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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펜던트 그룹

인디펜던트 그룹 Independent Group(영)

영국의 전위적인 미술 단체. 1952~1955년 테크놀로지, 커뮤니케이션, 대중 문화와 관련된 주제에 대한 런던의 아이시에이*의 멤버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그룹이었고, 아이시에이의 부설단체로 출발했다. 따라서 이 그룹의 본래의 목적은 대중을 위해 아이시에이가 주최하는, 강연회의 주제와 연사를 결정하는 데 있었다. 단체전을 한 번도 열지 않았던 이 그룹은 비평가 알로웨이Laurens Alloway(1926~1990)가 이론가로서 활약했고, 존 맥헤일John McHale, 에두아르도 파올로치Eduardo Paolozzi(1924~ ), 프랭스 코델Frank Cordell, 앨리슨 스미슨Alison Smithson, 피터 스미슨Peter Smithson, 리처드 해밀턴Richard Hamilton(1922~ ) 등이 그 주요 멤버였다.
인디펜던트 그룹은 현대 도시 사회의 대중매체인 영화, 광고, 공상과학소설, 팝 음악 등에 대해 폭넓은 이해를 갖고 있었으며, 그것들로부터 많은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미국에서 일어난 상업주의는 영국 미술가들에게 많은 아이디어를 주었는데, 특히 상품의 포장 디자인, 인간과 상표에 대한 새로운 규범 등이다. 이들의 아이디어는 결국 영국의 팝 아트*의 발단이 되었는데, 브리티시 팝(British pop)이란 말도 알로웨이가 명명했다. 영국 팝아트가 탄생하게 된 대중문화에 대한 논쟁(1954~1955)은 1954년 미국 여행에서 대중 잡지를 수집해온 존 멕헤일과 알로웨이에게서 이루어졌다. 이 단체는 <인생과 미술의 평행선Parallel of Life and Art>(1953), 그리고 <이것이 내일이다 This is Tomorrow>(1956)라는 전시회에 참가했다.

인면탑

인면탑 人面塔

캄보디아*의 앙코르* 시대 유적 중에서 프라사트*(탑당)의 사면(四面)에 커다랗게 사람 얼굴을 표현한 것을 가리킨다. 자야바르만Jayavarman 7세(재위 1181~1220)에 의해 세워진 불교 사원 〈바욘Bayon〉 이외에 〈타 프롬Ta Prohm〉 〈프레이 칸〉 〈반테아이 크데이Banteay Kdei〉 〈타 솜〉 등의 사원과 〈앙코르 톰〉의 성문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는 이 시대 건축의 한 특징인 것으로 추정된다. 50여 개에 이르는 이 얼굴은 불교의 로케쉬바라*(관음보살)를 나타낸다고 알려져 있다.

인물십팔묘

인물십팔묘 人物十八描

중국 인물화* 기법 용어. 역대 인물 화법을 18종의 옷 묘법(描法)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명대(明代) 왕가옥汪砢玉(우왕 로위)의 《산호망珊瑚網》, 추덕중鄒德中(처우 떠쭝)의 《회사지몽繪事指蒙》, 주이정周履靖(저우 리징)의 《이문암독夷門庵牘》 등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십팔묘는 중국 인물화 선묘예술의 발전을 반영하는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고고유사묘(高古遊絲描)*;부드럽고도 가는 첨필(尖筆)로서 누에가 실을 토하는듯 하다. 고개지顧愷之(꾸 카이즈, 346~407)에서 볼 수 있고 육조(六朝)시대의 인물화*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②금현묘*(琴弦描);가야금을 그치지 않고 타내려가는 듯 부드럽게 필선이 이어진다. 고고유사묘와 같은 유형이나 보다 거칠고 굳건하다. ③철선묘*(鐵線描);석면이나 철선에 비유될 정도로 강하다. 당대(唐代)의 화가 주방周昉(저우 황)의 철선묘가 유명하다. ④행운유수묘*(行雲流水描);고요한 계곡의 흐름과 같으며 구름이 가는 듯 온화하다. ⑤마황묘*(螞蝗描);난초잎이 자연스럽게 꺾여진 듯하다 하여 난엽묘(蘭葉描)라고도 한다. 정봉(正鋒)의 첨필로서 모가 나도록 구사된다.
⑥정두서미묘*(釘頭鼠尾描);뒤로 갈수록 가는 세필을 구사하여 정봉(正鋒)이 쥐의 꼬리와 같이 된다. ⑦혼묘*(混描);옷의 주름에 있어서 농담묵(濃淡墨)의 필묘가 혼합된다. ⑧궐두묘*(橛頭描);‘궐두정묘(橛頭釘描)’라고도 한다. 선묘가 가느다란 나무말뚝과 같으며, 질박하고 간솔하다. ⑨조의묘*(曺衣描);북제北齊시대의 조중달曺仲達(차오 쭝따)의 인물화에 나오는 꽉 끼고 좁은 의습선과 같다. 붓을 이용해 곡선으로 이루어진 옷주름을 표현한다. ⑩절로묘*(折盧描);첨필과 대필(大筆)로 가늘고 긴 선을 이룬다. 선이 길고 가늘어 마치 갈대를 꺾는 듯한 느낌이다. 남송南宋의 양해梁楷(량 카이)가 자주 사용하였다. ⑪감람묘*(橄欖描);용필의 처음과 끝이 가늘고 중간은 거칠어 그 형세가 마치 감람(올리브 나무)과 같다. ⑫조핵묘*(棗核描);첨필로서 장봉(藏鋒)을 이루며 필두(筆頭)가 마치 대추씨와 같다. ⑬유엽묘*(柳葉描);버들잎이 바람을 맞는 것 같다. 가늘고 부드러운 의습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⑭죽엽묘*(竹葉描);용필이 마치 대나무잎과 같다. 거칠고 딱딱한 의습을 표현한다. ⑮전필수문묘*(戰筆水紋描);정봉과 장봉으로서 그 빠르기가 파도가 밀려오는 듯 하다. 오대(五代)의 주문구周文矩(저우 윈지)가 많이 사용하였다. ⑯감필묘*(減筆描);절제되고 간략한 선묘로서 선화(禪畵)에서 많이 사용된다. ⑰시필묘*(柴筆描);마른 울타리 또는 땔나무와 같다. 날카로운 필세를 보이기도 하고 대감필(大減筆)을 보이기도 한다. ⑱구인묘*(蚯蚓描);마치 지렁이가 기어다닌 흔적처럼 곡선을 나타내며 용묵이 수윤하고 장봉을 이룬다.

인물화

인물화 人物畵 figure-painting(영)

사람을 주제로 하여 그린 그림의 총칭. 동서를 막론하고 회화사의 발전과 전개는 인물화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으며, 가장 오랜 옛날부터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인정되어 온 제재이다. 본래는 특정 개인을 개체적 특징에 의해 작성하는 초상화*, 또는 그와 같은 개인의 모임을 그린 집단 초상화를 말한다. 전신상뿐만 아니라 상반신이나 두부를 그린 것, 군중을 그린 것도 포함된다.
물론 사람을 주제로 하는 것이 반드시 사람만을 그려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신인동형(神人同形)의 신화 등에서 주제를 택한 신화에 관한 그림이나 의인법을 쓴 우의화 등도 인물화와의 구별이 어렵다. 역사적 사건을 그림 역사화*, 나체를 그린 누드화, 일상 생활을 그린 풍속화* 등도 광의의 해석으로는 인물화에 포함된다. 이들은 내용, 제재에 따라 초상화, 신화화, 종교화*, 역사화, 풍속화, 나체화*, 전쟁화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특히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풍경화*, 풍속화 등이 독립된 회화 장르*로 발전되기 이전, 동양에서 송대(宋代)의 산수화*가 발전하기 이전에 약간의 예외가 있더라도 회화는 곧 인물화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주제였다.

인보

인보 印譜 yin-pú(중)

옛 인장*, 또는 전각가(篆刻家)가 새긴 인장을 모아서 계보에 맞게 책으로 만든 것. 당唐의 장언원張彦遠(즈앙 이앤위앤, 815~875경)의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의 한 부분인 〈서고금공사인기敍古今公私印記〉가 당대(唐代)의 감장인(鑑藏印)을 모아 수록하고 있어, 인보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보라는 형식이 성립된 것은 북송北宋의 휘종徽宗이 옛 도장을 수집해서 편집해 놓은 《선화인보宣和印譜》가 처음이지만, 현재는 전하여지지 않는다. 남송南宋 왕기王夔(우앙 치어우)의 《소당집고록嘯堂集古錄》에도 한漢, 위魏, 진秦 때의 공사인(公私印) 37개를 싣고 있어, 불완전하나마 인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왕후지王厚之(우앙 허우즈)의 《복재인보復齋印譜》는 현재 《한진인장도보漢晋印章圖譜》로서 전해지고 있다. 이 밖에 양극일楊克一(양 커이)의 《도서보圖書譜(集古印格)》, 안숙하顔叔夏(이앤 쑤시아)의 《고인보古印譜》, 강기姜夔(지앙 쿠에이)의 《집고인보集古印譜》 등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 또한 현재는 전하여지지 않는다. 원대(元代)에는 조맹부趙孟頫(자오 멍후, 1254~1322)의 《인사印史》가 있어 한, 위의 인장 340개를 모각하였다. 또 양준楊遵(양 쭌)의 《집고인보》, 오맹사吳孟思(우 멍쓰)의 《오씨인보吳氏印譜》 등도 있었지만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명대(明代)에 고종덕顧從德(꾸 충더)이 왕상王常(우앙 츠앙)과 함께 이제까지의 고인보를 모두 모아 새롭게 《집고인보》를 편집하여 만력 3년(萬曆, 1575)에 이를 간행한 이래로, 고동인보(古銅印譜)가 잇달아 저술되고, 전각도 부흥하여 그 각인(刻印)의 인보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청대(淸代)에는 인장에 대한 학문이 성행하여, 새로 출토된 옛 동인장도 첨가하고 방대한 연구도 이루어져 우수한 인보가 나타났다. 동시에 명대에 시작된 문인의 전각이 청 건륭 연간(乾隆, 1736~1795)에는 더욱 유행하고, 이와 함께 각인의 인보도 많이 만들어져, 청 말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명, 청의 인보는 인전(印箋)에 검인한 것을 모은 서책으로, 감상가의 서문을 붙여 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인상주의

인상주의 印象主義
Impressionisme(프)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일어난 회화 운동. 인상주의는 단일한 이념이나 명백한 원리를 갖는 유파라기보다는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었다. 최초의 중심 인물은 모네Claude Monet(1840~1926),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1841~1919), 시슬리Alfred Sisley(1839~1899) 등으로 이들은 글레이르(Marc) Charles Gleyre(1808~1874)의 제자들이었으나, 1863년 마네Edouard Manet(1832~1883)의 전시회 이후 아카데믹한 교습에 불만을 품어, 피사로Camille Pissaro(1830~1903), 세잔느Paul Cézanne(1839~1906), 모리조Barth-Marie Morisot(1841~1895), 기요맹Armand Guillaumin(1841~1927)과 친교를 맺고 몽마르트르의 카페 등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다. 이후 드가Edgar Degas(1834~1917)와 마네, 비평가 뒤레Théodore Duret 및 리비에르Georges Rivière도 합세하고, 화상 뒤랑-뤼엘Paul Durand Ruel의 후원을 받게 된다.
1873년 살롱*이 피사로, 모네, 르누아르, 세잔느, 시슬리의 그림을 거부하자, 이를 계기로 이듬해인 1874년 4월, 사진작가 나다르Nadar의 작업장에서 자신들의 앙데팡당* 전시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를 자칭 ‘무명화가 및 조각가 판화가 예술가 협회전Société anonyme des artistes peintres, sculpteurs, graveurs’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출품자 중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인용하여, 신문기자 르로이Louis Leroy가 《르 샤리바리Le Charivari》지에서 이들 모두를 ‘인상주의자’라고 조소적인 의미로 명명한 것이 후에 그들 자신에게도 그대로 받아들여져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들에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는 어려우나 대체적으로 아카데미*의 전통 교육과 낭만주의*의 기본 이념에 반대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예술가의 정서 상태보다도 오히려 자연 혹은 삶의 편린들을 가능한 한 객관적이며 과학적인 정신에 의해 기록함을 예술의 제일의 덕목으로 삼는 사실주의*의 태도에 동조했다. 이 운동은 19세기 후반에 널리 보급되었던 과학적 사실주의의 한 일환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들의 예술관은 사회주의 사실주의*와는 달리, 사회의 개혁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인상주의의 시대적 배경으로는 자포니슴*의 만연과 사진기의 발달로 인한 미술의 초상화적 기능의 쇠퇴, 또한 현대 시민사회의 형성과 광학의 발달, 그리고 고전주의 역사화에 대한 반발 등으로 요약해볼 수 있다.
인상주의자들의 주제는 매우 다양했는데, 마네는 18세기 전통적 주제들을 사실적으로 변형했고, 르누아르는 귀여운 여인이나 아낙들, 아름다운 풍경들을, 드가는 경마, 무희, 세탁부, 재봉사들을, 시슬리, 피사로, 모네는 주로 풍경에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형태 구성을 피하고, 마치 카메라가 우연히 한 장면을 찍은 것처럼 즉각적인 시각적 인상의 효과를 전달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우연성의 인상은 의도적으로 계획된 것으로, 예컨대 드가는 현장에서의 스케치를 자신의 작업실에 와서야 비로소 그림으로 구성했다. 마네는 1870년 이후에야 외광파*로 전환했다. 르누아르의 방향 전환은 검은 음영과 윤곽선을 배제하고 ‘색채 분할 기법’ 혹은 점묘법*, ‘아롱다롱한 색체계(rainbow palette)’ 등을 도입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풍경화는 이제 망막의 실제 이미지를 재생하고 밝은 관선에 비친 생생한 장면의 등가물을 그림물감으로 재창조하는 행위가 되었다. 음영은 회색이나 검정색이 아니라 대상의 보색으로 칠해지고, 윤곽선을 배제함에 따라 대상의 입체성이 상실되며, 따라서 인상주의 회화는 빛과 대기의 회화, 지시색과 반사색의 유희로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기법은 바르비종파*의 페냐Diaz de la Peña의 영향 아래 1860년대 말, 르누아르에 의해 도입되어 1870년대 초 피사로, 모네, 시슬리에 의해서 채택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들의 풍경화에서 빛과 대기를 통해 표현된 기후와 계절 등의 효과에 대한 민감성은 콘스터블John Constable(1776~1837)과 터너William Turner(1775~1851)에 의한 풍경화 양식에서 영향받은 바가 컸다.
그리고 전통적인 다갈색 대신 흰색이 초벌칠된 캔버스 위에 혼합되지 않은 그림물감을 사용하는 필법, 검정색의 배제 등은 직접 관찰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것은 쇠라Georges Seurat(1859~1891) 등 신인상주의* 화가들이 점묘법에 의해 과학적 기초를 획득하고자 한 것이었다. 모네는 인상주의 개념에 일관되게 충실했던 거의 유일한 화가인데 점차 빛과 대기에 몰두,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섞지 않는 대신 색채를 분할하여 공간을 해체하는 등 인상주의 기법의 한 전형을 개척했다. 인상주의의 특징들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미술 이외의 다른 가치기준들이 예술에 관여하는 것을 금했다. 둘째, 비례, 균제, 규칙성 등의 기하학적 법칙들을 거부한다. 자연을 모방하는 참된 방식은 선이나 형태가 아닌 색 자체에 충실하게 지각하고 묘사하는 것이다.
한편, 1870년대에 인상주의 그룹과 유대를 맺었던 세잔느는 더 이상 우연적인 장면을 재생하는데 관심을 갖지 않고, 한 장면의 속성을 보유케 하는 형태, 연관들에 대한 그 자신의 생각을 전개했다. 르누아르 역시 1880년대에 들어 인상주의의 주된 특징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실재의 우연적 현상보다는 그 영속적 구조에 대한 관심은 쇠라와 세잔느로부터 입체주의*, 그리고 이후에 이르기까지 전개되었다. 인상주의 이론에 의해 제기된 과학적 리얼리즘은 그 이후의 미술 운동의 흐름에서 퇴조하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주의는 근대 예술 이론을 전개하는 출발점으로서 여전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인상주의는 사상사적으로 경험론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고 볼 수 있는데, 경험론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우리의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얻어진다’는 것이다. 경험주의자들은 경험 이외에 다른 어떤 선험적 원리나 본질을 가정하지 않고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획득되는 방식을 오직 경험에 의해서 설명하려 하는데, 태도 면에서 인상주의자들은 경험론자들이라 말할 수 있다.
인상주의자들의 화법의 배후에는 화가의 임무는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라는 사실주의 사상이 있었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온 윤곽선의 사용법이 실제로는 근거 없는 공상에 불과하고 오히려 색채들을 투명하게 화폭에 옮기는 것이야말로 참된 자연을 묘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선이나 형태는 추상적인 기하학적 존재로서 실제의 살아있는 자연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다. 경험주의자들의 설명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선을 직접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 구성해내는 것이다. 실제로 선이나 형태는 최소한 두가지 이상의 색깔들을 필요로 하고 그 색깔들의 관계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다. 인상주의자들은 색깔들을 관찰하는 것이 자연을 엄밀하게 관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의 빛을 붓자국으로 성실하게 캔버스에 옮기는 것이 소위 색조분리의 법칙이다.

인장

인장 印章

특정한 이름이나 모양을 찍기 위해 금속, 나무, 돌, 조개 등을 새겨 만든 물건. 인장은 가지고 있는 사람의 신분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황제나 황후가 사용하는 것을 따로이 ‘새(璽)’나 ‘보(寶)’라 하고, 그 밖에 관청이나 일반에서 사용하는 것을 ‘인(印)’이나 ‘장(章)’이라 불렀다. 인장은 사용자에 따라 어부인(御府印), 관인(官印), 사인(私印)으로 나뉘며, 요철에 따라 주문(朱文)과 백문(白文)으로 나뉘고, 새김방법에 따라 주인(鑄印), 각인(刻印), 착인(鑿印)의 구별이 있으며, 생김새에 따라 방인(方印), 반통인(半通印), 원인(圓印), 타원인(恕圓印), 호로인(葫蘆印), 철형인(凸形印), 연주인(連珠印), 정인(鼎印), 금인(琴印), 삼선형인(三扇形印), 편방인(扁方印), 천대인(穿帶印), 사면인(四面印), 오면인(五面印), 육면인(六面印), 자모인(子母印), 삼합인(三合印), 대구인(帶鉤印) 등으로 나뉘고, 구리, 쇠, 금, 은, 옥(玉), 마노(瑪瑙), 수정(水晶), 보석, 밀랍(蜜蠟), 돌, 상아, 뿔, 나무, 대(竹), 자기, 기와, 진흙 등 재료에 따라 구분하기도 한다. 그 밖에도 서화(書畵)에 찍는 인장은 보통 ‘도장*(圖章)’이라고 하는데 그 찍는 위치에 따라 위쪽에 찍는 것을 수인(首印), 자유롭게 찍는 것을 유인(遊印)이라고 하며, 감정가가 찍는 도장을 ‘감정인(鑑定印)’, 수장가가 찍는 도장을 ‘수장인(收藏印)’이라고 한다. 인장의 개수는 과(顆)로 세고 이를 찍는 것을 방(方)이라 부른다.
인장은 신석기 시대의 중국의 인문토기(印文土器)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는데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의 토인(土印)이 그 효시라 할 수 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정식 인장은 하남성河南省 안양安陽에서 발굴된 것으로 기호와 같은 원시 문자가 양각으로 새겨진 3과의 은새(殷璽)이다. 주대(周代)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부터는 고녑이 있었는데 현존하는 대부분의 것은 전국시대 이후의 것이다. 고녑은 관인(官印), 사인(私印)의 구별이 있어서 관인은 관리에게 신분증명으로 주어졌으며 관직에서 물러날 때는 이를 반납하였다. 관인은 죽간*(竹簡)이나 목간(木簡)을 봉인하는데 사용되었으며 물품 교역시 증빙에도 쓰였다. 이들은 대개 꼭지가 달린 작은 동인(銅印)으로서 때때로 커다란 것도 있었다. 인장에는 길어(吉語)인 ‘천추(千秋)’ ‘대길(大吉)’ 등의 좋은 글씨를 새기거나 인물, 동물 등의 형태를 넣기도 하였다.
진, 한대(秦漢代)는 지위의 고하에 따른 인장의 호칭과 그 재료 등의 구분이 제도화되어, 천자(天子)의 옥새(玉璽)와 일반의 인장(印章), 관인과 사인간의 구별이 생겼으며 관인도 지위 고하에 따라 그 크기가 규제되었다. 수, 당대(隋唐代)에는 일관일인(一官一印)제도가 수립되어 인장의 제도와 형식이 변하였는데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새(璽, xi)’의 발음이 ‘사(死, si)’와 같다고하여 이를 부르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새(璽)’를 ‘보(寶)’라 불렀다. 한편 이 때부터 새로이 감장인(鑑藏印)이 발달되고 사용방법도 한대(漢代) 이후로는 봉인(封印)에서 날인(捺印)으로 바뀌었다. 인장은 송대(宋代)에 이르러 문인 사대부의 낙관인(落款印)이 유행하고 원, 명대(元明代) 이후로는 전각*(篆刻) 예술로 발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전각’ 참조

인타글리오

인타글리오 intaglio(이)

이탈리아어로 음각*, 요각(凹刻) 등의 뜻. 표면을 모양에 따라 파낸 조각. 음각에 의해 모양을 표현한 것. 고대 오리엔트에서는 실린더 상인형(狀印形)의 작례가 많고 지륜상인형(指輪狀印形)은 현대까지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또 판화*의 기술에 있어서는 판에 음각하는 기법을 인타글리오 내지 인타글리오 프린트라고 부른다. 에칭* 기법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인터미디어

인터미디어 intermedia(영)

1960년대에 들어와서, 뉴욕을 중심으로 하는 미국의 전위 예술가들 사이에서 쓰이기 시작한 말로서, 종래부터 쓰여왔던 해프닝*, 이벤트*, 믹스트 미디어* 따위를 종합한 명칭이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시각 예술에 있어서 여러 ‘미디어(매체*)’간의 중간 영역이다. 회화, 조각, 영화 등 지금까지의 장르*들은 이러한 미디어를 포함하고 있는데, 보다 전체적인 관점에서 어느 장르에 넣기가 곤란한 새로운 예술상의 동향을 가리키는데 이 용어가 사용된다. 약간의 뉘앙스의 차이는 있지만, 믹스트 미디어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몇 개의 미디어를 병용하는 측면을 강조한 경우는 믹스트 미디어, 전체적인 작품이 여태까지의 어느 장르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는 경우는 인터미디어가 되어, 표리(表裏)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화가들에 의한 연극’이라 불린 해프닝을 비롯하여 뉴욕파*의 작가들에 의해 행해져 온 빛이나 음향, 오브제*, 텔레비전이나 우화의 영상, 등장 인물의 액션 등을 종합한 공연을 가리키는 데 쓰이고 있다. 1968년 봄에 뉴욕을 중심으로 한 시인, 화가, 조각가, 음악가, 영화가들이 참가하여 조직된 ‘인터미디어 68전’이 있었다.

인학

인학 印學

→ 전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