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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장

인장 印章

특정한 이름이나 모양을 찍기 위해 금속, 나무, 돌, 조개 등을 새겨 만든 물건. 인장은 가지고 있는 사람의 신분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황제나 황후가 사용하는 것을 따로이 ‘새(璽)’나 ‘보(寶)’라 하고, 그 밖에 관청이나 일반에서 사용하는 것을 ‘인(印)’이나 ‘장(章)’이라 불렀다. 인장은 사용자에 따라 어부인(御府印), 관인(官印), 사인(私印)으로 나뉘며, 요철에 따라 주문(朱文)과 백문(白文)으로 나뉘고, 새김방법에 따라 주인(鑄印), 각인(刻印), 착인(鑿印)의 구별이 있으며, 생김새에 따라 방인(方印), 반통인(半通印), 원인(圓印), 타원인(恕圓印), 호로인(葫蘆印), 철형인(凸形印), 연주인(連珠印), 정인(鼎印), 금인(琴印), 삼선형인(三扇形印), 편방인(扁方印), 천대인(穿帶印), 사면인(四面印), 오면인(五面印), 육면인(六面印), 자모인(子母印), 삼합인(三合印), 대구인(帶鉤印) 등으로 나뉘고, 구리, 쇠, 금, 은, 옥(玉), 마노(瑪瑙), 수정(水晶), 보석, 밀랍(蜜蠟), 돌, 상아, 뿔, 나무, 대(竹), 자기, 기와, 진흙 등 재료에 따라 구분하기도 한다. 그 밖에도 서화(書畵)에 찍는 인장은 보통 ‘도장*(圖章)’이라고 하는데 그 찍는 위치에 따라 위쪽에 찍는 것을 수인(首印), 자유롭게 찍는 것을 유인(遊印)이라고 하며, 감정가가 찍는 도장을 ‘감정인(鑑定印)’, 수장가가 찍는 도장을 ‘수장인(收藏印)’이라고 한다. 인장의 개수는 과(顆)로 세고 이를 찍는 것을 방(方)이라 부른다.
인장은 신석기 시대의 중국의 인문토기(印文土器)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는데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의 토인(土印)이 그 효시라 할 수 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정식 인장은 하남성河南省 안양安陽에서 발굴된 것으로 기호와 같은 원시 문자가 양각으로 새겨진 3과의 은새(殷璽)이다. 주대(周代)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부터는 고녑이 있었는데 현존하는 대부분의 것은 전국시대 이후의 것이다. 고녑은 관인(官印), 사인(私印)의 구별이 있어서 관인은 관리에게 신분증명으로 주어졌으며 관직에서 물러날 때는 이를 반납하였다. 관인은 죽간*(竹簡)이나 목간(木簡)을 봉인하는데 사용되었으며 물품 교역시 증빙에도 쓰였다. 이들은 대개 꼭지가 달린 작은 동인(銅印)으로서 때때로 커다란 것도 있었다. 인장에는 길어(吉語)인 ‘천추(千秋)’ ‘대길(大吉)’ 등의 좋은 글씨를 새기거나 인물, 동물 등의 형태를 넣기도 하였다.
진, 한대(秦漢代)는 지위의 고하에 따른 인장의 호칭과 그 재료 등의 구분이 제도화되어, 천자(天子)의 옥새(玉璽)와 일반의 인장(印章), 관인과 사인간의 구별이 생겼으며 관인도 지위 고하에 따라 그 크기가 규제되었다. 수, 당대(隋唐代)에는 일관일인(一官一印)제도가 수립되어 인장의 제도와 형식이 변하였는데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새(璽, xi)’의 발음이 ‘사(死, si)’와 같다고하여 이를 부르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새(璽)’를 ‘보(寶)’라 불렀다. 한편 이 때부터 새로이 감장인(鑑藏印)이 발달되고 사용방법도 한대(漢代) 이후로는 봉인(封印)에서 날인(捺印)으로 바뀌었다. 인장은 송대(宋代)에 이르러 문인 사대부의 낙관인(落款印)이 유행하고 원, 명대(元明代) 이후로는 전각*(篆刻) 예술로 발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전각’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