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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중구우

화중구우 畵中九友

그림을 통한 아홉 친구. 중국 명말청초(明末淸初)의 동기창董其昌(똥 치츠앙, 1555~1636), 양문총楊文驄, 정가수程嘉燧(쳉 찌아수이), 장학증張學曾, 변문유卞文瑜, 소미邵彌(샤오 미), 이유방李流芳(리어 우황), 왕시민王時敏(우앙 스민, 1592~1680), 왕감王鑑(우앙 지엔, 1598~1677) 등 9명의 화가에 대한 총칭이다. 청초(淸初)에 오위업吳偉業이 지은 《화중구우가畵中九友歌》에 보인다. 9명의 화가 중 중심인물은 동기창인데, 그는 남북종론(南北宗論)을 주창하면서 상남폄북*(尙南貶北)론을 제기하였다.
이후 동기창의 주장이 화단을 지배하게 되면서부터 ‘의고주의(擬古主義)’가 팽배하였다. 왕시민 역시 동기창의 남북종론을 충실히 따랐고, 청초의 의고사상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왕시민의 그림은 동기창으로부터 직접 전수받은 것이었고 동기창과 진계유陳繼儒(츠언 지로우)로부터 인정받은 것이었다. 화중구우는 명말(明末)의 동기창이 골간이 되어 남종화*를 숭상하였고 당시와 후세의 화단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화중십철

화중십철 畵中十哲

중국 청대(淸代) 누동화파*에 속했던 10명의 화가. 즉 동방달董邦達(똥 방따), 고위高爲, 고봉한高鳳翰, 이세탁李世倬(리 스주어, ?~1770), 장붕충張鵬翀(즈앙 펑츠옹), 이사중李師中, 왕연격王延格, 진가락陳嘉樂, 장사영張士英(즈앙 씨닝), 시신柴愼 등을 가리킨다.

화지

화지 畵旨

중국 명대(明代)의 동기창董其昌(똥 치츠앙, 1555~1636)이 펴낸 화론서 1권. 원래는 《용대별집容臺別集》 4권에 실려 있었다(부분 조목은 막시룡莫是龍(모 스롱)이 편찬한 《화설畵說》에도 실려 있음). 내용은 자신의 그림 및 옛 그림에 대한 제발*(題跋)이 많고, 화법 품평 감상에 대한 논술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동기창이 주장한 남북종론(南北宗論)과 기운론(氣韻論)이 요약되어 있다는 점이다.
동기창은 이 책에서 “선가(禪家)에 남북이종(南北二宗)이 있어 당唐나라 때 처음 나뉘어 졌는데, 그림도 당나라 때 남북이종으로 나뉘어 졌다. 북종은 이사훈李思訓(리 쓰쉰), 이소도李昭道(리 사오따오) 부자의 착색산수가 유전하여 송의 조간趙幹(자오 간), 조백구趙伯駒(자오 뿌어쥐), 조백숙趙伯驌이 되었다가 마원馬遠(마 위엔), 하규夏珪(시안 꾸에이)에 이르렀고, 남종은 곧 왕마힐王摩詰이 처음으로 선담법(渲淡法)을 써서 구작(鉤斫)의 법을 일변시킨 이래 그것이 전하여 장조張璪(즈엉 차오), 형호荊浩(싱 하오), 관동關同(꾸완 똥), 곽충서郭忠恕(구어 쫑쉬), 동원董源(똥 위앤), 거연巨然(쥐 르안), 미불米芾(미 후), 미우인米友仁(미 이어우르언)이 되었다가 원사대가*에 이르렀는데, 이는 육조(六祖)의 뒤에 마구(馬駒), 운문(雲門), 임제(臨濟)의 자손들이 성하고 북종은 쇠미해진 것과 같다”고 하며 남북종론을 주장하였다.
이는 왕마힐은 ‘남종’이고 이사훈 부자는 ‘북종’이며 남종 산수화의 미적 가치가 북종 산수화보다 높다는 주장을 함축하고 있다. 이는 상남폄북*의 미학사상으로 문인화*파의 미학사상을 대변하는 것이다(남북종론은 막시룡의 《화설》에도 실려 있어 막시룡의 글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동기창은 기운(氣韻)의 타고난 성질에 대해서 북송北宋 곽약허郭若虛(구어 루어쉬)가 말한 “기운은 배울 수 없는 것이다”는 주장을 따름으로써 기운론을 설파하고 있다. 동기창의 남북종론과 기운론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화훼도

화훼도 花卉圖

화조 영모화*의 한 화제(畵題). 짐승에 꽃이나 나무를 배치하는 화조화*와는 달리 꽃이나 풀만 그리는 것이다. 화초도에 속하며 절지(折枝)를 포함한 꽃그림을 총칭한다. 초충도*를 포괄하기도 한다. 서아시아가 기원으로 중국으로는 남북조(南北朝)~당대(唐代)에 전파되었다. 특히 연화, 모란, 부용 등 각종의 덩굴풀 문양은 장식문양으로 발전하였다. 중국 회화사상 ‘화훼’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840년경에 쓰여진 주경현朱景玄(주 징시앤)의 《당조명화록唐朝名畵錄》에서이다. 그뒤 화훼라는 화목(畵目)은 화조화*나 소과도(蔬果圖), 초충도 등과 함께 소개되다가, 청대(淸代)에 이르러 화훼만을 다룬 화보로 추일계鄒一桂(처우 이지에, 1686~1772)의 《소산화보小山畵譜》가 나왔다. 독립된 화제로서 그려진 오래된 예로 남조(南朝) 양梁의 장승요張僧繇(즈앙 썽야오)가 그렸다는 요철화(凹凸花)와 초당(初唐) 은중용殷仲容(인 쫑롱)이 그린 묵화(墨畵) 등이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 화훼도가 본격적인 발달을 보인 것은 오대(五代)와 북송北宋에 걸쳐서이다. 이 때는 가지 하나만을 그리는 절지화*(折枝花)와 뿌리에서부터 전체를 다 그리는 전주화(全株花)의 구별이 생겼고, 일반적으로 구륵법이 사용되었다. 몰골*법(沒骨法)으로 그려진 수묵 화훼도는 문인화*가 발달됨에 따라 등장하게 되었다. 사군자*도 엄격히 말하자면 이 범주에 속한다. 문인화와 선화(禪畵)의 발달로 인한 수묵화훼도의 전통은 명대(明代) 중기의 심주沈周(선 저우), 서위徐渭(쉬 웨이) 등에 이어졌고, 청대의 팔대산인八大山人(빠따르산르언)이나 양주팔괴*(揚州八怪)에 이어졌다. 표현 기법에는 구륵전채법*(鉤勒塡彩法), 구륵을 배제한 몰골채색법(沒骨彩色法), 수묵법(水墨法), 백묘법*(白描法) 등이 있다.