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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

표현 表現 expression(영) Ausdruck(독)

예술 창작의 근본 작용으로 포화된 감정이 통일적 직관 형태를 산출하는 것. 여기엔 다음 두 가지 계기가 포함된다. ①표출(Ausdruck) 즉 주관적 감정을 객관화하는 작용 ②묘사(Darstellung) 즉 내적 표상이 지각되는 형태를, 통일적 형식* 법칙을 가진 작품으로 나타내는 것. 따라서 소재를 내면 형식에 따라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리오 히른Yriö Hirn처럼 표출을 예술 활동의 본질로 보는 입장도 있으나, 본래 이는 일반 심리학적인 인간 공통적인 계기이므로 예술 특유의 동인(動因)은 오히려 묘사에서 구해야 한다. 그러나 묘사 또한 표출과 명확하게 구분되는 단계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므로 구체적인 창작 활동에서의 표출은 묘사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체험은 예술적 형식 속에서 전개된다.
따라서 현대의 미학이나 예술학에서는 우티츠Emile Utitz, 콘Jonas Cohn, 뮐러-프라이엔펠스Richard Müller-Freienfels 등과 같이 예술적 체험의 ‘표출’과 여기에 예술적 형식을 부여하는 형성*과의 통일*을 중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크로체Benedetto Croce(1866~1952)처럼 주관적인 것을 직접적인 객관화로 표출하는 것을 정신적 통일의 내면적 기초로 보는 학설에서는 이를 직관과 동일시해 예술의 본질적 계기로 삼는 입장도 있다.

표현주의

표현주의 表現主義
Expressionismus(독)

미술사*와 미술비평*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 미술의 기본 목적을 자연의 재현으로 보는 것을 거부하며, 르네상스* 이래 유럽 미술의 전통적 규범을 떨쳐버리려 했던 20세기 미술 운동 중의 하나.
표현주의자들은 예술의 진정한 목적이 감정과 감각의 직접적인 표현이며 회화의 선, 형태, 색채 등은 그것의 표현가능성만을 위해 이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구성(구도)의 균형과 아름다움에 대한 전통적 개념은 감정을 더욱 강력하게 전달하기 위해 무시되었으며, 왜곡*은 주제나 내용을 강조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표현주의가 명확하게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1905년경 부터이지만, 1880년대부터 그 전조가 나타났다. 표현주의는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으나 다른 나라에서도 거의 동시에 전개되었다. 특히 독일의 경우, 1933년 나치의 탄압으로 해체되기 전까지 다른 어떤 나라보다 표현주의가 발전했다.
표현주의는 야수주의*, 초기의 입체주의*, 인상주의*, 그리고 의식적으로 자연의 모방을 거부한 다른 여러 화가들의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 독일 비평가들이 1911년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이다.
그러나 이 용어를 그뤼네발트Mathis Grünewald(c.1470~1528)나 엘 그레코 El Greco(1541~1614) 같은 화가들에게 적용함으로써 용어 사용에 약간의 혼란을 가져왔고, 더 넓은 의미로는 낭만주의*나 바로크*와 유사한 미학, 비평 용어로 통용되기도 했다. 19세기말 이전엔 형식의 아름다움이나 구성의 조화가 감성적인 메시지의 명료한 전달에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통적 규범(관습)의 완전한 파괴는 없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의미에서 광범위하게 통용되고 있는 ‘표현주의’와 20세기 예술의 한 경향으로서의 ‘표현주의’는 구별되어야 한다.
20세기 미술에서의 표현주의는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와 고갱Paul Gauguin(1904~1948)을 선구로 한다. 비록 반 고흐가 스스로 인상주의 전통에 속해 있다고 생각했고 인상주의자의 밝은 색채를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그의 감성적, 상징적 특성은 색채를 단지 빛을 표현하는 것에만 한정하지 않고 미술가가 대상에 대해 느낀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는 더 적극적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데 있다.
고갱은 엄밀한 의미에서 표현주의자는 아니지만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표현주의의 중요한 요소가 된 상징주의의 규범을 명확하게 받아들인 최초의 화가였다. 베르나르Emile Bernard(1868~1941)의 영향을 받은 고갱은 모든 형태를 단순화, 평면화시켰고 사실주의*와 유사성이 없는 색채를 사용했다. 또한 유럽 도시문명에 염증을 느낀 고갱은 이후 표현주의자들이 열중하게 된 원시 미술이나 민속 미술*에 관심을 기울였다.
반 고흐와 고갱을 이미 알고 있던 노르웨이 태생의 뭉크Edvard Munch(1863~1944)는 불안, 공포, 애정, 증오와 같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감정을 격렬한 색채와 왜곡된 선으로 표현한 화가로서 표현주의의 가장 직접적인 선구자 중 한 명이다. 자신의 강박관념을 그림으로 나타내고자 한 뭉크의 작품은 특히 독일 미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편 그로테스크*하고 끔찍한 가면을 이용해 인간의 본성 속에 잠재된 비열함을 그린 벨기에 태생의 앙소르James Ensor(1860~1949)와 독일 표현주의에 영향을 미친 스위스 태생의 호들러Ferdinand Hodler(1853~1918)도 표현주의 초기의 대표적 작가이다.
표현주의 그룹은 1905년 독일과 프랑스에서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야수주의는 반 고흐와 고갱의 이론을 그들의 회화에 결합시켰는데, 1908년 그들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추구하는 것은 표현이다. 색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표현을 도와주는 것이다. 가을 풍경을 그리기 위해 나는 어떤 색채가 그 계절에 적합한 가를 기억해 내려고 애쓸 것이다. 나는 계절이 주는 감각에 의해서만 영감을 얻는다.”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는 이러한 생각을 인물화*에도 적용했다.
마찬가지로 드랭André Derain(1880~1954)은 풍경화*에, 루오Georges Rouault(1871~1957)는 강렬한 힘과 단순성에 의한 새로운 종교 회화에 이것을 적용했다. 그러나 1907년 이후 입체주의가 유행하면서 야수주의의 활동은 퇴색했다.
1905년 드레스덴에서 다리파*가 결성되었고, 1906년 이들의 첫 전시회가 열렸다. 구성의 조화와 장식성을 유지했던 야수주의와 달리 다리파는 형태와 색채의 왜곡을 통해 기존 질서에 대한 반항과 창작에의 열망을 표출하였다.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1880~1938)는 1913년 “우리는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순수한 창조적 충동을 유발하는 모든 색채를 수용한다”라고 말했다.
1911년 마르크Franz Marc(1880~1916)와 러시아 출신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 등은 청기사* 그룹을 조직해 같은해 뮌헨에서 전시회를 개최했다. 칸딘스키가 1911년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Über das Geistige in der Kunst》를 쓴 것을 비롯, 청기사 그룹의 미술가들은 더욱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작품을 제작했으며 후배 세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는 칸딘스키나 클레Paul Klee(1879~1940) 같은 화가들이 바우하우스*에서 가르쳤기 때문이다. 제1차세계대전 후 표현주의는 독일을 풍미하게 되었다. 프랑스 표현주의는 꿈 속의 장면을 그린 마르크 샤갈Marc Chagall(1887~1985)이나 격한 감정을 표현한 수틴Chaim Soutine(1894~1943)에 의해 명맥이 유지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클림트Gustave Klimt(1862~1918)와 코코슈카Oskar Kokoshka(1886~1980), 쉴레Egon Schiele(1890~1918)도 표현주의자로 간주된다. 신즉물주의*로 알려진 독일의 새로운 리얼리즘을 전개한 그로츠George Grosz(1893~1959)와 딕스Otto Dix(1891~1969)는 초기 표현주의에서 고안된, 왜곡과 과장이 심한 작품을 그렸다.
표현주의의 여러 특징은 현대 미술에서도 많이 추구되고 있다. 타시슴*과 추상표현주의*는 표현주의의 직속 후예라 할 수 있으며 많은 그룹들이 야수주의와 다리파의 방법을 지금까지도 따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