데, 유화의 가장 큰 특징이랄 수 있는 이러한 기법이 르네상스* 화가들 중에서도 티치아노Tiziano(1485~1576)의 후기 작품에서 절정에 달하였다. 티치아노는 그림의 구조와 입체감 표현 작업에 있어서 주로 색채와 안료에 의존하였다.
17세기에는 루벤스Pieter Paul Rubens(1577~1640),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a Y Velasquez(1599~1660), 렘브란트Rembrandt(1606~1669)를 통하여 다양한 유화 기법이 완벽하게 구사되었다. 이들은 유화만이 가능한 제작의 신속함과 분방함, 미묘한 명암의 변화 등을 능숙하게 처리하여 바로크 회화의 양식 형성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19세기 중반에는 두 가지 면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그 하나는 상업적인 재료상이 등장하여 화가가 직접 하던 재료의 제조과정을 떠맡았다는 것이다. 짤 수 있는 주석 튜브의 발명은 이전에 사용되었던 불편하고 지저분한 주머니를 대신하여 작업 면에서 기본적인 변화를 가져 왔다. 뿐만 아니라 옥외에 나가 자연을 직접 그릴 수 있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매재로서 포피유의 사용은 천천히 마르는 그림을 만들게 되었지만, 동시에 두껍게 버터를 바른 듯한 견고함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견고함은 붓 터치와 같은 거친 흔적을 보존할 수 있게 했는데 이전에는 그러한 흔적들이 곧 평평하게 사라져 버리기 일쑤였다. 이 같은 물감 성질의 변화는 덧칠해서 원하는 색채를 내는 방법이 아닌, 직접 또는 프리마묘법*으로 그리는 것을 선호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유약칠과 바림(scumbles)으로써 투명 또는 반투명의 물감을 여러번 덧칠하여 그리는 방식이 아니라, 이제는 화가가 마치 그림의 마지막 단계에서 나타나는 효과를 의도했던 것처럼 색채를 부분적으로 칠한다.
또한 직접 그리는 방법은 자연스러움과 충동성을 나타낼 수 있게 하였다. 이전에는 그릴 것을 머릿 속에 구상해 놓은 체계가 있어야 했다. 이제는 세심한 소묘와 주의깊은 밑그림 작업에 따라 단계적으로 조심스럽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밑그림이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단 한 번의 덧칠을 하거나 아니면 거의 덧칠을 하지 않고서도 그림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많은 19세기 화가들에게는 장식적인 붓터치가 더이상 그림의 표현적인 종속물이 아니라, 그림의 본질적 요소가 되었고, 그들 양식의 뚜렷한 특징을 갖게 하였다.
두번째 변화는 인상주의자들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16세기와 17세기의 화가들은 몇 개 안되는 비교적 밝은 색채를 사용했다. 그래서 그들은 보다 짙은 색조의 사용을 선호하였는데, 이러한 색조로서 미와 강렬함을 최대한 나타낼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는 보다 많은 밝은 계통의 색채, 특히 금속성의 색채를 이용할 수 있게 되어, 그들의 팔레트는 연보라색, 보라색, 밝은 녹색, 오렌지색, 다양한 청색, 강렬한 노란 색 등으로 더욱 풍부해졌다. 그러나 인상주의자들에 의한 이러한 새로운 방법은 물감의 보다 밝고 풍부한 효과를 만들어내기보다는 빛과 대기를 재현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낸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유화의 역사는 끊임없이 불안한 실험양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5세기 초나 19세기 중반에 일어났던 새로운 미적 전개가 매재를 다루는 방법에 따른 새로운 기법의 소개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던 것에 비추어 보면, 20세기의 유화는 이에 비견할 만한 중요한 혁신을 보이지는 못했다. 다만 20세기의 가장 특징적인 혁신은 삼차원적인 구조물에 유화를 결합하는 방법을 고안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