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1 2 7

전각

전각 篆刻

세칭 ‘치인(治印)’ ‘각인(刻印)’ ‘인학(印學)’이라고도 하며 인장*(印章)을 전각(篆刻)하는 것을 가리키는 통칭. 일반적으로 전서*(篆書)로 먼저 글씨를 쓰고 새긴다하여 전각이라 하며, 그 재료로는 돌, 상아, 뿔, 금속, 옥 등이 다양하게 이용된다. 중국에서는 이미 진, 한대(秦漢代)에 유행하였으며 수, 당대(隋唐代) 이후로는 독특한 시대양식을 보여주면서 흥성하였다.
송대(宋代)의 미불米芾(미 후, 1051~1107), 원대(元代)의 조맹부趙孟頫(자오 멍후, 1254~1322), 왕면王冕(우앙 미앤, 1287~1359) 등은 모두 서화(書畵)뿐만 아니라 전각에도 조예가 깊었다. 대표적인 유파로는 환파皖派, 절파*浙派, 등파鄧派, 조파趙派, 오파*吳派 등이 있었으며 현재에도 전각은 중국에서 서예와 쌍벽을 이루는 예술 장르로 높이 애호되고 있다.

전면균질회화

전면균질회화 全面均質繪畵
all over painting(영)

화면에 어떤 중심적인 구도를 설정하지 않고 전체를 균질하게 표현하는 경향의 회화. 화폭의 테두리까지도 그림으로 가득 채우며, 화면 전체를 동일한 방법으로, 같은 강도로 칠한다. 전통적 구성의 기본 바탕이 되는 작품 내에서의 부분과 부분들 간의 관계를 결코 강조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주로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적 드립 페인팅을 가리킨다.
이러한 기법의 대표적인 작가는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으로 그의 작품은 때때로 위 아래가 분명치 않을 뿐만 아니라, 캔버스*를 초월하는 확장 가능성을 보여 주기도 한다. 이러한 개념은 외관상 되는대로 만든 것 같은 전면적 처리에서 유발된 것으로 폴록은 종종 캔버스를 방바닥에 뉘어 놓고 여러 방향에서 작업을 하거나 캔버스 속에 들어가 작업을 하곤 했다. 후에 이 용어는 동일한 요소 혹은 거의 균일한 색의 바탕에서 전면적 디자인을 시도한 몇몇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도 적용되었다.
이 용어가 폴록의 뿌리기 회화에서 파생되었다 할지라도 중심을 이루는 초점없이 회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은 인상주의자들에게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인상주의자들은 빛과 분위기가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공기의 변화를 색점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들의 제작 방식이 화면의 극적인 강조점이 제거된 올 오버적인 화면 구성을 창조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특히 모네Claude Monet(1840~1926)의 후기 작품인 <수련>을 통해 가장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올 오버 구성의 또다른 시도는 분석기 큐비슴에서 찾을 수 있다. 1910~1912년 성행했던 분석기 큐비슴은 대상을 단편들로 해체하여 구축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회화면의 통일을 표현하고자 하였고, 색채를 회색이나 갈색 등으로 단색화함으로써 화면의 평면성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1920년에서 1950년 사이에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실험하였던 자동주의 기법 역시 이미지를 회화면 위에 균등하게 분포시킴으로써 올 오버 구성을 시도하고 있고 화면을 장의 개념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마송André Masson(1896~1987)과 미로Joan Miró(1893~1983)의 우연적이고 자동주의적인 필치는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우연과 자발성이 창조의 기본 원칙이 되는 폴록의 뿌리기 회화는 마송의 미리 예견되지 않은, 자동주의적인 기법에 그 원천을 두고 있다. 폴록은 마송의 자동주의 회화, 즉 초현실주의의 반역적인 면을 자신의 전면균질적 구성을 통해 급진적이고 새로우며 자유로운 감각으로 표출하였다.

전서

전서 篆書 zhuanshu(중)

한자의 서체*. 대전(大篆)*과 소전*이 있다. 동주(東周)시대 청동기의 명문*(銘文) 등에 지방적 특색이 나타나 있다. 진秦을 중심으로 행해진 공식 서체를 대전이라 한다. 소전은 진이 통일한 후, 시황제가 이사李斯(리쓰)에게 명하여 대전을 간략하게 한 것이다. 전서는 한대(漢代)에 예서*가 보급된 이후 새인(璽印), 비명(碑銘), 액자(額字) 등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비수(碑首)의 제자(題字) 부분을 ‘전액(篆額)’이라 불렀다.

전신

전신 傳神

‘정신을 전한다’는 뜻의 동양회화 용어. 전신의 이론을 명확히 제시한 것은 중국 동진東晋(317~420)의 고개지顧愷之(꾸 카이즈, 346~407)가 처음이다. 고개지는 회화 창작시 여러 인물의 전형적인 정신과 마음을 파악할 것을 중시하였다. 그래야만 비로소 형(形)과 신(神)이 겸비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전신을 회화비평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이러한 전신론은 중국 회화미학의 중심이론인데, 전신을 획득하는 방법의 변화가 있어 주목된다. 처음에 고개지는 전신을 얻는 방법으로 ‘이형사신(以形寫神)’을 제기하였다. 즉 형상으로써 정신을 그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형(形)’과 ‘신(神)’을 아울러 중요시한 것이다.
그러나 송대(宋代)에 이르러 문인화론(文人畵論)이 제창되면서 ‘형’보다는 ‘신’을 중시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구양수歐陽修(어우 이앙서우)와 소식蘇軾(쑤 스, 1036~1101) 등이 제기한 ‘중신사론(重神寫論)’은 ‘형을 잊고 뜻을 얻은 작품’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문인 일사(文人逸士)이어야만 기운(氣韻)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과 함께 북송北宋 문인화론의 중심이 되었다.

전위예술

전위예술 前衛藝術 avant-garde(프)

아방가르드는 전위(前衛), 선두, 선구 등의 뜻으로 프랑스의 군사 용어인 ‘전위(부대의 전초로서 선발된 소수 정예부대)’에서 나온 말. 정치적 의미로 오늘날에는 좌익(左翼)과 같은 말로, 특히 예술상으로는 인습적인 권위와 전통에 대한 반항, 혁명적인 예술 정신의 기치를 내걸고 행동하는 예술 운동을 말한다.
따라서 특정의 주의나 형식을 가리키는 용어라기보다는 신시대의 급진적인 예술 정신 전반에 걸쳐서 사용되는 말이지만, 특히 제1차세계대전 후의 추상주의와 초현실주의*를 중심으로 한 조형활동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이들 활동의 배후에는 기계 문명의 발달과 무의식 세계의 규명, 원시 예술의 발굴, 사회 의식의 확대 등 신시대적인 여러가지 요인이 내포되어 있다. 또한 이 말은 반자연주의라는 점에서 동시대의 문학, 연극, 영화 등의 분야에 있어서도 그 실험적, 혁명적인 행위에 대해서 쓰여진다.

전지

전지 剪紙

종이를 가위나 칼로 잘라서 다양한 형태를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판화*에 가까운 효과가 있으며, 색다르고 독특한 맛이 있다. 동서양을 통틀어 민간예술로서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던 표현방법이다.

전필

전필 顫筆, 戰筆

필치에 힘을 가해 마치 손을 떨 듯이 쓰는 서체*, 혹은 그와 같이 그리는 옷주름 묘사기법. 전필의 발생은 중국 수隋의 손상자孫尙子가 창시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며 오대(五代)시기 남당南唐의 후주(後主)인 이욱李煜이 전필의 서체(書體)를 애용하였으며 당시의 화가들이 이를 좇아 그림에도 응용하여 널리 퍼졌다는 설이 보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현존하는 수, 당대(隋唐代)의 전칭작(傳稱作) 중 전필이 사용된 작품은 오대 남당때의 모사본으로 추정된다. ‘인물십팔묘*(人物十八描)’에서는 ‘전필수문묘(戰筆水文描)’라고 했는데, 이는 선(線)이 물결처럼 흔들리는 것을 의미한다.

→ ‘인물십팔묘’ 참조

전필수문묘

전필수문묘 戰筆水紋描

→ ‘인물십팔묘’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