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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 아트

파인 아트 fine art(영)

응용미술* 혹은 장식미술*에 반대되는 의미로 ‘보다 고급스럽고’ 비실용적인 예술을 지칭하는 용어. 일반적으로는 회화*, 조각*, 건축 분야를 말하나 시나 음악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파인 아트란 용어는 18세기까지는 사용되지 않았다. 바토Charles Batteaux는 <동일 원리로 환원된 순수 예술Les Beaux Arts réduits â un même principe>(1746)에서 예술을 유용한 예술과 아름다운 예술(조각, 회화, 음악, 시) 그리고 미와 유용성이 결합된 예술(건축, 웅변술)로 구분하였다. 뒤이어 디드로Diderot(1713~1784)의 <앙시클로페디아Encyclopédia>에서 다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는 파인 아트를 회화, 조각, 건축, 시, 음악으로 나누었다. 이 목록으로 파인 아트의 개념이 확정되었으며 영국에서는 ‘5예술(five arts)’이라는 말이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

파크튀르

파크튀르 facture(프)

구조, 골조, 짜임새 등의 뜻이 있다. 각종 표현 수단을 조작한 결과, 작가의 발상이 작품에 정착되면서 그에 따라 나타나는 작품의 물질적, 감각적인 양상을 가리킨다. 즉 제작의 과정보다 그 결과에 대해 말해지며, 유화 작품인 경우에는 터치*, 마티에르*가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파트롱

파트롱 patron(프)

보호자라는 의미. 미술에서는 예술의 보호자, 후원자를 가리킨다. 17세기 이전에는 미술작품이 단지 쓸모있다거나 소유자의 명예를 돋보이게 하는 부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유명한 미술가를 후원하고 기릴 만하다고 믿었던 최초의 증거는 1334년 피렌체 시정부가 지오토Giotto(1266~1337)를 고용한 법령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피렌체에서 지오토란 존재가 그 도시의 명성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반영한 것이다. 1401년 피렌체의 세례당을 위해 치러진 시험 역시 이를 반증한다.
15세기 피렌체의 상인 루첼라이Rucellai는 자신에게 우첼로Paolo Uccello(1397~1475) 같은 화가를 고용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신에게 감사했다. 미술가들이 문필가들이 받는 대접과 대등한 후원을 받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메디치 가*에 거액을 요구한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1430~1506)를 통해 엿볼 수 있다.
한편 15세기와 16세기초에 로마 교황청이 벌인 미술 진흥사업이 신앙심이 강한 사람들에게 교황청의 권력과 힘을 과시하기 위한 계획이었다는 증거는 많다. 역대 교황 중 가장 두드러진 후원자였던 율리우스 2세는 새로운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를 부흥시키려 했고,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1444~1514), 미켈란젤로Michelangelo(1475~1564), 라파엘로Raffaello Sanzio(1483~1520)의 도움을 얻어 제국적 위엄을 회복하려고 계획하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권력자들이 만든 이러한 유형은 알프스 산맥 너머의 북쪽 나라에까지 이어졌다. 프란시스Francis 1세는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1500~1570)를, 막시밀리안Maximillian왕은 뒤러Albrecht Dürer(1471~1528)를, 헨리Henry 8세는 홀바인Hans Holbein(1497~1543)과 토리지아노Pietro Torrigiano(1472~1528)를 고용했다.
이때부터 통치자들은 그들의 통치기간 중 미술이 번성했다고 얘기되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했다. 국가 권력의 후원과 성격이 다른 상업적 가치를 위한 후원은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1619~1683)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수출을 증대하기 위해 프랑스의 디자인 수준을 향상시키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그때부터 공적 후원의 이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게 되었다.
19세기 이전 영국은 이러한 경향을 등한시해 호가드William Hogarth(1697~1764)의 격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영국 미술가들이 당한 불이익을 한탄한 최초의 미술가였다. 프랑스의 제도를 모방, 왕실의 후원을 받아 아카데미*를 설립한 목적 속에는 후원자의 안목으로 영국 미술의 지위를 상승시키고자 하는 의도도 포함돼 있었다.
19세기에 대중과 미술가의 소외현상이 심화되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블레이크William Blake(1757~1827)가 소외되고 하이든Franz Joseph Haydn이 자살한 것은 바로 예술가들이 평범한 사람의 기호에 영합하기를 거부한다는 표시였다.
그 당시 화가들은 우정으로 그의 작품을 매입할 중류계급의 적절한 사람을 찾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했다. 대체로 표현주의 미술가들이 법률가나 의사 등의 몇 명되지 않는 친구들에게서 받은 후원이 이런 종류였다.
후원자로서 안목을 갖춘 화상이 등장한 것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뒤레Théodore Duret와 볼라르Ambroise Vollard 같은 화상은 젊은 미술가나 새로운 미술운동에 명성과 돈을 걸었고, 심지어 화가가 작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연금을 지불하기도 하였다.

파티오

파티오 patio(스)

스페인 주택의 중정(中庭). 근대 건축에도 응용되어 실내의 연장으로서 거실 또는 식당이 되도록 설계된 중정을 일컫는다.

파피루스

파피루스 papyrus(영)

이집트, 근동에서 널리 자라는 습지 식물(학명 Cyperus Papyrus L.), 또는 그 가지에서 채취된 필기 재료(종이의 일종). 고대 이집트에서는 3000년 전부터 사용되었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국에서도 표준적인 필기 재료였는데 이것에 글씨를 쓴 문서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4세기부터 양피지로 대체되면서도 10세기까지 사용되었으며 잉크뿐만 아니라 페인트로도 기록되었다. 삽화가 곁들여진 파피루스로서는 이집트의 중왕조와 신왕조 시대의 것들이 남아 있으며 직조 무늬로 짠 것뿐만 아니라 고전을 해석한 서적 형태의 것들도 단편적으로 남아 있다.

파피루스 기둥

파피루스 기둥 papyrus column(영)

고대 이집트 건축에서 사용된 원주*(圓柱)로서, 파피루스를 모티브*로 하여 주신(柱身, shaft) 및 주두*(柱頭, capital)를 형성한 것. 꽃망울을 모방한 것과 꽃을 모방한 것이 있는데 두 경우 모두 주신은 주초(柱礎, base)에서부터 가늘어지며, 주두와 주신의 경계에는 띠 모양의 장식이 있다.

파피에 콜레

파피에 콜레 papier collé(프)

종이 따위를 찢어 붙이는 기법으로 콜라주*의 일종. 콜레란 풀로 붙인다는 뜻인데, 이 기법을 최초로 쓴 사람은 종합적 입체주의* 시대의 브라크Georges Braque(1892~1963)와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였다. 그들은 그때까지 현실의 일부를 그림물감으로만 그리던 수법을 진일보시켜 1912년경 캔버스*에 여러가지 종이를 붙여 미적 효과를 자아내게 하는 기법을 고안해 냈다.
이때 신문지나 나뭇결 무늬의 벽지 조각, 차표나 상표 따위의 인쇄물, 판화* 등이 사용되었다. 이같은 기성(旣成)의 물체를 붙이게 되면, 화필(畵筆)에 의한 재현묘사보다 한층 분명한 현실감이 생기게 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견고한 화면 구성이 요구된다. 손으로 그려진 부분에서 물체가 떠오르지 않도록 마무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브라크는 “파피에 콜레와 그림으로 물체와 물체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되찾으려 했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현대 미술이 처음으로 물체와 만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파하리 회화

파하리 회화 Pahārī painting(영)

17~19세기 전반 서북 인도의 펀잡Punjab주와 카슈미르 일대에서 발달한 세밀화*이다. 바소리Basohli, 쿨루Kulu, 잠무Jammu, 칸그라Kangra, 굴레르Guler, 가르왈Garhwal 지역의 그림이 파하리 회화에 속한다.
라자스탄* 지역과 마찬가지로 라지푸트족들의 군소 왕국이 이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파하리 회화에서는 바누다타Bhanudatta가 15세기에 쓴 연애시를 도해한 라사만자리Rasamanjari가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였다. 라사는 연극이나 시를 통해 전달되는 특별한 정조(情調)를 말하는데 이런 느낌을 8가지로 체계화하여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크리슈나*와 《라마야나*》의 이야기나 군주의 초상화*도 주된 주제로 나타났다. 1750년경 나디르샤의 침입으로 무갈 황실의 화가들이 파하리 지역으로 피란을 오게 되면서부터 새로운 양식*이 등장한다. 무갈 회화*의 영향을 받아 현실적인 주제도 많이 그려졌고 공간에 대한 이해도 합리적으로 변모했다. 라가말라, 크리슈나, 《라마야나》를 주로 그렸던 바소리 회화는 18세기경 칸그라 화파의 등장으로 영향력이 감소했는데 칸그라 화파의 양식은 고상하고 시적이며 이상주의적이다.

→ ‘라자스탄 회화’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