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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단

제단 祭壇 altar(영)

신이나 신격화된 존재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단(壇). 의식(儀式)을 행할 때 공물(供物)을 바치기 위해 다른 곳과 구별하여 신성화한 장소나 혹은 그 구조물을 말한다. 고대에는 흙을 돋우어 만들거나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형태의 제단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 밖에도 방형(方形)의 벽돌이나 마석(磨石)을 사용한 것이 있다. 페르가몬의 제단이나 아라파키스의 제단처럼 웅장한 크기의 제단도 있으며, 일반적으로 제단은 신전 안에 두지 않고 신전의 앞이나 옆에 두었다. 한편 기독교에서의 제단은 교회의 중심부에 설치되어 신자들이 집중할 수 있게 한 탁자처럼 생긴 단을 가리킨다. 이것은 엄격히 예배 의식의 기능만을 하는 신성한 탁자로 간주되며 성경과 성찬용품만을 그 위에 놓을 수 있다.

제단화

제단화 祭壇畵 altarpiece(영)

기독교 교회 건축물의 제단* 위나 뒤에 설치하는 그림이나 조각* 또는 장식 가리개. ‘제단 뒤 선반(retable)’ ‘제단 뒤 장식 병풍(reredos)’이라고도 한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교회에서 제단은 신성한 장소로 간주되었으므로 일체의 장식이 금지되었다. 제단에 성인들의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던 것은 10세기경 이후에야 가능했으며, 제단 뒤에 설치된 장식 칸막이가 보편적으로 수용되었던 시기는 14~15세기에 들어서였다. 특히 반종교개혁 시기에 들어서 제단 뒤의 칸막이는 제단의 필수적인 중요한 요소가 되었으며, 이후 12세기경부터 교회의 수호성인, 사도*들, 교회박사들, 성경 속의 여러 사건들을 그린 목재 칸막이를 설치하는 것이 점차 일반화되었다.
제단 가리개는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으로 병용하는 경우도 있다. 조각만으로 장식하는 것은 제단 조각(리아도스)이라고 한다. 중앙 패널* 양측에 날개 패널을 나란히 놓고 문처럼 열고 닫는다. 제단화는 일반적으로 세폭 제단화*(triptych)의 형태가 많지만, 그 외에도 날개가 많은 다폭 제단화(polyptych)나 휴대 가능한 소형의 두폭 제단화*(diptych)도 있다. 주로 삼면 이상의 제단화는 성서의 주제 가운데에서도 근원적인 주요 주제를 중심으로 한 대작이 많다.
제단화의 장식적인 모티브*는 국가와 지역마다 각기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이탈리아에서는 성직가들의 생애나 성격의 장면들을 묘사한 제단화가 주를 이루었으며, 화판 가장자리를 금도금으로 장식하고 칸막이의 수를 늘려 복잡한 주제를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는 틀 장식은 줄어들고 그림도 단일화되었으며 제단화는 건축의 일부로 장식되었다.
14세기 알프스 북부에서는 ‘날개 달린 제단(winged altar)’이라는 독특한 양식의 제단 장식이 발달하였다. 이것은 중심 화판의 양옆에 그림을 그린 두 장의 화판을 붙여 접고 펼 수 있게 한 것으로, 과거에 성물함을 넣어두던 제단 뒤 선반에서 기원한 것이다. 서로 관련된 별개의 세장면을 보여주는 세폭이 한 벌로 된 이 제단 뒤 칸막이 양식은 17세기까지 주류를 이루었다. 스페인의 교회에서도 방대한 이야기와 여러 일화를 보여주는 그림으로 된 거대한 칸막이를 선호했으며 그 가장자리는 조각으로 장식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종교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석재 제단을 선호했다.
14세기 영국에서는 제단 뒤 벽 전체를 예수와 성인들의 상을 세운 벽감*으로 장식한 독특한 양식의 제단화가 발달했다. 15세기에는 제단 장식이 더 많아져 15세기말에는 거의 모든 제단 뒤에 장식 선반이 설치되었다. 종교개혁*으로 16세기 영국과 북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그림으로 제단 뒤를 장식하는 일이 사라진 반면 반종교개혁 교회에서는 제단 뒤에 교회의 수호 성인을 그린 그림을 붙여놓을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런 과정에서 제단과 그 뒤의 칸막이는 실내장식*의 일부가 되었다. 종교적 외경심과 호화로움을 직접 느끼게 하기 위해 화려하게 장식한 바로크 시대의 제단은 17~18세기 가톨릭 제단의 모범이 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 제단 뒤 칸막이 디자인은 전통적인 형태를 고수하고 있을 뿐 새로운 점은 거의 없다. 한편 현대 교회는 구조가 단순해서 전통적인 장식 형태와는 어울리지 않고 제단 장식에도 부적합하다.

제로 그룹

제로 그룹 Gruppe Zero(독)

마크Heinz Mack, 피네Otto Piene가 1957년 뒤셀도르프에서 조직한 예술가 그룹으로 후에 우에커Günter Uecker가 합류하였다. 앵포르멜* 및 감정의 주관성, 사실주의*의 모든 형식을 거부하였으며, 제로 그룹이라는 명칭도 ‘영점에서 출발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들은 폰타나Lucio Fontana(1899~1968)의 공간주의*나 만조니Piero Manzoni(1933~1963)의 연장선상에서 새로운 재료를 탐구하였고, 특히 빛과 광선의 사용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네온사인의 빛을 사용하는 등 키네틱 아트*와 라이트 아트*의 시위적 전시에 공감하였다. 오토 피네는 거대한 풍선에 착색 가스를 가득 채우고 조명을 비추어 <빛의 발레>를 연출하기도 했다. 과학기술을 사용한 환경 미술*의 차원으로 나아간 제로 그룹은 원래 미술가와 과학자의 교류 증진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그래서 활동의 폭이 넓었다. 이외에도 시간과 운동성, 움직임과 관련된 기하학적 추상*을 발전시켰고, 특히 자연적 소재의 역동성과 일련의 리듬 이용에 주목하였다.
제로 그룹은 자신들의 사상과 입장을 전달하기 위해서 정기간행물인 《제로》를 발간했고, 유럽의 여러 새로운 경향의 그룹들과 공동으로 단체 작업을 벌였으며 뉴욕과 필라델피아 등 미국에서도 전시회를 가졌다. 1958년과 1961년에 재조직되었던 이 그룹은 하노버에서의 전시를 마지막으로 1966년 해체되었다. 제로 그룹은 창설된 이래 뒤셀도르프의 아방가르드*로서 오랫동안 미술계의 관심의 대상으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
한편 그룹이 공식적으로 해체된 이후에도 마크는 1970년대에 사하라 사막에서 금속 조각에 의한 모래와 바람, 빛으로 작업을 계속하고 있으며, 피네는 기구를 이용한 에어 아트*와 공기, 불, 빛, 소리 등의 원소를 사용한 환경 미술 및 관객과 청중이 참가하는 퍼포먼스* 등을 지속적으로 실험하고 있다.

제발

제발 題跋

서적이나 비첩(碑帖), 서화 등에 쓰이는 제사(題辭)와 발문(跋文). 서화권(書畵卷)이나 첩책(帖冊)에 그 작품에 대한 감상이나 기록을 적은 것이다. 본래는 앞에 쓰이는 것을 제(題) 또는 제사라고 하고 뒤에 쓰는 것을 발(跋) 또는 발문이라고 하지만 흔히 제발이라 통칭되는 경우가 많다. 당 오대(唐五代)에 소수의 예가 있지만 당시에는 정착되지 못했던 듯 하다. 송대(宋代)에 이르면 감상법의 발달에 따라서 제발을 적는 일이 많아지며, 그것이 정돈된 저술로서 전해졌다.
구양수歐陽修(어우 이앙서우)의 《집고록발미集古錄跋尾》, 소식蘇軾(쑤 스, 1036~1101)의 《동파제발東坡題跋》, 황정견黃庭堅(후앙 띵지엔, 1045~1105)의 《산곡제발山谷題跋》 등이 바로 그것이다. 즉 송대에 이르러 그림의 화면 위에 시(詩)와 글씨를 적어 넣음으로써 회화와 문학, 서예가 하나로 결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훌륭한 제발은 그림의 미적 가치나 내용을 보충하며, 화가의 사상이나 감정 및 예술관을 표현할 수 있다. 이는 회화작품의 내재미를 높이는 것이다.

제방서

제방서 題榜書

→ 방서

제석천

제석천 帝釋天 Indra Śakra(범)

인도 베다시대(기원전 1500~600년경)의 무용신(武勇神)인 인드라가 불교에 들어온 것으로 군신답게 거대한 체구에 벼락을 상징화한 금강저*를 든 모습으로 표현된다. ‘석제환인다라釋提桓因陀羅’ ‘석가제바인다라釋迦提婆因陀羅’라고 쓰던 것을 줄여 ‘제석천’이라고 부른다. 제석천은 도리천忉利天의 주인이며, 수미산 정상에 있는 선견성善見城에서 산다. 사천왕과 함께 주위의 32천왕(天王)을 통솔한다. 불법을 옹호하며, 불법에 귀의한 사람들을 보호할 뿐 아니라, 아수라*의 군대를 징벌하기도 한다.
제석천상은 인도의 간다라*시대에 많은 예가 있는데, 형상은 보통 귀족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중국에서 북위北魏 이후의 중국사원들에 나타나는데, 형상은 《십이천공양의궤十二天供養儀軌》에 따랐다. ‘동방제석이 백상왕(白象王)을 타고 오색구름 속을 가는데, 몸은 황금색이고 오른손은 삼고저를 들어 가슴부위에 놓고, 왼손은 허벅지를 짚고, 왼쪽 다리는 아래로 늘어뜨렸다’고 서술되어 있다.
돈황*막고굴의 위대(魏代) 이후의 벽화*에도 보이며, 제왕 또는 동자의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북경 법해사法海寺 정전正殿 서쪽 벽화(1443)에는 보관과 영락을 장식하고 천의를 입은 보살형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한국에서는 제석과 단군환인檀君桓因을 동일시하여 삼국시대부터 신앙되었고 고려시대에는 호국진병(護國鎭兵)의 신앙의례로 제석도량(帝釋道場)이 행해질 정도로 제석신앙이 성행하였다. 제석은 범천과 함께 짝을 이루며 등장하는데, 이는 인도에서 온 전통으로 통일신라시대 석굴암의 제석, 범천상, 고려후기 〈부석사 조사당 벽화〉(1377)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조선후기 신중탱화의 주존으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기도 한다.

제스처

제스처 gesture(영) geste(프)

예술적인 이념이나 감각을 구체화시킬 때 활발해지는 행위, 동작, 몸짓, 표현력 등 표현 태도 전체에 대한 총칭. 모든 미술 창작 행위는 제스처적인 요소가 있다고 볼 수 있으나 특별히 무의식적인 추상적 표현 행위를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제스처는 액션*과 거의 구별되지 않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액션과 차이가 있다. 액션은 연극적인 수단에 의하여 미적 사고 과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행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즉흥적인 이벤트를 갑자기 행함으로써 보는 이에게 실생활 그 자체를 최대한 인상적으로 실연(實演)해 보이는 데 그 목적이 있는 액션과는 달리, 제스처는 개인적인 필적에 관심을 집중시켜 회화 자체의 주관성을 일깨워 준다.
이는 화가의 표현적인 붓의 필치나 행위의 궤적이 화면에 반영된 것을 의미한다. 제스처가 두드러진 회화나 드로잉을 가리켜 ‘제스처주의Gesturalism’라고 한다. 강한 붓의 필치를 통해 예술적 개성을 발현한 예로는 할스Frans Hals와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a Y Velasquez(1599~1660) 같은 17세기 미술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근대 미술에서는 19세기 인상주의* 작가인 마네Edouard Manet(1832~1883)와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의 경우가 포함된다. 특히 제스처주의는 독일 표현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이러한 유대 관계는 최근의 신표현주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전후에는 손이나 몸놀림을 통해 화폭에 물감을 순간적으로 도입한 행위 중심적 추상회화가 등장하였는데 이러한 방식에 의한 일련의 작품에는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이 있다. 대부분의 유럽 앵포르멜* 계열 회화에서 제스처는 손놀림에 그치나, 마티유George Mathieu(1921~ )나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에 이르러서는 신체의 제스처로 발전하였다. 이는 동양의 서예나 수묵화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제시

제시 題詩

그림이나 표구의 대지(臺紙) 위에 적어 놓은 시문(詩文). 제화시(題畵詩), 화찬(畵讚)이라고도 한다. 제시의 내용으로는 그림이 이루어지게 된 배경이나 감흥, 작가에 대한 평, 진위(眞僞)에 대한 고증 등 다양하다. 제시와 그것을 쓴 서체*, 그리고 그림이 한데 어우러져 그림을 더욱 아름답고 풍부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 ‘제발’ 참조.

제왕도

제왕도 帝王圖

중국 인물화의 한 화제(畵題). 중국 역대 제왕들의 초상화*를 그린 것이다. 중국 황실에서는 고대(古代)부터 바로 앞의 왕조까지의 역대 황제 황후를 제사지내면서 스스로 정통성을 강조하였다. 이 때 선군(先君)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여러 제왕의 초상화를 상상으로나마 궁전과 종묘 벽에 그리기 시작하였다. 제왕도가 그려진 것은 한대(漢代)부터라고 추정된다. 현존하는 제왕도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용문석굴*의 북위굴 중 빈양동賓陽洞 등에 있는 부조* <황제 황후의 예배>로, 위풍당당한 거구의 제왕과 시자(侍者)들을 나타내고 있다.
미국의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염립본閻立本(이앤 리번, ?~673)의 작품으로 전하는 <제왕도>는 전한前漢의 소제昭帝로부터 수隨의 양제煬帝까지 13인이 면복(冕服)의 위엄을 갖춘 거구의 열상(列像)으로 그려져 있다. 염립본은 중국의 전통적인 인물화법으로 궁중인물이나 제왕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는데, 이 그림은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시대의 각 제왕들의 집정(執政)모습이나 거동할 때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제왕도는 명 청(明淸)시대에도 꾸준히 그려져 역대 황제 황후가 성장을 하고 있는 정면상이나 청대(淸代)의 <남훈전도상> 등이 있다.

제정양식

제정양식 帝政樣式
Style Empire(프)

근세 프랑스 나폴레옹 제1제정기(1804~1814)를 중심으로 1830년경까지 실내장식, 가구, 복장 등에 유행하였던 양식으로 고대 로마제국의 장대함을 원했던 나폴레옹의 요구로 장려되었다. 따라서 고전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나 여기에 나폴레옹 원정의 영향으로 이집트와 터키의 장식양식 또는 군국주의적인 모티브*가 애용된 점이 특색이다. 작품들은 대부분 장엄하고 화려한 반면 치밀함은 부족하며 1815년 이후에는 다소 양식상의 경직성이 보인다.
이 양식의 건축으로는 피에르 알렉상드르 비뇽의 마들렌 교회와 샬그랭Jean-François Chalgrin의 에투왈 개선문(Arc de Triomphe de l’Étoile), 페르시에Charles Percier와 퐁텐Pierre-François Fontaine(1762~1853)의 궁전 리노베이션과 카루셀 개선문(Arc de Triomphe du Carrousel)이 좋은 예이다. 특히 페르시에와 퐁텐은 나폴레옹의 의전실 비품을 설계했으며 제정양식의 실내장식과 가구 디자인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마호가니를 대고 구리와 아연의 합금인 오르몰루로 둘려진 가구는 스핑크스, 종려나뭇잎, 날개달린 사자 등의 모티브로 장식되었고, 특별히 나폴레옹의 권위를 암시하는 것으로 승리를 나타내는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상과 월계관, 번영을 상징하는 벌이나 곡식단 및 풍요의 염소뿔, 정복을 상징하는 막대기 다발에 끼워진 도끼나 스핑크스 등이 자주 사용되었다. 회화에서는 장대한 <나폴레옹의 대관식>(1805~1807)을 그린 다비드Jacques-Louis David(1748~1825)가, 조각에서는 나폴레옹 가족의 형상을 만든 카노바Antonio Canova(1757~1822)가 유명하다.
한편 복식에 있어서는 여성 의복의 경우, 어깨와 목 부분을 많이 파고 가슴 바로 아래에 띠를 둘렀으며 가벼운 천으로 부드럽고 품위있게 늘어뜨렸는데, 이는 혁명 이전의 화려함과 우아함을 의식적으로 모방한 것이었다. 남성의 경우에는 조끼가 드러나도록 앞섶을 비스듬히 잘라낸 연미복과 깃이 화려한 셔츠가 주를 이루었다. 제정양식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지만 곧 유럽 전체에 퍼져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북부에서 유행했던 비더마이어(biedermeier) 양식과 같이 각국의 고유한 취향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